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의 원인이 되었다는 응답
슥 7:8-14
8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13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4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슥 7:8-14 / 이때에 주께서 스가랴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다. 9)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동족을 서로 아끼고 키워 주어라! 10) 과부와 고아들, 고용살이를 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지 말아라! 동족끼리 서로 해칠 궁리를 하지 말아라!' 11) 그런데도 너희 조상들은 이 말씀을 듣지 않고 거절하였다. 그들은 거역하는 자세로 등을 돌리고, 그 말씀이 듣기 싫어서 손가락으로 귀를 막은 자들이다. 12)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그 당시의 예언자들을 시켜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자신의 영으로써 들려 주신 그 교훈과 경고가 듣기 싫어서 그들은 차돌같이 굳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그토록 무서운 진노를 그들에게 내리셨던 것이다. 13) 그렇기 때문에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않았던 것과 같이, 이제는 그들이 아무리 불러도 내가 들어 주지 않겠다. 14) 나는 오히려 광풍이 되어 그들을 흩어 멀고먼 타국에 들어가 살도록 하고, 그들이 떠나간 고향땅을 황폐케 하여 오가는 사람도 없게 하겠다. 그 아름답던 땅을 황무지로 만든 것은 바로 너희들 자신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반드시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합니다.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8-9) 이스라엘이 들어야하는 말씀은 진실한 재판을 행하여 사회 정의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정의롭고 공정한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살아갈 의욕을 상실합니다. 또한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일입니다. 인애와 긍휼의 본질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랑으로 원수조차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4). 이에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요일 4:8).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먹고사는 생존조차 어려운 과부, 고아, 나그네, 그리고 궁핍한 자를 보살피는 것을 사랑의 시작점으로 보았습니다.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10-13)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듣기를 싫어하며 등을 돌리며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불러도 그들이 듣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도 그들이 환난의 때에 불러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금강석 같다는 것은 그 심령이 부드럽지 못하고 굳어서 끊임없는 하나님 상한 마음의 호소에도 꿈쩍하지 않고 그분의 애끊는 마음이 담긴 말씀에 대해 귀를 막았다는 뜻입니다(겔 3:9; 렘 17:1). 이러한 사람들은 전능자의 진노하시는 심판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14) 하나님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로 흩으셨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라 한 것과 같습니다(시 44:11). 과거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이유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결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옥토는 아주 몹쓸 황무지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모든 저주가 현실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적용: 당신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공평과 정의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의 모든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고전 13:1) 어떤 존재가 될까요?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들은 무엇입니까?
“뇌내혁명”이라는 책의 저자 하루야마 시게오는 모든 사건을 마이너스로 생각하지 말고 플러스로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즉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좋은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궁극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지, 손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플러스 관점으로 모든 사물을 보면 뇌 속에서 엔돌핀이 생성되어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능력을 발휘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 설 교 >
우리 교회의 경건
슥 7:7-14 / 오대식 목사
우리가 잘 알고 또 늘 느끼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시대적으로 많이 변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변하게 되는 것은 어느 언어에서나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그것은 우리말과 한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벌써 3년 전 얘기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에 다시 왔을 때, 긴 시간을 일본에서 생활한 것도 아닌데 이 언어 때문에 당황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다시 한국에 왔을 때 옛날 청년부 때 지도했던 한 자매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 참 예뻐졌구나!”
그랬더니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근이지요!”
“뭐! 당근! 당근이 뭐야?”
“당근도 모르세요? 말밥이요?”
“??!!...”
한 남자 청년은 제가 온 건을 반갑게 맞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반가워요, 언제 한 번 제가 쏠께요?”
“뭐!??!!!, 넌 또 뭘 쏘냐?....”
쏜다는 말이 밥을 사겠다는 말로 변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김동호 목사님과 함께 어느 교인의 발인예배를 드리는데 김목사님께서 고후15:55-56의 말씀을 봉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니라>
갑자기 우리의 변한 언어의 뜻을 생각하고는 혼자 많이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망이 오늘 저녁 한 턱 내려나?.....”
이렇듯이 우리가 쓰는 언어는 그 처음의 본질과는 사뭇 다르게 쓰이고 있는 것이 많은데, 문제는 그것이 성경 속의 단어에서도 간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 그 본래의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는 사뭇 달라진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중 그 뜻이 많이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경건’입니다. 여러분은 ‘경건’, 혹은 ‘경건하다’ 라는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체적으로 우리가 ‘경건’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단순히 떠올리는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금식기도, 새벽기도, 절제되고 엄숙한 예배생활과 언어생활, 주일성수, 금연, 금주..... 등입니다. 즉 절도 있고 절제된 말과 행동, 그리고 엄숙한 그 생각들.... 다시 말해 ‘경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외형적인 틀로써의 이해를 먼저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기독교의 ‘영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본시 ‘경건’이란 말의 뜻은 외형적인 것과는 정 반대의 말입니다. 그것은 신학사전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사전 즉, 한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그리스도교 대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를 이렇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경건이란, 성도가 가져야 할 한 가지 덕목으로 외형적이기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내적인 태도를 말한다.”
뭔가 중간에 잘못되었습니다. 경건은 본래 외형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 경건을 오히려 외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의미변화입니다.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그 폭이 좁아져서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생활을 나타내는 종교적인 단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그 의미가 바뀌었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① 첫째, 경건이 외형적 금욕으로 간 이유는 초창기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의 선교 사들의 영향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하는 경건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경건으로 그렇게 그 의미가 바뀌게 된 데에는,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몸에 배어 있던 미국 선교사의 영향이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에 이어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한국이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복음을 받으면서 경건의 의미는 변질되었습니다. 외형적인 금욕을 중시하는 청교도적 정신을 갖고 있는 선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치면서부터 경건의 의미는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가르치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금욕과 성경이 말하는 경건을 구분 짓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자연히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경건이 외적인 금욕과 결부되어 이해돼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복음의 유입과 동시에 경건과 절제운동이 시작 된 아주 독특한 교회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아직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와 기성세대의 뇌리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둘째로, 한국 기독교 초기에 성경을 번역한 학자들이 성경을 잘못 번역한데서 온 오류이기도 합니다.
초창기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은 한학자(漢學者)들이었습니다. 이 한학자들은 본시 모두 유학자(儒學者)들입니다. 원래의 성경원문에는 이 경건이란 말을 ‘유세베이아’ 라는 단어로 쓰는데, 이 단어를 중용(中庸)이나 대학(大學)에 나오는 아주 어려운 단어인 경건(敬虔), 즉 소위 유교적인 단어로 번역을 한데서 문제가 꼬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경건이라는 단어의 뜻은 다분히 유교적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 이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가 경건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교적 사고에서 기인한 <경건>의 뜻입니다. 시끄러워서는 아니 되고, 불규칙적이어서도 안 되며 항상 조심스러워야 되고 엄숙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엄청난 금욕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유교적 경건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의 경건으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많이 이해가 바뀌었지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예배당에서 드럼을 치는 것과 일랙트릭 기타를 연주하며 시끄럽게 찬양을 하면 웬만한 어른들은 경건치 못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끄럽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기존의 틀을 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회에서 연애를 하는 것, 욕을 먹는 일인데 왜 그랬습니까? 삼가며 조심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절제와 금욕등으로 그 경건성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금식이라 말하고 삶의 세상적 욕구를 절제하는 것을 금욕이라 부릅니다. 말을 절제하고 행동을 절제하는 것을 신앙인의 더 없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 한학(漢學)에서 나오는 유교적 단어인 ‘경건’을 성경에 넣어 번역함으로 본래의 의미가 축소 혹은 변질된 결과입니다.
③ 셋째로는, 이 땅에 복음이 유입될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매우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금연과 금주운동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의 상황이 너무 특별해서 매우 독특하게 한국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즉, 절제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기독교의 본질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1907년 국체보상운동을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한 1,300만원의 국채를 갚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제재를 받는다는 인식을 모두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 아래 한반도의 2천만 동포가 약3월간 금연을 한다면 1,300만원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계산은 이렇습니다. 개인당 매 월 20전씩 3개월만 저축하면 1,200만원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교회가 이 금연운동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금연운동과 관련하여 1911년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잡지에는 담배의 해되는 증거가 무엇이뇨? 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게 됩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흡연이 신체에 해됨이니 지권련(담배)은 사람의 몸에 활동력을 감하며 미성년자의 신체로 하여금 발양치 못하게 하고
2) 흡연이 뇌력을 약하게 함이요
3) 흡연이 도덕에 해됨이니 담배가 먹는 자로 하여금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나게 만드는 고로 술 마실 생각을 가지게 하기 쉬우니 이로 인하여 우 리 영혼의 거룩한 집이 더럽혀지는 것이요
4) 흡연이 경제에 해됨이니 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여 금전을 내버리며 정 결한 방안과 아름다운 의복을 그을려서 못쓰게 만드느니라.
또한 이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잡지는 담배뿐 아니라 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화를 크게 해하는 물건은 술 인고로 옳게 생각하는 사람마다 이것을 없이하기 힘쓸지니, 술은 바른 생애로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빼앗으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게 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정을 성행케 하며 국가의 재산을 남용하여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없애야 할 물건이니라
이렇게 교회 내의 금주 운동이 확산되자 1931년 《신정찬송가》가 발행될 때 임배세 선생 작곡의 금주가가 정식 찬송가 곡으로 채택되었는데, 그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1) 금수강산 내동포여 술을입에 대지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두렵다
2) 패가망신 될독주는 빚도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쓰려내
3) 전국술값 다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수양 늘시키면 동서문명 잘빛내리
4) 천부주신 네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 술의독기 받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찌라
후렴) 아-마시지말라 그 술, 아-보지도말라 그 술 조선사회 복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주초문제는 바로 술과 담배에 관한 문제가 아닌, 어려운 나라, 즉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를 구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공동체가 어려울 때 실의에 빠지거나 모르는 척 해서는 아니 되고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민족을 살릴 것을 호소한 것이고, 그 일을 누구보다도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신학적인 견지에서도 한국교회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실천한 금주와 금연운동의 보급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술과 담배뿐 아니라 먹고 입는 것, 아니 그 이상이라도 참고 견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그 금연과 금주 운동이 이상하게도 그 본질은 싹 사라지고, 이제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경건성’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직도 많은 기성세대들이 개신교의 경건성을 말할 때,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주저하지 않고 그 경건의 덕목으로 상위권에 두는 것이 바로 이 주초문제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음주와 흡연을 하는 것을 생명을 걸고 막고 있으며,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음주와 흡연에 대해 교회와 연결지어서는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듯 주초문제는 한국교회의 경건 문제에 있어서 그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 경건이란 말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참된 경건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경건의 참 뜻을 알기 위해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아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 66권 중에 경건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바로 스가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지 스가랴서 전체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이 본문말씀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인지 그 ‘경건’을 말해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위해 먼저 경건치 못한 것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거짓된 경건을 말할 때 ‘금식’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슥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70년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70년동안 해마다 5월과 7월에 금식을 해 왔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의 모습은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금식 자체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경건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엄숙하고 절제된 예배를 70년 동안 드렸다 해도, 또 금식과 금욕으로 절제된 생활을 70년 동안 했다 할지라도, 또 평생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교회밖에 모르는 생활을 해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이 그 안에 없다면 다 무효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경건의 뜻을 바로 9-1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슥7:9-10)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재판관들은 진실한 재판을 하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 즉, 약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제일 먼저 가져야 할 경건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더욱 이 스가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덕목은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슥8:16-17)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인간관계에 있어서 진실을 말하며 너희 가정과 직장에서 진실하고 거짓을 행치 말 것이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라. 너희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비방하거나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요? 아닙니다. 스가랴서를 이같이 오늘날의 말로 해석한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스가랴의 말씀은 신약에 와서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약1:26-27)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은 무엇입니까? 주초의 문제입니까? 절제되고 엄숙한 예배의 문제입니까? 거룩한 표정과 세련된 고급스러운 말과 위엄 있는 걸음걸이입니까? 일년 내내 아침 금식을 하면 되겠습니까?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입니다. 그리고 경건은 사람들을 향한 진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경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으니 하나님의 원하시는 경건을 행치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경건을 너무나도 좇아 왔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밥 굶어 가며 기도하는 데는 명수이고, 밤을 지새워 기도하는 데는 선수들입니다. 연초가 되면 영성집회를 하는 기도원은 만원이고, 일년 열두 달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세계 교회를 놀라게 해 왔으며, 구름 떼 같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많은 교인들의 모습을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가는 곳은 어디나 교회가 생기게 됩니다.
오래 전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웅장한 폭포가 있는 나이아가라에 가서 두 가지에 놀라고 왔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그 창조의 웅장함에 놀랐고, 또 하나는 그 폭포 옆에 나이아가라 한인교회가 있다는 것에 참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한국교회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위력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래서 무엇이 변했습니까?
뚜껑을 열어 내면을 들여다봅시다. 중국사람 가는 곳에 중국집 생겨나듯이, 세계 어딜 가나 한국사람 가는 곳에는 한인교회가 세워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 어디서나 한국 사람이 가는 곳에 한국 사람들이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이 번 호주에 가서도 느낀 것이 참 많았습니다. 시드니에만 한인교회가 2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한국사람들의 위상은 날로 낮아지고만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인은 많아지는데 우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길가에 버려져 밟히는 지경에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장로라, 안수집사라 하며 같이 사업하자고 다가오면, 여러분 그 사람을 무조건 믿겠습니까? 저는 믿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제는 믿지 않습니다. 부끄럽지만 목사인 제가 교회의 중직자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교인이 목사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의 좋지 않은 현상을 놓고 제가 한국교회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진실치 못한 일들과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진실이 사라졌습니다.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비방과 욕설과 시기와 질투가 사회 곳곳에서 신앙인들의 입과 손과 마음을 통해 전달이 되며, 교회 내에서도 똑같은 행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말 바울의 한탄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적어도 교인라면, 적어도 직분자라면, 말이 진실해야 합니다. 행동이 진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자녀들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일터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가랴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호와께 기억된 자》입니다. 즉 스가랴의 말씀대로 경건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가랴서의 주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사람들 앞에서 거짓되지 않을 때, 그리고 항상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꼭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바른 경건으로 하나님의 인정받는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잃었던 경건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신앙인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경건을 행치 못했던 저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생활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 앞에서 거짓을 행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참된 경건을 소유하여 이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스라엘의 고의적 불순종
슥 7:8-14
7절에서 언급된 내용, 즉 그들은 "이전 예언자들이 외친 말을 청종해야 할 것" 이라는 점이 여기서 부연된다. 이는 그들이 꼬집어서 금식을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가부를 물었을 때도, 그들의 죄를 계속 행하던 이 위선적 질문자들에 대한 경고가 된다. 이 예언자는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예언자들의 부름에 대한 그들의 선조들의 불순종과,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기억나게 했는데(1:4-6), 이제 여기서 다시 반복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해로움은 우리의 경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옛 이스라엘 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충고가 되기 위하여 기록되었고(고전 10:1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의 유사한 섭리를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Ⅰ. 여기서 이 예언자는 이전 예언자들이 그들의 선조들에게 했던 설교의 서두를 반복한다(9,10절).
그 까닭은 바로 그 동일한 일이 이제 그들에게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제 너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선조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진실한 재판을 행하라." 여기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평안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서, 이들의 평안의 회복이었음에 틀림없다. 또 금식을 지키고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애의 긍휼을 베풀라." 이것은 비록 어떤 예언자들이 주장해 왔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의 빛과 법에 의해 그들이 해야 하며, 공공 복리와 평화를 향한 직접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 이익을 보게 되는 그런 의무들이다.
1. 관리들은 공평하게 정의(재판)를 집행하되, 개인적인 정리에 의하지 말고 법과 사건의 시비곡직에 따라서 해야 한다.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일단 재판한 다음에는 그것을 집행하라."
2. 이웃들은 서로 온유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서로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 그들의 힘이 닿는 데까지 모든 선한 직임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그들은 소송 사건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의 형제를 대하듯 모든 사람에게 긍휼과 동정을 표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환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도 동정심있게 살펴져야 한다. Hanc veniam petimusque damusque vicissim - 즉 이 친절을 우리가 구하고 행한다.
3. 그들은 자기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자들, 연약한 자들을 혹심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장사로나 법의 핑계로 "과부와 고아,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학대해서는 안 된다(10절). 가장 약한 자들은 그들이 가장 약하다는 이유로, 벽에 던져져서는 안 된다. 권리를 요구하여 그것을 회복할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권리를 부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우리로부터 권리를 강제로 빼앗을 힘이 없는 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것을 주어야 한다. 또는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히 하는 것은 고아들과 과부들에게 가혹한 것임을 암시한다. 아니, 우리가 마땅히 할 바대로 그들을 구해 주고 돕지 않는 것이, 사실상 그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나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거나 생각하는 일조차 말아야 한다. "너희는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그것을 계획하지 말라. 그것을 원하지 말라. 아니, 그것을 공상함으로써 스스로 즐기지조차 말라."
하나님의 법은 마음에 제한을 주며, 오락을 금하고, 악하고, 심술궂고, 악의에 찬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한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신 15:9).
Ⅱ. 그는 그들의 조상들의 강퍅함과 불순종을 서술한다.
그들은 이 권고와 조언이 번번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류의 사악함과 부정의를 지속했다. 이러한 취지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여기 산적되어 있는데(11,12절), 이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며, 그의 율법에 대한 불복종이며, 참으로 순종으로 여겨질 수 없는" 저 육체에 따르는 마음의 완고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이 굳고 고집불통이었으며, 순전히 율법에 대한 반대의 정신으로부터 계속 율법을 범하였다.
1. 그들은 할 수 있었으나 예언자들의 말을 듣는 범위 내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혹은 그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것에 주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청종하기를 싫어하며," 마치 듣지 못한 듯이 다른 쪽을 바라 보았다.
2. 그들은 그들에게 한 말을 들었으며, 짐작되듯이, 처음에는 그것에 응하는 듯하였으나 달아났으며,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황소처럼 "어깨를 저었으며," 하나님의 계명의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굳은 어깨로 향했다" (그 말의 뜻이 그렇다). 그들은 일에 그들의 어깨를 내어 놓았던 것 같은데, 이제 다시 그 어깨를 움츠렸다(렘 34:10, 11 처럼). 그들은 "내가 가겠나이다" 고 말했으나 "가지 않았던" 아들과 같으니, 속이는 인사와 같았다.
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편견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웠고, 그들이 들었던 모든 선고에 대해자신을 구축하게 하였던 반박을 이모저모로 가졌다. "그들은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 귀머거리 독사 같았고(시 58:4),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말대로 "그들 자신의 귀를 무겁게 하는" 자들처럼 심한 귀머거리는 없다.
4. 그들은 이명령을 강화하려고 그들에게 말해진 어떤 것도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했다." 이 돌은 깍여진 돌 중에 가장 단단한 것이며, 혹은 "부싯돌" 같게 했으니, 이 돌은 석공이 다른 돌을 채석장에서 쪼아서 만들 듯이 그 모양을 쪼아낼 수 없는 것이다. 뻔뻔한 죄인의 마음처럼 단단하고, 두드려 늘이기 어렵고, 고집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이 굳은 자들은 스스로 굳게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방하는 뜻에서 버려두시어, 그 마음이 강퍅하고 회개하지 않도록 하신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 완악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록된 말씀에 의해, 곧 "모세의 율법에 의해," 그리고 그들에게 선포된 "예언자들의 말" 에 의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청종치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굳혔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 을 가졌으나,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죽은 자로부터 한 사람이 그들에게 보내졌는데도 복종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예언자들의 말" 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셨고 그들에게 향하게 했으며, 그가 즉시 예언자들 속에 있는 "그의 영에 의해" 그들(말)을 보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 말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욕했고 "성령을 거스렸다." 왜 인간이 선하지 않는가 하는 까닭은 그들이 그렇게 되려하지 않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은 고려하지 않으려 하며, 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비방한다면 너 홀로 그것을 짊어질 것이다."
Ⅲ. 스가랴는 그것이 그들의 선조에게 끼친 치명적 결과를 보여준다.
"큰 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하나님은 그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합리적이고 유익이 되는 것 외에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으며, 그것도 역시 가장 무례한 태도로 그리했다. 어떤 주인이 자기 종에게 비난받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복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적대는 율법과 예언자에 대한 것이었는데, 유다 교회의 최후 세대에 "끝까지 임하는 (최고의) 노하심" 을 가져왔다(살전 2:16). 그 권위가 명백한 "만군의 여호와" 께 대한 큰 죄는 그 권세가 저항할 수 없으신 "만군의 여호와로부터의 큰 진노" 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효과는,
1.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다(13절). 그들이 번성할 때 그들의 죄로부터 떠나라고 "외쳤으나 그들이 듣지 않고" 계속 범죄했듯이 그들의 환난날에 심판을 치워달라고 "그들이 하나님께 외쳐도," 하나님은 들으려 하시지 않고, 그들의 재난을 더욱 강화하셨다. 스스로 교만의 꼭대기에 올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도, 고통이 임했을 땐, 그에게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환난 중에 그들이 당신을 찾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지키시는 것이 있으니 곧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는 가증하리라" (잠 28:9; 1:24 등). 마음속에 있는 죄는 확실히 기도의 성공을 방해할 것이다(시 66:18).
2.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충성으로부터 달아났고, 변덕스럽고 불안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으시고 회오리바람 앞의 쭉정이처럼 그들을 내동댕이쳤다. "그는 회오리바람으로 그들을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으로 헤쳤다." 따라서 그들은 그 열국으로부터 아무런 친절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14절).
3. 그들이 그들의 나라의 모든 법을 어겼듯이,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모든 영광을 빼앗으셨다. "그들의 땅이 그들 이후로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달랴의 살해에서 비롯된 남은 유다인의 흩어짐 이후에 두 지파의 왕국이었던 온 땅에는 전혀 거주민이 없게 되었다. 유다인이 70년 포로기 이후 돌아오기 전까지, 거기에는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없었다. 아니, 그 나라를 가로질러 놓여 있었던 그 도로들이 황폐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아무도지나가지 않았고 다시 오지 않았다), 이는 그 안에 임할 긍휼의 암시를 가지고있었다(비록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추방되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복귀를 위해 계속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분간 심판을 더욱 더 비참하게 보이도록 했다. 그처럼 여러 해 동안 아무도 살지 않던 땅은 얼마나 비참한 광야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탓이었다. 그들 자신의 악함이 "아름다운 땅을 황무하게 한" 것이다. 그것을 행한 자는 갈대아인들이 아니었다.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행하였다. 땅의 황폐는 그 거주민의 악함에서 기인한다(시 107:34). 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완고한 불순종에서 기인했다. 그리고 현 세대는 죄가 그 아름다운 땅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가를 보았으나, 거기서 경고를 받지 않으려 했다.
등 돌린 백성
스가랴 7:8-14 / 이근호
구약에 나오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 측은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신을 섬겨도 유난스레 섬긴다고 이해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직접 맞닿은 특수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방치된 족속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치 않지만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혹독하게 관여하십니다. 날씨로 비유하자면 이방민족은 늘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이라면 이스라엘은 늘 쾌청한 맑은 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서 그대로 노출된 천장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제각 조치가 떨어집니다.
이런 시절이 다 옛적 이야기라고 여기지 마세요. 비록 이 스가랴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 말씀은 그대로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에게 적용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곧 참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용에 보면, 재판 똑바로 하고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성도의 운명에 특수하게 다가옵니다. 이는 오늘날 모든 자들이 이 말씀대로 살 사람이 없다는 것이 온전히 다 드러났다는 사실을 공히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특히 성도에게는 특수하게 적용되는데 이는 ‘율법이란 사람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기능으로 작용함’ 이들 성도들만이 삶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다음과 같이 다구칩니다. “이번에 너는 반드시 반에서 1등해야 돼” 이 소리를 듣고 자식이 기가 죽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다음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이는 네가 아무리 해도 1등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라고 말입니다. 이 덧붙은 말은 들은 자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것입니다.
“내가 결코 1등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되기에 부모님께서 나에게 1등하라고 하셨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때부터 아이의 마음을 도리어 편한해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부모님, 죄송해요”라고 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마음가짐은 “미안해요. 죄송해요”입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천국의 질서를 안겨주므로서 감당하지 못할 거룩한 말씀 앞에서 자신의 진면옥을 새삼스레 정리토록 하십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 다루는 나라가 아니라 ‘나라됨’ 자체를 가지고 모든 개인에게 요구합니다. 즉 “너희들은 이 나라가 천국이 되기 위해서 각자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지?”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얻기보다는 나로 인해 천국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야 하는지에 관심두기 바랍니다. 재판을 바로하고 어렵고 약한 사람을 학대하지 말라는 것은 지도자들 급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도자들은 같은 이스라엘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더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자들입니다.
힘과 돈에 있어 남다른 대우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점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이들 세계에 있어 구슬이나 딱지는 부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폐지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권력과 돈을 인간 세계에서는 흠모의 대상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가난하게 오신 것입니다. 가난이 선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리나 원칙에 대해서 기죽지 말고 위협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돈이나 인기나 세상 권력은 악마에 의해서 길들여진 재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은 이런 말씀에 대해서 등돌리게 될까요?
그것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데 있어 두 가지 상반된 이론을 점검하면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국가나 사회 구성에 있어 우선은 하향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지배, 통치하면서 아랫사람들의 노동의 결실을 착취하는 구조로 국가 체계가 유지되는 형태입니다. 자연세계에서 자연을 뽑을 때, 새로운 지배 계층이 등장하고 그들은 부와 권력으로 거대한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다른 인간들로부터 자연을 뽑아내며 이러한 질서가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또 아랫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약한 아랫사람들을 형성시켜 착취시키는 형식을 말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상향 이론’이란 사회가 복잡하면서 사회의 효율성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찾고 갖추어나가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입니다. 진화론에서 대자연은 단세포에서 점차 복잡한 세포로 발전해갑니다. 처음에는 스트로마톨라이트(남조류 박테리아: 햇빛을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로 전환시킴)나 스펀지와 같은 조악한 구조로 뭉쳤다가 나중에서 인간과 같이 복잡한 다세포 생명체로 전환하는 것이 대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인간 사회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특히 흰개미 사회에서 전체 공동체가 의사소통과 협동을 통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지도자라는 것도 그 공동체 일원들이 자진해서 원해서 세우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사회 공동체 형성 이론은 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창세기 4:23-24에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지도자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이 전 공동체 전체로 파급되는 경우입니다. 하향 이론에 부합됩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10장에 나오는 사울은, 처음에는 공동체를 섬기는 왕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악신이 걸려서 다윗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자기 소유인양 행세합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2장에 나오는 남쪽 유다나라 왕 르호보암도 “내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면 되겠느냐?”고 자문을 구할 때, 원로 신하들은 말합니다. “왕이 먼저 백성의 종이 되시면 백성들은 당신을 왕으로 인정할 것입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왕 권력의 맛을 본 자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내놓리가 없습니다.
바로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권력이나 돈이 없을 때는 상대적으로 가진 자를 미워하고 욕하지만 막상 본인이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사정없이 숙청해버리는 심보는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시선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된 천국은 오직 죄인을 부르시는 그 분만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미련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스가랴 선지자에게 주신 이 말씀을 일거에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거는 그들의 땅, 그들의 백성이 특수하다는 것, 일반적이 아니고 특수하다는 점을 우선 감안하시면 이 말씀이 이해됩니다.
어떤 점에서 특수하냐 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어버려두는 겁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거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방민족은 보편적인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합니다. 그들에게 야부지게 나무라시고 야무지게 심판하시고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면 야무지게 축복하시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 같으면 이게 하나의 기상도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막힌 게 없다고 보고요. 이방민족은 그냥 마귀가 해놓은 황사? 그런 거 같은 게 안개 같은 게 뿌옇게 끼어서 봐도 하나님 모르고 두꺼운 구름층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항상 흐릿한 구름 낀 날씨라 보시면 되고, 이스라엘은 생생하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구름이 없이 쨍쨍하게 햇빛이 그냥 쬐니까 하나님의 그 시선 앞에 그들은 노출되니까 그들이 혼나고 있는 걸 보고 우리는 팔짱 끼면서 ‘저들이 왜 호들갑을 떨지? 참 이상하기도 하여라.’ 이렇게 하고 그들이 잘 되면 ‘그들은 자기가 노동해 놓고 왜 모든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지? 아이쿠, 유난스럽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때까지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 스가랴 7장 요 본문 말씀이 그대로 어디로 이동하느냐 하면 오늘날 성도한테 그대로 이동해요. 성도에게 이동할 때는 성령에 담겨서 성령께서 툭! 하고 요 본문을 떼서 옛날 이스라엘에게 적용시켰던 그 말씀을 이제 성령 받은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을 시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고 또 이야기하죠. ‘유난스럽기도 하다. 뭐 조용하게 믿지, 뭐 저렇게 예민하게 구느냐,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하게 구느냐, 이상하기도 해라. 우리는 그냥 살아가면 되는데. 왜 저렇게 발작이지?’ 이렇게 똑같은 그런 평을 안 믿는 사람한테 우리가 듣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을 보고 우리는 참 안 됐다고 하지 말고 그런 소리 하려면 우리가 우리보고 이야기해야 돼요. 주께서 우리를 그냥 방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방치하지 않을 때 그 기준이 뭐냐, 오늘 본문 말씀 가지고 그대로 흔들어 댄다는 사실을 우리가 각오를 해주셔야 됩니다.
그러면 흔들어 대는데 기준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무슨 기준 가지고 흔들어 대느냐 하면 또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구약을 개인중심이 아니고 나라중심이거든요. 나라중심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천국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하늘나라 백성으로서는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전체를 전부 다 나라중심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전체가 나라중심이라면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내용은 그 당시 국가 이스라엘 지도자들한테 하신 말씀들이예요. 재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10절에 보면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또 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라고 돼 있다 이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보게 되면 저한테 묻고 싶은 게 있을 거예요. 뭐냐 하면 ‘목사님, 천국 가도 재판합니까?’ 만약에 우리가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면 ‘천국 가서도 이러한 재판 업무를 하게 되면 그게 일종의 노동이고 힘든 일인데 천국 가서 쉬려고 했는데 또 이 일까지 하게 되면 천국 가서 쉬지도 못하고 괴롭습니다. 천국 갈 마음도 싹없어지는데요. 천국 가서 재판해야 됩니까?‘라고 하실 거예요.
미리 결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왜냐 하면 이 말씀은 우리보고 이걸 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이 말씀이 표준인데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왜 그렇게 편하죠? 부모가 자식보고 ‘얘, 너 이번에 성적이 몇 등이야?’ ‘10등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반에서 1등해.’ 그럼 ‘아빠, 너무 부담돼요.’ 하면 ‘내가 너보고 1등하라고 하는 말은 네가 죽었다 깨나도 절대로 1등은 못한다는 말을 하는 거야.’ 할 때 왜 그 듣는 애의 마음이 왜 그렇게 편한지요.
모든 구약의 율법, 말씀은 율법적 기능이 있어서 어떤 인간도 이 율법을 못 지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얘야, 너는 1등을 해. 내가 1등을 하라고 해도 1등 못한다는 줄 알기 때문에 1등 하라고 하는 거야. 네가 죽었다 깨나도 1등 못해. 네 머리가 누구에서 나왔는데, 내 머리에서 나왔는데, 내 머리가 1등 못하니까 너도 1등 못해.’라고 아예 단정을 지을 때 그 애가 진짜 시험을 쳤는데 만약에 또 1등을 못하고 또 15등 했다 할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역시 나는 안 돼, 1등 못해.’라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될 거죠. 지금 설교가 이상한 데로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난 1등 될 실력이 못 돼.’라고 하면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거예요. 천국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했지만 그걸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미안하다, 미안하다, 란 그 말만 남는다는 거예요. 박상민이 부른 노래 해바라기 가사에 나오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건 껍데기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은 1등 못해서 죄송합니다. 말씀 못 지켜서 죄송합니다. 그럴 때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그 많은 스트레스는 다 날라 갑니다. 우리가 뭔가 쫓기고 있는 인생, 우리가 뭔가 쫓기고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쫓기고 있거든요. ‘나 바보 아니야, 나 등신 아니야, 나 똑똑해, 나 잘난 사람이야.’ 그런 것들이 오는데 그런 것들이 있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반드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압제하게 돼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왔던 산업 자들 압제하게 돼 있고 옌변 사람들 ‘이래서 밥 먹고 살겠니?’ 하는 조선족 사람들, 취직하려는 그들을 무시하지 않게 돼 있어요. 그러면서도 사실은 무시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누가 제대로 이야기해 줄 때 ‘너는 못해. 이건 안 돼, 너는 될 수가 없어.’라고 할 때 그것이 계속해서 누적되고 쌓이고 쌓이게 되면 ‘도대체 그럼 내가 산다는 것은 누구 덕분에 사는 거야?’ 다시 한 번 누구 덕분에 사는 거라고 바라보면서 그분의 주신 사랑에 보답 못할 때 사랑이란 말 대신에 차라리 ‘미안합니다.’란 말로 그분 앞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참 모든 면에 죄송합니다. 제대로 영광 못 돌리고 제대로 보답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말을.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바로 오늘날 신약 시대 성도들로 하여금 이대로 어떤 누구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제발 사람들 의식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기죽지 말라는 이야깁니다.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지배하거나 통치하는 것을 허용하거나 용납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담은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같은 죄인이 돌을 들고 남을 돌을 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재판하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어느 누구도 돌을 들고 남을 재판할 수 있는 자격자나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누가 비판하느냐, ‘네가 비판한 그것으로 오히려 비판받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신 그분만이 장차 우리의 진정한 영원한 재판장이 되는 그 나라, 그 나라가 새 나라입니다.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의 특징은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세상, 정말 멋진 세상 아닙니까? 어른들이 애들 딱지 많이 갖고 있으면 어른들이 그걸 부러워 미칩니까? ‘너는 좋겠다. 딱지 많아서.’ 어른들에게는 딱지는 그냥 폐지에 불과하죠. 현찰이 있는데 왜 딱지를 좋아합니까? 그런데 애들 세계에서는 구슬, 딱지, 이런 것 가지고 마치 부자 된 것처럼 그게 없는 자들을 핍박하고 압제합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 속에.
우리 주님 보세요. 하늘에서 주님 볼 때에 ‘돈 없다. 부자 안 됐다.’ 할 때 남들은 우리를 무시하지만 우리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어떻겠습니까? 그걸 무시하는 인간도 나쁘지만 무시당해서 슬퍼하는 인간도 마찬가지로 그것도 문제 있어요. ‘어디서 딱지 놀이해?’ 어디서 세상에서 딱지놀이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그게 의미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난한 자로 오셨잖아요. ‘나 아무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천국이 뭐냐를 이제부터 이 본문 가지고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천국 이전에 먼저 천국 아닌 나라가 먼저 등장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천국 아닌 자가 있는데 거기 아닌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창세기 4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 아내가 여러 명이죠. 라멕이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인진대 라멕을 이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라 하였더라 말이죠.
법이죠.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멕 본인이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아내들이여 내 소리를 들으라” 이게 엘리트 관료층이죠. 엘리트 지도자입니다. 이게 도시입니다. 고고학적 도시는 약 BC 5000년경에 나타났어요. BC5000년경에 먼저 도시가 나타나고 국가가 나타났는데 이때 농업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냥 유리하지 않고 정착하면서 농업 생산성이 많아지면서 거기서 생산이 남아돌 때 생산이 남아돌면서 일 할 필요가 없는 자가 등장하면서 그들이 소위 엘리트로 작용합니다. 그들은 남이 노동해서 얻은 자원들을 약탈하고 착취함으로써 그 모아진 힘을 가지고 네트워크, 그 힘을 가지고 다시 조직화해서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더 상대적으로 빈곤한 층으로 만드는 그러한 일들을 해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높아지는 일을 했어요.
이게 마르크스 이론인데 이게 하향이론이라는 겁니다. 국가가 만든 이론에 두 가지가 있어요. 하향이론, 위에서 지배하는 이론, 궁예 같은 경우에 깡패 아닙니까? 궁예가 삼국시대 이후에 돌아다니면서 깡패 짓해서 나라를 만든 나라, 궁예거든요. 옴~ 하는 그 사람 이예요. 하여튼 불교를 동원해서 자기가 메시야, 불교에도 메시야 있어요. 돌아올 재림 부처라 하는데. 하여튼 돌아보면 종교라 하는 것은 다 비슷비슷해요. 이걸 하향구조가 했어요. 착취함으로써 그 국가가 단단하게 유지되는 겁니다. 그들이 착취한다고 다 착취하는 거 아니에요. 그들은 가끔은 일본 말 써서 죄송합니다마는 ‘기마이‘라고 하잖아요. 한번 기마이 해주는데 기마이 하는 날이 언제냐 하면 바로 신에게 제사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그래요. 저 남태평양의 추장들, 종족들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하는가 보세요. 기마이를 써요. 기부를 해요. 배려를 해주고 너무 등쳐먹으면 너무 나쁜 사람 되니까 일종의 쥐었다 폈다, 들었다 놨다, 풀어줬다 쪼았다 이렇게 하면서 어장관리를 하는 거죠. 조폭들이 나이트클럽에 돌아다니면서 너무 가져가지만 때로는 술로 푸고 기마이 쓰는 것처럼 뭔가 무상으로 베풀어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나서서 다른 종족의 땅과 자원을 착취할 전쟁이 났을 때 ‘네가 그냥 얻어먹은 인간들아, 나의 전쟁에 네가 무기 들고 참전해서 도와줘.’ 할 때 얻어먹은 사람이 입 다물고 가만있겠습니까? ‘형님, 도와드리겠습니다.’ 얻어먹은 게 있기 때문에.
그러니 이 착취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뭔가 베풀어 줄 때는 아쉬울 때 나중에 두 배, 세 배 뜯어먹으려 하는 노림수가 다 있어요. 그게 바로 놀면서 남의 자원을 뺏어먹는 착취이론에 의하면 이게 바로 엘리트 국가 관료들인데 이것이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그 짓을 한 겁니다. 이게 마르크스는 맞다고 이야기하고 그 이론 말고 상향이론이 있어요. 위쪽으로 향해서 나오는 게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서로서로 어떤 집단이 효율적으로 유지되려면 우리가 알아서 어떤 어른들, 뛰어난 영웅들을 이렇게 받들어 모셔야 된다는 겁니다.
지난주일 낮에 이야기했지만 왕이라는 것은 자기가 왕 노릇 해서 왕으로 인정해서 왕이 아니고 백성들이 왕이라고 인정해줄 때만 왕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 이론에 의하면 이건 인간 사회 뿐만 아니고 모든 사회, 인간이 진화론에 의하면 단 세포에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그러한 남 조류에 의해서 이게 새롭게 대기의 산소가 많아지면서 거기서 생물들이 햇빛이 에너지로 변하는 그러한 기능을 하고 그게 조직화되고, 조직화되고 이러면 그때 꿀벌이나 개미 같은 경우에 페르몬이라는 화학물체가 흰개미한테 나오게 되면 흰개미는 그 화학물체에 의해서 소통하고 서로 의존하는 거예요. 재미없죠? 이 이야기.
사회라는 것은, 인간사회를 알려면 개미사회를 보면 된다. 베르나르란 유명한 프랑스 작가가 쓴 개미란 책에 보면 나와요. 개미란 사회 구성원, 성경 잠언 서에도 나옵니다. 구성하는 것이 인간들의 사회 조직과 얼마나 닮았는지 이거는 자발적으로 자진해서 하나의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는 거예요. 김장한다 하니까 벌써 다 나와 있잖아요. 전부 다 서로 의존하고 의지할 때 거기에 어떤 뛰어난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어 모심으로써 공동체 유지한다. 이게 상향되는 거예요. 지도자에요.
그러면 그 지도자가 과연 성경에 있느냐? 있습니다. 실제는 없는데요. 그런 의견을 제시한 적은 있었어요.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나눠질 때 남쪽에 르호보암이란 왕이 등장합니다. 솔로몬 이후에 북쪽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으로 남북으로 우리나라처럼 갈라지거든요. 그 르호보암 왕이 솔로몬 왕과 같이 국가 경영에 참여했던 늙은 신하한테 묻습니다. ‘나라가 어떻게 하면 나라가 되겠습니까?’ 할 때 ‘먼저 왕이 백성의 종이 되시면 백성은 당신을 섬길 겁니다.’ 이건 중국의 노자나 공자 그런 책에도 나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왕이라 하는 것은 백성의 머슴일 뿐이지, 제발 네가 돛대라. 이렇게 왕 노릇 할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기서 우리가 사회 이론에서 인간 철학에서 빼먹은 게 있어요. 국가의 조직에 나중에 다니엘에 나옵니다만 짐승인 악마가 개입한다는 사실을 사회학이나 철학이나 진화론이나 과학에서는 그걸 빼먹고 이야기해요.
처음에 사울은 섬기는 종으로서 왕이 되었습니다. 맞죠? 분명합니다. 그런데 악신이 걸려버리니까 악마의 개입 이예요. 인간들만의 사회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국가 건설에 개입하도록 용납을 하고 허용을 해버려요. 왜냐 하면 악마가 들어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씀이 들어가고 언약이 들어가고 성령이 들어가서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은 인간들 모아놓고 천국이 아니라 먼저 인간들을 점령한 점령군을 건드려서 점령군의 정체를 폭로 과정을 통해서 이 인간나라를 천국으로 바꾸는 작업, 이거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이걸 사회학이나 철학에서나 인간의 학문에서는 이걸 몰라요. 그냥 개미하고 인간이 똑같다 하지.
스탈린이라는 러시아의 독재자는 무려 천오백 만 내지 이천 만 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2차 대전 때. 저 로마의 유명한 네오 황제는 로마에 불을 지르고 자기는 시를 지었어요. 북한의 김일성부터 이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숙청했습니까? 이 숙청은 지금도 멈추지 않습니다. 모든 큰 교회마다 숙청이 다 일어나요. ‘내 아들 목사 되겠다는데 반대파 나와.’ 이래서 장로들 목 다 날려버립니다. 대를 이어 충성하겠다는데 반대 하는 사람 나와, 저한테 아들 없는 게 참 다행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ㅎ
모든 사회는 동호회, 낚시회, 바둑 회 관계없어요. 게 모임 어느 모임이든 처음에는 ‘이번 새 회장님 박수로 환영하세요.’ 해서 할 그때는 좋았지, ‘섬기겠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부녀회 회장도 처음에는 다 섬긴다고 다 해요. 나중에 하고 난 뒤에 커미션 들어오고 업자들과 엮이게 되면 그 자리 못 내놓습니다. ‘반대파 나와’ 숙청해 버립니다. 라멕? 라멕 이야기 아니에요.
다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선하고 마음속으로 주의 법을 원해도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않고 바르게 한다 해도 막상 그 자리 앉아 놓으면 ‘감히 나보고 나가라 해? 누구야? 우리교회 이만큼 됐는데, 누군데? 싫으면 네가 나가. 왜 내가 나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목사가 설교를 해요. 이제사 말한다. 이제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어느 자리에나 다 들어있어요. 모든 조직에 다 들어있습니다. 가정에도 있고요.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조직이든 천국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서 너무 미련이나 애착, 집착하지 맙시다. 뭔가 이상 사회, 반듯한 나라, 기대하지 맙시다. 정의구현 사제단 되지 맙시다. 세상에 이 세상에 이상 나라 없어요. 그냥 살다가 다 같이 죽읍시다. ‘아! 세상 더럽구나.’ 더러운 이유가 내가 권력이 없어서 더럽다 하지만 내가 만약에 더럽다고 외치고 있는 내가 만약에 그 자리 앉으면 나도 내가 욕했던 자와 똑같이 어떻게 판박이처럼 똑같은 그런 인간으로 돌변합니다. 권력 있고 돈 있는데 미쳤다고 내놓습니까? 그걸, 안 내놓지.
교회 가면 이랬으면 좋겠어요. 목사라는 사람을 집사 시키고 집사하는 사람을 목사 시켜 봤으면. 목사로 그 자리 버티고 있는가. 아니면 더럽다고 뛰쳐나가는지 한번 보자.
오늘 제목이 등 돌린 백성입니다. 당연합니다.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푹 떠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입힙니다. 우리가 이 자리 있는 이유는 어떤 말씀도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악마가 이미 지배하고 있는 그런 인간일 뿐인데 그 자리에다 주의 십자가가 나타나게 하셔서 ‘너는 그동안 악마하고 잘 놀았다.’는 것을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오직 그 십자가 피로만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증거 할 때 그 증거가 지금부터 시작되게 되면 영원토록 천국에서 오직 주님께만 감사한다는 그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좋다 하면서도 권력 주면 권력 좋다 하고 돈은 별게 아니라고 하면서 막상 돈 들어오면 예수를 버리는 그런 본성을 갖고 살아가는 저희들을 이 시간도 다시 한 번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세리와 창기 같은 너희 죄인이, 죄인을 부르러 내가 왔다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인생의 3대 기본실천 덕목
슥 7:8-14
금식은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단식이 아니라 자신의 요구사항조차 보이지 않게 되고 오직 하나님만 보이게 되려는 몸부림입니다. 또한 금식은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금식의 중요한 내용은 ‘정성과 노력’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금식은 ‘문제해결을 위한 정성스런 도구’라기보다는 ‘목표전환과 가치관전환을 위한 결단’입니다. 즉 금식과정보다 금식 후에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금식이란 외적인 의식보다 말씀을 듣는 마음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며 특히 3가지 기본실천 덕목을 언급합니다.
1. 정의
먼저 하나님은 진실한 재판을 권고합니다(9절). 이 말씀은 바르고 정의롭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은 소중한 일이지만 그것이 정의는 아닙니다. 많은 사회운동이 부작용을 낳는 것도 정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정의란 정확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부자 편을 들거나 가난한 자의 편을 드는 치우침이 없이 오직 진실의 편을 드는 것이 정의입니다.
어렸을 때 가끔 저의 두 딸이 싸웠습니다. 어떤 때는 누가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서 바른 판단을 해야 자녀를 상처 없이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익과 이익이 다툴 때는 진실한 판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정의로운 판단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때마다 겸허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바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2. 사랑
살면서 바르고 정의로운 판단만 가지고는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정의의 바탕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려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9절). 살다 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때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시오.
두 딸이 싸울 때 분명히 그 싸움의 원인제공을 한 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싸움의 원인을 밝혀서 더 잘못한 딸을 가려내어 더 야단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성과 어린 딸의 미성숙함을 생각하면 싸움하는 두 딸이 모두 안쓰럽고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함을 느낍니다. 그처럼 바르고 정의롭게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인애와 긍휼의 마음이 그 바탕에 깔려야 합니다.
3. 섬김
하나님은 인생의 기본실천 덕목으로 어려운 이웃의 섬김을 강조합니다(10절). 하나님은 섬김 받는 사람도 축복하지만 섬기는 사람을 더 축복합니다. ‘투철한 의식’보다 ‘투철한 섬김’이 더욱 소중한 축복의 원천입니다. 상처 받은 영혼을 살리려면 함께 울어주는 것도 필요하고 같이 근심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 어둠은 물러나고 곧 빛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어느 날, 한 수도사가 성자 호칭을 받는 한 비천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를 찾아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어떻게 사람들로부터 성자란 호칭을 얻었나요?” 그때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몰라요. 다만 나는 사람들이 구두를 맡기면 언제나 예수님의 구두를 수선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선해요.” 최선의 섬김은 비천한 사람도 최대의 성자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의식보다 정의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진노를 받았고, 기도응답이 막혔고, 그 땅이 황무해졌습니다(11-14절). 말씀을 멀리하면 불안감이 커지고, 인생이 암울해지고 곳곳에서 삶이 펑크 납니다. 반면에 말씀을 잘 지키면 고민했던 문제들이 풀리고 삶이 경쾌해지고 기도응답도 신속해집니다. 그리고 기도응답 전에 이미 심령이 행복해집니다. 인생의 내용은 선택과 결단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택과 결단의 순간에 항상 말씀을 따른 선택과 결단을 하십시오.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
스가랴 7:1-14 / 한마음교회 서은철 목사
요절 7:9,10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6장까지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8개의 환상을 연속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 건축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고, 참 성전을 지으실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월 중에 행하던 금식을 계속하며 근신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에 70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던 5월을 기억하며 한 달 동안 금식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한지도 약 20년이 지났습니다.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한지도 2년이 지나 성전 건축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5월 금식을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한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을 내놓으셨습니다. 한 가지는 7장이고, 다른 한 가지는 8장입니다. 스가랴 7장에서 금식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참된 경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경건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바로 스가랴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배우고 실천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그 금식이 나를 위한 것이냐(1-7)
1절을 보십시오. “다리오 왕 제 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다리오는 바사 왕 고레스의 장인 다리오가 아니고,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리오입니다. ‘기슬래월’은 유대 음력 9월, 양력으로는 11월에 해당합니다. 그 달 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습니다. 말씀이 임한 날짜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허공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에게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속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물어 왔습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벧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하여 벧엘에 작은 마을을 재건했습니다(스 2:28; 느 7:32; 11:31).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사라셀과 레겜멜렉과 부하들을 보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행해왔는데 오월 중에 울며 계속하여 근신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5월 17일에 불탔습니다(렘 52:12,13).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5월이 되면 그 참혹한 날을 기억하면서 울며 금식을 했습니다. 이스라엘로 귀환한 후에도 20년 동안 금식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성전 공사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계속해서 울며 금식해야 하는지 물은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귀환한 유대인들이나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나 묻고 싶은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습니다. 5-7절은 스가랴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습니다. 5월은 성전이 불타고 무너진 달이요, 7월은 바벨 군대에게 유대 총독 그달리야과 남은 유대인들이 살해된 달입니다(왕하 25:25,26; 렘 41:1-). 하나님은 그들이 70년 동안 이 날들을 기억하면서 금식하고 애통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이 말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애통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금식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적 슬픔을 달래는 금식일 따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 달씩 금식하는 것을 큰 공로로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우리는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사 58:3)라고 따졌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정말로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사 58:5). 하나님은 금식하는 그 외형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며 회개하는 심정을 받으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먹고 마실 때는 금식하지 않을 때를 말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평소에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은 금식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금식은 평소 생활의 연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소에 자기를 위하여 먹고 마시는 사람은 금식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은 금식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0:31).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그 때에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여러 성읍에는 거주하는 사람의 수가 불어나고, 사람들이 마음을 놓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남쪽 네겝과 스불라 평원에도 사람의 수가 불어났습니다. 그들이 평화롭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 옛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모든 지방의 백성들이 잘 살고 있던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요, 그들은 바벨론에 잡혀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금식하여 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70년 동안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의 근본은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청종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느냐?’하나님은 그 종들을 통해서 말씀을 외치시는 분이시니다. 외치셨다는 말은 부르짖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부르짖으시며 회개를 촉구하시고 위험을 알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먹고 마시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안할 때에 말씀을 주시고 순종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성경 읽을 때에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범죄하려 할 때에 성령께서 그 속에서 “안 돼!”라고 강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말씀이 때로는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나중에 징계를 받고, 금식을 백번 하는 것보다 백배 낫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막막합니다. 산다는 자체가 얼마나 두렵고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니 우리가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합니다. 캄캄한 세상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밝혀 주십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모든 것을 잃은 후에 금식하는 것보다 평온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백배 낫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금식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금식보다 낫습니다. 금식은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참회하는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II.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8-10)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다시 임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멸망하기 전에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함으로 서로에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소외된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힘이 있다고 약한 자들에게 갑질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항상 소외된 약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들을 학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압제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히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넷째, 서로 해하지 말고 마음에 악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해하려고 심중에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보실 때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악한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그 마음에 간음했다고 정죄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 기도를 계속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참된 경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은 무엇입니까?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6-27)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경건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참된 경건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을 힘에 지나도록 하여 거대한 교회를 짓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경건은 중요시합니다. 금식도 잘 합니다. 철야기도를 합니다. 새벽 기도회는 세계에서 알아줍니다. 연초가 되면 영성집회를 합니다. 세계 10대 대형교회가 한국에 있습니다. 주일마다 구름 떼같이 많은 교인들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한국인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부흥은 20세기의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의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인구의 1/6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서로에 대한 인애과 긍휼이 없습니다.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외국인 나그네들에 대한 차별이 심합니다. 특히 동양인들에 대한 배려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지니까 맛 잃은 소금처럼 불신자들에게 밟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참된 경건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일터에서나 사회에서 갑질을 하지 않고, 참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III.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1-14)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아예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귀머거리 독사와 같았습니다(시 58:4). 독사처럼 머리를 빳빳하게 쳐들고 하나님을 향하여 혀를 날름거렸습니다. 금강석은 돌 중에 가장 단단한 돌입니다. 마음이 금강석처럼 굳어져서 하나님이 옛 선지자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 전한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겔 3:9; 11:19).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개떡같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막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에 대해서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 가운데 부르짖어도 부르짖음을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리바람으로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렇게 비참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스스로 초래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였습니다.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한 것은 바로 그들 자신들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순종했을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도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2,23) 사울은 사무엘에게 자기와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거절했습니다.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 15:26) 사무엘은 사울이 너무 안타까워서 오랫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책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삼상 16:1)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것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우리를 외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거두는 것도 달라집니다. 선한 것을 심는 사람은 선한 것을 거두고, 악한 것을 심는 사람은 악한 것을 거둡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금식이나 경건을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느냐, 듣지 않고 멸시하느냐, 그것을 보십니다. 평상시에 평화로울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소에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경건을 행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심장이 기능을 멈추자.....
스가랴 7:8–14
인간의 장기중의 생명의 근원이자 삶의 중심이 되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장입니다
심장(心臟, 영어: heart) 또는 염통은 가슴의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근육질로 둘러싸인 혈액을 들리고 보내는 역할을 하는 인체 순환 기관입니다.
심장은 인체에 퍼져 있는 총 80,000km(성인 기준) 이상 되는 혈관으로, 날마다 쉬지 않고 혈액을 순환시킴으로써 물질대사를 비롯하여 인체가 살아있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선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심장이 건강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인생,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신앙의 심장이 튼튼하고 건강해야겠습니다
신앙의 심장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계명의 두 돌판에 반영되어 있으며 구약의 율법의 정신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팔도 쓰고 다리도 사용합니다 온 몸을 움직여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합니다.
정말 많은 일들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섬김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두가지 섬김의 현상이 있습니다
1)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하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은혜로 하는 사람이고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은 의무로 하는 사람입니다
의무로 섬기시는 분들은 물론 처음에는 감동으로 은혜로 교회일을 하고 섬김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요인으로 심장의 기능의 이상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던지, 삶의 고난이 닥쳐왔다든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데 충족이 안된다든지 .... 그래서 봉사를 하거나 교회를 정규적으로 다니면서도 은혜는 식고 매사 차갑게 반응하며 판단하고 정죄하고 원망하면서 교회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힘들고 고된 교회생활이 뒤따릅니다 마치 엔진이 고장난 차를 밀고 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자주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멈추면 신앙생활은 다양한 병들을 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스가랴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쓴 책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이 지난후 1차 귀환때 스룹바벨이 작으나마 성전을 짓기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무려 여덟 번에 걸쳐 환상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회복과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이루어질 것을 전하는 강력한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70년 동안 다섯 째 달과 일곱 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해 하였습니다
5월의 금식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것을 슬퍼하는 금식이었고 7월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임시 총독으로 있던 사반의 손자 그다랴가 이스마엘에게 살해 당함으로 남은 유다 백성들이 망한 것을 슬퍼하는 금식이었다. (렘41:1~2)
나라가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잿더미가 되었는데 슬픔의 역사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70년간 이어져 오는 금식과 눈물의 기도, 이것은 유다 백성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랑이고 선민의식에 대한 긍지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심장에 이상이 왔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근거하여 금식을 하고 기도하던 일들이 자신의 자랑과 자기 의로 변모하고 만 것입니다
5-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현대인) 슥7:5 '너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나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 주어라. '너희가 지난 70년동안 5월과 7월에 금식하며 슬퍼하였는데 그 금식이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이었느냐 ?
슥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전적으로 너희 자신을 위해서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
즉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긍지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였던 것이 아니었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심장의 기능은 멈추어지고 몸만 움직인 것입니다
혈액이 공급이 안되었는데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랑의 심장이 멈추자 어떤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첫째로 생활에서 이상이 찾아옵니다 즉 말씀순종이 사라집니다
9-10절에 말씀하십니다
슥7: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슥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이것은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건강한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요약하면 ① 모든 판단에 진실로 접근해라 ② 서로에게 대할 때 정죄와 판단보다는 인애와 긍휼로 대하라 ③ 약자에 대한 보호하고 신경을 써라 ④ 해하지 않는 삶, 즉 서로 간에 잘 지내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롬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그런데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하면
슥7: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서는 봉사를 하는데 실생활에서는 이웃 사랑이 기능이 멈추게 된 것입니다
자기 사랑, 자기 자랑, 자기 과시가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삶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점점 더 멀리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아세라는 다산의 신입니다
양심도 말씀도 율법의 정신도 다 잊혀집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만족과 세상의 즐거움과 다양한 취미활동이 인생의 낙이고 기쁨이고 만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속은 비어가는데 영혼은 초라해지는데 외적인 기쁨과 육신의 만족에 열정과 에너지를 계속 쏟아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천하보다 귀하고 하늘보다 깊고 바다보다 넓어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가슴 깊은 곳에, 그리고 이 깊은 영혼의 자리에 자리해야 비로서 참된 만족과 생의 생기와 역동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자랑해도 그리고 열심히 자기를 완성해나가도 그래서 소정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내 심장속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혈액이 흐르지 않는다면 텅빈 영혼이 되고 멈추어버린 심장이 되어서 여기저기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망합니다 고독합니다 외롭습니다 쓸쓸합니다
내려갈까봐 두려워집니다 놓칠까봐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탐욕을 부리고 불의를 행하고 외면을 화려하게 치장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심장이 건강하면 내면 깊은 곳까지 은혜의 혈액이 흘러 들어가서 감사와 감격이 회복되실 것입니다
둘째로 아름다운 삶에 황폐함이 찾아옵니다
슥7:14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황폐함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마인데 경악, 놀라운 일 이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놀라운 일들입니까?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제 북 이스라엘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침공을 당합니다 그리고 3차에 걸처 많은 사람들이 70년동안 유배를 당합니다 사람들은 살육을 당하고 성문은 불타고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은 돌위에 하나도 남김없이 다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계속 놀랄 일들만 남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황폐함입니다
그 원인과 형상은 세가지입니다
1)보호장막이 사라졌습니다 성벽도 천사도 하나님의 마음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2)마음의 중심이 사라졌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어집니다 삶의 중심추가 무너진 것입니다 성전이 없으니 어느곳에서도 평안과 안식을 얻을수 없게 된 것입니다
3)외부의 공격이 계속파도처럼 이어지는 것입니다 물질의 문제 사람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심지어는 마귀의 공격까지 파도처럼 밀려와 강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땅이 황폐하고 만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가난해지고 병에 걸리고 모두가 떠나버리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원래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은헤가 있었고 감사가 있었고 열매가 풍성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심장이 멈추자 그들의 땅은 망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혹시 내 인생은 왜이리 힘들고 고달픈가 ?
내 삶은 왜 이렇게 화폐해지나? 깊은 탄식이 있으신 분이 계십니가? 걸음을 멈추시고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오시길 기도드립니다
호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11: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호11: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그렇습니다 고치시는 분은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지명하시고 부르신 우리 주 나의 하나님께 손을 들고 나아오시길 축원드립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했어도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고 있어도 그리고 직함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심장의 기능이 멈추고 은혜의 피가 온 몸을 돌지 못한다면 우리는 금강석처럼 굳어지고 완악해지고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고 섬김을 하고 직분을 감당을 해도 하나님의 마음이 내 가슴에 없다면 지치고 힘들고 괴롭고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량없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고 인정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헤쳐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한 것 같지만 주님의 손길이 있었고 하나님의 도와주심이 있었습니다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하신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조건과 세상의 가치로 비교할 필요없이 내 모습 이대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누가 함부로 판단을 하고 손가락질 할수 없는 내 삶의 신비와 소중함이 내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그 극하고 모진 시간들을 버티고 견디고 뚫고 나오신 것이 아닙니까?
무엇으로 그렇게 헤쳐나온 것입니까? 은혜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헤쳐 나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깊이 깨닫습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구나....
그런데 이런 나를 구원하시니 이제는 내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물거품같이 허망한 자기 의, 자기 자랑, 자기 과시가 다 사라지고 은혜로 가득차게 되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이 시간 다시 우리의 심장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은혜로 따듯하게 뎁히시길 기도합니다
오직 예수뿐이네 찬양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금강석 같은 마음
슥 7:8~14 / 송기현 목사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에 많은 피해를 남긴 태풍 '차바'가 휩쓸고 지나간 후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주의해야 할 질병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심혈관들이 굳어지고 좁아져서 터지는 것과 같은 심혈관질환입니다. 이 질병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2위이고, 세계인의 사망원인 1위가 바로 심혈관질환이며, 1시간 안에 사망하는 돌연사 역시 심혈관질환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혈관이나 피부나 관절 등은 부드러울수록 좋습니다. 굳어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소리없이, 통증없이 다가오는 강력한 현대인들의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굳어지는 병입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자신도 파멸에 이르는 악독한 사람이 되지만, 그렇게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로 인해서 세상은 황폐해져가고 있고 사회는 불안해지고 있으며, 무서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굳어 돌 같이 되는 것도 안타까운데 오늘 본문말씀에는 돌중에서도 "마음이 금강석같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굳어지고 강팍해졌으면 이런 표현을 하나님께서 성경에 쓰셨겠습니까?
금강석이 무엇입니까? 금강석은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립니다. 이 다이아몬드는 현재까지 알려진 자연산 물질 중 굳기, 즉 경도(硬度)가 가장 높은 광물이자 가장 대중적인 선호도를 지니이면서 값비싼 보석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소유하고 싶어하고 소유하고 있다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값비싸고 좋은 금강석이라도 이것이 성경에서와 같이 인간의 마음을 비유할 때는 가장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인애와 긍휼을 베풀어주어야 할 연약한 사람들에게 무정하고 포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금강석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바늘은 커녕 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강팍한 마음이 금강석같은 마음입니다. 인애도 없고 긍휼도 없는 사람들, 사랑이라고는 약에 쓸려고 눈을 씻고 찾아보다도 눈꼽만큼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서 등을 돌리고 귀를 막고 마음을 금강석 같이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부드러울수록 좋습니다.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향해서는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날카롭게 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데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갖는 마음에는 부르러움과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 보다 더 연약한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피가 통하고 정이 통하고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 수 있고 교훈이 통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금강석같은 마음'을 성경에서는 많은 다른 표현들로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막 3:5절에서는 "완악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 6:10절에서는 "둔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시 119:70절에는 "지방같이 살찐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겔 36:26에서는 "굳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심하게 무디어져서 감각이 전혀 없고 또 심하게 딱딱하게 되어서 부드러워질 소망이 전혀 없음을 말해줍니다. 감동하고 슬퍼하고 애통해야 할 마음이 금강석 같이 딱딱하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금강석 같은 마음은 혈관이 굳어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한 것입니다. 혈관이 굳어지는 것은 개인 한 사람의 불행으로 끝날 수 있겠으나 마음이 금강석 같은 사람으로 인해서는 수 많은 사람, 심지어는 나라와 민족이 화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금강석 같은 마음이 스가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11절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향하여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의 불의를 타이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불순종과 모든 악을 버리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지 않으려고 하나님과 그 선지자들로부터 등을 돌렸고, 귀를 막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말씀을 듣지 아니하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첫 반응은 듣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것입니다. 이렇게 듣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마음의 강도가 바로 금강석과 같은 단단한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이렇게 하려면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금강석같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금강석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오게 되고 하나님도 결국은 등을 돌리게 합니다. 13절에서는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자신을 파괴하고 삶이 황폐해지는 이유는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터를 주시는데 사람이 불의의 씨를 뿌려 재앙을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주신 아름다운 터에 의로운 씨를 뿌려서 복된 열매를 거두고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금강석 같이 굳은 마음 대신에, 피가 통하고 정이 통하는 부드러운 마음, 부드러운 영을 주시도록 간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굳은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깨어지기 전에, 그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연스럽게 순발력 있게 부드러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