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쉼터 / 윤미옥
따사로운 햇살이 창가를 파고드는 아침이다. 겨우내 어두운 땅속에서 빛을 그리워하던 새싹들이 세상 구경을 나왔다. 봄의 재잘거림에 햇볕도 고운 빛깔을 더욱 빛내 준다. 지난겨울은 눈이 많이 내린 탓인지 자취를 감춘 꽃들도 많다.
봄은 햇살과 비와 안개 속에서 하루하루가 새로워진다. 화려한 정원은 아니어도 내 손으로 가꾸어가는 작은 꽃밭은 하루의 시작이며 끝이다. 초록의 눈부신 생명력은 소소한 행복을 주기까지 한다. 사계절의 변화를 보기 위해 여러 꽃을 심었다.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팝콘처럼 터지며 봄이 온다고 소식을 전한다. 꽃은 모두에게 희망을 선물해 준다. 눈꽃 모자를 쓰고 피는 노란 복수초와 영춘화가 절기의 시작을 알려준다.
봄에 피는 꽃은 화려하지만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목련과 벚꽃은 우리에게 봄이 왔다는 것을 잠시 알려주고 떠나간다. 꽃들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에 담아두고 그리는 시간이 더 길다. 언제나 만남과 시작은 힘들고 더디지만 떠남과 헤어짐은 잠시다. 벚꽃보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사람들 곁을 떠나는 꽃이 있을까. 인생과 사랑이 모두 덧없는 것이듯이 모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우리에게 영원이란 없다. 모든 것은 순간에서 시작해서 순간으로 끝날 뿐이다. 정원에서 이꽃 저꽃 들여다보면서 속절없는 생각을 해본다.
풀들은 꽃을 시샘이라도 하듯 더 잘 자란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은 잡초를 뽑기 좋은 날이다. 아직 흙과 친숙하지 않아서 지렁이만 나와도 놀라서 호미를 내 던지기도 한다. 풀 속에서 숨은 그림 찾듯이 꽃의 새싹을 찾아내기도 한다. 잡초와 뒤엉켜 버릴까봐 작은 돌담을 쌓아 보호해준다. 풀은 뽑히는 것이 아니라 땅속으로 다시 숨어 버리는 것 같다. 며칠만 지나면 어느새 각종 풀이 고개를 내민다. 땅속 어딘가로 퍼져가면서 자신들의 생명력을 과시한다. 풀의 강인함과 끈질김을 닮고 싶어진다.
100여 종이나 되는 화초들이 심어진 정원이지만 그리 화려하지도 않다. 어딘가에 가려져 작은 꽃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잡초 사이로 미니범부채가 싹을 틔웠다. 늦봄부터 가을까지 꽃대를 올린다. 개화 시기도 길며 시든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는 깔끔한 꽃이다. 작은 꽃이라고 해서 화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작은 꽃에 겸손함을 배운다.
모란과 작약꽃이 피기 시작하면 벌들이 날아든다. 이 시기에 초롱꽃도 피기 시작한다. 벌은 엄마 젖가슴을 찾아 들 듯이 초롱꽃 속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이때부터 꽃과의 속삭임은 시작된다. 씨앗 하나가 떨어져 겨울을 잘 견뎌내고 싹을 틔운다. 세상 구경을 나온 새싹은 모진 비바람을 견뎌야 꽃을 피운다. 새싹들은 내 삶의 모습을 다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서로 바라보며 “우리 잘 견뎌내자.”라고 대화를 나눈다. 서로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예쁜 미소로 화답해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수단이 있듯이, 작은 꽃밭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쉼터이자 마음을 치유해주는 곳이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독일의 국화인 수레국화와 화려함을 뽐내는 꽃양귀비도 피기 시작한다. 예로부터 양귀비는 절세미인을 비유할 만큼이나 화려하다. 이때쯤이면 여름 장마가 시작된다. 높은 습도로 풀은 죽었던 그 자리에 다시 푸르게 자란다. 풀의 모습을 보면 사람과 자연에 숨어있는 삶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 같다. 꽃은 넘어지고 엉키고 짓무르며 해충으로 관리가 힘들어진다. 꽃의 생애가 봄의 새싹으로 피어나 장마와 뜨거운 햇살 아래의 삶을 견뎌내며 가을을 맞이한다.
백묘국은 꽃보다 잎이 더 매력적으로 하얀 눈꽃처럼 생겼다. 정원을 화려하게 꾸미는 추명국의 꽃잎은 비대칭에 색깔까지도 이중 색이다. 꽃잎의 오묘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깊은 가을로 빠져든다. 식물의 모습과 그들이 품고 있는 삶의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만약 숲과 꽃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떠할까. 또 새와 나비가 없다면 숲과 나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 만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듯이 이세상의 모든 존재의 삶도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허브의 종류인 빨간색 꽃의 파인애플세이지는 화려하지 않지만, 잎은 달콤하고 싱그러운 사과의 맛을 낸다. 사람들도 겉모양과 다르게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세이지는 ‘치료하다’라는 뜻을 가져서인지 키우면 집안이 무병하다는 속설도 있다. 작지만 앞마당과 보이지 않는 뒷마당까지도 식물에 관해 마음을 나누고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꾸며 가고 싶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초가을 태풍이 지나간 뒤, 열정도 적당히 기운이 꺾였다. 저절로 마음을 비우게 된다. 언제 어려움을 겪었냐는 듯이 가을바람을 타고 온 금목서의 꽃향기는 황홀감에 빠져들게 한다. 고급향수의 원료로도 쓰일 만큼 향기롭다. 하루 사이 꽃잎은 바닥을 붉은 양탄자로 만들었다. 조심스레 쓸어 담아 깨끗이 씻어 보았지만 향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금목서 꽃잎으로 방향제 주머니를 만들어 선물할 생각이었던 꿈을 가을 비바람이 가로막았다. 사계절 피는 원평소국과 바람꽃은 일 년 내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이제 곧 겨울이 오면 동백꽃과 크리스마즈로즈도 피게 된다.
식물들도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겨울잠을 자는 꽃도 있다. 추위에 약한 꽃들은 겨울채비를 해주어야 봄을 잘 맞이하게 될 것이다. 꽃을 키우면서 지혜롭게 사는 법과 인생을 배우게 된다.
정원에서 보내는 휴식은 보석 같은 시간이다. 정원에서 생기를 얻으면서 느끼게 되는 시간은 내 삶에서 또 다른 소중한 취미인 그림과 글쓰기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오늘도 정원의 여러 꽃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들의 삶과 자연을 위하여 기도해본다. 꽃잎이 머금은 이슬 한 방울이 떨어져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과 슬픔을 위해 서로에게 위로를 던진다. 소박한 정원에 한줄기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와 내 삶의 쉼터를 아름답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