요14장은 육신의 예수님을 바라보던 눈을
진리의 성령의 차원으로 높여 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요14장은 세 사람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요13장은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이고, 요14장은 도마와
빌립과 가룟인 아닌 다른 유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 첫 질문자인 도마의 질문을 한번 보십시다.
5절 “도마가 이르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하고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시는 곳, 곧 그 장소와 가는 길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와 그 목적지로 가는 방법을 묻는 거죠.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십니까?
요14:2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아버지 집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그 길을 요14:6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십니다.
길 곧 방법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곧 그곳에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은 그 길과 진리를 깨닫는 겁니다. 그러나 육신이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바로 양의 문이 됩니다.
그래서 요9장에 예수님께서 진흙에 침을 뱉어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날 때부터 소경은 그 눈이 있으나 마나 아닌가? 눈이 없는 것이죠.
이 눈을 예수님께서 다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나니까 10장의 양의
문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깨달아지더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깨달아 지니까
우리가 그분 안에 들어가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요14장에서는 길이다 곧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방법을 자세히 배우면 진리를 터득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터득하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생명이 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면 같은 생명인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바로 방법이다. 내가 곧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이다,
그러므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 집으로 가십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14:4)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내가 가는 곳과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도마가 대뜸 하는 말이 가시는 장소가 어딥니까? 가는 방법이 뭡니까?
다시 말하면 도마의 생각에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장소,
육신으로 그 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해달라는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육신의 걸음으로 갈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동문서답을 하시면서 자기 자신이 방법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나를 알면 방법이 생긴다. 진리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진리를 알면 너희가 자유를 얻고, 사망에 묶여있던 자들이 자유를 얻으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게 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그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으면
아버지를 만납니다. 모든 만물이 같은 생명끼리는 소통을 합니다.
모든 만물은 생명이 같아야 서로 소통이 됩니다. 사람이 짐승하고는
생명이 다르기 때문에, 곧 유전인자가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됩니다.
천국은 왜 생명책에 녹명된 자만 모으느냐하면 서로 대화가 안 되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생명만 가진 사람들만 모이는 곳인데,
다른 생명이 들어오면 천국이 언어가 통일 되지 않아 통역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럼 천국은 왁자지껄한 시장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을
얻어야 아버지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생을 얻은 것은
어느 목사가 말한 것처럼 ‘내가 구원을 얻었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시험지를
받아서 겨우 이름하고 주민등록번호을 멋있게 썼다는 것’ 밖에 아닙니다.
시험지에 자기 이름 멋있게 쓰고, 주민등록번호 잘 기록했다고 해서
시험점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생 그 안에 엄청난 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영광을 맛보고 풍성함을 맛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만든 교훈을 갖고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유전과 전통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가니까
‘내가 별나게 신앙생활을 해서 뭘 하겠나’하고 그만 답습하고 따라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그 전통을 따라가면 교단에서 귀엽게 봐줍니다.
높은 분들의 귀여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이나 진리이야기를 하면 배척당합니다.
한국의 어느 교단은 교수들이 성령이야기 하면 그날로 쫓겨나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D.MIN 공부를 할 때에 성령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하니
한국 측의 한 교수가 실천신학에 대해서 써 달라고 강청하다시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론은 그들의 고유영역인 양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성경공부를 하려면, 성령이야기를 빼놓고는 성경공부가 안 됩니다.
교리나 교훈은 이성적인 지식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가 있지만
진리는 성령이 아니고는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진리가 아니면 거짓이며 불법이며 미혹이 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에 대해서 말만하면 쫓겨납니다.
‘지금까지 교리나 신조라든가, 웨스트민스트 대소 요리 문답이라든가,
아니면 교단의 정치법이라든가 하는 이런 것으로 얼마든지 성경공부하고 교인들을
교회로 오도록 했는데, 너희들이 왜 별스럽게 성령이야기, 진리이야기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런 얘기를 왜 끄집어내어서 자기들을 난처하게 만드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몰아냅니다. 대부분 정통을 내세우는 교단들은 일렬로
줄서서 자기들의 뒤를 따라오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교단이 권력이잖아요?
신학교 교수들을 한번 보세요. 교수들은 그들도 목사요, 나도 목사인데,
신학적인 이야기나 교회의 교육이라든가 하는 것에 반론을 펼치면 교수들이
굉장히 자존심 상하게 여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들 생각에
우리가 절대적인데 우리가 가르쳐 준대로 목회나 하지, 그걸 어디서 가지고
와서 번거롭게 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제가 고린도전서 강해 공부를 하다가
어느 신학교 교수와 사랑이 명사냐 동사냐 하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 교수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합리화시키는 것을 봤습니다.
지금의 교계상황은 일렬로 서서 따라가는 타성에 전부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전통에 전부 집어넣어 질식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신학교 교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영적이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학과 영성에 대해 고민을
하는 교수들은 다 밀려납니다. 거짓말인가 한국 신학교 현장을 한번 살펴보세요.
진리를 가지고 있고 살아있는 말씀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 대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흠집을 내고 결국 쫓아내고 만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좋은 산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