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일기(45) - 서해랑길 75코스와 태안마애삼존불
서산 구도항에서 태안 방향으로 이어지는 서해랑길 75코스는 해변과 산 그리고 들판을 걷는 보통의 코스이다.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에 대비하여 비옷을 입고 출발했는데 2시간 이상 걸어도 비가 오지 않아 비옷을 벗고 걸었다. 확실히 기온이 떨어져 걷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3시간 정도 걸었지만 특별한 광경은 없다. 다만 한국의 일상적인 모습을 천천히 받아들일 뿐이다. 둘레길은 평범했지만, 구도항으로 돌아왔을 때 저녁 서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밀물때를 만난 것이다. 서해안을 답사할 때는 저녁에 찾는 것이 좋다. 낙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도 있지만, 낙조가 아니더라도 힘차게 해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물결의 흐름을 보는 것도 특별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코스의 가장 큰 수확은 걷는 도중에 ‘태안 마애삼존불’을 만났다는 것이다. 항상 찾아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중에 우연히 만난 마애불 안내는 원래 코스와는 다른 방향이지만 답사의 발걸음을 그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서해랑길 75코스 중간 정도에서 갈라진 길은 약 5km 정도 이동하여 태안의 대표적인 백화산으로 이어진다. 그 중간에 전각으로 보호하고 있는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었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서산의 마애삼존불과 함께 백제의 불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약 6세기 남조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이 부처들은 서산의 부처님과 달리 아쉽게도 미소가 사라지고 없다. 오랜 시간 속에 얼굴 모습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오랫동안 바라보자 특별한 일이 벌어진다. 보이지 않던 미소와 얼굴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라졌지만 숨겨져 있는 얼굴을 각자의 상상력으로 복원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인지 모른다. 무척이나 선명하고 강인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태안의 마애삼존불은 보통의 삼존불과는 다른 배치를 하고 있다. 보통 마애불은 서산의 마애불처럼 중간에 부처가 있고 양쪽에 두 보살이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태안의 마애불은 가운데 보살이 있고 양쪽에 석가모니불과 약사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구도의 변화는 분명 색다른 흥미를 보여준다. 부처가 가운데 있는 모습이 시선의 방향을 중심에서 외곽으로 전환시키며 부처를 강조하는 것과는 다르게,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는 배치는 마치 두 부처가 보살을 보살피는 듯한 친밀하고 정겨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간의 풍파 속에서 많이 낡고 마모되었지만 그런 모습이 더 애틋하고 정겹다.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은 항상 아름답다.
첫댓글 - 불상 안에 있는 백제인의 부드러운 미소, 그 해맑고 순진한 미소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