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주교회의가 지정한 전국 111군데 성지를 모두 순례한 대구지역 첫 완주자인 박정자·소정하·김정자씨(왼쪽부터)가 대구 관덕정 순교성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수시로 성지를 찾아 그 곳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신앙심까지 키우고 있다. 누구보다 성지순례에 적극적이란 신앙인들을 만나 왜 성지를 찾는지, 성지순례의 매력은 무엇인지 등을 들어보았다.
성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108배 기도를 한다는 불자 배선화씨. 배씨는 “108배 기도의 참된 의미는 스스로의 몸을 낮추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전국 111개 성지 대구 최초 모두 순례
천주교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는 한국의 가톨릭 성지를 소개한 성지순례 가이드북인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를 지난해 8월 발간했다. 최근 도보로 성지를 순례하는 바람이 전국적으로 불고 있는 가운데 발간된 이 책에는 전국 각 교구에 있는 111개 성지 및 순례 전·후 기도 등이 수록돼 있다. 책이 발간된 지 1년여 만에 책에 실린 전국 111개 성지를 모두 순례한 완주자가 대구에서도 배출됐다.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는 전국의 성지를 모두 순례한 순례객에게 위원장 명의의 축복장을 수여하고 있다.
김정자(여·71)·박정자(여·69)·소정하씨(여·51)는 가톨릭 순교성지인 대구 관덕정기념관에서 10여년째 함께 안내봉사를 하고 있다. 평소 각별하게 조우하던 이들은 지난해 성지순례 가이드북이 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의기투합했다.
김씨는 “순교성지는 온갖 박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신앙을 정의하신 분들을 모신 곳”이라며 “배고프면 밥을 먹듯,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으로 허탈할 때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시며 성지를 찾아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지난 1년간 걸어온 여정은 실로 놀랍다. 1주일에도 한두 번 틈만 나면 성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오전 4시면 집을 나서 한밤중에 귀가하기 일쑤였다. 잠시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달래고,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소씨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온갖 박해를 당했을 순교자들의 삶을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순례길에서 보낸 지난 1년은 신앙인으로서 내게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흔히 성지순례라고 하면 외국의 명소를 먼저 떠올리지만, 한국의 순교자만 해도 1만여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박씨는 “지난 1년간의 여정이 육체적으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성과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깨달은 것”이라며 “굳이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순교지를 방문해 보면 인생의 숭고한 의미를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성지에서 108배 올리며 행복 체감
“절을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나를 숙인다는 의미예요. 부처님의 발등에 내 이마를 대고, 몸을 온전히 낮췄을 때 비로소 참된 나를 만날 수 있어요.”
배선화씨(법명 길상화·관오사)는 불교성지 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행복한 때는 “성지에서 108배를 마치고 났을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상사 번다한 것을 다 내려놓고, 108배를 마치고 나면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젖지만, 저절로 온몸 가득히 행복의 기운이 퍼져나간다”고 자랑했다.
배씨가 본격적으로 성지순례의 매력에 빠진 것은 2006년, 설악산 봉정암을 다녀오고서부터다. 아침 일찍 출발해 5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뚫고 4시간 이상 산길을 올랐다. 봉정암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체력이 고갈됐지만, 사찰 가득히 느껴지는 신묘한 기운에 홀연히 빠져들고 말았다고 한다.
배씨는 “우여곡절 끝에 봉정암에 도착해 기도를 하는데, 피로함은커녕 오히려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이후 봉정암을 네 차례 다녀온 것을 비롯해 틈만 나면 전국의 성지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배씨가 찾은 불교성지는 어떤 곳일까. 배씨는 “통도사·상원사·봉정암·법흥사·정암사 등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을 비롯해 낙산사·보문사·보리암 등 대자대비한 정신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도량과 지장도량 등 전국의 유명한 사찰과 이름없는 작은 암자 등을 찾았다”며 “성지순례는 유명하고 이름난 성지를 가는 것도 좋지만, 같은 장소라도 사계절마다 느낌이 제각각 달라지는 만큼 자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배씨는 또 “성지순례를 다니며 얻은 깨달음 중 하나가 우리시대 종교의 역할과 의미”라며 “요즘 사회적 문제로 종교갈등이 지목되는데, 성지를 걸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게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