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 8기-2학기 15차시 자료 (11월 25일 용)
수필의 결말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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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품 실기
1. 비빔당면 한 그릇 /김옥수 3
1. 국제시장 가는 날이면, 배가 아무리 불러도 비빔당면 한 그릇은 꼭 먹는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먹는다. 안 먹고 오는 날은 뭔가 해야 할 일을 빠뜨린 것처럼 허전하기까지 하다.
2. 국제시장에서 비빔당면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다양하다. 시장 통 리어카에 서서 먹을 수도 있고, 먹자골목 난전, 목욕탕 의자에 앉아 먹을 수도 있다. 양념이 맛을 좌우하는 비빔당면은 어디서 먹든, 보통 사람들은 크게 맛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3대째 비법이 전수되는 그 집 비빔당면과는 한 끗 차이로 뒷맛이 다르다. 더구나 오랜 시간 우려낸 어묵 국물과 어우러진 그 단짠 맛은 아무나 흉내 내기 어렵다.
3. 나의 비빔당면에 얽힌 추억은 유치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집에서 유치원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차가 다니는 큰 길에서 시장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 가장 빨랐다. 그 시장 안에도 비빔당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비빔당면 뿐 아니라, 잔치국수, 비빔국수, 김밥, 팥죽, 녹두죽도 팔았는데, 나는 유독 비빔당면을 좋아했다. 어린이 손님이 가면, 고추장 양념 대신 간장과 설탕, 참기름 두어 방울을 떨어뜨려 버물린 당면 한 그릇에 어묵과 단무지도 얇게 채 썰고, 부추 나물도 잘게 썰어 올리고 즉석에서 구운 김을 손으로 부숴 뿌려주셨다. 그 가게의 유일한 어린이 단골손님을 위한 맞춤식 비빔당면이었다.
4. 디귿 자로 구획 지어진 그 가게는 여러 개의 솥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껍고 좁은 나무 탁자와 같은 질감의 긴 나무 의자가 있었다. 유치원에 입학하는 날, 어머니와 처음으로 시장 안 그 가게에서 비빔당면을 먹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어린이용 비빔당면은 그때 어머니의 특별 요청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아주머니는 모녀가 함께 비빔당면을 좋아하는 것을 신기해했다.
5. 그때 처음 맛본 비빔당면은 맛의 신세계를 열었다.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고 생선종류도 지리멸치볶음 밖에 먹지 않았던 나였다. 입이 짧아, 늘 병치레를 했던 딸이 처음 맛본 비빔당면은 남기지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웠으니 어머니의 기쁨이 컸으리라. 그때부터 돈 한 푼 없이도 유치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그 가게에 들러 비빔당면을 먹었다. 세일러 칼라가 있는 유치원복을 입고 가방을 맨 작은 여자 아이가 발이 바닥에 닿지도 않는 긴 나무 의자에 앉아 혼자 비빔당면을 먹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딸이 잘 먹는 것이 보기 좋았던 어머니는 주인아주머니와 사전 약속을 했고, 시장에 갈 때마다 계산을 했다는 사실은 좀 더 커서 알았다.
6. 고추장 양념을 먹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알게 된 국제시장 비빔당면 집은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영화 ‘국제시장’ 때문에 명소가 되어, 주말에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집이 되었다. 가격은 배로 올랐으나, 한결같은 맛을 유지해주어 고맙다.
7. 친구들은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비빔당면을 찾느냐고 핀잔을 준다. 그 친구들은 비빔당면 한 그릇에 내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담겨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2. 식성이 달라 / 최정란3
① 어제 아침 식탁에서의 일이다. 남편이 김치를 한 입 베어 먹다 말고 인상을 썼다.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왜냐고 눈짓을 보내자, 남편은 가는 한숨을 쉬고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얼른 맞은편에 앉은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김치를 담근 사람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엄마는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밥을 먹었고 그도 더 이상 별다른 내색 없이 식사를 마쳤다.
② 저녁에 남편과 산책하면서 김치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도 불만을 제기한 적이 있었기에 이유는 짐작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 집 김치맛을 견딜 수 없다는 남편과 자신의 김장법을 고수하려는 엄마 사이에서 어떤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③ 친정엄마는 6년 전에 우리 이웃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면서부터 계속 시어머니와 한집에 살았다. 지금은 어머님의 빈자리를 이웃에 사는 친정엄마가 채우고 있다. 어머님처럼 텃밭을 가꾸고 꽃을 돌보고 사랑과 지혜로 우리의 가족을 함께 챙긴다. 엄마에게 우리 곁으로 오시라고 적극 권한 이는 남편이었다.
④ 엄마와 남편은 대단히 살갑지도 특별히 냉랭하지도 않게 무난히 지낸다. 아침마다 함께 하는 식탁에서는 하루의 계획이나 전날 있었던 일이 오간다. 엄마가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남편이 커피를 타서 한 잔씩 나눈다. 웃음과 농담도 오가는 편안한 분위기다. 다만 서로 입 밖에 내지 않는 한 가지 불만이 있으니 바로 식성에 관한 것이다.
⑤ 남편은 비린내를 몹시 싫어한다. 산골서 나서 자란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어머님은 비린내나 누린내를 견디지 못하셨고 나의 남편은 어머니가 밭에서 키워낸 채소를 먹으며 성장했다. 군대에 가고 직장인이 되면서 점차 육류에 맛을 들였고 삼겹살과 치킨은 선호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산물의 맛은 알지 못한다. 특히 비릿한 향을 싫어하는데 찌개나 국수 국물에서 짙은 멸치나 새우 같은 향이 나면 그릇을 슬그머니 내게로 밀쳐낸다.
⑥ 친정엄마는 세상 모든 음식의 맛을 즐긴다. 요리에도 자신이 있어 사 먹기보다는 당신의 손으로 뚝딱뚝딱 만들어 내신다. 아침 6시면 우리집에 오셔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새 반찬을 보태 상을 차려낸다. 그것이 당신의 소명이자 즐거움인 양 지치는 기색도 없이 하시고는 “나와서 밥 먹어라.” 씩씩하게 소리를 치신다. 처음에 나는 엄마의 태도에 당황하여, 그러실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엄마 없을 때도 우리 식구 밥 먹고 살았다고 여러 번 만류했지만 가만 보니 그것이 엄마의 또 다른 긍지인 듯 느껴져 이제는 그저 감사한 태도로 받아먹고 있다. 남편도 늘 엄마가 활기찬 점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⑦ 남편과 엄마의 갈등은 결혼 후 줄곧 해안 도시에서 살아 온 엄마가 멸치 육수와 비린 생선과 해산물을 즐긴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엄마는 된장찌개의 육수도 멸치를 진하게 우려야 맛이 있고, 채소 겉절이에도 액젓이 몇 방울 들어가야 맛이 난다고 믿는다. 엄마의 이사 후 얼마 동안 나는, 아침부터 온 집에 번져있는 멸치 육수 냄새로 괴로워하는 남편과 애써 준비한 음식에 숟가락도 대지 않는 사위 때문에 서운해하는 엄마 사이에서 곤혹스러웠다. 남편이 국과 찌개를 물리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엄마는 점차 육수 조리법을 버섯과 채소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겉절이에 액젓 사용도 되도록 자제한다.
⑧ 그런 엄마가 김치만큼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한다. 특히 김장 때면“싱싱한 멸치로 직접 삭혀 만든 액젓을 끓여서 넣기 때문에 김치의 맛이 깊다.”라고 강조한다. 주변 사람들이 엄마의 김치를 상당히 맛있다고 평하기 때문에 그 액젓 향이 사위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못한다. 사실은 나도 남편의 불만이 잘 와 닿지 않는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남편은 올해 김장에서 유난히 액젓 맛이 많이 느껴진다고 한다.
⑨ 남편은 아침에 김치를 입에 넣는 순간 심하게 풍기는 액젓 냄새에 역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왜 식당이나 다른 김치에서 나는 것보다 유독 진한 향이 나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지금이라도 당장 김치를 사다 먹고 싶다고 했다. 다음부터는 자신의 몫으로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를 따로 담아달라고 말했다. 듣고 있자니 남들이 다 문제 없이 잘 먹는 김치를 유난히 냄새가 난다 어쩐다 하는 남편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해산물을 즐기지 않는 남편 때문에 식재료 구입과 외식 메뉴에도 제약이 있는 점을 생각하니 은근히 화도 났다. 입을 열게 되면 말투에 짜증이 묻어날 것 같아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⑩ 그러다 시어머님과 함께 살던 때가 생각났다. 육류도 어류도 없는, 온통 초록뿐인 상차림,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게 허기진 느낌. 맵지도 달지도 않은 밍밍함, 무얼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각적인 만족감을 얻지 못한 식사. 어쩌다 고기 한두 점을 사 들고 들어가면 대단한 낭비라도 한 것처럼 듣게 되던 지청구. 그때의 나는 얼마나 고단했었나 돌아봐졌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보다 서러웠던 것은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어머님의 태도였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남편의 답답한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 매일 상에 오른다면 괴로울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김치라면 힘겨움이 더 하겠지. 비린내를 싫어하는 남편에게 액젓 향이 강한 김치는 고통이었겠구나.
⑪ 마음이 가라앉고 나니 말이 차분하게 나왔다. 사실 작년에도 젓갈이 적게 든 김치를 두 통 따로 담았다고, 올해에는 한 통 더 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급한 대로 김치를 물에 헹궈내고 마늘과 설탕 같은 양념을 넣어 기름에 볶아줄까? 김치 볶음은 예전부터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이다. 남편이 반색을 했다. 돌아가서 당장 볶으라고 성화인 것을 밤이 늦었으니 다음 날 오전에 대량으로 볶아주겠다고 약속했다.
⑫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후 마늘과 파를 넣어 향을 올린다. 물에 여러 번 헹궈냈다가 꼭 짜서 송송 썰어둔 김치를 볶는다. 부디 남편의 입맛에 맞춤하기를, 더 이상 밥상에서 김치 때문에 괴롭지 않기를 바라며 정성을 더한다. 엄마와 남편이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아침 식탁을 기대하면서 김치를 볶는다.
3. 소낙비/이태령5
1. 친구들과 산행하기로 한 날이었다. 절정에 치달은 벚꽃이 가로수 길을 따라 낙화를 시작했다. 벚꽃은 바람을 따라 흩날리며 길가로 소리 없이 쌓여갔다. 봄날에 보는 하얀 눈꽃이다. 만개한 벚꽃이 지는 모습은 나들이에 흥을 돋우며 마음을 설레게 했다. 산 입구에 이르자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알록달록한 옷차림으로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2.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였다. 우리는 넓은 비탈길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를 선택했다. 출발선은 같았지만 오르면서 점점 앞사람과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앞선 이의 꼬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옆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올랐다. 빠르게 앞장서서 가던 몇몇의 모습이 멀어지자 남은 친구들은 아예 여유를 부리며 걸었다.
3. 앞만 보고 올랐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산을 오르는 등산객을 비호하듯 울창하게 자리 잡고 있는 소나무 숲, 나무 사이로 투명한 사선을 그으며 쏟아지는 햇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진달래, 산비탈을 따라 소박하게 뿌리내린 야생화들. 소나무 숲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볼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4.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것도 잠깐, 올라가다보니 세 갈래 길이 나왔다. 앞서 지나간 등산객들의 흔적이 모두 엇비슷했다. 갈래 길 나뭇가지마다 초행자를 위한 빨간 리본이 걸려있었다. 어느 길로 갈지 고민이었다. 최종 선택에 결정적 단서를 준 것은 리본에 그려진 가위표와 동그라미였다. 산길이 서툰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가 이정표를 표시해 두었다. 덕분에 더 이상 고민 없이 산행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인생길도 O, X처럼 양자택일이 분명하다면, 갈팡질팡 머뭇거리지 않고 실수도 없이 속도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오르기 힘들다고 불리어진 깔딱 고개까지는 몇 명만 다녀오기로 했다. 나머지 일행은 기다리며 산중턱에 앉아 가져온 음식을 먹으려 자리를 폈다. 흘러내리는 땀을 식히며 산 위에서 먹는 음식은 뭐라도 다 맛있었다.
6. 점심을 먹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새파랗던 소나무 숲 위로 시꺼먼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쨍쨍했던 해가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숲은 먹물을 끼얹은 듯 어둑해졌다. 금방이라도 소낙비가 내릴 기세였다. 예상보다 빨리 먹구름이 천둥소리와 함께 숲을 어둠으로 몰아갔다. 날카롭게 날선 번개까지 나무 둥치를 쪼개듯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화창하던 봄날을 시샘이라도 하듯 금새 굵은 빗방울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소나무 숲에 떨어졌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소낙비는 어느 새 장대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탄탄했던 산길이 진흙탕 길이 되어 힘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7. 우산도 비옷도 없었기에 펼쳐졌던 짐들을 대강 챙겨 가방에 주섬주섬 밀어 넣었다. 사방은 짙은 어둠이 깔렸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산속은 우거진 숲으로 이미 밤이 온 듯이 어두웠다. 앞서 산을 내려가는 사람의 실루엣만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검은 그림자가 산을 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8. 내리막길은 진흙이 빗물과 같이 흘러내려 미끄러웠다. 어두워진 숲은 올라올 때와 사뭇 달랐다. 비를 깡그리 맞고 서 있는 소나무가 한층 더 비장하게 보였다. 마치 등산객들을 비호하는 호위무사라도 되는 듯 굵은 빗줄기가 소나무 뿌리를 캐낼 듯이 쏟아져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빗줄기는 굵어질 때로 굵어졌다. 고요했던 산을 천둥과 번개가 흔들어 깨우는 듯했다. 갑작스런 소낙비로 급하게 하산한 바람에 산행은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9. 소낙비를 뚫고 내려오는 동안 십년도 더 된 일이 새삼 떠올랐다.
봄날의 소낙비처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들였던 일이었다. 인생의 봄날이 낙화될 때 내렸던 소낙비는 걷잡을 수 없었다. 그날은 동생이 수년간 해오던 사업을 접기로 한 날이었다.
10. 동생이 사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당시 동생은 자기가 가진 기술로 꽤나 인정을 받았다. 전공분야에서 수상 경력이 많았기에 졸업 후 취업도 바로 되었다. 취업된 곳에서 몇 년 경력이 쌓이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독립해서 사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좀 더 경험을 쌓기를 권했다.
11. 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생각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동생의 고집을 꺽질 못했다. 결국 가지고 있던 부동산을 담보로 사업을 하도록 열어주었다. 동생은 젊은 나이에 사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을 해본 경험도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12. 처음에는 시대 유행에 맞는 디자인사업 구상으로 잘나간다 싶었다. 하지만 급하게 시작한 사업은 불과 몇 년도 안 되어 서서히 하락경기를 타기 시작했다. 주변에 유사한 업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모래성같이 허술한 자본과 경력으로는 디자인 사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경력이 좀 더 있었던 동업자는 들여놓았던 발을 슬그머니 먼저 빼버렸다. 동업자금을 챙겨주고 남겨진 것은 점점 늘어나는 부채뿐이었다. 그때 온가족이 일을 도와주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13. 산 정상에도 올라보지 못한 채 소낙비를 만났던 것처럼 젊은 날에 만난 소낙비는 그칠 줄 몰랐다. 곧장 멈추지도 않았고 살아가는 동안 몇 년에 걸쳐 잊을 만하면 다시 내렸다. 소낙비가 쏟아진 자리마다 메꿀 수 없는 구멍이 생겨났다. 수입은 없어도 매월 들어가는 고정 지출은 따박따박 약속한 날에 나가야 했었다. 사업장 임대료와 인건비, 운영비 충당을 위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집안의 부동산은 하나둘 족쇄를 걸어 둬야했다. 족쇄가 한계에 달하자, 급기야는 타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14.‘조금만 기다리면 경기가 회복되겠지’했던 기대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내려붓는 소낙비처럼 반복되는 불경기는 발목을 오도 가도 못하게 붙잡았다. 한번 발을 내디딘 사업장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 년 동안 손에 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잠시 손에 쥐었다싶은 것들도 어느새 모래 빠져나가듯 손가락 사이로 새나갔다. 그 후로도 또다시 몇 년간을 해무에 갇힌 듯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야만 했다.
15. 아닌 줄 알면서 시간만 붙들고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다. 수년간 맡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야했다. 이제는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일을 접을 용기가 필요했다. 가족의 끈질긴 설득 끝에 동생은 사업을 접기로 했다.
16. 그동안 흘려보낸 시간과 돈이 아깝고 후회스러웠다. 미래가 불분명했던 동생에게 그나마 희망이 보인 것은 하던 일을 좀 더 전문화하고자 계속 공부를 놓지 않은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원래 가졌던 전공을 좀 더 보완하기 위해 편입하여 공부를 해왔다.
17. 대학을 졸업하고 십 여 년을 더 지나 다시 시작한 공부로 재취업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 다시 처음 배운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때 동생의 나이는 이미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하루하루는 소중하고 값진 생계의 터전이었다.
18. 산을 오르다보면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다. 오늘의 오르막은 내일의 내리막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은 살아있다. 맑을 줄만 알았던 날씨가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도 한다. 하지만 소낙비를 내리게 한 먹구름 뒤에 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 하듯이 햇빛이 다시 숲을 비춘다.
비가 갠 후 숲에서는 새 생명들이 성장을 멈추지 않고, 비를 피해 잠시 숨어있었던 새들의 지저귐도 다시 시작된다. 그렇게 숲은 비온 뒤에 더 풍요롭게 성장한다. 자연이 가르쳐주듯 우리 또한 소낙비 지나간 후 남은 시간을 더 단단하게 살아가야한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은 다시 일어나 내가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이다.
4. 난로를 피우며// 이선옥(5)
1. 난로는 살아 있는 풍경이다. 주전자가 부웅부웅 소리를 내면서 구수한 둥굴레차를 끓이고 있다. 주전자가 내뿜는 수증기가 난로 위에 떨어지며 수은 방울처럼 뭉쳐 떼구르르 구른다. 그 옆에서 질세라 포일에 쌓인 고구마도 “피지직, 퓨우!” 하며 단물을 내뿜고 있다.
2. 산골 겨울은 춥다. 도심보다 기온이 4-5도 낮은데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은 외풍이 심하다. 외겹 장지문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천정이 높은 것도 냉기를 끌어 모으는데 일조한다. 암막 커튼으로 냉기를 막아보지만 코끝이 시리긴 마찬가지다. 겨울을 나려면 보조 난방장치인 난로가 필수다.
3. 30대에 영국에서 살았다. 세 들어 사는 집에 벽난로가 있어서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서양은 우리나라처럼 온돌 난방이 아니라 벽에 붙은 온수 보일러가 집안 보온을 책임진다. 심야 보일러를 사용하여 전기료를 절감하다 보니 방은 쌀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집집마다 페치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추위를 걱정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들이 이국인들에게 잊지 못할 정경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4. 겨울이면 무연탄을 페치카에 넣고 불가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거나 책을 보며 가족의 화목을 다졌다. 그 목가적인 정경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내가 앞으로 집을 지으면 꼭 페치카를 설치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현실은 꿈을 좇아가지 못했다.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이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보일러로 바닥을 데우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니 구태여 번거롭게 페치카를 만들 필요가 없다.
5. 꿈은 꾸면 이룰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시골에 집터를 사서 조그만 황토집을 지었다. 이제야 그 꿈을 이루겠거니 했지만 페치카를 넣는 꿈은 접어야 했다. 구조가 서양과 다르고 거실 규모도 작은 집에 창까지 많이 내다보니 페치카를 앉힐 자리가 없었다. 우아한 페치카는 꿈으로만 남겼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꿩 대신 닭이라고 화목난로를 놓았다. 기분만 비슷하게 내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6. 이웃에 사는 지인의 도움으로 난로를 만들었다. 화목이 들어가서 타는 밑부분은 큰 가스통, 남은 열을 회수하는 윗부분은 작은 산소통을 활용했다. 큰 통과 작은 통을 무쇠 파이프로 연결하고, 산소통 위에 연통 구실을 하는 무쇠 파이프를 달아 굴뚝으로 이어지게 했다. 난로는 흡사 염소나 기린 등 뿔 있는 동물을 연상하게 한다. 연소용 큰 통은 몸통이고, 몸통 위 무쇠 파이프는 목이며, 목 위에 놓인 작은 산소통은 머리, 그리고 산소통 위에 붙은 연통은 뿔에 해당된다. 몸통 밑에 다리를 4개 달고, 하얀 절연용 사기 애자로 발을 만들어 붙이니 귀여웠다. 난로 바닥에 철판을 깔고, 지붕위로 굴뚝을 올리니 난로 만들기가 끝났다.
7. 난로에 불을 지폈다. 장작이 제 몸을 태워 뿜어내는 불꽃을 보고 있다. 불꽃을 바라보는 것만이 기쁨은 아니다. 나무는 연소통 속에서 “따닥 따닥 따다딱, 톡톡, 따다닥 딱!” 신기한 음률을 내며 타고 있다. 솔괭이가 탈 때는 “피지직!” 소리를 내며 파아란 불꽃을 내뿜기도 한다. 불꽃의 상태에 따라 강음과 약음이 섞여서 들려주는 속삭임이나 부르짖음이 만드는 하모니가 환상적이다.
8. 난로 위에는 으레 차가 끓고 있다. 닷 되들이 주전자가 난로 위에서 종일 전통차를 끓이며 쉴 새 없이 수증기를 내 뿜는다. 가습기 대용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따뜻해진다. 불꽃과 장작이 타는 소리는 유년시절 밥을 짓거나 소죽을 끓이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던 추억의 빛깔과 소리를 고스란히 데리고 온다. 아득한 옛 추억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모깃불이나 아궁이 알불로 밀사리나 콩사리를 하던 일과 감자를 구워 먹고 입가가 꺼멓던 모습이 와라락 밀려온다.
9. 겨울철이면 남편은 난롯가를 떠날 줄 모른다. 가난했던 유학시절 이었지만 페치가의 추억을 그도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고구마를 구워 간식을 먹는다. 담요를 깔고 낮잠도 난로 앞에서만 자려고 한다. 유년시절 밖에 기르던 강아지나 고양이가 겨울 아침이면 부뚜막에 올라 쪼그리고 누워 있던 모습이 연상된다. 날씨가 얼마나 추웠으면 부뚜막에 올라와 추위를 피했을까. 나도 난롯불에 중독자가 된 듯하다. 밤늦도록 불가에 앉아서 일을 한다. 더러는 화투점도 치고, 뜨개질도 하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고 멍을 때리기도 한다. 옛 추억이 생성되는 곳이다. 오래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세상 근심이 사라지는 이상한 곳이 난롯가이다. 거실 천정은 이미 거멓게 그슬렸다. 몇 년이 지나면 시골 부엌처럼 우리 집 기둥과 서까래에도 그을음이 덕지덕지 달라붙겠지.
10. 난로 위에서 끓는 차와 구워지는 고구마에 침이 절로 흘러나온다. 서양인들이 누리던 대리석 페치카보다 어찌 이 난로가 더 좋아 보인단 말인가. 페치카는 외양이 멋있을지 몰라도 가스통이나 산소통을 재활용하여 만든 이 난로는 운치뿐만 아니라 효용면에서 쳐지지 않는다. 30년 전 그날을 다시 소환해 오니 진정 기쁘다. 아이들은 이제 난로 옆에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귀찮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귀찮은 일을 즐기는 별종인가 보다.
11. 혼자 불을 피우고 어슬렁거린다. 바깥이 꽁꽁 얼었는데 집안은 열대다. 방금 친구가 방문한다는 전갈이 왔다. 마침 차가 펄펄 끓고 있고, 고구마가 내 친구 기다린다는 듯 피지직 소리를 요란하게 내고 있다.
5. 진주, 내 젊은 날의 초상1 /남경수5
1 진주에 가면 왠지 그리운 이를 만날 것만 같다. 진주는 내 젊은 날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진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애틋하게 가슴이 저려온다. 서러운 청춘이 있었던 곳. 그리고 너무나 가기 싫어서 울면서 갔던 곳이기도 했다.
2 처음 진주에 간 날은 예비 소집일이었는지 입학식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함께였다. 시골 유배지로 끌려가는 기분으로 우울했던 나는 남강 다리 기둥의 가락지 모양에 눈길이 꽂혔다. 다리에 쌍가락지가 있다니 참 특이했다.
3 시내 여관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학교에 갔다. 눈이 쌓인 교정은 무척 고즈넉하고 예뻤던 기억이 난다. 가기 싫은 학교를 억지로 가다 보니 학교생활엔 별 관심도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싫어 아버지께 재수한 사람들은 안 된다고 거짓말하고 하숙을 했다. 하숙집 방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사람들과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4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들에 비해 초라했던 마지막 성적은 연필을 놓게 만들었다. 공부에 배신당한 기분이랄까?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 전의 과정이 모두 부정당한 억울함이 있었다. 졸업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5 학교생활은 따분하고 무료했다. 마음을 둘 데가 없었던 나는 길거리를 배회하다 ‘산레모’ 음악감상실을 발견하고 자주 다녔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은 곳이기도 하고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힘들고 외로울 땐 처박혀 있었다.
6 전봇대에 붙어 있던 전단지에서 우연히 ‘놀이판 큰들’의 강습 안내를 보고 찾아갔다. 그때가 1학년 3월이었다. 대학 입학 전에 부산에서 재수학원 아저씨를 따라 민요와 판소리를 처음으로 배웠었다. 좋았던 기억이 있었고 외로운 곳에서 내 마음의 열정을 태워 줄 뭔가가 필요했다. 만약에 부산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텐데. 인생에는 묘한 인연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7 하고 싶었던 동아리는 남강 밴드의 싱어, 민속예술의 풍물, 연극 등이었지만 교대생들만 있는 학교 안에서의 활동은 답답할 것 같아 학교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찾아든 놀이판에서 판소리와 민요, 풍물과 춤을 배우고 여러 학교 사람들과 어울리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학생운동 현장에는 항상 풍물패들이 있었다.
8 경상대 집회에 풍물을 치고 나오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 저런 옷 입고 장구 두드리면 학교생활 끝장난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날부터 놀이판에 나가지 않았다. 무서운 데로 끌려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9 놀이판 대표인 형이 학교로 찾아왔다. 왜 나오지 않냐고. 두렵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형은 그런 말을 했었다.
“열심히 해보고 참여해 보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둬도 좋다. 근데 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느냐? ”
그 말은 들으니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용기도 없고 비겁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러다 결국 학생운동에 발을 디디게 되었지만.
10 2년 동안 놀이판 큰들 에서 활동했었다. 큰들은 중앙시장 맞은편 허름한 건물 꼭대기에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공간’이라고 불렀다. 주로 경상대 출신의 학생들이 많았고 그 외 진주가 고향인 타 지역 휴학생 등 여러 학교 출신들이 섞여 있었다. 노래패, 춤패, 풍물패가 있었는데 나는 노래패에 속해 있었다. 물론 풍물과 춤도 같이 배웠다. 가장 기억나는 노래는 ‘진주 난봉가’인데 이곳 사람들은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11 그때는 마당극 공연도 많이 했었고 주로 집회를 할 때 알리는 문화공연으로 많이 활동했다. 큰들에서 배운 민요인 ‘상주 모심기’로 교내 행사인 두류 가요제에 나가서 인기상을 탔다. 바지와 저고리만 입고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용감했구나 싶다. 제1회 전국 민족극 한마당에도 출전했는데 부산에 와서 공연했었다.
12 문산으로 칠순 잔치 공연을 하러 갔을 때다. 넓은 마당에 장막을 치고 생신상을 차렸는데 동네 주민들과 친척들이 모여 마을 잔치를 했었다.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신명 나게 풍물을 치고 마당에서 한바탕 놀았다. 나중에 따로 상을 차려주시는데 진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하게 잔치 음식을 차려주셨다. 수고비로 받은 돈으로 공간에서 뒤풀이까지 하면서 놀았다.
13 언젠가 여름날이었다. 촉석루에서 만나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놀던 우리는 갑자기 삼천포로 가자고 해서 떠난 적이 있었다.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갔는데 돌아올 차비는 즉석 공연으로 돈을 벌어오자고 했다. 삼천포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돌아다니다 공연을 했는데 돈을 벌지 못해 결국 삼천포에 집이 있는 사람이 차비를 가져와서 돌아왔던 추억이 있다.
14 정월 대보름이면,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시내와 남강 다리를 돌며 ‘지신밟기’를 했다. 시장을 돌며 풍물을 울리면 상점 주인들이 나와서 돈을 주거나 먹거리를 주었다. 큰 가게보다 작은 가게 인심들이 훨씬 더 좋았다. 지신밟기 할 때는 춤패로 변신해서 춤을 추며 돌아다녔는데 무거운 악기를 메지 않아서 자유롭고 좋았다.
15 이전에 진주에 갔을 때 학교 건물에 아는 형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큰들에서 같이 활동했던 형이었는데 지금은 전통춤을 이어받은 유명한 춤꾼으로 변신해 있었다.
16 지금도 어디선가 꽹과리 소리가 나면, 장구 장단이 들리면 귀가 쫑긋해지고 흥이 난다. 공부밖에 몰랐던 나에게 그런 신명이 있을 줄 몰랐다. 아무래도 풍류를 좋아하는 외가 쪽 피가 흐르나 보다. 아버지는 술 마시고 춤추고 노는 것을 천하다고 싫어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놀이패 생활을 하면서 엄마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17 집을 떠난 객지 생활은 오히려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었고 청춘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외롭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만큼 독립적으로 성장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어리고 미성숙해서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 그 시간 속에 달콤했던 사랑도 있었고 실연의 아픔도 있었다. 방황했던 청춘의 민낯들이 남강 위로 흘러내렸고 촉석루 달밤을 헤매고 다녔다. 뒤벼리, 그 길을 함께 걸어서 헤어진 걸까?
19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진양호의 물안개였다. 독일 슈바빙의 안개를 상상하며 유학을 꿈꾸었던 나는 안개가 좋았다. 안개가 짙게 드리운 날엔 꽤 몽환적이었고 그런 날은 신기하게도 매우 화창한 날이 많았다.
20 따닥따닥 붙은 닭장 같은 자취방 뒤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었고 남강이 흘렀다. 새벽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물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강 위로 뜨거운 연기가 나듯이 안개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21 진양호는 남강댐을 만들기 위해 수몰된 마을 위로 생겨난 호수다. 진양호로 가는 길에는 닭백숙집이 많았다. 여름밤 진양호에서 밤낚시를 할 때면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흘렀다. 꼭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려서 매우 신기했다.
22 그때는 호수 안에 마을이 있어 오고 가는 배가 있었고 선착장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 선착장은 없어지고 더 이상 배는 다니지 않는다. 진양호 입구에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호수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아서 데이트할 때 한번은 가보는 곳으로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23 논개의 절개가 빛나는 촉석루는 우리가 수시로 드나들던 마당 같은 곳이었다. 그때는 입장료도 없어서 시내에서 놀다가 촉석루 후문을 통해 걸어서 학교까지 갈 때가 많았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학생은 달 밝은 촉석루를 걸으며 부모님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4 진주시를 유유히 흐르는 남강에서 옛날에 엄마는 빨래도 하고 몸도 씻었다고 한다. 남강 옆에 있었던 ‘남강 나이트’에서 청춘들은 쉼 없이 땀에 젖도록 흥청거렸다. 소주를 마시며 남강 변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맛은 자유 그 자체였다. 봄날의 남강은 연인들이 타고 노는 오리배들이 둥둥 떠 있어 예스러운 풍류가 느껴졌다.
25 중앙시장에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들이 먹기 좋은 값싼 먹거리가 많았다. 주로 해장국을 많이 먹었지만, 김밥이랑 순대 막걸리 등 부담 없이 배를 채우기에 좋았다.
26 밤늦게 언니들과 함께 진주역에서 목포행 완행열차를 탔다. 그냥 밤 기차를 타고 떠나보고 싶었던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목포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비마저 부슬부슬 내렸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유달산에 올랐다. ‘목포의 눈믈’ 이란 노래를 부르면 항상 이때가 생각난다.
27 부산이 고향이면서 재수한 사람끼리 ‘열 손가락’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는 나름 대도시에서 살았던 자부심으로 뭉친 아웃사이더 들이였다. 그중에 한 명은 40대 중반에 뇌종양으로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9명만 남았는데 무심한 세월 탓인지 한번 모이기가 쉽지 않다.
28 님프는 선배의 소개로 열 손가락이 4대4 미팅을 했던 커피솝이다. 경상대 의대 밴드 동아리였는데 2명이 애프터 신청을 받았다. 이미 사귀는 여자가 있는 남자를 만난 나는 두어 달 만에 헤어졌다. 재미있고 잘 통하던 사람이었는데 순수했던 시절이라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만났다면 내 감정에 더 충실했을 것 같다. 그때 밴드 공연을 보러 갔었던 기억과 자주 들려주었던 QUEEN의 ‘love my life’ 곡이 생각난다.
29 진주에는 대학이 6개나 있어 버스를 타면 반이 학생들이었다. 전통이 살아있고 아름다운 남강을 품고 있는 예향의 도시이다. 진주 사투리 ‘에나’는 ‘정말’이란 뜻으로 많이 사용했는데 서부 경남이라 사투리가 심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서 그때의 모습들은 나의 기억 속에서만 머물러 있다.
30 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두 가지의 후회가 밀려왔다. 한 가지는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짧은 생각에 너무나 빨리 포기해 버린 공부. 왜 대학이 끝이라고만 생각했을까? 왜 인생이 다 정해졌다고만 생각했을까?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놓아 버린 것이다. 대학만 보고 달려 온 공부의 한계였는지도 모르겠다.
31 다른 한 가지는 존경할 만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넓은 시야와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 인생의 등불이 되어 줄 만한 어른이 옆에 있었다면 다른 목표를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나에겐 그런 기회가 없었다.
32 요즘 가끔 동기 모임을 할 때 진주를 찾아간다. 학교 다닐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기들도 나이가 드니 반갑게 느껴진다. 그래도 젊은 날 4년을 같은 교정에서 보낸 친구들이고 학생 수가 적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33 대학 생활에서 경험한 것이 평생을 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제 생각해 보면 대학 시절만큼 젊고 자유롭고 열정이 넘치는 나이가 있었던가? 그 시절을 다른 곳에서 보냈다면 또 다른 모습의 젊은 날이 있었을 것이다.
34 나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홀로 방황하며 그 젊은 날을 보냈다. 진주는 어리석고 무모했지만, 열정이 넘쳤던 젊은 날의 순수했던 모습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내 젊은 날을 만날 것만 같다.
6. 받아 놓은 밥상/ 유광목4
1.현관 문 벨 소리가 났다. 인터폰 화면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모습에 회색 모자만 보였다. 문을 여니 택배 기사는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고 과일 상자가 있었다. 딸아이가 며칠 전에 사과를 주문하여 보낸다고 연락이 와서, 우리 집으로 온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거실에 두었다.
2.조금 있다가 차를 마시면서 상품 상자를 자세히 보니, 받는·보내는 사람의 연락처가 없었다. 상자에는 ‘밀양 단감, 10kg, 특’ 만 표시되어 있었다.
3.밖에 나간 아내에게 집에 온 단감 상자에 대하여 통화했으나, 누구한데도 통지를 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밀양과 연고가 있는 주위 사람을 찾았으나 평소에 만나는 사람은 드물다.
4.근래에는 택배로 물건을 주고받는다. 친척이나 지인에게 물건을 보낼 때나 받을 때는 사전에 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문자로 소통한다. 요사이 택배 배달 사고도 종종 생긴다.
5.지난겨울에 외출에서 집에 오니 문 밖에 선물로 보이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위에 수신자를 보니 아파트 호수는 맞으나 동이 달라, 택배 기사가 잘못 배달된 것이었다. 수신자와 통화가 안 되어 발신자에게 연락하여 물건을 가져가게 했다.
6.이번 여름에 처제가 우리 집으로 불루베리를 보냈다고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며칠이 지나서도 오지 않아서, 택배 회사에 문의하니 착오로 우리 집 위층으로 배달되었다고 했다. 위층 집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니 배달된 상자를 확인하고 잘못되었다고 했다. 냉장고에 보관한 불루베리 10개 봉지 중 1개는 먹고 9개를 내 주었다. 뒷날 위층에서 불루베리를 사와 가져왔다. 안 받으려고 했지만 윗집 아주머니의 주장이 완강하여 어찌할 수가 없었다.
7.아내가 집에 돌아왔다. 매년 가을에 단감을 주는 위층 집에 가서 물어보았다. 배달될 단감도 없으며 자기 집에서 놓아두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의 친구나 지인한데도 전화를 걸었으나 모른다고 했다.
8.우리 집에서는 사연을 모르고 처분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경비 아저씨에 알리고 우리 라인 승강기에 알림문을 부착하기로 하고 단감 상자는 문 밖에 두었다.
‘몇 월 며칠 오후 3시 쯤 수신·발신 표시 없는 밀양 단감 10kg 1상자가 배달 왔습니다. 택배는 아닌 것 같고, 구입하신 분 있으면 몇 호로 연락바랍니다.(벨만 누르고 배달하신 분이 내려갔습니다)’
9.아내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고향에 가서 밤을 따와 이웃에 나누어 준다. 내일 이웃 사람 모임에 가면 누군가가 단감을 배달시킨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고 했다. 모임에 가도 감을 보내 준 사람이 없었다.
10.받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처분하지. 경로당이나 경비원 아저씨에게 주든지. 아파트 관리 사무소 방송을 통해 찾아 주거나,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 하나 마나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내는 태연하게 있으면서 작은 것을 신고하느냐고 나무랐다. 택배로 인한 사고 물건은 점유 이탈물이 될 수 있다. 마음대로 처분할 수가 없다.
11.받아 놓은 단감이 ‘받아 놓은 밥상’이 되었다. 이 속담은 받아 놓은 밥상을 물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먹을 수도 없다는 뜻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경우나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12.단감을 문 바깥에서 3일이나 재웠다. 생물이라 오래둘 수가 없었다. 아무런 전화나 이웃 사람들의 말도 없었다. 결정을 할 때다.
13.아내는 타인이 자기 물건이라고 찾으러 오면, 우리가 보상해 주면 된다고 했다. 수고 해주시는 경비 아저씨, 청소 아주머니들, 우리와 나누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주면서 우리가 책임을 진다고 드시라고 했다.
14.단감 상자가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서면에 사는 여동생이 전화로 잘 먹었냐고 묻고서, 단감을 농장에서 주문하여 우리에게 보냈다고 했다. 배달한 사람은 농장 주 아들로서 주문 받은 양이 많아 상자에 별다른 표시 없이 집집마다 배달했다고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15.살아가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경우를 만날 수가 있다. 곧이곧대로 빠르게 처리할 것이 아니고, 여유를 두고 생활의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대응해야 만사가 형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