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도까지 남편은 감기 한번 앓지 않고 아주 건강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잔기침을 하더니 단순한 감기 정도로 알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검사결과가 나오고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폐암 말기....6개월 밖에 못 산다고 했습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고 또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병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서울대학병원, 원자력병원...모두다 같은 소리만 했습니다. 수술도 때가 늦었다 했습니다. 남편은 공무원이라서 6개월 전에 종합검진을 받은 상태였고, 그때는 건강하다 했기에 도저히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을 원자력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그래도 수가 있을거라고, 처방약이 있고 고칠 수 있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민간요법이며 한약재를 수소문한 끝에 수원에를 가면 200만원 하는 약이 좋다해서 짓고, 대나무에 소쿠리를 매달고 똥 속의 구데기를 건져 씻어 빻아 먹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냄새가 난다고 넘기질 못했지만, 난 이것만 먹으면 금방 암이 삭아 없어질 것 같은 기분에 냄새를 전혀 느끼질 못 했습니다. 스쿠알렌을 몸에 바르고 하루에 3번 100알씩 먹이고, 굼벵이를 구하려고 시골에 다 쓰러져가는 집을 사들이고, 전라도까지 용한 이를 찾아가 엄청난 돈을 들여서 약을 구할때면 내 기분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희망이 보였으니까요.
또 한번은 화장터에 송장 가루를 구해 보라는 말에 대전화장터에 가서 사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옛날과 다른 기계시설에 가족이 직접 뼈를 빻아가기 때문에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날은 시체 3구를 태웠는데 교통사고 였는지 태운 자리 앞에는 피자국을 모래도 덮은 흔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혹시나 태우고 남은 조그마한 뼈라도 있을까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소각로를 들여다 보다가 눈썹과 앞머리가 타기도 했습니다. 결국 바늘만 한 것을 주워 돌아오는 차안에서 계속 구멍뚫린 산소가 없나 살폈습니다. 혹시라도 눈에 띄면 밤에 몰래 삽으로 파가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집에 오니까 남편친구들이 굼벵이를 비닐에 담아 놓은게 있었습니다. 비닐을 묶어두면 굼벵이가 죽을까봐 열어 둔 탓에 온 방에 굼벵이가 기어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너무 반가워서 한 마리씩 모두 주워서 정성으로 또 약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수 천만원을 들여 약을 썼지만 남편의 병세는 점점 더해져만 갔습니다. 나의 그 수고 덕인지 병원에서 이야기하던 6개월보다는 더 사셨지만 아들마저 군대가 가있고 시안부 생을 사는 동안 식구라고는 우리 내외뿐이였습니다. 환자가 식사하면 따라하고 그나마 잘 넘기지도 못하고 토해내는 식사를 같이 하자니 자연적으로 나도 살이 빠지고 건강이 나빠져갔습니다.
밤낮으로 죽음으로 서서히 덮여가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세상의 모든 신에게 기도하는 일뿐이였습니다. 이 사람만 살려주시면 어떠한 벌이라도, 죽으라면 죽기도 하겠다고....
내가 들을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입술을 깨물면서 몸부림 치던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차라리 듣게 소리라도 질러 고통이 덜하면 좋겠건만, 입술에 흐르는 피가 아물질 않았습니다.
출근할 때나 퇴근해서 따뜻하게 날 안아주던 남편을 반대로 내가 안아주며 위로하는 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 7주만에 결국 물만 들던 남편은 혼자서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다 능막염이란 병을 얻어 떠난 사람 정리도 할 시간없이 한달가량을 병원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들립니다.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오며
“여보, 나 왔어요” 하는 그리운 목소리가....
첫댓글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님의 애처로운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나보다 앞서 누군가를 먼저 보내고 나면 남겨진 이들은 무너지는 가슴을 혼자서 추슬러야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