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 대통령
나라의 돈에는 건국 대통령이 주로 그려져 나온다. 오래된 로마 화폐에는 카이사르가 새겨졌고 미국 달러에는 워싱턴, 중국은 모택동, 인도는 간디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승만이 보이다가 사라지고 주화 백 원과 지폐 천원, 오천 원, 만원, 오만원권에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 신사임당이 그려졌다. 둥근 주화 1원과 5원, 10원, 50원, 500원엔 무궁화와 거북선, 다보탑, 벼 이삭, 두루미가 보인다. 이젠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대통령은 기념관이 전국 곳곳에 있지만 이분에겐 변변한 것 하나 없다. 무엇이 잘 못 돼 흔적 지우기에 급급하다. 그분이 쓴 진해에 있는 멋진 서예‘충무공 이순신 상’동판 좌측 ‘李承晩 謹書’를 긁어 도려냈다. 부산 중구의 우남공원을 용두산공원으로 바꿔버렸다. 독재자라 낙인찍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나쁜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다. 총질해서 젊은 학생을 죽인 살인자라고도 매도한다. 친일파와 합세해서 정권을 잡았으며 통일을 가로막은 반역자라 온갖 주홍글씨를 갖다 붙여 부른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조선 고종 12년 해 3월 26일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다. 두 형이 천연두에 걸려 출생 전에 죽어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랐다.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3세 때 한성으로 옮겨 숭례문 밖 염동과 낙동을 거쳐 남산 서쪽에 있는 도동에 정착해 살았다.
후손댁에 살면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곳 이름을 따 우남(雩南)이라 호를 지었으며 전주가 본관이다.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웠다. 과거에 나가려 했으나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어 보지 못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개설한 신교육 배재학당을 다녔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여러 차례 권유로 나갔다.
아버지를 본받아 사서오경 공맹의 성리학을 즐기는데 난데없는 성경을 읽어 기독교 재단의 정규 교육을 받았다. 스무 살의 늦은 나이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아펜젤러 외 여러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특히 영어 공부에 집중해 초급영어반 교사를 맡기도 했다. 이듬해엔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을 만나 서구의 정치와 경제, 문화 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서 미주와 유럽에 눈을 떴다. 학내 토론 단체인 협성회를 통해 서양의 근대 시민사회와 조선왕조의 정치 현실에 대하여 점점 깊이 알게 되었다. ‘협성회주보’에서 주필을 맡아 정부를 비판하는 논설을 발표했다. 만민공동회 연사로도 나섰다. 여기서 한흰샘 주시경을 만났다. 남달리 영어에 익숙해져 교수 반열에 들게 되었다.
22세 졸업식 때는 대표로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까지 했다. 언론과 정치활동을 하면서 민중계몽과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갔다.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펴내고 이어 ‘제국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신진 소장파의 일원으로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추원 의관으로 선임되어 일하다가 24세 때 박영효 갑신정변 사건으로 투옥된다. 고종황제의 무능과 부패로 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명이다. 수감 시기에 기독교도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시경의 권총 도움으로 탈옥을 시도하다 들통나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소로 이감된다. 탈옥하면서 육혈포를 쏴 경비에게 상처를 입힌 협의가 추가됐다.
여기에서 정치 이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의‘독립정신’을 집필한다. 5천 년 왕정이 민주 세계화로 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선진화와 함께 공화정을 주장했다. 한성에서 숱한 고생을 겪었다. 낮에는 칼을 쓰고 밤은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받았다. 목이 달아나는 망나니 칼춤을 보면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불안이 컸다.
일본 낭인들의 궁중 행패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신변 위협의 고종을 아관파천으로 옮겨 보호해줬다. 그렇게 도와준 감옥 동지와 외국 공사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아비손, 번커, 게일, 헐버트 등 개신교 선교사들의 간곡한 구명운동으로 감형받았다. 애국 청년들이 감옥살이한다는 걸 뒤늦게 알고 도움 주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많은 책을 넣어주어 읽게 했다. 감옥 서장 김영선의 특별 호의에 의해 감옥 문고가 만들어졌다. 도서 문고에는 사민필지와 파혹진설론, 신약전서, 의원의 행전, 구세진경, 천로역정, 국문독본, 천로지귀, 인가귀도, 심산초학, 요한공부, 성경문답, 장원량우상론, 묘축문답, 요한복음대지, 구세론, 래취예수, 성경대지문답, 예수행적, 속죄지법, 성공회문답, 찬미가, 초학언문, 복음요사 등이다. 여기에서 이 감옥을 옥중신학교라 불렀다.
한문 서적으로는 천지기이지와 신약전서, 인도사개요, 성경문답, 광학류편, 구세진주, 칠국신학비요 등이 있고 이외에도 그리스도신문과 신학월보, 무디의 설교집이 보였다. 이때 정독하면서 독서와 집필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과 신흥우, 박용만의 권고로 독립협회 반국가 혐의의 죄수 이상재도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읽은 책은 신약전서나 기독실록, 로득개신교기략, 격물탐원, 성경문답 등의 책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월남 이상재만 그런 게 아니라 감옥 안의 지식인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YMCA 일을 맡아 이 나라에 선교와 교육에 힘썼다. 조선일보 사장을 맡아 언론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노일전쟁 무렵 29세 나이로 6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학부협판 민영환과 의무협판 윤치호, 김기진의 진언에 따라 도움받아 특사로 석방됐다. 죽을 뻔했던 곳이다.
그해 겨울 고종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한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뒷받침해준 사람이 모두 감옥에서 사귄 사람들이다. 월남 이상재와 의인 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 등 수많은 사람이 발 벗고 나섰다. 의로운 친구와 선교사들이 각종 도서를 넣어줘 거기서 많은 책을 읽어 방이 그득했다니 그의 지식과 견문은 부단한 독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에 이곳을 복 받은 곳이라 이른다. 여러 해를 지낸 한성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다. 주로 정치범이나 반역을 저지른 사람이 많아 가혹하게 다스리는 곳이다. 처형되면서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거나 어떤 이는 이승만 만세를 부른 사람도 있었다니 놀랍다. 그의 걸출한 인품이 이 나라를 건져내 자유 독립국으로 이끌어 가길 바랐던 것이다.
한번은 보부상을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격해져서 위험에 처했는데 누가 손을 잡고 이리로 걸어가라 소리쳤다. 반대쪽으로 달려야지 맞닥뜨리는 곳으로 천천히 갈 수 있나. ‘잡아라.’휙 휙 좌우 옆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치달렸다. 산길을 내려가는 나그네처럼 보였나. 그냥 이승만 곁을 지나쳤다.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손잡은 이가 누군가 소리친 사람이 어디 있나 살폈지만 온데간데없다.
윤치호와 서재필, 이상재의 3인 구도의 시민단체 만민공동회가 거대해지고 독립신문에 이어 독립협회의 입김이 세지자 조정의 적대감이 나타났다. 조정이나 관리들의 비행, 불의를 온 나라에 알리고 비판을 가하는 단체였다. 보부상 중심의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이 협회를 해체하려 들었다. 수천 명의 보부상이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제국주의가 가깝게 다가온다. 을사년 보호조약과 이어 경술년 국치로 국권이 넘어가자 그만 일본 식민지가 되고 붉은 태양 일본 국기가 펄럭거렸다. 특히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가고 나라가 기울어지자 온 세상은 그만 을씨년스러움에 빠져서 우울하게 지났다. 우물쭈물 한국과 일본은 그만 합방이 되고 말았다. 제대로 여긴 내 나라다 큰 소리 외치며 저항하는 싸움 한번 못하고 넘어간 것이 기막힐 일이다.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긴 한숨이 사람마다 터져 나온다.
1905년 11월 18일 마침내 굴용의 늑약이 맺어지자, 시일야방성대곡한다는 황성신문의 장지연 통탄 글이 실렸다. 민영환은 이천만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곧 한국의 유일한 희망이 기독교에 있고, 다른 나라도 기독교 진리를 통하여서만이 비로소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간곡한 유지를 남겼다.
애국지사들의 대부역을 해오던 죽천 박정양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그해 12월에 분사하고 만다. 이승만이 기독교로 인도했던 월남 이상재도 같이 죽기로 마음먹게 된다. 고향에 내려가 모든 것들을 정리하자. 동료들이 말리고 질레트와 함께 일했던 브록크만이 급히 달려와 감시하면서 결심을 막았다.
나라를 잃자 이 무렵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와 하버드 석사학위,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이승만이 YMCA에 학생운동 담당 간사로 일하게 됐다. 1910년 10월 35세의 일이다. 감옥에서 이미 월남을 만났고 독립운동의 기상을 함께 불태우던 동지였다. 월남보다 25세 연하였다.
뒷북치는 왕실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미국에 특사를 보냈다. 그때 영어를 할 줄 아는 이승만이 단연 발탁됐다. 감방 친구들과 선교사들의 주선이었다. 워싱턴에서 루스벨트를 만났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그의 임무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이미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일본의 조선 침략 저지에 협조해주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미일 사이에 ‘가쓰라 테프트 밀약’이 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 아시아 약소국의 허약함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식민지 청년의 하소연은 도무지 먹혀들지 않음을 본다. 하릴없고 어찌할 수 없어 그냥 눌러앉았다. 그때부터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운동에 안간힘을 쏟기 시작했다.
30세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 들어갔다. 이어 하버드,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해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2년과 석사 1년, 박사 2년 모두 5년 만에 졸업한 것이다. 중간 학년에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신청하자 교수회의가 열렸다. 드문 이런 경우를 위해 그의 학력을 평가받아야 했다.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와 다행히 건너뛸 수 있었다.
프린스턴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으로 번역했을 때 200자 원고지 700여 장이었다. 박사라는 권위는 그 당시 대단해 그를 독립운동의 선두에 서게 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정치지도자들이 선생보다는 박사로 불리는 것을 영예스럽게 생각했던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보다 박사로 많이 불렸다.
나이 많아 오래 다닐 수 없고 그렇게 한가히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갖춰진 학력을 인정받으면서이다. 세계 대통령과 장관 등 저명인사를 허다히 배출한 명문 학교이다. 당시 프린스턴대학 총장이 뒤에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다. 리셉션에서 이승만은 총장에게 등록금을 돌려달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묻자 ‘국제법이란 강대국의 논리일 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있지도 않은 걸 공부하라 했으니 돌려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고 했다.
뒷날 이승만에게 도움을 준 동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사관학교 친구도 있었다. 공산혁명이 일고 삼일운동으로 고국이 시끌벅적하다. 좌우합작으로 러시아와 어깨를 겨루는 미국이다. 농민과 노동자가 주인이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가 싫은 이승만이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을 쥐어짜는 정치에 염증을 일찌감치 느껴왔다.
35세 때 경술국치로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가자 그해 가을 서울로 돌아왔다. 이태 동안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미국 선교사들의 운영 단체로 일제 탄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조선 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신민회 회원 105명을 검거하는 105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체포 대상에 올랐던 이승만이다.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세계 기독교 감리회 총회에 나갔다. 한국 대표로 출국, 참석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38세에 옥중 동지이자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의 요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로 갔다. 여기서 한인 중앙학원과 한인여자대학, 한인 기독학원 등을 세우는 교육사업을 펼쳤다.
미주 한인 1만 명 중 절반이 사는 이곳에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일제 식민지 사슬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와이에서 시작해 나갔다. 노동자로 한 달 넘게 뱃멀미에 시달리며 이곳에 오고, 사진결혼으로 들어와 여러 섬에 떨어져 고생하는 동포들을 찾아다녔다. 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이름 대신 번호표를 달고 집단농장 사탕수수밭과 온갖 잡일로 시달렸다. 대부분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해서 살아야 하는 여성들이다.
하와이에 여러 학원을 세워 그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아이도 있었다. 여자아이라고 푸대접해 버려서이다. 나라를 되찾자면 남녀 모두가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한글과 영어, 수리, 역사, 과학을 가르쳐 나갔다. 거기다 교목으로 기독교를 알렸다. 당시 놀라운 남녀공학으로 여학생이 더 많았다.
국제 정치학박사 이승만이 손수 가르치자 독지가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한인 학교는 날로 번창하고 학생들이 늘어났다. 저절로 독립의 기운이 드세지고 똘똘 뭉쳐 한민족의 뜨거운 피가 엉겨 흘렀다. 곳곳에 흩어져서도 한마음으로 애국의 노래인 교가 아리랑을 줄기차게 불러댔다. 행사 때마다 부모도 모여 독립의 염원을 키워나갔다.
조국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인가 나라 사랑이 샘솟는다.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열열한 마음이 들불처럼 번졌다. 독립운동 자금을 대 주고 학교를 세울 돈을 인천으로 보냈다. 여자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학교가 인하대학이다. 인천과 하와이의 앞 글자를 땄다. 미주와 구주의 선진 교육이 나라를 건질 수 있다고 여겼다.
44세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었다. 한 달 전 2월 8일 도쿄의 한국인 YMCA에서 2.8 독립선언을 하면서부터이다. 그 선언문은 이광수의 기초로 된 것이었다. 당시 동경 한국 YMCA 총무인 김정식의 지도로 도쿄 한국인 유학생들은 세계 2차대전의 종식이 민족자결의 시대적 대세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에서 기독교인은 16명이고 불교 인이 2명, 천도교 인이 15명이다. 기독교인 16명 중에서 박희도와 이갑성, 최성모, 이필주, 양전백 등 9명이 YMCA 관계 인사이다. 이승만과 이상재는 뒤에서 지켜봤다. 1921년 신흥우가 하와이에 가서 이승만을 만났다. 우남의 지시로 국내 민족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가 만들어졌다. 물산 장려를 통해 독립운동에 협조를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한데 이 조직은 서북 계통의 안창호 중심의 흥사단과는 대립을 보임으로써, 국내 양대 민족운동의 한 판도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 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됐다. 당시 이승만은 국내외 기독교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기다 미국에서 딴 박사학위가 명성을 높여줬고 하와이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인지도가 더욱 높아졌다.
임시정부의 추대를 받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위원장이 되어 활동했다. 임시정부 명칭을 영어로 ‘Republic of Korea’라고 정하고 자신의 대외 호칭을 대통령(President)으로 정해 각국에 알렸다. 이를 두고 안창호가 대통령 호칭을 사용하지 말 것을 청했다.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력히 주장해 맞섰다. 그해 9월 개헌이 단행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활동했다. 1년 동안 상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미국에서만 활동했다. 그러자 점차 임시정부 각료들의 반발을 샀다. 45세 때 처음 상해에 나타났으나 각료들과의 갈등은 계속됐다.
다시 이듬해 하와이로 떠났다. 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동포에게서 걷어 임정에는 적은 돈을 보냈다. 맡은 지 4년 만인 48세 때 탄핵론이 제기됐고 50세 3월에 승인됐다. 그로부터 7년간 정치적 암흑기를 걸었다. 57세 때 김구의 임정 국무회의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이듬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을 중립국으로 인정해 달라는 탄원을 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9세 10월 이곳에서 프란체스카를 만났다. 66세 되던 해에 ‘일본 내막기’를 출간했다. 일본이 태평양의 여러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과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 내용이다. 주목받지 못했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으로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미국과 유럽에 알릴 수 있었다.
시간 날 때마다 유럽으로 건너가 한국 독립을 외쳤다. 곳곳에 널려있는 대학 동문 친구들을 만나고 신문에 자주독립의 글을 실었다. 많은 사람이 호응했지만 마음뿐이다. 어찌할 수 없는 독불장군이다. 스위스 식당에서 잠시 만난 33세 오스트리아 실업가 집안 딸 프란체스카가 여러 곳에 난 기사를 오려 보냈다. 젊지 않은 독립투사로, 재결혼은 생각지도 못한 왕성한 젊음을 보인 이승만에게 눈길이 갔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식민지 조선의 자주독립이 아시아와 세계 평화의 길로 나감을 신문 투고를 통해 만방에 알려 나갔다. 힘 있는 광활한 미국 땅 전역을 돌며 몸이 부서지도록 강연하고 신문 논설로 이리 뛰고 저리 내달았다. 눈엣가시인 이승만의 목엔 일본이 30만 달러 당시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많은 체포 현상금을 내걸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오롯이 외길로 달리는 그에겐 오직 내 사랑하는 조국만이 보이는 외롭고 쓸쓸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일본 식민지 조국의 해방은 이승만의 나이 70세 때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왔다. 꽁꽁 얼어붙어 풀릴 줄 모르고 굳어져만 가던 조선이다. 쇠사슬에 얽어맨 채 기진해 쓰러져가던 때였다. 맥아더가 군사기지인 광도와 장기에 원폭을 투하하면서이다. 도시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모든 게 하늘로 치솟았다. 수많은 사상자와 건물이 잿더미로 바뀌었다.
3일 간격으로 이어지면서 수도 동경을 겨냥하자 일찍이 서둘러 손들고 나섰다. 천황의 성명서가 방송되었다.
“모든 신민은 전장에서 철수하라.”
는 명령이다.
조선 총독부는 감옥에 있는 여운형을 불러내 이 나라 치안을 맡겼다. 경성방송을 통해 현재 생활을 그대로 이어 나가고 동요하거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평온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계속 냈다. 떠나는 일인들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도울 것도 당부했다. 폭행으로 살상하거나 강탈, 방화, 절취를 막았다.
광복은 잃었던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 지배의 노예 상태에서 풀려났다. 그 첫 선물은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우리 본래의 성과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다. 총독 미나미는 1939년 조선인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름을 고치지 않으면 자녀의 학교 진학, 취직은 물론 생필품 배급 중단과 우편물까지 배달하지 못하게 하는 강제 수단을 동원했다. 1941년 말 전체 가구의 81.5%인 322만 가구가 일본 이름으로 바꿔 신고했다.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은 일본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8월 15일은 해방의 날이자 우리가 근대적 헌법과 국민 영토 주권을 가진 온전한 독립 국가가 됐음을 세계에 선포한 날이기도 하다. 1948년 5월 10일 나라의 기본 틀인 헌법을 만들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제헌 의원 선거가 있었다. 21세 이상 유권자 813만 명 중 784만 명이 투표소에 나갔다. 198명이 뽑힌 이 선거에서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두 곳은 남로당 폭력 방해로 투표가 이뤄지지 못했다.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연장자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승만을 개회사에서 ‘기미년에 결사 혈투한 정신을 본받아 최후 1인 최후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다짐했다. 개원 다음 날 헌법기초위원회를 꾸려 헌법 초안 작성에 매달렸다. 기초위원회는 제헌 의원 30명과 유진오를 비롯한 10명의 전문가로 구성됐다.
기초위원회는 이승만의 당부대로 ‘3.1운동 당시 결사 혈투 정신’으로 전문과 10장 102개 조항으로 된 헌법 초안을 완성해 6월 22일 제헌국회 본회의에 넘겼다. 제헌 의원들은 트럭 화물칸에 판자를 깔고 아침 10시 출근해 자정 무렵까지 손바닥만 한 걸상에 5명씩 붙어 앉아 단어의 뜻과 문장 뜻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국호를 놓고 많은 얘기가 오갔다. 대한민국과 고려, 조선, 새한 등 여러 후보 가운데 대한민국을 선택한 것도 진통의 연속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과 한 살 아래인 김구는 형, 아우 하던 사이로 서로 상대방에게 없는 것을 갖췄던 거인이다. 이승만은 세계정세를 굽어보는 통찰력으로 독립운동과 독립 후 대한민국을 번영의 길로 선도했다. 김구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궂은일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독립 정신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지켜냈다. 양쪽 모두 결점도 있는 인간이었다. 장점을 합하면 나라의 보물이다.
일제가 패망한 뒤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의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 때문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 미군정을 이끌고 있던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소개했다.
이승만에게만 라디오 방송에 나가 전 국민을 상대로 연설할 수 있는 특권을 줬다. 해방정국에서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일주일 뒤 한국민주당과 조선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 좌우익을 망라한 조직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립촉성회)를 발족시켜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박헌영 등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은 친일파 배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립촉성회에서 철수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반공 노선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미국과 소련, 영국의 모스크바 3상 회의가 막바지이던 해방 12월 28일 동아일보에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실렸다. 남한 사회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매주 방송을 통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방송을 했다. 전국을 순회하며 반탁 강연을 개최하는 등 김구와 함께 반탁 운동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촉성회의 조직이 크게 확대됐다.
남한의 좌우익은 신탁통치의 찬성과 반대로 갈려 극심한 대립을 빚었다. 그러던 중 다음 해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연설에서 통일 정부를 세우는 것이 어렵다.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와 같은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에 한민당이 지지하고 나섰다.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를 설립하여 자신이 총재가 됐다. 이로써 이승만은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72세 때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관할권을 유엔총회에 넘겼다. 그해 1947년 11월 14일 총회는 감시하에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 선거를 결정했다. 소련이 이를 전면 거부했고 다음 해 2월 미국은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포고를 발표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반대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는 두 곳 선거구가 불탔다. 군인과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3만 명 이상의 도민이 사망하는 4.3사건이 벌어졌다.
상해 임정을 이끌던 이승만이 서울로 들어왔다. 안창호와 김구, 여운형, 조병옥, 김성수, 안재홍, 김규식, 조만식, 조소앙, 조봉암, 신익희 등 애국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건사하려 속속 얼굴을 드러내고 건국에 몸 바쳤다. 남북의 다른 이념 속에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솥에 콩 볶이듯 튀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천만다행히 미국의 지원과 이승만의 지혜로운 정치활동으로 총선을 치렀다. 대한민국을 가까스로 어렵사리 일으켜 세웠다.
5월 10일 총선을 통해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국회가 구성됐다. 이승만을 의장으로 신익희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제헌헌법 초안은 의원 내각제를 골자로 한 정부 수립안을 채택했다. 20일 치러진 간접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주장했다. 제헌국회는 뜻을 받아들여 헌법을 제정하고 7월 17일 공포했다.
남북 총선이 시끄러워질 때 남한만으로 날짜를 정해 치르려 했다. 이때 김구는 여러 차례 평양을 찾아 김일성을 만났다. 통일을 꿈꿨으나 남과 북은 합쳐지지 못한 채 갈라져 가고 있다. 총선을 방해하는 남로당의 준동으로 제주와 대구, 여수, 순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얼핏 애국의 모습으로 비쳤다. 이는 바로 소련과 북이 원하는 공산화로 가는 길이다.
이승만에게 걸림돌이고 심한 고뇌의 시간이었다. 시인이고 수필가인 모윤숙에게 ‘메논’을 이화장으로 데려오도록 부탁했다. 드라이브를 청해 금곡릉에서 달구경하고 인삼차를 마시자며 안내했다. 신생국 한국의 운명을 거머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장이다. 인도 사람으로 뒷날 소련 대사를 역임한 사회주의에 밝은 자였다.
1948년 1월 유엔총회의 남북총선거 결의를 실행하기 위해 한국에 온 막강한 8개국 대표단장이다. 부단장은 시리아의 ‘무길’이며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필리핀, 중국, 엘살바도르 대표단이다. 입국할 때 서울에서는 대대적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그런데 ‘그로미코’주유엔 소련 대표가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냈다.
북한에서 남북 총선을 하게 되면 이미 만들어진 소비에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좌파와 좌우 협상파들 김구와 김규식도 선거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메논’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이승만은 이날 밤 모윤숙과 함께 남북의 총선거가 어려우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치러 정부를 세우게 해달라고 호소문과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지도자 60여 명의 서명록도 제출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몇 차례 모여도 상반된 주장만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게 되고 철수하면 바로 공산화가 되는 걸 뻔히 짐작하는 이승만이다. 군정장관 ‘하지’도 모르게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이다. 유엔에서 맡아 감시 아래 총선을 할 수 있도록 주장해 이뤄졌다.
처음은 미국도 반대하다가 나중에 트루먼이 받아들여 유엔에서 다루기로 한 커다란 성과이다.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의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국인 북쪽과 남쪽 일부에서 이런 반대 여론이 나왔으니 단장은 난감하다. 유엔 소총회인 정치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토의했다.
이때 회의장 밖에서 임병직과 중앙대 임영신이 설득작업을 벌였다. 논란 끝에 표결에 부쳐졌다. 찬성 32표, 반대 2표, 기권 11로 통과됐다. 이런 결정이 났는데도 서울의 위원단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4일간 격론을 벌였다. 모윤숙 아니면 다 된 일이 자칫 물 건너갈 뻔했던 일이다. 곳곳에 진탕이고 지뢰밭이다.
8개국 대표 가운데 미국이 낸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확실하게 지지한 나라는 중국과 필리핀, 엘살바도르뿐이었다. 5대 3이면 남한만의 자유 선거는 어려워진다. 표결에 부쳐진 3월 12일이다. 찬성 4표로 1표 늘어났다. 여기에 ‘메논’이 찬성으로 돌아서 주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가 반대하고 시리아와 프랑스가 기권했다.
이렇게 아슬아슬할 수가, 만약 안 됐으면 지금 이 나라는 어찌 됐겠나. 문학 얘기로 친밀감을 주고 나라의 현실을 이해시킨 덕택이다. 이화여대 낙랑클럽도 위원들을 감싸고 도는데 나라 사랑으로 한몫했다니 다 고마운 일이다. 이승만을 도운 이들 여성을 창녀라고 매도하는 일이 안타깝기만 하다.
2백 제헌국회 의석 중 제주 두 선거구 결원이 생겼다. 그런 가운데에도 감격의 국회가 열렸을 때 73세 이승만 의장이 개회를 선언하면서 감사 기도로 시작했다. 정말 우여곡절로 이뤄진 나라이다. 어찌어찌 되어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일이 하나하나 보살펴주고 그때마다 손잡아줘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식 때 이윤영 의원의 기도문은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는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는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는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는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는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가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을 걷는 오늘 우리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자객이 들끓었다. 우남을 죽이기 위해 이화장과 경무대, 동선 주위에서 밤낮으로 좌파 저격범이 설쳐댔다. 누군가 손목을 이끌고 소리치듯 하나님이 그를 곁에서 늘 보호해줬다. 북은 러시아 군대가 남쪽은 미군이 주둔해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켜 군인과 경찰, 관리들을 먼저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행정기관과 경제인, 농민 등 일본인들은 정한 날짜에 재산을 모두 남겨두고 알맞은 여비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해방 뒤 어수선한 정치에 군정장관 하지와 나라를 토닥거려 나갔다. 우글거리는 공산주의자들 숲에서 혜성처럼 나타났다. 수천 년 왕정과 삼십여 년 식민지 시대, 짧은 신탁통치도 끝났다. 나아가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나라 이름 대한민국 건국이 이뤄졌다. 북한은 이듬해 9월 9일 조선 이름으로 건국된다.
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유엔의 인준을 받아야만 전 세계에 출생신고를 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유엔의 인준을 받으려고 팀을 꾸려 파리로 향했다. 그 당시 국무총리 장면 외 4명이 파리에 도착했다. 그해 12월 12일까지가 마지막 인준의 날이다. 11일 첫날부터 공산국가들의 ‘의사진행 방해안’이 시작됐다.
‘미군의 앞잡이 이승만, 독재자 이승만’등등 2시간씩 소련, 헝가리, 동독, 체코 등으로 시간 때우기 작전에 시간이 다 지나갔다. 다음날 12일에 인준을 못 받으면 우리나라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장면 총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함께 간 팀원들과 교회를 찾아갔다. 밤을 새워 눈물로 기도를 올렸다.
한국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교회에 기도 부탁과 밤새워 구국의 기도를 간절히 했다. 다음날 또다시 공산국가들의 의사진행 방해가 시작됐다. 소련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시작한다. ‘코리아 이승만은 미국 앞잡이고 독재자’라 하다가 목 결절이 생겨 숨을 못 쉬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런 와중에 가, 부 결정하는 표결에서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감격의 유엔 인준을 받아낸 것이다. 북한은 반대로 반대 48, 찬성 6, 기권 1로 인준에 실패했다. 몇 해 뒤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감행했을 때, 유엔이 인정한 나라 대한민국에 유엔군이 참전하게 됐다. 이승만과 장면의 발 빠른 기도로 하느님이 손잡아 준 것에 감사를 드린다.
내각제 간선으로 초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선임되어 경무대에 자리 잡았다. 국방, 교육, 문화 등 행정부 조각에다 입법 제헌국회, 사법 기관 등 삼권에 각 청 골격 갖추기에 분주했다. 9개 도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등 대도시 기관장과 군, 면 단위까지 학교 병원 등 수많은 단체장 발표가 있었다.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군 단위에 경찰서, 면에는 지서나 파출소를 설치했다. 대도시에는 시위 진압을 위해 연대급 군대를 만들어 앉혔다. 전국 곳곳을 손금 보듯 설계에 따라 배치했다. 전방 38선 접경지역을 우선 10만 국군 병력이 공산군을 막도록 했다. 처음 하는 일이 서툴고 시간이 걸려도 잘 진행해 나갔다. 모두 선진 미국식을 본받았다.
정부 수립 후에도 제주도에서는 양민 피해가 계속됐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던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제주도로 1개 대대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렸다. 남로당 소속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 등은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으나 10여 일 만에 미군과 정부군에 진압당했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무려 2,600여 명에 달했다. 17,000여 명이 반란 가담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8백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승만의 지시로 군대 내의 남로당을 색출해 5천 명 가까이 숙청했다.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국가보안법을 마련해 국회에 올려 통과시켰다.
1년간 이 법으로 체포된 사람이 11만 명에 달했다. 경찰은 2만 명이 증강되고 군인은 4배로 늘었다. 언론 검열도 강화되어 정권을 비판하는 신문은 폐간되고 방송국은 국영으로 바뀌었다. 국민보도연맹 단체를 만들어 좌익 경력이 있는 자는 가입을 권유받았다. 전향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거부하면 보안법의 적용을 받아야 했다. 1950년대 초 회원 수는 50만 명에 이르렀다. 좌우익을 구별하지 못하는 문맹자이거나 도시 빈민들이 다수였다. 회원들은 전쟁 때 빨갱이로 몰려 많은 수가 학살됐다.
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이 가장 첨예한 문제로 등장했으나 이승만은 그것에 부정적이었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 재석의원 141명 중 103명 압도적 지지로 제정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승만은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친일파 처단보다 나라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면서
친일파 처단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정부는 경찰을 포함한 친일 고위 관료와 추종 세력을 동원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반민특위 주요 의원들을 남로당과 연계해 프락치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검거한 국회 프락치 사건이 벌어졌다. 반민특위 직원 35명을 체포해 구속하기도 했다. 1949년엔 한민당에 의해 반민특위 폐지안이 통과됐다.
그가 마음 썼던 일은 먼저 농지개혁이다. 해방 당시 한국 농민들은 84%가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고 농토의 63%가 소작지였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초에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의한 전면적 토지개혁이 이뤄졌다. 이승만을 북한과의 체제 경쟁 차원에서도 농지개혁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다. 이 개혁을 위해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혔다.
74세 때인 1949년 6월 헌법에 따라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농가경제의 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향상 내지는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목적으로 농지개혁법이 제정됐다. 1950년 3월과 4월 농지개혁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잇달아 공포하고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3천 평 이상의 농지에 대해 정부가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서 소작농에게 파는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을 취했다. 땅값은 현금이 아니라 유가증권을 지주에게 줬고 땅을 받은 소작농은 땅값인 수확량의 1.5배를 5년 동안에 나눠 현물로 상환하도록 했다. 전쟁으로 중단했다가 1957년에야 마무리됐다.
남한 경작지 이백만 헥타르의 절반 이상이 소작농이다. 거기다 수십만 헥타르가 일제가 사용한 땅이다. 수천 년 지주 밑에서 종처럼 소작을 부치던 귀천이 끝날 때이다. 갑오년에 반상 타파가 있었지만 끈질기게 여태까지 내려왔다. 이제 우남 이승만이 역사적인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다수 지주 국회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5인 가족으로 한 가구당 3헥타르 9천 평을 기준으로 끊어갔다.
평년작의 2.4배를 주장하다가 1.5배로 결정했다. 십 년 걸리던 것을 더 줄여 4. 5년 소출로 갚아 나가면 내 땅이 되게 했다, 반만년 소작지가 꿈같은 내 토지로 바뀌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데도 논밭에 드러누웠다. 그 얼마나 감격적인가 비가 무슨 대수인가. 조상 대대로 하인이고 양반에게 굽실대던 게 이제야 끝이 나고 말았다. 개혁 진행 중에 그만 6.25 전쟁이 일어나 중단됐다가 이어졌다.
긴긴 세월 지주들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복락을 누리며 살았다. 두리둥실 드넓은 기와집 깊은 곳에 들앉아 편하게 지냈다. 수많은 남자 머슴과 여자 하인들로 북적였다. 집안일을 총괄하는 집사가 있고 고을마다 소작농을 다스리는 마름이 고을 원처럼 버티고 있다. 집안에는 물길어 부엌 단지와 동이에 붓는 일꾼과 땔 나무하는 사람이 득실거린다.
연말 소작료를 바치러 오는 달구지 줄이 어디까지 이어 섰다. 집사와 마름의 지시에 따라 큰 저울에 달아 창고에 넣어 쌓는 머슴들이 숱하다. 춘천 김유정의‘동백꽃’과 하동 박경리의‘토지’에 지주의 얘기가 나온다. 주인마님으로 허리 숙여서 불러야 하고 그 자녀들도 도련님이나 아씨로 깍듯이 높여야 했다.
청소하고 주인 방 데우며 지키는 머슴에다 밤낮으로 연자방아를 돌려 알곡 먹거리 장만하는 하인도 있다. 여자들은 부엌 일하는 식모에다 반찬 만드는 찬모가 있다. 손님 접대용 술 담그는 주모와 주인 아기 받아 키우는 양모가 드세다. 길쌈과 모시 짜서 옷 만드는 의모, 안주인 모시고 의복 이부자리 보살피는 안방 하인들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 혼란 통에 다시 재정비해서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수복 땅이 생겨 전선 지역까지 넓혀 나눴다. 지주에게 임야나 거주지, 그 외의 땅은 대금으로 유가증권을 발행해줬다. 전쟁 중에 유통되면서 이를 사 모았던 사람들은 일본인 적산 기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한화와 선경, 두산 등의 대기업이 속속 생겨났다. 내려오고 올라가는 그 북새통 전투 중에 대구와 부산 지역에서 등락을 거듭하다가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는데 농업경제가 산업과 공업발전으로 이루어지면서 여러 방면에 영향을 줬다.
농지개혁으로 전통적 지주제도가 일시에 해체됐다. 특히 3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주 계급이 받은 지가증권은 휴지가 되어버려 더욱 빠르게 붕괴했다. 이 개혁으로써 공산화를 막고 자본주의 기틀인 사유재산 제도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주가 내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소작농은 길거리에 나앉는 가엾은 신세다. 이것이야말로 공산이고 민주주의다. 행복한 인권이고 백성이 은신하며 서성일 수 있는 낙원이다. 웃음이 활짝 피어나고 꿈꾸는 희망의 세상이며 꽃피는 나날이다. 주인마님과 도련님에게 쩔쩔매는 일이 없는 이게 바로 평등하고 공평한 정치이다.
이승만은 이내 초등학교 6년 과정을 의무교육 기간으로 실시했다. 처음은 사정이 어려웠던가 월사금이나 사친회비라 해서 조금씩 받다가 사라졌다. 수업료를 받아 들어가기 어려운 일제가 세운 면 단위까지의 소학교였다. 교육과정이 달라 우리 아이들은 들어가도 소용없는 곳이다. 양달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먼 곳에는 분교를 설치하는 등 취학 남녀 어린이들이 모두 입학해 무료로 교육받게 했다. 반만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한자와 한글을 익힌 일부 사람만이 관가에서 붙이는 갖가지 방이나 편지를 읽고 썼다. 대부분 까막눈의 세상이다. 글자 해독이 어려웠다. 농사짓고 공방 일하는 사람이 무슨 글이냐이다. 특히 여자들이 글을 익히면 크게 잘못된 일로 여겼다. 극소수의 양반이 그것도 남자만의 전유물이다. 상민이 공자와 맹자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또 그럴 시간도 없다. 널브러져 쌓인 일이 바쁘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먹고 사는 일로‘내 코가 석 자’이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7세 남녀부동석도 깨어졌다. 한 반에 5, 60명씩 가득히 앉아 공부했다. 넘쳐나는 곳은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었다. 남녀가 섞여서 스스럼없이 지났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살판났다. 집에 꼭꼭 박혀 숨도 못 쉬고 살았는데 해방됐다. 남자아이들은 소를 풀밭에 내다 매고 저녁엔 우리로 들여야 한다.
소 꼴 베고 돼지풀 쇠뜨기와 토끼 먹이 씀바귀를 뜯으러 다니며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엉성히 매 둔 소가 어디로 가고 없을 땐 야단났다. 소학교나 공민학교는 일본인 그들 자녀를 위해 지어진 한없이 부러운 곳일 뿐이다. 뒤에는 좀 느슨해졌다. 그래도 우리 학생은 일본말을 해야 한다. 한글은 입도 벙긋 못하게 했다. 학교는 무슨 ---.
“날아라 푸른 하늘아 ---.”
세상에 태어나서 교복 입고 모자 쓰며 책가방 드는 걸 해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들판을 냅다 달음질해 학교에 다다랐다. 반별로 줄 서서 조례를 갖는다. 교장 선생님 훈시와 주번 선생의 주훈을 듣고 줄줄이 교실로 들어가 담임 선생의 출석 점호와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된다.
“거북아, 거북아, 이리 오너라.”
한글 수업에다
“2,4=8. 3,5=15. 5,6=30 ---.”
셈본이 이어진다.
담임 선생님이 붕붕 두드리는 흥겨운 풍금을 따라 노래하는 음악 시간이 즐거웠다. 넓은 두꺼운 종이에 색색 크레용으로 덧칠하며 그리던 미술은 어떤가. 봄가을 폭포나 절간, 유적지를 찾아 원족 아니 소풍 가던 게 선하다. 철판 도시락에 달걀찜을 덮은 게 맛났다. 가을 글짓기와 체육대회, 연극공연 등 6년간 온갖 것을 배우고 익혔다.
음악 시간 몇 번 따라 부르다가 나와 부르게 했을 때 혼났다. 감감한 게 금방 들은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이다. 아버지를 그리라 했는데 보니 허수아비다. 운동회 때 만국기가 펄럭이고 작은 모래주머니를 던져 종이풍선을 터뜨리면 색종이가 쏟아지면서 ‘대한민국 만세’ 휘장이 늘어 펼쳐진다. ‘검사와 여선생’ 연극에서 검사역을 맡아 하면서 대사를 더듬거렸던 게 생각이 난다.
운동장 구석구석 돌아가며 풀 뽑고 자갈을 주워냈다. 뒤뚱하게 쌓은 돌담이 자주 무너져 허물고 밑바닥 돌부터 앉혀 다시 쌓기를 얼마나 했던가. 유리창과 교실 바닥을 청소하면서 해맑고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아야 했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교실 바닥과 복도 마루를 솔잎으로 문지르면 조금 빛이 난다.
반장 선거를 통해 귀한 다수 의견을 알게 된다. 학급 회의도 열려 반장의 진행을 선생님이 멀찍이서 도와준다. 아주 민주적인 방식이다. 세상에 나가기 전 학교에서 배움으로 익힌다. 대다수가 문맹에서 눈뜬 문명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중간, 기말고사시험으로 성적표를 나눠준다. 경쟁하게 되고 또 반성도 한다.
이 모든 게 이승만이 배재학당과 미국에서 배우고 서구를 다니면서 겪은 것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방위선을 아래로 내려 일본까지 하고 한국을 제외하자 곧바로 전쟁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찾아온 친구 덜레스에게 화를 내며
“이게 무슨 미국의 정치인가.”
소리쳤다. 소련과 중국이 주위 인접국을 마구잡이로 공산국가를 만들고 있다. 그게 자그마치 40여 개국으로 도미노가 일어나고 있다.
“보라 돌아가면서 공산화가 아닌가.”
공산화 파도에 휩쓸리는 현실을 알리면서 딱한 나라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이해시켰다. 일본과 대만은 바다에 떠 있는데 한국만 달랑 드넓은 붉은 공산 대륙 끄트머리다. 그것도 북한이 공산화 되어 반쯤 대롱대롱 곁붙어 겉돌고 있다. 고려 백여 년 원나라 지배와 조선 5백 년 중국의 영향 아래 지내며 조공을 바쳤다.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의 도움으로 남침을 감행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정보에 어두워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일요일 새벽 곤히 잠든 남녘으로 전차와 수십만 무장병력이 그대로 밀고 내려왔다. 김일성이 기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한 전쟁이다. 1년 전부터 당시 소련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요청했다. 또 안달이 나 승인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스탈린 동지, 이제 상황이 무르익어 전 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빨치산 부대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미군이 철수하자 ‘한반도를 적화할 좋은 기회’라며 변화된 국제정세를 이유로 들어 허락받게 됐다.
“한국과 미국이 체계적으로 저항하거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동원할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기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고 강조한 스탈린이다. 달포 전에 승인하고 소련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파견해 선제타격 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도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 북한 공산군은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남쪽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이때 20만 북한군은 2백여 대의 전차와 항공기, 1백여 척의 함정, 수백 문의 야포로 아직 준비가 제대로 안 된 남한을 쳐들어왔다. 점심 때쯤 춘천이 함락되고, 서울은 사흘 뒤 소련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미아리를 넘어 태평로와 남대문으로 들이닥쳤다. 중앙청엔 인공기가 걸려 펄럭였다.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남한은 치안이 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미국은 1949년 5월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서울을 떠나 열차로 대전에 도착한다. 밤 9시
“동포 여러분, 미군이 참전했으며 계속 진격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라는 방송 담화를 내보냈다.
전쟁 발발 66시간 만에 대통령 육성이 나오자 서울에 머물러 방송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28일 새벽 2시 30분경 육군은 한강 인도교 폭파 작전을 감행했다. 7월 1일 새벽 3시 이승만은 다시 대전을 떠나 이리와 목포를 거쳐 배편으로 부산에 닿았다.
인민재판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오효진의 실화 소설 김팔봉과 인민재판에서
“500명 중 50명이면 십분의 일이 찬성했는데도 나는 인민의 이름으로 죽는구나. 팔봉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파랬다. 아름다웠다. 그는 기도했다. 깨끗하게 죽자고,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탓하지 말자 ---.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총탄도 아깝다. 때려죽여라. 이 소리가 들려온 건 그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러니 살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이 들끓었다. 폭파된 한강철교 옆에 임시로 만들어진 부교를 건너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수원역에서는 어떻게든 피란 열차에 올라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잠시 머물 수도 없이 한시가 급한 이들은 한사코 서울을 떠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뜨거운 기관차 난간과 지붕 위에도 사람으로 꽉 찼다. 출입문과 창틀에도 들어갈 수 없어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로 가득 넘쳐났다. 총포탄이 콩 볶듯 터지는 소리와 번쩍이는 빛으로 온 천지가 시끌벅적 자욱하다. 지옥도 이런 참혹한 곳이 있을까. 공포가 하늘을 찌른다. 어찌 살아가나.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완전하게 폭파하지 못한 철교를 수리해 북한군 전차가 남쪽을 향해 내리 달렸다.
아직 비행기와 전차도 없는 남한군이다. 창군이 덜 된 남한군 10만 명은 제대로 반격하지도 못한 채 절반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데다 갑자기 휴일 새벽에 내리 닥치니 견뎌낼 수 없었다. 심히 열세이고 어려울 땐 대열을 벗어나 달아나는데 이들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도 꿋꿋이 견뎌낸 것이다. 장하고 용감했던 군인들에게 한없이 감사하다.
유엔의 감독 아래 자유 선거를 치르고 유엔총회의 승인을 거쳐 탄생한 대한민국은 건국 과정부터 유엔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48년 말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로 인정했다, 그런 대한민국이 적화될 위기에 처한 것은 자유세계에 대한 위협인 동시에 유엔의 권위와 위신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일이었다.
‘침략행위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 병력을 철수하라.’
는 유엔 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남침을 감행하자 유엔은
‘군사적 제재를 통하여 평화를 회복한다.’
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어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고 미국의 맥아더 원수를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전쟁 동안 미국과 영국, 터키 등 16개국의 전투부대와 인도와 덴마크, 스웨덴 등 5개국의 의료 지원부대, 아일랜드와 이라크, 포르투칼 등 전투 복구지원 6개국 등 유엔군으로 참전해 ‘자유’의 이름으로 피 흘리며 함께 싸웠다. 그 외에도 물자를 지원한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대만 등 40여 개국을 잊을 수 없다.
유엔 역사상 최초의 집단행동이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6.25 전쟁 유엔군통합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킨 내용이다. 이는 전 세계 위협인 공산 세력의 침략을 격퇴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전국을 휩쓸어 경상도 남쪽만 일부 남겨둔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가던 한국이다.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대구와 부산을 넘보고 있다.
유엔군이 태풍처럼 휘몰아쳐 들어와 이들을 북으로 밀어 올렸으니 망정이지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일본에서 신속히 출동해 공산군을 막으려던 오산의 스미스 부대와 대전 24사단은 속수무책으로 뿔뿔이 흩어져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북한군은 도심 곳곳 건물에 인공기를 꽂아 의기양양하게 날렸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전쟁 시작 한 달 만에 영토의 90%를 잃었다. 이제 한반도 끝인 낙동강 전선으로 내몰려 커다란 위기에 처했다.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던 북한 공산군은 낙동강 전선만은 사수하려는 국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제 더 물러설 곳 없는 부산에서 이승만은 공산군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며 대책에 골몰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치고받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칠곡과 군위, 영천, 경주, 포항을 지키는 국군 1사단과 6사단, 8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북한 공산군 6개 사단을 어렵게 감당하고 있었다. 서쪽 대구와 달성, 영산, 함안, 마산은 미군 기병사단과 24사단, 2사단, 25사단, 해병 1대대가 맡아 인민군 8개 사단을 힘겹게 막아내는 중이었다.
밤새 피 튀는 싸움으로 지쳐서 잠시 취침 중인 모습의 사진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허물어진 신발과 해어진 옷가지, 무더운 여름 풀밭에 아무렇게 나뒹굴어 잠들었다. 뜨거운 햇볕을 그대로 받으면서 쓰러진 모습은 기력 없이 지친 게 역력하다. 가장 격렬했던 다부동 전투에서는 발밑으로 피가 개울처럼 흘렀단다. 적과 바짝 붙어 싸우다 보니 총포 대신 수류탄을 주고받고 마침내 육탄전으로 겨루는 백병전으로 번졌다.
영천과 포항, 다부동 전투가 인민군이 밀어붙여 동남쪽 경상도 일부만 남은 절체절명의 최전선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대구가 쉽게 점령되고 남은 부산은 삽시간에 덮쳐내려 버티기가 어렵다. 어떻든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야만 한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서 동북으로 좀 들어가면 학이 머무르는 산이라 하는 유학산이 있다.
이 산정 근처에 마이클 레스 미 중령과 김재명 소령이 이끄는 대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여기 뚫리면 대구까지 허물어지는 개활지로 매우 중요하다. 나라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지역이다. 1사단 병력이 힘겹게 막아내다가 수천 명이 전사하고 부상하는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우리 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참패하는 접전 지역이다.
인민군 3개 사단을 맞아 싸우는 1개 사단의 처참한 모습이다. 치고 빠지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했으며 유학산 정상을 차지하려는 피나는 최대 격전지였다. 이때 미8군 사령관이 다급하게 백선엽 사단장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당신 나라를 포기할 것이냐. 유학산이 뚫려 포위되면 우리 마이클 레스 중령 전차부대 다 죽는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부대를 뺄 수밖에 없다. 그리하면 당신 나라는 끝장이다. 우리도 버티고 있는데 당신들이 후퇴할 수 있는가.”
잠시 시간을 달라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김재명 소령이 맨몸으로 낙오병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백 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즉결처분받겠다.’라고 말한다. 여기 지키느라 몇 번씩 탈환하고 밀리기를 반복해왔다. 이틀간 물 한 모금 밥 한 끼 먹지 못했고 탄약도 없으니 이젠 별도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백장군은
“너희를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러서라.”
고 말하고 학도병과 내려오는 군대 모두 합하여 수천 명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며 허기를 달랬다. 이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 올라서서 외쳤다.
“장하다 그간 고쟁이 많았다. 이곳이 뚫리면 그간 우리의 전공도 모두 수포가 되고 우리나라는 끝장이다. 대한민국이 사라지는데 살아 뭐하나. 난 여기서 죽겠다.”
집안의 독자이거나 또는 돌볼 노부모가 계신 사람은 돌아가라. 공격 구호는 간단하다.
“돌격 앞으로!”
내가 제일 앞장서겠다. 만일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면 나를 쏴라. 내 시체를 밟고 넘어서 이곳만은 꼭 지키고 탈환해라.
분위기가 바뀌면서 김재명 소령도 자신이 제일 먼저 죽겠다며 앞장섰다. 이를 본 마이클 레스 중령은 세계 전사 상 후퇴하던 군대가 다시 ‘돌격 앞으로’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군대를 신의 군대 즉 하늘이 낸 병사(god’s soldier)라는 말을 했다.
백선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유학산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유엔군이 인천을 상륙하고 반격한 것이다.
최악의 전투 상황에서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외치며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적군을 향해 나아가며 내린 명령이다.
이곳 다부동 여기에 미8군 30만 명의 한국노무단 지게 부대가 있었다. 차량이 드나들 수 없는 높은 산악지대에 1인당 50킬로그램의 병력 물자를 져 날라야 했다. 내려올 때는 부상자와 전사자를 지고 왔다. 수많은 애국 지게 부대원, 이 중 2천 명 전사자와 2천여 명의 실종자가 나오고 4천여 명이 부상자가 생겼다.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지게 부대가 없었다면 최소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한다.”
까마득한 산꼭대기까지 보급품을 져 나른 수송 지게 부대의 전무후무한 활약을 기렸다. 이렇게 해서 악전고투 다부동 전투가 반격의 디딤돌이 되었다.
38선을 넘어 새벽 전쟁이 터지자, 친구 덜레스는 미국 정부와 유엔에 긴급 도움을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일본 주둔 미군 맥아더에게 긴급 명령을 내렸다. 만날 때마다 다정했던 가까운 극동 사령관이다. 5년 아래여도 겉늙은 덩치 큰 모습의 장군은 이승만의 한국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둘 다 70세가 넘은 늙은이다. 벌써 퇴역해야 할 나이다. 미국은 그에게 정년을 넘어선 5성 장군으로 종신 원수를 명했다.
가장 가깝고 한국 군정에 근무한 적이 있는 구주 24사단 딘 소장을 출전시켜 공산군을 막도록 했다. 바로 출동했다. 스미스 특공부대가 날아가 대전 북쪽 오산에 내렸다. 당시 수영 공항과 부산항으로 마구 들이닥쳐 대전으로 올라가 공산 인민군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지형에 어두운 미군은 매섭게 달려드는 북한군에게 역부족이었다. 날아오는 야크 폭격기를 피할 수 없고, 줄줄이 오는 전차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돌을 놓고 나무를 덧대도 소용이 없어라. 밀쳐내고 꾸물꾸물 내려온다. 수류탄을 던지고 박격포를 쏘아대도 끄떡없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낙하산 부대는 대전으로 이어 대구 후퇴를 거듭했다. 막강한 미군 화력이지만 여러 사단에 에워싸여 들어오는 데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작은 연못’ 영화가 떠오른다. ‘노근리’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곳인가. 부산, 마산, 양산이 산 많은가 했는데 여기도 산 높은 깊은 골짜기다. 가로수가 주렁주렁 감나무이고 비 가림 포도밭이 곳곳에 보인다. 맑은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돌아 내리는 고즈넉한 곳이다. 황금빛으로 곱게 물든 은행나무가 돋보이는 평화공원으로 들어섰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미군과 인민군이 맞닥뜨려 싸웠던 곳이다. 피난민 수백 명이 이고 지고 살던 마을을 떠나 남쪽으로 동동걸음쳤다. 그 속에 인민군도 숨었는가. 기총소사와 폭격이 이뤄졌다. 경부선 철도 다리 아래로 살려고 숨어들었다. 총알이 소낙비 퍼붓듯 쏟아졌다.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어이없게도 꼬꾸라져 숨졌다.
굴은 두 갈래로 차도와 도랑으로 되었다. 양쪽 입구는 온통 총탄 자국으로 얼룩졌다. 흰 페인트를 칠해 동그라미와 삼각, 사각형으로 그려졌다. 삼각은 실탄이 박혀 있는 곳이다. 얼마나 쏘아댔던지 빤한 틈이 없다. 다급한 때라 시신을 바로 뒷산으로 옮겨 묻었다. 흩어져 난리를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몰려 뭉쳐 다니다가 변을 당했다.
빨리 위험 지역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리 가자. 저리 가야 한다. 말썽 속에 갈팡질팡했다. 죽을라치면 수렁으로 들어간단다. 또 흰옷을 즐겨 입어 표적이 쉽다. 정찰기가 돌다가는 이내 폭격기가 들이닥쳤다. 정조준 겨냥으로 맥없이 쓰러져야만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꾸불꾸불 산길보다 바른 철길을 따라가다가 그만 전투기를 만났다.
딘 소장은 해방 직후 신탁통치 군정관으로 있을 때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에 간여했다. 일본 남쪽 구주 사단장으로 있다가 6.25사변 발발로 유엔군 중 가장 먼저 부산을 거쳐 대전에 들어와 공산군을 막았다. 그러나 힘겨웠다. 약할 줄 알았던 인민군 여러 사단이 기세등등 대전으로 밀고 들어왔다. 오합지졸이 아니라 잘 훈련된 작전으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막강한 포병과 연대가 쉽게 물리칠 줄 알았는데 남쪽으로 밀리면서 그만 지휘 체계가 무너져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의기양양하던 미군은 낯선 지형에 어둡고 말이 통하지 않아 며칠 사이에 사달이 났다. 이때 영동 황간 지역을 지나던 미군에 의해 빚어진 일이다. 전쟁 시작 꼭 한 달 뒤 무더운 여름에 일어난 노근리(老斤里) 사건이다.
다급할 때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4만 평 노근리평화공원에 여러 개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쟁 지역에서는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철길 쌍굴다리 아래 숨어지냈다. 그런 가운데서 아기를 낳아 ‘앙앙’ 울자 들통날까. 두려움에 떠는 피란민 성화에 잠시 물속에 담갔다. 숨이 끊어지자 아버지가 미쳐 소리치고 날뛰었다. 이내 사격이 시작되고 물속 아기 곁으로 가라앉았다.
또 발걸음을 멎게 하는 동상이 있었다. 아기 젖을 먹이는 어머니다. 천연덕스레 젖 먹는 아기를 안고 아래를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죽어있었다. 넓은 광장 끄트머리에 위령탑이 섰다. 커다란 벽에 흑백 사진을 새겼다. 당시 찍은 것으로 어쩌면 저리도 선명할까이다. 철길 굴 앞을 지나는 피난민이다. 불안한 얼굴 모습과 걸친 흰 바지와 적삼에다 치마, 저고리 옷이 새삼스럽다.
긴 경사진 길을 따라 지하로 들어갔다. 구석구석 영상이 돌아간다. 영화인 듯 미군이 피난민을 일일이 뒤지고 철길 위로 올라가게 한 뒤 폭격과 기총사격이 이루어졌다. 다급히 피해 굴속으로 뛰어들자 좌우에서도 총격이 이어졌다. 어찌 살거나. 상처 속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이 고스란히 나왔다.
벽에 수백 명 죽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졌다. 밝혀지지 않은 사람도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이 산골짝에서 오글오글 복작복작 대대로 지내다가 갑자기 엉겁결에 나서 살기등등하다. 이승과 저승이 금방 왔다 갔다 했다. 평화, 평화, 자유, 자유 말을 뭉뚱그려서 싸움 없는 세상을 가꿔나가자. 정은용의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소설이 나오고 영화를 찾아 그때의 기막힌 참상을 밤늦도록 지켜봤다.
통신도 끊어져 뒤늦게 사단장 딘 소장이 철수했다. 급한 김에 사단기도 버려두고 나왔다. 총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포연 자욱한 속을 헤집고 옥천 산속을 지났다.
어두운 밤 길거리에 쓰러진 부상병을 싣고 가다가 물을 찾자 개울로 내려갔다. 그만 절벽에 굴러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 달이나 남쪽 대구를 향해 산속을 헤맸다. 물을 퍼마시고 밭의 농작물을 뜯어먹었다. 하도 배고파 어느 산골 외딴집에 들어가 구걸했다. 콩가루에 묻힌 밥을 줘서 먹었다. 얼마나 맛있었던지 꿀맛이었다고 말한다.
뱅글뱅글 돌았던가 진천에 들러 청년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대구까지 데려다주면 필요한 달러를 주겠다고 길 안내 도움을 청했다. 그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임시 수도 강계로 끌려가 험하디험한 시간을 보냈다. 키 낮은 좁은 감방에 손으로 음식을 주워 먹고 개나 돼지처럼 살았다. 그는 판문점 포로 교환 때 풀려났다. 그를 고발한 청년을 체포해 바로 총살하고 다음 사람을 세울 때 연락이 왔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폐 3만 원을 받고 한 일이다.”
살려주라는 부탁이다. 딘은‘죽음과 같은 3년 세월’의 책을 펴냈다.
막강한 인민 무장 군대로 밀고 내려왔다. 약한 우리 국방군과 미군 24사단을 여지없이 냅다 밀어붙였다. 낙동강 왜관에서 경상도 남쪽 일부만 덜컹 남았다. 꺼지기 직전 바람 앞의 등불이다. 대구와 부산을 삼키기 위해 김천에서 잠시 전열을 가다듬을 때이다. 너무 급히 내리 달려 흩어진 부대를 찾아 모아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이렇게 잠시 쉬었다 내려가도 남은 지역은 이제 ‘식은 죽 먹기’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때 유엔군 사령관 노병 맥아더가 직접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서해 쪽 목포와 군산 적진지 중 상륙작전 선택지로 인천이 격론 끝에 결정됐다. 바닥이 얕아 군함이 들어가기 어렵고 조수간만이 심해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고집불통 맥아더의 주장이 한국을 살려낸 것이다. 김포를 되찾고 서울을 수복했다. 춘천을 가로질러 병참 보급로를 막았다. 집결지 김천은 일본에서 날아온 미군 융단 폭격기의 포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났다. 군수품이 모두 막힌 북한 주력부대가 갈팡질팡할 때 남쪽은 부산으로 막 들어오는 연합 유엔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수월하게 이들을 밀치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내친김에 시월 들어서면서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치달았다. 서울 중앙청에 석 달 동안 걸렸던 인공기가 내려지고 다시 태극기가 휘날렸다. 유엔기도 올리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감격의 중앙청에서 수복 기념식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지고 옆에는 맥아더 장군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북한 정권이 무력으로 38선을 파괴하면서 남침한 이상 이제는 존속할 이유가 없다.”
며 수복 후 명령을 내려 북진하도록 했다. 국군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은 미8군 워커 사령관 승인을 얻어 10월 1일 3사단과 11사단이 38선을 넘어갔다. 동해안은 열흘 만에 원산을 점령하고 서부전선에는 국군 1사단이 유엔군과 함께 10월 19일 평양에 들어갔다.
그달 말 평양 입성 환영대회에서 서울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인민군과 노동당 간부는 평북 강계나 만주로 피신했다. 김일성과 그 가족은 일찌감치 중국 땅 통화로 넘어갔다. 그가 버리고 간 소련 리무진 차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됐다. 그들이 머물다 간 곳에는 양민 학살 현장이 발견되고 있다.
대전교도소에 4백여 구의 민간인 시신이 마당 구덩이에 묻히지 않은 채 나뒹굴고 있다. 주로 감치장과 유치장에 갇힌 수형자들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대량 학살은 전쟁 나던 해 9월 말, 전국적으로 동시에 이뤄졌다. 마을 일반인은 인민재판으로 가차없이 행해지기도 했다. 거기다 헤아릴 수 없이 줄줄이 묶어서 북으로 데려간 납북자가 사진으로 확인되고 있다. 납북 인사는 기록으로 8만 명에 이른다니 ‘한 많은 미아리고개’ 노래가 생각난다.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지은 춘원 이광수도 납북됐다. 인민군들이 찾아와 공산당 전향을 뜻하는 자수하라는 말을 했다. 여운형과 친하긴 했어도 자율적인 사상을 가져 남달랐다. 절필했다며 저항하자 트럭에 태워 종로경찰서로 실려 갔다. 앞을 가로막은 아내가 젊은 17. 8세 된 앳된 북한군에게 엎드려 절하며 만류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어 서대문형무소 유치장에 감금됐다. 옷가지와 먹을 것 등을 갖고 오라는 연락도 받았다. 양복과 비타민을 넣어줬다. 몇 달 뒤 서울이 수복되자 찾아가 보니 벌써 이내 북으로 끌려간 뒤였다. 강계 부근에서 혹독한 추위에 굶주린 데다 팔다리가 얼어 걸을 수조차 없었다. 같은 작가 출신인 홍명희 부수상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인민병원에 입원했을 땐 너무 늦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견디다 못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는 미국 딸들의 증언이다. 그는 강계 부근 만포에서 폐렴으로 사망해 그곳에 묻혔다가 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현재 납북과 월북 인사를 위한 평양 교외의 특설 묘지로 이장됐다. 당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민주주의를 해설하던 한치진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은 안 뺏긴다.’고 한 말을 믿고 피난 가지 않았다가 납북당한 경우가 많다고 일렀다.
경기도 지사 구자옥의 친족 황규필씨는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의 무장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연행돼 납북이 이뤄졌다고 한다. 8만이라 기막힌 숫자이다. 모두 데려다가 잘 거두기는커녕 오르내리는 전란 통에 수렁에 집어넣고 온갖 수모와 고생을 시켰다. 그 잘 있는 수많은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갔다. 단란한 가정을 마구 깨뜨리고 말았으니 한 많은 일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김일성의 우상숭배 글을 써야 하는데 어울리지 않고 마땅치 못하자 화를 내며 유배를 명했다. 평남 외딴 산골짝에 지내면서 다시 좋게 짓길 바라는 반성의 기회였다. 붓을 놓은 뒤 해 보지 않던 농사를 지으며 허덕였다. 수시로 찾아오는 감시병의 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굶주리며 지내다 괭이를 잡고 밭고랑에 쓰러졌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해 잔당을 소탕하는 중이었다. 6사단 7연대가 압록강 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기쁨과 환희에 찬 병사들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 수통도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이제 막 꿈에 그리던 통일이 올 것 같았는데, 그 영광은 잠시뿐 짧았다.
많은 숫자의 중국 공산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몰래 북한 땅에 숨어들어 와 있었다. 북한 깊숙이 매복해 있던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중공군을 불러들인 김일성의 편지에 의해서이다.
“약속한 바와 같이 중국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편지에 조선인민중앙위원회 김일성과 박헌영의 한글과 한자 친필 사인이 보인다. 난데없는 중공군의 대량 참전으로 혹한의 추위 속에 38선을 넘었다가 다시 내려오는 1.4후퇴의 길로 들어섰다. 평양을 뒤로 할 때 많은 군수 물자를 버리고 떠나야 했다. 험준한 낭림산맥 장진호 전투와 함께 흥남 철수도 이었는데 당시 1,200만 북한 인구 중 3백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따라 내려왔다.
오르내리면서 격전 중 잡힌 포로를 어디에 수용할까 하다가 거제도로 정했다. 육지와 가까워 수송하기 수월하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에 포로가 된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이다. 고현과 상동, 용산, 양정, 수월, 해명, 저산, 지구 등 드넓게 설치했다. 인민군 15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여자와 의용군 3천 명 최대 17만 명 넘게 머물렀다.
이곳에서 반공포로와 공산 포로 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벌어졌다. 포로 소장 돗드 준장이 납치되는 불미스러운 사건까지 있었다. 휴전협정 이후 폐쇄되었고 친공 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보내졌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 주는 민족 역사교육의 장소이다. 곳곳에 그때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다.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대립의 원인은 제네바협정에 따른 자동 송환이 아닌 자유 송환을 국제연합군 측이 주장하면서부터이다. 제76 수용소의 공산 포로들은 수용소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했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했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 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 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과 폭행, 학대 등을 거부했다.
평양 지시에 따라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은 국제연합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를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한다. 돗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그 과정에 105명의 반공포로가 공산 포로에 의해 살해된 사실이 드러난 아수라장의 현장이었다.
미군 연인원 170만 명이 들어오고 16개국 지원군이 속속 부산항을 거쳐 전선으로 올랐다. 병원선과 난민 구호금품이 수십 개국에서 답지했다. 미국은 거대한 군함에다 전투군인과 군수품 외에 가축 수천 마리와 많은 양봉 통, 달걀 수십만 개를 보내 병아리를 만들어 카우보이들이 전후 어려운 가정을 찾아 집집이 전달했다. 온갖 먹을 것들과 입을 구호물자를 바리바리 실어 날라 굶주리는 사람을 살려냈다.
길거리를 떠도는 어린이를 일일이 데려와 군부대에서 먹이고 재웠다. 대구 전투 비행대를 급히 만든 헤스 소령은 9백 명이나 되는 이 어린이를 임시거처지 제주농업고등학교에 옮겼다. 작전 중인 16대 수송 비행기로 실어 날라야 했다. 백악관의 특별 허락으로 그 바쁜 1.4후퇴의 긴박한 전쟁 중에도 ‘꼬마 자동차’라는 작전명으로 이동했다.
목사 안수받은 헤스는 조종사를 자원해서 맥아더 보좌관으로 참전한다. 한국군 조종사를 교육 시켜 일본에서 10여 대의 무스탕 전투기를 들여온다. 앞장서서 뱀처럼 긴 인민군 전투부대 차량을 집중 폭격으로 분쇄했다. 이어 북한 전투비행장과 보급창, 군사기지, 철도, 도로망을 폭파해 공산군 전투 능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공로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신념(信念)의 조인(鳥人)’이란 전투기 이름을 받고, 빨간 머플러를 목에 걸어주며 아들처럼 대했다. 맥아더의 특별 명령으로 어린이를 보호한 헤스이다. 어찌 이 일을 잊으리오.
미군 여러 전투사단이 국군과 함께 공산군을 막았다. 일부 유엔군은 미군 사단에 배속되어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싸워 전진해 올라갔다. 그 막대한 비용을 미국이 댔다. 전투 비행기와 전차, 차량, 전투 장비, 총포탄, 급식, 피복 등 미국 국민이 낸 세금이다. 전선에서 죽어가는 귀한 생명은 얼마나 아깝나. 이 모든 게 친구 덜레스와 맥아더의 도움이다. 맥아더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하는 바람에 현지 전선에서 쫓겨났다. 삼팔선을 넘어 평양을 빼앗고 신의주 압록강까지 치올랐다. 하얗게 눈에 덮인 압록강 주위 국경을 알아볼 수 없을 때 건너 만주를 폭격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속속 부산항에 들어올 때마다 토성동 대통령관저를 나와 직접 부두에서 따뜻이 맞아준 백발의 이승만이다. 그중에서도 머나먼 아프리카 가난한 에티오피아 군대가 들어올 때는 감격스럽게 그들을 부둥켜안고 어루만졌다. 미군 7사단에 배속되어 가평과 춘천 전투에서 인민군과 중공군을 맞아 싸웠다. 그런 중에 굶주리며 죽어가는 어린이를 거뒀다. 폭격으로 부대가 파괴되자 옮겨 다니는 급박함 속에서도 보호했으니 고마워라.
이탈리아 파시즘 무솔리니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다. 셀라시에 황제는 유럽으로 올라가 도움을 청했지만 돕겠다는 말뿐이었다. 애국 청년들과 죽음을 무릅쓴 지하 유격대 저항 끝에 침략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았다. 갓 창설된 유엔에서 유엔 전투군대를 설치하여 억울하게 피해를 받는 연약한 나라를 도와야 함을 역설했다. 유엔군이 만들어졌고 그 첫 번째 도움을 준 참전이 한국전이다.
영국군이 한국 지형에 맞춰 교육한 뒤 미군 수송함에 태워져 달포 항해 끝에 닿아 한국전을 수행했다. 오랜 가뭄으로 농사가 황폐해지고 목초지가 메말라가자 가축의 떼죽음이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좌파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켰다. 셀라시에 황제는 구금되어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고 참전 군인들은 체포와 재산을 박탈당했다. 은신해서 사막이나 산속에 숨어지내야 했다. 뒷날 두 분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이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춘천에 그들을 위하는 기념관을 세웠다.
수십만 명 부산 시민이었는데 피난민이 함께하면서 백만 가까운 복작거리는 최남단 도시 사람들로 들썩거렸다. 배로 기차로 내려온 마지막 거처지이다. 깡깡 추운 겨울 중공군이 물밀듯이 들이닥치자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할 때 퇴로가 막혀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사방에서 꽹과리와 북, 장구, 피리를 불며 엄청나게 많은 군사인 양 옥죄어왔다. 미 10군단 소속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 제3사단 3만여 명과 국군 1군단, 영국군 일부 10만여 명이다. 자고 나면 동사자가 생기는 등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퇴로를 찾아야 했다.
여기에 수십만 명 북한 동포도 따라나섰다. 흥남철수작전은 각종 함선 132척이 동원되어 보름간이나 이뤄졌다. 목적지는 부산과 마산, 거제, 울산, 포항, 울진, 묵호 등이었다. 마지막 배는 메러디스와 빅토리아 화물선으로 7,600톤이다. 전쟁 군수 물자를 실으러 왔다가 모두 내버리고 수만 명이 오글보글 사나흘을 굶주리면서 남녘으로 내려온 피난민 선이다. 서울역과 수원역 마지막 기차에는 개미 떼처럼 매달려 종착지 부산으로 밀려든 행렬이다.
언론인 김홍삼은 당시 흥남 부두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군 상륙함정이 부두에 닿아 그물망을 내렸다. 피란민이 서로 먼저 타려고 죽기 살기로 몰려들었다. 밟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물에 매달려 기어오르다 떨어져 죽은 사람이 즐비했다. 주인 잃은 피란 보따리가 산처럼 쌓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을 에는 혹한의 연속이었다. 부두를 빠져나간 배가 다시 돌아오려면 며칠씩 걸렸다. 얼어 죽은 시신이 매일 밤 수없이 버려졌다.”
이틀 밤낮을 달려온 배는 부산항에 닿았지만 많은 피난민으로 북적여서 거제도 장승포항에 내렸다. 콩나물시루와 같은 피란민으로 지극히 위험했다. 쓰레기와 배설한 오물로 그득했다니 가관이다. 그런 수송선 내에선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 항해 중에 배 안에서 모두 다섯 명의 아이가 태어나 김치1, 2, 3--으로 명명했다. 이는 크리스마스 기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집집이 방과 마당을 내줘도 거처지가 모자라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디. 사십 계단 층층대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갈 곳이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다. 부산역 맞은편 언덕바지에다 지푸라기를 깔고 덮고 잤다. 초량과 영주동, 중앙동까지 산기슭은 온통 천막과 판자, 거적때기로 가득 찼다. 밤낮 북새통이다. 사는 게 아옹다옹 또 다른 전쟁이다.
이곳에 그만 불이 나 전소하고 말았다. 하나 건질 것 없이 황량한 땅으로 변해버렸다. 전쟁통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이승만에겐 근심 걱정이 늘었다. 오글보글 복작거리며 살기 힘든 임시 수도 부산 바닥에 또 다른 난리가 생겼다. 수만 명이 길거리에 나 앉아야 했다. 당장 먹을 것 입을 옷에다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리차드 위트컴’이다. 한국 참전 미군 장성으로 군수사령관이다. 황망한 표정의 고뇌에 찬 이승만 얼굴을 보고 돕겠다 맘먹었다. 군법을 어기면서 군수창고를 헐어 담요와 군복, 천막, 먹을 것을 나눠 줬다. 이 일로 장군은 연방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해 오래도록 박수로 답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 군수기지를 이승만에게 돌려주면서 그 자리에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했다. 부산대학교이다. 귀국하지 않고 계속 남아서 도왔던 판자촌 언덕 자리에 메리놀병원을 지어 어렵고 헐벗은 사람들을 치료했다. 병원을 세울 때 힘들어서 갓에 도포를 걸치고 기부문화를 장려하고 조성하기에 애쓴 그이다. 장군이었는데 체신 없는 일이라 말해도 개의치 않았다.
당시 고아원을 하는 한묘숙 여사와 결혼해서 그들을 돌봐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렸다. 장진호 미군 유해를 찾아달라는 유언에 따라 아내 한묘숙은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길쭉길쭉한 유해만 나오면 가져왔다. 300불씩 꼬박꼬박 지급하면서 유해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하와이를 통해 되돌려받은 국군도 있었다. 장군의 재산과 연금은 모두 이렇게 쓰였다.
부산 유엔공원묘원에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이다. 아내와 함께 합장되었다. 죽어 40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나마 70여 년 전 불타버린 판자촌 후손 수만 명이 모여 장군의 조형물을 만들고자 헌금하는 데 모두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정부에서도 장군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는 소식이다.
16개 참전 유엔군 중 터키군도 잊을 수 없다. 부모 잃고 팽개쳐진 아이를 보살핀 군인의 얘기가 눈길을 끈다.
인민군이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쳤다. 전차가 짓밟은 뒤 폐허가 됐다. 달 밝은 밤 이곳을 정찰하던 터키 병사들이 동물 소리 응응거림을 듣고 적인가 경계하며 살폈다. 시월 말 으스스한 곳에 춥고 허기져 기진해 쓰러질 듯이 앉아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슐레이만 하사가 안고 어찌할 수 없이 부대로 데려간다.
마을 사람과 부모가 죽어 나뒹구는 시신 더미 속에서 멍하니 말 못하고 찡찡거리기만 하는 어린이였다. 탕탕탕 마구 총을 쏘며 죽이고 불태웠다. 갑자기 참혹한 마을로 변하면서 쑥대밭을 만들고 지나갔다. 아직 타고 있는 매캐한 연기 속에 엄마 아빠를 부르다 지쳐 말 못하는 둥근 얼굴의 아일라(ayla)이다. 달처럼 예뻐서 지어진 터키 이름이다.
부대 안에 이리저리 다니며 철없이 구는 여자 아일라로 전장 병사들의 즐거운 웃음거리였다. 아이는 비타민 같아 사랑을 듬뿍 받는다. 목을 덮는 텁수룩한 머리를 깎이고 모포를 잘라 헐렁한 옷을 만들어 입혔다. 슐레이만이 한참 훈련 중일 때도 졸졸 뒤 따라다닌다. 하나. 둘 번호를 외치면 옆에서 같이 한다. 앞으로 갓. 차렷. 하면 곧잘 그대로 흉내 낸다.
말문이 트여 ‘바바’라며 슐레이만을 아빠라고 부른다. 어디든 응애처럼 붙어 지내며 눈길을 매달고 사니 바쁜 전쟁 통에 성가시다. 그런 가운데에도 정성을 다하는 슐레이만이 한없게 돋보인다. 어찌 그리할 수 있을까. 거치적거리는 아일라를 대하는 그의 그윽한 눈매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내무반 구석에 자리를 만들어 잘 자라 안아 눕혀주면 자다가 저쪽 슐레이만 침대로 가 옆에 꼬꾸라져 잔다.
우유를 구해다 먹이면 발칵발칵 넘기고 한국 사람이 없어 터키 말을 하나하나 가르치면 그대로 외워 곧잘 하는 아일라이다. 부대 전선 이동으로 산 고개를 넘어가는데 시동이 꺼진 차량을 고치다가 그만 적군의 기습을 받는다.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도 아일라를 차 밑으로 밀쳐 넣고 숲속 중공군을 향해 필사의 반격을 가한다.
옷을 기워주고 머리를 깎아주며 목욕시켰다. 우유와 먹을 것을 구해주고 시간 날 때마다 찾아와 싱겁게 허드레 몸짓으로 웃겨주던 터키군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풀죽은 색 카키 옷을 입은 적군이 좌우 산기슭에서 막 내려온다. 총탄 소리에 놀라 앞서가던 부대가 급히 뒤돌아와 엄호사격을 해준다.
그 가운데 오직 아일라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싸우는 슐레이만이다. 한국 정부에서 훈장을 주고 특별휴가를 받아 일본 동경으로 갔을 때 아일라도 데려간다. 맛있는 음식과 볼거리, 장난감을 안고 부대로 돌아온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교체부대가 도착해서 교대해야만 한다. 공습으로 부대가 난장판이 되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인데 아일라를 버려두고 어디 갈 수 없었다. 몇 달을 더 보듬었는데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수원에 있는 앙카라 보육원에 맡기고 떠난다. 어느새 뒤쫓아와 ‘아빠!’ 한다. 가다 말고 길거리에서 한참이나 보듬었다. 큰 가방에 넣어 몰래 가다가 공항 검색에서 그만 발각되어 이내 들통이 나고 만다. 느닷없는 세월은 흘러 60년이 지났다. 눈에 삼삼하고 ‘바바’하는 말이 귀에 쟁쟁하다. 다 살기 바빠 생각뿐이었다. 늙어만 가는 슐레이만은 ‘꼭 찾아올 게 그땐 우리 헤어지지 말자.’ 한 약속을 죽기 전에 지키고 싶었다. 아내와 함께 외교부와 알릴 수 있는 곳을 통해 여러 차례 수소문했다. 돌아오는 답신은 이름이 바뀌어 아일라를 찾을 수 없단다.
지구 반 바퀴나 돌아가야 하는 저편 한국은 무려 8천 킬로의 머나먼 나라다. 한국 지형에 맞게 훈련한 4,500명이 커다란 미국 군함으로 한 달이나 걸려 부산항에 닿았다. 어찌 그리 쉽게 가지겠나.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 문화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찾게 되었다. 그들의 주선으로 한국에 오게 됐고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앙카라공원에서 극적인 만남을 갖는다.
팔순이고 육순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재회하는 날이다. 그윽한 눈매로 일 년 넘게 아일라를 안고 보살폈던 이제 백발이 다된 슐레이만이다. 저쯤 다 큰 아들딸 셋을 데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김은자 아일라를 단번에 알아보곤 달려간다. 안고 쓰다듬길 오래 한다. 남편이 일찍 세상 떠나 아이 키우느라 행상에서 청소부까지 팍팍한 삶을 산 아일라이다. 남루하고 꺼칠한 얼굴이 말해 주었다.
2002년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이 태극기와 초승달에 별이 그려진 터키 국기를 흔들며 함께 ‘이겨라. 이겨라.’ 소리 소리친 것이 엊그제만 같다. ‘형제의 나라’라 불렸는데 이제 그 말을 이해하게 됐다. 한국전쟁 때 참전 연인원 일만오 천명이 미국 다음으로 서둘러 와서 인민 공산군과 중공군을 막아주었다.
7백여 명이 사망하고 2천 명 넘게 다쳤다. 행방불명과 포로로 잡힌 인원 또한 4백 명이 넘는다. 미군 사단 예하 연대 소속으로 아까운 젊은이가 그리도 많이 전사했다. 유엔에서 한국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해준다. 유럽을 잇는 해협의 교량과 온갖 토목공사를 발주해 주고 제품을 구매하는 피를 나눈 정말 형제의 나라이다.
‘잔 울카이’ 감독의 ‘아일라’ 영화는 터키에서 500만 관객을 동원하여 일약 흥행으로 올라섰다. 이듬해 2018년 한국에서는 5만 명 관객이다. 개봉관 확보가 어려웠고 홍보 부족이었다.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다. 어찌 허망하게 흘러갔나. 감쪽같이 지나쳤다. 이리 좋은 영화를 쥐도 새도 몰랐을까.
뒤늦게 유튜브를 통해 봤다. 아내는 아역 ‘김설’ 아일라의 늙은 모습에 훌쩍훌쩍 눈물을 훔쳤다. 수렁에서 딸 아이를 건져내 거둬준 슐레이만이다. ‘영광의 앙카라’를 부르던 수원 ‘앙카라보육원’이자 학교는 없어졌다. 터키 유엔군을 기리는 앙카라공원만이 덩그렇게 남았다.
토성동 임시수도관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결재하러 온 편수국 최현배에게
“내 이름은 리승만인데 왜 자꾸 이승만으로 쓰시오.”
라는 언성 높은 말에
“각하, 두음법칙으로 사용하면 발음하기 편합니다.”
하자
“성경대로 쓰시오.”
느닷없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 일로 고심을 거듭하던 편수국장은 전란 중에 이승만 대통령을 보좌해야 함에도 꼿꼿한 성정을 억누르지 못해 사직서를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냈다. 뒤이어 장관도 자리를 털고 나온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이 잘 풀어지지 않아 가까운 사람에게 역정을 낸 것이 큰 사달로 번졌다.
이승만은 백악관에서 회담하다가도 트루먼 대통령을 향해서
“이런 고약한 사람이 있느냐.”
면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낼 때도 있었다. 이런 수모를 받아 가면서 한국을 도와준 사람이 트루먼 대통령이다. 그는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도와줬다. 첫째는 한국전쟁에 파병한 것이다. 잠자리에 들려다 북한군 남침 보고가 들어왔다. 대부분 정치인은 계산부터 하게 된다. 이 전쟁이 본인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관해 생각하게 마련이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미군 참전을 결정했다. 용기 있는 결정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그 순간을 위해서 하나님은 기차 검표원과 작은 상점을 한 시골 출신 고졸의 트루먼을 대통령으로 세우셨다. 얄타회담 직후 뇌출혈로 돌연 병사한 루스벨트 뒤를 이어 부통령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올랐다. 대단한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고 처리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은 뒤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생각해 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재선이 어렵게 보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박빙의 차이로 당선되자 다시 대통령의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버드와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꿈을 꿨다. 시골 가난한 생활로 모두 이루지 못하자 맥아더와 이승만을 부러워했다. 특히 하버드를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 대통령이다. 돕겠단 마음을 먹은 것으로 짐작된다. 맥아더와 같이 굉장히 올곧고 오만한 성격이다. 망해가는 나라를 건졌음에도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확전을 피해 사관학교 수석 졸업의 부러웠던 맥아더는 해임했어도, 한국과 이승만은 어찌해 볼 수 없었다. 국무장관 애치슨이 방위선을 내려 제외한 나라인데 한번 발을 걸치자 뺄 수 없이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두 번째는 철수론이 강했다. 조셉 케네디도 공개적으로 한국을 포기하라고 말했다. 명문가 출신에 정치 감각이 뛰어난 자들은 모두 한국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요구를 거절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영국 에틀리 수상은 한국에 배치된 병력을 유럽으로 철수시키라 제안했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이다.”
오히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며 한국에 쏟아부었다. 국방예산을 올리고 중국군과 맞서 싸웠다.
“우리가 한국을 버린다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고마운 트루먼의 생각이다.
“우리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철수를 거절하고 비상하에 많은 전비를 들이부으면서 의리있게 행동했다. 수십만 명의 귀한 미군 희생자를 내고 전쟁은 멈췄다. 당시 트루먼은 한국전에 막대한 물자와 군인을 투입한 것에 대해 대내외적으로 거친 비판을 받았다. 오늘날의 한국은 고마운 미국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트루먼을 잊을 수 없다.”
전쟁 중이던 1951년 대통령 임기를 1년여 앞두고 피난 수도 부산에서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뽑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국회의 판도로 볼 때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11월 국민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3일 뒤에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부결되고 말았다. 이듬해 4월 의원들이 내각 개헌안을 냈다. 이승만은 이를 막기 위해 부산에도 계엄을 선포했다. 헌병대를 동원해 국회의원 10여 명을 감옥에 가뒀다. 이 박사는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두 가지만을 발췌한 안을 갖고 해산하겠다고 협박해 통과시켰다.
기립 투표로 진행된 결과는 출석의원 166명 중 163명이 찬성했다. 기권이 3표였다. 정치 파동에 동원된 경찰과 깡패 등이 조성한 공포 분위기였다. 1952년 8월 5일 2대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이 당선됐다. 재선되자 헌법의 3선 금지 조항을 없애고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1954년 5월 20일에 실시한 민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원 수를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경찰의 물리력을 동원해 야당 후보의 등록과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이로써 자유당은 무소속 의원 23명을 영입해 개헌에 필요한 136명을 넘겼다. 자유당은 그해 9월 중임제한 철폐 개헌안을 제출했다.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 자동 승계와 국무총리제 폐지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승만은 개헌안을 내놓으며 개헌 반대자들을 반역 행위자로 간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개헌안은 11월 20일 본회의에 상정되고 27일 비밀투표에 붙여졌다. 표결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에 재석의원 202명,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의결 정족수 136명에 1명 모자라는 결과로 나와 부결로 선언됐다. 이틀 뒤 최순주 부의장은 재적의원 203명에서 의결 정족수 3분의 2는 사사오입에 따라 135명이지 136명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놓으며 결과를 뒤집었다. 당일 정부는 개정 헌법을 공포했다.
1956년 81세 때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확정했다.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을 확정했다. 민주당과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다. 5월 6일 최종 합의 직전 신익희 후보가 열차에서 급서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단일화는 무산됐다.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504만여 표로 52% 지지 속에 승리했다. 조봉암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지만 216만여 표를 획득하여 이승만의 정적으로 떠올랐다. 부통령에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제치고 장면이 당선됐다. 조봉암은 대선 직후 창당작업에 들어가 11월 11일 대회를 열었다. 진보당은 1958년 5월 실시될 국회의원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20석 이상 확보를 목표로 했다.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올라가자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해 진보당 간부 전원을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검찰은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적용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재심 청구는 기각되고 사형당했다. 이에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정적 제거를 위해 사법살인을 벌였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50년이 지난 뒤 2011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2년 뒤 85세 때인 3월에 4대 정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지병으로 쓰러져 어이없게 사망한다. 이승만은 저절로 당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상 부통령을 뽑는 3.15 선거에서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 후보 이기붕의 재대결이 벌어졌다.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 반공청년단, 정치 깡패 등을 동원해 민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자유당은 투표함을 열기도 전에 경찰과 내무부가 연합하여 투표 결과를 조작한 결과 이승만은 963만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기붕은 833만 표를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 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 직후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선거 무효를 주장했고, 부정선거에 대한 격렬한 국민 저항이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4월 11일 마산 앞 바다에서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박혔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확대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공산 분자들이 시위대를 조종하고 있다.”
고 매도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더욱 무력으로 진압하고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이 대학교에 난입하여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19일 서울의 시민과 대학생, 고등학생 10만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실탄을 발포해 100여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다급한 이승만은 내각 총사퇴를 지시하고 이기붕의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자신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그대로 경무대에 남아있자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학교수 258명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거리 행진에 나섰다. 이래저래 버텨봤지만 소용없자 결국 이승만은 26일 사임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낯선 땅 조그만 나라 한국을 돕기 위해 수만 명의 아까운 미군 전사자와 수십만 명의 부상자를 내고 막대한 전비를 들였다. 유엔군과 병원선, 보급선을 보낸 수십 개 국가의 비용이 모두 미국민의 귀한 달러이다. 중국 광활한 공산화 물결에 밀려 방위선을 아래로 내렸던 나라이다. 아시아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나라 전쟁에 지친 미국 국민이다. 의회에서도 비난이 일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기약 없고 가망 없는 전쟁에 싫증이 났다. 아이젠하워도 대선 공약으로 한국전 휴전을 내걸었다.
눈치챈 이승만이 노발대발한다. 현 전선에서 전쟁을 멈추고 싶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남한 수백 배 크기의 소련과 중국, 호시탐탐 적화를 노리는 머리맡 북한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 뾰족한 수가 있기나 하나. 영락없이 공산화되고 만다. 그를 막을 힘이 우리에겐 없다 없고말고. 잘 도왔던 우방국이 이대로 두고 떠나면 우린 어쩌나 낭패다 이럴 수 있나.
얌전하지 않았다. 도와준 것에 고마워하는 마음도 없어 보인다. 호락호락하거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휴전에 걸림돌이 되는 이승만에게 화난 미국이다. 감사하기는커녕 배은망덕한 게 아닌가. 제거해야겠다 맘먹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에겐 자살할 권리가 있다.”
이승만의 절박한 외침이다. 싸우다 죽겠다는 말이다. 그럴수록 더 거칠게 엇나간다. 헌병부대에 명령하여 여러 곳 거제와 부산, 창원, 대구 등 반공포로수용소 3만여 명 중 대부분을 풀어주어 탈출하게 한 일이다. 철조망을 끊어놓고 땅굴을 파놓아 그리로 도망가게 안내했다. 심하게 저항하는 미군에겐 얼굴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려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우선 급한 대로 마을 민가에 숨을 수 있도록 미리 도움을 취해뒀다. 군인이 부족했던가 아직 앳된 어린 소년병도 있었다. 무서운 승냥이 미군과 남한군이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김일성에게 발갛게 속은 것이다. 부모 형제가 있는 북한 땅으로 가지 않겠다며 남한에 살겠다고 한 반공포로이다. 어찌 됐든 애초에 적군으로 내려왔다는 이유에서다. 제네바협정에 따라 무더기로 교환하려는 데에 분노한 이승만이다.
그들을 모아놓고 앞에 선 78세의 이승만은
“이제 너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야.”
세계가 다 놀랐다. 중국은 크게 화를 내며 그냥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전쟁 막바지에 주고받는 포로 교환이 더뎌지고 있다. 아니 중단되고 말았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적을 만났다.”
분노로 외쳤다.
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1953년 6월 이 박사는 미국 대사 브릭스와의 회동에서도 휴전 후에도 한국을 지켜줄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립주의로 흘러가던 미국은 이 말에 부정적이었다. 당장 발을 빼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미국이다. 장관을 보내 협상을 요청했다. 이승만을 달래 봐야지 그냥 뒀다간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무서운 사림이다.
다시 되돌려 말을 바꾸고 한국을 돕겠다 나섰다. 로버트슨 국무부 특사단을 보냈다. 보름 넘도록 긴 협상을 이어 나갔다. 전후 복구와 경제 지원에다 당시 8억 달러 커다란 지원을 약속받았다. 가장 중요한 건 1953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미군 2개 전투사단을 주둔시켜 서부전선에 배치함으로써 인계철선 역할을 하도록 했다. 거기다 한국군 20개 사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군사원조를 하기로 했다.
혈맹으로 맺어졌다.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명한 이 조약으로 2020년대 70년 동안 북한이 함부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남한만의 평온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날 동문수학했던 정계와 학계의 친구 도움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이다. 미국의 초청까지 받았다. 79세의 고령에도 꼬장꼬장하게 미국 땅을 밟았다.
뉴욕 중심거리를 매운 수많은 환영인파와 카퍼레이드, 웅장한 음악, 높은 건물에서 쏟아져 내리는 오색 풍선과 형형색색 날림이 휘황찬란하다. 전현직 대통령의 극진한 예우로 일약 등극의 길이 파격이다. 다른 나라 정상도 이랬을까 싶다.
국회 연설이다.
“존경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님, 각부 장관님, 의원 여러분, 각계 인사와 위대한 미국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어 특별히
“전국의 어머님, 먼 나라 한국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귀한 자식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엔 눈시울이 붉어진다. 모두가 일어나 열렬히 힘찬 박수로 맞이했다. 미군 주둔의 중요성을 강조한 연설에 수십 번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유수의 대학을 거쳐 국제 정치 석학으로, 보기 드물게 위대한 세계적인 대통령을 만나는 날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정치인의 진실이 뚝뚝 떨어지는 말에 목메었을 것이다.
미군은 1950년 7월 1일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후 3년 1개월간 전쟁을 치렀다. 17만 명이 희생됐다. 8천여 명의 실종자와 7천여 명의 포로, 거기다 평생 힘들게 살아야 하는 10만여 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전사자가 5만 명이 넘으니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감동을 넘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장군의 아들이 참전한 일이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아버지가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시신을 운구한 아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벤플리트 장군의 아들 지니 벤플리트도 조종사로 전폭기를 몰고 평안남도 순천에서 야간 출격 중 대공포에 맞아 전사한다. 미 해병 1 항공 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의 아들 윌리엄 해리스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때 장진호 전투에서 죽음을 맞았다.
미 중앙정보국 알렌데라스 국장의 아들 데라스 2세도 해병 중위로 참전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평생 상이용사로 살아간다. 미 극동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육군 대장의 아들도 부상이다. 의회 의원의 가족이 참전해 훈장을 받았는데 그 사상자도 1백 명이 넘는다. 1차 대전보다 많은 수였다니 한국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말함이다.
그뿐이 아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한국전쟁 발발 시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갓 임관한 꽃다운 신임 소위 110명이 참전해서 절반 가까이나 전사했으니 가엾으며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위험하고 어지러운 한국전쟁 현장을 찾았다. 갓 당선되어서이다. 위험한 최전선 여러 곳을 마다하지 않고 둘러보았다. 미 제8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령관이자 막역한 후배인 밴 플리트로부터 전선 현황에 대해 보고 받았다. 조용히 다 들은 뒤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장군, 내 아들 존은 지금 어디에 근무하고 있습니까.”
첫째 아들이 어려서 병사한 뒤 외아들 격인 둘째가 한국전에 참전했다. 지극히 사적인 질문에 당황이 되어 망설이다가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미 제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현재 중부 전선의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다음 말을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빼주시겠습니까.”
이는 바로 얼마 전에 외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가 듣기에 몹시 거북한 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탁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젠하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군,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포로가 된다면 적들은 미국과 흥정하려 들겠지만 결단코 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국민이 고초를 겪는 대통령 아들의 모습을 보고 이것은 미국의 자존심 문제이니 즉시 구출 작전을 펼치라고 한다면 장군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단지 내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작전에 차질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장군은
“각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대통령의 아들이 이 나라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런 나라가 미국이다. 이 많은 빚을 갚을 날이 오기나 하려나.
주둔군이 공격받으면 의회의 동의 없이 바로 반격을 할 수 있다. 육해공군 주둔 미군을 전국 곳곳에 두었다. 특히 전방 주요 길목에 전투사단을 배치했다. 모든 분야에 미국의 지원으로 경제성장과 공업 기술을 발전시켜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내용도 들었다. 전쟁 나면 그때 서둘러 참전하는 게 아니라 평상시에도 계속 전선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위조약의 나라다.
세계에서 놀랍게 민주정치와 경제, 공업, 교육, 기독교가 발전한 한국이다. 군사력도 뛰어나다. 우리가 만든 휴대전화가 온 세상을 누빈다. 오대양을 떠다니는 대형 배들의 상당수가 우리 조선소에서 만든 것이다. 현대와 기아, 삼성, 쌍룡에서 만든 자동차가 각 나라 간선도로와 골목을 누비고 굴러다닌다. 첨단 기술인 반도체가 모든 분야 온 시장을 휩쓸고 있다.
한국형 원자력발전기를 만들어 전력을 생산하는가 하면 수출길에도 나섰다. 나로도 우주 발사장에선 인공위성을 올려 변화무상한 기상을 관측해 대처하고 군사 정찰로 동태를 살피는 데 유익하다. 우리 손으로 만든 고속철과 지하철이 전국을 달린다. 미제니 일본 제품 하던 게 사라진 지 오래다. 고급 의료와 각종 화학 제품, 건축 장비, 교량, 터널, 대형 차량, 의류와 전자 물품, 주방기기 생활용품을 막 만들어낸다. 못 만드는 게 없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투기와 전차, 자주포, 대공 미사일 등 군사 무기가 동남아와 중동에서 그 성능을 인정받았다. 이어 유럽에도 대량 판매가 이뤄지니 어찌 된 일인가 얼떨떨하다. 공업과 방위산업 선진국이 대량 구매를 할 수 있는가. 최신형 전투기와 군함, 잠수함 등 생산도 이뤄져 양산에 들어갔다. 대형 지대공 미사일과 방어 장비도 개발했다니 이승만을 도우려는 애당초 미국의 눈부신 협력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 모두 미국의 자금과 기술 지원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지나치거나 허투루 말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과 한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다. 유학 시절 사귄 친구들의 덕택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의 인격이 이리 위대할 수 있을까. 조그마한 나라 대통령의 말을 누가 믿고 따라 주겠는가. 그것도 잠시지 이리 긴 세월 동안 상호방위조약과 경제 지원을 아끼지 않을까이다. 헌신짝처럼 버리고 팽개치는 세상인심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굳건한 한미 동맹 이후 오늘까지 큰 외세 침략은 한 건도 없었다. 푸에블로호 납치사건과 판문점 도끼 만행, 연평도 포격, 무장 간첩의 청와대 기습에 이어 강릉 침투 등 소규모가 있었다. 5천 년 역사에 9백여 차례나 전쟁에 휘말려 쑥대밭이 됐다. 5년 주기로 이어졌으니 한 많은 민족이다. 봄에 풀이 돋듯 소생해서 살아온 가엾은 역사이고 그 민족이다.
미국 도움 이전만 해도 많은 평양 시민이 중국 일본 저들끼리의 청일전쟁으로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러일전쟁과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우리 국민을 얼마나 괴롭혔나. 36년간 일베 치하에서 겨우 숨 쉬고 눈치 보며 산 세월이 기막히다. 태평양 전쟁에 이모저모로 끌려간 사람이 수백만으로 놀라운 숫자이다. 당시 2,500만 명 중 700만 명이라니 나라 잃은 것이 이다지도 슬픈 역사인가. 부산에 있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보라. 거기다 한국전쟁은 기가 막힌다. 같은 민족끼리 치고받아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평생 장애우가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김활란 여사가
“이승만은 워싱턴과 제퍼슨, 링컨을 합친 인물이다.”
이 나라의 건국 대통령이 아니라 세계적인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높이 높이 치켜세웠다.
휴전으로 일단 물러가 있는 것이다.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면 유엔 상임이사회의 허가 없이도 유엔군이 그대로 들어와 적과 대치해 물리친다. 전선 곳곳에 유엔 감시초소가 있다. 지난날처럼 북침이다. 남침이다. 말할 수 없다. 남한 전역으로 날아갈 수 있는 다연장 포탄을 쏘며 연습 사격을 벌이고 있다. 미주까지 갈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고 각도로 발사하며 연일 핵폭탄 위협이지만 녹록지 않다.
우리의 군사력도 뛰어나다. 세계에서 열 손가라 안에 들어간다. 전쟁 발발로 이어지면 북한 전역의 군부대 수십여 곳이 일시에 남한 현무 미사일의 정밀 포격을 받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가공하리만치 무서운 10톤 가까운 폭탄이다. 일찍이 우수한 공군력으로 제공권을 장악해 초토화되어 정권 종말을 맞을 수 있다. 미국과 남한을 겨냥한 핵폭탄도 으름장이지 실전 사용은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지난날 남한 내 끈질긴 빨치산과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승만에 의해 분쇄된 좌파 활동이 지금도 문제다. 적군만치나 무섭게 설쳐대고 있음을 본다. 이념 갈등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민주주의 근간을 많이 흔들어놨다. 호시탐탐 예전의 공산화된 월남 베트콩 공작처럼 적화통일을 위해 안달이다.
날만 새면 국민의 피로도를 높여주는 평화협정, 종전협정, 미군 철수 등 흑백 정치 선전으로 해가 뜨고 진다. 그래야만 유엔군이 해체되고 미군이 철수하게 되며 적화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충청도 양반 고장의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를 거쳐 온갖 변장으로 서울에 잠입해서 남한 공산화를 꾀했다. 위폐까지 만들어 전국적 남로당 조직을 완성하려다 들통났다. 관속에 들어가 시체로 위장해서 북으로 넘어갔다. 연암파 김두봉,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소련파 허가이와 함께 갑산파 김일성 수상을 보좌하는 부수상이 됐다.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활동하다가 평양에 들어갔다. 그런 혁명 동지를 얼싸안고 맞아들였다가 뒤이어 사정없이 후려쳤다. 수정공산주의자란 이름으로 파란만장한 공산 혁명가들을 하나하나 숙청해 나갔다. 인민군이 내려가면 남로당이 벌떼처럼 지지해 적화에 성공할 것이라 했는데 실패한 것을 들이댔다. 첩자란 죄명을 씌워 전원회의 석상에서 바로 체포해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남로당원들을 속결 재판으로 처리했다.
박헌영만은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녀 공산 이론에 밝았다. 크렘린 지지의 그에겐 신중해야 했다. 어찌할 수 없어 신의주 아래 철산교도소로 옮겨 독방에 감금됐다. 여러 해 동안 남조선과 미제 간첩 혐의 인정을 강요받았다. 지난날 감옥에 있을 때 인분을 먹고 미친 행동을 하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수염을 달았다 뗐다 교묘한 위장으로 알아볼 수 없다. 모진 고문을 이겨낸 지독한 그였는데 견딜 수 없어 결국 응하게 되고 곧바로 이마에 권총 두 발을 맞아 생을 마쳤다.
월맹이 베트남을 접수했을 때도 공산화에 앞장섰던 베트콩을 먼저 처형해 나갔다. 아류를 용서하지 않는 공산국가이다. 다 같은 붉은 것이 아니다. 속까지 붉어야 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사과는 속이 희다. 포도는 푸르다. 토마토처럼 안팎이 새빨개야만 한다. 옆의 캄보디아 총리 폴포트도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이름났다. 그때 죽은 사람의 머리뼈가 몸서리치게 무더기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죽여 머리를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인간을 덧없이 죽이는 이게 어디 사는 곳인가. 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다.
이다지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든 이승만은 73세에 초대 대통령에 올라 2대, 3대를 이으면서 십여 년 이 나라 건국을 다져 나갔다. 그러다 4.19 학생혁명을 맞았다. 시위가 광화문을 시끄럽게 해도 즐거운 일이라 둘러댔다. 얼마 뒤 경찰의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김을 알게 되자 병원을 찾아갔다. 다친 학생을 안고
“내가 맞아야 하는데 그대들이 다쳤다.”
며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니 나는 성공한 것이다.”
란 말을 남겼다. 바로 직위를 내려놓고 이화장으로 옮겼다. 며칠 뒤 독립운동하던 고향 같은 곳에서 얼마간 쉬려 하와이로 떠났다. 그때 나이 85세이다. 자택으로 갈 때와 출국할 때 연변의 수많은 국민이 그를 맞이했고 환송했다.
2공화국 민주당 장면 정권이 이어받았다. 다시 어수선한 나라를 군인이 들고일어나 다잡아나갔다. 5.16쿠데타가 발발했다. 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의 혁명 군인들이 문민정부를 밀어내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반만년 가난에 허덕이던 삶을 잘 사는 국가로 세워보겠다며 공약과 함께 새마을 정신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승만의 각별한 도움을 받았던 장본인이다.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9연대가 나섰지만 어려움을 겪자, 여수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여순반란으로 번졌다. 출동은커녕 시내와 순천까지 관공서와 지주, 기업인에다 민간 살상까지 벌어져 삽시간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이들을 진압하면서 군부대의 좌익 색출에 나섰다.
군 장교와 하사관들 다수가 연루됐는데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 총책임이 드러났다.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구형받았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한국 육군사관학교 2기 졸업을 우수하게 마친 뛰어난 장교이다. 그를 아깝게 여긴 이승만이 백선엽 대령의 사면 권고를 받아들였다. 남로당 군사 조직도를 제출해 공작을 무너뜨리는데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현역에서 예편되어 육군본부 작전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했다. 6.25 전쟁이 나자 다시 소령으로 복직시켰다. 곧 중령으로 올라가고 이내 대령으로 진급했다. 전쟁 때 군에서 중요한 포병 장교를 하다가 장군 반열인 준장에 오른다. 좌익 전력이 있는 그에게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승만은 계속 밀어붙이고 일으켜 세워줬다.
미국 오클라호마 유학의 길도 터 줬다. 인사차 경무대를 찾아온 박정희에게 여비를 손에 쥐여주며
“미국 선진문화를 배워오라.”
일렀다.
보병 5사단장 때 많은 눈으로 내무반이 무너져내렸다. 이때 수십 명의 젊은 군인이 눈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처참하게 압사당했다. 정일권 참모총장이 전역 신청서를 갖고 와 재가를 기다렸다.
“이 일이 인재요, 천재요.”
이승만 대통령의 물음에
“천재입니다.”
총장의 대답이다.
“그러면 용서해 주시오.”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박정희는 사단장에서 물러나 쉴 겸 육군대학교에 들어가 군작전과 지휘 통솔 교육을 연수하다가 졸업했다. 다시 드높은 소장 진급 물망에 올랐다. 어려울 때마다 이승만이 도와주곤 했다. 거리낌 없는 군 가도를 달리는 박정희다. 소장으로 오르자 6관구 사령관에서 2군 부사령관직을 부여받아 혁명을 일으켰다.
자리 잡은 문민 정권을 총칼로 불의하게 밀쳐냈다. 언제나 정권을 넘겨주겠다는 혁명 공약을 지키지 못한 채 스스로 가로챘지만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농업과 중화학공업 국가를 만들었다. 그가 지은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
새마을 노래는 협동과 새 희망의 노래로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과 같이 이승만이 만들어놓은 대한민국 민주국가 위에 번영을 가져온 박정희 대통령의 커다란 업적이다. 범인이 아닌 하나님이 내려준 사람이다. 사형에서 사고로 여러 번 사라지고 잊어버릴 그였다. 그때마다 은혜의 손길이 이어져 살려낸 것이다.
이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
교민회장의 안내로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가르쳤던 수많은 학생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다 커서 어른이 되었으며 섬을 주름잡고 있다. 파란 눈의 프란체스카 부인과 함께 양아들 이인수 내외가 정성껏 보살펴 드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는데 이렇게나 보잘것없을까이다. 세상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독립투사였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나. 집도 절도 없고 이웃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엾은 신세이다.
동포들 옆에서 곁방살이하다 귀국하려 하와이 공항에 이르렀을 때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불허의 소식을 듣게 된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뒤돌아서던 이승만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걷지 못한 채 휠체어에 몸을 담아야 했다. 그렇게 원기를 되돌리지 못하고 태평양 가운데 섬에 살다가 5년 뒤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잃은 듯 하와이 교민도 울고 화장한 시신 운구가 김포 가도에 들어설 때 인산인해의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고단했던 몸을 동작동 묘지에 뉘었다.
그는 아내와 아침저녁 기도하면서 나라 발전과 국민 행복을 빌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늘 암송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며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맨날 그 많은 연설문과 투고 기사 원고를 말없이 모두 타이핑 해 댔다. 수고하는 아내를 시원한 워싱턴 포토맥강 언덕으로 데려가 어깨를 두드리고 주물러주는 남편 이승만이다. 그때 불러주던 다정한 노래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오다가다 만난 임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독립투사로 드넓은 미국 전역과 유럽, 상해, 모스크바를 뛰어다녔다. 남북통일을 위해 2백여 회 위험한 전선을 일일이 돌아보았던 이승만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는 것 같다. 사람을 곧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다.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 먹는다.
독립운동가로 밤낮없이 미국 땅을 누비고 다녔다. 강연 시간이나 방송, 신문기자와의 약속 시간에 대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태풍처럼 질주했다.”
고 25세 아래인 아내 프란체스카는 말한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남편은 포토맥강과 호수에서 낚시를 즐길 때 서울 한강 광나루 낚시터 얘길 들려주곤 했다. 도라지타령을 흥얼거리며 가르쳐 주기도 한다. 남궁억이 지은 찬송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곧잘 불렀다. 젊을 때부터 장작을 잘 팼다. 항일이나 대북 일이 안 풀려서 울분이 쌓일 때로 보인다.
맨손체조를 하고 정구를 쳤다. 나무와 꽃을 가꾸는 솜씨도 뛰어나다며 얘길 이어가던 오다가다 만난 검소한 영부인도 이 박사 곁에 고이 잠들었다.
건국 때처럼 좌익의 설침이 무섭게 넘실댄다. 공산주의는 굶주리다 반드시 패망한다는 신념의 이승만이다. ‘건국 전쟁’의 필름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우남 그를 생각하게 하고 이 나라를 수렁에서 건져냄에 감사한다. 수십 명 시사평론가의 말씀이 쟁쟁하다. 훌쩍훌쩍 우는 사람들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자막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면서 마치자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공산당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농지개혁과 교육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반상이 사라졌으며 남녀가 동등해졌다. 더벅머리 상투와 패랭이, 짚신, 미투리도 없어지고 말았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을 가라앉히고 10여 년 동안 지루한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 5천여 명의 간첩을 색출해냈다. 수십만 명의 남로당을 숙청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원자력 협력으로 뒷날 발전소와 의료활동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한 사람의 노력이 이다지도 대단할 줄이야. 몽골리아와 중국, 일본의 침략으로 짓밟힌 전 국토와 피비린내 나는 살상이 얼마나 심했나. 남북한 전쟁으로 들볶이다가 파괴된 도시와 사상자 또한 얼마였던가. 긴 왕정으로 일그러진 관의 횡포와 악덕 지주에게 눌린 모진 역경의 소작농을 바로 잡고 일으켜 세웠다. 선거 때마다 후보를 읽을 수 없어 l, ll, lll, llll의 작대기 기호 숫자로 투표하던 무지몽매한 백성을 가르치고 남녀의 구별을 없앴다. 한미조약과 유엔군을 통해 국방을 튼튼히 한 이승만 위인을 만나 오늘날 눈부신 선진국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
방송인 최불암은 4.19 학생혁명 때 이승만 정권에 저항했다. 뒤늦게 공부해 보니 오해였다고 털어놨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정동 제일교회에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한미우남포럼회’를 개최했다. 이날 최불암 씨가 등단해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전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방송국에서 전원일기와 수사반장에 출연하던 중 드라마 ‘제1공화국’에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나는 과중한 출연 스케줄로 배역을 거절했는데 다시 간곡히 부탁해서 맡았다. 이어 배역 연구를 위해 이화장을 찾아 며느리 조혜자 여사를 만났다. 유품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이 입던 옷을 하나둘 보여줬는데 헤어져 짜깁기 한 옷을 내놨다.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산은 양복 2벌과 가방, 만년필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생전 이 박사가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었다고 전했다. 매우 검소한 사람이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조혜자 여사는 ‘대한민국의 현재 부유함은 이승만 대통령의 생전 검소한 생활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말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청년 시절 4.19 학생혁명에 동참해서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전 삶을 공부하니 그에 대해 너무 오해였다.’며 당시 혁명에 동참했던 친구들이 지긋이 나이 들어서 나눈 얘기에 따르면,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빌붙었던 보좌진들이 독재를 부추겼던 것이라고들 한다.
이어진 축사에서 김중환 회장은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했던 신익희 선생과 초대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신 선생은 이 대통령에 대해 ‘우남 이승만은 국내 정치에서 오점을 다소 남겼지만, 구한말 독립협회를 통해 민권운동을 펼친 이래 국가의 번영과 자유를 위해 투신한 사람이다. 해방 이후 국내의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애국자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두 분 덕택으로 한국은 세계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레마을 공동체 대표 김진홍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아침 묵상’에서 이승만의 공적 4가지 중 2가지를 설명했다. 건국 전쟁 영화를 인용해 말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공과는 7대3으로 여긴다. 다 잘할 수 없다. 잘잘못이 있기 마련이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최고의 업적이라 이른다. 해방 정국에서 국민 다수가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선호했다.
그 당시 미군정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새로 시작하는 정부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78%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택했다는 자료가 있다. 그런 시대에 유독 이 박사는 고집스러웠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민족의 살길임을 주장하여 그 덕으로 자유세계 아래 살 수 있게 됐다. 북은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남은 자유민주주의를 택해 경쟁에서 승리하게 됐다. 그러면서 나아가 다가오는 통일이 자유 나라로 된다면 우리 겨레는 단군 이래 최대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 한다.
둘째는,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게 한 공로이다. 북한군이 일거에 남침하자 보고받은 즉시 먼저 나에게 1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기도실에 들어가 간절히 ‘하나님, 이 나라 이 백성을 구해주시옵소서.’기도를 드린 후 미국 대사 무초를 불렀다. 본국과 유엔에 이 긴박한 일을 알리고 재빠른 구원을 요청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대위 김일성을 앞세워 전쟁 준비에 골몰했다. 수백 대의 탱크와 함정, 비행기를 물려주고 일본군이 만주에 버리고 간 무기로 인민군을 무장시켜 강하게 훈련했다. 아울러 장개석과 모택동 군대가 드넓은 중국 영토를 놓고 다투었던 강력한 중공의 8로군 5만 명을 인민군에 편입시켜 남침 때 도움을 줬다.
그들은 만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로 경험이 풍부한 정규군이다. 소련군 교관과 중공군 등 이래저래 당시 막강한 전력을 갖춘 북한 인민군이다. 전차와 비행기, 함정, 대포도 제대로 없는 아직 군 전열이 덜 된 열악한 남한군이다. 전투병도 절반밖에 안 된다. 전쟁 시작하면 일주일에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노라 기염을 토하던 김일성이다.
김 목사는 이런 상황에서 인민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국군이 막아내기에는 중과부적 역부족이었다. 이와 같은 처지에서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승만의 지도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외교에 천재란 별명이 붙은 이 박사는 먼저 일본에 주둔 중인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전선을 시찰케 했다. 이어 미국의 조야와 유엔을 움직여 공산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참여케 했다.
이창건 원자력 과학자가 국립묘지 이승만 박사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젊은 시절에는 미웠다. 그러다가 세월 갈수록 훌륭한 점이 많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신의 정치 체제를 국민이 반대하자 피를 흘리지 않고 하야한 점을 들었다. 미국으로부터 과학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도 큰 업적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를 자유화하는 역할이고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불러오는 길이다. 불합리하고 인습적인 것을 깨뜨리는 해방자 일이라고 여긴다. 이제 노쇠해서 기력이 줄어만 가도 이 박사를 만난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창건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끝난 직후이다.
초반 엘리트 중에는 공군 소속 기술 장교가 된 사람이 많았다. 산업 기반이 없던 시절 그나마 전공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 사람이 제대하면서 ‘원자력 공학 입문’이라는 책을 미국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이 교재로 물리학 공학 전공 공군 장교 출신 10여 명이 문교부 강당에서 매주 세미나를 열었다.
특수 공작 부대 출신인 이창건 박사도 함께했다. 전기공학과에서 배운 적이 없는 교재를 타자 쳐서 여러 권을 만들었다. 원자폭탄은 알지만 아무도 원자력발전소는 생각 못한 시절이다. 스승도 없는 상태에서 언제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막연한 지식에 청춘은 빨려들어 갔다. 원자력 평론가들은 1956년을 한국 원자력의 원년으로 삼는다.
이승만은 무엇인가를 간파해서 진수를 찾아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개념에 눈을 뜬 것이다. 문교부 산하에 원자력 부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미국 워커 시슬러라는 전력협회 회장을 만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과학고문으로 국내 화력발전소 건설에도 도움을 준 인물이다.
방한한 시슬러에게 전력난 해결 방안을 묻자 그는 갖고 있던 나무상자 하나를 열었다. 그 속엔 자그마한 막대기 하나와 석탄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리 프레시던트! 이게 핵연료봉이란 겁니다. 같은 무게 석탄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3백만 배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슬러 회장, 그걸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시슬러의 대답은
“에너지는 땅에서 캐는 게 아니라 머리로 개발하는 겁니다. 헌신적인 과학기술자를 훈련해 키워야 합니다.”
이때 원자력 엔지니어 양성을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국무회의에서
“우리도 원자력을 할 수 있을까.”
묻자
물리학 박사인 최규남 문교부 장관이 즉석에서 답변했다.
“자발적으로 연구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당장 데려오시오.”
이 대통령의 지시로 국비 유학생이 됐다. 10년간 230여 명이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서 원자력을 공부했다. 자발적 스터디그룹의 윤세원이 이들 좌장이 되어 이리저리 뛰면서 수고했다. 서울대 물리학 조교수에서 문교부 원자력 과장으로 옮겼다. 관련 법률 제정을 위해 국회와 행정 부서로 무수히 뛰어다녀야 했다.
이창건 박사는 두 번째 술잔을 바치며 윤세원 박사가 고맙고 그립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1인당 연간소득이 40달러이던 시절 1인당 6천 달러가 드는 해외연수에 수백 명을 10년간 보냈다. 시슬러는 20년이 지나야 그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80세 넘은 이 대통령은 뒷날 내다보면서 후세의 계획을 세웠다.
유학생들이 외국으로 가기 전에 이 대통령에게 인사를 갔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국으로 싸우러 가는 용사를 격려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여러분의 몸은 가족이나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여 원자력으로 국민의 밥을 만들어 주십시오. 한국을 살릴 책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5만 달러 커다란 돈을 들여 교육용 원자로를 만들어 실천에 나섰다. 이창건을 비롯한 한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국비 원자력 연구원으로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에 파견되었다. 당시 학비는 연수 기간 10개월 동안에 엄청 비싼 것을 무릅써야 했다. 8차에 걸쳐 유학생을 보냈다. 이들이 한국 원자력원과 원자력 연구소를 세웠다.
원자력 연구소 내에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크 2 건설을 이끌며 한국의 원자력 시대를 키워나갔다. 이 대통령은 직접 원자력 연구소 건설지를 제안하고 공사 현장을 수시로 둘러보며 연구자들을 격려했다. 그가 육성한 인력은 중수로에 이어 경수로 연료봉을 만들고, 한국형 원자로 모델까지 개발하여 세계 경쟁의 선두에 서게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시작된 3.1운동에는 2백만 명이 참가했다. 조선 전체 인구는 2천만 정도였다. 10%에 달하는 규모였다. 독립을 향한 열망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과 조선공화국, 고려공화국 등이 제안 거론됐다. 신석우는 황제의 나라를 뜻하는 제국 대신,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여운형이 대한이란 이름으로 망했는데 다시 쓰는 게 옳으냐 말을 거들었다. 또 대한으로 흥해보자는 말에 힘이 실려 여럿의 지지로 결정됐다. 이날 채택된 임시헌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이는 세계 최초이다. 제헌국회에서 그대로 제헌헌법으로 계승됐다. 충칭에 정착한 임정은 광복군을 창설하여 유엔군의 일원으로 활약하는가 하면, 연합군과 국토 수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귀국하게 됐다.
1919년 발표된 3.1독립선언서 및 3.1운동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망명정부이다. 줄여서 임정이라 말한다. 그해 4월 11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수립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해산하였다.
3.1 직후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 임시정부가 있었다.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에 따라야 했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민국의회,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에 산재한 7개의 임시정부였다.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내용을 대폭 보완하여 이날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했다.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 행정, 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했다.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이후 김구와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임시정부는 일제강점기에는 윤봉길 의거 지휘, 한국광복군 조직이 강했다. 임정 승인을 위한 외교 등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중국국민당과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지원도 받았다. 광복 후엔 김구를 중심으로 임정 법통 운동을 주도했다. 7월 17일 제정된 제헌헌법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되었다. 제헌 국회의장 이승만은 국회 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
평화선이 그어졌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인접 해안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하여 설정된 주변 국가 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오늘날 배타적경제수역과도 비슷한 개념인데, 실상은 영해로서 선포된 것이다. 이 경계선이 한일 간 평화 유지에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그에 따라 ‘평화선’으로 명명하였다. 해외에선 이승만 라인으로 불린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은 1951년 9월이었고 이듬해 4월 발효될 예정이다. 이에 이승만은 앞서 1월에 ‘한일 간 평화유지를 위해’라는 명목으로 평화선의 설정을 선포한다. 당시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은 3해리였으나, 20배인 60해리를 안전선으로 선포했고 이는 당대 통용되던 국제법을 어긴 조치였다.
전쟁 중이지만 미국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기에, 선포 한 달 뒤인 2월 12일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의 통보를 무시했다. 일본 정부도 대응하려 했으나 주권이 회복되려면 석 달이나 남았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4월 일본 주권이 회복되자 어업지도선이 독도에 들어와 독도의 일본 주소인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를 나무 팻말로 꽂아뒀다.
격분한 이승만은 해군과 해경을 동원해 10월부터 전시 긴급 명령으로 평화선 내 해역에서 조업하는 일본 선박을 나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어선 나포 시 몰수하고 선원은 모두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정선 명령을 거부하거나 도주 시 바로 전투배치에 돌입해 총격을 가하고 격침 시킬 정도로 강경한 대치였다.
전쟁 끝난 1955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에 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선박 나포에 더더욱 힘을 쏟았다. 그렇게 해서 1965년 한일어업협정 체결 때까지 총 3백여 척의 일본 선박이 해군과 해경에 나포됐다. 4천 명 가까운 일본 선원이 부산과 거제도, 제주 한림항 등에 설치된 법무부 형정국 형무소에 구금됐다.
일본은 해안보안청 소속 순시선을 파견했지만, 포격으로 평화선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유엔군에 항의했지만, 이승만의 평화선을 어찌해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이 클라크 라인을 선포한 것이다. 평화선과 비슷한 선이다. 해상을 통한 북한군 침투와 밀수를 막기 위해서이다.
두만강에서 독도를 감아내려 대한해협을 지나 제주도 남쪽을 돌아 서해 중앙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는 선이다. 60해리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1965년 한일어업협정에 따라 12해리를 자국의 EEZ로 선포한다. 이로써 한국 어민의 자유로웠던 어로 활동 해역이 철폐됐다.
김구와 서재필, 이상재, 임영신 등 관계와 화폐, 방영, 영화를 알아본다. 먼저 김구와는 구한말 과거에 낙방한 경험을 가진 사이로 기독교인이다. 가까운 사이였다. 상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귀국해서도 승마장을 자주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일제에서 벗어나 이 나라의 장래를 같이 걱정해 나가는 걸맞은 정객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주의 이론과 공산주의에 싫증을 가진 이승만이다. 일찍이 구미 선진 세계에 눈을 뜬 그는 북의 김일성에 대해 달갑잖은 사람으로 여겼다. 민주와 인민, 평화를 거짓으로 외쳐대는 것에 그 속임수를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공산과 공존을 말하면서 그렇지 못한 형태를 보고 절대로 국민을 맡길 수 없는 정치라 생각했다.
그런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러 간 김구에게서 사이가 점점 벌어지게 됐다. 공석에서도 이승만을 형님이라 부르던 애국 정객 형제가 친중국과 반 공산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 김구는 동학교도였고 이어 원종 법명을 가진 승려였다. 그러다 이승만과 상해에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둘은 우파였다. 상해에서 임시 대통령과 경무국장의 관계로 첫 대면을 했다. 이승만이 친미국 노선으로 가고, 김구는 친중화민국으로 기울었다. 백범일지에서 투옥 중 ‘감옥 선배 이승만을 흠모했다.’고 밝혔다. 그의 많은 책을 어루만지며 손때 묻고 얼룩진 눈물 자국의 책은 이승만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의 느낌이 든다고 했다.
둘은 경마장을 자주 찾았는데 이승만은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왔다. 그런 그들이 사이가 벌어진 것은 남한 단독 정부와 남북통일 정부 수립 의견 차이로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경교장을 찾은 기자에게 ‘노력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해소할 날이 곧 올 것이다.’고 했지만, 난데없는 군인의 총격을 받고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은 김일성이 있는 한 통일이란 어렵다고 보았다. 그에 대해 아예 포기하는 태도였다. 그의 북한 장악은 통일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이었다. 남한을 침략한 한국전쟁으로 그 말은 더 정확해졌다. 현실주의 이승만과는 달리 이상주의 김구는 남과 북의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평양을 드나들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협성회를 통해 이승만을 지도했다. 그는 하지 장군의 초청으로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으로 내정돼 귀국했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YMCA에서 이승만을 도왔고, 옥중에서 그를 따라 기독교를 믿었다. 이승만의 미국 유학비와 생활비를 대 주었다. 안창호도 유학생들의 학비를 도왔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후 군의 급격한 성장에 국군 세력을 경계하게 됐다. 세계에서 걸핏하면 일어나는 쿠데타를 걱정한 것이다. 그런 기도를 막기 위해 일본군과 만주군, 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와 갈등을 묵인하면서 서로 감시를 명했다. 김창룡과 정일권, 강문봉에게 서로 수사를 지시해 둔 것이 예이다.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승선과 결혼해 아들 이봉수를 뒀다. 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죽자 부인과 헤어지게 됐다. 박씨는 진남포에 살다가 해방 후 인천으로 내려왔다. 전쟁 때 인민군이 들이닥쳐 이승만의 아내가 누구냐 물었을 때 당당히 ‘나다.’ 하고 맞서다가 총을 맞았다는 이인수 양아들의 증언이다.
박씨는 이승만을 옥바라지했을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 산소를 고향 황해도 평산으로 이장했다. 선교사들과 교유하며 영어와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소통이 가능한 여장부라고 조혜자 며느리는 말한다.
이승만은 임영신 부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실망했으나 그래도 측근으로 두고 신뢰했다. 임영신도 충실하게 따랐으며 이승만 이름의 승을 따 승당이란 호를 지어 불렀다. 해방 직후 귀국하여 돈암장에 머물렀을 때 승당이 자주 들러 도왔다. 이승만은 71세 영신은 47세였다. 불륜관계라 소문이 나돌게 됐다. 마포장으로 옮겨진 뒤 프란체스카는 임 여인의 출입을 막았다.
이승만은 술 담배를 안 하는 대신 미식가였다. 독서를 즐겨하고 재담이 뛰어났다. 낚시와 테니스, 정원 손질,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장작 패기, 서도 등을 잘했다. 시 짓기를 좋아해서 애국충정의 한시가 많다. 소와 벼룩, 빈대, 쥐, 파리, 누에 등 잔잔한 하찮은 것을 소재로 읊은 것들도 있다.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식습관이 미국인과 거의 비슷하다. 식단에는 거의 햄버거가 올랐으며 카스텔라와 샌드위치 등을 즐겼다. 사고방식도 미국화 되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에 한국어로 항일 단파방송을 했다. 경성방송국 직원이 일본 눈을 피해 몰래 청취했다.
이때 이승만의 공식 직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 외교위원 부위원장이었다. 청취한 사람의 증언은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의 구름처럼 먼 데서 알 수 없는 곳에서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나라를 찾으려는 가냘픈 희망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했다. 그 방송 원본은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처음 백 환의 화폐에 한복 초상이 그려졌다. 이어 다시 발행된 백 환과 천 환, 오백 환엔 양복으로 바뀌었다. 10년이 지난 60년대 초에 무슨 이유에선지 그만 화폐 속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초상이 사라졌다. 주화 백 환 동전에도 그려졌었는데 그마저 지워지고 말았다. 대신 학자와 장군, 여인이 나타났다.
방영과 라디오, 영화, 연극에 나타난 이승만은 ‘경무대 비화 잘돼 갑니다’동아방송국에서 방영됐다. ‘TBC백서 이승만 특집방송’과 ‘건국 비화 특집방송’이 TBC 방송국을 통해 나갔다. 최불암이 대역한 것으로는 제1공화국과 한, 오성장군 김홍일, 제2공화국, 반민특위가 있고 서인석의 독립신문, 신구의 새벽, 여명이 있다.
이어 하대경의 무풍지대, 이창환의 여명의 눈동자, 정욱의 김구, 민지환의 삼김 시대, 권성덕의 야인시대와 영웅시대, 서울 1945가 방영됐다. 라디오 드라마엔 구민 씨의 광복 20년이 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에 김진규가 나와 열연하고, 최용한의 경무대 비화 잘돼갑니다와 광복 20년 백범 김구, 정성호의 국제시장. 김덕영 감독의 ‘건국 전쟁’이 있다. 연극으로는 박기선의 6.25 전쟁과 이승만이 공연됐다.
부정적 평가로는 친일파 등용과 각종 민간인 피해, 국가보안법 남용,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 언론탄압, 부정선거 등을 들 수 있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 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과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 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 이승만도 친일파 청산 주장은 공산당과의 연관성이 긴밀하다고 발언했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했다고 평가한다.
비판론자들은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피해에 대해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또한 6.25 전쟁 시기 한강 인도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에도 책임을 말한다. 4.19 학생혁명 때 어린 초등학생에게도 총격을 가해 경무대 앞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투사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기 때문이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 때 극렬히 반대했다. 이 법으로 구속된 사람이 제정 다음 해 한 해에만 12만 명을 넘어섰다.
제2차 개헌 의도가 국익보다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사리사욕에 있었다는 비판이다. 의원 수 135명을 2/3로 보아 불법적으로 통과시켜 사사오입법이라 이른다.
동아일보 괴뢰 오식과 대구매일신문 피습, 경무대 똥통, 함석헌 필화,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일로 언론을 탄압한 비판이 일었다.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여기 언론규제 조항은 위헌 시비가 있었으나 민주당이 이를 무시함으로써 넘어갔다. 이는 자유당의 본격적인 부정선거 기초가 됐다.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당하는 결과이다. 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고 무소속과 군소 정당은 타격을 입었다. 부정선거의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
옳고 그른 점을 함께 말한 허정은 중학교 재학 때 우남과 기독교 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우고 이후에도 측근으로 가까이 지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말한다. 누구든지 따르고 복종하면 동지로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봤다. 성질이 급해 남들과 쉽게 싸우고 주요 정치 문제엔 완고한 성질이었다. 평화로운 정권교체에는 미숙함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승만은 사리에 옳은 말이면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다. 그는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고 말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다. 한참 어린 연하에게도 공대하며 방문을 받을 때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아랫사람에게 인사를 받거나 반말은 하지 않았다. 공대, 존대하며 맞인사를 했다.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라도 믿는 성미이다. 부드럽고 자애로우며 유머가 풍부하다. 그러다 뒤틀려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하다. 조크를 잘하기로 으뜸이었다고 한다. 장관을 해임할 때는 그만두라는 말 대신 수고했다 잠시 나가 쉬라는 말을 했다.
진언을 받으면 즉시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은 채 즉시 결단으로 실천한다.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사실 여부를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놓은 뒤 사실을 알아낸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농담을 잘하고 장난도 잘 치는 유머러스한 사람이라 한다.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학교에서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기분 좋을 때 일이다. 화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한다. 주권재민을 앞세우면서도 카리스마적으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모순되고 상반되는 두 면이다. 어떻게 보필하느냐에 따라 우남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이상적으로 앞세우는 민주주의 신념을 구현하는 자들이 많았다면 한국의 워싱턴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독립운동하기 전부터 고집스러운 태도와 가부장적인 면을 보였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면 화를 내고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의 고집은 확신과 신념으로 우리 역사에 많은 기여를 남겼다. 해방 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며 반공포로 석방, 일본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이다. 그러나 그의 고집으로 말년이 나빴다. 진정한 자유당 배려가 부족했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약했다.
장면은 국무총리로 지내면서 장단점이 많았다고 말한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같은 반공 태세와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탄복할 만큼 위대하다고 말한다.
또 그분의 성격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 보인다는 독재의 전형을 보였다.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으로 정적을 용서치 않는 면을 보였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마음에 안 들면 공포 안 하기 일쑤다. 그의 유시와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의원의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재판소 등도 그에겐 필요 없다. 장기 집권을 위해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할 당시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한다고 평가했다. 제1대 대통령 당선 직후 방문해서 국무총리 이하 각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고 그 아래는 그 사람이 임명하도록 하십시오. 열한 부서와 네 처장을 지시하십시오. 많은 부서를 일일이 총괄하면 능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남 장께서는 연만하신 터수여서 그렇게 하시라 진언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 방안을 빙빙 돌고 손을 입에다 대며 훅훅 분 뒤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모두 돌봐야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는 말씀이라 이른다. 아직도 하와이에 있을 때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으로 정치가 어려워질 것이라 느꼈다.
미군정청장 하지는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을 늙은 악당이라 지칭했다. 그의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 조병옥과 같이 회고록에서 이승만보다는 안창호가 진정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감인데 일찍 가셨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돈암장과 이화장을 출입하던 최기일의 말에 충분히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인격자인 김성수와 안재홍조차 적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의 실책이라 이른다.
여운형은 조선 체육회를 이끌던 중 서울 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몽양은 노선은 달라도 이승만을 초대했다. 일장기가 사라진 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들어오는 젊은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식이 시작될 때 함께 온 윤치영과 얘기하다가 바쁘다며 자리를 떴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김영삼은 이승만은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로 사사오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은 정치 깡패들과 서북청년회를 대거 이용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을 탄압했다. 특히 해방정국에서 서북청년회가 자행한 백색테러와 학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들은 정권의 비호 아래 각종 이권 사업에 뛰어들어 수많은 불법을 저질렀다. 임화수와 곽영주, 이정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이 벌인 사건으로는 장춘단 집회 방해와 고대생 습격, 충정로 도끼,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 등이다. 심지어 정권 시작 전 5.10 총선거에 이승만과 경쟁하러 출마하려 했던 최능진을 서북청년단과 깡패들을 이용해 강제적으로 입후보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잘 알려진 제주 4.3과 여순,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이어 산청 함양 학살, 문경 양민학살 사건이 있다. 국군이 경남 산청군, 함양군에 사는 주민들을 무장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일곱 마을이 초토화됐다. 가현과 방곡, 점촌, 서주리에서 7백 명 넘게 죽어 나갔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주동 세력이 일으킨 일로, 제대로 된 이유와 근거가 없다. 극악무도한 전쟁 범죄이다.
국군 제2사단 70여 명이 경북 문경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학살했다.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 남성 83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 사건을 정부는 무장 공비가 선량한 양민을 죽였다고 조작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진실이 밝혀져 세상에 알려졌다.
또 강화 양민학살 사건도 있다. 이승만 정부는 공비 진압에 있어, 지역별로 치안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강화 지역에 조직된 치안대는 수사대를 별도로 설치해 민간인들을 임의로 살해했다. 치안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간인 특공대도 민간인을 죽였다. 문경 양민학살과 같은 해에 벌어졌다. 1.4 후퇴 때 당시 국군 산하의 강화 향토 방위특공대가 중심이 되었다. 수백 명의 강화 주민을 조선인민군의 협조자로 아무 근거 없이 몰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여기에만 있은 일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자행됐으며 북진 시 적진에서도 일어났다. 전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이름으로 덮여서 알 길이 없었다. 진실화해위는 계속 조사해 캐 나가고 있다.
대통령 재임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농지개혁과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6.25 전쟁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하여 국민의 반발을 샀다.
1960년 자유당의 3.15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다.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해야만 했다. 말 많고 탈 많던 제1공화국은 이렇게 하여 막을 내리고 제2공화국 장면의 시대가 열렸다. 크게 피 흘리지 않은 정권 이양을 좋게 평가한다. 다 집권 의욕에 불타 짓밟고 억누르는데 조금 늦었지만 물러선 것이다.
전직 대통령 아들들이 모여 이승만 기념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이는 수백 평의 비싼 대지를 내놓았다. 죽산 조봉암 기념사업회와 각계 정당 인사들의 협조로 사단법인이 설립되기도 했다. 2024년 8월 현재 국민 모금 운동을 통해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 온 이승만 대통령 기념재단이 있다. 13일 기념관 후보지로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옆 부지를 선정했다.
기념재단은 이날 임시 이사회를 열고 기념관 건립할 부지 선정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기념재단은 2027년 완공 개관을 목표로 올 하반기 중 건축 설계 공모에 들어갈 계획이다. 재단이 부지로 선정한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옆이다. 주한 미군 기지에서 용산공원으로 변모하는 이 일대가 한미 동맹 체결로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한 조석을 닦은 곳이다.
이 전 대통령을 기리기에 적합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이 부지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 전쟁기념관 인근에 있어 관람객 유입에도 효과적이란 점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국무총리 김황식 재단 이사장은 ‘기념관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자 국민 누구나 향유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승만 기념재단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축으로 한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사상과 업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미래 세대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수하겠다는 목표로 작년 6월 발족했다. 이후 재단은 ‘국민 손으로 짓는 기념관을 세우겠다.’며 작년 9월 범국민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
11월 부지선정위원회(위원장 손병두)를 꾸리고 서울 시내 10여 곳을 후보지로 검토해왔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와 학예 전문가, 관계 기관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자문 위원 의견을 듣고 역사성과 접근성, 사업성 등을 고려해 이날 국립중앙박물관 옆 부지를 후보지로 최종 선정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은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액 정부 예산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단 측은 국민 참여 속에 사업을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고 범국민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안중근과 김구 기념관처럼 정부가 주도하면 기념관 건립 비용을 다 댈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기념관 명칭에서 대통령이란 직함을 빼야 하는 점도 고려했다. 재단 측은 30%만 국고에서 지원받고 나머지 금액은 성금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작년 9월 320억 원을 목표를 세워 11개월간 8만여 명이 참여해 132억이 모였다.
김문수 경사노위원장이 사랑침례교회에서 ‘종북 주사파 대한민국의 위기로 자유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연 주제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구하고 경제발전으로 오늘날 잘 살게 한 내용이다. 김문수는 수십 년 동안 좌익의 선봉에 섰다가 우익으로 돌아선 것도 수십 년이 됐단다.
노동위원장을 하면서 반정부 활동하다가 감옥에도 들어갔다. 서울구치소의 험악한 생활도 겪었다. 구더기가 얼굴을 기어 다녔다. 화장실이 감방 안에 같이 있기 때문이다. 6년 가까이 나보다 배나 한성감옥에서 지낸 이승만은 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지났을까 생각하니 막막하다.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애국자이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협성회에서 토론을 즐겼다. 한 사람 전도하기도 힘든데 감옥에서 기독교 예수를 믿도록 한 사람이 40명이나 된다. 독실한 신자였다. YMCA를 하면서 교육과 의료에 힘썼다. 왕실의 무능으로 일제 사슬에 얽매이자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애국에 몸 바친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책을 냈다.
처음은 각계의 비웃음이었다. 미국은 지형이 쿠바 외에는 침략할 적국이 없다. 남북이 다 친한 멕시코와 캐나다로 교역의 나라들이고 동서는 드넓은 바다이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져서 감히 건드릴 나라가 어디에도 없다. 그랬는데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깜짝 놀랐다. 먼 나라 조그만 일본이 하와이 항 군사기지를 폭파하다니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태평양을 휘젓던 거대한 군함이 그대로 침몰당하고 갇혀 어이없는 전사자가 많이 생기자 분통을 터뜨린다. 적중한 이승만의 학식과 예견에 적이 놀랐다. 일약 미국인의 선지자가 됐다. 미국 유수의 대학을 세 곳이나 다니며 졸업했다. 그는 동문 친구도 많아 알아보는 사람이 곳곳에 우뚝하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이승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기가 살아 펄펄하던 때이다. 조선과 만주, 중국, 아세안을 침략하는 중이다. 조그만 섬나라여도 780만 군사 대국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도 넘볼 때이다. 380만 일군을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보내 욱일기를 흔들며 제패하려 들었다. 영국 해군도 말레이 동쪽 바다에서 패하고 말았다. 막강한 군사력을 막을 길 없는 승승장구하던 일본이다. 이때 한국도 벌써 일제 식민지가 되어 고통받고 있었다. 막무가내이다. 당할 자가 없다. 그러니 승승장구하는 길로 들어서면서 미국에 덤벼든 것이다.
패망의 화를 자초한 것이다. 원폭으로 두 도시가 폐허로 변하자 두 손을 번쩍 든 일본이다. 공중에서 열과 빛으로 지상 생명체를 죽이고 방사선과 폭풍으로 휩쓸어 남김없이 사그라들게 하는 무서운 폭탄 앞에 절레절레 고개를 숙였다. 섬과 갱도, 숲에서 항복할 줄 모르던 일군은 천황의 귀국 명령에 따라야 했다.
이승만과 김성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주장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을 아우르는 통일 정부나 남북합작을 원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공산정권을 위해 헌신해 왔다. 결국 남북은 갈라져서 각자의 길을 걸었다. 형제같이 지나던 김구가 자객에 의해 쓰러지고 공산화하려던 빨치산 남로당원이 북으로 넘어가면서 굳혀져 갔다.
살얼음 밟듯 아슬아슬한 정국이었다. 하마터면 뒤바뀔 수 있는 세상을 이승만은 잘 살려내고 이끌었다. 천번 만번 공산화의 길로 걸어가던 나라였는데 자유시장경제 민주국가로 나아간 것은 이승만의 지도력이요 미국의 도움이다. 그 우남의 동상이 국회의사당 둥근 탑 아래 로텐더홀에 있다. 동대문구에서 당선된 초대 국회의원이고 의장을 기리기 위해서다. 이화장과 남산 자유총연맹에도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 때맞춰 오세훈 서울 시장의 이승만 기념관 건립 주장이다. 이 대통령의 업적과 공헌을 재조명하고,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주장했다.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에 균형과 공정성을 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온 것에 대한 반성과 재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오 시장은 페이스북과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확립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역설했다. 이는 당시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공산화 위협 속에서 대한민국이 자유의 가치를 지키며 독립적인 국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이 대통령의 토지개혁 정책을 언급하고, 한국전쟁 당시 국민이 자신의 땅과 국가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적 평등을 높이고 경제발전의
기초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확산에 맞서 싸우는 국민적 의지를 높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오 시장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편견과 선입견을 경계하며, 역사를 한쪽 시각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공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공과를 모두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업적을 존중하는 동시에 잘못된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역사 인식의 성숙을 촉구하는 것이다.
기념관 건립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주장은, 과거의 한계를 넘어서 우리 사회가 더욱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가치와 교훈을 전달하고자 하는 뜻깊은 시도로 볼 수 있다.
저서로는 신영한사전과 청일전기, 독립정신, 한국교회 핍박, 옥중 잡기, 이승만 일기, 청년 이승만 자서전, Japan inside out, 건국과 이상, 일민주의 개설을 지었다. 시집으로 이승만 한시선과 체역집이 있다.
작품으로는 민영환 묘비와 헐버트 묘비, 화천댐 파로호 비석이 친필로 기록되었다. 서훈으로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비롯해 상훈으론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과 미육해군합동협회금명예훈장, 미국 금영자유훈장 등을 받았다. 늦었지만 국가 보훈부는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기리고 있다.
|
첫댓글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그 많은 기록들 어찌 다 저장되어 꺼 집어 내셨어요
정말 존경합니다
요즘 건국 전쟁의 영화 상영으로
대통령 님이 다시 조명 되는 것은 정권이 바로 선 덕분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박물관 같은 지식
많이 남겨 놓으셔야 합니다
글 쓰면서 많이 배웁니다.
이승만을 알고 보니 우리 민족과 나라를 살려낸 걸출한 위인입니다.
관람하셨던분들이 역사바로알기에 많은 도움된다...하셔요.
저는 아직...
단순히 관람만 하신게 아니라,이렇게 긴 설명을 곁들여 주시다니,정말 대단하십니다.
70초반분들도 치매걱정된다면서,노력하시는걸 봤는데, 쌤은 "치매가 뭔가요?" 하실듯...
여긴 목련이 피었어요.
이승만은 참 고마운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