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뿔, 뿔, 뿔
고요했던 순물질
비등점에
닿는 순간
최선의 방어이자
최후의 공격으로
뿔, 뿔, 뿔
들끓어 오르지
맹렬해진
심장의 서슬
차오르던 역한 기운
포화점을
넘는 찰나
한 모금 혼돈주로도
솟구치는 혀의 돌기
이맛전
짓이겨져도
치받아버리지
뿔
뿔
뿔
■ 당선 소감/ 이현정
세상과 통하는 나만의 목소리
어떤 말을 벼려 쓰면 후회가 남지 않고 기억에 남는 소감이 될까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습니다. 고민의 끝을 거듭 짚어 봐도 제한된 지면 안에 진심과 감사를 담는 것 외에는 답이 없기에, 소박하고 담박하게 소감을 전해 봅니다.
감정의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 거친 질감의 시조, 더 무두질해야 할 시조를 꼭두에 올려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내가 창작한 작품, 나만의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은 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이제 그 꿈의 길목에 한 걸음을 뗀 기분입니다. 두 발이 가뿐하고 또한 무겁습니다.
어머니처럼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동생과 누구보다 뿌듯해 하실 아버지, 자기 일 마냥 기뻐해준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여기에 제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비록 야인이셨지만 시를 참 잘 쓰셨습니다. 시를 쓰고 싶다는 손녀에게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대상을 바라보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말씀에 담긴 마음을 시금석으로 삼겠습니다.
처음 시조에 눈 뜨게 해주시고 불초 제자를 어르고 달래며 정진케하시는, 존경해 마지않는 이정환 선생님께 마지막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대학 시절, 좌우명을 써 내라 하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음말만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음말에 담긴 진정성을 알아보셨던 스승님 덕분에 이 영광의 자리에 제가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새롭게 바라보며 깊이 천착하여 오래, 오래도록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약력
1983년 경북 안동 출생. 대구교육대 졸업. 경북대 교육대학원 상담심리전공. 대구광역시교육청 학교생활문화과 파견 재직 중.
■ 심사평 / 박권숙, 염창원, 이종문, 최영효
한 시대를 난타하는 시적 전략
새해 벽두에 봄을 맞이할 전령시를 보낸다. 달마다 검증을 거친 응모자들의 정련된 작품들이라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설경미의 ‘이웃집 여자’, 황혜리의 ‘먹이사슬’, 김수현의 ‘유빙’, 윤애리의 ‘쉼표’, 예숲의 ‘파종’과 이현정의 ‘뿔, 뿔, 뿔’이었다. 단단한 말의 결에 삶의 역동성이 넘치는 발화법으로 불안한 관계와의 존재를 성찰하거나 현실의 지난함을 토로하는 시편들과 새로운 시대의 파종을 꿈꾸는 노래들이 다채로웠다.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시가 언어의 심연에 가닿지 못하고 표피적 한계성, 시인의 날카롭고 치열한 시정신과 개성적인 목소리의 부재를 걱정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이웃집 여자’는 오른손을 들면 왼손이 아쉬웠지만 이현정의 ‘뿔, 뿔, 뿔’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다수의 원숙한 다른 작품에 비해 패기와 진정성, 미래의 가능성을 택한다. 조금은 서툰 보법 속에 주눅 든 현실에 기죽지 않고 한 시대를 난타하며 시적 전략을 곁눈질 않는 그를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심사위원=박권숙, 염창권, 이종문, 최영효(대표집필)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산다화 조리다 남도 삼백리를 졸다
김성배
입안의 잔칫상 성게알 톡톡톡
터지는 게, 맛있게 터지는 게 고로코롬
깨어진 하루가 홀딱, 파도에 젖었다
터져서 기쁘다니 지지고 졸이고
겁나게 그녀는 가난한 골목길
백내장 앓는 가로등 아래 서로 맛났나
익모초로 단 입술 떠난 그녀 상큼 쓰려,
고사리 고것고것 살리라 하는데
도라지 돌아 돌아서 오라는데 소식 없다
돌아오고 돌아가게 만드는 그녀가
돌아버린다, 저 섬에 돌아갈 땔 아는 건
갯바람 징허게 동백 헤아릴 때이다
■ 당선 소감/ 김성배
젊은 글 쓰고픈 쉰 넷, 이 세상 못이 되겠다
함박눈이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짜릿하고 말랑말랑한 전화를 받았다. 버스 안에서 얼음보숭이로 녹아드는 목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심사위원 분들이 모자란 나를 뽑아주신 뜻은 앞으로 못난 빈 구석을 채워가라는 말씀으로 새기겠다.
오래전 글이 밥이 되길 바랐고 그렇게 기웃거렸다. 나를 두고 앞서간 누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들은 기억도 못할 김선향이란 이름으로 시를 쓰던 누나,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행복한 뒤끝은 없었다. 나 역시 어머니의 오랜 병상 생활로 어려워진 집안을 어떻게든 해야 했지만 능력이 닿지 않았다. 솔직히 나의 시는 밥벌이가 될까 시작했지만,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오히려 시라는 양귀비를 맛들이곤 중독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 삶이 어려워서 포기했고 도움이 될까 다시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그렇게 공모전 상도 몇 번 받았다. 오오, 행복한 지옥이여. 제대로 되는 거 없이 이 일 저 일 늑대처럼 순례했다. 글이 내가 잘할 수 있는 하나라 생각했지만 또 다른 좌절의 시작이란 걸 몰랐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글이란 걸…. 그때의 나를, 더더욱 지금의 나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부족했는지를…. 누나를 보내고 뒤이어 아버지까지 보내고 난 뒤 얼음물에 빨래하던 퉁퉁 부은 내 손에 박힌 동상처럼 나는 혼미했다.
요즘은 글 쓰는 젊은 친구들이 적어진 듯하다. 그만큼 힘든 탓일까. 천연기념물, 멸종위기동물이 되어가는 이 시대 서러운 수컷들의 운명인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살짝 쉰 쉰넷, 시어 꼬부라져도 총각김치는 총각이듯 젊은 글을 쓰고자 한다. 스스로 못났기에 이 세상의 못이 되겠다. 잘 박히겠다.
■ 김성배 ▲1965년 경북 문경 출생 ▲2000년 ‘자유문학’ 시 부문 당선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 부지부장 ▲등대문학상·해양문학상·거제문학상 수상
■ 심사평 / 이근배 이송희
아픈 기억, 남도의 맛과 향기로 상상력 극대화
문학은 새로운 감각의 언어와 신선한 양식을 요구한다. 기존의 관습과 제도에 충실한 언어는 다분히 소통의 도구로 떨어지기 쉽다. 삶의 구체성을 담아낸 언어는 관습과 제도, 그 바깥에 존재한다. 시는 습관으로 굳어가는 언어의 형식을 벗어나려고 하는 지점에서 싹을 틔운다.
올해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산다화 조리다 남도 삼백리를 졸다’(김성배), ’술잔의 실루엣이 내걸린 골목’(강대선), ‘새들의 망명정부’(김수형), ‘햇귀 한 줌, 갈피끈 되다’(최평균), ‘천상열차분야지도’(김경태) 등이다. 논의 끝에 김성배의 ‘산다화 조리다 남도 삼백리를 졸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김성배의 ‘산다화 조리다 남도 삼백리를 졸다’는 의성어와 의태어, 남도의 방언을 적절히 배합해 살아 있는 말맛과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이다. 특히 ‘조리다, 졸다’, ‘터지는 게, 맛있게 터지는 게 고로코롬’처럼, 유사발음의 언어를 반복적으로 활용하여 리듬감을 부여한 점이 심사위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종장 처리에서 음보가 다소 불안해 보이지만 신인의 패기로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음도 주목된다. 여기에 음악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나 가치가 상당했다. 이 작품의 진정한 미학은 화자가 가지고 있는 편 편의 아픈 기억을 남도의 맛과 정서, 산다화의 쓰디쓴 향에 연결 지어 상상력의 폭을 극대화한 데 있다. 한편 이 시조에서 의성어와 의태어의 과도한 남발은 오히려 작품의 진정성을 떨어뜨리고, 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부디 초심을 견지하여 시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를 당부한다. 또 한 사람의 신인을 맞으며 축하를 보낸다. 낙선자들께도 위로와 정진을 빌며, 시조 창작의 행복한 길에 동행해주시기 바란다.
[2019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김기택 교수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만난 첫 선생님이 교수님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인사드리지 못하지만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MID 출판사의 최성훈 사장님, 틈틈이 일하게 해주셔서 고비마다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가르침을 주신 노희준 교수님, 해이수 교수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조금씩이라도 좋은 소식을 계속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랜 친구인 래선, 어서 힘을 내고 스스로 일어나길. 래선이 동생 화성, 넌 잘 살 거야. 믿어 의심치 않아. 지현 언니, 정 없는 사람을 정으로 챙겨주는 것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뽑아주신 경남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또 한 번 무너지지 않고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아쉽게 낙선한 분들에게는 가열한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장성진·이달균)
[2019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고무공 성자
고윤석
어라, 쪼그만 녀석 여간내기 아니었네
엉덩이 뻥 내질러도, 허리를 작신 밟아도
도무지 쓰러지지 않네,
두 손 들 줄 모르네.
누르면 꼭 그만큼 이 악물고 튀어 올라
가슴속 숨긴 깃발 하늘 높이 흔들다가
다시금 지상에 내려
낮은 곳을 살피네.
마음조차 둥글어서 각진 세상 품은 걸까?
진자리 마른자리 아래로만 길을 찾는
속 텅 빈 고무공 성자,
걸음마저 탱탱하네.
■ 당선소감 / 고윤석
덤덤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가슴 속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까마득한 산 앞에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멍하니 기다리던 나락 같은 날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투명한 햇살이 눈송이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는 아침, 어느 산머리에 올라가 돌처럼 뭉친 응어리를 펑펑 쏟아 놓고 싶었다.
무슨 조화였는지 교실 창가에서 말라 죽어 가는 화분 속 꽃들을 보며 학생 때 외운 음보를 떠올려 ‘환경미화’란 제목으로 쓴 첫 작품이 중앙일보에 덜컥 실린 이후, 달콤하게 때론 처절하게 숱한 시간을 태웠다. 그렇게 열병을 앓다 ‘아, 나는 천재성이 없구나’라는 씁쓰름한 자각과 함께 10여 년 외도하다 방황의 발걸음이 이끈 곳이 다시 시조였다. 세상일이 그렇듯 시는 천재성보다 치열한 산고 속에서 태어난다는 깨달음과 함께.
기뻐해 주는 동료 시인들의 축하 전화를 받으며 고독감에 몸부림쳤던 이 여정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윤금초 선생님과 그리고 늘 내 일처럼 응원해주는 장은수 회장님, 조성문 시인, 박희정 시인, 임채성 시인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동문과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흔들리는 발걸음을 잡아 주고 현대시조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라는 채찍을 가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삶과 사람을 노래하리라. 마지막으로 어머님과 장모님의 건강을 빌며 묵묵히 응원해주는 사랑하는 아내 조인옥과 지수, 지영, 지형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약력
1961년 충남 서산 출생.
한양대 졸업. 동국대 법학박사. 현직 교원.
제17회, 제18회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동상 수상.
2017년 중앙시조 백일장 11월 장원 수상
■ 심사평
심사위원 : 김영란(심사위원)
“평범한 사물의 속성 예리하게 포착, 주제를 단아하게 들어앉혀”
등단제도의 문제점이 꾸준히 지적되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화려한 등단을 꿈꾸는 작가들의 로망은 단연 신춘문예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번 응모작들은 신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노련하고 탄탄한 수준급의 작품들이 많아 신인 등용문인 신춘문예 심사가 아니고 기성작가의 문학상 심사를 하는 듯 했다.
전국에서 보내온 400여 편의 작품을 한 편 한 편 읽어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다. 하지만 단 한 편의 당선작을 고르기 위해 작품을 추려내면서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작품 수가 많기도 했지만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의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도저히 판가름을 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신춘문예의 이름값에 가까운 신선하고 패기있는 작품이면서 정형시인 시조의 운율과 맛을 잘 살려낸 작품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손에서 내려놓기가 아쉽고 미안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서형국, 조우리, 조경섭, 이형남, 허순옥, 고윤석의 작품만 남겼다.
서형국의 ‘바람 우체부’는 감각적인 표현들이 신선했으나 마지막 수까지 끌고 가는 힘이 부족했다. 조우리의 ‘후드티’ 등 작품은 대부분 5수 6수 짜리였는데 끌고나가는 힘은 있었으나 압축과 절제라는 시조의 묘미를 살려내는데 다소 부족함이 있었다. 조경섭의 ‘세한도를 읽다’는 무리 없는 편안한 전개는 좋았으나 잡아끄는 매력이 조금 부족했다. 이형남의 ‘정물이 되는 저녁’은 이미지가 선명하고 깔끔했는데 당선작으로 선택하기에는 다소 가벼웠다.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한 것은 허순옥과 고윤석의 작품이다. 허순옥의 ‘널문리 아리랑’은 시대성이 부각되는 작품으로 시조의 속성을 잘 살려냈지만 뒷받침하는 작품들의 힘이 조금 모자랐다. 고윤석의 작품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수준이 균일했다. 정형시 전통의 율격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쉽고 편안하게 이끌어나가는 품이 한두 해 닦은 실력이 아니다. 특히 ‘고무공 성자’는 평범한 사물의 속성을 예리하게 포착해 작품 안에 주제를 단아하게 들어앉혔다. 시조단의 내일을 이끌어나갈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김영란 시조시인 대표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