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mayfly)와 좁쌀 같이 살지말고 절대자유를 구가하라.
莊周의 逍遙遊 齊物論에
"小知不及大知(작은 지식으로는 큰 지식을 따라잡지 못하고)
小年不及大年[짧은 세월(목숨)로는 긴 시간을 헤아리지 못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평생 날개 한 번 접지 못하고 버둥대며 살다가 죽어가는 하루살이.
장자는 인간을 하루살이에 비유하여 지구나 우주의 긴 역사를 다 헤아리지 못함을 지적했다.
‘아침에 피는 버섯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알지 못하고, 여름에 나고 죽는 쓰르라미는 봄가을과 겨울을 알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밤과 새벽을 알 리 없고, 여름벌레는 눈과 얼음을 알 리 없다.”
“한 조각 좁은 배를 타고 술을 들어 서로 권하니,
천지간에 하루살이 인생이요,
창해에 한 알갱이 좁쌀이로다.”
판소리 <적벽부>
絶代自由를 구가하라 - 莊周
先秦庄周的《逍遥游·节选》
北冥有魚,其名為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者,天池也。
《齊諧》者,志怪者也。《諧》之言曰:「鵬之徙於南冥也,水擊三千里,摶扶搖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野馬也,塵埃也,生物之以息相吹也。天之蒼蒼,其正色邪?其遠而無所至極邪?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則其負大舟也無力。覆杯水於坳堂之上,則芥為之舟;置杯焉則膠,水淺而舟大也。風之積也不厚,則其負大翼也無力。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而後乃今培風;背負青天而莫之夭閼者,而後乃今將圖南。
蜩與鷽鳩笑之曰:「我決起而飛,槍榆枋而止,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奚以之九萬里而南為?」適莽蒼者,三餐而反,腹猶果然;適百里者,宿舂糧;適千里者,三月聚糧。之二蟲又何知!
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楚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為春,八千歲為秋,此大年也。而彭祖乃今以久特聞,衆人匹之,不亦悲乎!
湯之問棘也是已(탕지문극야시이)
窮髮之北有冥海者(궁발지북유명해자) 天池也 有魚焉
其廣數千里 未有知其脩子
其名爲鯤
有鳥焉 其名爲鵬
背若泰山(배약태산) 翼若垂天之雲(익약수천지운)
搏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박부요양각이상자구만리)
絶雲氣(절운기) 負靑天(부청천)
然後圖南(연후도남) 且適南冥也(차적남명야)
斥鴳笑之曰(척안소지왈)
彼且奚適也(피차해적야) 我騰躍而上(아등약이상)
不過數仞而下(불과수인이하) 翺翔蓬蒿之間(고상봉호지간)
此亦飛之至也(차역비지지야) 而彼且奚適也(이피차해적야)
此小大之辯也(차소대지변야)
故夫知效一官(고부지효일관) 行比一鄕(행비일향)
德合一君(덕합일군) 而徵一國者(이징일국자)
其自視也亦若此矣
而宋榮子 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 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竟 斯已矣
彼其於世 未數數然也
雖然猶有未樹也
夫列子 御風而行
泠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彼且惡乎待哉
故曰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북녘 검푸른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鵬이라 한다. 이 붕새의 등 넓이 또한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온몸의 힘을 다해 날면 그 활짝 편 날개는 하늘 한쪽에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붕은 바다 기운이 움직여 大風이 불 때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하늘 못인 天池이다.”<소요유 1>
제해(齊諧)라고 하는 사람은 괴이한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제해(齊諧)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붕(鵬)이 남쪽 바다로 날아 옮겨 갈 때에는 〈그 큰 날개로〉 바다의 수면을 3천 리나 쳐올리고서 회오리바람을 타고서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유월의 거센 바람을 안고 날아간다. 그리하여 여기 북쪽 바다 상공을 떠나서 6개월을 계속 난 뒤에 비로소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아지랑이와 티끌은 〈천지 사이의〉 살아 있는 생물들이 입김을 서로 내뿜으면서 불어내 보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그 본래의 제 빛깔인가. 아니면 끝없이 멀고 멀기 때문일까. 붕(鵬)이 〈9만 리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무릇 물이 깊지 않다면, 큰배를 띄울 수 없을 것이다. 한 잔의 물을 작은 웅덩이에 부어 놓으면 땅에 닿아 버리는 것은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쌓이되 두텁지 않다면, 그 역시 큰 날개를 떠받칠 힘이 없게 된다. 따라서 9 만리 정도는 올라가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되어, 그런 뒤에 지고 거리낄 것이 없는 뒤에야 붕은 남쪽으로 날아가게 된다.
매미와 작은 새는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팔짝 뛰어 날아서야 겨우 느릅나무 위에 올라 머물 수 있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데, 무엇 때문에 9 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는 것일까?
가까운 교외로 나가는 사람은 세 끼 밥을 먹고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부를 것이나,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에 양식을 절구에 찧어 준비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 그 두 마리의 작은 벌레가 그러한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수명이 짧은 것들이다. 초 나라의 남쪽에 명령이라는 거북이 살았는데, 오 백 년을 봄으로 하고 또 오 백 년을 겨울로 삼았다. 상고 시대에 대춘 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것은 팔 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이것들은 수명이 긴 것들이라. 그리고 팽조는 지금까지도 오래 산 것으로 특히 유명한데, 세상 사람들이 그와 견주려 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은(殷)나라의 탕(湯)임금이 현자(賢者)로 이름 높은 극(棘)에게 물어서 들은 내용도 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초목이 나지 않는 불모지의 북녘에 검푸르고 어두운 바다가 있으니 그것은 하늘의 못, 天池입니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넓이는 수 천리이고 그 길이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새가 있으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합니다. 등은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 한 쪽에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습니다. 〈이 새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羊의 뿔처럼 빙글빙글 선회하면서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구름 위로 뚫고 나가 푸른 하늘을 짊어진 연후에 남쪽으로 가기를 도모하며 바야흐로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가려고 합니다. 메추라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고 하는 것인가. 나는 힘껏 날아올라도 몇 길을 지나지 않고 도로 내려와 쑥대밭 사이를 날아다닐 뿐이다. 이것이 또한 내가 날아다닐 수 있는 최상의 경지이다. 그런데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 가〉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저 지식은 한 관직을 맡아 공적을 올릴 만하고 행실은 한 고을의 인망(人望)에 비합(比合)하며 능력은 군주의 마음에 들어 한 나라에 쓰여지는 사람들도 그 스스로를 보는 것이 이 메추라기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송영자(宋榮子)는 이런 자기만족의 인물들을 빙그레 비웃는다. 그리하여 그는 온 세상이 모두 그를 칭찬하더라도 더 힘쓰지 아니하며 온 세상이 모두 그를 비난하더라도 더 흔들리는 바가 없다. 그러니 그는 자기의 내면과 밖의 외물(外物)의 구분을 뚜렷이 하고 영예나 치욕 따위가 바깥 경역(境域)의 일임을 변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할 뿐이다. 그는 세상의 평가에 대해 초연하기는 하나 비록 그러나 아직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는〉 주체성이 수립되지 않고 있다.
列子는 바람을 조종하여 하늘을 날아다녀 가뿐가뿐 즐겁게 잘 날아서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온다. 그는 〈세상의 평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속의 행복을 구하는 일에 대해서도 초연하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비록 걸어 다니는 번거로움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아직 무엇엔가 의존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저 〈바람 정도가 아닌〉 하늘과 땅의 바른 氣를 타고 육기(六氣)의 변화를 조종하여 끝없는 경지에 노닐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것이겠는가. 그래서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공적이 없고 성인(聖人)은 명예가 없다’고 한다.)
이는 <장자>의 첫 번째 편, 첫 이야기이다. <장자>에서 장자의 중요 사상인 絶代自由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 중 하나인 逍遙遊는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소요유는 노닐 소(逍), 노닐 요(遙), 놀 유(遊)의 문자적 의미인 ‘바람에 따라 나부끼는 깃발의 끈과 같이 얽매이는 바가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즉 장자에게 있어서 소요유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정신을 말한다.
원래 곤(鯤)은 ‘작은 물고기’나 ‘알’을 뜻하는데 우화(寓話)의 형식을 빌려 몇 천 리의 큰 물고기로 등장하고, 이것이 또 전설 속의 큰 새인 붕(鵬)으로 변하여 비상하였다. 여기서 붕(鵬)은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이것이 날아올랐다 함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인식의 超越을 상징한다.
바닷속에 갇혀 살아가던 물고기가 바다라는 얽매임에서 벗어나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 것처럼, 인간 또한 현실의 속박에서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보통 사람의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는 언어로 우리의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세상을 새로이 인식하도록 하면서, 가장 먼저 인간이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을 ‘化而爲鳥'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다.
無何有之鄕 – 파라다이스?
장자에게서 소요유, 즉 절대 자유 경지의 주체는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들이 소요하는 곳을 ‘無何有之鄕'이라 한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붕이 날아간 남쪽 바다(南冥)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향’이란 뜻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도 하다. 장자가 ‘무하유지향’을 권하는 것은 자신의 좁은 편견인 成心에 사로잡혀 이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모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인간 세계의 독단과 편견을 제거하려는 의도이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의 철학은 모든 성심에서 벗어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함으로 소요유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커다란 나무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 커서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탄하는 친구 혜자에게 그러한 제한된 관점에서 是非하는 마음이 없이, 無爲하며 逍遙하라 권하며 無用之用을 제시한다.
이는 우리의 제한된 이성적 사유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려는 것에 집착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초월함으로 새로운 세계와 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파라다이스는 장자가 꿈꾸는 ‘무하유지향’을 그대로 그려낸다.
無己 – 自己否認 자유의 세계, 즉 ‘무하유지향’에서 노닐기 위해서는 정신세계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장자는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다름 아닌 너무나 견고해 보이는 ‘나’라는 자아의식이라고 보았다. 장자는 이를 成心이라 하였다.
일상의 ‘나’라는 자아의식은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비교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상대의 크기가 생각보다 크다고 느끼면, 매미와 비둘기처럼 먼발치에서 비웃기에 바쁘다.
따라서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충실한 소요유의 주체를 형성하는 인간의 자세는 無己이다. 무기란 자기중심의 주관적인 판단 의식과 부귀공명에 속박되는 자아를 버리고, 자기의 정신이 물질세계의 인위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無爲自然적인 삶을 말한다.
그것의 전제조건은 喪我와 坐忘, 心齋이며, 이것들은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부정의 정신을 말해 준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인간을 구속하는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자유로움과 해방이 소요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살펴볼 기회가 있을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아(成心)를 가지고 있다. 즉 자기가 자신 삶의 주인이 되어 남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가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잘못된 자아, 거짓된 자아를 먼저 내려놓아야 참된 자유로 나아 갈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의 자아는 그렇게 쉽게 내려놓아지지도, 쉽게 변하지도 않는다.
평생 날개 한 번 접지 못하고 버둥대며 살다가 죽어가는 하루살이.
장자는 인간을 하루살이에 비유하여 지구나 우주의 긴 역사를 다 헤아리지 못함을 지적했다.
‘아침에 피는 버섯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알지 못하고, 여름에 나고 죽는 쓰르라미는 봄가을과 겨울을 알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밤과 새벽을 알 리 없고, 여름벌레는 눈과 얼음을 알 리 없다.”
“한 조각 좁은 배를 타고
술을 들어 서로 권하니,
천지간에 하루살이 인생이요,
창해에 한 알갱이 좁쌀이로다.”
판소리 <적벽부>
장자(莊子 : BC 369?~BC 289?)의 ‘소요유(逍遙遊)’ 라는 것이 있다. 장자는 춘추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周’다. 道家)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로 천지만물의 근원인 ‘道’는 정의할 수 없는 진리이며, 만물 어디에도 도가 존재한다는 일종의 汎神論을 주장했다. 장자는 인간이 사물의 양면성, 즉 전체를 살피지 못해 사소한 일에 一喜一悲하는 것이며, 세상의 유동성을 이해하고 사물의 진실을 연구한다면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인간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의식을 바꾼다면, 사물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죽음과 삶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장자는 만물은 하나이고, 차별 없이 평등하고, 생사도 하나이며, 꿈과 현실도 하나라고 했다.
그의 사상은 ‘胡蝶之夢’이라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어느 날 장자가 호랑나비가 되어 근심 없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지나치게 현실 같아 잠에서 깨어난 장자는 자신이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호랑나비가 자신이 된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자는 도가 어디에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무리 미천한 것에도 佛性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장자야말로 無碍自在의 도를 깨친 위대한 사상가였다. 장자 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기계적, 소모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장자는 우리에게 인생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풍’을 권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삶을 수단시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 이 삶이라는 여행이 무슨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이 여행 자체를 즐겨라.」 바로 이것이 장자의 ‘逍遙遊’다. 장자가 말한 ‘소요유’에는 글자 어디를 뜯어봐도 바쁘거나 조급한 흔적이 눈곱만큼도 없다.
‘소(逍)’자는 소풍간다는 뜻이고, ‘요(遙)’자는 멀리 간다는 뜻이며, 유(遊)자는 노닌다.‘는 뜻이다. ‘소요유(逍遙遊)’는 묘하게도 글자 세 개가 모두 책받침 변(辶으)로 되어 있습니다. 책받침 변(辶)은 원래 ‘착(辵)’에서 온 글자인데, ‘착’이란 그 뜻이 ‘쉬엄쉬엄 갈 착(辵)’이다.
그러니 ‘소요유’를 제대로 하려면 내리 세 번을 쉬어야 하는 것이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는 것’이다. 장자는 이렇게 자연의 도를 추구하며 無爲로 돌아가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인간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의식을 바꾼다면 사물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죽음과 삶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장자의 이러한 사상은 아내가 죽었을 때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아내가 죽자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친구 ‘惠施’가 장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에 장자는 “본래 삶과 죽음은 없었던 것이며, 뿐만 아니라 형체와 氣도 없었던 것이네. 혼돈 속에 섞여 있던 무언가가 변하여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고, 형체 속에서 삶이 생긴 것이네. 오늘 아내도 이렇게 변해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일 뿐, 이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반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삶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강물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네.”라고 말했다.
장자가 죽어갈 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안장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이를 보고 장자는 “염려하지 마라. 나는 천지를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벗으로 삼으며, 별들을 보석으로 삼고, 만물을 휴대품으로 삼으니 모든 葬具는 갖추어진 셈이다. 여기에 무엇을 더 좋게 하겠느냐?”
그리고 장자는 또 “露天에 버리는 것은 까마귀나 독수리 떼에게 뜯어먹도록 주는 것이며, 땅에다 묻는 것은 개미 떼나 땅강아지가 먹도록 주는 것이니 이 둘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것은 이쪽에서 식량을 빼앗아 저쪽에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즐거운 맛점하셔요
고마워요.
점심 맛나게 드시고.
한문이 많으니 난해해서 여기 사람들한데는 좀 거시기 한지 인기가 없는 글이 되었네...ㅋㅋㅋ
@심산(深山) 괜찬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