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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결(鑑訣)
감(鑑)은 사마휘(司馬徽), 제갈량(諸葛亮)보다 낫다.
한륭공(漢隆公)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 있는데, 맏아들 임(淋)은 일찍 죽었다. 둘째 아들은 심(沁)이요, 셋째 아들은 연(淵)이다. 심과 연이 정공(鄭公)과 함께 팔도 산수의 기이하고 절승(絶勝)한 곳을 유람하다가 금강산(金剛山)에 이르렀다. 세 사람은 대나무 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비비대(飛蜚臺)에 올라 서로 돌아보며 말했다.
「천지(天地)는 음양(陰陽)이 먼저 주장이 되도다.」
심이 말했다.
「산수(山水)의 법이 기이하고 절승하도다.」
정이 말했다.
「곤륜산(崑崙山)의 내맥(來脈)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千年)의 운수가 지나 그것이 송악(松岳)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오백 년 도읍할 땅이나, 요승(妖僧)과 궁녀가 난을 꾸며 지기(地氣)가 쇠하고 천운(天運)이 막혀 운은 다시 한양(漢陽)으로 옮길 것이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난리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충신이 죽었으니 천지가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이 남쪽으로 건넜으니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 모름지기 흰 소를 쫓아 종성(從城)으로 달아날지어다.」 심이 말했다.
「금강산으로 옮겨진 내맥(來脈)의 운이 태백산(太白山)․소백산(小白山)에 이르러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鷄龍山)으로 들어가니, 정씨(鄭氏)의 팔 백년 도읍할 땅이로다. 그후 원맥(元脈)이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니, 조씨(趙氏)의 천년 도읍할 땅이로다. 전주(全州)는 범씨(范氏)의 육 백년 도읍할 땅이요, 송악(松岳)으로 말하면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인데, 나머지는 상세하지 않아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삼각산(三角山) 백운대(白雲臺)에 앉아 정이 말했다.
「모년(某年)이 지나 모년이 되면 지각이 있는 이는 살고, 지각이 없는 이는 죽으리라.」
심이 말했다.
「언제 그렇게 되겠는가?」
정이 말했다.
「네 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오로지 자기 뜻대로 하고 임금이 어려서 나라 일이 잘못되니 홀몸으로 의지할 데가 없고,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요, 사람마다 진사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안 후에 어진 사람이 나타나 폄론(貶論)하리라. 선비(士)가 관을 비뚜로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기(己)를 빗기고, 성인의 휘자(諱字)에 팔(八)을 덧붙이면, 계룡산 돌이 희게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가 희어지고, 초포(草浦)에 조수가 들어와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움직이지 않고, 혜성이 진성(軫星) 머리에서 나타나 은하 사이로 들어가 자미(紫微)를 범하고 두미(斗尾)로 옮았다가 두성(斗星)에 이르러 남두(南斗)에서 멈추면 대중화(大中華)․ 소중화(小中華)가 한꺼번에 망하리라.」 심이 말했다.
「삼각산(三角山)은 규봉(窺峰), 백악(白岳)은 주산(主山)으로 삼고, 한강은 요대(腰帶)를 삼고, 계락산(稽絡山)은 청룡(靑龍), 안현산(鞍峴山)은 백호(白虎), 관악산(冠岳山)은 안산(案山), 목멱산(木覓山)은 남산(南山)이 되었다.」 정이 말했다.
「사방 도둑이 들어와 노략질하나 반드시 다시 중흥하고, 관악산을 안산으로 삼으니 왕궁에 세차래 불이 나 단우(丹宇)에 불꽃이 일어나고, 위는 근심하고 아래는 어지러우니 아전이 태수를 죽이고, 삼강과 오상(吳常)은 영영 사라지리라.」 심이 말했다.
「세 사람이 마주 대하였으니 못할 말이 어디 있겠나. 신년(申年) 봄 삼월, 성세(聖歲) 가을 팔월에 인천(仁川)과 부평(富平) 사이에 밤중에 배 1천 척이 정박하고, 안성(安城)과 죽산(竹山)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여주(驪州)와 광주(廣州) 사이에 인적이 영영 끊어지고, 수성(隨城)과 당성(唐城) 사이에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한강 남쪽 백리에 닭․개의 소리가 없고, 인적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 정이 말했다.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은가?」
심이 말했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첫째는 풍기(豊基) 예천(醴泉), 둘째는 안동(安東) 화곡(華谷), 셋째는 개령(開寧) 용궁(龍宮), 넷째는 가야(伽倻), 다섯째는 단춘(丹春), 여섯째는 공주(公州) 정산(定山) 마곡(麻谷), 일곱째는 진천(鎭川) 목천(木川), 여덟째는 봉화(奉化), 아홉째는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으로 이는 길이 살 수 있는 땅이어서 어진 정승,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날 것이다. 그리고 열째는 태백(太白)이다.」 심이 말했다.
「곡식 종자는 삼풍(三風․豊)에서 구하고 인종(人種)은 양백(兩白)에서 구할 것이다. 이 열 곳은 병화(兵火)는 물론 흉년이 들지 않고, 흰 옷 입은 도둑을 만나면 결혼하고, 형제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지내리라. '영가(永嘉) 사이에 화기가 성하다' 했는데, 영가가 바로 이 산이다. 금강산 서쪽, 오대산 북쪽은 12년간 도둑의 소굴이 되고, 9년간의 수해와 12년간의 병화가 있을 것이니 어느 누가 그것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간 사람은 시국을 잘 관망하여 살리라.」 정이 말했다.
「날이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가 길었다.」
그리하여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청아한 풍경 소리가 흰구름 사이에서 들려오고, 날아 떨어지는 폭포 소리는 귀를 씻고, 구름 골짜기는 천태만상이었다.
다음날, 세 사람은 다시 금강산으로부터 가야산에 이르렀다.
정이 말했다.
「후세에 만약 지각 있는 사람이 먼저 십승지에 들어가면, 가난한 자는 살고 부자는 죽으리라.」 연이 말했다.
「어찌하여 그런가?」
정이 말했다.
「부자는 많은 돈과 재물이 있으므로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가난한 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으니 빈천하게야 어디 간들 못 살겠는가.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국을 보아 행하리라.」 심이 말했다.
「두 서쪽 땅, 곧 황해도와 평안도는 3년간 천리안에 인연(人烟)이 없을 것이요, 또한 동협(東峽)은 심히 꺼릴 땅이니라.」 정이 말했다.
「아무 산, 아무 물의 기세가 이러이러하니 천년 뒤의 일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심이 말했다.
「전주에서 도둑이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화(華) 사이로 배 만 척이 강을 가로지르리니, 이것이 하나의 큰 근심이다.」 정이 말했다.
「이것은 작은 근심이다. 만약 말세가 닥치면 아전이 태수를 죽이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상하의 구분이 없어지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변고가 연달아 일어나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은 어리고 나라는 위기를 맞으니, 대대로 녹(祿)을 먹은 신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정이 말했다.
「내 말세에 있을 재앙에 대해 더 상세히 말해 보겠다.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상들은 나무 껍질로 연명하고, 4년 동안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반으로 줄고, 사대부의 집은 인삼 때문에 망하고 벼슬아치의 집은 이익을 탐하는 것 때문에 망하리라.」 연이 말했다.
「후세의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용문산(龍門山)이 몸을 숨길 만한 곳으로 보이리라. 산수법(山水法)이 아닌 것으로 말하면 생기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용문산은 한양에 그 기를 뺏겼으므로 산 가운데 기세가 다 죽은 혈(穴)이다. 따라서 도둑들이 수소문해 알아 낼 것이니, 채 일년이 안되어 목숨이 재가 되리라.」 정이 말했다.
「산수의 형상이 이토록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심이 말했다.
「만일 후세의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에 들어가려 해도 필시 어리석은 자들이 만류할 것이니 공(公)과 사(私),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화복(禍福)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형용하기가 힘들다.」
정이 말했다.
「계룡산의 돌이 흰빛이 되고, 모래펄 30리에 남문(南門)을 다시 일으키고, 내 자손 말년에 쥐 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자가 생기고, 큰 흉년이 들고, 호환(虎患)으로 사람이 다치고, 생성과 소금이 지극히 흔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서 호마(胡馬)가 긴 울음을 내고, 양서(兩西) 사이의 하늘에 원맺힌 피가 넘치리니, 한양 남쪽 백리에 어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
연이 말했다.
「목멱산은 그 형상이 아이 낳는 여자의 음부(陰部)와 같으니, 사대부가 허물을 더하면 온 나라가 무력해질 것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정이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음란한 풍속은 막을 것이나 황씨(黃氏)는 후사가 없으리라.」
심이 말했다.
「계룡산에 나라를 세우면 변씨(卞氏) 성을 가진 정승, 배씨(裵氏) 성을 가진 장수가 개국 일등 공신이 되고, 방성(房姓), 우가(牛哥)가 손발같이 일하리라. 대백(大白)․ 소백(小白) 사이에 옛날 양반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니, 후세 사람으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자손을 대백․소백 사이에 길이 감추어 두리라.」
정이 말했다.
「대개 인간 세상에서 피신하려면 산도 좋지 않고 물도 좋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네 자손 말년에 국운이 팔임(八壬)에 다하고 박(朴)에 난리가 있고 내 자손에서 끝나리라.」
심이 말했다.
「내 자손이 네 자손을 죽이고 네 자손이 내 자손을 죽이리라.」
연이 말했다.
「십승지는 사람이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다. 그러나 새재〔鳥嶺〕앞뒤의 큰길은 어찌할까?」
정이 말했다.
「새재에 성을 쌓으면 대군이 바다에 떠서 배로 남쪽 전주(全州)에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이루면 화진(華津)과 양서(兩西)의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리라. 그런 까닭에 이 열 곳은 병화(兵火)가 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 가서 살겠는가. 장씨(張氏)가 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것이 경염(庚炎)의 때이니, 지각이 있는 자는 이때 십승지로 가라.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으리라.」
연이 말했다.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병화가 있어도 해를 입지 않지만, 6도(六道)의 백성은 죽으리라.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하므로 흉년이 들지 않는다. 대개 산수의 법은 기이하여, 훗날 지각이 있는 자가 비록 걸식을 하며 이곳에 들어가더라도 좋으리라. 신년(申年) 말과 임년(壬年) 3월을 무사히 지내면 비록 향야(鄕野)에 일이 있다 해도 요행히 편안하리라.」
연이 다시 말했다.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
정이 말했다.
「여기는 경기도보다는 조금 낫다. 그러나 강원도 산골은 그 허다한 일을 어찌 다 기록하리요.
첫째는 풍기(豊基)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으로, 소백산 두 물곬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花山) 소령(召嶺) 고기(古基)로 청양현(靑陽縣)에 있는데, 봉화(奉化)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報恩) 속리산 사증항(四甑項)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雲峰) 행촌(杏村)이다.
다섯째는 예처(醴泉) 금당실(金塘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公州) 계룡산으로, 유구(維鳩) 마곡(麻谷)의 두 물곬의 둘레가 2백 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寧越)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 만하다. 그러나 수염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여덟째는 무주(茂朱) 무봉산(舞鳳山) 북쪽 동방(銅傍) 상동(相洞)으로, 피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扶安) 호암(壺岩)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 만수봉(萬壽峰)으로, 그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동북쪽 정선현( 善縣) 상원산(上元山) 계룡봉(鷄龍峰)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참서(讖書)의 하나인 이 책은 여러 비기(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 ·도교(道敎)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룩되었으며, 조선의 선조인 이심(李沁)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鄭堪)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말도 전하나 그 종류가 많아 70종(種)에 이르며 정확한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감록》이라 하면 《감결(鑑訣)》을 비롯한 여러 비기(記)에다 《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등을 합친 비기의 집성을 말하기도 하고, 협의(狹義)로는 《감결》 하나만을 떼어서 말하기도 한다. 그 명칭도 많지만, 《정이감여론(鄭李堪輿論)》 《정이문답(鄭李問答)》 《정감록(鄭堪錄)》 《감결》 《징비록(徵懲錄)》 《감인록(鑑寅錄)》 ≪천이록(天以錄)≫《동세기(東世記)》《요람역세(要覽歷世)》《동차결(東車訣)》
《경고(鏡古)》《기말록(其末錄)》《참서유취(讖書類聚)》등의 이본(異本)이 있다.
현재 이 제목이 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규장각본 《鄭鑑錄》:필사본. 아유까이 후사노신(점貝房之進) 1책.
② 김약술(金若述) 소장본 《鄭鑑錄》:필사본. 1책.
③ 김용주(金用柱) 발행 《鄭鑑錄》:활자본. 국판. 163쪽. 한성도서(주) 대정12년(1923)년 3월 19일 발행,
④ 현병주(玄丙周) 편《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활자본. 4×6판. 100쪽, 우문관(友文館), 대정 12년(서기 1923년) 4월 18일 초판, 영창서관(永昌書舍官)에서 그해 6월 10일 재판, 운정도인(雲汀道人) 저(著)로 근화사(謹花社), 세창서관(世昌書館) 등에서 발행.
⑤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편저 《鄭鑑錄》:동경,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4×6판 국립중앙도서관 청구 기호:한-02-5.
6. 야나기타 분지로[柳田文治郞] 편집 겸 발행, <鄭堪錄>,활자본, 4x6판,3 5장(70쪽), 이문당(以文堂), 대정 12년(1923)년 3월 19일 초판, 그해 3월 30일 재판발행.
7. 鄭鑑錄(제목 없음)/영조(英祖)?/45쪽/필사본.
1. 鄭鑑錄/刊年未詳/編者未詳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1番/(복사본).
2. 道宣秘訣/記年未詳/玉龍子/2장:4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3番/(복사본).
3. 無學秘訣/記年未詳/朴自超/4장:7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2番/(복사본).
4. 北窓秘訣/記年未詳/鄭磏/2장:3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4番/(복사본).
5. 南師古秘訣/記年未詳/南師古/4장:7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5番/(복사본).
6. 西山大師秘訣/記年未詳/淸虛(休靜)/1장:1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6番/(복사본).
7. 土亭家藏訣/記年未詳/李之菡/25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9番/(복사본).
8. 杜師聰秘訣/記年未詳/杜師聰/4장:8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7番/(복사본).
9. 西溪家藏訣/記年未詳/李得胤/ 14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8番/(복사본).
10. 鄭勘秘錄/編者未詳/記年未詳/22장:44쪽/
서울大學校 想白古133J459番/(복사본).
11. 秘訣輯錄/編者未詳/記年未詳/46張:91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7568番/(복사본).
12. 徵秘寶藏(징비록(徵秘錄)/30쪽/哲宗九年 戊午(단기4191〈서기1858〉)음 2월 9일/ 編者未詳/印本/국립중도서관 한-19-110/(복사본).
13. 鏡古/編者未詳/116쪽/記年未詳/筆寫本/國立中央圖書館 古
19-20番/(복사본).
14. 其末錄/編者未詳/71쪽/記年未詳/ 印本/國立中央圖書館 古
19-42番(복사본.
15. 鑑寅錄/記年未詳/編者未詳/63張:125쪽/釜山大學校圖書館/(복사본)
16. 秘覽(聽流堂陰晴錄)/필사본/22쪽.
17. 秘藏/필사본/14장.
18.鄭邯錄(盤溪訣在中附論心及楊柳問答)/ 필사본/33쪽/庚寅 臘月(陰12월) 初八日.
19.鄭賦‧沁與勘長歎賦/필사본/3쪽.
20. 東國要覽/37쪽/필사본/신해(辛亥) 9월
21. 鄭鑑錄/63쪽/이소암(李小岩)?/ 필사본.
22.鄭公李沁問答/필사본/13面.
23.雜書訣/筆寫本/23張.
24.年事錄/필사본/12쪽.
25.朝鮮秘訣全集/奎文閣 /1966년 10월 20일 발행/ 97쪽/프린트本.
8. 批難 鄭鑑錄 眞本/槿花社/100面/1923년 4월.
9. 批難鄭鑑錄眞本/雲汀道人 著/100面/世昌書館版/刊年未詳.
10. 批難鄭鑑錄眞本/玄丙周 編/100面/永昌書館/단기4254(서기1921)년 6월10일 발행.
11. <鄭鑑錄>/77쪽/연활자본./刊年 및 발행처 및 발행년도 미상.
12. <鄭鑑錄解說>/16쪽/신세계사 간행/西紀1946년 2월 15일 발행.
13.< 鄭鑑錄에 對한 社會的 考察>/崔守正 著/55쪽/서울, 解放書林/(단기 4281) 서기 1948 年 4月 5日 發行
14. <鄭鑑錄; 원본해설>/編輯部編/66쪽/서울,昌新文化社/ 단기4288(1955)년 5월 27일 발행.
15. <韓國의 蕙眼>/權寧斗 著/100쪽/世光出版社/ 西紀 1962년 十月 五日 初版發行.
16. <元本 鄭鑑錄解說>오륜출판사/1969년 10월 30일 발행.
17.<鄭鑑錄>/ 金水山 編/217쪽/弘益出版社/西紀一九七零年 二月 二十五日.
18.<鄭鑑錄>/金水山 編著/217쪽/明文堂/1972年 4月 15日 初版 發行.
19. <鄭鑑錄集成>安春根 編/870面/亞細亞文化社 西紀一九七三年 三月 二十五日 發行.
20.<鄭鑑錄集成>/安春根 編/870면/亞細亞文化社, 西紀一九八一年 月 日 再版發行.
21 <鄭鑑錄>李民樹 譯註/206쪽/홍신문화사 /1985년 10월 30일 초판 발행.
22 <鄭鑑錄 원본해설>저자 정다운/376쪽//밀알/1986. 4. 28. 발행.
23 <鄭鑑錄>백운항 편/246쪽/일광사/1986.7.15. 발행.
24 <內訓‧鄭鑑錄>黃吉顯 譯解/225쪽~400쪽/大韓書籍/1989년 4월 20일 발행.
25 <鄭鑑錄>하명중 편저/241쪽/삼원출판사/1989. 5. 30.발행.
26, <鄭鑑錄秘訣>범우사 편집부/168쪽/초판1쇄 발행 /1997년 6월2 0일.
27 <韓민족의 秘書>다물민족연구소/298쪽/다물/1993년 8월 15일 재판.
28<현장風水>최어중 저/ 272쪽/동학사/초판발행,1992년 10월 1일.
29<십승지>지은이‧펴낸이: 이태희/301쪽/참나무/단기 4331년 음력 7월열사흘 초판발행.
30<鄭鑑錄>김탁 지음, (주)살림출판사, 313쪽,초판 발행:2005년 10월 31일.
<鄭鑑錄>金用柱 著/朝鮮圖書株式會社/大正 十二(1923)년 三月 十九日.
1) 徵秘錄/12쪽.
2)運奇龜策/13쪽.
4)要覽歷歲/22쪽.
5)東世記/11쪽.
6) 東車訣/22쪽.
7)鑑訣/38쪽.
8)鑑寅錄/52쪽.
《정감록》의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堪)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 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의상(義相) ․ 도선(道詵) ․·무학(無學) 박자초(朴自超) ․·낭선자(浪仙子) 어무적(魚無跡)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 두사총(杜師聰) ․ 정북창(鄭北窓) ․ 서산대사(西山大師)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등의 예언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정권에서 물러난 소론(少論) 및 남인(南人)들이 이용하였다. 아마 허균옥사(許均獄事)(서기 1618년)가 아니면 선조 6년(1573년) 정여립(鄭汝立) 사건(事件) 때 만들었을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 ·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朝廷)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 ·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黨爭)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 ·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희망을 불어넣으려 한 점에서 이 책은 높이 평가될 수는 있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란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 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이 《정감록》의 악폐였다. 신흥종교의 원전(原典)으로 되기도 하였다.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초래할 것이 두려워하였기에 조선 왕조의 집권자(執權者)들은 『정감록』의 소지(所持)나 유포(流布)를 범법(犯法) 행위로 간주하였고, 조선 태종(太宗) 17년(1417) 11월과 세조(世祖) 3월과 5월에 왕이 팔도(八道) 관찰사(觀察使)에게 명(命)하여 '『古朝鮮秘詞(고조선비사)』, 『大辯說(대변설)』, 『朝代記(조대기)』, 『通天錄(통천록)』, 『壺中錄(호중록)』,『道詵漢都讖記(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를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진상(進上)하도록 하라.'하였다. 성종(成宗)은 즉위(卽位)년(1469) 12월에 왕이 여러 도(道)의 관찰사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周南逸士記(주남일사기)』『志公記(지공기)』『表訓天詞(표훈천사)』『三聖密記(삼성밀기)』『道證記(도증기)』『地異聖母河沙良訓(지리성모하사량훈)』,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壺中錄(호중록)』『地華錄(지화록)』『明鏡數(명경수)』와 천문 ․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하유(下諭)했으니, 위에 언급한 『명경수』는 아마 술수(術數)에 관한 책이고, 『太一金鏡式(태일금경식)』은 太乙神數(태을신수)』에 관한 책(冊)이다. 『道詵讖記(도선참기)』라는 비결서가 성종대에도 실존(實存)했던 것을 확인됩니다. 그러한 금압(禁壓) 조치에도 불구하고 『鄭鑑錄(정감록)』은, 그가 지닌 도참서(圖讖書)로서의 매력으로 인하여 널리 퍼져 나갔다.
1618년 교산(蛟山) 허균(許均)의 옥사(獄事), 1628년 류효립(柳孝立, 1579~1628) 사건, 『仁祖實錄(인조실록)』 1628년(인조 6년) 2월 7일(음력 1월 3일, 乙丑을축)에 "초포(草浦)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계룡[산]에 도읍한다(草浦潮入, 鷄龍建都)"라는 구절(句節)이 있다.
『시디롬 조선왕조실록』에는 『정감록』은 1739년(영조 15) 9월 11일(음력 8월 6일, 庚辰)에 함경도(咸鏡道)에서 출현하였다.
『備邊司謄錄(비변사등록)』에 영조(英祖) 15년(1739) 5월 15일 평안도 삼등현(삼등현)에서 국경(國境)을 넘은 죄인(罪人)에 대한 기록에서 『鄭鑑錄』과 『歷年(역년)』이 등장(登場)하여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조(正祖) 6년(1782) 음력 12월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보다 43년이 앞선 것이다.
17세기 말(末) 숙종 17년(1691) 때 발행된 『推案及鞫案(추안급국안)』의 기록 [104책 신미(辛未) 음력 11월, 갑술(甲戌, 1694년)2월 28일]에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 1733년(영조9년) 3월 초(初)에 남원시장(南原市場) 비롯하여 4월 보름경에는 백복사(百福寺)에 있는 돌부처에 붙였고 『南師古秘訣(남사고비결)』『要覽(요람)』, 1739년 이재형(李載亨)의 『鄭鑑錄(정감록)』사건(事件), 1748년 이지서(李之曙) 등(等)이 청주(淸州)와 문의(文義)에서 괘서(掛書) 사건(事件), 영조(英祖) 31년(1755년) 나주(羅州)괘서사건, 정조(正祖) 6년(1782년)의 문인방(文仁邦) 역모(逆謀) 사건(事件), 1783년 해주(海州) 안치복(安致復)․안필복(安必復)도 『鄭鑑錄(정감록)』사건(事件), 정조 9년(1785년) 문양해(文洋海) 역모(逆謀) 사건(事件), 이율(李瑮)과 양형(梁衡) 사건(事件) 등 사건이 관련이 있다.
조선 철종(哲宗) 9년(1858)년12월 9일에 쓰인 『徵秘寶藏(징비보장)』일명(一名) 『徵秘錄(징비록)』과 고종황제(高宗皇帝) 23년(1886년)음(陰) 4월에 등초(謄抄)한 『聽流堂陰晴錄(청류당음청록)』과 고종황제(高宗皇帝) 때(?) 쓰인 『鏡古(경고)』와 『其末錄(기말록)』과 병자(丙子)(1936년?) 겨울 동현정사(銅峴精舍)에서 춘봉(春峰)이 쓴 『讖書類聚(참서유취)』와 임진(壬辰)(?) 괴하(槐夏)(음력 4월)가 목고(牧皐)가 옹필(弄筆)한 『要覽(요람)』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대정(大正) 2년(1913) 2월부터 3월까지 1개월에 걸쳐 아유까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한성(漢城)(지금의 서울)에서 『海左龜策(해좌구책)』과 『東國地理略論(동국지리약론)』와 제가비결(諸家秘訣)을 모아『鄭鑑錄』102쪽을 복사(複寫)하였고, 호소이 하지메(細井肇)가 동경(東京)의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에서 『鄭鑑錄秘訣集錄』을 서기 1923년 2월 15일에 초판(初版), 2월 22일에 재판(再版), 3월 2일에 제3판, 대정 15(1926)년 10월 5일에 4판 발행하였다. 그 뒤 김용주(金用柱)가 경성(京城)(지금의 서울) 한성도서출판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서 3월 19일에 『鄭鑑錄』을 펴냈고, 금강어부(錦江漁父) 현병주(玄丙周)가 편(編)하여 『批難鄭鑑錄』을 경성(京城)에서 서기 1923년 4월 18일에 友文館(우문관)에서 초판, 永昌書舘(영창서관)에서 6월 10일 재판(再版) 발행하였고, 근화사(槿花社) 및 세창사관(世昌書舘)에서는 1945년 12월에 운정도인(雲汀道人) 저(著)로 발행되었다. 서기 1923년 3월 19일 초판 및 그해 3월 3일 재판(再版) 발행을 야나기타 분지로(柳田文治郞)가 『眞本 鄭堪錄』편집(編輯) 겸(兼) 발행(發行)을 이문당(以文堂)에서 하였다.
최초로 『鄭鑑錄』을 간행한 호소이 하지메는 앞서 『朝鮮文化史論(조선문화사론)』 과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朋黨․士禍의 檢討』을 목포신보(木浦新報) 주간(主幹)이었던 나가로 고지로(長野虎次郞)의 자료 지원을 받아 썻기 때문에 같이 지은 것[共著]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호소이 하지메 혼자 썼다고 한다.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에서 서기 1921년에 발행, 자유토구사에서 기획한 『通俗朝鮮文庫(통속조선문고)』의 주무(主務)를 맡아 보면서 『정쟁(政爭)과 당쟁(黨爭)』(1914)․『閥族罪惡史(벌족죄악사)』(1919)․『국태공의 비(國太公の妣)』(1932) 등 조선의 당쟁과 정쟁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대부분 참서(讖書)는 내용상 풍수설(風水說), 음양설(陰陽說), 방위설(方位說), 상서설(祥瑞說), 운수설(運數說)의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음양택학(陰陽宅學)의 양대(兩大) 조류(潮流)를 형성하는 명당(明堂)이 위치한 방향(方向)을 중시(重視)하는 좌향론(坐向論)과 산수(山水)의 형상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형국론(形局論)이다.
1. 들어가는 말
미래를 미리 알고자 하는 욕망은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그 예언의 방식 또한 무척 다양하고 개인적인 예언에서부터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까지 그 범위 또한 매우 다양하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현대사회에서도 운명과 미래를 점쳐보는 일은 매우 흔한 일로서 오히려 요즈음은 운세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전통적인 점술방식에서부터 사주카페, 인터넷과 전화를 이용한 점술마케팅도 성행하고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알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는데 불확실성이 높은 전환기일수록 이런 욕구가 커진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급격한 사회변동과 우리나라의 불안한 사회상황으로 인해 지금의운세 열풍이 촉발된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과거에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참서인 정감록이 나타난 시기 또한 이러한 근거로 추론되고 있다.
2. 정감록의 내용 소개
정감록(鄭鑑錄)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은밀하게 유포되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정감록이라 할 때에는 감결(鑑訣)하나만을 말하기도 하고 감결 이외의 동국역대음양결(東國歷代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등 십여 종의 비기들을 묶어서 말하기도 한다. 정감록의 저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도선 국사, 혹은 무학 대사 정도전이라는 설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정감록은 언제 누가 쓴 책인지 불분명할뿐더러 세월을 지나며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 내용이 변화되고 덧붙여지기도 해 어떤 것이 원래의 정감록의 모습인지 조차 불분명하다. 다만 그 저작연대를 17세기경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씨의 국운이 쇠했다던가. 한양의 정기가 다했다는 등의 논리가 등장하는데 이런 반왕조적인 내용이 민간에서 강한 신뢰를 받으며 유포되려면 임란과 병란이후의 혼란한 사회에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이다.
정감록의 첫 장 감결은 감 자신이 사마의나 제갈량보다 낫다는 첫 구절이 나오고 그 다음은 주로 우리나라의 풍수를 논하면서 왕조의 흥망성쇠를 예견한다. 정감록은 지리쇠운설(地理衰運說)에 입각하여 역대왕조의 쇠망과 역성혁명을 풀이하면서 '이망정흥(李亡鄭興)'이 비결(秘訣)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곤륜산의 맥이 백두산에 이르러 그 원기를 받은 평양은 1천년 도읍할 땅이나 그 운수가 다하여 송악(개성)으로 옮겨졌다. 개성은 5백년 도읍할 땅이나 요승과 궁녀가 난을 꾸며 땅기운이 쇠하였고 한양으로 옮겨간 기운은 오백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 맥은 금강산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계룡산으로 들어가며 이곳은 정씨가 800년 도읍할 땅이라 하였다. 정감록의 내용은 국가 저주를 담은 다른 예언서들처럼 은어, 시구, 파자 등을 이용하여 적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렵다. 따라서 해석하기 나름인 부분이 존재하게 되어 많은 자의적 해석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정감록에서는 난세에 몸을 피할 만한 땅을 ‘십승지’라 하여 소개하는데 풍기, 화산, 보은, 운봉, 예천, 공주 계룡산, 영월, 무주, 부안 등이 거론되며 그 자세한 지리적 위치도 설명하고 있다.
3. 정감록이 영향 받은 사조와 다른 예언서의 소개
정감록은 참위학, 음양오행설, 풍수, 사주 등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았다. 참위학은 중국 진나라 때에 비롯되어 후한(後漢) 때에 성행하였던 예언설로서 천변지이(天變地異)를 중요한 조짐으로 삼고, 음양오행설로 해석하여 불안한 사회 현상에 대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였다. 민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신뢰를 형성하고 있는 음양오행설은 사물을 음과 양으로 나누어 그 상호작용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 하였으며 땅의 기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길흉을 예견한 풍수, 인간의 생년, 월, 일, 시를 네 개의 기둥으로 하여 인간의 미래를 예견한 사주에 대해서는 굳이 긴 설명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감록이외에도 민간에 강력한 영향력을 형성했던 다른 예언서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우선 조선 중종 때 토정 이지함이 썼다고 전해지는 ‘토정비결’이 있다. 이는 주역의 팔괘를 응용하여 만든 예언서로 그 정확도가 지나쳐 사회폐단을 가져오자 토정이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리게 고쳐버렸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지함은 토정비결 이외에 정감록의 한 비기의 일종으로 포함시키기도 하는 ‘토정가장결’도 남겼는데 원숭이, 쥐, 용의 해에 병란이 있고 범, 뱀, 돼지 해에 형살이 있을 것이라 예언 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 명종 때 천문에 능통했다는 격암 남사고가 지은 ‘격암유록’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예언들도 담고 있다 하는데 우리나라의 국운을 예견하고 전쟁과 권력의 변화 또한 적어두었다 하나 역시 파자 등의 방법으로 적어둔 것이 많아 해석하기 나름인 부분 또한 많다.
4. 정감록의 시대 배경
정감록과 연관되는 사회적인 사건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붕당 정치 및 세도 정치, 둘째로는 왜란과 호란을 들 수 있다. 흔히 제14대 선조 원년(1568)으로부터 제20대 경종 말년(1724) 까지 의 약 157년간을 근세의 중기로 잡는다. 이 시기엔 이전으로부터의 오랜 태평 속에 발효된 지배계급의 정권 다툼이 드디어 당파의 대분열을 일으켜 자당(自黨)을 애호하고 반대당을 공격하는 바가 더욱 노골화되고 첨예화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이대외란(二大外難)인 임진․병자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회는 극도로 피폐해저 갔다. 이와 같이 외구의 침입, 당쟁의 격심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회세태는 한마디로 혼란과 모순과 민심의 동요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정감록은 이러한 조선중기의 어지러운 시대상황과 맞물려 직접, 간접적으로 민심을 자극하고 지배함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 붕당정치 및 세도정치
붕당 정치란 조선 중기 이후의 정치형태로 학연과 지연을 매개로 의식과 정치이념이 같은 사람들끼리 붕당을 이루고, 언론활동을 통하여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체제를 뜻한다. 붕당 정치는 원래 조선 중기에 성립되어 서로 대립하고 공존하면서 정치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당파의 이익을 앞세워 당쟁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 등 사색(四色)으로 나뉘어 벌어진 붕당의 분열은 세자책봉 문제처럼 사회성이 결여된 관념적인 정치론을 주제로 하여 결국 국력이 약화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일당 전제화의 경향이 나타났다. 영조와 정조는 특정 붕당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기 위하여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탕평 정치는 특정 권력 집단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붕당 정치의 폐단을 일소하지는 못하였다. 탕평 정치로 강화된 왕권을 순조 이후 왕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외척을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세도 정치로 인해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그 결과 지방 수령들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심화되었고, 매관 매직이 성행 하였다. 삼정의 문란으로 농촌 경제는 피폐해졌고 결국 대대적인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때, 적이 경성을 차지한 지 이미 2년이라 적병의 칼날이 미치는 곳에 천리 사이가 소연(簫然)하고, 백성들은 밭 갈고 씨 부리지 못하여 거의 굶어 죽었다. 서울 성안의 남은 백성들은 갖은 고생을 하며 붙들고 이끌고 메고 지고 와서 우리 군중으로 들어오는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 남방의 양곡 배가 강 언덕에 와서 정박하고, 전라도 소모관(召募官) 안민학이 역시 곡식 10만을 모집하여 얻어서 배로 운반하니 곧 전 군수 남궁제 를 감진관(監䀼官)으로 임명하여,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 솔잎가루 열 홉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도록 했는데,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살아난 사람이 얼마 안 되었다. .... 하루는 밤에 큰비가 왔다. 주린 백성들이 좌우 쪽에 있으면서 슬피 부르는 소리가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기 저기 쓰러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서 처와 자식에게 요즘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여도 나랏일에 대한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고을에서 보내 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만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정묘하고 또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고 말한다. 이름 있는 관리들이 말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다. <목민심서>』
(2) 왜란과 호란
1592년(선조 25) 4월 조총으로 무장한 약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준비와 조총을 앞세운 왜군에 크게 밀렸으나, 우리 민족의 다각적인 항쟁으로 인하여 왜군은 휴전을 제의 하였다. 하지만 1597년(선조 30)에 침략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의병도 훈련도감을 설치하는 등 새로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명의 원군과 합세하여 왜군을 남쪽으로 내몰았다. 바다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인해 왜의 수군을 격멸하고 재해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왜군들은 철수하였고 7년간의 걸친 왜란도 끝을 맺게 되었다.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우리나라가 입은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임진왜란 전에는 농지 면적이 170만 결에 달했으나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54만결로 줄어, 그만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하였다. 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어 인구가 줄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경복궁과 불국사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이런 상태에서 인심이 흉흉하여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도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 중에 군량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공명첩은 조선 왕조의 신분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한몫을 하였다.
왜란 이후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으나,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들의 반정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인조반정 1623년) 그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 정책을 뚜렷이 하여 후금을 배척하였다. 그 결과 인조즉위의 부당성을 구실로 후금은 군대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오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본래 후금은 우리나라 보다는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쉽게 화친이 맺어졌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하지만 금은 세력이 커져 중국의 북부지방을 점거한 후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우리나라에 군신의 관계를 요구 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무력으로 오랑캐를 정벌하자는 주전론이 대두 되어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청의 태종은 군대를 이끌고 와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 청과 군신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서북지방이 황폐화 되었고, 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상(上)께서 서울에 환도하시니 백성이 이진(已盡)하여 그림자도 없고 오직 먼 데서 개 짓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통화문(通化門)으로 해서 창경궁 태화당(泰和堂)에 듭시었다. 여염(閭閻)이 탕잔(蕩殘)하여 사시(死屍)가 상연(相連)하고 교동구(校同口) 좌우필방(左右筆房) 행랑과 대소(大小) 광통교(廣通橋)근처 인가는 모두 소신(燒燼)하여 닭, 돼지 등속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다만 인육(人肉)을 포식한 개들이 광주(狂走)할 뿐이었다. 나만갑(羅萬甲)의 <丙子錄>』
5. 정감록의 영향
정감록을 비롯해서 예언비결류는 정사의 자료가 되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비결서가 민간에서는 계속 유전되어 일종의 민속신앙을 형성하여 난세적인 상황에 이르러서는 반왕조적인 비판의 수단으로, 또는 피난(도피) 의식의 상징으로서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정감록을 살펴보아야 할 의의는 충분할 것이다. 정감록의 참설이 황당무계한 예언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임진․병자란 이후 혼란한 사회세태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1) 민중사상, 신앙으로서의 역할
19세기 지배계급만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에 반하여 나타났던 것이 정감록을 위시한 많은 민중 사상들이었다. 커다란 사회, 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사회 변혁세력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정감록에는 국가의 길흉화복, 성패를 점치는 참위설적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혹심한 전재(戰災)를 입은 난 후의 사회세태는 왕조의 흥망, 전재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위기의식으로서 민심을 지배하게 되었다. 정감록은 전쟁 등으로 인한 사회혼란의 극심한 정세가 반영되어 반왕조적, 현실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관민의 의사소통이 통제된 봉건사회에서 억압된 민심을 보상하는 작용을 하여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간에 전파될 수 있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정감록을 금서로 취급하였으며 민간에서는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사회심리가 반영되어 필사 등의 방식으로 은밀하게 전승되어갔다. 이 책은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사회변동의 와중에서 왕조교체의 사회변혁사상과 우주론에 입각한 운세의 법칙이 서로 결합되는 성향이 강해졌다. 또한 동학을 비롯한 신흥 종교의 성립에도 그 기반을 제공하여 조선 후기 사상계와 민중의식의 변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2) 반봉건적 운동의 이념적 구심점.
사회변혁을 바라는 민심은 역성혁명이 이루어져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는 정감록의 사상과 잘 맞아떨어져 당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민중에게 강한 설득력을 지니는 이러한 사상들은 그 사회를 변혁하려는 세력들에게 끊임없이 이용되었고 실제로 많은 농민 운동의 이념적 지도를 했던 것이 정감록이었다. 홍경래의 난에서도 출진에 앞서 정감록을 토대로 한 격문을 발표하였는데 부패한 세도정관에 대한 반발과 부정에 직결되는 부분에서 특히 크게 정감록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정감록 등 당시 기층민중의 여러 사상들은 동학으로 연결되고, 또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들의 정서와 크게 일치된 변혁론으로서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고통 없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이를 실현시켜줄 초월자인 구세주의 출현을 고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지배층의 수많은 모순과 무력함을 뛰어넘을 이념과 믿음을 기층 민중들에게 심어주어 변혁세력을 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6. 정감록의 이해와 한계
정감록이 담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자면 병란설, 피란설과 말세관의 세 가지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전란에 대한 공포의식을 담고 있는 병란설은 과거에는 임진왜란(진년), 병자호란(자년)이 일어났으며 미래에는 갑자가 든 해(1864)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라 예언했다. 피란설은 대내외 위기의식과 관련하여 전란이 있을 때마다 만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곧 이어 닥쳐올 병란을 예고하면서 이에 대비하여 보신을 위한 피난처로서 풍기, 예천 등을 비롯한 십승지가 있음을 적었다. 또 감결에 나온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유행하였던 남조선신앙, 즉 초현실적 관념의 세계로 전향하여 희망을 미래에 두는 이상사회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다. 말세론은 이 시기 정치기강의 문란, 봉건적 수탈의 심화 그리고 이로 인한 민생의 도탄 등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정감록이 유행했던 시기의 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시대였기 때문에 민중들은 그 시기를 말세로 인식하고 이씨 정권을 대신해서 새로운 유토피아적 세계인 정씨가 지배하는 나라를 열망한 마음이 정감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종래의 ‘정감록’을 보아 온 시각은 전근대의 조정이나 관변에서 행해 오던 "도참은 미신이요, 혹세무민하기 때문에 단속해야 한다."는 시각에 기반(基盤)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참이나 풍수지리설, 혹은 ‘정감록’의 유포현상을 미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보아 이러한 사조가 유행했던 이유와 배경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는 도참은 "억눌린 민중의 한, 즉 원과 망이 표출된 소리"라는 정의가 가능해진다. 이는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과 변화를 희구하는 염원의 소리이다. 조선 시대에 있어서 이상세계는 중국의 전설적인 이상사회인 하은주(夏殷周)시대를 재현하는데 있었고, 그것은 결국 왕도정치의 구현에 의한 대동세계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왕도정치의 기본인 민본정치가 행해지지 못하고, 오히려 대다수의 민중을 수탈 억압하는 패도정치가 자행되는 경우가 허다하여 핍박받는 민중은 새로운 왕조라는 변혁을 바랐으며 이러한 바램이 정감록에 투영되어있는 것이다.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참언은 민심을 동요시킬 힘을 가짐으로써 조정정국을 긴장시켜왔다. 그러나 단순한 역성혁명의 사상 만으로서가 아니라 정감록은 험난한 사회를 피해 나가는 삶의 지혜로서 민중에게 작용했다.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사회 역기능적인 면을 가지면서도 민중의식의 표상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소지를 가지는 것은 변화되는 시국에 대해 깨어 있는 민중의 소망과 마음이 정감록에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감록은 또한 부정적인 영향도 많이 끼쳤는데 풍수와 도참을 결부시킨 정감록의 일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책의 예언에 따라 이런 십승지의 피난처를 찾아 나서 가산을 탕진하기도 하는 등 자신과 자손의 안녕만을 도모하려는 도피적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봉건 모순에 대한 변혁투쟁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통해 해결한다기보다는 정감록에 의거하여 봉건적 역성혁명사상으로서 이루고자 한 점은 사회모순을 전 구조적으로 탈피할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하였던 그 당시 정치의식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정감록은 최근에도 대선, 대선이후 행정수도 이전문제와 맞물려 새로이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정감록은 아직도 민중의식의 기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민중의 의식을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보다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인 해석으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어내는데 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보인다. 정감록이 우리에게 남긴 가치가 신비론적 측면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며 정감록에 대한 발전적인 재해석이 요구된다 하겠다.
첫댓글 과연 이 비서들이 지금 한반도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언서들이 쓰여진 시대에 우리 조선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현재 그마저도 오리무중인 상태입니다. 너무 믿지 마세요.
격암유록에서 말하는 십승지는 지리십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학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해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격암록 내용 중에 지리십승을 찾는단 말인가 세상사가 한심하다 고 한 글이나 구궁가일 십승 이라는 대목이나 모두 땅에서 십승을 찾으라는 의미는 결코 아닌 것 입니다....
격암유록 또한 중생을 위해서 준비된 책 분명히 해석할분이 나올것입니다 ^*^그리고 저또한 지리는 아닐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