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페니키아의 역사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이다.
페니키아는 셈족으로 B.C.3000년 경에 페르시아만 연안에서
유대 가나안 북쪽에서 시작한
민족으로,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이며, 지중해의 해안지대로,
성경에는 시돈이라는 항구도시가 페니키아를 대표해서 자주 등장한다.
페니키아는 비블로스, 베이루트, 시돈, 사렙타, 티레(레바논), 등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맹의 형태를 취했으며,
거주민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페니키아'라는 명칭은 '자(紫)색의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포이니케오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왜 그리스인들이 이들을 '포이니케오스'라고 불렀냐 하면,
페니키아인들이 고둥에서 나오는 분비액로 값비싼 보랏 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니키아는 B.C.15세기 경, 파라오, 투트모스 3세부터 이집트의 통치를 받아왔으나,
B.C.14세기 경에 히타이트와 아모리인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이집트가 혼란할 때,
독자적인 해양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B.C.1250년 경부터는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약해지면서,
페니키아가 동 지중해 연안과 에게해 연안을 장악했고,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디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페니키아인들은 뛰어난 항해기술과 유리제품 제작 기술,
고둥의 분비액에서 추출하는 보랏빛 염료와 염색 옷감,
시돈에서 생산되던 자수 제품, 포도주, 소금, 삼나무 벌목,
소금에 말린 생선, 등으로 지중해를 누비며 상인으로 살다가,
지중해 연안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귀금속, 상아,
공예품 등을 사고 팔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사용하였으나,
B.C.15세기 경에는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자 체계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리스인들이 이 표기법을 채택하여 오늘날의 알파벳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 페니키아가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시돈이라는 국가로 북 이스라엘의 음녀,
인신제사의 대가 왕비, 이세벨의 국가라는 것이다.
훗날, 페니키아는 B.C.9세기경 아시리아(앗수르)의 지배를 받다가,
B.C.538년 경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B.C.4세기 경에는 그리스의 한 속주로 전락하여 알렉산더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으며,
B.C.64년에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2. 카르타고의 역사
위와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된 페니키아 내부에서 알력 다툼과 시기와 탐욕이 없을 리가
없었다.
페니키아가 한참 잘 나가기 시작할 때, 페니키아의 티레 왕이 그의 여동생 엘리사,
(라틴어로는) 디도와 그녀의 남편의 재산을 탐내어 디도의 남편을 죽였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디도가 북아프리카로 도망을 가서 세운 나라가 바로 카르타고이다.
그 옛날 기원 전에는 지구 상에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A.D.1년 경에 지구의 전체 인구가 약 2억명 정도였고,
A.D.1800년대 세계 총 인구가 10억 명,
현재 A.D.2011년 10월 기준으로 세계 인구가 70억을 돌파했다.
노아와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은 점점 짧아졌다.
B.C.2500년 경에는 세계 인구가 약 1억명,
B.C.5세기는, 터키 서부에서 파키스탄, 이집트, 러시아에 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 수가 1000만 정도였다고 하고,
카르타고 보다도 훨씬 뒤에 일어 서서 번창한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전쟁과
질병으로 로마의 인구가 다 죽고 10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B.C.800년경 카르타고가 세워질 무렵에는 세계에는
인구가 더 적었을 것이다.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평민들은 거의 약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병에 들면 우상에게 빌다가 죽기 일쑤였을 뿐 아니라,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고,
잦은 전쟁으로 지구상의 인구가 적었던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이유는 현대 사회의 학문적 원인이고, 실은 그 뒤에는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따라서 지구 상에는 땅 덩어리가 널널하게 남아돌았고,
현대와 같은 많은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한 국가를 점령하거나 일으키기가 쉬웠다.
또 무엇이든 한 가지만 잘하면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현대 보다는 훨씬 쉬웠다.
디도가 그의 일행을 이끌고 도착한 곳이 현재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의 해안지대' 라고 한다.
북아프리카 해안가에 살던 한 족장은 자신의 왕국에 웬 여인이 난민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고 조롱하듯이
"이 나라의 땅 중에서 황소 한마리의 가죽 넓이 만큼의 땅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
라고 하였다.
이에 디도는 큰 황소 한마리를 잡아서 제물로 바치고는,
황소 가죽을 조심스럽게 실처럼 가느다랗게 잘라서 그녀가 도시로 삼고자 하는
땅에 경계선으로 붙였다고 한다.
자신의 부족들 앞에서 여자의 지혜에 당한 족장은 그 땅을 디도에게 내어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B.C.800년경, 디도는 이 도시의 이름을 페니키아어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의
'카르타고'라고 지었다.
(튀니지, 카르타고 시디 부사이드)
카르타고의 동쪽과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스페인이 있었고,
북쪽 지중해를 건너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해상무역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번창하는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르타고는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높은 언덕이 외부의 침략을 막는
천혜의 장벽 역할을 했고,
바다로 통하는 좁은 통로는 천혜의 항구 역할을 해 주면서
'지중해의 보석'이라고 일컬름을 받았다.
게다가 인공방어 시설 까지 구축하여 이중으로 보호 방벽을 갖춤으로써
북쪽으로는 바다를 쳐들어오는 해적을 막았고,
남쪽으로는 사막에 거주하는 적대적인 부족을 막았다.
카르타고 주변에는 울창한 삼림지대가 넓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기호품과
공업 원료를 단일 경작하는 기업적인 농업 경영 방식인,
대규모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면서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생산하였다.
또 카르타고 시 내부에 이중 항구를 건설하여 한꺼번에 많은 군함과 상선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고 바닷물을 막고 배를 수리할 수 있었던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이미 페니키아에서 익혔던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로 지중해 전역에
엠포리아(교역거점)을 설치하고 상업활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 카르타고의 해군은 지중해에서 가장 막강했으며,
온갖 값지고 아름다운 상품들이 카르타고로 흘러들었다.
아프리카 서쪽 해안지대에서는 동물 가죽과 금, 상아를 실은 배들이,
중앙 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를 들여와 훈련시켜 전쟁과 상업에 활용하였다.
스페인에서는 은, 철, 납, 아연, 수은, 구리를 들여 왔고,
영국에서는 주석을 들여 왔다.
또 그리스에서는 대리석을 들여와 궁정과 신전을 지었다.
카르타고 인들은 이렇게 들여온 자원으로 무기, 모, 단지, 유리제품,
보석제품의 장신구들을 지중해 전 지역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게다가 카르타고 상인들은 타지역에서 가서 싼 값으로 물건을 사와서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면서 해외 경쟁도 유발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카르타고는 B.C.3세기 경에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제도, 스페인 등
지중해 서쪽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독점하기에 이르렀고,
(오렌지색이 카르타고 영역)
프랑스 남부 지방 등과 같은 약소국가들은 위협적인 카르타고 해군과
여러 조약에 묶여서 경쟁에서 배제 되었다.
이 당시에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국가들은 족장 시대로
로마는 아직 미개한 나라였고, 영국과 프랑스도 야만족에 정도 밖에 되지 않았었다.
또한 카르타고는 오늘날의 리비아에서 모로코까지 대토지를 개간하여
기후가 알맞은 토지에서는 곡물을 재배했고, 목장, 포도밭, 올리브 과수원을 만들었다.
강대해진 카르타고는 고대의 다른 국가들 처럼 식민지에서 들여온 노예 노동을 통해서
임금지불이 없었기에 점점 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페니키아에서 들여온 어린아이를 사탄에게 인신제사로 바치는 의식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극심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따르면 카르타고의 고지대인 비르사에
'토페트' 라고 불리는 신성한 구역이 있는데,
현대에서 볼 수 있는 바포멧 상의 청동 조각상에 불을 피워
아이를 던져넣는 제사가 있었다고 한다.
카르타고 지역에 이러한 인신제사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유적지 마다 딱딱한 석회질 조각들이 발견되곤 하는데,
범죄 전문가들이 분석한 결과 어린아이들의 뼈인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카르타고인들은 상당한 부와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었지만,
문화와 예술적 측면에서 이집트, 그리스와 같은 이웃 국가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한 시기는 약 500년 정도로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이후 로마가 등장하기 전까지 카르타고의 유일한 경쟁국가는 그리스 정도였지만,
그리스의 알렉산더 전성기에 그리스인들은 온통 소아시아와
페르시아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카르타고에는 영향력이 약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탄은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충성시키기 위하여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결말은 이생의 멸망과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3.포에니 전쟁과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카르타고는 배를 조종할 줄 아는 해군들이 있었을 당시, 로마는 아직 미개한 국가였다.
어느 날, 카르타고의 배 한 척이 아탈리아 로마 바닷가에 난파되어 떠내려 갔다.
조선 기술이 없었던 로마가 그 배를 가져다가 분해하여 배 만드는 법을 스스로 익히고
항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후 로마는 기원전 3세기부터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점점 힘을 키워나가게 되었고,
카르타고와 패권 경쟁을 할 만큼 지중해로 진출을 노리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중해 해상권을 두고 벌어지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패권은 한 국가가 가져 가는 것이지, 두 국가가 나란히 사이 좋게 장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지중해에서는 드디어 로마와 카르타고가 패권 경쟁으로 맞붙게 되었지만,
그동안 사탄과 연합하여 연륜을 쌓아온 카르타고를 무너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①1차 포에니 전쟁
B.C.264년~B.C.241년까지 시칠리아 섬을 둘러싸고 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였다.
'포에니’라는 말은 로마인들이 페니키아인들을 부르던 말이다.
미개한 국가였던 로마가 시칠리아 섬에 진출하면서 카르타고와 충돌하여 점점 규모가
커진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스'가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를 지휘하였다.
카르타고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당시
이베리아인, 갈리아인, 리구리아인, 발레아레스 제도인 등
용병 2만명을 고용해서 대신 전쟁터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로마에게 패하여 주도권을 잃고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사탄을 숭배하는 카르타고인답게 그들은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카르타고를 위해 싸워주었던 용병들에게 임금 전액을 지불하지 않으려고
거짓 약속을 하는가 하면, 모욕적인 말로 용병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그러자 화가 난 용병들이 카르타고의 인근 농촌 지역으로 들어가서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인간이 취할 수 없는 가장 사악한 행동을 넘어서
흉포스런 광기로 복수하였다고 한다.
카르타고도 자신들이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용병들은 여러 아프리카 부족들을 설득하여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카르타고에 맞선 반란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을 휩쓸었다.
이렇게 되자, 카르타고의 시민들도 역사상 최초로 자신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카르타고인들과 용병들 사이에 임금 때문에 벌어진 전쟁은 끔찍한 잔학 행위로
3년 간을 지속하다가,
B.C.238년에 로마의 전쟁을 이끌던 '하밀카르 바르카스'가 카르타고 외각에 있는
계곡으로 허기와 피곤에 지친 외국인 용병들을 유인하여 코끼리들에게 밟혀 죽게 만들었고
여기서 살아남은 용병들은 성벽 바깥에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이고 전쟁을 끝냈다.
결국 카르타고의 패배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북아프리카 용병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용병들의 국가 또한 당시에는 모두 우상숭배 국가였기 때문에
서로서로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 역할을 하고 징계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게 승리한 로마가 쌩뚱맞게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 용병 전쟁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양측 세력에게 군수품을 팔아먹었다는 점이 뻥찌게 만든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정말 웃끼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꿩 먹고 알 먹은 로마는
B.C.237년에 자신들의 힘을 뻗치기 위해서 사르데냐 섬을 점령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데다 전투에 쓸 군함마저 남아 있지 않던 카르타고는
로마에 맞설 힘이 없어서 사르데냐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로마에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주고 말았다
이에 힘입은 로마는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와 시칠리아를 합쳐서 최초로 로마
속주를 세웠다.
드디어 하나님의 새로운 진노의 막대기, 로마가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 것이다.
카르타고는 빼앗긴 영토를 만회하기 위하여 아직 미개발 되었던 스페인(에스파냐)에 눈을 돌려 스페인(에스파냐)의 천연자원으로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번성한 도시를 세웠다.
그 중에 유명한 곳으로 뉴 카르타고와 바르셀로나가 있었다.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가 성공을 거두자,
로마인들은 지중해 서쪽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두 번째 전쟁을 준비하였다.
②2차 포에니 전쟁
이 전쟁은 B.C.218년에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
한니발 장군이 지휘관으로 탁월한 기량을 보였고 로마인은 한니발 앞에서
무능력하기 짝이 없었다.
한니발 장군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길을 통해 이탈리아를 가기 위해,
B.C. 218년에 보병 9만 명, 기병 1만 2천 명, 코끼리 37마리의 대군을 거느리고
원정에 나섰다.
그 유명한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던
것이다.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패기와 배짱을 펼친 이 전쟁 작전 때문에
한니발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군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000년 뒤 A.D.180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2차 이탈리아 원정 때,
한니발의 방법 대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방법을 쓴다.)
그러나 15일 동안의 힘든 여정 끝에 만년설이 덮인 알프스를 넘었을 때,
그의 군대는 추위에 3/4죽고 보병 2만 명, 기병 6천 명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병사들이 추위에 죽어나갔다.
보병이 9만명에서 2만명으로 줄었고, 기병도 1만2천에서 6천으로 줄었다.
이 미련한 작전이 과연 한니발을 영웅으로 떠받들만한 작전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한니발의 예상대로 로마군은 카르타고 군이 알프스를 넘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의 군사들은 로마군을 기습 공격하였고,
로마의 북쪽을 흐르는 트레비아 강은 피바다가 되었다.
이탈리아로 들어간 한니발은 방화와 살육을 하기 시작했고,
로마는 말을 이끌고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를 대적하였지만,
코끼리의 육중한 몸을 본 말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때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이 머리를 썼다.
강력한 한니발 장군이 로마에 있는 동안,
틈이 생긴 카르타고로 건너가 공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처럼,
로마가 카르타고로 건너가 공격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카르타고로 건너 가야만했다.
드디어 B.C. 202년,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운명을 가른 자마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결전에 앞서 로마 기병들을 정렬시키고 일제히 함성과 소음을 내도록 하였다.
그 소리에 놀란 카르타고 군의 코끼리들이 요동을 쳤고,
그 위에 타고 있던 카르타고 군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때 로마군들은 날렵한 말을 타고 카르타고 군의 코끼리들을 헤치고 다니면서
한니발의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자마 전투의 승리는 치밀한 작전을 세운 스키피오의 것이었다.
그리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스키피오는 자국의 병사들을 알프스 산에서 얼어죽게 만들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한니발은 시리아로 몸을 피했다가 로마에 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전쟁에서 진 카르타고는 로마에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또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여전히 카르타고를 두려워 하였다.
그리고 두려운 카르타고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③3차 포에니 전쟁
B.C.149년 로마가 카르타고를 포위하여 공격을 퍼부었고 카르타고는 3년 만에
스키피오의 양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크게 패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사탄에게 인신제사를 지내는 카르타고를 무척이나
두려워 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탄의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꺼구로 사탄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사탄은 예수님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예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성령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사탄의 힘을 두려워한 로마인들은 시커멓케 타버린 카르타고의 폐허 위에
두려움을 이기기 위하여 저주를 퍼붓고,
풀한 포기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저주를 퍼붓고 소금을 뿌려도 카르타고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탄은 종말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미혹된 사람들을 놓지 않고 물고 늘어진다.
100년이 지난 후에 카르타고는 또 다시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강력한 제국이 된 로마가 지배하는 새로운 패권 아래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넓은 영토를 갖지는 못했다.
이후 A.D.1세기 경에는 로마제국에 완전히 통합되었고, 곡물을 로마까지 운송하는 일을
맡았으며, 나중에는 로마의 황제를 배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제 많은 죄인들을 억압할 로마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사40;17~18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이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첫댓글 사틴에게 드리는 인신 제사는 어느 시대에도 다 있었나 봐요 요즘은 까늫고 인신 제사 드리고 예수님께서도 귀신이 사람 몸에서 나가서 다시 들어올 때에는 일곱귀신들이 같이 들어 온다고 했죠 전 사람 보다 후 사람이 더 심해진다고 했고 마지막 시대가 일곱 귀신 들린 시대가 될거라고 했죠 앞으로는 더 할것입니다 샬롬
어느시대에도 다 있었죠.. 그리고 현대에도 진행되구요. 적그리스도가 인신제사의 악행을 또 저질를 겁니다.
피니키아(시돈)은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입니다.
위 게시글에서 셈족으로 잘못 표기하였습니다.
스크렙 글이라 정정하지 못하는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글에서 정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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