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놀이터 이야기 / 이후남
놀이터에서는 누군가의 즐거운 놀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나 역시 그러한 놀이터 하나 갖고 있어 수시로 드나든다. 거기에는 모터 재봉틀과 규중칠우인 척부인, 교두각시, 세요각시, 청홍각시, 감토할미, 인화부인, 울낭자 등 자질구레한 일곱 친구 들이 오순도순 각각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모두가 나의 놀이기구다.
일고여덟 살 때부터 어머니를 졸라 두루주머니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딴에는 가장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머리핀, 실반지, 색동천 조각 등 잡동사니들을 넣어 치마 허리춤에 매달았다. 친구 중 유일하게 갖고 있는 손가방 자랑이었던 셈이다.
재봉틀 의자에 앉아 ON 스위치를 누른다. 놀이터에 울려 퍼지는 시동 소리가 고요를 깨운다. 발판은 요령껏 살짝만 밟는다. 드디어 순조로운 놀이 시작이다. 뚜르륵 소리와 함께 박음질이 고르다. 초보자일수록 기구 사용법은 미리 숙지해 두는 것이 좋으리라. 속도 조절하는 발판을 겁 없이 함부로 세게 밟으면 곤란하다. 놀란 일감이 혼비백산 사정없이 달려나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할 일이다. 오래 놀아 본 경험자의 조언이다.
바느질이 고르지 않거나 경로를 이탈한 땀수는 반듯이 손 봐 두는 것이 좋다. 아무리 놀이로 하는 바느질일지언정 정석대로 해야 마음이 놓인다. 재촉하는 이 없으니 천천히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자식들이 자라면서 가계 지출이 수입을 앞지르기 시작할 때다. 위기감이 가슴으로 와 닿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우리 가정의 ‘금순이’ 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나의 놀이는 자연스럽게 생계형으로 바뀌게 된다. 앞뜰 목련이 피고 지기를 꾀 여러 해가 되었나 보다. 어느결에 자식들은 졸업, 취업, 결혼까지 마무리된 상태가 되었다. 놀이터, 놀이기구, 놀이를 즐긴 자. 삼박자가 잘 맞은 호흡이 일궈 낸 쾌거라고 생각한다. 나만의 놀이터가 투정 없이 늘 거기 있어 고맙고도 정겨운 곳이다. 속된 표현으로 “취미로 잘 먹고, 잘 살았구나” 싶다. 우러러 하늘에 감사드린다. 그동안 수없이 나와 만나고 헤어진 모든 이에게도 고마웠노라 머리 숙인다.
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는 너 나 없이 모두가 바쁘다. 속도전에 목을 매는 세상이 되었다고나 할까. 누구의 탓도 아닌 세태의 자연스러운 흐름인 듯하다. 자기 생활에 바쁜 자식들마저도 한 주에 한 번 간신히 얼굴 볼 수 있을까 말까다. 날로 늘어나는 독거노인은 외롭기 마련일 터다. 주변의 내 나이 또래 중 열에 두 명은 요양원에 입소했다.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 앓거나 세상 뜬 친구도 많다. 노인들은 누가 나를 보살펴주길, 누가 나와 친구 해 주길 바랄 처지가 못 되는 것 같다. 스스로 혼자서도 즐겁게 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겠다. “죽는 날까지 행복해지려면 즐기는 일거리나 놀이를 찾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명심하려고 한다.
나는 그나마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일찍부터 재미로 해오던 바느질이 이제는 자연스레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놀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를 기다려 주는 놀이기구들은 어느덧 흉허물없는 친구가 되었다. ‘비둘기의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듯’이라고 했던가. 오매불망 그곳이 좋다.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다. 여기저기 천 보퉁이를 뒤적인다. 손길이 닿는 천마다 춤추듯 손에 감긴다. “그래 오늘은 너와 놀리라” 금방 답이 나온다. 놀이에 취해 시간이 언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아프고 외로울 여가 없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점점 이 놀이에 중독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무리 애써도 억제하기 힘들다는 술이나 쇼핑, 도박 중독이 아닌 건전한 중독이라 여겨 열심히 중독돼도 괜찮지 않을까. 놀이에 깊이 빠져들수록 하나, 둘 늘어나는 완제품들은 내 눈에 하나같이 예쁘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 함함하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순간만큼은 자화자찬하는 팔불출이 되어 보기로 한다. 놀이 과정의 즐거움은 덤으로 받는다. 이웃과 나눌 것을 생각하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나만의 여유다.
인견으로 만든 여름용 속 조끼는 단연 인기 만점 품목이라 해도 거짓말 아니다. 과감하게 브래지어 대용으로 먼저 착용해보았다. 삼복더위에 얼음물 한 잔 들이켠 듯 상쾌해서 아주 흡족하다. 나만의 착각일지 몰라도 내가 좋으니 남도 만족하리라 믿고 서슴없이 나누고 싶어진다. 그것의 진가를 알아주는 친구들이 고마워 기분 좋은 미소를 감추지 않는다. 받는 그들보다 주는 내가 더 즐겁다. 자투리 천을 활용해도 좋지만, 재활용품으로 배출되는 의류 중 면, 마, 실크 등을 골라 리폼을 해도 괜찮았다. 친환경적이라 더욱 바람직했으며 보람을 느낀다.
친구들과 만나자고 약속하고 나서 가장 먼저 발길 가는 곳이 여기다. 무엇을 만들면서 놀아 볼까 궁리 중인데 손은 이미 바늘꽂이를 마름질하고 있다. 벌써 그들과 함께 놀고 있는 착각에 든다. 어떤 색상이 적당할까 상상하면서 한 발 짝 더 가까워짐을 느낀다. 별것 아닌 것도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웃을 일 그리 많지 않은 고령 친구들 모임에서 잠시나마 활명수 마신 듯 상쾌할 수 있어 좋다.
어느 날 문득 “저리 많은 재고품 천이 없어지는 날 나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여러 해 동안 어지간히 논듯 한데 각색 실 꾸러미가 아직도 광주리에 가득하니 한참을 더 놀아봐야겠다. 이웃에게 받은 것만큼 나도 베풀어야 될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놀이터에서의 놀이란 혼자보다 더불어 함께라면 훨씬 다채로운 놀이가 펼쳐지겠지. 그렇다면 얼마나 더 즐거울까? 많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뜻맞는 몇몇이면 충분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울타리 없는 놀이터로 개방해야 하리라. 놀이 과정을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만 있다면 여태 겪어 보지 못한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될지 자못 기대해 보게 된다.
두루주머니 만들며 놀았던 코흘리개 계집아이가 미수가 되도록 참 열심히 잘 놀았다. 한결같이 곁을 지켜준 나만의 놀이터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즐겁게 놀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재봉틀의 바늘귀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바늘허리 매어 쓸 수는 없는 노릇, 바투 잡은 실을 바늘귀 언저리로 가져가 본다. 어림없는 짓이다. 몇 차례나 헛손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재미있는 놀이의 포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여서가 아닌 감으로 재시도한다. 성공이다. 그럼 그렇지! 아직은 더 놀아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