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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기행] 월미도의 지명 유래와 인천상륙작전 상징물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2.11.02.
월미도 산책(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북성포구를 나오면 바로 앞 도로가 월미도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많은 변화를 겪으며 현재는 간척이 많이 이뤄져 주변에 공장들이 들어서며 육지가 돼버린 일종의 육계도(陸繫島)이다.
1656년(효종 7)에는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로 월미행궁이 지어졌으나, 월미도 동남쪽 설과 월미산 서북쪽 자락 설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월미도(月尾島)의 지명 유래
일반적으로 월미도는 한자의 뜻풀이 그대로 섬의 생김새가 달의 꼬리 모양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이름으로 볼 때 달의 꼬리 모양이라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월미도의 명칭을 시기 순으로 나열하면 <승정원일기>에는 ‘魚乙未島(어을미도)’, <비변사등록>에는 ‘於乙味島(어을미도)’와 ‘於味島(어미도)’, <해동지도>에는 ‘孽尾島(얼미도)’와 ‘月尾島(월미도)’, 외에도 <효종실록>에는 ‘濟物島(제물도)’가 <청구도>에는 ‘月星(월성)’ 등으로 적혀있다.
이렇게 볼 때 ‘어을미도’에 가까운 우리말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며 ‘月尾島(월미도)’로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형 상으로도 월미도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기에 달의 꼬리 모양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는 <기호일보> 2018년 11월 6일자 지면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얼’은 ‘얼다’와 같은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얼음이) ‘얼다’는 ‘섞이다’, ‘교합(交合)하다, ‘합쳐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미’는 ‘물(水)’을 의미하는 것이니 월미라는 명칭은 ‘물(미)이 섞이는(얼) 섬’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육지와 거의 맞닿은 곳에 있고, 바닷물이 이 섬을 타고 돌면서 섞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을 것이다.”
‘맥아더 길’ 표지석과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 안내비
북성포구로 들어가는 대한제분 정문 대문기둥 왼쪽으로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3개의 상징물이 나란히 서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맥아더 길’ 명예도로 표지석이다. ‘맥아더 길’은 월미공원 입구에서부터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까지 이르는 1.9km 구간을 일컫는다.
한국자유총연맹 인천시지부가 2015년 7월 중구에 명예도로 지정을 신청해 10월에 중구로부터 지정 통보를 받고, 12월 2일 표지석 제막식을 가졌다.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 안내비는 ‘맥아더 길’ 표지석 옆에 있다. 안내문을 보면 ‘이 지점은 1950.9.15. 새벽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원수가 전함 261척과 상륙군 미해병 제 1사단, 한국해병 제1연대를 진두지휘하여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3곳의 상륙지점(적색해안·청색해안·녹색해안) 중 한 지점임’이라고 해서 이곳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상륙지점 3곳에는 안내비가 같은 모양으로 서있다.
1950년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일 때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북한군의 배후를 쳐 위기에서 벗어나자는 구상으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인천과 군산, 주문진 등 3곳을 대상으로 검토하다가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의 결정으로 인천이 최종 선택됐다. 물론 상륙작전을 위한 사전 공습은 9월 4일부터 매일 이뤄졌다.
9월 15일 새벽 5시, 미국과 영국, 호주, 프랑스 등 8개국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순양함 등 함정 261척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해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맥아더가 진두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은 인천 해안 3곳에서 차례대로 진행된다.
선발 병력은 월미도 녹색해안(Green Beach)에 6시 33분에 상륙해 20여 분 만에 월미도 105고지를 점령했으며, 정오쯤에는 월미도 일대에 있던 북한군을 섬멸하고 주변을 장악했다.
다시 밀물이 들어오는 오후 5시 32분 후발대인 미 해병 1연대가 지금의 미추홀구 낙섬사거리 일대 청색해안(Blue Beach)에, 5시 33분에는 미 해병 5연대가 동구 만석동 부근 적색해안(Red Beach)에 상륙했다.
이때 맥아더도 이곳 적색해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오후 8시에는 국군 해병 1연대가 만석동 부근에 상륙해 시가지 소탕전과 외곽 경비를 맡았다.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는 2017년 11월 15일에 제막식을 했지만 평시에 인천상륙작전만 생각했기에 또 뭔가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기념물이 하나 더 들어섰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 전 사진을 찍다가 “어, 제2차 인천상륙작전이라니” 처음 접하는 또 하나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게 된다. 이에 1950년 10월 25일 중국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는 전쟁)을 표방하며 30만 명에 달하는 인민지원군을 투입해 대공세를 펼친다.
전세는 역전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1·4후퇴)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택 인근에서 저지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한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1951년 2월 10~11일 이틀간 북한군과 중공군에 점령당한 인천을 탈환하기 위해 함정 6척과 해군·해병대로 구성된 합동특공대가 상륙작전을 감행, 1·4 후퇴 이후 한 달여만에 인천을 재탈환한 작전이다.
원래 목표는 월미도를 포격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처럼 적군을 속여, 병력을 인천 쪽으로 유인해 서울을 재탈환하려는 작전이었다.
작전의 책임은 미국 해군 극동사령부의 제95기동부대장인 앨런 스미스가 맡았다.
그는 여러 차례 인천항에 진입한 경력이 있는 YMS-510정의 정장(艇長, 작은 함정의 우두머리)인 함덕창 대위에게 정찰을 명령한다.
그는 1월 27일 인천항에 기습 상륙해 포로 2명을 압송했고, 그들을 심문해 적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특공대를 구성한 뒤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을 건의한다.
그리고 2월3일 해군 장병과 국민 성금으로 구입한 한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 미국·영국의 순양함, 구축함 등과 함께 북한군 진지를 포격한다. 이를 계기로 인천항에 주둔한 북한군 포대의 위치와 화력 규모가 그리 강력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2월 10일을 ‘제2차 인천상륙작전’의 날로 잡는다.
그런데 당시 해병대 병력은 덕적도를 중심으로 서해 각 도서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작전 개시일인 2월 10일 시간에 맞춰 제대로 집결할 수 없었다.
이에 백두산함의 노명호 함장과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대 제2대대를 이끌었던 김종기 소령은 만조시간을 놓치면 안된다고 판단해, 인천 외항에 집결한 각 함정의 수병들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특공대 총 70여명으로 구성한 상륙부대를 긴급 편성한다.
상륙작전은 오후 5시 미국과 영국 함정의 함포사격으로 시작한다. 특공대는 6시쯤 만석동 해안으로 상륙해 치열한 전투를 펼쳤고, 7시에 뒤늦게 도착한 해병대 100명까지 만석동 해안에 상륙한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적들은 인천 방어를 포기하고 퇴각한다. 오후 9시에는 목표했던 국립중앙관상대(현 인천기상대)를 점령하고 내처 인천시청(현 중구청)도 탈환하고 태극기를 게양한다. 2월 11일 후속 부대가 도착하여 인천의 재탈환이 완료되며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마친다.
높이 3m의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는 해병대를 상징하는 8각형의 화강암 기둥 위에 당시 참전한 함정과 해군·해병대를 형상화한 닻과 상륙군 청동 조형물로 이뤄져 있다. 또한 기둥 앞면에는 상륙작전을 하는 모습을 양각으로 새겼고, 뒷면에는 전투업적, 작전세력, 참전자 명단 등을 넣었다.
육지와 연결된 ‘월미도’
대한제분에서 월미도로 곧게 뻗은 왕복 4차선 도로와 인도를 보면 왼쪽으로 제7부두, 오른쪽으로 공장들, 위로는 모노레일이 놓여있어 섬과 육지를 연결한 연륙 도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더구나 계속되는 간척사업으로 1970년대쯤 북성포구 십자굴이 완성되며 월미도 북쪽으로 공단이 조성돼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월미도’라는 명칭에서만 과거 섬이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인천항 앞에 있는 월미도는 일찍부터 군사기지로 각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1882년 임오군란이 끝난 후 일제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군함의 동력원인 석탄을 조달하기에 적합한 월미도 북서쪽에 석탄창고를 세운다.
1889년 청나라도 뒤질세라 일제의 석탄창고 건너편인 월미도 동쪽에 석탄창고 부지를 마련했지만 창고는 짓지 않았다. 그러다 1894년 청일전쟁에 청이 패배하면서 일제는 이 부지에 군수물자 창고를 짓는다.
이에 조정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견제하려고 1896년 월미도 남쪽 지역 1만3400평(약 4만4297㎡) 규모 토지를 러시아에게 내준다. 러시아는 이곳에 부두, 석탄창고, 병원, 연병장, 사격장, 수도관까지 건설한다.
한편 조선의 석유 제품 시장을 독점하려는 미국의 타운센드 회사는 월미도에 5백만 갤런 규모 석유저장고를 건설한다. 이후 1897년 월미도 동쪽에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설립해 조선의 석유 판매권을 장악한다.
1904년 제물포해전에서 러시아를 물리친 일제는 월미도를 통째로 군사 지역으로 지정하고,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짓는다. 그리고 이에 발맞춰 1905년 12월 6일 월미도 북단과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군용철도를 준공한다. 그러나 인천항에 갑문식 도크가 설치되면서 만조가 아닐 때마다 월미도에 정박하던 선박들은 더 이상 이곳에 정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되자 열차로 수송할 화물의 양이 줄어들면서 1917년부터 일제는 월미도와 육지를 잇던 철로 자리에 석축 제방인 돌제(突堤, 육지에서 바다로 길게 뻗쳐 나오게 해 만든 둑)를 쌓고, 1918년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해 유원지로 개발하면서 석탄창고를 철거한다. 그리고 1937년에는 돌제를 확장해 폭을 넓힌다.
[개항장기행] ‘월미도 유원지’와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3.01.01.
월미도 산책(2)
일제강점기 행락시설, ‘월미도 유원지’
1910년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월미도는 더 이상 군사 지역의 역할을 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이에 인천부는 1918년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며 경인지역의 대표적인 행락지로 부상한다.
물론 이런 부상은 1899년에 개통된 경인철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월미도를 관광지화 하려던 인천부는 총독부 철도국으로부터 월미도의 철도 용지 396㎢(12만평)를 20년 무상 임대받아 도로를 정비하고 벚나무 등을 심는다. 그리고 월미도 북서쪽 해안에 모래를 깔아 해수욕장을 만들며 시설을 정비한다.
해수욕장이 유명세를 타자 일본인 사업자들을 중심으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조선총독부에 기존 위락시설과는 별도의 유원(遊園)회사 설립 문제를 타진한다. 그리고 1923년 3월 경인지역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월미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7월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탕 원조인 월미도 조탕(潮湯)과 해수풀장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월미도 유원지 전체를 관할하게 된다.
이후 여관, 별장, 식당, 매점, 해수욕장, 보트장 등도 조성해 월미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휴양지로 명성을 떨친다. 월미도를 찾는 행락객들이 계속 늘어나자 1928년 조탕 맞은편에 3층 규모의 조탕호텔을 신축했으며, 1934년에는 조탕과 회랑으로 연결한 3층의 조탕별관을 신축한다.
월미도 유원지가 개장한 후 15여 년이 지난 1937년 6월에 용궁각이 들어서는데 조탕 서북쪽 바다 위에 세워진 요정이었다. 바다에 콘크리트 교각을 놓고 그 위에 일본식 목조건축물을 올렸다. 조탕과 회랑으로 연결했으며 바닷물이 들어와 만조가 되면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이외에도 1923년에는 해수욕장 뒤 월미산 자락에 임해학교가 설립된다. 애국부인회 인천지부와 간호부인회 인천지부가 공동으로 경영하고 인천교육회가 후원했다.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서양식 2층 건물로 경인 지역의 많은 청소년을 수용해 수영과 모래욕, 운동, 자유 연구, 학예발표, 오락 등을 진행했다.
그리고 수영장, 텐트, 흑판, 탁자, 식기 등의 시설을 갖추고 학교의 학생들이 단체로 들어와 체제 유지에 필요한 규율과 정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광복 후 이 유원지 시설은 적산(敵産)으로 미군정에 접수된다. 그 후 1948년 지역 유지들이 ‘월미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 시설을 개보수하고, 월미도 조탕을 재개장해 운영하며 옛 명성을 다시 찾고자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도 보지 못한 채 인천상륙작전 중에 안타깝게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1970년대에는 유원지였던 제방 주변의 바다를 땅으로 메우고 이 자리에 공장과 항만시설이 들어섰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월미도 유원지’의 아름다운 풍광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남아있는 엽서 사진으로나마 당시 위용을 떨쳤던 유원지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50여 년 만에 개방된 ‘월미공원’
월미산과 월미공원은 2001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2001년 9월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관리권을 인수해, 10월 13일 월미공원 개방과 기념행사로 시민에게 녹지를 개방했다. 2004~2007년에 월미공원 1단계 사업으로 한국전통공원을, 2005년에는 월미공원 전망대를, 2008년에는 이민사박물관을, 2008~2010년에는 월미공원 2단계 사업으로 월미문화관과 산책로 등을 조성했다.
실제 인천상륙작전의 항공기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인해 월미산 서쪽 산 사면은 거의 초토화된다. 그리고 상륙작전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며 월미산을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해 통제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거의 50여 년 동안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월미산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바뀌어 도리어 복이 된다’고 오히려 군사보호구역이었기에 사람들의 때를 타지 않아 지금은 울창한 수림이 조성돼 멋진 산책길이 만들어졌다.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건립
그런데 문제는 현재 월미전통공원이 조성된 곳은 원래 민가가 있던 지역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항공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인해 마을은 불에 탔으며, 주민 100여명이 폭격과 기총 소사로 희생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30여 가구 남짓한 월미도 원주민들은 월미도로 돌아오려 했으나 미군이 월미도와 인천을 잇는 다리마저 봉쇄했다. 그리고 미군은 마을의 집터를 도저로 밀어 마을은 흔적도 남지 않았으며 이곳에 미군부대 기지를 건설했다.
이에 주민들은 인천시장에게 진정서를 냈고,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는 답변만 받았을 뿐이다.
1970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 화해를 추구하는 신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주한미군 감군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1971년 7월 20일 미군이 철수하며 한국 국방부에 인계했는데, 국방부는 땅을 전부 국유화하라고 통보하고 이곳에 해군 제 2함대 사령부를 주둔시켰다.
결국 박정희 군부 독재정권 시절이라 주민들은 감히 항의할 엄두내지 못하고 여전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주민들은 계속 국방부와 인천시 등에 진상규명, 배상, 귀향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넣었으나 실현되지 않자, 1997년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월미공원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고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2006년 귀향대책위원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서를 제출했고, 2008년에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진실 규명 결정’, 즉 월미도주민이 입은 피해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상을 받지 못하자 월미도 원주민들은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3년 11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은 소유권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피해 보상을 해줄 수 없다며 국가승소(확정) 판결을 내렸다.
결국 월미도 원주민들은 진실화해위원회부터 받은 권고사항이 무산됐고 어떤 피해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후 2017년 3월 7일 인천 지역 여야 국회의원 10명 ‘월미도 군부대 설치에 따른 월미도 이주자의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공동 발의했는데 국회에서 계류되다 입법이 무산됐다.
그러나 다행히 2019년 3월 29일 ‘인천시 과거사 피해 주민의 생활안전 지원 조례’가 인천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이 조례는 월미도 귀향지원 대상자에게 피해주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비록 현재 생존자는 30여명에 불과했지만 거의 70여년 만에 월미도 폭격 민간인 희생자들의 보상 길이 열렸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조례에 의해 2011년 11월 2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월미도 원주민들의 넋을 기리는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를 월미전통공원 제물포마당 안에 건립하고 제막식을 진행했다.
위령비의 내용을 보면 “이 위령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소속 미군의 폭격으로 월미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원주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권고에 따라 건립하였다”고 적혀있으나, 안타깝게도 신원이 밝혀진 희생자 10명의 이름만 적혀있고 그 외 희생자 100명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이에 생활안정지원금을 받고 위령비를 세웠지만, 대책위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인 월미도로 돌아가고 싶어 하며, 과거 자신들이 살던 곳에 월미공원이 생긴 만큼 월미도 안에 대체 토지 마련을 원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과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비롯한 명예회복조치 등을 적극 강구하라”는 말을 되새겨본다. 월미도 원주민들이 대체 토지를 받아 월미도로 귀향하지 않는 한, 아직도 인천상륙작전은 인천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전쟁인 것이다.
[개항장기행] ‘월미둘레길’ 중 ‘정상광장’으로 올라가며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3.02.05.
월미도 산책(3)
‘월미 평화의 나무’와 현충시설로 지정한 ‘해양경찰 흉상’
거의 50여년간 군사보호구역으로 개방하지 않았던 월미산을 2001년 인천시가 매입해 산책로를 만들어 개방하자 인천시민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월미산에 오를 수 있는 기대감 때문이다. 현재 월미산 산책로는 수목이 기대 이상으로 우거져 인천시민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항상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월미산은 비록 해발 108m로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오르지만 계속 오르막길이라 유아나 노인을 동반했을 경우는 월미공원 안내소에 있는 물범카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올라가는 것이 좋다.
물범카 배차 간격은 기본 20분으로 비나 눈이 내리거나 방문객이 많아 길이 혼잡한 경우 안전을 위해 운행을 하지 않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은 쉬니 참고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월미산 산책로를 돌며 ‘월미 평화의 나무’를 찾아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월미 평화의 나무’는 인천상륙작전 이전부터 월미공원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목 7그루를 발굴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물론 더 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2015년 선정 당시 70년 이상 된 나무로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산책로를 걸으며 견학이 가능한 나무들로 뽑았다.
월미공원 안내소에서 월미바다열차 레일을 따라 길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해양경찰 206 경비정이 전시돼있고, 2011년 불법조업을 하던 중국어선을 단속하다 안타깝게 순직한 해양경찰 이청호 경사 흉상과 2015년 응급환자 구조를 위해 긴급 출항을 했다가 충돌사고를 당해 순직한 해양경찰 오진석 경감 흉상이 서있다.
이 흉상들은 모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는데,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다 순국한 상황을 떠올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다.
‘월미둘레길’을 따라
맞은편에는 월미산으로 오르는 ‘월미둘레길’이 보이고 그 옆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덱(deck)과 계단이 있는데, 계단 옆으로 아름드리 은행나무의 여러 가지가 하늘을 향해 한껏 벌리고 서있다.
‘월미 평화의 나무’ 중 첫 번째로 ‘치유의 나무’이다. 나무의 형태가 가장 멋지고 품격이 있으며, 사람들과 친숙해 시민들을 힐링해 주기에 치유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령 89년에 높이가 19m이니 여름철에는 그늘이 넓어 그 밑에서 쉬어가기 적격이다.
계단을 올라 공연이나 행사를 하는 만남의 광장을 가로질러 맞은편으로 가면 ‘한국전통공원’을 바라보는 전망대 옆에 수령 111년인 두 번째 나무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가 있다. 나무 밑동 둘레가 4m가 되는 노거수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일품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 주위에 함포사격으로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월미둘레길’은 기본적으로 차량이 다닐 수 있게 포장도로가 나있고 오른쪽 한편으로는 흙길이 조성돼 원하는 길을 걸으면 된다.
그리고 숲을 보호하기 위해 길 양쪽으로 울타리를 쳤는데, 월미도에 있던 일본석탄고와 임해학교 등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한 안내판과 4계절 꽃길 구역별 종합 안내판, 월미공원에서 볼 수 있는 새들 안내판과 새 사진들 등을 보며 올라가다 보면 월미돈대에 다다른다.
‘월미돈대’
돈대(墩臺)는 성곽 시설의 하나로 성벽 위에 석재 또는 벽돌(塼, 전)로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높직한 누대를 일컫는다. 1872년 지방지도인 ‘영종지도(永宗地圖)’를 보면 월미도 남서쪽 4부 능선쯤에 원형의 돈대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월미돈대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강화도에 설치된 돈대가 숙종 때 건립된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에는 반원형의 성벽과 성가퀴, 포대(砲臺) 1개를 설치했지만 과거 ‘월미돈대’가 있던 자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돈대로 추정되던 이 주변은 여러 채의 군인막사가 설치됐기에 안타깝게도 돈대는 초석 하나 남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영종지도’에만 표시로 남아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곳 성벽에 오르면 인천대교와 영종도가 한눈에 보였는데 수림이 우거지고 건축물을 공사하느라 시야를 가려 바다를 제대로 조망하지 못해 가슴이 답답하다.
‘사랑의 나무’ 연리지
‘월미둘레길’ 산책로는 수림이 우거져 여름에도 그늘이 많기에 더위가 한창인 때도 그리 땀이 많이 흐르지 않는다. 그리고 곳곳에 쉬어갈 쉼터도 많아 그늘에 들어가 앉으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수목의 내음이 잔뜩 묻어와 저절로 가슴이 활짝 펴진다.
정상광장으로 오르는 길 역시 울타리에는 월미공원이 조성되기 전의 사진과 조성과정을 알 수 있는 연표와 각종 사진, 월미공원 숲의 역사, 식물 이름에 얽힌 안내판 등이 걸려있다.
2004년 ‘인천향토교육연구회’ 선생님들과 함께 월미공원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고 있던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의 사정을 듣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해군 제 2함대 사령부가 있던 터를 봤던 기억이 가물거렸는데 걸려있는 사진에서 다시 보고 확인하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조금 더 오르니 길 왼쪽에 빨간 쌍하트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는데 모양이 재밌다. 아마도 연인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든 것 같다.
의자 2개를 맞붙였는데 가운데를 기울여놓았기에 앉으면 자동적으로 몸이 서로 밀착될 수밖에 없게 했다. 연인들이 앉아 손으로 하트를 만들면 멋진 추억의 사진을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까닭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쪽에 연리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월미 평화의 나무’가 7그루 선정됐는데, 안내판을 보니 이 나무는 ‘월미공원의 나무’ 여덟 번째 ‘사랑의 나무’라 이름을 붙였다.
‘월미 평화의 나무’를 선정한 이후에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연리지란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원래는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냈으나 현재는 남녀 간의 사랑 혹은 짙은 부부애를 비유한다.
책 ‘후한서’에 담긴 ‘채옹전’을 보면, 채옹은 효심이 지극한 효자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 계절이 바뀌어도 옷 한 번 벗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다.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 후 채옹의 집 앞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자랐는데, 점점 가지가 서로 붙어 하나가 됐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의 효성이 지극해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처음에는 지극한 효심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훗날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읊은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이다. 한 도사가 선녀가 된 양귀비를 만나서 들은 내용으로 당 현종 천보 10년(751) 칠월 칠석에 현종과 양귀비가 화청궁에 거동해 노닐며 장생전에서 나눈 사랑의 맹약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 / 칠월 칠석 장생전에서 /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 /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 /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월미공원 ‘정상광장’
정상광장 중앙에는 인천시의 대표 캐릭터인 물범 애이니(인천을 사랑한다는 애인과 인천의 ‘ㅣ’를 결합), 꼬미(꼬마 물범), 버미(씩씩한 점박이 물범)가 반가운 표정으로 산책객을 맞이한다. 여기까지 물범카를 운행한다. 이곳에서 월미전망대와 월미산 정상으로 갈 수 있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길이 갈린다.
광장 오른쪽 숲에는 편히 쉴 수 있는 긴 의자들이 늘어서 있고, 그 오른쪽에는 ‘월미공원 귀환 기념비’와 월미도와 관련된 역사나 사건을 기록한 ‘월미도 연표’비가 나란히 서있다. 건강을 위해 산책하는 분들이야 무심히 지나치지만 그래도 연표를 읽어보면 월미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숲속 한쪽 끝에 ‘월미 평화의 나무’ 네 번째 ‘영원한 친구나무’가 있다. 수령 107년의 상수리 나무로 정자목(亭子木)처럼 왕성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다람쥐의 서식처가 되기에 붙인 이름이다.
정자목이란 서당·정자·향교 등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은 나무로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개항장기행] ‘월미전망대’와 ‘월미둘레길’ 한 바퀴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3.03.04.
월미도 산책(4)
월미공원 정상광장 위에 설치된 ‘예포(禮砲)’
‘정상광장’ 물범 캐릭터 뒤로 난 길로 50여m 오르면 성가퀴를 두른 호미 형태의 포대가 있고, 그 안쪽에 ‘예포’가 한 문 놓여있다. 예포는 전쟁에 이긴 쪽에 대한 경의와 무장 해제의 표시로 행한 중세 시대의 전통 의식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원수나 고위관리, 고급 장성 등이 국가·부대·함정을 방문할 때나, 군함이 외국의 항구에 입항하는 등 각종 의례를 할 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정 수의 공포탄을 발사하는 예식용 대포를 일컫는다.
고종은 즉위 40주년을 맞아, 1902년 9월 17일 거행할 예정이던 칭경예식(稱慶禮式)에 초대될 각국대사를 맞이하는 포대를 월미도에 설치하기로 한다.
이에 1901년 8월 14일 월미도 정상에 포대를 구축하기 시작해 9월 6일에 공사를 마쳤다. 길이 90자(대략 27m) 높이 6자(대략 1.8m) 정도의 성곽을 쌓고, 3~4개의 반달형 포문을 설치했으며, 포차에 실린 야전포 2문을 배치했다. 그러나 콜레라의 유행과 영친왕의 두진(痘疹 : 천연두와 홍역)으로 ‘칭경예식’이 연기돼 예포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의정부 찬정외부대신 서리 외부협판 최영하가 인천감리 하상준에게 보낸 훈령에 보면 “귀항 월미도 포대를 건설하고 각국 군함과 예포하여 응답포로 한성 각 영사에 알려 훈령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인천항을 드나드는 각국 군함에 예포를 발사하여 입출항에 응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을사조약(1905)이 체결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그 이듬해인 1906년 8월 8일 통감부의 명령에 따라 월미도 포대가 폐쇄된다.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에는 ‘선박의 입출항을 알렸던 예포’라는 제목으로 보다 자세하게 실려있다.
인천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월미전망대’
월미공원 ‘정상광장’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200여m 내려가면 2005년에 준공한 ‘월미전망대’가 나온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구조 전망대로 조망을 위해 겉은 유리로 둘렀다.
높이는 23.75m로 별로 높지 않은 것 같아 ‘올라가 봐야 뭐 별 것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지만 반드시 올라보길 권한다. 전망대는 나선형 계단을 걸어서 오르거나 노약자를 위해 설치한 승강기를 타고 오르면 된다.
2층은 현재 ‘달빛마루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중구노인인력센터가 중구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2019년 7월에 개업한 중구 실버카페 1호점이다.
일을 하는 어르신들도 매우 친절해 자리를 잡고 앉으면 저절로 마음이 포근해진다. 이곳에서 음료를 마시며 창밖을 보면 자리에 따라 인천항과 인천대교, 영종도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직원 어르신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실버카페로는 국내에서 가장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장소이며,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색다르게 치장하는 둘레길 경치가 좋다고 한다. 그리고 낙조가 떨어질 때와 야경이 더 멋있다는데 다음에는 계절마다 시간을 바꿔가며 와봐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노약자들이 찾아오기 어려운 애로사항도 이야기한다. 이곳에 오르는 물범카가 시간 편성이 많지 않아 자주 다니지 않고, 비나 눈이 오면 운행이 정지돼 노인들이 찾아오기 쉽지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월미둘레길 남쪽에서 전망대에 오르려면 전망대길 계단(266계단)이 가파르고 노인들이 걸어서 오르기 쉽지 않아 남쪽 구간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면 좋겠다고 한다. 또 자유공원과 월미도, 연안부두를 잇는 케이블카를 설치하면 멋진 바다풍경도 볼 수 있어 좋겠다고 한다.
물론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3층 전망대이다. 360도를 빙 둘러 유리로 난간을 만들고 전망대 망원경을 설치해 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 곳도 구석구석 가깝게 당겨서 볼 수 있다.
우선 한 바퀴 돌며 곳곳을 조망하고 사진을 찍어본다. 풍광이 워낙 넓게 펼쳐져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사진에 담아보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사진 한 장, 한 장에 다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핸드폰 파노라마 기능을 활용해 최대한 넓게 펼치며 찍어본다.
이곳에서는 인천 시가지는 물론 인천항 1부두에서 8부두까지, 멀리 산세를 보면 왼쪽부터 계양산, 천마산, 원적산, 만월산, 소래산, 문학산, 청량산, 그리고 서쪽 바다 쪽으로는 송도신도시, 인천대교, 무의도, 용유도, 인천국제공항, 영종도까지 파노라마처럼 막힘없이 펼쳐져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다. 날이 맑고 시계가 좋은 날 올라보기를 권한다.
월미산 정상과 ‘아타고신사(愛宕神社, 애탕신사)’
월미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정상광장’을 중심으로 ‘월미전망대’와 정반대 방향에 있다. 정상까지는 대략 200m로 그리 가파르지 않은 길을 오르다 보면 정상에 못 미쳐 쉼터에 ‘아타고신사’에 대한 안내판과 사진이 있다.
신사(神社)란 일본의 민속신앙인 신도(神道)신앙에 근거해 만들어진 종교시설이다. 일본인은 신도의 신(神)을 ‘카미’라고 부르는데 800만의 카미가 있다고 한다. 이 수많은 카미들의 기원은 주로 조령(祖靈), 즉 조상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모든 자연물에 영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신도의 카미 중에는 자연물을 신격화한 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 ‘아타고신사’는 1908년에 세워졌고 1929년 9월에 한 차례 개축했다고 한다. 교토지역을 화재나 천재지변으로부터 보호하는 신을 모시는 ‘아타고신사’는 교토의 아타고야마(愛宕山)에 있는 ‘아타고신사’가 총본산이라고 한다.
신사 입구에는 청일전쟁 때 사망한 일본군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을 세웠다. 이곳 신사는 광복 후 파괴돼 봉안전에 오르는 계단만 남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월미산 정상에는 ‘산과 바다를 품어라’란 글귀가 써진 전망대가 있다. 이곳은 나무들이 아래를 가려 ‘월미전망대’처럼 풍광이 시원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월미산에 가려 볼 수 없었던 북쪽의 드넓은 광경을 다 조망할 수 있다.
월미산 정상 전망대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왼쪽부터 영종도와 그 뒤로 강화도, 물치도, 영종대교, 인천북항 배후단지와 북항제4부두, 계양산, 천마산 등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남서쪽으로는 왼쪽부터 송도신도시, 인천대교, 무의도, 용유도, 인천국제공항, 영종도의 백운산과 석화산까지 보이니, ‘월미전망대’와 월미산 정상 전망대 두 곳에 오르면 월미도를 빙 두른 인천시의 모든 곳을 조망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무선통신을 한 ‘월미도 무선전신소’
우리나라에서 직접 설치한 무선전신 시설은 ‘월미도 무선전신소’와 항로표시 시찰과 세관감시선인 탁지소 소속의 ‘광제호’에 장치한 것이 그 효시가 된다. 1910년 6월 대한제국은 예비비 3만원을 지출해 월미도, 항문도, 목포, 소청도, 원산 등의 해안국과 광제호에 무선설비를 장착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 결과 1910년 8월 15일 무선설비공사를 착공해 1910년 9월 5일 완공된 ‘월미도 무선전신소’와 당시로서는 최신설비를 장치한 ‘광제호’ 간에 무선전신을 처음으로 개시한다.
물론 일반 대중의 전보는 취급하지 못하고 군사적으로 이용되는데 불과했지만,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소라는데 의의가 있다.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월미도 포대자리에 설치됐고, 1923년 인천무선 전신국이 문을 연 데 이어서 2년 뒤 경성무선 전신국이 확장되면서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폐지됐다. 그리고 폐지 후에는 안테나와 전신소 건물만이 월미도 산정에 남아 있었으나 1932년 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월미둘레길’ 한 바퀴
월미산 정상에서 ‘월미둘레길’로 가려면 다시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야 하는데, ‘정상광장’을 거쳐 ‘월미돈대’에 도착해서 왼쪽 경사로로 내려가면 된다. 여기만 짤막한 경사로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넓고 평탄한 길이다. 길 양쪽으로 각종 나무들이 훤칠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우니 걷기도 무난하다.
봄에는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으로, 여름에는 싱그러운 청록색 그늘로, 가을에는 울긋불긋 채색한 단풍들로, 겨울에는 하얗게 덮인 설경으로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길이다. 길 중간중간에는 쉬어갈 쉼터와 체육 시설, 정자 등이 있어 잠시 쉬어가며 주변 경치를 누리는 것도 좋다.
한국이민사박물관으로 내려가는 해넘이 언덕 위에는 석양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인천대교와 무의도가 나무들 사이로 보인다. 일몰의 광경이 멋질 것 같다.
계속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 계단 아래로 ‘월미 평화의 나무’ 중 세 번째 ‘평화의 어머니 나무’를 볼 수 있다. 월미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현재 수령은 252년에 높이 22m, 밑동 직경은 2.2m이다. 나무가 워낙 위로 자라면서 넓게 펼쳐져 사진에 다 담을 수 없다.
길을 계속 걸으면 쉼터와 체육시설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월미도 남단을 돌아 왼쪽 위로 가파른 계단으로 돼있는 전망대길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쳐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언뜻 나무 틈새 사이로 인천항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월미둘레길’에서 월미도 바깥 풍경을 보려면 나뭇잎이 다 떨어져 숲이 온통 나목이 된 겨울에 와봐야 할 것 같다.
인천항 제6부두의 중간쯤 되는 둘레길에 진양정(進洋亭)이 있다. 바다로 나아가는 정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8부두와 제1부두 사이로 자유공원이 보인다. 개항 이후 가장 번성했던 부두이다.
조금 더 가니 나무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제7부두와 제8부두가 바로 눈앞에 성큼 다가오며 정박한 대형화물선이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다. 멀지 않은 곳에 해군 장병들이 월미산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만 그루 식수에 즈음한 1997년 4월 5일에 세운 ‘만 그루 식수 기념비’가 있다.
계속 걸으니 오른쪽으로 월미전통공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고 왼쪽으로 콘크리트 구조물인 벙커가 보인다. 과거 군부대에서 사용하던 탄약고인데, 내부를 수리해 갤러리로 활용해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조금 더 가니 내무반으로 사용했음직한 벙커가 있는데 ‘숲속 작은 휴게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월미둘레길’을 출발할 때 만났던 두 번째 나무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가 있다.
이렇게 월미도 산책을 끝냈는데 월미공원 입구에서 월미전통공원을 둘러보고 양진당이 있는 후문으로 나와 제6부두를 따라 바닷가로 월미도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의외로 차량 통행이 없어 봄이나 가을에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에도 무난한 길이다. 이왕 이 길로 돈다면 인천항 갑문 홍보관과 한국이민사박물관에도 들러보자.
연인과 같이 왔다면 월미도 등대길, 2024년 6월 설립될 국립인천해양박물관, 월미문화로를 따라 바닷가에 늘어선 각종 시설물들을 구경하고, 월미도 선착장에서 낙조가 떨어지는 시간에 맞춰 인천 앞바다를 도는 유람선도 타보자.
바다에서 인천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맛이다. 아이들을 데려온 가족이라면 ‘월미테마파크’에서 각종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4. 행궁에서 식민지 파라다이스로,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
글 : 김준 박사
현대해양 기사 승인일 : 2023.06.15.
인천 월미도 (1)
[현대해양]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 숙소를 찾기 위해 도착한 월미도는 밤이 아니었다. 화려한 불빛과 젊은이들의 웃음과 몸짓이 생기가 넘친다. 지척인 인천 구도심과 너무 다르다.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월미공원을 산책하기 위해 다시 본 그 거리는 지난밤 그 거리가 아니다. 한산하기보다는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월미산에 오르면서는 또한번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침 운동을 나온 활기찬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낮과 밤이 다른 얼굴인가. 월미도는 곧 월미산이며, 월미공원이다.
월미도는 ‘어울미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지금처럼 ‘달꼬리섬’인 ‘월미도’가 아니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어을미도(魚乙味島)’, ‘비변사등록’에는 ‘어을미도(於乙味島)’와 ‘어미도(於味島), ‘해동지도’에는 ‘얼미도(孼尾島)’와 ‘월미도(月尾島)’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제물도(濟物島)라고도 했다. 부르기 좋고 의미도 좋은 오늘의 월미도(月尾島)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월미도는 해안선 4킬로미터의 작은 섬으로 해발 105미터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이웃한 영종도와 함께 뱃길로 한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중요했다. 또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로 한강이 아닌 월미도와 자연도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에 머물 거처로 행궁을 만들기도 했다.
월미도는 옛 이름이나 지금의 지명이나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섬은 골골이 아픔으로 가득하다. 가장 큰 슬픔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불바다로 변했던 것과 섬사람들의 기억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섬 주민들은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전쟁 후에는 섬을 떠나 70여 년을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월미도에 행궁이 있었다?
‘해동지도(1750)’에는 월미도라는 명칭과 함께 행궁(幸宮)이 표기되어 있다. 또 인천부에서 발행한 ‘해동지도’에도 행궁(行宮)이 자연도(영종도), 용유목장지처(용유도), 무의목장지처(무의도), 팔미도 등이 그려져 있다. 또 여지도서(1760년대)에도 행궁과 함께 월미도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다만 그림은 조금씩 다르다.
행궁은 왕이 나들이할 때 머무는 임시거처를 말한다. 월미도의 행궁은 왕이 유사 시 영종진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침입으로 강화도 갑곶으로 피신하려다 길을 막히자 남한산성에 들었다가 항복했던 ‘삼전도 굴욕(1637, 인조 15)’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 왕이 월미도 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없다.
행궁에 이어 주목해야 할 부분이 돈대다. 돈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물이다. 월미산으로 오르는 길에 복원한 돈대를 만날 수 있다. 돈대로 유명한 곳은 강화도다. 해안을 따라 능선이나 언덕이나 해안가에 돌이나 흙을 쌓아 설치한다. ‘영종진지도’를 보면 월미도 남서쪽 4부 능선에 둥근 원형의 돈대가 표시되어 있다.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설치한 강화도 돈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조선 고종조에 제물포 인근에 이양선이 출몰하자 화도진, 연희진 등 여러 곳에 포대를 축조했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 극동함대에서 제작한 해도에도 월미도가 등장한다.
월미도의 역할은 자연도와 함께 살펴야 한다. 청의 침입에 대비해 남양에 있던 영종진을 자연도에 딸린 작은 섬(太平巖)으로 옮기고, 자연도라는 이름도 영종도로 바꾸었다. 그만큼 해안방어에서 중요도가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무엇보다 유사시 강화도라는 요새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 확보가 중요했다. 그 길목에 월미도가 자리한 것이다.
열강은 왜 월미도를 탐냈을까
인천은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그래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곳곳에 붙어 있다. 그 처음의 배후에는 월미도가 있다.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 낯선 문화가 곧바로 뭍에 상륙하기보다는 정치나 권력의 관심이 적고 힘이 미치지 않거나 약한 고리가 섬이었다. 그 틈새에서 권리는 물론이고 인권마저도 무시되고 고통을 받는 것은 섬사람이다.
일찍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같은 방법으로 조선의 개방을 요청했다. 일본만 아니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국적의 이양선출현이 그 징후이다. 이들은 대부분 인천항을 기웃거렸다. 한양으로 들어가는 한강수로의 나들목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곧바로 제물포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월미도를 교두보로 이용했다.
일찍 조선을 넘본 일본이나 청나라는 무단으로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짓거나 지으려 했다. 당시 석탄은 군함을 움직이는 동력원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월미도에 아예 군수물자 창고를 짓는다.
당시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도 월미도의 토지를 임대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곳에 석탄창고만 아니라 병원, 사격장, 수도관까지 건설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타운센드 회사도 월미도에 석유 저장고를 구축해 조선의 석유공급권을 차지했다.
1895년(고종 32) 1월부터 8월까지 감영, 감리서 등 지방 관서에서 보내온 첩보를 필사해 엮은 ‘첩보전안’(牒報存案, 1895, 규장각 자료)을 보면, ‘인천항 월미도 등에 미·영·일·러·프 병선’이 자주 출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 정부에 공공연하게 월미도 땅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일본의 ‘租借月尾島地基約單(1891)’, ‘美海軍의 月尾島 小砲鍊習承認要請(1893)’, 러시아의 ‘政府에 月尾島西南址段을 租借하는 契約書(1986)’ 등이다.
일제, 월미도에 아방궁을 짓다
월미도 건너편이 제물포다. 그 사이에서 치러진 제물포해전(1904)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승리한 일본은 월미도를 군사지역으로 지정하고 인천과 월미도를 잇는 군용철도를 만든다.
인천항이 개발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월미도는 군사나 물류수송의 병참기지보다는 경인철도와 연결해 경인지역 일본인을 위한 관광지로 조성을 계획한다.
월미도가 인천과 연결된 것은 1906년이다. 이에 일제는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고, 인천역과 섬을 잇던 철도를 도로 바꾸었다.
1918년에는 북성지구에서 월미도로 왕복2차선 제방둑길이 만들어졌다. 지역의 유력자본을 끌어들여 1923년 ‘월미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탕 ‘월미도 조탕’과 해수풀장을 운영했다. 그리고 여관, 별장, 호텔, 해수욕장, 보트장, 용궁각(요정) 등을 갖춘다. 월미산 자락에는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임해학교(1923)를 설립해 일본애국부인회 인천위원부와 독지간호부인회 인천지부가 일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영, 운동, 오락 등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일본 관리들에 의해 식민사관에 근거해 발간됐던, 인천 역사서인 「인천부사(1933)」에는 월미산 정상에 아타고신사(愛宕神社)가 있다고 기록됐다. 아타고 신사는 인천신사의 경외신사로 1908년 세워졌고, 1929년 9월에 개축했다.
아타고신사는 교토시의 애탕산 위에 있는 신사로 일본 신사의 근본사로 전쟁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다. 신사 입구에는 청일전쟁 때 사망한 일본군을 추모하는 충혼비가 있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는 영종도와 인천을 잇는 영종대교와 강화도로 이어지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가운데 작은 섬이 물치도다. 열강의 외양선들이 출몰했던 현장이다.
월미산 정상 맞은편 언덕에는 예식용 대포인 예포가 복원·설치되었다. 예포는 국가 부대 함정을 공식방문하는 내외국의 국가원수나 고위관리 등이 도착하거나, 군함이 외국항구에 입항하는 등 각종 의례 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군대나 군함이 공포탄을 발하는 예식절차다.
기록에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각국 대사를 맞이하는 포대를 월미도에 설치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월미도는 열강의 다툼 속에 일제가 병참기지로 만들었다가 이후 경인지역 일본인을 위한 유원지로 조성되었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5.군사기지에서 시민공원으로
글 : 김준 박사
현대해양 기사 승인일 : 2023.07.17.
인천 월미도(2)
[현대해양] 해방되면서 일제는 물러갔다. 인천 월미도 주민들은 이제 예전처럼 월미산 자락 보금자리에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제가 점유한 땅과 건물은 적산으로 미국 군정이 차지했고, 집으로 가는 길은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집으로’ 가려는 주민들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지역유지라는 사람들은 ‘월미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 적산 재산을 연합군으로부터 받아서 운영했다. 그마저도 인천상륙작전으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불타는 월미도, 적색해안으로 상륙하다
“크로마이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명’이다. 그날 6시 33분, 미해병이 월미도에 상륙했다. 그리고 8시, 월미도를 탈환했다. 연합군은 월미도를 확보하지 않으면 인천상륙작전은 시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북성포구에서 대한제분을 지나 우측 구석 작은 쌈지공원에는 두 개의 인상적인 조형물이 서 있다.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적색해안)이라는 표지석과 ‘맥아더 길’이라는 표지석이다. 이 길은 내항로를 따라 월미도까지 이어진다. 월미도가 인천항과 이어지는 길이다. 일제가 월미도를 군사기지로, 유원지로 조성할 때 막은 제방이 시작이다.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은 적색, 청색, 녹색 해안으로 구분한다. 녹색 해안은 선발대가 9월 15일 새벽 6시 33분 상륙한 월미도다. 청색 해안은 오후 5시 32분 미추홀구 낙섬사거리 일대로 미 해병대 1연대가 도달했다. 적색 해안인 만석동 부근에는 오후 5시 33분 미 해병 5연대가 도착했다. 이때 맥아더도 인천땅에 발을 디뎠다.
인천상륙작전은 UN 사령관 맥아더 지휘 아래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함대에 7만 5,000명의 상륙군 및 지상군과 장비를 싣고 감행했다. 미국은 225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 한국 15척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미국 본토에서 8월 중순 출발, 일본 고베를 거쳤다. 맥아더를 비롯한 지휘부는 일본 사세보항에서 9월 중순쯤 들어와 덕적도 부근에 집결했다.
문제는 인천의 10m에 이르는 대조차다. 작전을 위해 밀물을 이용해야 했다. 이들은 아침 밀물에 월미도로, 저녁 밀물에 인천 시가지로 진격하는 2단계 작전을 시행했다. 그 1단계가 월미도 녹색 해안 상륙이고, 2단계가 오후 5시 이후 만석동 적색 해안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월미도 화공작전도 계획됐다.
해방되지 않는 월미도
주민들은 마을에 쏟아지는 폭격을 피하려 갯벌로 뛰어들었다. 다행스럽게 물이 빠지고 있었지만 갯벌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네이팜탄으로 인해 섬은 불바다로 변했고, 갯벌에 허우적거리는 주민들은 미 헬기 기총소사의 과녁이 되어야 했다. 빠져나오지 못한 섬 주민들의 안부는 물을 여유도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5일 전이다. 비행기들이 반나절 동안 3차례 95개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조종사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저공비행 하며 기총소사를 했다. 마을은 전부 타버렸고, 시신도 까맣게 탔다. 서로 꼭 끌어안고 죽음을 맞았던 황씨 성을 가진 세 명의 형제자매들의 시신도 발견됐다.
그렇게 미군은 120가구 600여 명이 사는 월미도를 초토화로 만드는 폭격을 감행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초토화 작전에 사용한 네이팜탄은 대량살상용 무기다. 군인이나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를 초토화하는 것이 네이팜탄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천상륙작전의 출발점이다.
1950년 전쟁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연합군이 상륙하여 점령하면서 월미도는 군사 요새 지역으로 바뀌었다. 수복 이후에도 주민들은 그리운 고향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미군과 연합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길목을 막았다. 그사이 미처 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사실은 빠져나올 시간이 없었다), 불에 탄 가족의 시신과 집은 싹 밀어버렸다.
그렇게 땅과 집을 빼앗겼다.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그들은 고향에 돌어갈 수 없었다. 월미도를 미군 제2함대에 인계했기 때문이다.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국방부는 땅을 인천시에 수백억 원에 팔았다. 그리고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되면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주민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은 귀향’이었다. 월미도가 공원으로 개발돼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10월 15일에 이르러서다.
주민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지 70년 만에 첫 위령제를 지냈다. 100여 명의 넋을 위로했으나,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 가족과 친구의 유골은 찾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야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이 모든 일이 의도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 증거로 인천상륙작전 수행 5년 전 1945년 9월 8일 미 제24군단의 한반도상륙 계획을 내세웠다. 당시 일제 군무장 해제를 위해 월미도와 인천에 관한 조사계획서가 남아 있다.
알려진 것처럼 ‘5,000분의 1’ 도박이 아니라, 1945년 데이터를 기초로 언제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야 성공할 것인지를 치밀하게 계산한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에 접안하기 위해 측면과 후방에서 사격할 수 있는 곳이 월미산이었다. 월미산은 요새였다.
시민공원으로 개방됐지만…
전쟁이 끝난 후 원주민들은 여러 차례 귀향을 시도했다. 하지만 번번이 저지당하자 1997년 ‘월미도 원주민 귀향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귀향대책위원회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2008년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으로 월미도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국가가 책임지고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행히 인천시가 조례로 ‘인천시 과거사 피해 주민의 생활 안전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결국 월미산과 월미공원이 우여곡절 끝에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지역주민, 인천시민은 물론 필자처럼 외부인도 찾고 있다. 2001년, 70년 만에 개방된 월미공원 정상부에 월미공원전망대가, 마을이 있던 자리엔 월미공원전통정원이, 소월미도와 마주한 남쪽 지역엔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조성되었다. 이 외에도 둘레길과 산책로 등이 조성됐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반 시간이면 족하지만, 주민들이 월미산에 발을 딛기까지는 반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월미전통공원 자리에 사라진 마을이 있었다. 그 자리에 2021년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가 세워졌다.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원주민 마을 위치)
정용구, 우소시경, 문정숙, 이대수, 이종힐, 황태성, 황성례, 황태환, 추성만, 문이만 외 100명
2021. 10. 5.
인천광역시,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이 위령비는 1950년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 소속 미군의 폭격으로 월미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원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권에 따라 건립하였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0명의 이름도 새겨졌다. 네이팜탄에 까맣게 찬 시신에서 신원을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외 다른 희생자들의 이름은 ‘100’이라는 숫자가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비문 중 ‘유엔군 소속 미군의 폭격’이라는 문구를 삭제하라는 요청도 있다고 한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시민공원으로 조성된 월미산을 차마 오르지 못한다고 한다. 잃어버린 가족이 어느 자락 어느 구석에 묻혀 있을지 몰라서란다. 행여 내가 걷는 걸음이 아버지를, 어머니를, 자식을, 형제자매를 밟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월미공원 안내도
월미공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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