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3월 평양중학교를 졸업한 뒤,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横浜高等工業学校)(現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하였다. 1941년 12월에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마츠다·히라타 건축사무소[3]에서 3년간 건축실무를 익혔다. 1944년 서울에 있는 조선주택영단 기수로서 일하였으며, 광복 전 1945년 안양에 있는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에 근무하였다.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되어 건축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4]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사범대학을 비롯하여, 한양공과대학(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부산공업학교(현 부경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서울이 당면한 도시계획·건축 등의 문제에 대한 정부시책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1970년 4월, 준공 4개월만에 와우 아파트가 붕괴하자 라디오 동아방송에 출연하여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 때문에 본격 박정희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70년 8월 서울시 철거민 이주를 위해 졸속으로 추진되다 대규모 시민 봉기를 야기했던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을 때, 또 다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기재해 양택식 시장을[7] 강하게 비판한다. 사실 김중업은 그 이전에도 5.16 쿠데타 과정에서 육사 생도들이 쿠데타 지지 행진을 하자[8] "지금이 어느 땐데 관제 데모냐" 라고 비판하여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도 있었고, 박정희의 측근이 동빙고동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호화주택을 짓자 '로마 제국 말기 현상'에 비유하며 신문에 비판 칼럼을 쓴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중업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이러 저러한 고초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결국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김중업은 1971년 11월, 갑작스럽게 3개월짜리 단수 여권으로 강제 출국당해 프랑스에 거주하게 된다. 한마디로 정권에 의해 해외로 강제 추방된 것. 3개월 여권이 만료된 후에는 무국적자가 되어 불법체류 신분이 되었지만,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축으로 받은 프랑스 슈발리에 훈장 덕분에 프랑스에서의 체류는 가능하였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밖으로의 출입국은 안되는 반쪽짜리 체류였다. 강제 추방 외에도, 정권의 표적성 세무조사로 인해 거액의 세금이 추징되기도 했고, 이 때문에 31빌딩 설계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의 시련이 이어졌으며, 이 와중에 성북동 자택도 경매로 날아가고, 소장 석물 등도 모두 매각되어 빈털터리가 된다.
프랑스에 거주하던 1972년 3월에는 르 코르뷔지에 재단의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74년에는 프랑스 공인건축가(DPLG)로 인정받았다. 그 뒤 한국 정부와 편지 등을 통해 실랑이 하다가, 관계가 어느정도 개선되어 겨우 여권을 발급받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주권을 취득했다. 미국 정착 이후에는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 대학 및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건축 강의를 하였으며, 1978년에는 파리건축대학에서 명예석사 학위도 수여받는다. 그 사이 제주 시내 오라지구 종합관광 센터의 설계를 위해 1977년 4월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몇 달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난 적도 있었다. 1978년 10월에는 영구 귀국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답게 아파트 문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마포아파트와 관련된 좌담회에서 김중업은 아파트는 한국 주거 생활의 혁신이라 극찬했고, 아울러 85%가 산악지대라 주택건설을 위한 공지 조성이 매우 힘든 한국의 주택 정책은 가능한 한 집단 주거 위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중업의 작품 중 하나인 유유산업(현 유유제약)의 제약공장이 경기도안양시에 있었는데, 공장이 제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공장이 텅 비게 된다. 이에 이것을 어찌 하나 고민하다가 2007년에 안양시에서 이 공장이 세워진 땅을 통째로 매입해서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해 2014년 시민에 개방했다. 박물관 이름도 이 사람을 기념해 김중업박물관이라 지었다. 또한 이 박물관 안에는 그의 일대기와 그가 기록한 낙서들과 글, 그가 설계한 건축물 등을 볼 수 있는 김중업관이 있는데, 그의 기록물들은 전자화 작업을 통해 쉽게 볼 수 있게 해 놓았고, 그가 설계한 건물들 중 일부는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되었는데, 그 건물 모형들 중 일부는 나무로 만들어져 그런지 상당히 고급스럽다. 관람료도 무료니 한번쯤 가 보는 것을 추천
김중업 특집다큐방송 에피소드 : 건설작업할때 노동자분들과 자주싸웠다고 합니다 김중업님은 생각하고있는 수준높은 건축디자인을 노동작업자들이 못따라와줘서 많이 다투고 싸웠다고합니다 줄담배를 많이 피우실정도로 애연가였다고 합니다
확실히 미래를 앞서가셨고 안목이 높으신분 혼자서 스트레스받으시고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혼자서 대한민국 건축계를 멱살잡고 높은수준으로 끌어올리신분 입니다
첫댓글 건축구조 시간에 교수님이 엄청 존경하는 교수님이라고 했었는데 ㅋㅋㅋ
어릴적 뛰놀던 태양의 집
ㅅㅂ 다까기 마사오
김수근 그 쓰레기와는 정 반대의 힘든 삶을 선택하셨군요 ㅠㅠ
국내 현대건축의 양대산맥,
선구자격이신 분
대단하신분이네요!!!
중간쯤 A형 건물은 어디인가요? 한번 가보고 싶네요.
부산 대연동 UN묘지입니다
제가 어릴때부터 자주보던 건물이라
애착이 가네요
서산부인과가 아리움이라고 바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