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를 빼고 튀긴 두부를 가른 뒤, 밥을 (만두나 찐빵의 속에 채워 넣는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소처럼 집어넣어 맵싸한 양념장에 찍어 먹는 이 낯선 요리의 이름은 ‘두부밥’. 남한(한국 – 옮긴이)의 떡볶이 같은 북한(조선 공화국. 수도 평양 – 옮긴이)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이다.
(이것은 – 옮긴이) 언뜻 보면 유부초밥과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맛과 향이 난다.
이 생소한(낯선 – 옮긴이) 음식을 처음 접한 건 북한학(조선 공화국학 – 옮긴이)을 공부하던 4년 전쯤(그러니까, 서기 2014년 – 옮긴이)이었다. 당시 북한 인권 단체 활동을 하면서 친해진 탈북 대학생 친구들(조선인 망명자인 대학생들 – 옮긴이)은 내게 종종 장마당(시장처럼 물건을 사고파는 북한의 장터)에서 먹던 두부밥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 친구들은 ‘장마당 세대’였다. (서기 – 옮긴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 사이, 북한의 근간이던 사회주의경제와 배급 체제가 붕괴되고(무너지고 – 옮긴이), (서기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비엣남[Vietnam]이나 서기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제하[諸夏 : 수도 북경(北京)]처럼 – 옮긴이) 새로운 형태의 시장경제 체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 태어난 그들은 시장과 장사에 익숙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와 함께 물건을 팔러 나갔을 때, 다른 지방에 여행 갔을 때, 일하러 갔을 때 등 집 밖에서 먹어온 두부밥은 그들에게 하나의 솔 푸드(Soul Food. ‘영혼[soul]의 음식[food]’. 그러니까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을 이루는, 가장 친근한 먹을거리를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이자, 어린 시절(의) 추억 그 자체였다.
▶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북한의 길거리 음식들
북한의 길거리 음식 종류가 두부밥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찹쌀떡인 ‘앙꼬모찌(일본어로 팥앙금을 일컫는 말인 ‘앙꼬’와, 일본어로 ‘떡’을 일컫는 말인 ‘모찌’가 합쳐져서 그대로 굳어진 말인 듯하다. “항일”과 “민족주의”를 큰 소리로 외치는 나라[조선 공화국]가, 이런 식으로 일본어를 내버려둔 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 옮긴이)’, 김치말이국수, 순대 같은 음식들을 비롯해 밥에 밀가루를 묻혀 튀겨낸 밥완자, 팥소를 넣은 빵을 기름에 튀겨낸 팥빵, 옥수숫가루와 물을 섞어 뭉친 떡에 고물을 묻힌 펑펑이떡, 밀가루 피(겉껍질 – 옮긴이)에 콩이나 견과류를 채워 틀에 넣어 굽는 월병(月餠. 순수한 배달말로는, ‘달떡’이라고도 한다. ‘月’은 ‘달’이고, ‘餠’은 ‘떡’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 콩고기(인조고기[요즘은 한국에서도 채식주의자들이 콩이나 버섯이나 밀가루로 만든 고기를 만들어 먹는다 – 옮긴이])를 불려 속에 밥을 넣은 인조고기밥 등 다양한 음식이 있다. 또한 여름엔 시원한 오이냉국, 겨울엔 뜨끈한 배추시래기된장국에 면을 말아 먹는 다양한 국수 요리도 계절 별미로 꼽힌다.
이런 길거리 음식이 북한에서 인기를 끈 배경에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을 휩쓴 대기근이던 ‘고난의 행군’이 있었다.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식량을 들여오기 위한 장사가 활발해지며 북한의 새로운 경제 체계(냉전시대와는 달리, 개인의 소유와 장사를 묵인하는 체계 – 옮긴이)가 형성되었고,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다양한 음식이 장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싼 가격에 주린 배를 마음껏 불릴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는 두부밥이나 밥완자나 팥빵이 기름에 튀긴 음식이고, 월병과 인조고기밥이 “콩”을 집어넣은 음식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튀긴 음식은 굽거나 절이거나 찌거나 끓이거나 삶은 음식보다 열량이 더 늘어나, 적게 먹어도 배가 부르기 때문이고, 콩은 단백질 덩어리라, 고기나 해산물을 구하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단백질 보충원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 공화국은 서기 1980년대 이후부터 점점 동물성 단백질을 구하기가 힘든 나라가 되기 시작했고, 냉전이 무너진 뒤에는 그 현상이 더 심해졌으며,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옮긴이)은 서민에게 많은 인기를 끌며 발전했고, 그들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한국의 서민 음식 가운데 하나인 떡볶이도, 서기 1958년 이후에야 고추장을 넣은 형태로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 뒤에야 널리 퍼졌다. 이 무렵의 한국은 서기 1990년대 중반의 조선 공화국처럼 가난하고 배고픈 나라였다 – 옮긴이).
(이처럼 – 옮긴이) 북한의 길거리 음식은 ‘오래된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가 담긴 북한의 전통 음식(예를 들면,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나 왕만두 – 옮긴이)’이 아닌, 북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었다(단, 같은 말을 팥빙수나 붕어빵이나 꿀빵이나 찐빵이나 호빵이나 고추장 떡볶이에도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 길거리 음식들도 ‘오래된 갈마가 담긴 한국의 전통 음식’이 아니라, - 서기 19세기 말인 개화기나 서기 20세기 초인 대일 항전기에 일어난 새로운 문물 수입이나, 서기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6.25 전쟁이라는 - 한국 사회의 변화에 따라 생겨난 음식들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조선 공화국의 길거리 음식들은 냉전 이후에야 나타난 것이므로, 냉전 초기인 서기 1945 ~ 1953년에 김일성과 조선노동당과 인민군을 피해 남쪽으로, 그러니까 한국으로 망명한 사람들[고향이 황해도나 개성이나 강원도 북부나 평안도나 함경도인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은 이 음식들이 아주 낯설 것이다.
이는 어떤 두 집단 – 냉전시대에 망명한 이북 사람들과, 냉전 이후에 망명한 조선인 망명자들 - 의 생물학적인 핏줄이나 고향이 똑같다고 해서, 그 문화도 반드시 똑같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시대가, 교육이, 체제가 이 둘을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이 오늘날 한국 시민들과 갈등/마찰/충돌을 일으키는 코리아[Corea]계 제하[諸夏] 인민<또 다른 이름은 ‘재중동포’나 ‘조선족’>이나, 한국 시민들이 어느 정도는 낯설어하는 고려인이나, 일본어는 잘 하지만 한국말이나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지닌 재일[在日] 코리안[Corean]<이른바 ‘재일동포’/‘재일조선인’>이나, 문화나 말이나 인식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라틴계 미국인/미국 백인과 크게 다를 게 없는 한국계 미국인<이른바 ‘재미교포’>을 이해할 때에도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결국, 한 나라 – 또는 체제/사회 – 의 경제가 바뀐 일이 새로운 음식문화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음식/음료수의 갈마는 경제사나 정치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문화사의 일부인 음식의 갈마는 그 자체만 연구하지 말고, 다른 갈마와 견주면서 연구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감자와 옥수수와 고구마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나 에이레[Eire]를 비롯한 유럽과 로[Ro]시야를 바꾼 사실과, 고대에 중앙아시아에서 화북 지방으로 들어온 밀과 보리가 춘추전국시대의 제하[諸夏] 여러나라의 식생활을 바꾼 사실과, 소와 돼지와 양과 닭이 메소아메리카[중앙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바꾼 사실과, 분나[‘커피’의 바른 이름]가 중세 서[西]아시아 사회와 근세 프랑스/오스트리아 사회를 바꾼 사실과, 홍차가 영국 사회를 바꾼 사실과, 초컬릿/코코아의 원료인 카카오가 서양 사회를 바꾼 사실을 연구할 때에도 명심해야 할 사실이다 – 옮긴이)
▶ 남한 속 북한 식당, 북한 속 남한 입맛
북한 현지의 맛이 담긴 길거리 음식들을 판매하는 식당(밥집 – 옮긴이)은 남한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전국 230여 개 시/군/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북한이탈주민(조선인 망명자 – 옮긴이)이 주거하는(사는 – 옮긴이) ‘탈북민 타운’으로도 알려진 인천 남동구에서는 이북(以北. 여기서는 ‘휴전선 이북’, 그러니까 ‘조선 공화국’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 음식 식당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중(그 가운데 – 옮긴이) 단골인 지인의 추천으로 직접 방문한(찾아간 – 옮긴이) 곳은 아파트 단지 근처에 위치한(자리한 – 옮긴이) ‘국화네 가게’였다(다섯 해 전의 잡지기사에 나온 밥집이므로, 지금도 영업하는지는 알 수 없다 – 옮긴이).
이곳은 북한이탈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인조고기밥과 두부밥, 냉면을 비롯해 쉼떡(‘기정떡’, ‘술떡’의 북한말[조선말 – 옮긴이]), 콩떡, 팥빵 같은 별미를 함께 파는 곳이다.
이 식당에 들어서자,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서울말(이자, 한국의 표준어 – 옮긴이)을 쓰는 내(이 기사를 쓴 ‘정지은’ 씨 – 옮긴이)가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지만, 친절한 주인장 덕분에 그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한 토박이를 금세 알아차린 그는 메뉴도, 양도 감을 잡지 못하는 날 위해 설명을 해주었다.
국화네 가게의 두부밥은 인터넷(순수한 배달말로는 ‘누리그물’ - 옮긴이)에서 숱하게 본 두부밥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얇지 않은 두께의 두부피는 입에 넣자마자 폭신한 식감이 느껴졌고, 심심하게 간이 된 밥은 두부도 마찬가지였다.
양념장을 찍어 먹는 방식도 독특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 옮긴이) 탕수육을 먹을 때 ‘찍먹파(“[탕수육의 고기를 소스에]찍어서 먹는 파”를 줄인 말 – 옮긴이)’와 ‘부먹파(“[탕수육의 고기 위에 소스를] 모조리 부어서 먹는 파”를 줄인 말 – 옮긴이)’로 나뉘듯, 두부밥도 마찬가지다. (두부밥을 양념장에 – 옮긴이) 찍어 먹거나, (양념장을 두부밥의 – 옮긴이) 위에 뿌려서 먹거나(조선 공화국의 공민[公民 : 한국으로 치면, 시민]들이 두부밥을 먹는 방법은 그 둘 가운데 하나였다 – 옮긴이).
찧은 마늘과 고춧가루가 들어가 알싸한 맛을 내는 양념장은 조금 맵게 만든 떡볶이 소스(양념이나 국물? - 옮긴이) 같은 맛으로 풍미를 자연스럽게 살리며 두부밥의 맛을 한층 끌어올렸다.
북한에서만 존재하던 음식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밥의 간, 익힘 정도, 그리고 양념장의 매운 정도까지 두부밥의 맛은 우리(한국 시민들의 – 옮긴이) 입맛과 닮아 있었다.
(남북의 – 옮긴이) 통일은 어쩌면 우리의 입안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 부산의 찹쌀순대, 신의주의 돼지국밥
“평양에는 직장인을 위한 냉면 런치(Lunch. 점심 – 옮긴이) 세트가 존재할까?”, “신의주의 젊은 사람은 숙취가 심할 때 순댓국으로 해장을 할까?” 같은 질문들일지라도, 누군가의 문화를 알아가려는 호기심과 노력은 결국 서로의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그런 뜻에서 – 옮긴이), 남한 사람들이 북한의 일상 음식을 접하고,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일상 음식을 접하는 기회가 앞으로 더 많아지길 바란다.
(슬프게도 – 그리고 절망스럽게도 – 이 기사가 나온 지 다섯 해가 흐른 지금은 [전자는 가능하지만] 후자[그러니까, 조선 공화국의 공민들이 한국의 일상 음식을 접하는 기회가 더 많아질 가능성]가 사실상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이른바 “남조선”, 그러니까 한국의 대중문화를 접한 조선 공화국 공민은 사형에 처하거나 수용소로 보낼 수 있게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흥선대원군처럼 쇄국을 더 굳게 지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그런데 그런다고 젊은 공민/인민들이 더 ‘착해질’ 지는 의문이다. 목숨 걸고 반항하거나, 달아났으면 달아났지, 과연 순순히 따르려고 할까? 이웃 나라인 제하(북경)에서도 ‘한족(漢族)’ 인민들이 자기나라 공산당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고, 그들의 ‘우방’인 비엣남(Vietnam)도 공산당의 1당 독재에서 “다당제”를 바탕으로 삼은 공화국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데, 조선 공화국만 그 변화를 피해갈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건 웃기는 이야기다].
나는 말로는 ‘조국과 우리민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과 자기 동료들[다른 조선노동당 간부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감옥이나 수용소로 만드는 그를 볼 때마다, 젊은 시절에 총을 들고 조선의용군이 되어서 일본군과 목숨 걸고 싸웠고, 해방 이후에는 제하[자칭 ‘중화인민공화국’]로 망명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모택동/김일성의 독재를 비난했으며, 그 때문에 옥살이를 하셨고, 말년에는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루마니아의 독재자인 차우세스쿠 부부에게로 보내 버려야 한다!”고 딱 잘라 말씀하신 김학철 전 조선의용대 분대장님의 말씀에 천 번 만 번 공감한다.
분명히 말하겠지만, 평범한 한국 시민인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은 평범한 조선 공화국의 공민/인민들 – 그러니까, 평양특별시와 황해도와 개성과 강원도 북부와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보통 사람들 – 과 조국에서 달아나[또는 떠나서] 살고 있는 조선인 망명자들이고, 서기 1949년[김일성이 조선 공화국을 세운 해] 이전에 그 땅에 살았던 조선 공화국 공민들의 선조[조상]고, 그들의 전통문화나 생활문화고, 그들의 말이고, 그들이 연구한 상고사/고대사/중세사/근세사/(서기 1919년 이전의) 근대사지, 조선노동당이나 인민군이나 주체사상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광복군을 부정/비난하는 조선노동당의 주장이나, 그들의 무신론은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 옮긴이)
그러다 보면 언젠가 부산에서 정통 찹쌀순대(원래는 조선 공화국의 음식이고, 주션[한자로는 ‘여진(女眞)’으로 불리는 민족의 바른 이름]족의 음식에서 비롯되었다 – 옮긴이)를, (평안도에 있는 – 옮긴이) 신의주에서 할머니 원조 돼지국밥(경상남도의 음식이다 – 옮긴이)을 먹을 날이 머지않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만 … 그렇게 되려면 먼저 한국 안에서 윤석열을 비롯한 친일파들을 확실히 청소하고 미국 정부와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되찾아오며, 그 다음 조선 공화국이 한국과 국제사회의 압박[변화를 요구하는 일]을 받아들여 지금까지의 모든 쇄국정책과 1당 독재와 인권탄압과 선군정치를 포기하고 공식으로 남북 간의 종전선언[휴전일 뿐이라서, 법적으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6.25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는 일]을 한 뒤, 한국과의 경제교류나 투자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못해도 서기 1919년 이전의 배달민족 갈마에서는 두 체제[한국과 조선 공화국]가 ‘합의점’을 찾아야 할 테고, 전통문화와 민족주의와 갈마에서 두 체제 안의 사람들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모든 일을 하지 않고서는 글쓴이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무력통일이나 휴전을 깨뜨리는 일은[둘 가운데 어느 누가 먼저 시작하건] 한반도/조선반도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짓이 될 것이므로, 이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 옮긴이).
- 『 빅 이슈 코리아 』 지 제 188호(서기 2018년 양력 10월 1일)의 기사(‘정지은’ 씨의 글)
- 단기 4356년 음력 2월 15일에, ‘비록 김정은과 조선노동당을 비난하더라도, 그것이 평범한 평양 시민이나 조선 공화국의 생활문화나 서기 1949년 이전에 휴전선 이북에서 펼쳐진 갈마/전통문화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둘(체제와 공민/인민)은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