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8/228일차>
2012년 5월 26일(토) 바릴로체, 흐림/비, 다양한 여행자들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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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릴로체 인근의 호수와 숲, 산이 조화를 이룬 곳에 들어선 마을들.
각 마을들은 유럽 이민자들의 후예들이 주거하는 곳으로,
각각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며, 이를 콜로니(Colony)라고 합니다.
콜로니에는 '식민지'라는 뜻 이외에 '이민자들의 집단 주거지'라는 의미가 있죠.
한국에서 '콜로니=식민지'로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과 상당히 다르게 쓰입니다.
하루 종일 바릴로체 일대를 돌아다닌 만족스런 여행이었다. 오전 9시30분 숙소를 출발해 먼저 내일 칠레 오소르노(Osorno)로 가는 버스 티켓을 예매했다. 노르테 인터나치오날(Norte Internacional) 버스로, 내일 오전 8시 바릴로체를 출발해 안데스 산맥을 넘어 오후 1시 오소르노에 도착하는 버스다. 거리는 248km, 버스비는 100페소(2만5000원)였다, 내일 오후 오소르노에 도착해서는 저녁 때까지 오소르노를 돌아본 다음, 야간버스를 타고 안데스 동쪽 태평양 연안길을 따라 산티아고로 올라갈 예정이다. 산티아고에는 다음날 아침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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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릴로체가 접한 네후엘 후아피 호수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버스를 예약한 다음, 10시30분 버스 터미널에서 체로 캄파나리오(Cerro Campanario)로 향하는 20번 버스에 올랐다. 체로는 보통 '산' 또는 '언덕' '구릉'을 말한다. 캄파나리오는 네후엘 후아피(Nehuel Huapi) 호숫가의 언덕으로, 호수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 호숫가의 마을들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아르헨티나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후아피 호수를 비롯해 이곳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에는 볼만한 곳이 많고 스키장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이 체로 콤파나리오다. 캄콤파나리오는 바릴로체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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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 캄파나리오 입구. 바릴로체에서 17km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바릴로체의 도로는 네후엘 후아피 호수를 끼고 이어져 있는데, 정류장은 버스터미널을 기점으로 거리(km)로 표시가 돼 있어 아주 편리했다. 말하자면 버스 정류장이 숫자로 이뤄져 있는데, 이 숫자가 버스터미널까지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캄파나리오는 17km 지점에 있어 버스를 타고 가면서 정류장에 표시된 숫자만 확인하면 되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았다.
캄파나리오에는 보통 스키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었다. 케이블카로는 2분이면 올라가지만, 걸어서 가면 30분 정도 걸린다. 걸어갈 수도 있지만, 케이블카를 타 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일 것으로 생각돼 케이블카를 탔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호수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가장 큰 호수인 나후엘 후아피 호수를 비롯해 크고 작은 호수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며, 그 호수 주변으로는 숲이, 그 숲속에는 마을들이 아름답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유럽 산간지방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의 호수마을, 우리 가족이 돌아본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와 할슈타트를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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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파나리오를 오르는 케이블카.
호수를 비롯한 자연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죠.
사실이 그랬다. 이곳은 바로 스위스와 스웨덴, 독일 등 유럽 이주민들이 집단 거주지(콜로니)를 만들고, 각각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대부분 1800년대 말~1900년대 초부터 활발히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나치주의자들이 대거 피신해온 곳으로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의 도피처로 인기가 높았던 지역이며, 특히 독재자 히틀러가 이곳에 피신해 수년간 살았다는 주장이 대두돼 주목을 끌기도 했다. 한 작가가 관련 저술까지 내놓아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유럽 이민자들이 선호하며, 각자의 문화를 유지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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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잔뜩 끼어 아쉽기는 하지만,
무척 아름다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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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깃들 듯이 들어선 마을들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캄파나리오에서 바라본 바릴로체 인근 호수 주변의 마을은 아르헨티나 속의 유럽, 그 자체였다. 바릴로체가 ‘작은 스위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듯이 이곳이 영토적으로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지만, 마을의 모습이나 생활방식, 문화 등은 아르헨티나가 아니었다. 각각의 마을이 스위스 콜로니, 독일 콜로니 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곳은 아직 유럽의 식민지, 이주민 집단거주지역인 셈이었다. 그러니 아르헨티나의 사회통합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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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너머로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안데스 영봉들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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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해발 100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고사목이 마치 높은 곳에 올라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체로 캄파나리오를 여행하다 아르헨티나 현지 청년들을 만났다. 친구들끼리 여행을 온 청년들이었는데, 프란치스코는 졸업후 파타고니아 북쪽에 있는 네우켄의 여행사에서 2개월째 근무하고 있는 청년으로 영어에도 상당히 능통했다. 제시카 생일을 맞아 친구 7명이 3일간 바릴로체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아주 명랑하고 쾌활했다. 학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친구끼리 소풍을 왔으니, 즐겁지 않을리 없었다. 이들은 전망대 스낵코너에서 나에게 차도 대접하는 친절을 보였다. 현지 청년들과 만나 같이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고, 차도 마시니 나도 기분이 한껏 고조됐다. 이들과 학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국립대의 학비는 무료인 반면 사립대는 월 800페소 정도의 수업료를 내며, 시험비는 따로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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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과 함께.
아주 친절하고 낙천적인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맨 오른쪽이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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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 캄파나리오 정상에 있는 야외 카페.
날씨가 쌀쌀해서 사람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가 있고, 빈 의자와 테이블만...
이곳이 해발 1049m라는 팻말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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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에서 차를 한 잔 하며...
오른쪽 두번째가 오늘 생일을 맞은 제시카입니다.
체로 캄파나리오에서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브렌트라는 젊은 미국인 여학생을 만났다. 미국 콜로라도 출신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공공정책(public policy)을 공부하면서 자전거 투어가이드를 병행한다고 했다. 나는 아르헨티나야말로 지속가능한 공공정책, 사회통합과 사회개발을 위한 공공정책이 필요하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 여학생도 내 의견에 적극적인 동의를 하면서, 공공정책 분야에서 아르헨티나가 개발해야 할 것들이 많아 여기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고 말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의 최대 현안인 물가 급등과 페소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브렌트도 물가를 걱정하며, 혀를 내둘렀다.
내가 “그런데 아르헨티나 정부나 국민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니 그녀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물가와 환율을 크게 걱정하면서 달러를 비축하고 있다. 국민들은 달러를 모으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브렌트는 그러면서 “국가의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걸 국민들이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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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릴로체 시티 센터와 중앙공원을 잇는 건물로
바릴로체의 랜드마크입니다.
시티센터로 돌아와 엘 치링퀴토(El Chirinquito)라는 시내 중심의 식당에서 스테이크로 바릴로체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쇠고기 스테이크는 39페소, 와인 1글라스 8페소 등 47페소(약 1만1300원)였지만, 기본 좋게 팁까지 포함해 50페소를 지불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3시가 넘었다.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엔 주말에 비가 온다고 하더니 틀리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칠레의 산티아고 숙소를 예약했다. 1박에 14달러(약 1만6800원)로 약간 비싼 느낌이었다. 이 숙소가 산티아고에서 가장 저렴하면서 레이팅(호스텔 이용자들의 평가)은 90%가 넘는 인기 호스텔이었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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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소박한 식사.
옆에 항상 갖고 다니는 메모용 공책이 있네요.
여행을 하면서 이런 공책을 몇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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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은 바릴로체의 치링퀴토 식당.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한국인을 만났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 한국인과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SK네트웍스의 아르헨티나 지역전문가로 파견된 직원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거의 전역을 여행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어에도 상당히 능통했다. 매우 활달한 성격이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와 남미 정세, 여행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의 대화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나는 아르헨티나가 엄청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부정부패와 사회통합 실패로 그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또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자신을 제3세계 국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유럽 모국의 후예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 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적 에너지를 모으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 청년도 나의 견해에 지지를 보내며 아르헨티나의 경제엔 당분간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며 콜롬비아의 사업기회가 더 많다고 말했다. 모처럼 한국어로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세계일주 시작 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한국의 기업이나 젊은이들이 이렇게 세계 곳곳을 누비며 시장조사도 하고, 사업기회도 모색하고, 투자대상을 물색하는 한 한국에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까지 전문가를 파견해 이런 시골까지 조사토록 하는 것은, 한국의 기업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그 젊은 청년은 남미대륙의 남쪽 끝 칼라파데에서 버스를 타고 28시간 달려 막 도착했는데도 쌩쌩했다. 패기만만했다. 그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아르헨티나의 우울한 현재 모습과 한국전쟁 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역동적인 한국의 모습이 겹치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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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신의 독특한 경험이나 현지인과 나눈 짧은 이야기를 일반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특수성의 일반화’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독특하고 단편적인 경험과 이야기는 그 자체로는 사실, 즉 ‘팩트(fact)’지만 그것이 보편성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 특수한 경험과 대화를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경우 그 사회가 가진 ‘진실(truth)’과 멀어질 수 있거나 또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여행이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여행은 편견에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령,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내 중심의 번화가를 여행하는 경우와 외곽의 공원지대를 여행하는 경우, 보카 지역의 남루한 골목을 여행하는 경우, 각각은 사실이지만 부분적인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여행자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며, 비단 여행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런 편협한 사고의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끝없는 반추와 다양한 자료들을 통한 전체적인 여행지 정보를 충분히 취득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