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 김근우
바람 끝이 매섭다. 엄마가 살고 있던 집을 찾는 내 마음은 더 시리다. 앞서 달려간 바람이 주인 기다리는 전단을 흔들며 대문 밖을 서성인다. 집안에는 종이상자 하나도 버리지 못했던 엄마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구석까지 들춰가며 찾아낸 것들이 문밖에 수북하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주섬주섬 손수레에 얹는다. 구부러진 허리에 짐이 버겁다. 헐떡거리는 털신 속으로 박힌 앙상한 발목에 노인의 고단한삶이 애처롭게 스친다. 수레를 끄는 힘겨운 모습에서 엄마를 본다. 내려놓지 못하고 버겁게 끌고 다닌 엄마의 짐이 멀어져가는 수레 위에서 너울거린다.
시부모님 차례를 모시고 급한 음복을 한다. 친정 부모님 차례상을 다시 차리는 나는 ‘무남독녀’다. 아들 노릇이라는 행동강령이 화인처럼 박힌 내 꼬리표다. 이름보다 더 많이 나를 따라다닌 말이다. 그 무게를 감당하느라 엄마와 마주 잡고도 숨비소리 같은 한숨을 보태가며 살았다.
할머니는 딸만 셋을 낳은 진외할머니를 오래도록 모셨다. 아들 없는 작은 며느리를 당신 친정어머니 보듯 안쓰러워했다. 후사 없는 아들에 대한 할머니의 노심초사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약으로 침으로 뜸으로도 모자라 밖에서 들이는 손자도 마다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손자를 기다리는 마음만큼 엄마의 가슴에 뚫리는 구멍은 커져만 갔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봄 엄마는 마흔이었다. 할머니한테 빨리 가보라는 전갈을 동네 아주머니가 숨 가쁘게 전했다. 걸인이 애를 낳으려고 하는데 아들이면 데려오려고 할머니가 옆에서 지키고 있다는 말이었다. 지쳐 주저앉은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황급히 달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경찰이 산모를 데려간 뒤였다. 웅성거리는 몇몇 사람들 속에서 할머니는 수습하는 경찰관의 뒷모습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손에 끌려오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던 할머니의 아쉬운 표정은 오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월을 먹지 않는다.
손자를 원했던 할머니 마음이 천근이면 아들을 품에 안고 싶은 엄마의 소망은 몇 근이었을까. 자신이 끊어버린 아들 고리를 잇고 싶은 엄마의 몸부림은 안타깝도록 강고했다. 끝없이 약을 먹으면서도 여기저기 침(鍼)을 꽂고 누워서도 오래도록 지치지 않았다. 화상으로 부푼 배꼽에 얹어진 벌건 쑥뜸을 향해서도 엄마의 갈망은 부채질에 바빴다. 그러나 운명은 단호했고 나는 끝내 무남독녀였다. 내가 작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엄마는 득달같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이고, 우리 손자 고추 봐라, 아이고 우리 손자 고추 봐라.”
엄마는 울먹울먹 되뇌며 아들에 대한 열망의 무게를 아주 조금 덜어내고 있었다.
산아제한이 절실했던 그 시절 아들이 없다는 사실이 엄마에게는 역린이었다. 거기에 혼인한 딸은 친정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는 고전까지 아프게 배웠다, 아들로 채우지 못해 허허로운 마음에 더 큰 옹이가 생기고 말았다. 외손주 둘을 유치원에 보내도록 이어서 키워 주면서도 시집간 딸네 집을 향한 발길은 끝내 열지 않았다. 대를 끊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한 자신의 치부를 헤집은 이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것으로도 다 쏟아내지 못한 말들은 당신 가슴에 켜켜이 쌓아놓고 자신을 짓누르는 짐으로 키워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그 짐을 풀고 싸는 날이 많아졌다. 허리를 다쳐 밥은커녕 이틀이나 화장실을 가지 못할 만큼 위급했어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팔순을 넘기면서부터는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아들 없는 자신을 방어하던 분노가 버틸 힘을 잃은 듯했다. 상처를 지켜주던 면역력이 다해 곪아가고 있었다. 살아가야 할 모든 이유를 잠식하는 지독한 화농이었다. 고통스러워도 응어리를 들어내고 싶어 엄마의 너절한 푸념을 외면했다.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에 대한 미움은 고통을 더해줄 뿐이라는 말을 길게 했다. ‘마음의 자유’를 들먹이며 엄마의 생각을 바꾸려는 내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여든셋 되던 해 겨울 엄마는 거짓말처럼 가고 싶다던 곳으로 갔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져 찾아간 응급실에서 진료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 손을 놓았다. 아니 놓아주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 점점이 박혀있던 아픔의 입자들도 마지막 호흡에 섞어 반함에 물고 다시는 내놓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거부할 수 없는 이별을 위해 사십구재까지 아침저녁 상식을 올렸다. 진언 중에는 애써 눌러둔 것들이 녹아나는지 자꾸 눈물이 났다.
소식을 들은 정 많은 친구가 상식에 올리라고 나물 몇 가지를 들고 찾아와 주인 없는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힘들지. 상식 올리면서 얼마나 우나 싶어 눈물 닦아 주려고 왔지.”
그 말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한참을 울었다. 장례식 때도 엄마가 편안한 곳으로 가길 바라며 울음을 삼켰던 나다. 그런데 ‘힘들지’하는 한마디에, 가슴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쿵 내려앉으며 울음을 밀어 올렸다.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는 친구의 눈빛을 향해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잘했어, 엄마도 네 맘 다 아실 거야, 그만 울어도 돼.”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기댔던 날, 저녁상식을 올린 후 진언하는 것을 잊고 텔레비전에 빠져 있었다. 상식을 올리고 나서 엄마를 잊고 있었다. 친구가 받아 간 하소연만큼 마음이 가벼워진 터였다. 엄마한테도 이랬어야 했다. 이렇다 저렇다 내 식대로 해석하고 설명하기보다 하소연을 곰살맞게 들어 주는 게 맞았다. 아픔을 걷어내려고 했던 갈퀴질 대신 엄마의 웅크린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어야 했다. 엄마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나도 엄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빵점짜리 딸이었다.
이제 두 번의 차례와 기제사를 빼고는 무남독녀로서 할 일이 없다. 엄마가 옆에 없으니 애잔하던 마음도 많이 가셨다. 내려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엄마의 짐에서도 무게를 거둬냈다. 당초에 짐이라는 게 있기나 했을까. 자신이 만들고 스스로 짊어질 뿐이다. 엄마가 그러했을 것처럼 나도 헛된 짐을 만들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나를 바라볼 아이들의 짐을 생각하며, 째깍대는 초침 위에 꾸려놓은 짐을 하나씩 얹어 보낸다.
서둘러 잠을 청한다. 오늘 밤에는 큰 소쿠리 하나 들고 엄마랑 뒷밭으로 고추나 따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