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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나라의 돈에는 건국 대통령이 주로 그려져 나온다. 오래된 로마 화폐에는 카이사르가 새겨졌고 미국 달러에는 워싱턴, 중국은 모택동, 인도는 간디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승만이 보이다가 사라지고 주화 백 원과 지폐 천원, 오천 원, 만원, 오만원권에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 신사임당이 그려졌다. 둥근 주화 1원과 5원, 10원, 50원, 500원엔 무궁화와 거북선, 다보탑, 벼 이삭, 두루미가 보인다. 이젠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대통령은 기념관이 전국 곳곳에 있지만 이분에겐 변변한 것 하나 없다. 무엇이 잘 못 돼 흔적 지우기에 급급하다. 그분이 쓴 진해에 있는 멋진 서예‘충무공 이순신 상’동판 좌측 ‘李承晩 謹書’를 긁어 도려냈다. 부산 중구의 우남공원을 용두산공원으로 바꿔버렸다. 독재자라 낙인찍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나쁜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다. 총질해서 젊은 학생을 죽인 살인자라고도 매도한다. 친일파와 합세해서 정권을 잡았으며 통일을 가로막은 반역자라 온갖 주홍글씨를 갖다 붙여 부른다.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 서울 남산 기슭으로 옮겨 양녕대군 후손댁에 살면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곳 이름을 따 우남이라 호를 지었으며 전주가 본관이다. 한학을 익혀 과거에 나가려 했으나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어 보지 못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개설한 신교육 배재학당을 다녔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여러 차례 권유로 나갔다.
아버지를 본받아 사서오경 공맹의 성리학을 즐기는데 난데없는 성경을 읽어 기독교 재단의 정규 교육을 받았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을 만나 그의 영향으로 서구에 눈을 떴다. 학내 토론 단체인 협성회를 통해 서양의 근대 시민사회와 조선왕조의 정치 현실에 대하여 점점 깊이 알게 되었다.
여기서 한흰샘 주시경을 만났다. 남달리 영어에 익숙해져 교수 반열에 들게 되었다. 22세 졸업식 때는 대표로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까지 했다. 언론과 정치활동을 하면서 민중계몽과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갔다.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펴내고 이어 ‘제국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신진 소장파의 일원으로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추원 의관으로 선임되어 일하다가 박영효 갑신정변 사건으로 투옥된다. 고종황제의 무능과 부패로 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명이다. 주시경의 권총 도움으로 탈옥을 시도하다 들통나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소로 이감된다. 탈옥하면서 육혈포를 쏴 경비에게 상처를 입힌 협의가 추가됐다. 여기에서 정치 이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의‘독립정신’을 집필한다. 5천 년 왕정이 민주 세계화로 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선진화와 함께 공화정을 주장했다.
한성에서 숱한 고생을 겪었다. 낮에는 칼을 쓰고 밤은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받았다. 목이 달아나는 망나니 칼춤을 보면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불안이 컸다. 일본 낭인들의 궁중 행패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신변 위협의 고종을 아관파천으로 옮겨 보호해줬다. 그렇게 도와준 감옥 동지와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개신교 선교사들의 간곡한 구명운동으로 감형받았다. 이때 독서와 집필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노일전쟁 무렵 29세 나이로 6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죽을 뻔했던 곳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뒷받침해준 사람이 모두 감옥에서 사귄 사람들이다. 월남 이상재와 의인 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 등 수많은 사람이 발 벗고 나섰다. 의로운 친구와 선교사들이 각종 도서를 넣어줘 거기서 많은 책을 읽어 방이 그득했다니 그의 지식과 견문은 부단한 독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에 이곳을 복 받은 곳이라 이른다. 여러 해를 지낸 한성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다. 주로 정치범이나 반역을 저지른 사람이 많아 가혹하게 다스리는 곳이다. 처형되면서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거나 어떤 이는 이승만 만세를 부른 사람도 있었다니 놀랍다. 그의 걸출한 인품이 이 나라를 건져내 자유 독립국으로 이끌어 가길 바랐던 것이다.
한번은 보부상을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격해져서 위험에 처했는데 누가 손을 잡고 이리로 걸어가라 소리쳤다. 반대쪽으로 달려야지 맞닥뜨리는 곳으로 천천히 갈 수 있나. ‘잡아라.’휙 휙 좌우 옆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치달렸다. 산길을 내려가는 나그네처럼 보였나. 그냥 이승만 곁을 지나쳤다.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손잡은 이가 누군가 소리친 사람이 어디 있나 살폈지만 온데간데없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제국주의가 가깝게 다가온다. 을사년 보호조약과 이어 경술년 국치로 국권이 넘어가자 그만 일본 식민지가 되고 붉은 태양 일본 국기가 펄럭거렸다. 특히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가고 나라가 기울어지자 온 세상은 그만 을씨년스러움에 빠져서 우울하게 지났다. 우물쭈물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 제대로 여긴 내 나라다 큰 소리 외치며 저항하는 싸움 한번 못하고 넘어간 것이 기막힐 일이다.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긴 한숨이 사람마다 터져 나온다.
뒷북치는 왕실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미국에 특사를 보냈다. 그때 영어를 할 줄 아는 이승만이 단연 발탁됐다. 감방 친구들과 선교사들의 주선이었다. 워싱턴에서 루스벨트를 만났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아시아 약소국의 허약함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식민지 청년의 하소연은 도무지 먹혀들지 않음을 본다. 하릴없고 어찌할 수 없어 그냥 눌러앉았다. 그때부터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운동에 안간힘을 쏟기 시작했다.
조지 워싱턴과 하버드,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2년과 석사 1년, 박사 2년 모두 5년 만에 졸업한 것이다. 중간 학년에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신청하자 교수회의가 열렸다. 드문 이런 경우를 위해 그의 학력을 평가받아야 했다.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와 다행히 건너뛸 수 있었다.
프린스턴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으로 번역했을 때 200자 원고지 700여 장이었다. 박사라는 권위는 그 당시 대단해 그를 독립운동의 선두에 서게 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정치지도자들이 선생보다는 박사로 불리는 것을 영예스럽게 생각했던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보다 박사로 많이 불렸다.
나이 많아 오래 다닐 수 없고 그렇게 한가히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갖춰진 학력을 인정받으면서이다. 세계 대통령과 장관 등 저명인사를 허다히 배출한 명문 학교이다. 당시 프린스턴대학 총장이 뒤에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다. 리셉션에서 이승만은 총장에게 등록금을 돌려달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묻자 ‘국제법이란 강대국의 논리일 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있지도 않은 걸 공부하라 했으니 돌려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고 했다.
뒷날 이승만에게 도움을 준 동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사관학교 친구도 있었다. 공산혁명이 일고 삼일운동으로 고국이 시끌벅적하다. 좌우합작으로 러시아와 어깨를 겨루는 미국이다. 농민과 노동자가 주인이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가 싫은 이승만이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을 쥐어짜는 정치에 염증을 일찌감치 느껴왔다.
일제 식민지 사슬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와이에 건너갔다. 노동자로 한 달 넘게 뱃멀미에 시달리며 이곳에 오고, 사진결혼으로 들어와 여러 섬에 떨어져 고생하는 동포들을 찾아다녔다. 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이름 대신 번호표를 달고 집단농장 사탕수수밭과 온갖 잡일로 시달렸다. 대부분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해서 살아야 하는 여성들이다.
하와이학원을 세워 그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아이도 있었다. 여자아이라고 푸대접해 버려서이다. 나라를 되찾자면 남녀 모두가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한글과 영어, 수리, 역사, 과학을 가르쳐 나갔다. 거기다 교목으로 기독교를 알렸다. 당시 놀라운 남녀공학으로 여학생이 더 많았다.
국제 정치학박사 이승만이 손수 가르치자 독지가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한인 학교는 날로 번창하고 학생들이 늘어났다. 저절로 독립의 기운이 드세지고 똘똘 뭉쳐 한민족의 뜨거운 피가 엉겨 흘렀다. 곳곳에 흩어져서도 한마음으로 애국의 노래인 교가 아리랑을 줄기차게 불러댔다. 행사 때마다 부모도 모여 독립의 염원을 키워나갔다.
조국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인가 나라 사랑이 샘솟는다.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열열한 마음이 들불처럼 번졌다. 독립운동 자금을 대 주고 학교를 세울 큰돈을 인천으로 보냈다. 여자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학교가 인하대학이다. 인천과 하와이의 앞 글자이다. 독립운동 본부를 중국 상하이로 정했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이승만으로 추대했다.
시간 날 때마다 유럽으로 건너가 한국 독립을 외쳤다. 곳곳에 널려있는 대학 동문 친구들을 만나고 신문에 자주독립의 글을 실었다. 많은 사람이 호응했지만 마음뿐이다. 어찌할 수 없는 독불장군이다. 스위스 식당에서 잠시 만난 33세 오스트리아 실업가 집안 딸 프란체스카가 여러 곳에 난 기사를 오려 보냈다. 젊지 않은 58세 독립투사로, 재결혼은 생각지도 못한 왕성한 젊음을 보인 이승만에게 눈길이 갔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식민지 조선의 자주독립이 아시아와 세계 평화의 길로 나감을 신문 투고를 통해 만방에 알려 나갔다. 힘 있는 광활한 미국 땅 전역을 돌며 몸이 부서지도록 강연하고 신문 논설로 이리 뛰고 저리 내달았다. 눈엣가시인 이승만의 목엔 일본이 30만 달러 당시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많은 체포 현상금을 내걸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오롯이 외길로 달리는 그에겐 오직 내 사랑하는 조국만이 보이는 외롭고 쓸쓸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일본 식민지 조국의 해방은 이승만의 나이 70세 때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왔다. 꽁꽁 얼어붙어 풀릴 줄 모르고 굳어져만 가던 조선이다. 쇠사슬에 얽어맨 채 기진해 쓰러져가던 때였다. 맥아더가 군사기지인 광도와 장기에 원폭을 투하하면서이다. 도시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모든 게 하늘로 치솟았다. 수많은 사상자와 건물이 잿더미로 바뀌었다.
3일 간격으로 이어지면서 수도 동경을 겨냥하자 일찍이 서둘러 손들고 나섰다. 천황의 성명서가 방송되었다.
“모든 신민은 전장에서 철수하라.”
는 명령이다. 조선 총독부는 감옥에 있는 여운형을 불러내 이 나라 치안을 맡겼다. 경성방송을 통해 현재 생활을 그대로 이어 나가고 동요하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온을 갖자는 내용을 계속 냈다. 떠나는 일인들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도울 것도 당부했다. 폭행하거나 강탈, 방화, 절취를 막았다.
상해 임정을 이끌던 이승만이 서울로 들어왔다. 김구와 여운형, 김규식, 조만식, 조소앙, 조봉암, 신익희 등 애국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건사하려 속속 얼굴을 드러내고 건국에 몸 바쳤다. 남북의 다른 이념 속에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솥에 콩 볶이듯 튀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천만다행히 미국의 지원과 이승만의 지혜로운 정치활동으로 총선을 치렀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가까스로 어렵사리 탄생시켰다.
남북 총선이 시끄러워질 때 남한만으로 날짜를 정해 치르려 했다. 이때 김구는 여러 차례 평양을 찾아 김일성을 만났다. 통일을 꿈꿨으나 남과 북은 합쳐지지 못한 채 갈라져 가고 있다. 총선을 방해하는 남로당의 준동으로 제주와 대구, 여수, 순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얼핏 애국의 모습으로 비쳤다. 이는 바로 소련과 북이 원하는 공산화로 가는 길이다.
이승만에게 걸림돌이고 심한 고뇌의 시간이었다. 시인이고 수필가인 모윤숙에게 ‘메논’을 이화장으로 데려오도록 부탁했다. 드라이브를 청해 금곡릉에서 달구경하고 인삼차를 하자며 안내했다. 신생국 한국의 운명을 거머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장이다. 인도 사람으로 뒷날 소련 대사를 역임한 사회주의에 밝은 자였다.
1948년 1월 유엔총회의 남북총선거 결의를 실행하기 위해 한국에 온 막강한 8개국 대표단장이다. 부단장은 시리아의 ‘무길’이며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필리핀, 중국, 엘살바도르 대표단이다. 입국할 때 서울에서는 대대적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그런데 ‘그로미코’주유엔 소련 대표가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냈다.
북한에서 선거하게 되면 이미 만들어진 소비에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좌파와 좌우 협상파들 김구와 김규식도 선거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메논’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이승만은 이날 밤 모윤숙과 함께 남북의 총선거가 어려우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치러 정부를 세우게 해달라고 호소문과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지도자 60여 명의 서명록도 제출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몇 차례 모여도 상반된 주장만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게 되고 철수하면 바로 공산화가 되는 걸 뻔히 짐작하는 이승만이다. 군정장관 ‘하지’도 모르게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이다. 유엔에서 맡아 감시 아래 총선을 할 수 있도록 주장해 이뤄졌다.
처음은 미국도 반대하다가 나중에 트루먼이 받아들여 유엔에서 다루기로 한 커다란 성과이다.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의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국인 북쪽과 남쪽 일부에서 이런 반대 여론이 나왔으니 단장은 난감하다. 유엔 소총회인 정치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토의했다.
이때 회의장 밖에서 임병직과 중앙대 임영신이 설득작업을 벌였다. 논란 끝에 표결에 부쳐졌다. 찬성 32표, 반대 2표, 기권 11로 통과됐다. 이런 결정이 났는데도 서울의 위원단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4일간 격론을 벌였다. 모윤숙 아니면 다 된 일이 자칫 물 건너갈 뻔했던 일이다. 곳곳에 진탕이고 지뢰밭이다.
8개국 대표 가운데 미국이 낸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확실하게 지지한 나라는 중국과 필리핀, 엘살바도르뿐이었다. 5대 3이면 남한만의 자유 선거는 어려워진다. 표결에 부쳐진 3월 12일이다. 찬성 4표로 1표 늘어났다. 여기에 ‘메논’이 찬성으로 돌아서 주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가 반대하고 시리아와 프랑스가 기권했다.
이렇게 아슬아슬할 수가, 만약 안 됐으면 지금 이 나라는 어찌 됐겠나. 문학 얘기로 친밀감을 주고 나라의 현실을 이해시킨 덕택이다. 이화여대 낙랑클럽도 위원들을 감싸고 도는데 나라 사랑으로 한몫했다니 다 고마운 일이다. 이승만을 도운 이들 여성을 창녀라고 마구 매도하는 일이 안타깝다.
2백 제헌국회 의석 중 제주 두 선거구가 불타버려 결원이 생겼다. 그런 가운데에도 감격의 국회가 열렸을 때 73세 이승만 의장이 개회를 선언하면서 감사 기도로 시작했다. 정말 우여곡절로 이뤄진 나라이다. 어찌어찌 되어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일이 하나하나 보살펴주고 그때마다 손잡아줘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자객이 들끓었다. 우남을 죽이기 위해 이화장과 경무대, 동선 주위에서 밤낮으로 좌파 저격범이 설쳐댔다. 누군가 손목을 이끌고 소리치듯 하나님이 그를 곁에서 늘 보호해줬다. 북은 러시아 군대가 남쪽은 미군이 주둔해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켜 군인과 경찰, 관리들을 먼저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행정기관과 경제인, 농민 등 일본인들은 정한 날짜에 재산을 모두 남겨두고 알맞은 여비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해방 뒤 어수선한 정치에 군정장관 하지와 나라를 토닥거려 나갔다. 우글거리는 공산주의자들 숲에서 혜성처럼 나타났다. 수천 년 왕정과 삼십여 년 식민지 시대, 짧은 신탁통치도 끝났다. 나아가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행정부 조각과 입법 제헌국회, 사법 기관 등 삼권에 국방, 교육, 문화에 분주했다. 그가 마음 썼던 일은 먼저 농지개혁이다.
남한 경작지 이백만 헥타르의 절반 이상이 소작농이다. 거기다 수십만 헥타르가 일제가 사용한 땅이다. 수천 년 지주 밑에서 종처럼 소작을 부치던 귀천이 끝날 때이다. 갑오년에 반상 타파가 있었지만 끈질기게 여태까지 내려왔다. 이제 우남 이승만이 역사적인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다수 지주 국회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5인 가족으로 한 가구당 3헥타르 9천 평을 기준으로 끊어갔다.
평년작의 2.4배를 주장하다가 1.5배로 결정했다. 십 년 걸리던 것을 더 줄여 4. 5년 소출로 갚아 나가면 내 땅이 되게 했다, 반만년 소작지가 꿈같은 내 토지로 바뀌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데도 논밭에 드러누웠다. 그 얼마나 감격적인가 비가 무슨 대수인가. 조상 대대로 하인이고 양반에게 굽실대던 게 이제야 끝이 나고 말았다. 개혁 진행 중에 그만 6.25 전쟁이 일어나 중단됐다가 이어졌다.
긴긴 세월 지주들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복락을 누리며 살았다. 두리둥실 드넓은 기와집 깊은 곳에 들앉아 편하게 지냈다. 수많은 남자 머슴과 여자 하인들로 북적였다. 집안일을 총괄하는 집사가 있고 고을마다 소작농을 다스리는 마름이 고을 원처럼 버티고 있다. 집안에는 물길어 부엌 단지와 동이에 붓는 일꾼과 땔 나무하는 사람이 득실거린다.
연말 소작료를 바치러 오는 달구지 줄이 어디까지 이어 섰다. 집사와 마름의 지시에 따라 큰 저울에 달아 창고에 넣어 쌓는 머슴들이 숱하다. 춘천 김유정의‘동백꽃’과 하동 박경리의‘토지’에 지주의 얘기가 나온다. 주인마님으로 허리 숙여서 불러야 하고 그 자녀들도 도련님이나 아씨로 깍듯이 높여야 했다.
청소하고 주인 방 데우며 지키는 머슴에다 밤낮으로 연자방아를 돌려 알곡 먹거리 장만하는 하인도 있다. 여자들은 부엌 일하는 식모에다 반찬 만드는 찬모가 있다. 손님 접대용 술 담그는 주모와 주인 아기 받아 키우는 양모가 드세다. 길쌈과 모시 짜서 옷 만드는 의모, 안주인 모시고 의복 이부자리 보살피는 안방 하인들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 혼란 통에 다시 재정비해서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수복 땅이 생겨 전선 지역까지 넓혀 나눴다. 지주에게 임야나 거주지, 그 외의 땅은 대금으로 유가증권을 발행해줬다. 전쟁 중에 유통되면서 이를 사 모았던 사람들은 일본인 적산 기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한화와 선경, 두산 등의 대기업이 속속 생겨났다. 내려오고 올라가는 그 북새통 전투 중에 대구와 부산 지역에서 등락을 거듭하다가 폭락하기도 했는데 농업경제가 산업과 공업발전으로 이루어지면서 여러 방면에 영향을 줬다.
지주가 내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소작농은 길거리에 나앉는 가엾은 신세다. 이것이야말로 공산이고 민주주의다. 행복한 인권이고 백성이 은신하며 서성일 수 있는 낙원이다. 웃음이 활짝 피어나고 꿈꾸는 희망의 세상이며 꽃피는 나날이다. 주인마님과 도련님에게 쩔쩔매는 일이 없는 이게 바로 평등하고 공평한 정치이다.
이승만은 이내 초등학교 6년 과정을 의무교육 기간으로 실시했다. 처음은 사정이 어려웠던가 월사금이나 사친회비라 해서 조금씩 받다가 사라졌다. 수업료를 받아 들어가기 어려운 일제가 세운 면 단위까지의 소학교였다. 교육과정이 달라 우리 아이들은 들어가도 소용없는 곳이다. 양달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먼 곳에는 분교를 설치하는 등 취학 남녀 어린이들이 모두 입학해 무료로 교육받게 했다. 반만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한자와 한글을 익힌 일부 사람만이 관가에서 붙이는 갖가지 방이나 편지를 읽고 썼다. 대부분 까막눈의 세상이다. 글자 해독이 어려웠다. 농사짓고 공방 일하는 사람이 무슨 글이냐이다. 특히 여자들이 글을 익히면 크게 잘못된 일로 여겼다. 극소수의 양반이 그것도 남자만의 전유물이다. 상민이 공자와 맹자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또 그럴 시간도 없다. 널브러져 쌓인 일이 바쁘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먹고 사는 일로‘내 코가 석 자’이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7세 남녀부동석도 깨어졌다. 한 반에 5, 60명씩 가득히 앉아 공부했다. 넘쳐나는 곳은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었다. 남녀가 섞여서 스스럼없이 지났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살판났다. 집에 꼭꼭 박혀 숨도 못 쉬고 살았는데 해방됐다. 남자아이들은 소를 풀밭에 내다 매고 저녁엔 우리로 들여야 한다.
소 꼴 베고 돼지풀 쇠뜨기와 토끼 먹이 씀바귀를 뜯으러 다니며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엉성히 매 둔 소가 어디로 가고 없을 땐 야단났다. 소학교나 공민학교는 일본인 그들 자녀를 위해 지어진 한없이 부러운 곳일 뿐이다. 뒤에는 좀 느슨해졌다. 그래도 우리 학생은 일본말을 해야 한다. 한글은 입도 벙긋 못하게 했다. 학교는 무슨 ---.
“날아라 푸른 하늘아 ---.”
세상에 태어나서 교복 입고 모자 쓰며 책가방 드는 걸 해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들판을 냅다 달음질해 학교에 다다랐다. 반별로 줄 서서 조례를 갖는다. 교장 선생님 훈시와 주번 선생의 주훈을 듣고 줄줄이 교실로 들어가 담임 선생의 출석 점호와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된다.
“거북아, 거북아, 이리 오너라.”
한글 수업에다
“2,4=8. 3,5=15. 5,6=30 ---.”
셈본이 이어진다.
담임 선생님이 붕붕 두드리는 흥겨운 풍금을 따라 노래하는 음악 시간이 즐거웠다. 넓은 두꺼운 종이에 색색 크레용으로 덧칠하며 그리던 미술은 어떤가. 봄가을 폭포나 절간, 유적지를 찾아 원족 아니 소풍 가던 게 선하다. 철판 도시락에 달걀찜을 덮은 게 맛났다. 가을 글짓기와 체육대회, 연극공연 등 6년간 온갖 것을 배우고 익혔다.
음악 시간 몇 번 따라 부르다가 나와 부르게 했을 때 혼났다. 감감한 게 금방 들은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이다. 아버지를 그리라 했는데 보니 허수아비다. 운동회 때 만국기가 펄럭이고 작은 모래주머니를 던져 종이풍선을 터뜨리면 색종이가 쏟아지면서 ‘대한민국 만세’ 휘장이 늘어 펼쳐진다. ‘검사와 여선생’ 연극에서 검사 배역을 맡아 하면서 대사를 더듬거렸던 게 생각이 난다.
운동장 구석구석 돌아가며 풀 뽑고 자갈을 주워냈다. 뒤뚱하게 쌓은 돌담이 자주 무너져 허물고 밑바닥 돌부터 앉혀 다시 쌓기를 얼마나 했던가. 유리창과 교실 바닥을 청소하면서 해맑고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아야 했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교실 바닥과 복도 마루를 솔잎으로 문지르면 조금 빛이 난다.
반장 선거를 통해 귀한 다수 의견을 알게 된다. 학급 회의도 열려 반장의 진행을 선생님이 멀찍이서 도와준다. 아주 민주적인 방식이다. 세상에 나가기 전 학교에서 배움으로 익힌다. 대다수가 문맹에서 눈뜬 문명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중간, 기말고사시험으로 성적표를 나눠준다. 경쟁하게 되고 또 반성도 한다.
이 모든 게 이승만이 배재학당과 미국에서 배우고 서구를 다니면서 겪은 것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방위선을 아래로 내려 일본까지 하고 한국을 제외하자 곧바로 전쟁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찾아온 친구 덜레스에게 화를 내며
“이게 무슨 미국의 정치인가.”
소리쳤다. 소련과 중국이 주위 인접국을 마구잡이로 공산국가를 만들고 있다. 그게 자그마치 40여 개국으로 도미노가 일어나고 있다.
“보라 돌아가면서 공산화가 아닌가.”
공산화 파도에 휩쓸리는 현실을 알리면서 딱한 나라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이해시켰다. 일본과 대만은 바다에 떠 있는데 한국만 달랑 드넓은 붉은 공산 대륙 끄트머리다. 그것도 북한이 공산화 되어 반쯤 대롱대롱 곁붙어 겉돌고 있다. 고려 백여 년 원나라 지배와 조선 5백 년 중국의 영향 아래 지내며 조공을 바쳤다.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의 도움으로 남침을 감행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정보에 어두워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일요일 새벽 곤히 잠든 남녘으로 전차와 수십만 무장병력이 그대로 밀고 내려왔다. 김일성이 기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한 전쟁이다. 1년 전부터 당시 소련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요청했다. 또 안달이 나 승인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스탈린 동지, 이제 상황이 무르익어 전 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빨치산 부대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미군이 철수하자 ‘한반도를 적화할 좋은 기회’라며 변화된 국제정세를 이유로 들어 허락받게 됐다.
“한국과 미국이 체계적으로 저항하거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동원할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기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고 강조한 스탈린이다. 달포 전에 승인하고 소련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파견해 선제타격 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도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 북한 공산군은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남쪽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이때 20만 북한군은 2백여 대의 전차와 항공기, 1백여 척의 함정, 수백 문의 야포로 아직 준비가 제대로 안 된 남한을 쳐들어왔다. 점심 때쯤 춘천이 함락되고, 서울은 사흘 뒤 소련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미아리를 넘어 태평로와 남대문으로 들이닥쳤다. 중앙청엔 인공기가 걸려 펄럭였다.
인민재판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오효진의 실화 소설 김팔봉과 인민재판에서
“500명 중 50명이면 십분의 일이 찬성했는데도 나는 인민의 이름으로 죽는구나. 팔봉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파랬다. 아름다웠다. 그는 기도했다. 깨끗하게 죽자고,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탓하지 말자 ---.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총탄도 아깝다. 때려죽여라. 이 소리가 들려온 건 그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러니 살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이 들끓었다. 폭파된 한강철교 옆에 임시로 만들어진 부교를 건너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수원역에서는 어떻게든 피란 열차에 올라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잠시 머물 수도 없이 한시가 급한 이들은 한사코 서울을 떠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뜨거운 기관차 난간과 지붕 위에도 사람으로 꽉 찼다. 출입문과 창틀에도 들어갈 수 없어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로 가득 넘쳐났다. 총포탄이 콩 볶듯 터지는 소리와 번쩍이는 빛으로 온 천지가 시끌벅적 자욱하다. 지옥도 이런 참혹한 곳이 있을까. 공포가 하늘을 찌른다. 어찌 살아가나.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완전하게 폭파하지 못한 철교를 수리해 북한군 전차가 남쪽을 향해 내리 달렸다.
아직 비행기와 전차도 없는 남한군이다. 창군이 덜 된 남한군 10만 명은 제대로 반격하지도 못한 채 절반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데다 갑자기 휴일 새벽에 내리 닥치니 견뎌낼 수 없었다. 심히 열세이고 어려울 땐 대열을 벗어나 달아나는데 이들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도 꿋꿋이 견뎌낸 것이다. 장하고 용감했던 군인들에게 한없이 감사하다.
유엔의 감독 아래 자유 선거를 치르고 유엔총회의 승인을 거쳐 탄생한 대한민국은 건국 과정부터 유엔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48년 말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로 인정했다, 그런 대한민국이 적화될 위기에 처한 것은 자유세계에 대한 위협인 동시에 유엔의 권위와 위신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일이었다.
‘침략행위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 병력을 철수하라.’
는 유엔 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남침을 감행하자 유엔은
‘군사적 제재를 통하여 평화를 회복한다.’
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어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고 미국의 맥아더 원수를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전쟁 동안 미국과 영국, 터키 등 16개국의 전투부대와 인도와 덴마크, 스웨덴 등 5개국의 의료 지원부대, 아일랜드와 이라크, 포르투칼 등 전투 복구지원 6개국 등 유엔군으로 참전해 ‘자유’의 이름으로 피 흘리며 함께 싸웠다. 그 외에도 물자를 지원한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대만 등 40여 개국을 잊을 수 없다.
유엔 역사상 최초의 집단행동이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6.25 전쟁 유엔군통합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킨 내용이다. 이는 전 세계 위협인 공산 세력의 침략을 격퇴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전국을 휩쓸어 경상도 남쪽만 일부 남겨둔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가던 한국이다.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대구와 부산을 넘보고 있다.
유엔군이 태풍처럼 휘몰아쳐 들어와 이들을 북으로 밀어 올렸으니 망정이지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일본에서 신속히 출동해 공산군을 막으려던 오산의 스미스 부대와 대전 24사단은 속수무책으로 뿔뿔이 흩어져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북한군은 도심 곳곳 건물에 인공기를 꽂아 의기양양하게 날렸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전쟁 시작 한 달 만에 영토의 90%를 잃었다. 이제 한반도 끝인 낙동강 전선으로 내몰려 커다란 위기에 처했다.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던 북한 공산군은 낙동강 전선만은 사수하려는 국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제 더 물러설 곳 없는 부산에서 이승만은 공산군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며 대책에 골몰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치고받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칠곡과 군위, 영천, 경주, 포항을 지키는 국군 1사단과 6사단, 8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북한 공산군 6개 사단을 어렵게 감당하고 있었다. 서쪽 대구와 달성, 영산, 함안, 마산은 미군 기병사단과 24사단, 2사단, 25사단, 해병 1대대가 맡아 인민군 8개 사단을 힘겹게 막아내는 중이었다.
밤새 피 튀는 싸움으로 지쳐서 잠시 취침 중인 모습의 사진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허물어진 신발과 해어진 옷가지, 무더운 여름 풀밭에 아무렇게 나뒹굴어 잠들었다. 뜨거운 햇볕을 그대로 받으면서 쓰러진 모습이 역력하다. 가장 격렬했던 다부동 전투에서는 발밑으로 피가 개울처럼 흘렀단다. 적과 바짝 붙어 싸우다 보니 총포 대신 수류탄을 주고받고 마침내 육탄전으로 겨루는 백병전으로 번졌다.
영천과 포항, 다부동 전투가 인민군이 장악하고 동남쪽 경상도 일부만 남은 절체절명의 최전선이다. 여기가 무너지면 대구가 쉽게 점령되고 남은 부산은 삽시간에 무너져 버티기가 어렵다. 어떻든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야만 한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서 동북으로 좀 들어가면 학이 머무르는 산이라 하는 유학산이 있다.
이 산정 근처에 마이클 레스 미 중령과 김재명 소령이 이끄는 대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여기 뚫리면 대구까지 허물어지는 개활지로 매우 중요하다. 나라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지역이다. 1사단 병력이 힘겹게 막아내다가 수천 명이 전사하고 부상하는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우리 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참패하는 접전 지역이다.
인민군 3개 사단을 맞아 싸우는 1개 사단의 처참한 모습이다. 치고 빠지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했으며 유학산 정상을 차지하려는 피나는 최대 격전지였다. 이때 미8군 사령관이 다급하게 백선엽 사단장을 찾아 말했다.
“당신들은 당신 나라를 포기할 것이냐. 유학산이 뚫려 포위되면 우리 마이클 레스 중령 전차부대 다 죽는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부대를 뺄 수밖에 없다. 그리하면 당신 나라는 끝장이다. 우리도 버티고 있는데 당신들이 후퇴할 수 있는가.”
잠시 시간을 달라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김재명 소령이 맨몸으로 낙오병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백 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즉결처분받겠다.’라고 말한다. 여기 지키느라 몇 번씩 탈환하고 밀리기를 반복해왔다. 이틀간 물 한 모금 밥 한 끼 먹지 못했고 탄약도 없으니 이젠 별도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백장군은
“너희를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러서라.”
고 말하고 학도병과 내려오는 군대 모두 합하여 수천 명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며 허기를 달랬다. 이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 올라서서 외쳤다.
“장하다 그간 고쟁이 많았다. 이곳이 뚫리면 그간 우리의 전공도 모두 수포가 되고 우리나라는 끝장이다. 대한민국이 사라지는데 살아 뭐하나. 난 여기서 죽겠다.”
집안의 독자이거나 또는 돌볼 노부모가 계신 사람은 돌아가라. 공격 구호는 간단하다.
“돌격 앞으로!”
내가 제일 앞장서겠다. 만일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면 쏴라. 내 시체를 밟고 넘어서 이곳만은 꼭 지키고 탈환해라.
분위기가 바뀌면서 김재명 소령도 자신이 제일 먼저 죽겠다며 앞장섰다. 이를 본 마이클 레스 중령은 세계 전사 상 후퇴하던 군대가 다시 ‘돌격 앞으로’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군대를 신의 군대 즉 하늘이 낸 병사(god’s soldier)라는 말을 했다.
백선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유학산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유엔군이 인천을 상륙하고 반격한 것이다.
최악의 전투 상황에서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외치며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적군을 향해 나아간 일을 잊을 수 없다.
이곳 다부동 여기에 미8군 30만 명의 한국노무단 지게 부대가 있었다. 차량이 드나들 수 없는 높은 산악지대에 1인당 50킬로그램의 병력 물자를 져 날라야 했다. 내려올 때는 부상자와 전사자를 지고 왔다. 수많은 애국 지게 부대원, 이 중 2천 명 전사자와 2천여 명의 실종자가 나오고 4천여 명이 부상자가 생겼다.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지게 부대가 없었다면 최소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한다.”
까마득한 산꼭대기까지 보급품을 져 나른 수송 지게 부대의 전무후무한 활약을 기렸다. 이렇게 해서 악전고투 다부동 전투가 반격의 디딤돌이 되었다.
38선을 넘어 새벽 전쟁이 터지자, 친구 덜레스는 미국 정부와 유엔에 긴급 도움을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일본 주둔 미군 맥아더에게 긴급 명령을 내렸다. 만날 때마다 다정했던 가까운 극동 사령관이다. 5년 아래여도 겉늙은 덩치 큰 모습의 장군은 이승만의 한국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둘 다 70세가 넘은 늙은이다. 벌써 퇴역해야 할 나이다. 미국은 그에게 정년을 넘어선 5성 장군으로 종신 원수를 명했다.
가장 가깝고 한국 군정에 근무한 적이 있는 구주 24사단 딘 소장을 출전시켜 공산군을 막도록 했다. 바로 출동했다. 스미스 특공부대가 날아가 대전 북쪽 오산에 내렸다. 당시 수영 공항과 부산항으로 마구 들이닥쳐 대전으로 올라가 공산 인민군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지형에 어두운 미군은 매섭게 달려드는 북한군에게 역부족이었다. 날아오는 야크 폭격기를 피할 수 없고, 줄줄이 오는 전차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돌을 놓고 나무를 덧대도 소용이 없어라. 밀쳐내고 꾸물꾸물 내려온다. 수류탄을 던지고 박격포를 쏘아대도 끄떡없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낙하산 부대는 대전으로 이어 대구 후퇴를 거듭했다. 막강한 미군 화력이지만 여러 사단에 에워싸여 들어오는 데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작은 연못’ 영화가 떠오른다. 노근리’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곳인가. 부산, 마산, 양산이 산 많은가 했는데 여기도 산 높은 깊은 골짜기다. 가로수가 주렁주렁 감나무이고 비 가림 포도밭이 곳곳에 보인다. 맑은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돌아 내리는 고즈넉한 곳이다. 황금빛으로 곱게 물든 은행나무가 돋보이는 평화공원으로 들어섰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미군과 인민군이 맞닥뜨려 싸웠던 곳이다. 피난민 수백 명이 이고 지고 살던 마을을 떠나 남쪽으로 동동걸음쳤다. 그 속에 인민군도 숨었는가. 기총소사와 폭격이 이뤄졌다. 경부선 철도 다리 아래로 살려고 숨어들었다. 총알이 소낙비 퍼붓듯 쏟아졌다.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어이없게도 꼬꾸라져 숨졌다.
굴은 두 갈래로 차도와 도랑으로 되었다. 양쪽 입구는 온통 총탄 자국으로 얼룩졌다. 흰 페인트를 칠해 동그라미와 삼각, 사각형으로 그려졌다. 삼각은 실탄이 박혀 있는 곳이다. 얼마나 쏘아댔던지 빤한 틈이 없다. 다급한 때라 시신을 바로 뒷산으로 옮겨 묻었다. 흩어져 난리를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몰려 뭉쳐 다니다가 일을 당했다.
빨리 위험 지역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리 가자. 저리 가야 한다. 말썽 속에 갈팡질팡했다. 죽을라치면 수렁으로 들어간단다. 또 흰옷을 즐겨 입어 표적이 쉽다. 정찰기가 돌다가는 이내 폭격기가 들이닥쳤다. 정조준 겨냥으로 맥없이 쓰러져야만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꾸불꾸불 산길보다 바른 철길을 따라가다가 그만 전투기를 만났다.
딘 소장은 해방 직후 신탁통치 군정관으로 있을 때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에 간여했다. 일본 남쪽 구주 사단장으로 있다가 6.25사변 발발로 유엔군 중 가장 먼저 부산을 거쳐 대전에 들어와 공산군을 막았다. 그러나 힘겨웠다. 약할 줄 알았던 인민군 여러 사단이 기세등등 대전으로 밀고 들어왔다. 오합지졸이 아니라 잘 훈련된 작전으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막강한 포병과 연대가 쉽게 물리칠 줄 알았는데 남쪽으로 밀리면서 그만 지휘 체계가 무너져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의기양양하던 미군은 낯선 지형에 어둡고 말이 통하지 않아 며칠 사이에 사달이 났다. 이때 영동 황간 지역을 지나던 미군에 의해 빚어진 일이다. 전쟁 시작 꼭 한 달 뒤 무더운 여름에 일어난 노근리(老斤里) 사건이다.
다급할 때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4만 평 노근리평화공원에 여러 개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쟁 지역에서는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철길 쌍굴다리 아래 숨어지냈다. 그런 가운데서 아기를 낳아 ‘앙앙’ 울자 들통날까. 두려움에 떠는 피란민 성화에 잠시 물속에 담갔다. 숨이 끊어지자 아버지가 미쳐 소리치고 날뛰었다. 이내 사격이 시작되고 물속 아기 곁으로 가라앉았다.
또 발걸음을 멎게 하는 동상이 있었다. 아기 젖을 먹이는 어머니다. 천연덕스레 젖 먹는 아기를 안고 아래를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죽어있었다. 넓은 광장 끄트머리에 위령탑이 섰다. 커다란 벽에 흑백 사진을 새겼다. 당시 찍은 것으로 어쩌면 저리도 선명할까이다. 철길 굴 앞을 지나는 피난민이다. 불안한 얼굴 모습과 걸친 흰 바지와 적삼에다 치마, 저고리 옷이 새삼스럽다.
긴 경사진 길을 따라 지하로 들어갔다. 구석구석 영상이 돌아간다. 영화인 듯 미군이 피난민을 일일이 뒤지고 철길 위로 올라가게 한 뒤 폭격과 기총사격이 이루어졌다. 다급히 피해 굴속으로 뛰어들자 좌우에서도 총격이 이어졌다. 어찌 살거나. 상처 속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이 고스란히 나왔다.
벽에 수백 명 죽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졌다. 밝혀지지 않은 사람도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이 산골짝에서 오글오글 복작복작 대대로 지내다가 갑자기 엉겁결에 나서 살기등등하다. 이승과 저승이 금방 왔다 갔다 했다. 평화, 평화, 자유, 자유 말을 뭉뚱그려서 싸움 없는 세상을 가꿔나가자. 정은용의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소설이 나오고 영화를 찾아 그때의 기막힌 참상을 밤늦도록 지켜봤다.
통신도 끊어져 뒤늦게 사단장 딘 소장이 철수했다. 급한 김에 사단기도 버려두고 나왔다. 총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포연 자욱한 속을 헤집고 옥천 산속을 지났다.
어두운 밤 길거리에 쓰러진 부상병을 싣고 가다가 물을 찾자 개울로 내려갔다. 그만 절벽에 굴러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 달이나 남쪽 대구를 향해 산속을 헤맸다. 물을 퍼마시고 밭의 농작물을 뜯어먹었다. 하도 배고파 어느 산골 외딴집에 들어가 구걸했다. 콩가루에 묻힌 밥을 줘서 먹었다. 얼마나 맛있었던지 꿀맛이었다고 말한다.
뱅글뱅글 돌았던가 진천에 들러 청년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대구까지 데려다주면 필요한 달러를 주겠다고 길 안내 도움을 청했다. 그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임시 수도 강계로 끌려가 험하디험한 시간을 보냈다. 키 낮은 좁은 감방에 손으로 음식을 주워 먹고 개나 돼지처럼 살았다. 그는 판문점 포로 교환 때 풀려났다. 그를 고발한 청년을 체포해 바로 총살하고 다음 사람을 세울 때 연락이 왔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폐 3만 원을 받고 한 일이다.”
살려주라는 부탁이다. 딘은‘죽음과 같은 3년 세월’의 책을 펴냈다.
막강한 인민 무장 군대로 밀고 내려왔다. 약한 우리 국방군과 미군 24사단을 여지없이 냅다 밀어붙였다. 낙동강 왜관에서 경상도 남쪽 일부만 덜컹 남았다. 꺼지기 직전 바람 앞의 등불이다. 대구와 부산을 삼키기 위해 김천에서 잠시 전열을 가다듬을 때이다. 너무 급히 내리 달려 흩어진 부대를 찾아 모아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이렇게 잠시 쉬었다 내려가도 남은 지역은 이제 ‘식은 죽 먹기’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때 유엔군 사령관 노병 맥아더가 직접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서해 쪽 목포와 군산 적진지 중 상륙작전 선택지로 인천이 격론 끝에 결정됐다. 바닥이 얕아 군함이 들어가기 어렵고 조수간만이 심해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고집불통 맥아더의 주장이 한국을 살려낸 것이다. 김포를 되찾고 서울을 수복했다. 춘천을 가로질러 병참 보급로를 막았다. 집결지 김천은 일본에서 날아온 미군 융단 폭격기의 포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났다. 군수품이 모두 막힌 북한 주력부대가 갈팡질팡할 때 남쪽은 부산으로 막 들어오는 연합 유엔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수월하게 이들을 밀치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내친김에 시월 들어서면서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치달았다. 서울 중앙청에 인공기가 내려지고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유엔기도 올리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감격의 중앙청에서 수복 기념식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지고 옆에는 맥아더 장군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북한 정권이 무력으로 38선을 파괴하면서 남침한 이상 이제는 존속할 이유가 없다.”
며 수복 후 명령을 내려 북진하도록 했다. 국군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은 미8군 워커 사령관 승인을 얻어 10월 1일 3사단과 11사단이 38선을 넘어갔다. 동해안은 열흘 만에 원산을 점령하고 서부전선에는 국군 1사단이 유엔군과 함께 10월 19일 평양에 들어갔다.
그달 말 평양 입성 환영대회에서 서울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인민군과 노동당 간부는 평북 강계나 만주로 피신했다. 김일성과 그 가족은 일찌감치 중국 땅 통화로 넘어갔다. 그가 버리고 간 소련 리무진 차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됐다. 그들이 머물다 간 곳에는 양민 학살 현장이 발견되고 있다.
대전교도소에 4백여 구의 민간인 시신이 마당 구덩이에 묻히지 않은 채 나뒹굴고 있다. 주로 감치장과 유치장에 갇힌 수형자들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대량 학살은 전쟁 나던 해 9월 말, 전국적으로 동시에 이뤄졌다. 마을 일반인은 인민재판으로 가차없이 행해지기도 했다. 거기다 헤아릴 수 없이 줄줄이 묶어서 북으로 데려간 납북자가 사진으로 확인되고 있다. 납북 인사는 기록으로 8만 명에 이른다니 ‘한 많은 미아리고개’ 노래가 생각난다.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지은 춘원 이광수도 납북됐다. 인민군들이 찾아와 공산당 전향을 뜻하는 자수하라는 말을 했다. 여운형과 친하긴 했어도 자율적인 사상을 가져 남달랐다. 절필했다며 저항하자 트럭에 태워 종로경찰서로 실려 갔다. 앞을 가로막은 아내가 젊은 17. 8세 된 앳된 북한군에게 엎드려 절하며 만류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어 서대문형무소 유치장에 감금됐다. 옷가지와 먹을 것 등을 갖고 오라는 연락도 받았다. 양복과 비타민을 넣어줬다. 몇 달 뒤 서울이 수복되자 찾아가 보니 벌써 이내 북으로 끌려간 뒤였다. 강계 부근에서 혹독한 추위에 굶주린 데다 팔다리가 얼어 걸을 수조차 없었다. 같은 작가 출신인 홍명희 부수상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인민병원에 입원했을 땐 너무 늦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견디다 못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는 미국 딸들의 증언이다. 그는 강계 부근 만포에서 폐렴으로 사망해 그곳에 묻혔다가 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현재 납북과 월북 인사를 위한 평양 교외의 특설 묘지로 이장됐다. 당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민주주의를 해설하던 한치진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은 안 뺏긴다.’고 한 말을 믿고 피난 가지 않았다가 납북당한 경우가 많다고 일렀다.
경기도 지사 구자옥의 친족 황규필씨는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의 무장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연행돼 납북이 이뤄졌다고 한다. 8만이라 기막힌 숫자이다. 모두 데려다가 잘 거두기는커녕 오르내리는 전란 통에 수렁에 집어넣고 온갖 수모와 고생을 시켰다. 그 잘 있는 수많은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갔다. 단란한 가정을 마구 깨뜨리고 말았으니 한 많은 일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김일성의 우상숭배 글을 써야 하는데 어울리지 않고 마땅치 못하자 화를 내며 유배를 명했다. 평남 외딴 산골짝에 지내면서 다시 좋게 짓길 바라는 반성의 기회였다. 붓을 놓은 뒤 해 보지 않던 농사를 지으며 허덕였다. 수시로 찾아오는 감시병의 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굶주리며 지내다 괭이를 잡고 밭고랑에 쓰러졌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해 잔당을 소탕하는 중이었다. 6사단 7연대가 압록강 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기쁨과 환희에 찬 병사들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 수통도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이제 막 꿈에 그리던 통일이 올 것 같았는데, 그 영광은 잠시뿐 짧았다.
많은 숫자의 중국 공산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몰래 북한 땅에 숨어들어 와 있었다. 북한 깊숙이 매복해 있던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중공군을 불러들인 김일성의 편지에 의해서이다.
“약속한 바와 같이 중국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편지에 조선인민중앙위원회 김일성과 박헌영의 한글과 한자 친필 사인이 보인다. 난데없는 중공군의 대량 참전으로 혹한의 추위 속에 38선을 넘었다가 다시 내려오는 1.4후퇴의 길로 들어섰다. 평양을 뒤로 할 때 많은 군수 물자를 버리고 떠나야 했다. 험준한 낭림산맥 장진호 전투와 함께 흥남 철수도 이었는데 당시 1,200만 북한 인구 중 3백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따라 내려왔다.
오르내리면서 격전 중 잡힌 포로를 어디에 수용할까 하다가 거제도로 정했다. 육지와 가까워 수송하기 수월하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에 포로가 된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이다. 고현과 상동, 용산, 양정, 수월, 해명, 저산 지구 등 드넓게 설치했다. 인민군 15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여자와 의용군 3천 명 최대 17만 명 넘게 머물렀다.
이곳에서 반공포로와 공산 포로 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벌어졌다. 포로 소장 돗드 준장이 납치되는 불미스러운 사건까지 있었다. 휴전협정 이후 폐쇄되었고 친공 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보내졌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 주는 민족 역사교육의 장소이다. 곳곳에 그때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다.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대립의 원인은 제네바협정에 따른 자동 송환이 아닌 자유 송환을 국제연합군 측이 주장하면서부터이다. 제76수용소의 공산 포로들은 수용소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했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했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 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 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과 폭행, 학대 등을 거부했다.
평양 지시에 따라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은 국제연합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를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한다. 돗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그 과정에 105명의 반공포로가 공산 포로에 의해 살해된 사실이 드러난 아수라장의 현장이었다.
미군 연인원 170만 명이 들어오고 16개국 지원군이 속속 부산항을 거쳐 전선으로 올랐다. 병원선과 난민 구호금품이 수십 개국에서 답지했다. 미국은 거대한 군함에다 전투군인과 군수품 외에 가축 수천 마리와 많은 양봉 통, 달걀 수십만 개를 보내 병아리를 만들어 카우보이들이 전후 어려운 가정을 찾아 집집이 전달했다. 온갖 먹을 것들과 입을 구호물자를 바리바리 실어 날라 굶주리는 사람을 살려냈다.
길거리를 떠도는 어린이를 일일이 데려와 군부대에서 먹이고 재웠다. 대구 전투 비행대를 급히 만든 헤스 소령은 9백 명이나 되는 이 어린이를 임시거처지 제주농업고등학교에 옮겼다. 작전 중인 16대 수송 비행기로 실어 날라야 했다. 백악관의 특별 허락으로 그 바쁜 1.4후퇴의 긴박한 전쟁 중에도 ‘꼬마 자동차’라는 작전명으로 이동했다.
목사 안수받은 헤스는 조종사를 자원해서 맥아더 보좌관으로 참전한다. 한국군 조종사를 교육 시켜 일본에서 10여 대의 무스탕 전투기를 들여온다. 앞장서서 뱀처럼 긴 인민군 전투부대 차량을 집중 폭격으로 분쇄했다. 이어 북한 전투비행장과 보급창, 군사기지, 철도, 도로망을 폭파해 전투 능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공로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신념(信念)의 조인(鳥人)’이란 전투기 이름과 빨간 머플러를 목에 걸어주며 아들처럼 대했다. 맥아더의 특별 명령으로 어린이를 보호한 헤스이다. 어찌 이 일을 잊으리오.
미군 여러 전투사단이 국군과 함께 공산군을 막았다. 일부 유엔군은 미군 사단에 배속되어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싸워 전진해 올라갔다. 그 막대한 비용을 미국이 댔다. 전투 비행기와 전차, 차량, 전투 장비, 총포탄, 급식, 피복 등 미국 국민이 낸 세금이다. 전선에서 죽어가는 귀한 생명은 얼마나 아깝나. 이 모든 게 친구 덜레스와 맥아더의 도움이다. 맥아더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하는 바람에 현지 전선에서 쫓겨났다. 삼팔선을 넘어 평양을 빼앗고 신의주 압록강까지 치올랐다. 하얗게 눈에 덮인 압록강 주위 국경을 알아볼 수 없을 때 건너 만주를 폭격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속속 부산항에 들어올 때마다 토성동 대통령관저를 나와 직접 부두에서 따뜻이 맞아준 백발의 이승만이다. 그중에서도 머나먼 아프리카 가난한 에티오피아 군대가 들어올 때는 감격스럽게 그들을 부둥켜안고 어루만졌다. 미군 7사단에 배속되어 가평과 춘천 전투에서 인민군과 중공군을 맞아 싸웠다. 그런 중에 굶주리며 죽어가는 어린이를 거뒀다. 폭격으로 부대가 파괴되자 옮겨 다니는 급박함 속에서도 보호했으니 고마워라.
파시즘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다. 셀라시에 황제는 유럽으로 올라가 도움을 청했지만 돕겠다는 말뿐이었다. 애국 청년들과 죽음을 무릅쓴 지하 유격대 저항 끝에 침략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았다. 갓 창설된 유엔에서 유엔 전투군대를 설치하여 억울하게 피해를 받는 연약한 나라를 도와야 함을 역설했다. 유엔군이 만들어졌고 그 첫 번째 도움을 준 참전이 한국전이다.
영국군이 한국 지형에 맞춰 교육한 뒤 미군 수송함에 태워져 달포 항해 끝에 닿아 한국전을 수행했다. 오랜 가뭄으로 농사가 황폐해지고 목초지가 메말라가자 가축의 떼죽음이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좌파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켰다. 셀라시에 황제는 구금되어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고 참전 군인들은 체포와 재산을 박탈당했다. 은신해서 사막이나 산속에 숨어지내야 했다. 뒷날 두 분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이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춘천에 그들을 위하는 기념관을 세웠다.
수십만 명 부산 시민이었는데 피난민이 함께하면서 백만 가까운 복작거리는 최남단 도시 사람들로 들썩거렸다. 배로 기차로 내려온 마지막 거처지이다. 깡깡 추운 겨울 중공군이 물밀듯이 들이닥치자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할 때 퇴로가 막혀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사방에서 꽹과리와 북, 장구, 피리를 불며 엄청나게 많은 군사인 양 옥죄어왔다. 미 10군단 소속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 제3사단 3만여 명과 국군 1군단, 영국군 일부 10만여 명이다. 자고 나면 동사자가 생기는 등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퇴로를 찾아야 했다.
여기에 수십만 명 북한 동포도 따라나섰다. 흥남철수작전은 각종 함선 132척이 동원되어 보름간이나 이뤄졌다. 목적지는 부산과 마산, 거제, 울산, 포항, 울진, 묵호 등이었다. 마지막 배는 메러디스와 빅토리아 화물선으로 7,600톤이다. 전쟁 군수 물자를 실으러 왔다가 모두 내버리고 수만 명이 오글보글 사나흘을 굶주리면서 남녘으로 내려온 피난민 선이다. 서울역과 수원역 마지막 기차에는 개미 떼처럼 매달려 종착지 부산으로 밀려든 행렬이다.
언론인 김홍삼은 당시 흥남 부두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군 상륙함정이 부두에 닿아 그물망을 내렸다. 피란민이 서로 먼저 타려고 죽기 살기로 몰려들었다. 밟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물에 매달려 기어오르다 떨어져 죽은 사람이 즐비했다. 주인 잃은 피란 보따리가 산처럼 쌓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을 에는 혹한의 연속이었다. 부두를 빠져나간 배가 다시 돌아오려면 며칠씩 걸렸다. 얼어 죽은 시신이 매일 밤 수없이 버려졌다.”
이틀 밤낮을 달려온 배는 부산항에 닿았지만 많은 피난민으로 북적여서 거제도 장승포항에 내렸다. 콩나물시루와 같은 피란민으로 지극히 위험했다. 쓰레기와 배설한 오물로 그득했다니 가관이다. 그런 수송선 내에선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 항해 중에 배 안에서 모두 다섯 명의 아이가 태어나 김치1, 2, 3으로 명명했다. 이는 크리스마스 기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집집이 방과 마당을 내줘도 거처지가 모자라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디. 사십 계단 층층대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갈 곳이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다. 부산역 맞은편 언덕바지에다 지푸라기를 깔고 덮고 잤다. 초량과 영주동, 중앙동까지 산기슭은 온통 천막과 판자, 거적때기로 가득 찼다. 밤낮 북새통이다. 사는 게 아옹다옹 또 다른 전쟁이다.
이곳에 그만 불이 나 전소하고 말았다. 하나 건질 것 없이 황량한 땅으로 변해버렸다. 전쟁통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이승만에겐 근심 걱정이 늘었다. 오글보글 복작거리며 살기 힘든 임시 수도 부산 바닥에 또 다른 난리가 생겼다. 수만 명이 길거리에 나 앉아야 했다. 당장 먹을 것 입을 옷에다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리차드 위트컴’이다. 한국 참전 미군 장성으로 군수사령관이다. 황망한 표정의 고뇌에 찬 이승만 얼굴을 보고 돕겠다 맘먹었다. 군법을 어기면서 군수창고를 헐어 담요와 군복, 천막, 먹을 것을 나눠 줬다. 이 일로 장군은 연방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해 오래도록 박수로 답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 군수기지를 이승만에게 돌려주면서 그 자리에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했다. 부산대학교이다. 귀국하지 않고 계속 남아서 도왔던 판자촌 언덕 자리에 메리놀병원을 지어 어렵고 헐벗은 사람들을 치료했다. 병원을 세울 때 힘들어서 갓에 도포를 걸치고 기부문화를 장려하고 조성하기에 애쓴 그이다. 장군이었는데 체신 없는 일이라 말해도 개의치 않았다.
고아원을 하는 한묘숙 여사와 결혼해서 그들을 돌봐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렸다. 장진호 미군 유해를 찾아달라는 유언에 따라 아내 한묘숙은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길쭉길쭉한 유해만 나오면 가져왔다. 300불씩 꼬박꼬박 지급하면서 유해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하와이를 통해 되돌려받은 국군도 있었다. 장군의 재산과 연금은 모두 이렇게 쓰였다.
부산 유엔공원묘원에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이다. 아내와 함께 합장되었다. 죽어 40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나마 70여 년 전 불타버린 판자촌 후손 수만 명이 모여 장군의 조형물을 만들고자 헌금하는 데 모두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정부에서도 장군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는 소식이다.
16개 참전 유엔군 중 터키군도 잊을 수 없다. 부모 잃고 팽개쳐진 아이를 보살핀 군인의 얘기가 눈길을 끈다.
인민군이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쳤다. 전차가 짓밟은 뒤 폐허가 됐다. 달 밝은 밤 이곳을 정찰하던 터키 병사들이 동물 소리 응응거림을 듣고 적인가 경계하며 살폈다. 시월 말 으스스한 곳에 춥고 허기져 기진해 쓰러질 듯이 앉아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슐레이만 하사가 안고 어찌할 수 없이 부대로 데려간다.
마을 사람과 부모가 죽어 나뒹구는 시신 더미 속에서 멍하니 말 못하고 찡찡거리기만 하는 어린이였다. 탕탕탕 마구 총을 쏘며 죽이고 불태웠다. 참혹한 마을로 쑥대밭을 만들고 지나갔다. 아직 타고 있는 매캐한 연기 속에 엄마 아빠를 부르다 지쳐 말 못하는 둥근 얼굴의 아일라(ayla)이다. 달처럼 예뻐서 지어진 터키 이름이다.
부대 안에 이리저리 다니며 철없이 구는 여자 아일라로 전장 병사들의 즐거운 웃음거리였다. 아이는 비타민 같아 사랑을 듬뿍 받는다. 목을 덮는 텁수룩한 머리를 깎이고 모포를 잘라 옷을 만들어 입혔다. 슐레이만이 한참 훈련 중일 때도 졸졸 뒤 따라다닌다. 하나. 둘 번호를 외치면 옆에서 같이 한다. 앞으로 갓. 차렷. 하면 곧잘 그대로 흉내 낸다.
말문이 트여 ‘바바’라며 슐레이만을 아빠라고 부른다. 어디든 응애처럼 붙어 지내며 눈길을 매달고 사니 바쁜 전쟁 통에 성가시다. 그런 가운데도 정성을 다하는 슐레이만이 한없도록 돋보인다. 어찌 그리할 수 있을까. 거치적거리는 아일라를 대하는 그의 그윽한 눈매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내무반 구석에 자리를 만들어 잘 자라 안아 눕혀주면 자다가 저쪽 슐레이만 침대로 가 옆에 꼬꾸라져 잔다.
우유를 구해다 먹이면 발칵발칵 넘기고 한국 사람이 없어 터키 말을 하나하나 가르치면 그대로 외워 곧잘 하는 아일라이다. 부대 전선 이동으로 산 고개를 넘어가는데 시동이 꺼진 차량을 고치다가 그만 적군의 기습을 받는다.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도 아일라를 차 밑으로 밀쳐 넣고 숲속 중공군을 향해 필사의 반격을 가한다.
옷을 기워주고 머리를 깎아주며 목욕시켰다. 우유와 먹을 것을 구해주고 시간 날 때마다 찾아와 싱겁게 허드레 몸짓으로 웃겨주던 터키군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풀죽은 색 카키 옷을 입은 적군이 좌우 산기슭에서 막 내려온다. 총탄 소리에 놀라 앞서가던 부대가 급히 뒤돌아오며 엄호사격을 해준다.
그 가운데 오직 아일라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싸우는 슐레이만이다. 한국 정부에서 훈장을 주고 특별휴가를 받아 일본 동경으로 갔을 때 아일라도 데려간다. 맛있는 음식과 볼거리, 장난감을 안고 부대로 돌아온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교체부대가 도착해서 교대해야만 한다. 공습으로 부대가 난장판이 되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인데 아일라를 버려두고 어디 갈 수 없었다. 몇 달을 더 보듬었는데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수원에 있는 앙카라 보육원에 맡기고 떠난다. 어느새 뒤쫓아와 ‘아빠!’ 한다. 가다 말고 길거리에서 한참이나 보듬었다. 큰 가방에 넣어 몰래 가다가 공항 검색에서 그만 발각되어 이내 들통이 나고 만다. 느닷없는 세월은 흘러 60년이 지났다. 눈에 삼삼하고 ‘바바’하는 말이 귀에 쟁쟁하다. 다 살기 바빠 생각뿐이었다. 늙어만 가는 슐레이만은 ‘꼭 찾아올 게 그땐 우리 헤어지지 말자.’ 한 약속을 죽기 전에 지키고 싶었다. 아내와 함께 외교부와 알릴 수 있는 곳을 통해 여러 차례 수소문했다. 돌아오는 답신은 이름이 바뀌어 아일라를 찾을 수 없단다.
지구 반 바퀴나 돌아가야 하는 저편 한국은 무려 8천 킬로의 머나먼 나라다. 한국 지형에 맞게 훈련한 4,500명이 커다란 미국 군함으로 한 달이나 걸려 부산항에 닿았다. 어찌 그리 쉽게 가지겠나.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 문화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찾게 되었다. 그들의 주선으로 한국에 오게 됐고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앙카라공원에서 극적인 만남을 갖는다.
팔순이고 육순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재회하는 날이다. 그윽한 눈매로 일 년 넘게 아일라를 안고 보살폈던 이제 백발이 다된 슐레이만이다. 저쯤 다 큰 아들딸 셋을 데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김은자 아일라를 단번에 알아보곤 달려간다. 안고 쓰다듬길 오래 한다. 남편이 일찍 세상 떠나 아이 키우느라 행상에서 청소부까지 팍팍한 삶을 산 아일라이다. 남루하고 꺼칠한 얼굴이 말해 주었다.
2002년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이 태극기와 초승달에 별이 그려진 터키 국기를 흔들며 함께 ‘이겨라. 이겨라.’ 소리 소리친 것이 엊그제만 같다. ‘형제의 나라’라 불렸는데 이제 그 말을 이해하게 됐다. 한국전쟁 때 참전 연인원 일만오 천명이 미국 다음으로 서둘러 와서 인민 공산군과 중공군을 막아주었다.
7백여 명이 사망하고 2천 명 넘게 다쳤다. 행방불명과 포로로 잡힌 인원 또한 4백 명이 넘는다. 미군 사단 예하 연대 소속으로 아까운 젊은이가 그리도 많이 전사했다. 유엔에서 한국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해준다. 유럽을 잇는 해협의 교량과 온갖 토목공사를 발주해 주고 제품을 구매하는 피를 나눈 정말 형제의 나라이다.
‘잔 울카이’ 감독의 ‘아일라’ 영화는 터키에서 500만 관객을 동원하여 일약 흥행으로 올라섰다. 이듬해 2018년 한국에서는 5만 명 관객이다. 개봉관 확보가 어려웠고 홍보 부족이었다.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다. 어찌 허망하게 흘러갔나. 감쪽같이 지나쳤다. 이리 좋은 영화를 쥐도 새도 몰랐을까.
뒤늦게 유튜브를 통해 봤다. 아내는 아역 ‘김설’ 아일라의 늙은 모습에 훌쩍훌쩍 눈물을 훔쳤다. 수렁에서 딸 아이를 건져내 거둬준 슐레이만이다. ‘영광의 앙카라’를 부르던 수원 ‘앙카라보육원’이자 학교는 없어졌다. 터키 유엔군을 기리는 앙카라공원만이 덩그렇게 남았다.
토성동 임시수도관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결재하러 온 편수국 최현배에게
“내 이름은 리승만인데 왜 자꾸 이승만으로 쓰시오.”
라는 언성 높은 말에
“각하, 두음법칙으로 사용하면 발음하기 편합니다.”
하자
“성경대로 쓰시오.”
느닷없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 일로 고심을 거듭하던 편수국장은 전란 중에 이승만 대통령을 보좌해야 함에도 꼿꼿한 성정을 억누르지 못해 사직서를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냈다. 뒤이어 장관도 자리를 털고 나온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이 잘 풀어지지 않아 가까운 사람에게 역정을 낸 것이 큰 사달로 번졌다.
이승만은 백악관에서 회담하다가도 트루먼 대통령을 향해서
“이런 고약한 사람이 있느냐.”
면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낼 때도 있었다. 이런 수모를 받아 가면서 한국을 도와준 사람이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도와줬다. 첫째는 한국전쟁에 파병한 것이다. 잠자리에 들려다 북한군 남침 보고가 들어왔다. 대부분 정치인은 계산부터 하게 된다. 이 전쟁이 본인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관해 생각하게 마련이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미군 참전을 결정했다. 용기 있는 결정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그 순간을 위해서 하나님은 기차 검표원과 작은 상점을 한 시골 출신 고졸의 트루먼을 대통령으로 세우셨다. 얄타회담 직후 뇌출혈로 돌연 병사한 루스벨트 뒤를 이어 부통령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올랐다. 대단한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고 처리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은 뒤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생각해 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재선이 어렵게 보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박빙의 차이로 당선되자 다시 대통령의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버드와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꿈을 꿨다. 시골 가난한 생활로 모두 이루지 못하자 맥아더와 이승만을 부러워했다. 특히 하버드를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 대통령이다. 돕겠단 마음을 먹은 것으로 짐작된다. 맥아더와 같이 굉장히 올곧고 오만한 성격이다. 망해가는 나라를 건졌음에도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확전을 피해 사관학교 수석 졸업의 부러웠던 맥아더는 해임했어도, 한국과 이승만은 어찌해 볼 수 없었다. 국무장관 애치슨이 방위선을 내려 제외한 나라인데 한번 발을 걸치자 뺄 수 없이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두 번째는 철수론이 강했다. 조셉 케네디도 공개적으로 한국을 포기하라고 말했다. 명문가 출신에 정치 감각이 뛰어난 자들은 모두 한국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요구를 거절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영국 에틀리 수상은 한국에 배치된 병력을 유럽으로 철수시키라 제안했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이다.”
오히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며 한국에 쏟아부었다. 국방예산을 올리고 중국군과 맞서 싸웠다.
“우리가 한국을 버린다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고마운 트루먼의 생각이다.
“우리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철수를 거절하고 비상하에 많은 전비를 들이부으면서 의리있게 행동했다. 수십만 명의 귀한 미군 희생자를 내고 전쟁은 멈췄다. 당시 트루먼은 한국전에 막대한 물자와 군인을 투입한 것에 대해 대내외적으로 거친 비판을 받았다. 오늘날의 한국은 고마운 미국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트루먼을 잊을 수 없다.”
낯선 땅 조그만 나라 한국을 돕기 위해 수만 명의 아까운 미군 전사자와 수십만 명의 부상자를 내고 막대한 전비를 들였다. 유엔군과 병원선, 보급선을 보낸 수십 개 국가의 비용이 모두 미국민의 귀한 달러이다. 중국 광활한 공산화 물결에 밀려 방위선을 아래로 내렸던 나라이다. 아시아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나라 전쟁에 지친 미국 국민이다. 의회에서도 비난이 일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기약 없고 가망 없는 전쟁에 싫증이 났다. 아이젠하워도 대선 공약으로 한국전 휴전을 내걸었다.
눈치챈 이승만이 노발대발한다. 현 전선에서 전쟁을 멈추고 싶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남한 수백 배 크기의 소련과 중국, 호시탐탐 적화를 노리는 머리맡 북한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 뾰족한 수가 있기나 하나. 영락없이 공산화되고 만다. 그를 막을 힘이 우리에겐 없다 없고말고. 잘 도왔던 우방국이 이대로 두고 떠나면 우린 어쩌나 낭패다 이럴 수 있나.
얌전하지 않았다. 도와준 것에 고마워하는 마음도 없어 보인다. 호락호락하거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휴전에 걸림돌이 되는 이승만에게 화난 미국이다. 감사하기는커녕 배은망덕한 게 아닌가. 제거해야겠다 맘먹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에겐 자살할 권리가 있다.”
이승만의 절박한 외침이다. 싸우다 죽겠다는 말이다. 그럴수록 더 거칠게 엇나간다. 헌병부대에 명령하여 여러 곳 거제와 부산, 창원, 대구 등 반공포로수용소 3만여 명 중 대부분을 풀어주어 탈출하게 한 일이다. 철조망을 끊어놓고 땅굴을 파놓아 그리로 도망가게 안내했다. 심하게 저항하는 미군에겐 얼굴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려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우선 급한 대로 마을 민가에 숨을 수 있도록 미리 도움을 취해뒀다. 군인이 부족했던가 아직 앳된 어린 소년병도 있었다. 무서운 승냥이 미군과 남한군이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김일성에게 발갛게 속은 것이다. 부모 형제가 있는 북한 땅으로 가지 않겠다며 남한에 살겠다고 한 반공포로이다. 어찌 됐든 애초에 적군으로 내려왔다는 이유에서다. 제네바협정에 따라 무더기로 교환하려는 데에 분노한 이승만이다.
그들을 모아놓고 앞에 선 78세의 이승만은
“이제 너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야.”
세계가 다 놀랐다. 중국은 크게 화를 내며 그냥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전쟁 막바지에 주고받는 포로 교환이 더뎌지고 있다. 아니 중단되고 말았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적을 만났다.”
분노로 외쳤다.
난처한 미국이다. 장관을 보내 협상을 요청했다. 이승만을 달래 봐야지 그냥 뒀다간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무서운 사림이다. 다시 되돌려 말을 바꾸고 한국을 돕겠다 나섰다. 로버트슨 국무부 특사단을 보냈다. 보름 넘도록 긴 협상을 이어 나갔다. 전후 복구와 경제 지원에다 당시 8억 달러 커다란 지원을 약속받았다. 가장 중요한 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혈맹으로 맺어졌다.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명한 이 조약으로 2020년대 70년 동안 북한이 함부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남한만의 평온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날 동문수학했던 정계와 학계의 친구 도움이 컸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이다. 미국의 초청까지 받았다. 79세의 고령에도 꼬장꼬장하게 미국 땅을 밟았다. 뉴욕 중심거리를 매운 수많은 환영인파와 카퍼레이드, 웅장한 음악, 높은 건물에서 쏟아져 내리는 오색 풍선과 형형색색 날림이 휘황찬란하다. 전현직 대통령의 극진한 예우로 일약 등극의 길이 파격이다. 다른 나라 정상도 이랬을까 싶다.
국회 연설이다.
“존경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님, 각부 장관님, 의원 여러분, 각계 인사와 위대한 미국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어 특별히
“전국의 어머님, 먼 나라 한국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귀한 자식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엔 눈시울이 붉어진다. 모두가 일어나 열렬히 힘찬 박수로 맞이했다. 미군 주둔의 중요성을 강조한 연설에 수십 번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유수의 대학을 거쳐 국제 정치 석학으로, 보기 드물게 위대한 세계적인 대통령을 만나는 날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정치인의 진실이 뚝뚝 떨어지는 말에 목메었을 것이다.
미군은 1950년 7월 1일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후 3년 1개월간 전쟁을 치렀다. 17만 명이 희생됐다. 8천여 명의 실종자와 7천여 명의 포로, 거기다 평생 힘들게 살아야 하는 10만여 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전사자가 5만 명이 넘으니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감동을 넘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장군의 아들이 참전한 일이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아버지가 의정부에서 순직하자 시신을 운구한 아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벤플리트 장군의 아들 지니 벤플리트도 조종사로 전폭기를 몰고 평안남도 순천에서 야간 출격 중 대공포에 맞아 전사한다. 미 해병 1 항공 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의 아들 윌리엄 해리스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때 장진호 전투에서 죽음을 맞았다.
미 중앙정보국 알렌데라스 국장의 아들 데라스 2세도 해병 중위로 참전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평생 상이용사로 살아간다. 미 극동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육군 대장의 아들도 부상이다. 의회 의원의 가족이 참전해 훈장을 받았는데 그 사상자도 1백 명이 넘는다. 1차 대전보다 많은 수였다니 한국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말함이다.
그뿐이 아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한국전쟁 발발 시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갓 임관한 꽃다운 신임 소위 110명이 참전해서 절반 가까이나 전사했으니 가엾으며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위험하고 어지러운 한국전쟁 현장을 찾았다. 갓 당선되어서이다. 최전선 여러 곳을 마다하지 않고 둘러보았다. 미 제8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령관이자 막역한 후배인 밴 플리트로부터 전선 현황에 대해 보고 받았다. 조용히 다 들은 뒤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장군, 내 아들 존은 지금 어디에 근무하고 있습니까.”
첫째 아들이 어려서 병사한 뒤 외아들 격인 둘째가 한국전에 참전했다. 지극히 사적인 질문에 당황이 되어 망설이다가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미 제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현재 중부 전선의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다음 말을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빼주시겠습니까.”
이는 바로 얼마 전에 외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가 듣기에 몹시 거북한 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탁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젠하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군,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포로가 된다면 적들은 미국과 흥정하려 들겠지만 결단코 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국민이 고초를 겪는 대통령 아들의 모습을 보고 이것은 미국의 자존심 문제이니 즉시 구출 작전을 펼치라고 한다면 장군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단지 내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작전에 차질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장군은
“각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대통령의 아들이 이 나라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런 나라가 미국이다. 이 많은 빚을 갚을 날이 오기나 하려나.
주둔군이 공격받으면 의회의 동의 없이 바로 반격을 할 수 있다. 육해공군 주둔 미군을 전국 곳곳에 두었다. 특히 전방 주요 길목에 전투사단을 배치했다. 모든 분야에 미국의 지원으로 경제성장과 공업 기술을 발전시켜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내용도 들었다. 전쟁 나면 그때 서둘러 참전하는 게 아니라 평상시에도 계속 전선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위조약의 나라다.
세계에서 놀랍게 민주정치와 경제, 공업, 교육, 기독교가 발전한 한국이다. 군사력도 뛰어나다. 우리가 만든 휴대전화가 온 세상을 누빈다. 오대양을 떠다니는 대형 배들의 상당수가 우리 조선소에서 만든 것이다. 현대와 기아, 삼성, 쌍룡에서 만든 자동차가 각 나라 간선도로와 골목을 누비고 굴러다닌다. 첨단 기술인 반도체가 모든 분야 온 시장을 휩쓸고 있다.
한국형 원자력발전기를 만들어 전력을 생산하는가 하면 수출길에도 나섰다. 나로도 우주 발사장에선 인공위성을 올려 변화무상한 기상을 관측해 대처하고 군사 정찰로 동태를 살피는 데 유익하다. 우리 손으로 만든 고속철과 지하철이 전국을 달린다. 미제니 일본 제품 하던 게 사라진 지 오래다. 고급 의료와 각종 화학 제품, 건축 장비, 교량, 터널, 대형 차량, 의류와 전자 물품, 주방기기 생활용품을 막 만들어낸다. 못 만드는 게 없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투기와 전차, 자주포, 대공 미사일 등 군사 무기가 동남아와 중동에서 그 성능을 인정받았다. 이어 유럽에도 대량 판매가 이뤄지니 어찌 된 일인가 얼떨떨하다. 공업과 방위산업 선진국이 대량 구매를 할 수 있는가. 최신형 전투기와 군함, 잠수함 등 생산도 이뤄져 양산에 들어갔다. 대형 지대공 미사일과 방어 장비도 개발했다니 이승만을 도우려는 애당초 미국의 눈부신 협력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 모두 미국의 자금과 기술 지원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지나치거나 허투루 말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과 한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다. 유학 시절 사귄 친구들의 덕택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의 인격이 이리 위대할 수 있을까. 조그마한 나라 대통령의 말을 누가 믿고 따라 주겠는가. 그것도 잠시지 이리 긴 세월 동안 상호방위조약과 경제 지원을 아끼지 않을까이다. 헌신짝처럼 버리고 팽개치는 세상인심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굳건한 한미 동맹 이후 오늘까지 큰 외세 침략은 한 건도 없었다. 푸에블로호 납치사건과 판문점 도끼 만행, 연평도 포격, 무장 간첩의 청와대 기습에 이어 강릉 침투 등 소규모가 있었다. 5천 년 역사에 9백여 차례나 전쟁에 휘말려 쑥대밭이 됐다. 5년 주기로 이어졌으니 한 많은 민족이다. 봄에 풀이 돋듯 소생해서 살아온 가엾은 역사이고 그 민족이다.
미국 도움 이전만 해도 많은 평양 시민이 중국 일본 저들끼리의 청일전쟁으로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러일전쟁과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우리 국민을 얼마나 괴롭혔나. 36년간 일베 치하에서 겨우 숨 쉬고 눈치 보며 산 세월이 기막히다. 태평양 전쟁에 이모저모로 끌려간 사람이 수백만으로 놀라운 숫자이다. 당시 2,500만 명 중 700만 명이라니 나라 잃은 것이 이다지도 슬픈 역사인가. 부산에 있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보라. 거기다 한국전쟁은 기가 막힌다. 같은 민족끼리 치고받아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평생 장애우가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김활란 여사가
“이승만은 워싱턴과 제퍼슨, 링컨을 합친 인물이다.”
이 나라의 건국 대통령이 아니라 세계적인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높이 높이 치켜세웠다.
휴전으로 일단 물러가 있는 것이다.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면 유엔 상임이사회의 허가 없이도 유엔군이 그대로 들어와 적과 대치해 물리친다. 전선 곳곳에 유엔 감시초소가 있다. 지난날처럼 북침이다. 남침이다. 말할 수 없다. 남한 전역으로 날아갈 수 있는 다연장 포탄을 쏘며 연습 사격을 벌이고 있다. 미주까지 갈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고 각도로 발사하며 연일 핵폭탄 위협이지만 녹록지 않다.
우리의 군사력도 뛰어나다. 세계에서 열 손가라 안에 들어간다. 전쟁 발발로 이어지면 북한 전역의 군부대 수십여 곳이 일시에 남한 현무 미사일의 정밀 포격을 받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가공하리만치 무서운 10톤 가까운 폭탄이다. 일찍이 우수한 공군력으로 제공권을 장악해 초토화되어 정권 종말을 맞을 수 있다. 미국과 남한을 겨냥한 핵폭탄도 으름장이지 실전 사용은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지난날 남한 내 끈질긴 빨치산과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승만에 의해 분쇄된 좌파 활동이 지금도 문제다. 적군만치나 무섭게 설쳐대고 있음을 본다. 이념 갈등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민주주의 근간을 많이 흔들어놨다. 호시탐탐 예전의 공산화된 월남 베트콩 공작처럼 적화통일을 위해 안달이다.
날만 새면 국민의 피로도를 높여주는 평화협정, 종전협정, 미군 철수 등 흑백 정치 선전으로 해가 뜨고 진다. 그래야만 유엔군이 해체되고 미군이 철수하게 되며 적화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충청도 양반 고장의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를 거쳐 온갖 변장으로 서울에 잠입해서 남한 공산화를 꾀했다. 위폐까지 만들어 전국적 남로당 조직을 완성하려다 들통났다. 관속에 들어가 시체로 위장해서 북으로 넘어갔다. 연암파 김두봉,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소련파 허가이와 함께 갑산파 김일성 수상을 보좌하는 부수상이 됐다.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활동하다가 평양에 들어갔다. 그런 혁명 동지를 얼싸안고 맞아들였다가 뒤이어 사정없이 후려쳤다. 수정공산주의자란 이름으로 파란만장한 공산 혁명가들을 하나하나 숙청해 나갔다. 인민군이 내려가면 남로당이 벌떼처럼 지지해 적화에 성공할 것이라 했는데 실패한 것을 들이댔다. 첩자란 죄명을 씌워 전원회의 석상에서 바로 체포해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남로당원들을 속결 재판으로 처리했다.
박헌영만은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녀 공산 이론에 밝았다. 크렘린 지지의 그에겐 신중해야 했다. 어찌할 수 없어 신의주 아래 철산교도소로 옮겨 독방에 감금됐다. 여러 해 동안 남조선과 미제 간첩 혐의 인정을 강요받았다. 지난날 감옥에 있을 때 인분을 먹고 미친 행동을 하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수염을 달았다 뗐다 교묘한 위장으로 알아볼 수 없다. 모진 고문을 이겨낸 지독한 그였는데 견딜 수 없어 결국 응하게 되고 곧바로 이마에 권총 두 발을 맞아 생을 마쳤다.
월맹이 베트남을 접수했을 때도 공산화에 앞장섰던 베트콩을 먼저 처형해 나갔다. 아류를 용서하지 않는 공산국가이다. 다 같은 붉은 것이 아니다. 속까지 붉어야 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사과는 속이 희다. 포도는 푸르다. 토마토처럼 안팎이 새빨개야만 한다. 옆의 캄보디아 총리 폴포트도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이름났다. 그때 죽은 사람의 머리뼈가 몸서리치게 무더기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죽여 머리를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인간을 덧없이 죽이는 이게 어디 사는 곳인가. 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다.
이다지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든 이승만은 73세에 초대 대통령에 올라 2대, 3대를 이으면서 십여 년 이 나라 건국을 다져 나갔다. 그러다 4.19 학생혁명을 맞았다. 시위가 광화문을 시끄럽게 해도 즐거운 일이라 둘러댔다. 얼마 뒤 경찰의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김을 알게 되자 병원을 찾아갔다. 다친 학생을 안고
“내가 맞아야 하는데 그대들이 다쳤다.”
며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니 나는 성공한 것이다.”
란 말을 남겼다. 바로 직위를 내려놓고 이화장으로 옮겼다. 며칠 뒤 독립운동하던 고향 같은 곳에서 얼마간 쉬려 하와이로 떠났다. 그때 나이 85세이다. 자택으로 갈 때와 출국할 때 연변의 수많은 국민이 그를 맞이했고 환송했다.
2공화국 민주당 장면 정권이 이어받았다. 다시 어수선한 나라를 군인이 들고일어나 다잡아나갔다. 5.16쿠데타가 발발했다. 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의 혁명 군인들이 문민정부를 밀어내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반만년 가난에 허덕이던 삶을 잘 사는 국가로 세워보겠다며 공약과 함께 새마을 정신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승만의 각별한 도움을 받았던 장본인이다.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9연대가 나섰지만 어려움을 겪자, 여수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여순반란으로 번졌다. 출동은커녕 시내와 순천까지 관공서와 지주, 기업인에다 민간 살상까지 벌어져 삽시간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이들을 진압하면서 군부대의 좌익 색출에 나섰다.
군 장교와 하사관들 다수가 연루됐는데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 총책임이 드러났다.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구형받았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한국 육군사관학교 2기 졸업을 우수하게 마친 뛰어난 장교이다. 그를 아깝게 여긴 이승만이 백선엽 대령의 사면 권고를 받아들였다. 남로당 군사 조직도를 제출해 공작을 무너뜨리는데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현역에서 예편되어 육군본부 작전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했다. 6.25 전쟁이 나자 다시 소령으로 복직시켰다. 곧 중령으로 올라가고 이내 대령으로 진급했다. 전쟁 때 군에서 중요한 포병 장교를 하다가 장군 반열인 준장에 오른다. 좌익 전력이 있는 그에게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승만은 계속 밀어붙이고 일으켜 세워줬다.
미국 오클라호마 유학의 길도 터 줬다. 인사차 경무대를 찾아온 박정희에게 여비를 손에 쥐여주며
“미국 선진문화를 배워오라.”
일렀다.
보병 5사단장 때 많은 눈으로 내무반이 무너져내렸다. 이때 수십 명의 젊은 군인이 눈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참혹하게 압사당했다. 정일권 참모총장이 전역 신청서를 갖고 와 재가를 기다렸다.
“이 일이 인재요, 천재요.”
이승만 대통령의 물음에
“천재입니다.”
총장의 대답이다.
“그러면 용서해 주시오.”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박정희는 사단장에서 물러나 쉴 겸 육군대학교에 들어가 군작전과 지휘 통솔 교육을 연수하다가 졸업했다. 다시 드높은 소장 진급 물망에 올랐다. 어려울 때마다 이승만이 도와주곤 했다. 거리낌 없는 군 가도를 달리는 박정희다. 소장으로 오르자 6관구 사령관에서 2군 부사령관직을 부여받아 혁명을 일으켰다.
자리 잡은 문민 정권을 총칼로 불의하게 밀쳐냈다. 언제나 정권을 넘겨주겠다는 혁명 공약을 지키지 못한 채 스스로 가로챘지만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농업과 중화학공업 국가를 만들었다. 그가 지은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
새마을 노래는 협동과 새 희망의 노래로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과 같이 이승만이 만들어놓은 대한민국 민주국가 위에 번영을 가져온 박정희 대통령의 커다란 업적이다. 범인이 아닌 하나님이 내려준 사람이다. 사형에서 사고로 여러 번 사라지고 잊어버릴 그였다. 그때마다 은혜의 손길이 이어져 살려낸 것이다.
이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
교민회장의 안내로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가르쳤던 수많은 학생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다 커서 어른이 되었으며 섬을 주름잡고 있다. 파란 눈의 프란체스카 부인과 함께 양아들 이인수 내외가 정성껏 보살펴 드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는데 이렇게나 보잘것없을까이다. 세상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독립투사였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나. 집도 절도 없고 이웃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엾은 신세이다.
동포들 옆에서 곁방살이하다 귀국하려 하와이 공항에 이르렀을 때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불허의 소식을 듣게 된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뒤돌아서던 이승만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걷지 못한 채 휠체어에 몸을 담아야 했다. 그렇게 원기를 되돌리지 못하고 태평양 가운데 섬에 살다가 5년 뒤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잃은 듯 하와이 교민도 울고 화장한 시신 운구가 김포 가도에 들어설 때 인산인해의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고단했던 몸을 동작동 묘지에 뉘었다.
그는 아내와 아침저녁 기도하면서 나라 발전과 국민 행복을 빌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늘 암송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며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맨날 그 많은 연설문과 투고 기사 원고를 말없이 모두 타이핑 해 댔다. 수고하는 아내를 시원한 워싱턴 포토맥강 언덕으로 데려가 어깨를 두드리고 주물러주는 남편 이승만이다. 그때 불러주던 다정한 노래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오다가다 만난 임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독립투사로 드넓은 미국 전역과 유럽, 상해, 모스크바를 뛰어다녔다. 남북통일을 위해 2백여 회 위험한 전선을 일일이 돌아보았던 이승만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는 것 같다. 사람을 곧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다.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 먹는다.
독립운동가로 밤낮없이 미국 땅을 누비고 다녔다. 강연 시간이나 방송, 신문기자와의 약속 시간에 대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태풍처럼 질주했다.”
고 25세 아래인 아내 프란체스카는 말한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남편은 포토맥강과 호수에서 낚시를 즐길 때 서울 한강 광나루 낚시터 얘길 들려주곤 했다. 도라지타령을 흥얼거리며 가르쳐 주기도 한다. 남궁억이 지은 찬송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곧잘 불렀다. 젊을 때부터 장작을 잘 팼다. 항일이나 대북 일이 안 풀려서 울분이 쌓일 때로 보인다.
맨손체조를 하고 정구를 쳤다. 나무와 꽃을 가꾸는 솜씨도 뛰어나다며 얘길 이어가던 오다가다 만난 검소한 영부인도 이 박사 곁에 고이 잠들었다.
건국 때처럼 좌익의 설침이 무섭게 넘실댄다. 공산주의는 굶주리다 반드시 패망한다는 신념의 이승만이다. ‘건국 전쟁’의 필름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우남 그를 생각하게 하고 이 나라를 수렁에서 건져냄에 감사한다. 수십 명 시사평론가의 말씀이 쟁쟁하다. 훌쩍훌쩍 우는 사람들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자막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면서 마치자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공산당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농지개혁과 교육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반상이 사라졌으며 남녀가 동등해졌다. 더벅머리 상투와 패랭이, 짚신, 미투리도 없어지고 말았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을 가라앉히고 10여 년 동안 지루한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 5천여 명의 간첩을 색출해냈다. 수십만 명의 남로당을 숙청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원자력 협력으로 뒷날 발전소와 의료활동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한 사람의 노력이 이다지도 대단할 줄이야. 몽골리아와 중국, 일본의 침략으로 짓밟힌 전 국토와 피비린내 나는 살상이 얼마나 심했나. 남북한 전쟁으로 들볶이다가 파괴된 도시와 사상자 또한 얼마였던가. 긴 왕정으로 일그러진 관의 횡포와 악덕 지주에게 눌린 모진 역경의 소작농을 바로 잡고 일으켜 세웠다. 선거 때마다 후보를 읽을 수 없어 l, ll, lll, llll의 작대기 기호 숫자로 투표하던 무지몽매한 백성을 가르치고 남녀의 구별을 없앴다. 한미조약과 유엔군을 통해 국방을 튼튼히 한 이승만 위인을 만나 오늘날 눈부신 선진국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
방송인 최불암은 4.19 학생혁명 때 이승만 정권에 저항했다. 뒤늦게 공부해 보니 오해였다고 털어놨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정동 제일교회에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한미우남포럼회’를 개최했다. 이날 최불암 씨가 등단해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전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방송국에서 전원일기와 수사반장에 출연하던 중 드라마 ‘제1공화국’에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나는 과중한 출연 스케줄로 배역을 거절했는데 다시 간곡히 부탁해서 맡았다. 이어 배역 연구를 위해 이화장을 찾아 며느리 조혜자 여사를 만났다. 유품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이 입던 옷을 하나둘 보여줬는데 헤어져 짜깁기 한 옷을 내놨다.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산은 양복 2벌과 가방, 만년필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생전 이 박사가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었다고 전했다. 매우 검소한 사람이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조혜자 여사는 ‘대한민국의 현재 부유함은 이승만 대통령의 생전 검소한 생활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말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청년 시절 4.19 학생혁명에 동참해서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전 삶을 공부하니 그에 대해 너무 오해였다.’며 당시 혁명에 동참했던 친구들이 지긋이 나이 들어서 나눈 얘기에 따르면,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빌붙었던 보좌진들이 독재를 부추겼던 것이라고들 한다.
이어진 축사에서 김중환 회장은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했던 신익희 선생과 초대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신 선생은 이 대통령에 대해 ‘우남 이승만은 국내 정치에서 오점을 다소 남겼지만, 구한말 독립협회를 통해 민권운동을 펼친 이래 국가의 번영과 자유를 위해 투신한 사람이다. 해방 이후 국내의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애국자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두 분 덕택으로 한국은 세계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레마을 공동체 대표 김진홍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아침 묵상’에서 이승만의 공적 4가지 중 2가지를 설명했다. 건국 전쟁 영화를 인용해 말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공과는 7대3으로 여긴다. 다 잘할 수 없다. 잘잘못이 있기 마련이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최고의 업적이라 이른다. 해방 정국에서 국민 다수가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선호했다.
그 당시 미군정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새로 시작하는 정부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78%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택했다는 자료가 있다. 그런 시대에 유독 이 박사는 고집스러웠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민족의 살길임을 주장하여 그 덕으로 자유세계 아래 살 수 있게 됐다. 북은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남은 자유민주주의를 택해 경쟁에서 승리하게 됐다. 그러면서 나아가 다가오는 통일이 자유 나라로 된다면 우리 겨레는 단군 이래 최대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 한다.
둘째는,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게 한 공로이다. 북한군이 일거에 남침하자 보고받은 즉시 먼저 나에게 1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기도실에 들어가 간절히 ‘하나님, 이 나라 이 백성을 구해주시옵소서.’기도를 드린 후 미국 대사 무초를 불렀다. 본국과 유엔에 이 긴박한 일을 알리고 재빠른 구원을 요청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대위 김일성을 앞세워 전쟁 준비에 골몰했다. 수백 대의 탱크와 함정, 비행기를 물려주고 일본군이 만주에 버리고 간 무기로 인민군을 무장시켜 강하게 훈련했다. 아울러 장개석과 모택동 군대가 드넓은 중국 영토를 놓고 다투었던 강력한 중공의 8로군 5만 명을 인민군에 편입시켜 남침 때 도움을 줬다.
그들은 만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로 경험이 풍부한 정규군이다. 소련군 교관과 중공군 등 이래저래 당시 막강한 전력을 갖춘 북한 인민군이다. 전차와 비행기, 함정, 대포도 제대로 없는 아직 군 전열이 덜 된 열악한 남한군이다. 전투병도 절반밖에 안 된다. 전쟁 시작하면 일주일에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노라 기염을 토하는 김일성이다.
김 목사는 이런 상황에서 인민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국군이 막아내기에는 중과부적 역부족이었다. 이와 같은 처지에서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승만의 지도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외교에 천재란 별명이 붙은 이 박사는 먼저 일본에 주둔 중인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전선을 시찰케 했다. 이어 미국의 조야와 유엔을 움직여 공산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참여케 했다.
김구와 서재필, 이상재, 임영신 등 관계와 화폐, 방영, 영화를 알아본다. 먼저 김구와는 구한말 과거에 낙방한 경험을 가진 사이로 기독교인이다. 가까운 사이였다. 상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귀국해서도 승마장을 자주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일제에서 벗어나 이 나라의 장래를 같이 걱정해 나가는 걸맞은 정객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주의 이론과 공산주의에 싫증을 가진 이승만이다. 일찍이 구미 선진 세계에 눈을 뜬 그는 북의 김일성에 대해 달갑잖은 사람으로 여겼다. 민주와 인민, 평화를 거짓으로 외쳐대는 것에 그 속임수를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공산과 공존을 말하면서 그렇지 못한 형태를 보고 절대로 국민을 맡길 수 없는 정치라 생각했다.
그런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러 간 김구에게서 사이가 점점 벌어지게 됐다. 공석에서도 이승만을 형님이라 부르던 애국 정객 형제가 친중국과 반 공산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 김구는 동학교도였고 이어 원종 법명을 가진 승려였다. 그러다 이승만과 상해에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둘은 우파였다. 상해에서 임시 대통령과 경무국장의 관계로 첫 대면을 했다. 이승만이 친미국 노선으로 가고, 김구는 친중화민국으로 기울었다. 백범일지에서 투옥 중 ‘감옥 선배 이승만을 흠모했다.’고 밝혔다. 그의 많은 책을 어루만지며 손때 묻고 얼룩진 눈물 자국의 책은 이승만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의 느낌이 든다고 했다.
둘은 경마장을 자주 찾았는데 이승만은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왔다. 그런 그들이 사이가 벌어진 것은 남한 단독 정부와 남북통일 정부 수립 의견 차이로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경교장을 찾은 기자에게 ‘노력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해소할 날이 곧 올 것이다.’고 했지만, 난데없는 군인의 총격을 받고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은 김일성이 있는 한 통일이란 어렵다고 보았다. 그에 대해 아예 포기하는 태도였다. 그의 북한 장악은 통일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이었다. 남한을 침략한 한국전쟁으로 그 말은 더 정확해졌다. 현실주의 이승만과는 달리 이상주의 김구는 남과 북의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평양을 드나들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협성회를 통해 이승만을 지도했다. 그는 하지 장군의 초청으로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으로 내정돼 귀국했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YMCA에서 이승만을 도왔고, 옥중에서 그를 따라 기독교를 믿었다. 이승만의 미국 유학비와 생활비를 대 주었다. 안창호도 유학생들의 학비를 도왔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후 군의 급격한 성장에 국군 세력을 경계하게 됐다. 세계에서 걸핏하면 일어나는 쿠데타를 걱정한 것이다. 그런 기도를 막기 위해 일본군과 만주군, 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와 갈등을 묵인하면서 서로 감시를 명했다. 김창룡과 정일권, 강문봉에게 서로 수사를 지시해 둔 것이 예이다.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승선과 결혼해 아들 이봉수를 뒀다. 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죽자 부인과 헤어지게 됐다. 박씨는 진남포에 살다가 해방 후 인천으로 내려왔다. 전쟁 때 인민군이 들이닥쳐 아내가 누구냐 물었을 때 당당히 ‘나다.’ 하고 맞서다가 총을 맞았다는 이인수 양아들의 증언이다.
박씨는 이승만을 옥바라지했을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 산소를 고향 황해도 평산으로 이장했다. 선교사들과 교유하며 영어와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소통이 가능한 여장부라고 조혜자 며느리는 말한다.
이승만은 임영신 부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실망했으나 그래도 측근으로 두고 신뢰했다. 임영신도 충실하게 따랐으며 이름을 따 승당이란 호를 지어 불렀다. 해방 직후 귀국하여 돈암장에 머물렀을 때 승당이 자주 들러 도왔다. 이승만은 71세 영신은 47세였다. 불륜관계라 소문이 나돌게 됐다. 마포장으로 옮겨진 뒤 프란체스카는 임 여인의 출입을 막았다.
이승만은 술 담배를 안 하는 대신 미식가였다. 독서를 즐겨하고 재담이 뛰어났다. 낚시와 테니스, 정원 손질,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장작 패기, 서도 등을 잘했다. 시 짓기를 좋아해서 애국충정의 한시가 많다. 소와 벼룩, 빈대, 쥐, 파리, 누에 등 잔잔한 하찮은 것을 소재로 읊은 것들도 있다.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식습관이 미국인과 거의 비슷하다. 식단에는 거의 햄버거가 올랐으며 카스텔라와 샌드위치 등을 즐겼다. 사고방식도 미국화 되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에 한국어로 항일 단파방송을 했다. 경성방송국 직원이 일본 눈을 피해 몰래 청취했다.
이때 이승만의 공식 직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 외교위원 부위원장이었다. 청취한 사람의 증언은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의 구름처럼 먼 데서 알 수 없는 곳에서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나라를 찾으려는 가냘픈 희망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했다. 그 방송 원본은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처음 백 환의 화폐에 한복 초상이 그려졌다. 이어 다시 발행된 백 환과 천 환, 오백 환엔 양복으로 바뀌었다. 10년이 지난 60년대 초에 무슨 이유에선지 그만 화폐 속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초상이 사라졌다. 주화 백 환 동전에도 그려졌었는데 그마저 지워지고 말았다. 대신 학자와 장군, 여인이 나타났다.
방영과 라디오, 영화, 연극에 나타난 이승만은 ‘경무대 비화 잘돼 갑니다’동아방송국에서 방영됐다. ‘TBC백서 이승만 특집방송’과 ‘건국 비화 특집방송’이 TBC 방송국을 통해 나갔다. 최불암이 대역한 것으로는 제1공화국과 한, 오성장군 김홍일, 제2공화국, 반민특위가 있고 서인석의 독립신문, 신구의 새벽, 여명이 있다.
이어 하대경의 무풍지대, 이창환의 여명의 눈동자, 정욱의 김구, 민지환의 삼김 시대, 권성덕의 야인시대와 영웅시대, 서울 1945가 방영됐다. 라디오 드라마엔 구민 씨의 광복 20년이 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에 김진규가 나와 열연하고, 최용한의 경무대 비화 잘돼갑니다와 광복 20년 백범 김구, 정성호의 국제시장. 김덕영 감독의 ‘건국 전쟁’이 있다. 연극으로는 박기선의 6.25 전쟁과 이승만이 공연됐다.
부정적 평가로는 친일파 등용과 각종 민간인 피해, 국가보안법 남용,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 언론탄압, 부정선거 등을 들 수 있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 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과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 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 이승만도 친일파 청산 주장은 공산당과의 연관성이 긴밀하다고 발언했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했다고 평가한다.
비판론자들은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피해에 대해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또한 6.25 전쟁 시기 한강 인도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에도 책임을 말한다. 4.19혁명 때 어린 초등학생에게도 총격을 가해 경무대 앞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투사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기 때문이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 때 극렬히 반대했다. 이 법으로 구속된 사람이 제정 다음 해 한 해에만 12만 명을 넘어섰다.
제2차 개헌 의도가 국익보다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사리사욕에 있었다는 비판이다. 의원 수 135명을 1/3로 보아 불법적으로 통과시켜 사사오입법이라 이른다.
동아일보 괴뢰 오식과 대구매일신문 피습, 경무대 똥통, 함석헌 필화,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일로 언론을 탄압한 비판이 일었다.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여기 언론규제 조항은 위헌 시비가 있었으나 민주당이 이를 무시함으로써 넘어갔다. 이는 자유당의 본격적인 부정선거 기초가 됐다.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당하는 결과이다. 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고 무소속과 군소 정당은 타격을 입었다. 부정선거의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
옳고 그른 점을 함께 말한 허정은 중학교 재학 때 우남과 기독교 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우고 이후에도 측근으로 가까이 지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말한다. 누구든지 따르고 복종하면 동지로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봤다. 성질이 급해 남들과 쉽게 싸우고 주요 정치 문제엔 완고한 성질이었다. 평화로운 정권교체에는 미숙함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승만은 사리에 옳은 말이면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다. 그는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고 말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다. 한참 어린 연하에게도 공대하며 방문을 받을 때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아랫사람에게 인사를 받거나 반말은 하지 않았다. 공대, 존대하며 맞인사를 했다.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라도 믿는 성미이다. 부드럽고 자애로우며 유머가 풍부하다. 그러다 뒤틀려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하다. 조크를 잘하기로 으뜸이었다고 한다. 장관을 해임할 때는 그만두라는 말 대신 수고했다 잠시 나가 쉬라는 말을 했다.
진언을 받으면 즉시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은 채 즉시 결단으로 실천한다.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사실 여부를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놓은 뒤 사실을 알아낸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농담을 잘하고 장난도 잘 치는 유머러스한 사람이라 한다.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학교에서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기분 좋을 때 일이다. 화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한다. 주권재민을 앞세우면서도 카리스마적으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모순되고 상반되는 두 면이다. 어떻게 보필하느냐에 따라 우남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이상적으로 앞세우는 민주주의 신념을 구현하는 자들이 많았다면 한국의 워싱턴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독립운동하기 전부터 고집스러운 태도와 가부장적인 면을 보였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면 화를 내고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의 고집은 확신과 신념으로 우리 역사에 많은 기여를 남겼다. 해방 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며 반공포로 석방, 일본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이다. 그러나 그의 고집으로 말년이 나빴다. 진정한 자유당 배려가 부족했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약했다.
장면은 국무총리로 지내면서 장단점이 많았다고 말한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같은 반공 태세와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탄복할 만큼 위대하다고 말한다.
또 그분의 성격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 보인다는 독재의 전형을 보였다.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으로 정적을 용서치 않는 면을 보였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마음에 안 들면 공포 안 하기 일쑤다. 그의 유시와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의원의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재판소 등도 그에겐 필요 없다. 장기 집권을 위해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할 당시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한다고 평가했다. 제1대 대통령 당선 직후 방문해서 국무총리 이하 각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고 그 아래는 그 사람이 임명하도록 하십시오. 열한 부서와 네 처장을 지시하십시오. 많은 부서를 일일이 총괄하면 능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남 장께서는 연만하신 터수여서 그렇게 하시라 진언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 방안을 빙빙 돌고 손을 입에다 대며 훅훅 분 뒤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모두 돌봐야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는 말씀이라 이른다. 아직도 하와이에 있을 때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으로 정치가 어려워질 것이라 느꼈다.
미군정청장 하지는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을 늙은 악당이라 지칭했다. 그의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 조병옥과 같이 회고록에서 이승만보다는 안창호가 진정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감인데 일찍 가셨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돈암장과 이화장을 출입하던 최기일의 말에 충분히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인격자인 김성수와 안재홍조차 적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의 실책이라 이른다.
여운형은 조선 체육회를 이끌던 중 서울 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몽양은 노선은 달라도 이승만을 초대했다. 일장기가 사라진 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들어오는 젊은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식이 시작될 때 함께 온 윤치영과 얘기하다가 바쁘다며 자리를 떴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김영삼은 이승만은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로 사사오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은 정치 깡패들과 서북청년회를 대거 이용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을 탄압하였다. 특히 해방정국에서 서북청년회가 자행한 백색테러와 학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들은 정권의 비호 아래 각종 이권 사업에 뛰어들어 수많은 불법을 저질렀다. 임화수와 곽영주, 이정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이 벌인 사건으로는 장춘단 집회 방해와 고대생 습격, 충정로 도끼,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 등이다. 심지어 정권 시작 전 5.10 총선거에 이승만과 경쟁하러 출마하려 했던 최능진을 서북청년단과 깡패들을 이용해 강제적으로 입후보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잘 알려진 제주 4.3과 여순,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이어 산청 함양 학살, 문경 양민학살 사건이 있다. 국군이 경남 산청군, 함양군에 사는 주민들을 무장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일곱 마을이 초토화됐다. 가현과 방곡, 점촌, 서주리에서 7백 명 넘게 죽어 나갔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주동 세력이 일으킨 일로, 제대로 된 이유와 근거가 없다. 극악무도한 전쟁 범죄이다.
국군 제2사단 70여 명이 경북 문경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학살했다.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 남성 83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 사건을 정부는 무장 공비가 선량한 양민을 죽였다고 조작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진실이 밝혀져 세상에 알려졌다.
또 강화 양민학살 사건도 있다. 이승만 정부는 공비 진압에 있어, 지역별로 치안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강화 지역에 조직된 치안대는 수사대를 별도로 설치해 민간인들을 임의로 살해했다. 치안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간인 특공대도 민간인을 죽였다. 문경 양민학살과 같은 해에 벌어졌다. 1.4 후퇴 때 당시 국군 산하의 강화 향토 방위특공대가 중심이 되었다. 수백 명의 강화 주민을 조선인민군의 협조자로 아무 근거 없이 몰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여기에만 있은 일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자행됐으며 북진 시 적진에서도 일어났다. 전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이름으로 덮여서 알 길이 없었다. 진실화해위는 계속 조사해 캐 나가고 있다.
전직 대통령 아들들이 모여 이승만 기념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이는 수백 평의 비싼 대지를 내놓았다. 죽산 조봉암 기념사업회와 각계 정당 인사들의 협조로 사단법인이 설립되었다.
저서로는 미완성이지만 영한사전과 청일전기, 독립정신, 이승만 일기, 건국과 이상, 일민주의 개설을 지었다. 시집으로 이승만 한시선과 체역집이 있다. 작품으로는 민영한 묘비와 헐버트 묘비, 화천댐 파로호 비석이 친필로 기록되었다. 서훈으로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을 비롯해 상훈으론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과 미육해군합동협회 금명예훈장, 미국 금영자유훈장 등을 받았다. 늦었지만 국가 보훈부는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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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그 많은 기록들 어찌 다 저장되어 꺼 집어 내셨어요
정말 존경합니다
요즘 건국 전쟁의 영화 상영으로
대통령 님이 다시 조명 되는 것은 정권이 바로 선 덕분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박물관 같은 지식
많이 남겨 놓으셔야 합니다
글 쓰면서 많이 배웁니다.
이승만을 알고 보니 우리 민족과 나라를 살려낸 걸출한 위인입니다.
관람하셨던분들이 역사바로알기에 많은 도움된다...하셔요.
저는 아직...
단순히 관람만 하신게 아니라,이렇게 긴 설명을 곁들여 주시다니,정말 대단하십니다.
70초반분들도 치매걱정된다면서,노력하시는걸 봤는데, 쌤은 "치매가 뭔가요?" 하실듯...
여긴 목련이 피었어요.
이승만은 참 고마운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