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七 章 運命의 골짜기
침사곡!
천하무림의 관심은 일제히 이 침사곡에 집중되어 있었다.
때는 바로 마교오웅 중의 노대 풍륜이 침사곡에서 크게 소동을 벌이던 제삼일 째 되는 날……
이,삼십 명의 무림 각파 고수들이 작당(作黨)하며 침사곡을 향해서 전진하니 막남(漠南) 금사문(金沙門), 공동파(崆峒派), 무당파(武當派) 등등……
또한 하마와 사여명 남매가 침사곡을 향하여 몸을 날리고 있으니 뒤질세라 하고 운소진이 그들의 뒤를 쫓아 침사곡으로 달리고 있다.
그밖에 또한……
청목도장(青木道長)과 운학(鄆鶴)……
이 두 사람은 새북(塞北)의 사암구(沙岩區)에 이르렀다.
그들은 길을 재촉하면서 육반산(六盤山) 영총봉(英塚峯)에서의 지난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청목도장은 자기의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을 걷는 동안에 일생에 느껴 보지 못한 행복에 잠기는 것 같았다.
저렇게 믿음직스러운 후계자가 있어서 자신의 참된 무공을 천하에 길이 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진파의 영광스러운 명예를 당대에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 모두 제자의 공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금시에 승천(昇天)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더욱 운학의 개인적인 복수가 완전히 끝난다면 자신은 무림계에서 조용히 은퇴하여 일개 촌부(村夫)로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리라고 굳게 결심하니 운학에 대한 새로운 자애가 샘솟는 듯 마음에 우러나왔다.
두 사람은 누런 모래 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음침한 날씨에 자갈이 깔린 험한 길을 나는 듯이 침사곡을 향하여 몸을 날리고 있었다.
멀리 앞을 바라보니 콩알 같은 까만 그림자가 지평선에 보이기 시작하더니 두 사람이 몸을 날려 앞으로 전진할수록 그 검은 그림자는 점점 커지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그 앞에 이르니 그것은 하늘을 떠받칠 것 같은 큰 바위 앞이 아닌가?
그 바위에는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필체(筆體)로
<현기석(玄磯石)>
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정말 그 글씨체는 장하기만 하였다.
천마(天馬)가 공중을 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였고, 그 운필(運筆)의 묘함과 섬세함은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절묘하였다.
그러나 현기석이란 제자 밑에 응당 있어야 할 글 쓴 사람의 이름이 없어 누구의 운필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눈짐작으로도 적어도 이백 년 전의 유물일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두 사람은 바위 아래에 멈추고서는 이백여 년의 풍우성상(風雨星霜)을 묵묵히 견디어 온 바위를 감개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청목도장은 조용히
『운학아! 이곳은 침사곡과 팔,구백 리쯤 떨어진 곳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천전교주와 김인달을 잡아 없애는 일이다. 여기는 네가 보다시피 두 갈래의 길이 있으나 모두 침사곡의 호반(湖畔)과 통하여 있다.』
사부의 말을 듣고 난 운학은 쌍갈래 길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우리들의 공력 소모를 막고 그 두 사람과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서 각각 두 갈래의 길을 택하는 것이 좋겠으며 뒤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자.』
여기까지 이야기한 청목은 보란 듯이 웃으면서
『그렇지만, 나는 네가 누구를 만나든지 마음을 놓을 수가 있다. 가령 김인달을 만난다 하여도 무난히 이길 수가 있을 터이니까……』
『사부님! 이곳과 침사곡의 거리가 그렇게 멀으니 적어도 이틀은 갈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가까운 자리를 정해서 만나기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여기가 바로 두 길의 교차점이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길을 나누어 그들을 빨리 만날 수 있겠나!』
운학은 납득이 간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청목은 대견스럽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운학을 쳐다보았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운학아!』
『제가 만약 그들과 만난다면 이길 것 같지 않아서……』
운학이 말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청목도장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안심해라! 도중에 너는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도 겁낼 것이 없다. 넌 절대로 지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로 일시적인 기분으로 그들을 대해서는 안 돼!』
운학은 사부를 바라보면서 다시 반문한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바보 같은 소리! 당하지 못하겠거든 나에게로 도망쳐 오면 되지 않아!』
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아 우리는 출발하자! 만나든 못 만나든 이 현기석 아래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자.』
청목의 말이 끝나자 운학은
『좋습니다.』
『운학아! 만사를 조심해라!』
하며 청목도장은 몇 번인가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목표를 정하고 몸을 움직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자 밖으로 몸을 날려 지평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운학은 합장하여 사부의 앞날이 무사하기를 비는 나무아미타불을 입속으로 외워 불가의 자비를 청하며 서 있다가, 사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온 몸의 경공을 운행하여 길을 떠났다.
때는 풍륜이 침사곡에서 소동을 벌인지 엿새가 되는 날……
이 때 침사곡 모랫바닥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는 이미 백충주(百蟲珠)의 독기가 퍼지기 시작하고……
운학은 사흘이 걸려서 현기석(玄磯石)에서 침사곡(沈砂谷)까지를 왕복하였다.
그러나 천 리 길을 왕복하는 동안에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만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부와의 약속이 있어서 또 다시 현기석 아래로 돌아와 보았으나 사부의 그림자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그는 현기석 바위로 기어 올라가서 사방을 두리번거려 사부의 모습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혹시 사부님의 몸에 어떤 위험이라도?)
하고 걱정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기우(杞憂)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놓였다.
왜냐하면 사부의 노련한 공력을 생각하면 김인달이나 천전교주를 만났더라도 절대로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인 즉, 그 중의 한 사람만을 만났다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운학의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신공(神功)을 회복한 뒤의 청목도장은 그 무공이 입신(入神)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운학은 보고 있었다.
『아뭏든 여기서 기다리라 하셨으니 기다려야지!』
혼자 중얼거리며 그는 바위 위에 앉아서 유유히 떠 있는 몇 무더기의 구름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좀 떨어진 곳에서
『탁!』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운학은 재빨리 몸을 뒤집으며 바위 뒤로 숨어 동정을 살폈다.
조금 지나자 백여 자 떨어진 바위 위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사나이는 바윗가에서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돌린다. 이것을 본 운학은 그 사나이의 얼굴이 검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음을 보고
『천전교주(天全教主)!』
하고 소리치면서 바위 위에서 몸을 나타내었다.
그 사나이는 이곳에 차마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날려 운학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운학! 너였구나.』
그는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운학은 오만하게
『그렇다! 나는 죽지 않았다.』
천전교주는 몹시 놀랐으나, 자신을 가다듬어 태연스럽게
『하아 하아 운형(鄆兄)! 우린 오래간만에 만난 셈이로군!』
능청을 떠는 천전교주를 바라보는 운학의 표정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운학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니 천전교주는 마음에 떨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천전교주는 영지초(靈芝草)를 먹은 다음의 자신의 공력이 얼마나 강대하여 졌는가를 생각하다가, 드디어 그의 본성을 드러내어 소리쳤다.
『운학아! 그다지 뽐낼 것 없다. 네 놈의 그 선천기공(先天氣功)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전에는 용하게 살아났으나 이번엔 좀 힘들 것이다.』
자신이 만만한 듯한 외침이다.
그러나 운학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좋아. 피의 빚은 피로 갚아주마.』
하며 천전교주를 노려본다.
그러나 천전교주는 못 들은 척하고서는 딴청을 부리다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핫핫, 빚을 피로 갚겠다고? 오늘은 네가 얼간망둥이라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 주어야 하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몸을 뒤집으면서 손속을 보일 자세를 취하가 운학은 깜짝 놀라서 재빨리 방어의 태세를 취하였다.
운학이 비호와 같이 몸을 날려 천전교주에게 다가서자 천전교주의 몸은 벌써 수십 자 밖으로 피하고 있었다.
운학은 온 몸에 경공술을 운행시켜 그를 추격하려 할 때 천전교주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학아! 바위 위에 써 놓은 글자를 봐라!』
이 말을 들은 운학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정지시켜 바위를 보니 과연 가늘게 새겨진 다음과 같은 글씨가 보였다.
『이 철부지 놈아! 이틀 뒤에 침사곡 가운데에 있는 바위 위에서 만나자!』
운학은 몸을 재빨리 돌려 천전교주를 찾았으나 그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선천기공을 운행시켜 입김으로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지워버리고 발을 몇 번 굴러 천전교주를 추격하려고 하였다.
『뭐 이틀 뒤에 만나자고? 내 지금 너를 추격해야 되겠다.』
하기가 무섭게 몸을 날렸다.
사부와의 약속도 잊은 채……
이 때 침사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꼭대기를 향하여 한 무리의 행인이 올라가고 있다.
그들은 바로 천하 각파의 고수들……
이 고수들은 먼 곳 침사의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제각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소리를 친다.
『이르렀다.』
『침사곡이다!』
결국 그들은 침사곡에 이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긴 여정의 종점이 다음의 두 글자라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오!
『죽음……』
운학은 하늘에 무수히 흩어진 별과 서산마루에 기운 초생달을 바라보면서 침사곡을 향하여 싸늘한 황야의 발길을 비호와 같이 몸을 날렸다.
이때 운학의 귓가에 가느다란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걸음을 늦추었다.
울음소리는 낮았으나 아주 처량하게 들려왔다.
운학은 울음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쪽을 향하여 몸을 움직이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울음소리가 무척 귀에 익은 듯했다. 그러나 누군지를 분간하지 못하였다.
그는 앞을 응시하면서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더욱 가까이 가니 바로 눈앞에 보이는 숲속에서 그리 나이 어리지 않은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운학은 몸을 번개같이 날려 소녀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얼굴을 보고서는 어찌나 놀랐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울음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요원(姚畹)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원은 절망과 상심의 무거운 짐을 가슴에 안고서 하마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그는 일정하게 목표를 정하지도 않고 그저 서북(西北)…… 서북…… 서북으로 가기만 하면 자기에게 지금과 같은 절망과 상심의 쓰라림을 안겨준 침사곡에 이르려니 하고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들판에 흩어진 씁쓰름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허기를 달래었으나 끝내는 심한 현기증이 일어나 몇 번인가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졸렸다. 자기의 오라버니가 일러 주던 말이 졸리울 때마다 생각이 났다.
(여자란 음식은 마구 먹어도 잠자리는 가려 자야 한다.)
그는 오빠의 말을 상기하면서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이나 통나무가 석은 나무 구멍을 찾았고 어떤 때는 숲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밝히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 하마는 결심을 하고 운학과 사여명의 관계를 넌지시 요원에게 말하여 주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요원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의 선고 같아서 입을 열지 못한 적이 있었다.
요원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숲속은 갑자기 칠흑으로 변하였다.
아마도 서산에 매어 달렸던 초생달이 그만 넘어간 모양이었다.
요원은 숲속이 칠흑의 어둠속에 잠기자 조용히 몸을 일으켜서 고목나무에 몸을 기대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기는 지금 자기 자신의 영혼이 모두 빠져 버린 것같이 느껴졌다.
그 날 황학루에서 운학이 침사곡에 빠져서 속세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반은 미칠 것 같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 아니 하늘까지를 마구 원망하고 싶어지도록 격동하던 마음을 자신의 믿음으로서 이성을 찾아 진정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 믿음과 이성은 사라지고 자기의 마음이 삭풍을 만난 사막과 같이 메말라졌음을 알자 그의 두 눈에서는 소나기와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아리따운 소녀 요원의 마음을 이토록 메마르게 한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운학? 사여명?
어찌 이것이 이들의 잘못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하늘의 잘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하늘은 사랑스러운 소녀 요원으로 하여금 마부 운학을 만나게 하여 놓고서는 두 사람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시련을 주었으니 어찌 가혹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무에 기대어 있는 그의 가냘픈 두 어깨는 쉬지 않고 들먹이고 있었다.
복파보를 떠나 험난한 속세에 첫발을 들여 놓은 뒤 그 많은 날이 지나는 동안 그는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경험하여 이제는 복파보에 있을 당시의 아리따운 어린 아가씨는 아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로 하여금 이토록 상심하도록 시련을 주니 여자의 몸으로 어찌 견딜 수가 있었겠는가?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도 말랐지만 더 이상 울 기력조차 없어졌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초생달이 넘어간 서산마루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 눈앞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몸을 바로 세우면서 검은 그림자를 경계하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둠 속의 운학이 요원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자 요원은 눈을 비비면서 그를 노려보았으나 운학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는 무서움과 겁에 질려 몸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 운학은 그 이상 자기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죄스러운 것만 같아서
『요원이 아냐? 나 운학이야!』
나즈막한 운학의 이 말을 들은 요원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계략을 써서 자기를 농락하려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서 겁이 더럭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을 통하여 어렴풋이 보이는 그 모습!
그 모습이야말로 자기가 밤낮을 두고 한시도 잊어본 일이 없는 운학의 모습에 틀림이 없었다.
『설마? 당신이 운――』
요원의 목소리는 이성을 잃고 있었고
『운――』
하고서는 다음을 어떻게 이어서 운학을 불러야 좋을는지 마음속의 격정을 달랠 수가 없었다.
『요(姚)소저――』
운학도 여기까지 불러 놓고 다음 말이 이어 나오지를 않아서 괴롭기만 하다.
운학의 머리에는 처음 그를 만났던 복록잔방(福祿棧防)에서 벌어졌던 일이 그림을 보는 것같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요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대가 어떻게 이곳에――』
운학은 요원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가 자기를 보고 이렇게 대담하게도
『그대――』
라고 부르게 된 동기가 무척 알고 싶었다.
그러나 운학을 보고
『그대――』
라고 부르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온 사랑의 불씨를 안고 있는 요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 않은가!
더욱 요원이 운학을 만난 순간부터 운학의 모습이 그대로 요원의 온 마음을 정복하여 버렸으니 더욱 당연하다 할 것이다.
어둠 속에 운학의 모습을 발견한 요원의 전신의 피는 용솟음 치고 있었다.
그의 갸름한 얼굴은 그동안의 격난으로 희게 초췌해 있었으나 붉게 상기되어 다시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운학은 흥분하는 자기를 가누지 못하여 대담하게 그의 두 손을 잡으면서
『아가씨는 어떻게 이곳에……』
운학의 이 한 마디의 말은 상심에 젖어 있던 요원의 심금을 울려 놓고 말았다.
요원은 흑흑 흐느끼면서 여윈 뺨 위로 눈물이 폭포와 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흐느껴 우는 요원을 본 운학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다가
『아가씨의 사부가 또 아가씨를 괴롭힌 게로군?』
이 말을 들은 요원은 하늘 한 구덩이가 무너지는 것 같은 공허감을 느꼈다.
자기가 지금까지 천리 길을 멀다 않고 그를 찾아 헤매던 일이 허사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허무감에 빠져버리는 것 같이 섭섭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요원은 이슬에 젖은 풀밭에 앉으면서 운학의 손을 잡아당겨 같이 앉아 주도록 권유한다.
운학이 요원과 나란히 자리를 같이 하여 앉자 요원은 자기가 겪은 고초를 자상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요원이 말하는 말귀마다 자기가 운학을 그리워하던 순정(純情)을 은근히 비쳤으니 운학은 그가 그토록 자기에게 요원(遼原)의 불길 같은 사랑을 느끼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하였다.
운학은 어느덧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 속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겨 얼굴을 붉히면서 흥분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시고 냉정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의 뇌리를 자극하는 또 한 사람, 묘령의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여명(查汝明)――
그야말로 운학의 철모르는 사랑의 심지에다 불을 질러 놓은 여인이었다.
때로는 모닥불 같은 사랑의 불길이 타오를 때마다
(나 자신도 과거도 모르면서…… 부모가 누구인지?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사랑을 하다니…… )
하는 자학으로 사랑의 불길을 꺼보려고도 하였으나 자학의 자리에 이성을 대치(代置)한다는 것은 성인군자(聖人君子)가 아닌 운학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여명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이성을 잃어 그 아름다운 사여명의 모습이 요녀(妖女)와 같은 자태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것이었다.
운학의 이런 생각은 아랑곳없이 옆에 앉아 있는 요원은 쉬지 않고 슬퍼했다 웃었다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으나 운학의 귀에는 그가 무엇을 떠들어대고 있는 것인지 전연 들리지를 않았으니 첫사랑이란 이토록 마(魔)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운학은 문득 요원에게 미안하게 느껴져서 정신을 차렸다.
그토록 자기를 위하여 고생을 했다는 요원의 아름다운 순정을 짓밟아 버리는 것 같아서 어딘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순간 운학의 머리에서는 사여명의 모습이 멀리 사라져 가고 요원의 아름다운 꽃 같은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하니,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서는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요원을 바라보았다.
요원은 운학의 사랑스러운 눈길이 자신에게 쏠려지고 있음을 느끼자 지나간 일체의 고초가 일시에 사라지고 자기 자신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는 여성이라고 생각되어 자신의 몸도 마음도 운학이라는 잔잔한 호수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격을 느꼈다.
이렇게 행복의 요지경 속에 자신을 묻어버린 요원의 얼굴에는 요염스러운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운학은 난생 처음으로 따뜻한 여성의 사랑 속에 몸이 잠겨지자 요원에게 완전히 도취되어 매달렸던 억센 사나이의 가슴이 자신도 모르게 화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운학의 억센 손은 요원의 조그만 손을 꼭 잡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숲 속에는 운학과 요원이 그 모양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지구의 회전은 그 두 사람을 위하여 영원히 멈추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그들 두 사람은 서너 번 밖에 만난 일이 없었으나 십년지기(十年知己)와도 같이? 아니다 몇 년 동안을 삭풍에 품팔이 갔던 남편을 맞은 부부(夫婦)와도 같이――
요원은 나즈막한 소리로
『운랑(鄆郞)!』
운학은 모른 척하고
『응.』
『우리들은 다시는 떨어져 살 수는 없지요?』
『응.』
운학은 대답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 대답은 어디까지나 지금 도취되어 있는 행복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되자 앞에 앉아 자기에게 순정을 고백하는 요원이 다시없이 가련하게 보였다.
한편 그의 머릿속에는
인자한 사부(師父)의 모습――
사여명(查汝明)의 아름다운 모습――
하삼제(何三弟)의 늠름한 모습――
고향의 팔각정(八角亭)――
천전교주(天全教主)와의 최후의 약속――
이런 생각이 주마등같이 운학의 머리에 떠오르자 그는 철추에 머리를 맞은 것 같아서 정신이 번쩍 떠올랐다.
뼈에 사무친 복수(復讐)의 길――
결사(決死)의 약속――
등 이런 것이 완전히 끝이 나지 않은 지금 아무리 순정이라고 할지라도 요원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운학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노도와 같이 흘러 내려가던 운학의 사랑 앞에는 또 다시 이성(理性)이란 높은 제방이 쌓여지면서 그의 사랑의 물결을 가로막았다.
다시 그의 머리에는 천 갈래 만 갈래의 생각이 머리를 혼돈시켜 놓는다.
먼저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조차 깊이 생각하여 본 일이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회의론자가 되어 버리자 요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는지 자신의 명석한 두뇌가 미궁에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요원은 자기의 오른팔을 흔들면서 시원스러운 대답을 추궁하고 있었다.
『운랑! 우리는 이제부터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해가 서산에서 떠오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운학의 귀에는 요원의 이 말이 전연 들려오지 않았다.
넋을 잃고 어둠을 바라보던 운학의 눈에는 갑자기 사나운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피로 물든 꽃송이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운랑, 빨리 시원스럽게 대답을 해 보세요!』
요원은 다시 한 번 독촉을 했다.
그러나 운학의 입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
요원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우는 데에서 느낄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이때 운학은 우는 요원(姚畹)에게서 아름다움보다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가 얄밉도록 미워지기도 하였다.
요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난…… 난 알고 있어요. 당신의 마음을…… 당신은 사여명 언니를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운학은 깜짝 놀랐으나 떳떳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사여명 언니라고?』
그는 시침을 떼었으나
『난 알고 있어요. 사여명 언니, 당신의 낭자……』
요원의 이야기를 들은 운학은 그가 왜 사여명을 새삼스럽게 언니라고 부르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어떤 이야기를 그에게 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체 입을 다물어 버리고서는 마음속으로 소리친다.
(아무렇게나 생각하렴! 내가 천전교주를 죽이고 피의 복수를 하고도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일체의 변명을 하지 않으련다.)
요원은 또 다시 흑흑 흐느껴 울면서 허공을 바라보고서는
『나는 자신이 양가집 규수라는 것을 잊고 머리를 산발하고 천하를 돌아다녀 당신을 찾았는데…… 지금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라구!』
요원은 몸을 돌이켜서 얼굴의 눈물을 닦으며 숲을 빠져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순간 운학은 이지(理智)의 제방이 무너지고, 애처로움과 감상이 뒤범벅이 되어 가슴을 메워버렸다.
이 때 앞으로 걸어가던 요원은 고개를 돌려 운학을 바라보고서는
『죽어버려라!』
하고 단말마의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러나 운학은 못 들은 척하고 대답도 하지를 않았다.
운학은 벌떡 일어나 요원을 쫓아가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힘껏 당기니 요원의 몸은 팽이가 돌 듯 운학의 앞으로 돌아섰다.
돌아선 요원의 가냘픈 몸을 운학은 힘껏 껴안고 상심에 젖어 있는 그의 얄팍한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힘껏 대었다.
『요원! 우린 영원히 떨어지지 맙시다.』
운학은 요원을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언제까지나! 영원히!』
요원은 운학의 가슴에 안겨서 울고 있었다.
그가 왜 우는지?
그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눈물이었다.
『운랑! 사여명 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여 주었는지? 내가 언니를 찾아가서 언니와 함께……』
운학의 따뜻한 품에 안긴 요원은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행복스러운 꿈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요원의 보드라운 몸을 힘껏 안고 있는 운학은 불길처럼 일어나는 남자의 본능을 억지로 달래면서 오랫동안 잊었던 남자의 호기(豪氣)를 도로 찾았다.
『천전교주! 피는 피로서 갚아 주겠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삼십 회 이상이나 외쳤다.
그의 가슴에 일던 흥분은 가시기 시작하여 새로운 결심과 용기가 가슴에 용솟음쳤다.
그의 눈앞에는 하삼제(何三弟)가 만 길이나 되는 절벽 밑 골짜기로 떨어져 피바다를 이루는 광경이 역력히 보이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천전교주! 피는 피로서 갚아 주겠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기 시작하며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암흑 속에 요원을 안고 서 있는 운학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자기의 품속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는 요원을 내려다 볼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요원을 내려다보는 순간 자기의 결심이 또 다시 변할 것 같은 생각이 나서 여전히 하공을 노려보면서
『피, 불, 누런 모래의 침사곡.』
을 계속해서 외우면서 자신의 결심을 몇 번씩이나 촉구하였다.
그는 품속에 잠든 요원을 아늑한 풀밭으로 안고 가서 조용히 눕혔다.
그는 다시는 요원의 얼굴을 바라보지는 않고 그 자리를 총총히 떠나버리고 말았다.
아! 장사(壯士)의 한 번 떠남이여!
풍륜이 침사곡에서 큰 소동을 벌인지 여드레가 되던 날……
또한 남강(南彊) 백고주(百蠱珠)의 마(魔)의 힘이 최후의 발악을 하던 무렵…… (작업자 주: 앞부분에서는 백충주였는데, 이름이 백고주로 바뀌었습니다.)
침사곡은 무거운 구름과 안개에 눌려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가는 숨기고 숨겼다가는 나타내고 하였다.
침사곡 산정에서 산기슭을 향하여 나는 듯이 한 사람이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음흉한 찬바람이 그 사람의 얇은 옷에 사정없이 불어제치니 그 사나이가 추위를 어떻게 이겨 낼 것인지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 사람은 번개와 같이 몸을 날려서 골짜기 밑바닥의 한 굽이 후미진 누런 모래의 호반에 이르자 고개를 들어 잔뜩 찌푸린 하늘을 쳐다본다.
그의 얼굴 역시 하늘과 같이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요원! 나의 괴로움을 이해하여 주어! 만약 내가 이 골짜기에서 살아 돌아간다면 반드시 너를 찾으리라!』
사나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슴에 복받쳐 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얼마 뒤에 눈을 번쩍 뜨더니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는 침사곡의 누런 모래바닥을 노려보았다.
그의 몸은 가벼운 한 장의 종이처럼 모래 위를 날으니 그의 몸은 활을 떠난 화살과 같이 거침없이 모래 위를 달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발바닥과 모래 위에는 어떤 힘이 잠재하여 있다가 밀어 내는 것처럼 가볍게 침사곡을 날아서 건너가고 있었다.
침사곡은 조용하기만 하였고 사나이의 마음 역시 조용하기 한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침사곡에 도전하는 사람은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미신(迷信)으로 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틀림없이 돌아가고야 말겠다.)
회오리바람은 누런 모래를 휘몰아 하늘까지 치솟는 듯한 기둥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사나이는 오른쪽 손으로 회오리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침사곡을 건너가는 여정에 오른다.
그의 몸은 물을 차는 제비처럼 가볍게 수십 자를 날아갔다.
드디어 전진파의 청년 고수 운학이 침사곡을 건너가기 시작하였다.
얼마 뒤에 그는 침사곡 한 가운데에 있는 바위 위에 몸을 나타냈다.
그는 그 바위 위에 똑똑히 새겨진 발자국을 발견하였으나 그 발자국의 모양이나 크기가 일정하지가 않았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임에 틀림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발자국은 깊이 패어져 있어 좀체로 지워질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운학의 뛰어난 총명을 발휘하여 생각하니
(이 발자국은 천하의 무림 고수들이 떼를 지어 이곳을 건너갔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 고수들은 이곳에 이르자 이상 더 진기를 지탱할 수가 없어 이 바위 위에 우뚝 서자 진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힘으로 침사곡으로 곤두박질하는 것을 가까스로 면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이렇게 깊고 얇은 발자국이 패어져 남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운학은 자기의 발밑을 내려다보았으나 바위에는 전연 자기의 발자국이 나 있지 않은 것을 보고서는 마음속에 흐뭇함을 느끼고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운학의 머리에는 왜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이 골짜기 한 가운데의 우뚝 솟은 바위를 찾아 올라간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사방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자기에게 만나자고 약속했던 천전교주 사형령주마저도 보이지를 않았다.
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음침한 날씨……
요동을 치는 침사곡의 회오리바람……
적막한 고요……
모두가 음산하고 음침하기만 하여 운학은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그는 가슴을 쭉 펴고서는 대기를 들이 마시니 마음속까지 싸늘하여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는 꼭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허구많은 날을 살아오는 동안에 온갖 고생을 다하였지만 내가 이 침사곡에서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어 어지러운 무림을 정화하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운학은 슬그머니 자기 몸을 바위 뒤로 숨기고 눈만을 내놓고 사방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윙 윙……』
하는 바람 소리와 질식할 것 같은 적막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를 또 지났으나 주위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한 운학은 바위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높은 바위 위로 가뿐히 몸을 날려 올라 섰다.
그는 적막의 무서운 테두리에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도 어지간히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 되었군! 반나절을 참지 못해 이 꼴이니 아마 십 일을 기다린다면 미쳐서 저 침사곡으로 빠지려 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자 역시 빨리 제자리에 돌아가서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된다는 자책을 받고 바위에서 뛰어 내려 먼저의 자리로 돌아갔다.
운학이 이 높은 바위에서 제자리로 빨리 돌아가도록 된 것은 분명히 그를 살리려는 하늘의 계시가 있었던 것에 틀림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바위를 떠난 지 얼마 뒤에 그 곳에는 남강(南彊)의 백고주(百蠱珠)의 독기가 번졌기 때문이다.
운학이 조그만 더 그 바위 위에 머뭇거리고 있었더라면 그는 영영 속세를 떠나 이승으로 가버렸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운학은 바위 뒤에서 걸어 나오자 다시 몸을 날려 봉우리의 꼭대기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죽음의 바위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의 눈을 끈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오른쪽 절벽가에 솟아 있는 돌 위에 푸른 옷의 소맷자락이 바람의 부는 방향을 따라 펄럭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이상한 푸른색의 소맷자락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여 오른쪽 절벽 위로 달려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러 버렸다.
『앗!』
절벽 아래 땅 위에는 한 사람의 시체가 버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시체는 완전히 죽은 것 같지는 않았으니 아직도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살아보려는 생각 때문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아관도복(峨冠道服)을 입은 도사라는 점이다.
운학은 몸을 날려 도사가 쓰러져 있는 곁으로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온 몸에서 상처라고는 한군데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죽었는지 그 사인(死因)을 밝혀 낼 수가 없었다.
운학은 세밀하게 시체를 조사한 끝에 그의 허리에 꽂혀 있는 단검을 발견하였다.
그 단검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운학은 차마 자기 손으로 그 단검을 만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온 몸의 공력을 운행시켜서 면도날 같은 경풍을 날려 도사의 허리띠를 치니 허리띠가 끊어지면서 순금의 단검이 땅에 떨어졌다.
그 단검의 검신 위에는 한 줄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金劍爲盟 靑城獨存. 금검위맹 청성독존
황금의 칼로 맹세를 삼으니 청성이 홀로 남아 있도다.>
운학은 글씨를 보자마자
『앗!』
하고 소리치면서 놀랬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가 바로 청성(靑城)의 장문인(掌門人)이 아닌가?』
하면서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방을 돌아보니, 한 오십 자 정도 떨어진 고 바위 옆으로 쭉 뻗은 다리가 보이는 것이었다.
운학은 무섭기는 하였으나 그 옆으로 다가가서 바위 모퉁이에 이르렀다.
『앗!』
운학은 또 한 번 놀라면서 우뚝 서 버렸다.
이십여 명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쓰러져 있었으나 먼저 번에 본 도사의 시체와 같이 상처라고는 하나도 보이지를 않았다.
운학은 놀랍기도 하고 끔찍한 생각이 들었으나 용기를 내어 시체 하나하나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운학의 바로 오른발 밑에 쓰러져 있는 시체는 바위에 몸을 기대어 마치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 같은 자세로 죽어 있었으며 옷차림이나 얼굴 모양으로 봐서 선비임에 틀림이 없었고 그의 목에는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진주는 붉은 색채가 나는 투명체이며 마치 예쁜 구슬같이 보였다.
운학은 몸을 굽히면서 황급하게 진주를 세어 보니 모두 아홉 개의 구슬이 쇠줄에 꿰어져 목에 걸려 있다. 이것을 본 운학은 나지막한 소리로
(이 사람은 반드시 곤륜(崑崙)의 장교(掌敎) 남선(南璿)이라는 것에 거의 틀림이 없다.)
이렇게 생각 하면서 옆으로 눈을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얼굴 모습이 아주 이상한 시체가 똑바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쓰러져 있는 바위에는 짙은 금색의 장인(掌印)이 나타나 있었다.
운학은 직감으로 그가 막남(漠南)의 금사장문(金沙掌門)인 살천조(薩天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운학은 시체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좁은 길을 나가다가 맨 마지막 시체 앞에 이르러 자세히 그 시체를 살펴보니 시체의 나이는 오십 안팎으로 보였으며 죽기 전에 심한 괴로움을 참지 못하였는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운학은 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허리를 굽혀 자세히 살피고 있던 운학은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러 버리면서 까무러칠 것 같은 충격을 받았으니 그 시체의 주인공은 바로 하마(何摩)의 사부인 공동신지(崆峒神指)였기 때문이다.
그가 쓰러져 있는 바위에는
『나는 알고 있다. 새북대전(塞北大戰)의 비밀을…… 독(毒)……』
위에서부터 써 내려온 글씨는 끝머리에 가서는 아주 힘이 빠져서 ‘독’자는 아래가 전연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까지 쓰다가 진기(眞氣)가 다하여 죽은 것에 틀림이 없었다.
순간 운학은 지난날 천하 고수 천일대사(天一大師)도 필경은 남의 흉계에 빠져서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단정을 했다.
그리고 또한 당시의 천하 고수들도 이 무서운 독의 해를 입어 비명에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독이 어떤 것이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더욱 의문이 깊어가기만 하였다.
운학은 공포에 싸여 공동장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죽었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골짜기에서 비명에 죽어 갔으니 눈을 감을 수가 있겠는가?)
운학은 심한 충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강열한 집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리하여 운학은 온몸의 경공을 운행시켜 죽기를 각오하고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의 몸매는 날씬하게 가다듬어져서 나는 제비와 같은 속도로 봉우리의 정상에 올라서면서 몸을 뒤집어 가까스로 몸의 안정을 얻을 수가 있었다.
마침 운학이 서 있는 바위 건너편 그리 크지 않은 돌 위에는 어떤 사나이가 우두커니 서서 침사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사형령주(蛇形令主)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천전교주의 얼굴 표정은 얼어 죽은 시체 모양으로 창백하고 무표정하였다. 그것은 그가 얼굴에 인피(人皮)를 뒤집어쓰고 참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형령주는 운학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골짜기와 온 산을 짓누른 안개의 틈을 타서 달빛이 희미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운학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우두커니 사형령주(蛇形令主)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사형령주의 동정을 살피는 탐색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학은 계속해서 손을 비비면서 일전을 치룰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니 운학의 눈은 사형령주에게서 떠나지를 않는다.
천전교주는 운학의 몇 자 앞에 다가서서 걸음을 멈추니 운학은 교주를, 교주는 운학을 서로 노려보기 시작하였다.
얼마가 지난 뒤에 사형령주는 음흉한 목소리로
『운(鄆)가 놈, 정말 왔구나!』
운학은 큰 소리로 껄껄대며 웃고 나서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는군!』
천전교주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건 어째서?』
운학은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한 어조로
『네 놈이 죽을죄를 지고도 뻔뻔스럽게 이곳에 또 나타났으니 말이다!』
이 냉혹한 소리를 들은 사형령주는 얼굴에 차가운 웃음을 띠우면서
『운형(鄆兄)은 나이도 젊고, 일신이 무공도 그렇게 훌륭해서, 본인은 언제가 존경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느님의 장난인지 양웅(兩雄)이 세상에서 병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하는 사형령주는 연달아 탄식을 하였다.
마치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운학은 다시 한 번
『하아! 하아!』
하고 크게 웃어 제치면서
『여보게 친구, 자네는 비유(比喩)를 잘못 한 것 같네!』
하고 말하니 그것은 천전교주(天全教主)를 나무라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사형령주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뭐가?』
한다. 운학은
『교주, 자네는 나와 자네를 양웅(兩雄)이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모독하는 소리로 밖에는 안 들리네! 흥!』
천전교주는 평소에 별로 말재주가 없는 운학이 이렇게 자기를 놀리면서 욕질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여 약간 놀라면서도 능청을 떨어
『그렇다면 운형은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시오?』
하고 묻자 운학은 사납게
『그러니 운학은 널 세워 놓고 일검에 쳐 죽여 주겠다는 거야!』
노기를 띠운 운학을 본 사형령주는 음침한 미소를 띠우면서
『운형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들 사이에는 굉장히 큰 오해가 쌓인 것 같군!』
운학은 여전히 뉘우치지 않는 사형령주를 보자, 크게 노하여 호통을 쳤다.
『내가 먼저 한 마디 묻겠다! 너는 뒤에서 흉계를 꾸며서 나를 침사곡에 밀어 넣었겠다? 이래도 또 뭐라고 변명하겠나?』
『운형! 자세한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그날 내가 먼저 손을 쓰는 것을 봤습니까? 그것을 어찌 계교(計巧)라고 할 수 있겠소?』
하는 사형령주의 뒷면에는 여전히 교활한 본성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운학은 분노의 물결이 넘쳐흐를 것 같은 충격을 억지로 참으면서 평정을 되찾아 침착하게, 또한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끝난 일이야! 네가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어도 할 수 없지! 그날이 하늘이 네 뜻대로 하게 버려두지는 않을걸! 네가 나에게 또 다시 어떤 흉계(凶計)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아!』
노하여 말하는 운학을 본 사형령주는 그가 크게 노하여 자기에게 그 무서운 손으로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몰래 자신의 공력을 운행하여 온 힘을 팔뚝에 집중시켜 그의 불의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운학은 폭발하려는 분노를 참고 견디는 것이었다.
사형령주도 운학의 수양의 미덕에 마음속으로 감탄하였다.
그러나 운학의 얼굴색은 갑자기 변하면서 벽력같은 목소리로
『그러나 신룡검객(神龍劍客) 하마(何摩)는? 네가 흉계를 꾸며서…… 또한 무림 중의 수십 명 고수들도 너의 음흉한 흉계로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하게 했으니……』
이 말을 들은 천전교주는 영악스러운 웃음을 띠우면서
『그들? 흥! 변명하고 싶지도 않소이다!』
운학은 그가 도피구를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는
『말해 봐.』
하며 독촉을 하니 천전교주는
『모두 살아야 했을 것을!』
사형령주의 이 간단한 대답이 어떤 뜻인지를 모르는 운학은 곧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이 원수에 대하여 아는 바가 너무 적었다.
운학(鄆鶴)과 사부 청목도장(青木道長)은 김인달(金寅達)과 운학의 집안 사이에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는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연 없었다.
운학은 이를 악물면서
『오늘은 네가 죽든 내가 죽든 결판을 내는 날이다.』
그러나 천전교주는 태연스럽게
『옳으신 말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학은 숨을 크게 들이마셔 진기를 운행시켰다.
즉시에 그 진기는 전신 백혈(百穴)을 향하여 운행시키면서 장풍을 치려는 순간에 우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지금 이 벼랑 위에는 이십여 명의 각파 고수들이 시체로 변하여 누워있는데 이 역시 현명하신 교주님의 음흉한 계략의 소치이겠습죠?』
비꼬아서 말하는 운학의 눈에서는 무서운 정기(精氣)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거 말인가? 본인들이 자초해서 택한 황천길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게!』
태연스럽게 말하는 사형령주를 보자 운학의 노기는 점점 높아지기만 하였다.
운학은 사형령주의 입을 통해서 좀 더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사형령주가 상하도록 비꼬아서 말을 했다.
『이십 명 고수들의 시체에서는 상처 하나 볼 수가 없었으니 분명히 너의 흉계에 틀림없을 것이니 자네의 비상한 술법에 다시 한 번 감탄하네!』
지금까지 자신을 억제하던 사형령주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양쪽 어깨를 들먹거리며 입가엔 경탄을 일으키면서
『너한테 말하여 주어도 괜찮겠지! 그들은 남강(南彊)의 백고주(百蠱珠) 때문에 죽었단 말야! 백고주의 독기가 번져 있는 범위 안에서의 생물이면 모조리 중독되어 죽어버리게 되어 있는 거야! 이래도 그들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나!』
운학은 깜짝 놀라면서 소리를 높여
『남강의 백고주라고 했지? 음…… 남강의 백고주라!』
그 많은 각파의 장문인이 삽시간에 한꺼번에 시체가 되어 버리다니!
순간 운학의 머리에는 한 가닥의 영감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친다.
(이것이 지난날 새북대회의 재연(再演)이 아니고 무엇이냐!)
운학은 크게 호통을 치듯이 큰 목소리로 허공과 사형령주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소리를 쳤다.
『백고주! 너는 어떻게 백고주를 그렇게 잘도 아느냐? 틀림없이 너도 그 백고주를 써서 사람을 상해한 일이 있지?』
순간, 사형령주는 당황하였으나 금시에 표정을 되찾고
『운학아! 넌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온 천하에 소문이 나 있는 남강의 백고주도 모르다니? 백고주는 남강의 신비에 싸인 뱀이 내뱉는 영주(靈珠)로서 한 번에 꼭 두 개씩 생겨나나 백년에 한 번도 보기 드문 것으로 무사(巫師), 즉 주술사(呪術師)라는 사람이 영주(靈珠)를 놓고 삼십 년 동안 저주를 하면 닷새 안에 효력을 발생하여 삼일 안에 백물(百物)이 몰살되는 독주(毒珠)란 말야! 그러나 이봐! 그 독물 중에 중독되어도 살아날 방법이 있단 말야, 그 방법까지 아주 가르쳐 줄까? 그것을 시술한 사람이 미리 무약(巫藥)을 먹어야 살아날 수 있단 말야!』
이 말을 들은 운학의 마음에는 자기 생각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천전교주를 향하여
『이제 그만 해! 이번엔 내가 너에게 대신 말하여 줄까? 백고주는 생길 때마다 두 개씩이 나온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한 알은 저 아래 무림 고수를 장사 지내는데 썼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십수 년 전에 새북대전(塞北大戰)에 살수(殺手)로 이용했지? 지금까지 신비에 싸인 무림 고수가 실종된 사건은 그 백고주의 독기 때문이었지? 네 말대로 그 백고주에 저주를 한 시술자의 무약(巫藥)을 미리 먹지 않았기 때문에 침사곡에서 모두 죽었단 말야! 어때, 틀림없지! 그러구 독주에게 삼십 년 동안 저주를 한 시술자가 바로 당신이구!』
그러나 천전교주는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참 잘도 알아내는군!』
운학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다면 천일대사(天一大師) 역시 그 백고주(百蠱珠)에게 중독으로 죽었단 말인가?』
『그렇다니까!』
『또한 전진파의 청쟁우사(靑箏羽士) 역시 중독으로 죽었다고?』
『물론!』
태연스럽게 말하는 사형령주가 운학에게는 살인마(殺人魔)로 보여 치가 떨렸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운학은 생각을 돌려 자기 가문의 원수를 생각하게 되었다.
운학은 자기 가문의 원수를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이 가장하여
『이봐 내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어!』
운학은 말하는 사이에 그 화염에 싸였던 나이 어릴 때의 자기 집의 광경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가슴에 일어나는 격동을 억지로 참았으나 자기의 떨리는 목소리를 눈치 챌까 하여 걱정하면서
『십수 년 전 강남(江南)의 운(鄆)씨댁 말야! 너희들이 너무 악독한 짓을 했어. 우리 운문(鄆門)을 몰살하기 위하여 피바다를 만들었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불을 지르고 말았으니…… 어디 이놈 말 좀 해봐.』
운학은 격동하여 다음 말을 이어 가지 못하였다.
운학이 치를 떨며 하는 말을 들은 사형령주는 그가 당시의 일체 사정을 알고 있는 것으로 알고 뻔뻔스럽게도
『나도 네놈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운학은 시침을 뚝 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까닭에 좀 더 알고 싶은 생각에
『이 악독한 놈아! 그래도 안했다고는 않는구나!』
『기왕에 저질러 놓은 일인데 안했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어디 있어! 비록 나를 교사(敎唆)한 것은 사부 김인달(金寅達)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너는 나에게 빚을 청산함으로써 만족할 거야!』
이야기하는 사형령주는 어딘가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같이 보였지만 그의 사부 김인달이 어째서 그렇게 무서운 흉계를 꾸몄는지 알고 싶어 좀 더 추궁하고 싶었으나 그의 불같은 노기를 참지 못하여
『에이, 이 죽일 놈!』
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사형령주를 노려보니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전신에 공력을 운행시키면서 마음속으로 앞뒤를 재어 본다.
(운가 놈의 무공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데 더구나 지금 이 놈의 기세는 미친 호랑이보다 더 사나운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코 다칠 걸! 되도록 이놈의 독수를 될 수만 있다면 건드리지 말도록 하자!)
운학의 숨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나워지기 시작하였고 눈을 벌겋게 충혈이 되었다.
그의 눈에서는 살기가 뻗쳐 천전교주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다.
운학은
『들어 봐! 이놈아! 내가 바로 그날의 사건 뒤에 남은 고아(孤兒)다!』
천전교주는 차가운 웃음을 띠우면서
『난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침사곡으로 빠져 들어간 그날 사부께서 나를 보시고 이미 만사를 짐작하고 있다 하셨어!』
천전교주의 이야기는 고무적이기는 하였으나 반 체념적이기도 하였다.
운학은 김인달이 왜 자기의 부모를 살해하려고 하였는지 사형령주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었으나 잠시 참기로 하였다.
그것은 지나치게 흥분되어 있는 까닭에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노하면 노할수록 이지와 냉정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유야 어쨌던 부모가 김인달의 손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
이것만 알면 모든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같이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운학의 마음속에는 다시 한 번 노도(怒濤)와 같은 적개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놈을 먼저 죽여야겠다. 이놈을 먼저…… 다음의 목표는 김인달이다.)
운학의 마음에는 심한 고동이 일어났다.
드디어 운학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천전교주를 향하여
『덤벼라!』
천전교주 역시 이젠 면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납게 소리치면서
『씨 없는 애새끼야! 너마저 황천으로 보내야 하겠다. 침사(沈砂)로 가서 사생(死生)을 결단하자!』
그러나 운학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드디어 두 사람의 몸은 유성과 같이 산봉우리 아래로 떨어져 침사의 골짜기를 향하여 떨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