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동화
조각돌로 그린 얼굴
전 세 준
처마 밑 풍경 소리만 댕그렁 댕그렁 들려오는 고요한 밤입니다.
언니 곁에 누운 길례는 기어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언니야, 언니는 왜 여기서 스님들과 살고 있어?”
오래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말입니다.
“.............그런 것 너는 알 필요가 없어. 잠이나 자”
행자 언니는 길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래도 알고 싶은 걸.....”
길례의 낭낭한 목소리였지만 희미한 달빛이 무겁게 방안에 내려앉습니다.
언니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요즘 가을철을 맞아 이상한 옷차림으로 둘 셋이 짝을 지어 산으로 오르고 또 절로 찾아오는 것을 보고 있으려면 어쩐지 언니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반지르르 윤이 흐를 것 같이 깎아 버린 머리에 바지통이 넓은 스님 같은 옷을 걸치고 아침 점심 저녁, 스님들의 공양을 지어 올리는 언니가 고맙기도 했지만,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언니, 얘기 해 줘 응!”
“................”
“얼른....”
“그래그래, 알았어 언니는 그저 몸이 아파서 이곳에 쉬러 왔어”
“그럼 몸이 다 나으면 엄마 곁에 다시 가겠네?”
“으응...그래, 어서 자거라”
언니의 대답이 어쩐지 무겁게 들려옵니다.
“언니, 그럼 나는 언제 우리 집에 갈 수 있어?”
“으응?”
언니의 목소리가 조금 놀란 듯 했습니다.
“자, 어서 잠이나 자자”
언니가 돌아누워 버립니다. 그러나 길례는 대답해 주지 않는 언니가 더욱 궁금합니다.
밝은 햇살이 골짜기 마다 환히 퍼져 들어오는 아침입니다.
가을 나뭇잎들은 밝은 아침 햇살에 더욱 울긋불긋하고, 법당 앞에 핀 코스모스와 국화들이 한층 더 아름답습니다.
언니는 벌써 아침 공양 준비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례는 언제나 하는 일처럼 법당 앞 계곡으로 세수하러 내려갑니다.
벌써 이른 아침인데도 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의 ‘야호!’ 소리가 맑고 깨끗한 아침 계곡을 찡 울리며 마주 선 산 봉오리를 타고 오릅니다.
졸졸 흐르는 골짜기의 물이 한 구비 돌며 또 돌아가는 곳에 살며시 앉습니다.
길례의 예쁜 얼굴이 물속에 잠기며 빙그레 웃습니다. 조그마한 휜 구름 한 조각도 흘러갑니다. -1-
예쁘게 물든 나뭇잎 하나가 맴을 돌며 정미 얼굴 위에 멈춰 섭니다.
봄여름 가을을 엄마 품에서 자라오던 나뭇잎이 홀로 둥둥 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것을 생각하니 문득 나뭇잎이 가여워 집니다.
살며시 두 손을 물에 넣어 나뭇잎을 건져 올립니다.
“어디로 가니? 나뭇잎아....”
“..............”
나뭇잎은 대답이 없습니다.
“에이, 바보...가지마! 네 엄마하고 지금 영영 헤어지는 거야, 이 바보야!”
길례는 살며시 나뭇잎을 건져 돌 위에 얹어 놓고 세수를 합니다.
산속의 겨울 아침도, 또 봄의 아침도, 여름 아침도 여러 번 지내 본 길례입니다. 조금은 심심했지만, 계절 따라 빛깔이 변하는 산속 생활은 할머니 스님과 아주머니 스님 그리고 행자 언니가 있어 외롭지 않았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늘 조각돌로 그린 엄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세수를 마친 길례는 법당 뒤 산신각 옆에 있는 둥근 바위로 갑니다.
삼층 석탑과 같이 있는, 넓은 바위는 언제부터인가 길례 혼자만의 놀이터였고 쉼터이고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입니다.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 하루 속히 엄마를 만나게 해 주세요. 엄마의 얼굴도, 우리 집도 저는 모름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부처님, 저의 소원을 꼭 들어 주세요. 나무관세음보살....”
길례는 스님의 흉내를 내며 절을 하고는 둥근 바위 위로 올라갑니다. 어제 조각돌로 그려 놓은 엄마의 얼굴을 더욱 예쁘게 고쳐놓습니다.
엄마의 얼굴은 한 번도 못 보았지만 개울물에 비친 자기 얼굴이 곧 엄마의 얼굴이 되곤 합니다. 언제나 엄마는 조각돌로 웃고 있습니다.
언제 따라왔는지 할머니 스님이 길례가 그린 조각돌 얼굴을 보며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엄마를 닮았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할머니 스님도, 아줌마 스님도, 그 누구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엄마 누군지 몰라요 선생님?
“이 다음 크면 알게 되요.....길례는 큰 스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요”
선생님도 언제나 같은 대답입니다.
“선생님은 알고 있잖아요? 알려 주세요”
“그렇게 궁금하니?... 그래그래, 네 엄마는 절에 같이 사는 아줌마 스님이야 하하하”
선생님은 웃으면서 장난같이 대답하기도 합니다.
“길례 엄마는 중이래, 산에 있는 중이래..”
그 후 반 아이들이 웃으며 길례를 놀리곤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길례는 선생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다시 물어보지 않습니다.
“스님, 나는 왜 절에 와있어요?”
가끔 저녁 공양시간에 아줌마 스님에게 물으면
“왜 산이 싫니?”
하고 길례를 쓰다듬어 주면서도 알고 싶은 이야기는 해 주지 않습니다.
아줌마 스님과 할머니 스님은 점점 태도가 이상해 가는 길례를 걱정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일 년이 가까워 옵니다.
삼학년에 오르고부터 길례는 엄마에 대한 생각과 집에 대한 궁금증이 가슴속에서 싹트기 시
-2-
작했습니다.
할머니 스님과 아줌마 스님, 그리고 언니와 넷이 아침 공양을 마친 길례는 늘 그렇게 하듯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합니다. 오솔길을 따라 한참 마을로 내려가야 조그마한 농촌 학교가 나타납니다.
“조심해라. 낭떨어지 길조심하고!”
할머니 스님은 산길을 내려다보며 매일 아침 손을 흔들어 줍니다.
오솔길 이 십리를 걸어가야 학교가 나옵니다. 계곡에 걸친 나무다리와 철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양쪽에 늘어 선 산들과 다람쥐들이 매일 아침저녁 길례를 반겨 줍니다.
벌써 배낭을 메고 울긋불긋 등산복을 입은 어른들이 길례 옆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이곳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나?”
등산객들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례를 이상한 듯 뒤 돌아 봅니다.
“오! 이제 학교 가니?”
그러나 이곳을 몇 번 찾은 등산객들은 이제 길례와 얼굴을 익혀 인사를 나눕니다.
매일 아침저녁 만나는 갈색 줄무늬 아기 다람쥐도 길례 앞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합니다.
“참, 넌 엄마하고 같이 살고 있니?”
“..............”
아기 다람쥐는 말이 없습니다.
“으응... 알았다. 등산객들이 나들이 나온 네 엄마를 붙잡아 갔구나 쯧쯧...”
아기 다람쥐는 슬픈 듯 두 눈을 깜박입니다.
“에이구 나쁜 아저씨들..... 야! 나도 엄마가 없어. 힘 내! 나, 간다!”
길례는 아기 다람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깡충깡충 뛰어 산길로 내려갑니다.
학교 운동장이 보입니다.
국기 게양대에는 태극기가 시원한 아침 바람을 타고 펄럭이고 있습니다. 좁은 마을 입구에는 벌써 등산객을 태운 몇 대의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오늘은 다른 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어 일찍 마친다. 매일 하는 얘기지만, 이곳은 관광지라 여러분들이 친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 잘 알지요?”
세 시간 수업이 끝나자 매일 하루 공부를 마칠 때마다 일러주시는 선생님 말씀으로 오늘 공부가 끝납니다.
길례가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 관광버스에서 내린듯한 아주머니가 배낭을 메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체 등산객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가방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으응, 그래 괜찮은데.....”
길례는 가방을 받아들고 아주머니 뒤를 따라 오솔길로 오릅니다.
“나, 간다. 잘 올라가”
얼마쯤 산길을 올랐을 때 헤어져야 할 마지막 친구가 손을 흔듭니다.
“너는 집으로 안가니?”
“얘는 스님과 같이 절에 산 데요!”
집으로 향해 좁은 길로 들어 선 남자 친구가 아주머니를 힐끔 바라보며 도망가듯 자기 집을 향해 뛰어 갑니다.
“..............”
-3-
“스님과 같이, 절에 산다니?”
“네, 절에서 학교에 다녀요”
길례는 갑자기 힘이 쪽 빠지는 듯합니다.
다른 등산객들은 벌써 많이 앞 서 가고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처음 등산하는 듯 힘들어 하며 자꾸만 자꾸만 길례를 내려다보며 같이 온 사람들을 빨리 따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잠시 쉬곤 합니다.
아기 다람쥐와 놀던 다리 건너편에 왔을 때, 아주머니는 다시 바위에 걸터앉습니다. 바로 길례가 아침마다 걸터앉아 아기 다람쥐와 놀던 곳입니다.
나무위에 숨어있던 아기 다람쥐가 길례가 온 것을 보고 쪼르르 내려옵니다.
“무서웠지?”
아기 다람쥐의 가슴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젠 괜찮아 모두 지나 갔어”
아주머니는 다람쥐와 이야기를 나누는 길례가 이상하듯 다람쥐와 길례를 번갈아 봅니다.
“얘, 너 이름 뭐지?”
“길례에요...”
‘언제부터 절에서 살았니?“
“몰라요. 아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 네가 있는 절에 아주머니 스님과 할머니 스님이 계시니?”
“네..... 잘 아셔요? 우리 절은 비구니 스님만 계셔요”
“응......그래. 이번이 두 번째야...”
“그런데 저를 몰라요?”
“으응... 그땐 못 보았던 것 같다”
아주머니의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산 그림자가 지나갑니다.
“길례라고 그랬지?”
“네 그래요”
“엄마는 안계시니?”
“누군지 몰라요. 절에서 제가 태어났데요. 그것 밖에 몰라요”
“그래?....................”
아주머니는 한참 말이 없다가 주위를 살피며 속삭이듯 말합니다.
“얘야, 아줌마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 줄까?”
“안돼요 듣고 싶지만 늦기 전에 할머니 스님에게 가야해요”
-얘, 길례야! 들려달라고 해. 이 아줌마하고 같이 집으로 가면 무섭지 않잖니?-
옆에 바싹 다가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기 다람쥐가 눈짓을 합니다.
“아주머니도 절에 가셔요?”
“으응 그래”
“그럼 우리 할머니 스님께 얘기 잘 해 줘요...... 그럼 옛날 얘기 들을 수 있어요”
‘그래 그래.“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길례는 가랑잎을 주워 모아 깔고 앉습니다 아기 다람쥐도 살그머니 길례 옆으로 다가와 앉습니다.
“지금부터 십여 년 전 어느 시골마을에 살던 예쁜 아가씨가 집에서 쫓겨났데요....”
-4-
“왜요?”
갑자기 행자 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응, 들어보면 알아요”
아주머니 목소리가 차츰차츰 빗물에 젖는 듯 하며 이야기를 계속 합니다.
“..........쫓겨난 그 아가씨는 갈 곳이 없어 온 사방을 헤매다가 너무나 고생이 심해서 죽으려고 산속을 찾아 헤매다 어느 비구니 스님을 만났데요. 그래서 그 스님의 도움으로 절에서 얼마를 보냈는데 절에서 그만 아기를 낳았데요.......”
길례는 어느 사이 아주머니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입니다.
“재미없니?”
“아니에요. 그냥 기대고 싶어서......”
“으응, 그래... 그 아가씨는 스님들 보기가 너무 부끄러워 아기를 둔 채 절을 뛰쳐나와 이곳저곳 혼자 살면서 두고 온 아기를 몹시 그리워했지만, 스님 몰래 절을 나온 것이 죄가 되어 절에도 못가고 있다가 어느 날 스님께 잘못을 빌고 그 아기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그간 푼푼히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가지고 관광버스에 올랐는데.....”
어느덧 길례는 깊은 잠에 빠져있습니다.
손에 말아 쥐었던 나뭇잎이 사르르 흘러내립니다.
아기 다람쥐는 길례의 발등을 몇 번이나 살살 긁었으나 길례는 눈을 감은 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안개가 자욱한 산신각 옆 둥근 바위가 유난히 큽니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을 한데 모아 합장하던 길례는 깜짝 놀랍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 넓은 바위가 쫙 옆으로 갈라지며 법당 안에 계신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며 길례 앞으로 다가 옵니다.
-길례야! 그간 고생이 많았다. 이제 너는 이 산에 더 있을 필요가 없으니 네 엄마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거라.. 너는 내 품안에서 착하게 잘 자라서 고맙구나.... 그리고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너를 이만큼 보살펴 준 스님들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비록 이곳을 떠나도 언제나 남에게 자비로운 행동을 실천하며 스님들의 말씀을 늘 가슴에 기억해라-
“네, 네 부처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넓은 바위에 그려 놓은 조각 돌 엄마 얼굴이 움직입니다.
길례는 혼자 자꾸 중얼거립니다. 가랑잎을 잡았던 두 손이 한데 모아지며 눈을 감은 채 부처님을 향해 합장을 하고 몇 번인가 큰 절을 합니다.
-그럼 잘 가거라!-
순간 부처님은 하늘에서 내려 온 흰 구름을 타고 손을 흔들며 미소를 띠우며 하늘로 훨훨 사라집니다.
갑자기 넓은 바위에 그려 놓은 조각돌 엄마 얼굴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가느다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네 엄마다 길례야!-
부처님이 사라진 구름 위에는 예쁜 아주머니가 오색 무지개를 목에 두르고 길례를 향해 손을 흔들자 오색 무지개는 긴 구름다리로 변합니다. 그 위로 아주머니가 길례를 향해 차츰차츰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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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길례는 구름 속에서 오색 무지개 다리를 건너오는 조각돌 엄마 얼굴을 잡으려고 두 팔을 벌리며 와락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
“길례야!”
아주머니가 와락 길례를 품속에 안습니다.
길례는 눈을 번쩍 뜹니다. 자기를 안고 있는 아주머니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 길례의 얼굴에 떨어집니다.
부처님도, 산신각 옆 넓은 바위도, 찬란한 무지개도 없습니다. 산 그림자가 골짜기를 덮고 있습니다.
“길례야! 내가 네 엄마다!”
아주머니는 더욱 길례를 힘껏 안아 줍니다.
아기 다람쥐도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그럼, 꿈에 본 그 눈부신 부처님이? 엄마!”
길례는 와락 아주머니를 끌어안습니다.
엄마와 길례는 아기 다람쥐와 헤어지고 어두워 오는 산길을 오릅니다.
“엄마! 어서 스님을 만나 뵙고 산신각 옆 큰 바위로 가 응!”
길례는 아침에 넓은 바위 위에 그려 놓은 엄마의 얼굴을 생각하며 눈물에 젖어있는 엄마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주지 스님과 아줌마 스님이 너를 잘 키워주셨구나....고마우신 분들이다!”
가을바람이 좁은 오솔길을 타고 쏴아- 불어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그래그래 할머니 스님, 아주머니 스님, 행자 언니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저를 잘 키워주시고 또 엄마까지 만나게 해 줘서...-
해가 산 넘어 간 법당 앞에 선 할머니 스님이, 앞으로 다가오는 길례와 엄마를 보고 빙긋이 미소를 띠웁니다.
그 웃음은 법당 안에 변함없이 늘 앉아계신 부처님의 미소로 밝아 오며, 어두워지기 시작한 산골짝, 작고 아담한 절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