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자오온천3 - 자오온천에서 온천욕 후에 나와서 거리를 구경하다!
11월 5일 야마가타역 광장 1번 정류소에서 1시간에 1대 있다는 자오온천행 12시 20분
버스를 타니 버스는 야마가타 시내를 벗어나 들판을 달리더니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경사가 완만하니 산자락에는 많은 집들이 들어선 것을 봅니다.
40분 후에 버스가 도착해 내리니 자오온천(藏王溫泉) 관광 안내소가 보이는데.... 우리 호텔
이름을 말하고 위치를 물으니 산을 구불구불 한참 올라가야 할 모양이라 지도를
들고 산길을 올라 15분 가량 걸어 료칸(旅館) 르 베르트 자오 Le Vert Zao 호텔에 도착합니다.
체크인후 방으로 올라가서 배낭을 풀고는 바로 나와 온천욕을 하러 가는데 일본에서 온천의 종류는
유황온천, 산성온천, 염화물온천, 단순온천등으로 유황온천은 냄새가 지독하고, 단순온천은
온천수가 단순하고 염화물온천은 보습에 좋으니 보디로션을 펴 바른 것처럼 감촉이 미끈거립니다.
여기 온천수는 잿빛 감도는 우유색으로 젖은 나무 냄새와 유황 냄새가 뒤섞여 강렬한 향기를
내뿜는데..... 온천수가 강산성 유황 성분을 띄기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을 시 소독액을 칠한 것처럼 따끔거릴 수 있으니 목욕 후에는 물로 몸을 다시 씻어내야 합니다.
그러고는 호텔을 나와 거리를 구경하면서 산쪽으로 올라가는데.... 가을철이라
빨강색으로 물든 단풍이며 여러 온천 료칸들을 구경하는데, 나중에
지도를 찬찬히 보니 저 위쪽에 겐시치 노천온천이 있는데 보지 못한게 아쉽습니다.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으니 가오라야 온천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걸으니 도랑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게 아마 하수도인 모양으로 온천욕을
한 후에 버린 온천수인지 아님 그냥 땅에서 솟는 온천수 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나무로 지은 “上湯共同浴場(상탕공동욕장)” 이라는 건물을 발견하는
데... 아마도 료칸에 묵지 않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온천탕인 것 같습니다.
여기 상탕공동욕장(上湯共同浴場) 앞에는 돌로 된 시설물에 나무 벤치가 있는
구조물이 있으니.... 그 생김새로 보건데 아시유(足湯 족탕) 인가 봅니다.
그 옆에 보니 역시 하수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고 옆에는 물레방아에
또 나무로 된 구조물은 불을 밝히는 가로등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위쪽에 료칸이 있어 이름을 보니 えびや(에비야) 여관이라..... “에비야” 라는 말이 아주 익숙한
말이라 곰곰 생각해 보니, 이 료칸과는 상관이 없지만 일본과는 관계가 있는 말 입니다.
나는 어릴 때 농촌에서 태어나 살았는데 아이들이 울면 달래다가 끝내 그치지 않으면 어머니나 누이들이
“에비야 온다!” 라고 말해 울음을 그치게 만들었으니 아이에게는 뭔가 무서운 짐승이 나타난다는 뜻이라?
임진왜란때 일본군은 조선을 점령해서 다스릴 예정이라 민간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9명의 대장들이 서울과 8도를 하나씩 배정받아 주둔했으니
서울에 들어와서는 쌀 창고를 열어서 도망친 조선인들을 불러들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규슈와 서부 일본등 따뜻한 곳에서 살다가 여름옷을 입은채 침략해온 일본군들이 의병의 활약
으로 보급이 어려워 식량이 떨어지고, 명군의 개입과 겨울철 평양과 서울의 추위.....
그러니까 동장군(冬將軍)의 등장으로 인해 명군과 화의를 맺고 서울에서 철수하면서 시민들을
학살했으며 한번 공략에 실패했던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 함락하고는 군관민을 모두 학살했습니다.
명나라 심유경과의 교섭에서 조선의 남부 4도를 할양해 달라는 요구가 결국은 거부되자 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4년간의 휴전을 깨고 1597년 재침하니 정유재란인데, 이때 일본군은 14만인데 비해
명군은 11만 7천이고 조선군은 3만 8천이었으니.... 전쟁 당사자인 조선군의 숫자가 가장 적은
것은 백성들이 전란으로 굶어죽는 처지라 돈이 없어 많은 병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던 때문입니다.
히데요시의 생각은 여름에 일본군이 경상, 충청 및 전라도를 약탈하고 방화해서 초토화시킨후 늦가을
이면 울산에서 순천까지 28개 왜성으로 돌아와 겨울을 난후 다음해 초여름에 다시 저 3도를
휩쓸며 황폐화 시키는걸 몇년 계속하면 원거리에서 온지라 보급에 엄청 애를 먹던 명군은
결국 철수할 것이고 그럼 고립무원이 된 조선이 경상, 전라, 충청 하삼도를 내어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히데요시는 경상, 충청 및 전라도를 초토화 시키라고 하면서 병사들에게는 코(귀) 한되 씩을 베어
바치라고 명하니, 병사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귀(耳 이) 와
코(鼻) 를 베어 가니 여기서 “이비(耳鼻)야” 라는 말이 생겼는데 훗날 ‘이비야’가 “에비야”로 변했습니다.
에비야(えびや) 료칸에서 엣날 생각을 하고는 다시 계단으로 해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니 헌등
(獻燈)이라고 적힌 가운데 자오온천 그리고 스카와온천신사 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을 봅니다.
계단을 올라 평지가 되니 거기에 신사의 입구를 뜻하는 토리이가 보이는데.... 토리이는 신사의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으로 신토(神道 신도) 에서 신의 영역과 일반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관문 내지는 결계 역할을 합니다.
토리이는 鳥(새 조) 와 居(살 거) 를 사용해 鳥居(조거) 라 쓰는데 '닭이 머무르는 자리' 를 의미하는 한자어
鶏居(계거)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니.... 신토에서 닭을 신의 전령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며 '통과해 들어가다' 는 뜻인 通とおり入いる(토오리이루)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토리이의 명확한 기원은 알수없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형태나 역할의 건축물과 영향을 주고
받지 않았을지 추측되니, 일본 불교의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가 신성한 의식에 사용되는 공간을 구별
하기 위해 인도 아소카 대왕이 세운 산치 대탑의 문 토라나(Torana) 의 형식을 채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토리이를 중국 패루(牌樓)나 한국의 홍살문이나 절간의 일주문 등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나 역할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에 발전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토리이는 한자 표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새[鳥] 가 머무르는[居] 횃대', 즉 신의 사자(使者) 인 새가 앉아 쉬는 곳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를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보는 풍습은 기원전 2천년~ 5백여년 전 한반도의 솟대나
기원전 1만여년전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에서도 엿볼 수 있으니 고대의 조장(鳥葬) 풍습도
사람이 죽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육신을 먹어 그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믿었습니다.
한국에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1천여곳 신궁·신사를 창건하면서 그만큼 토리이도
세웠는데 패전 이후 추방당하게 된 일본인들이나 해방을 맞은 한국 민중들이
신궁· 신사를 철거·파괴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세워진 토리이는 함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보통은 기단부만 남아있는데 부산 용두산이나 서울 남산의 백범광장, 창원 마산합포구의 제일
여자고등학교 정문 등이 그런데, 한국에서 신토 건축물이 이처럼 철저히 헐린 사실은
타이완이나 동남아시아 등 일제의 영향권에 속했던 지역에 토리이가 남아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전통적으로는 목재에 주홍색을 칠하는데, 현대에는 목재 이외에도 석재, 도자기, 콘크리트, 스테인레스 스틸등
으로도 제작하니.... 크기 또한 다양하지만 대체로 토리이의 크기는 신사의 규모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제일 큰 토리이는 와카야마현에 있는 쿠마노혼구 신사(熊野本宮大社)에 있는데 높이만 34m 라고
하며 작은 것으로는 신사의 입구 건축물이 아닌 봉납용으로 사용하는 조그만 토리이가 있고,
심지어 일본 모 대학 연구진이 기술력을 뽐내기 위해 마이크로미터 단위 토리이를 조립한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토리이가 가장 유명한 신사는 교토시 남부 후시미 이나리 신사(伏見稲荷大社) 이니 수많은
토리이가 일렬로 놓여진 통로가 있으며, 이 중 센본도리이(千本鳥居)가 유명하고 또한
일본에서 가장 많은 토리이를 보유하고 있는 신사이기도 한데 영화 “게이샤의 추억” 에도 나옵니다.
다음으로는 헤이안 신궁(平安神宮) 에는 교토에서 제일 큰 토리이가 있으며 미야지마의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토리이도 유명한데 이쓰쿠시마 신사 자체가 세계유산이기도 하지만, 바닷물에 잠겨 있는
토리이로도 유명하며, BBC의 2002 한일 월드컵 오프닝에서도 일본의 상징 중 하나로 등장했고 규슈
아리타에 스에야마 신사(陶山神社 도잔신사)는 조선도공들이 세운 신사로 청화백자 토리이가 있습니다.
일본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을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신토를 소개할 때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드물게 삼각형의 토리이(三柱鳥居)도
존재하는데 오늘 여긴 작은 신사이니 토리이는 시멘트로 만든 것이러 볼품은 없습니다.
그러고는 석등이 늘어선 매우 가파른 긴 계단을 가쁜 숨을 쉬면서 땀을 흘리며 고생해
올라가서는..... 드디어 평지에 올라서니 여기에 스카와온천신사가 보입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조용한 신사를 둘러보는데... 일본에 그 많은 신사들의 한가지
특색은 신이 머무는 곳이라 여겨 그런지 담이나 울타리가 없다는 것
이며 또 이런 작은 신사는 신관이 상주하지 않는지라 그냥 비어 있는게 보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