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서기가 가장 괴로웠던 사도는 아무래도 베드로 사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창 잘 나가실 때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노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배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 사도였지만, 그도 인간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순식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아차 하고 크게 후회하며 상심했지만 이미 차는 떠나고 난 뒤였습니다.이런 베드로 사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심오하고 의미심장하면서도 다양한 복선이 깔린 질문 한 가지를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과거의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를까요?
지난 시절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불림을 받은 베드로, 그는 또 다시 사도단의 수제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잘 나가던 시절’, 예수님께서 죽었던 사람마저 살려내던 시절 베드로 사도까지 덩달아 어깨가 우쭐해졌습니다.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기고만장해졌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가치는 안중에도 없고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에 맛을 들여갔습니다.
그 최종적인 결과가 치욕적인 ‘수제자 3번 배반 사건’인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너의 근본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원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별 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러나 내가 너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기에 너를 선택했고 수제자로 불러준 것이지 않느냐? 너는 나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이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명심해라,
제발 앞으로는 나대지도 말고, 우쭐거리지도 말고 겸손해라는 의미에서 과거의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안 그래도 송구스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데, 다른 사도들도 보고 있는데, 한번만 질문하시면 될 텐데, 뭐 유치원생도 아니고 왜 같은 내용의 질문을 3번씩이나 거듭하셨겠습니까?
제가 예수님 입장이라면 베드로 사도를 앞에 놓고 제대로 한번 혼쭐을 냈을 것입니다. “어이, 베드로,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네가 수제자 신분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날 모른다고 하고 말이지. 그래놓고 너 지금 내 앞에서 지금 밥숟가락 들고 있는 거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냐?”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혼내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 반복을 통해 우회적으로 ‘배신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배신에 따른 깊은 바닥체험을 은근히 상기시키시며 진정한 회개를 통해 참 제자로 거듭나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배신 이후의 베드로 사도, 배반자 유다가 느꼈던 똑같은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수치심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유다와 똑같은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셀 수도 없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지만 끝까지 견뎠습니다. 끝도 없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 자비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은혜롭게도 진정한 수제자로의 거듭남이었습니다. 드디어 제자 중의 제자, 가장 겸손한 수제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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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불멸의 사랑,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 충실한 사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복음 21장 15절)
예수님과 수제자 베드로가 한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두 분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는 이 대목을 묵상할 때 마다, 혼자 속으로 ‘큭큭’ 하고 웃기도 합니다. 이팔청춘 연인 사이도 아니고, 시커먼 남자들끼리, 진지하게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니 말입니다. 정말이지 보편적이거나 통상적이지 않은 장면입니다. 제가 스승 같았으면 아마도 이렇게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아니면 “존경하느냐?” “지지하느냐?” “추종하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묻고, 수제자는 정말이지, 사랑한다고 세 번씩이나 꼬박꼬박 대답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대목에서의 사랑은 우리 인간의 머리 속에 떠올리는 그런 세상적 사랑, 인간적 사랑, 찰라적 사랑, 육적인 사랑을 훨씬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한 차원 높은 사랑, 보다 고결하고 순수한 사랑, 결국 영적인 사랑, 신앙 안에서 사랑, 주님 안에서의 사랑, 크고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남녀 사이 뿐만 아니라, 스승 제자 사이, 부모 자식간에, 동료들 사이에서도 가능한 것임을 새삼 확인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은 언제나 확장지향적이라는 것, 언제나 보다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국가와 민족. 성별과 출신 배경, 가치관과 이념조차도 뛰어넘을수 있는 사랑, 결국 원수조차 사랑할수 있는 그 사랑이야말로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사랑입니다
요즘은 과거보다도 훨씬 이념이나 사상, 지향하는 가치관에 따라 극한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입니다. 때로 극한 대립을 이루고 있는 두 부류 사이에, 도저히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듯 한 느낌도 듭니다.
때로 속상하고 불쾌하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큰 사랑을 생각하며, 또 다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정 반대쪽에 있는 상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품어안을 수 있는 큰 사랑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마치 ‘로또같은 그 분!’ 왜냐하면 로또가 잘 안 맞듯이 모든 점에서 나와 죽어도 안 맞는 그분 안에서 현존하시며, 시몬 베드로에게 던지셨던 똑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사도는 인간적 사랑이 우리의 눈길을 확 끌며 몰두하게 하는 좋은 것이기도 하고, 황홀한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만나면서, 그간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대대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베드로 사도는 주님 앞에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인간적 사랑, 세상적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 세월 앞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필연코 퇴색된다는 것, 안타깝게도 그 사랑이 변하고 떠나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언젠가 세상의 사랑이 끝나갈 무렵 고맙게도 영원한 사랑, 용광로보더 더 뜨거운 주님 사랑이 찾아온다는 것, 그 사랑은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불멸의 사랑,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 충실한 사랑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 절절한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했던 베드로 사도였기에, 오늘 주님 앞에서 용감하게 세번씩이나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꼐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복음 21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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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 나를 사랑하느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주연의 짐 카비젤의 간증이 SNS나 유투브를 통해 많이 시청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삶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예수님의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수님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그대로 맛보았습니다.
며칠 동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살이 많이 빠졌고, 채찍을 맞을 때는 실제로 30센티 정도가 찢어졌으며, 십자가 위에서는 심장이 멎고, 번개까지 맞아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자신이 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탈혼이든 죽음이었든 간에 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처럼 죽음에 다다랐고, 함께 있었던 많은 이들이 그의 머리에서 빛이 솟아나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가 채찍을 맞을 때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해야 했던 예수님을 떠올리며 죄를 뉘우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에서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고통이 있었는데, 의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쉬지 않고 영화를 찍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으로라도 영혼을 더 구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직접 느껴봄으로써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거든 당신 양떼를 잘 보살피라고 하십니다.
양떼는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교회는 그 양떼를 맡아서 돌보는 일꾼들입니다. 그 일꾼들이 주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양떼를 잘 돌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주인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분이 맡겨주신 것도 소중하기에 열심한 마음으로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양떼가 항상 말을 잘 듣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힘든 일을 해나가야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제게도 유학생활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원해서 유학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일을 시키는 하느님도 교구도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이 긴 유학생활을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언어공부, 학과공부 등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저의 결정은 ‘매일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한 무엇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만큼 나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조금 더 가볍게 질 수 있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이태리어 버전 10권을 구입하였습니다. 저를 신학교에 오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태리어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단어들이 어려워서 한 페이지를 읽는데 일주일은 족히 걸린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너무 별것 아니라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을 조금씩 더 사랑하게 됨에 따라, 그분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의 무게가 더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니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분을 위해 무언가를 해 드린다고 생각하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됨에 따라 그분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이 훨씬 더 큰 사랑임을 깨달을 때는 그분을 위해 하는 나의 모든 행위들은 아주 작게만 느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들을 맡기려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할 것을 먼저 요구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어려움에도 힘들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을 잘 돌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도 힘이 든 것은 그것을 맡겨주신 그분을 그만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차피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면, 그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나머지는 덤으로 얻고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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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5-19 :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절)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다른 사도들을 제쳐 놓고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그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선택된 이며 제자들의 대변인이며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도 조언을 구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 베드로를 찾아간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다른 사도들보다도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같은 곳) 하고 대답하였다. 십자가의 처형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한(마태26,69-75 참조) 분을 세 번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세 번 사랑한다고 고백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스도께 무슨 이익을 드리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오직 베드로를 위한 것이다.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6.17절)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을 세 번 하셨다. 주님의 양떼를 믿음의 음식으로 잘 돌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의 낙인(烙印)이 찍힌 주님의 양들을 돌보아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양들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 사목자들의 머리이신 분이 베드로를 사목자로 만드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양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 구원하신 양들이므로 베드로도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림을 말한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다. 이것은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바로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똑같이 숭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숭배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베드로는 쟈니꼴로 언덕에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19절)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처음에는 그들을 가르치시려 부르신 것이고, 지금은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고난당하는 이에게 영예이며 영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주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하는 위치라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되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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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앙갚음하셨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배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가 슬퍼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부인하였던 사실을 떠올리며 회개하였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하셨다기보다는, 당신을 향한 사랑을 굳건하게 하시며, 확고한 다짐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베드로가 대신 당신 양들의 목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목자 없이 남겨질 어린양들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바라보고, 양들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어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양들을 돌보는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히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를 앞세우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고, 우리를 공동체에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굳건히 하고 주님의 양을 돌보려고 떠나는 그런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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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베드로>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은,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는 몹시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아픈 일이어서 어쩌면 그는 그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복음서 저자들이 그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의 회개와 솔직함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0-62)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셨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시선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은, 또 베드로 사도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장면은 복음서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비록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한 일이지만, 또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대로 된 일이지만,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예수님께 큰 상처를 드렸음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라는 말은, 베드로 사도의 통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 ‘밖으로 나가’ 라는 말은, 겉으로는 자기를 추궁하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나간 것을 뜻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갔음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눈빛으로 베드로 사도를 바라보셨을까? 분노나 미움의 눈빛은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고, 안타까움, 연민, 사랑, 위로, 당신의 제자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런 슬픈 눈빛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입장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빛을 기억할 때마다 몹시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얼굴에 깊은 고랑이 생길 정도로 평생 날마다 울면서 통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사도들 중에는, 또는 신자들 중에는 베드로 사도가 한 일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 여전히 유효한가?', '그가 자격을 잃은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일은, 베드로 사도의 잘못을 추궁하려고 그러신 것은 아니고, 당신이 이미 그를 용서하셨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교회 공동체에 확인시켜 주심으로써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한 일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음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의 소명을 다시 깨우쳐 주기 위한 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고,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당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회개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고, 죄를 지음으로써 손상된 사랑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다시 처음처럼 사랑하는 단계까지 가야 회개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계시지만, 그 사랑이 당신만을 향하기를 바라시지 않고, 당신의 양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실행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은 잘못한 일에 대한 보속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모든 신앙인에게 적용하면, ‘이웃 사랑 실천’은 ‘회개와 보속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회개한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
이 말은, “사랑은 신앙생활의 완성이고, 회개의 완성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를 덮어 준다.’는 말은, 죄를 감추어 준다는 뜻이 아니고, 죄를 씻어 준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회개하고, 또 진정한 ‘사랑으로’ 보속하면, 누구든지 용서받고, 죄에서 벗어나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고, 사랑 없는 보속은 보속이 아닙니다.)
또 베드로 사도는 편지에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1-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은 악의적인 배반은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함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일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를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나는 이미 맛보았습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사랑을 세 번이나 확인하신 일은, 실제로는 당신의 ‘큰 사랑’을 다시 확인해 주심으로써 그의 ‘다친 영혼’을 치료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상처를 드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성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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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나궁렬 요셉 신부님]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사랑하느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장담을 하던 베드로였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베드로는 죄와 허물이 많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틈만 나면 하느님 곁을 떠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첫 마디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그분은 베드로의 잘못을 책하지 않으셨다.
나는 40일의 피정을 한 적이 있다. 마지막에 그분을 감히 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데 내가 만난 그분은 나의 과거를 알고 계셨고 놀랍게도 40년 전 내가 당신을 애타게 찾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나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누었던 사랑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세상의 부모들을 보라. 자녀들이 자라면서 잘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기껏해야 “네가 자랄 때 내 속을 좀 썩였느니라”가 아닐까?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마태오의 아들 요셉아,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느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고백을 하는 베드로가 무척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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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님]
<무사유(無思惟)는 위신적 신앙으로 인도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제1,2차세계대전과 세계사적 사건을 겪으며 사회적 악과 폭력을 사상적으로 분석하고 통렬히 비판한 인물이다.
그는 1960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치하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유다인 학살을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던 사람이다.
당시 법정에 선 아이히만한테서 사람들이 보려 했던 것은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이요,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을 받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충격적인 아이히만의 모습에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문제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의 사람이라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무사유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깃들 수 있는 '평범한 악'이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슬펐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슬프게 했을까? 예수님이 당신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예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30)라고 고백했지만 곧이어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했을 때 그분을 꼭 붙들며 반박했기 때문에 사탄이라고까지 비난받은 적이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삶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던 경험이 있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향한 사랑이 구체화되도록 세 번의 말미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삶 안에서 얼마나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 생각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사유의 신앙, 무사유의 사랑은 위선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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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우리는 흔히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는 스포츠 팀을 보며 “저 팀은 하나가 되었다”라는 말을 합니다. 요즘 프로야구를 보면, 예년과 달리 선수들의 유니폼에 이름을 쓰지 않고 선수 고유의 번호만 새겨놓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개인의 이름보다 “하나의 팀으로서의 화합”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처럼 단체 스포츠, 즉 축구나 야구 같은 경기는 “팀이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흔히들 이야기 합니다. 어떤 특정한 선수가 혼자 잘한다고 해서 그 팀이 우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로 예를 들면, 골키퍼와 수비수는 상대방의 공을 잘 막아야하고 미스필더는 상대의 공을 낚아채 공격수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또한 공격수들은 골을 잘 넣어야 하며 다른 공격수에게 공간이 생기도록 상대 수비수를 유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역할이 잘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이 팀이 하나가 되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오늘 복음은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즉, 십자가의 길을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드리는 기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오늘 복음에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제와 그저께 복음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기도가 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특별히 오늘의 복음에서는 이 기도의 대상이 더욱 크게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 즉 제자들 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리고 곧이어 기도의 핵심적인 부분이 드러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결국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공동체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앞서 축구를 예로 들어 말씀드렸듯이 단체가 함께하는 운동은 어떤 선수 한 명이 특정하게 잘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습니다. 공격수가 아무리 골을 넣어도 수비수가 상대를 막지 못하면 이 팀은 지게 되어있습니다. 수비수가 아무리 상대를 잘 막아도 공격수가 골을 넣지 못하면 그 팀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적재적소에서 함께 힘을 합쳐야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가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역시 그렇습니다. 나 혼자 사랑을 실천한다고 만족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결코 더 나아질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사랑은 타인에게 전해져야 하고, 그것은 적재적소에서 모범이 되어 세상을 더욱 하나 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강요가 아닌 모범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봉사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의 개념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랑이란, 나 자신만의 내면적인 마음가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퍼져나가게 하는 향기와 같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가까운 이웃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발견되고 선교의 의무 역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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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고백>
요한 21,15-19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사랑고백>
당신은 내게 주십니다
당신의 사람을 나의 사람으로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고백입니다
내 곁에 항상 당신의 사람인 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고백은 항상 참됩니다
나의 사람은 당신의 사람입니다
나의 사람을 당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때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고백은 시작됩니다
당신의 사람인 나의 사람을 사랑할 때에 오직 그러할 때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고백은 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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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주님, 아시지요...>
제가 보좌 신부 3년차를 끝내고, 첫 주임 사제로 광주 월산동에서 사목을 하였습니다. 첫 미사 날부터 제가 그 본당을 떠나는 날까지 항상 성전 앞자리 앉아서 미사를 봉헌하셨던 백발에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아내를 잃고 혼자되어 외동딸을 하나를 키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딸은 그 아버지의 전부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딸이 사랑스럽습니다. 그 딸도 아버지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대학에 들어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딸은 자기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는 그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딸은 그 사람 때문에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 아프리카로 떠나려고 합니다. 딸은 그 사람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딸이 수녀원에 입회할 때.. 아버지는 너무나 슬퍼서 통곡하며 소리를 쳤습니다. “도대체, 나의 딸을 내 품에서 데려간 예수가 누구요? 예수가 나보다 내 딸을 더 사랑하였단 말이요?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요.. 왜냐하면, 내 딸 가슴에 사랑에 불을 지른 것은 사람의 짓이 아니라 하느님의 짓이기 때문이요.”
이 이야기는 어르신의 딸이 수녀님으로 아프리카 선교를 하다가... 휴가차 한국에 와서 주일 미사 중에 고백했던 이야기입니다. 그 수녀님은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아버지의 말을 기억했답니다. “내 딸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후에 당신을 세 번 부인한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베드로는 상처투성입니다. 병든 사람입니다. 믿음과 사랑도 희망도 용기도 자존심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병들고 상처받아 지친 영혼을 향하여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즉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그 한 마디로 만족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양들을 돌보아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여 허기지고 지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추운데 불을 피어놓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몸을 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야단은 뒤로 하고, 먼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다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고운님들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고운님들! 힘들고 어려울 때,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시기를...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는 줄을 알고 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그 주님의 사랑으로 상한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은혜가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오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를...그리고 고운님들은 오늘 우리 주님을 붙들고 갚을 길 없는 큰 은총 베풀어주셨음에 감사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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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181)
♧♧ 시편 36편 2절... “악인은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죄악을 즐긴다. 그의 눈에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는 빛이 없다.”
이 구절을... ‘악인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게 스스로 말하기를 하느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라고 다르게 번역하기도 합니다. 한편 여기서 ‘죄악...’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페솨’는 ‘반역죄’를 뜻합니다. 이는 결국 하느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단순히 그분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섭리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시편 36편 3절... “그는 오히려 죄 거리를 찾아내고 마음을 일삼으려 자기 눈앞을 잘 닦아 놓았다.”
이 구절에서부터 5절 까지 에서는 하느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의 죄악 된 실상을 어떠한 것인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잘 닦아 놓았다...’라는 ‘매끄럽게 하다.’라는 말로서 ‘아첨하는 행위’ 나 ‘위선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악인들이 자신들의 악행에 대하여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범죄 하는 위선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저들이 은밀히 행하는 죄악까지도 다 지켜보고 계시니 하느님의 최후 심판 날에 저들이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코헬렛 12장 14절. 로마서 2장 16절. 참조)
(내일은 시편 36편 4-6절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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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살아오면서 후회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아닐 수가 없지요.
부족함과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후회에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 교수는 후회를 다음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한 일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로 말이지요.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후회라면 어떤 후회를 해야 할까요?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다 해도 ‘그래도 가치가 있었어.’라고 말하면서 얼마든지 정당화시킬 수 이유를 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정당화할 수 없게 되지요.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게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계속 생각합니다. 그 후회가 언제까지 가게 될까요? 죽기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결국 어차피 후회할 것이라면 ‘한 일에 대한 후회’를 남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변화의 가능성을 담고 있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변화의 가능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판단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는 계속된 후회를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폭력조직에 들어가서 죄를 짓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형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괜히 멋있어 보여서 젊어서 들어갔던 폭력조직에서의 생활이 평생 가는 후회를 만들었다면서 제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따라서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후회라면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외에는 ‘한 일에 대한 후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어떨까요? 세상 일이 더 중요하다면서 주님을 멀리하면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하겠다고 말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의 대부분은 결국 후회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차례 던지시지요.
이 부분에 대한 성경 주석은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무효화 시키는 것이었다고도 이야기하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나를 따라라.”
솔직히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아서 후회하는 분들은 많이 있지만, 주님을 믿고 따라서 후회된다는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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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격지심(自激之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적심허(做賊心虛)’라는 말도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과 의미가 비슷합니다. 카인은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한 제물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동생 아론이 바치는 제물을 부러워하였습니다. 동생에 대한 자격지심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승리를 부러워하였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자신의 승리이며, 다윗의 영광은 곧 자신의 영광임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에 대한 자격지심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격지심 때문에 본인은 물론, 가족과 이웃들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부정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은 손에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정의와 심판의 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허물을 애써 감추려는 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감추면서 타인에게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독재자라고 하기도 하고, 5.18의 정신을 부정하기도 하고, 신북풍’을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도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타인의 작은 허물을 애써 들추곤 하였습니다.
자격지심과 주적심허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들의 작은 꽃도 사랑하시고, 하늘의 새도 사랑하시고, 흘러가는 구름도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잘못했어도, 허물이 있어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허물이 있어도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였습니다. 한 자매님의 국에서 ‘동전’이 나왔습니다. 자매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국에서 동전이 나왔으니, 이번 여행에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품어주는 자매님의 모습에서 깊은 ‘내공’이 느껴졌습니다. 죄송해하는 직원에게도 위생관리를 좀 더 철저히 하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3번이나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양을 잘 돌보아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대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짐을 주는가?’라는 생각은 영적인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생각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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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기도, 사랑, 추종-
어제도 단비같은 손님이 저를 찾았습니다. 50대 중반의 41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의 네 제자들입니다. 바쁜 중에도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시 하느님 보내 주신 단비같은 선물이었습니다. 아삭 웰빙 단무지도 선물로 받았습니다. 가장으로 직장인으로 신앙인으로 충실한 제자들의 삶이 자랑스러워 모두 성공적 인생이라 격찬했습니다.
어제 또 하나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계속되는 가뭄입니다. 대지의 가뭄은 문제를 삼는데 왜 영혼의 가뭄은 문제 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거여동 성당 형제자매님들 24명 하루 피정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순수하고 열정 가득한 분들이였고 강의는 물론 미사 강론 주제도 기도였습니다,
“화초에 물주지 않으면 시든다. 사랑하는 이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기 마련이다. 기도도 똑같다. 영혼에 기도 물 주지 않으면 영혼도 시든다. 사랑하는 주님도 기도로 자주 만나지 않으면 주님도 멀어지기 마련이다.”
평범하지만 너무 자명한 기도의 이치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가뭄에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하늘로부터의 단비처럼 어제 하루 피정이 오후 미사로 끝날 때쯤 찌푸렸던 하늘이 비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반가워 버스에 탑승하여 떠나기 직전 급히 피정팀 대표분에게 다가가 다음 말을 전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오늘 피정은 하느님이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바로 기도는 지금 내리는 비와 같습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단비처럼 메마른 영혼을 적시는 단비같은 기도입니다.”
짧은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는 단비가 새벽까지 밤새 계속 내리니 대지는 촉촉이 젖었고 가뭄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세상은 들떠 있고 어수선해도 하느님은 묵묵히 차분히 부지런히 할 일을 다하십니다.
엊그제 많은 앵두를 땄고, 어제 산책중 보니 매실도, 살구도, 배도 열매 가득 달렸고 올해는 과일도 풍년일 거라는 예감도 듭니다. 눈만 열리면 차고 넘치는 하느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마침 초록빛 열매들을 보고 쓴 글을 나눕니다.
-얼핏보면 모른다/잎도 열매도 다 초록빛 동색이다 겸손의 수련이다/초록빛 겸손이다/기도의 수련이다 가을 때 되어/사랑의 겸손으로 익어야 제 본래/색깔의 열매들이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베드로이고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바오로입니다. 역시 교회의 양대 기둥인 베드로, 바오로가 나란히 오늘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 두분의 예수님 사랑을 능가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전 세 번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평생 화두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기도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사랑 실천의 힘도 나옵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느냐 확인하신후 대동소이한 답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주님 사랑의 진정성이 검증되는 형제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는 형제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당신을 사랑하듯 당신 양들인 형제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행의 동사입니다.
돌보고care, 섬기고serve, 주고give, 받쳐주고support, 나누는share 실천 동사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항구한 실천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영혼을 하느님 사랑의 단비로 촉촉이 적시는 기도입니다. 이어 주님은 베드로의 순교까지 예언하십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주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이 바로 순교입니다. 이어지는 복음의 결론 같은 주님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우보천리, 항구히, 충실히, 묵묵히 우직하게 소처럼 따르는 실천 동사의 사랑입니다. 막연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고 받쳐주고 나누고 주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혼자 단독으로 추상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형제사랑의 실천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그런 형제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기도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은 주님을 배우고 닮아 주님처럼 사랑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성령 충만한 삶에 사랑 실천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계속되는 바오로의 고초를 통해 그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 깨닫습니다. 페스투스 총독의 바오로에 대한 판단이 참으로 공정하고 지혜롭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페스투스입니다.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페스투스의 말을 통해 바오로의 예수님 부활 신앙을, 사랑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바오로에게 너무나 자명한 체험적 사실이자 삶의 원동력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성령의 은총으로 항구히 주님을 사랑하여 따를 수 있고 형제 사랑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한결같이 당신과 형제들을 사랑하며 항구히 당신을 따르도록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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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좌절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배반을 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 번의 사랑고백이 우리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공생활 동안 하셨던 목자로서의 사명을 베드로가 이어받게 하셨습니다. 양들을 돌보는 고귀한 임무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함께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 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을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만남이 사랑 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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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복음은 사랑 고백에 관한 요한복음의 아주 유명한 부분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세 차례 물음에 베드로가 응답하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미사 초입의 입당송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라고 문을 열고 있네요. 복음에 나올 베드로의 사랑 고백보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임을 일깨우며 미사를 시작하는 듯합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사랑에 들어가기 전에 제1독서를 먼저 흝어봅니다. 카이사리아의 신임 총독 페스투스의 눈에 비친 사도 바오로 관련 이야기로 그의 말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사도 25,19)
제3자의 눈에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열정의 사도 바오로의 문제가 딱 그 정도입니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고 냉랭하기까지 한 그의 보고에는 온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떤 온기도 물기도 배제된 견해일 뿐이지요. 누구라도 아직 하느님과,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라면 페스투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분명 다르게 이 사안을 보고 또 서술했겠지요.
복음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독서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밤새 헛그물질로 지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음식으로 아침을 막 들고 나서의 대화이니 이미 애정과 충만한 만족감, 감사가 넘치는 중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세 번의 물음이 예수님을 세 차례 부인한 베드로의 과오를 기워갚도록 하신 배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이 베드로의 미안함과 죄의식을 치유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리 하시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추궁이나 보속의 부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의도일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단순하고 담백한 질문에 비해 베드로의 대답은 좀 복잡합니다. 그냥, "예, 사랑합니다 주님!" 하면 좋겠는데 자꾸 앞뒤로 부연 내용이 붙습니다. 당신이 이미 아시지 않느냐며 길어지는 대답은 즉각적인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자칫 말대꾸 같이 느껴질 위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다"라는 동사보다 "알다"라는 동사에 더 강세가 부여되어 힘도 좀 빠집니다. 또 "사랑하느냐"(love)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좋아한다"(like)로만 응답을 합니다. 두번째도 똑같이 응답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강도를 낮추어 "좋아하니"(like)로 물으시어 베드로의 자신없는 사랑고백의 눈높이에 맞추어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왜 그렇게 자신 없어 했는지 영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죄 중에 있을 때, 주님 앞에 서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느낄 때, 죄의식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를 때, 원죄 이후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 눈을 피해 공간적으로 숨지는 못하지만, 변명과 딴청과 실없는 말로 숨어버린 경험이 있다면, 즉답을 피해 빙빙 말을 돌려본 적이 있다면 지금 베드로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서 더 짜안~ 하고요.
하지만 사랑 여부를 묻는 이들 사이에는 적어도 온도가 있습니다. 관계가 있고 연대가 있지요. 이미 유형 무형으로 맺어진 끈끈한 결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3자나 관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이라면 상대의 사랑스런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올 때까지의 몇 초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답답하고 긴장되는 초조한 순간인지를 잘 알 겁니다. 사랑을 묻는 이의 진심에는 기대가 묻어 있고,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구걸에 가까운 바람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으시는 이 순간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사랑을 기대하고 청하고 더 나아가 구걸하기까지 하는 어마어마한 순간입니다. 구약의 역사 내내 당신과의 사랑에서 등을 돌린 이스라엘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하다가, 사랑이라는 본성 상 제풀에 꺾여 다시 그들을 품어 주셨던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 당신 아들의 입을 빌어, 특별히 믿고 아꼈지만 당신을 부인했던 수석 제자에게 다시 겸손히 사랑을 물으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따사롭고 감미로운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세 번 "사랑"을 물으시고, 세 번 어징쩡한 "응답"을 들으시고, 세 번 "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이 당신 양들을 위한 사랑으로 옮아가야 함을,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양들과의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랑은 멈춤 없이 고이지 않게 흘러야 하고 번져나가야 하니까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이처럼 완전의 숫자 3만큼의 횟수로 세 차례씩 질문과 응답과 당부가 오고간 뒤 비로소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베드로에게 부여될 "직무"에서 베드로 "개인"에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내가 맡기는 내 양들을 잘 돌봐 달라는 부탁, 당부 명령에는 사명과 책임이 깔리기 마련이라,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상대방 인격과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옅어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서야 "따름"을 언급하신 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서 그랬을 겁니다. 질문과 응답과 당부를 거친 뒤에 비로소 깨우칠 수 있는 본질이 담겨 있기에 그럴 겁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예수님의 시선은 "양"에서 "베드로"의 인격으로 옮아갑니다. 주님과 그는 "나"와 "너", 즉 "I"와 "You"의 관계로 마주하며, 진정한 관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도직 현장, 사목 현장, 봉사 현장에서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위해 정신없이 헌신하며 주님의 당부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양들의 안위가 우선이어도 주님 앞에 머무르며 "나"와 "너"의 관계로 마주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양들과 일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는 단계로 그쳐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부신 성과와 양들의 칭송이 쏟아져도 여기까지는 아직 미완의 단계일 뿐,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 이상의 차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을 다 내려놓고 사랑으로 주님 앞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전부 바쳐드리는 자기 증여와, 앞서 가신 그분의 운명을 나도 받아들이겠다는 수용과, 나를 비워낸 자리에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분을 담겠다는 자기 비움의 과정입니다.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안에 담고 물들어 갑니다. 결국 그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사랑 질문과, 부족한 응답과, 주님의 당부를 거쳐 따름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따름은 추종과 닮음과 동일화로 이어지는 신비의 길입니다. 일치의 여정이지요. 우리 꼴을 다 아시고도 사랑을 구걸하시고 따름이라는 곁자리를 내주시는 주님께 빙 돌리지 말고 주저없이 사랑을 외쳐 고백하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 사랑이 비록 아가페적인 사랑이 못되고 "당신이 참 좋아요"라는 우정의 고백이어도 상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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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우리 안에 머물기 위해 오시는 하느님의 ‘어리석은’ 사랑을 깨닫기
우리는 이 상처들을 잘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모두가 성화를 이루기 위한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우리 안에 참된 회심, 복음적 메타노이아(회개)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게’ 바뀌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약함과 죄가 없는 ‘순수’의 상태가 구원이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사실은 이렇다. 구원과 성성聖性이란 우리가 상처를 받고 한계가 있으며 약한 존재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 안에 머물기 위해 오시는 하느님의 ‘어리석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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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그 마음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지 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것은 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묻고 또 물으십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의 한계가 올때가 있다는 것이죠.
장담했다가 큰 코 다치기도 하고 실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해 부끄러운 베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 마음 아십니다. 잘못한 것을 알고 있고 부족한 것을 알고 있는 우리를 믿어주고 또 맡기십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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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 17)
사랑의 기쁨은 사랑하는 참 기쁨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사랑은 부활이며 사랑은 삶의 참된 행복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또 다시 우리를 살립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진정 사랑할 때 우리 또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잘 돌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 기쁨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사랑이 사랑을 이끌고 갑니다.
사랑은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부활의 첫 시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의 이 기쁨을 나누는 소중한 오늘되십시오.
사랑을 믿습니다. 예, 주님.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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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것이 바로 참다운 기도입니다. 베드로는 진심어린 고백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치유해 나갑니다.
갈등을 겪지 않고서는 믿음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온전히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를 다시 물어 보게 됩니다.
주님 사랑의 거룩한 힘과 은총은 베드로를 놀라운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 확신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집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존재하시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에는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합니다. 사랑은 베드로를 다시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을 받아들일 때 변화가 이루어 집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까지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살아오면서 부끄럽고 아팠던 상처까지도 기꺼이 고백하게 만드는 주님 사랑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진실된 사랑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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