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천마장경동
어둡고 음침한 방안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기(邪氣)는 마치 유계(幽界)의 그것과도 같아 금방이라도 원귀(寃鬼)들의 통곡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지금 이 방에 한 여자가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짙은 흑발에 고양이의 그것과 같은 눈빛을 한 여인, 그녀는 바로 장천린의 가슴에 천독마비를 꽂은 여살수 암야혈홍이었다.
어둠 속이라 형상은 뚜렷하지 않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는 듯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녕 장천린을 네 손으로 척살했느냐?”
사내의 냉막한 음성이었다.
암야혈홍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껏 속하가 노린 표적치고 잔명을 유지한 자는 없었습니다. 혼해잠룡 장천린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확신에 찬 음성이었지만 그것을 들은 사내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했다.
“그럼 이것은 대체 무엇이냐?”
그는 말과 함께 양피지 한 장을 암야혈홍에게 날려보냈다.
<장천린(張千鱗) 금일미명(今日未明) 천마성(天魔城) 입성(入城).>
양피지를 읽은 암야혈홍의 눈이 불신으로 가득 차며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장천린은 소종사께서 내려주신 천독마비로 확실히 척살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녀는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뜻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내의 음성은 냉막했다.
“나도 너를 믿고 싶다, 혈홍! 하지만 장천린이 버젓이 살아서 천마성에 입성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순간 암야혈홍은 무언가 깨달은 듯 눈빛을 번뜩였다.
‘혹시 그 용왕묘의……!’
그녀의 뇌리 속으로 불현듯 비불범의 모습이 스쳐간 것이다.
암야혈홍은 눈앞의 사내를 직시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종사! 그자는 아마도 가짜일 것입니다!”
사내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칼날처럼 번뜩였다.
“가짜?”
암야혈홍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속하가 용왕묘에서 장천린을 척살할 때 그곳에 그와 아주 흡사한 외모를 지닌 놈이 함께 있었습니다. 독고소소는 그자를 죽은 장천린으로 위장시켜 천마성으로 데려갔을 것입니다!”
사내는 아래턱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천마성에 입성한 장천린이 가짜라? 그와 외모가 닮은 자라……?’
한동안 침묵하던 사내는 침중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어쨌거나 이미 일은 터졌다. 장천린이 가짜든 진짜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암야혈홍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감당치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사내의 냉막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문제는 네가 그자의 천마성 입성을 막지 못했고 그로 인해 나와 사부님의 이십 년에 걸친 심모원려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암야혈홍을 향한 사내의 질책은 무섭고도 냉혹했다.
“우리 흑무연에서 실패자의 종말이 어떠한지는 모르지 않겠지?”
잠시 암야혈홍을 노려보던 그가 문밖을 향해 냉엄한 어조로 외쳤다.
“대령하라!”
“존명!”
문밖에서 사내의 음성이 들리더니 곧 두 명의 복면인이 실내로 들어섰다. 그들은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장한 한 명을 질질 끌고 들어오고 있었다. 구레나룻의 장한은 이미 심한 고초를 겪은 듯 군데군데 혈흔이 맺혀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소종사님! 마지막으로 제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장한은 암야혈홍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사내의 음성은 살을 에는 삭풍과 같이 냉막하기만 했다.
“본연의 율법에 관용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소매 속에서 황금색의 종 하나를 꺼내들었다.
‘서… 섭혼금종(懾魂金鍾)!’
암야혈홍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의 건조한 음성이 이어졌다.
“너는 본연에 투신할 때 네 영혼도 함께 팔았다. 이제 그 계약을 이행할 때다. 옴 야마 따 따까 사바하!”
그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손가락으로 금종을 퉁기기 시작했다.
뎅뎅! 데… 엥!
“으아아악!”
금종소리가 점점 거세지자 장한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우욱!”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관자놀이를 비롯한 장한의 혈맥이 점점 부풀어오르더니 이목구비에서 검붉은 피화살을 쏘아내는 것이 아닌가.
퍼퍽!
뿜어져 나온 피가 암야혈홍의 뺨에까지 튀자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경련하며 공포에 몸을 떨었다.
“컥!”
이윽고 장한의 고개가 옆으로 툭 꺾이며 절명하는 순간, 그의 입에서 손가락만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벌레를 본 암야혈홍의 눈빛이 심하게 일렁거렸다.
‘잔… 잔심마고(殘心魔蠱)!’
그녀는 공포에 찬 시선으로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혈홍! 그 동안 너는 수많은 공적을 쌓아 나를 기쁘게 했다. 앞으로도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말에 암야혈홍은 사지의 맥이 다 풀리는 것만 같았다.
‘사… 살았다!’
“앞으로의 일은 내가 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겠다.”
사내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무심히 실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실신한 사람처럼 엎드려 있던 암야혈홍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놈……! 기어코 죽이고 말리라.’
암야혈홍은 비불범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
천마성 내부의 전각 사이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외모만으로만 본다면 당신은 장천린과 똑같아요. 하지만 당신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장천린의 무공이에요.”
화려한 궁장을 걸친 독고소소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따라 걷고 있는 비불범을 바라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 사사명은 어찌어찌 속여넘겼겠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원의 늙은 구렁이들까지 속일 수는 없어요. 당신이 완벽하게 장천린의 역할을 해내려면 단시일 내에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갖추어야 해요.”
그녀의 말을 듣는 비불범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독고소소는 한동안 침묵하다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심한 내상을 입어 한 달 정도는 요양을 해야 한다고 소문을 퍼뜨려 놓았어요. 그 사이에 늙은이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내외공을 쌓아야만 해요.”
비불범이 안색을 흐리며 말했다.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내가 한 달 동안 무공을 익혀봐야 얼마나 익히겠소?”
그로서는 독고소소의 말이 그저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독고소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비불범은 독고소소의 내심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거야 원! 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기에 저리도 태연하단 말인가?’
독고소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불범을 흘깃 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만 가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어서……!”
마지막 전각의 모퉁이를 돌아 조금 더 걸어가자 하나의 거대한 석산(石山)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독고소소는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며 비불범을 바라보았다.
“다 왔어요. 바로 저곳이에요!”
비불범은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석산의 중간쯤에 뚫린 작은 동굴이었다.
<천마장경동(天魔藏經洞)>
동굴의 입구에는 웅후한 필체로 그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독고소소는 눈빛을 번뜩이며 동굴을 응시하다 비불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곳은 천마장경동이라는 곳이에요.”
비불범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그렇게 씌어진 것 같구려. 한데 저곳에 뭐가 있기에 나를 데리고 온 것이오?”
독고소소는 진중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 안에는 십만 권에 이르는 무공비급이 소장되어 있어요.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장경각도 천마장경동의 규모에 비할 바가 못 되죠.”
무림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이 없는 비불범이었지만 그 유명한 소림사보다 대단하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마장경동을 응시했다.
독고소소는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저곳 천마장경동을 세운 인물은 제 증조부이신 겁황천마 독고혼이라는 분이에요. 보통 천마라 불리던 증조부께서 백여 년 간 노력하여 얻은 결실이 바로 저 천마장경동이죠.”
그녀는 비불범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 손을 잡으세요.”
비불범은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손을 내밀었다.
휘이익!
비불범의 손을 잡은 독고소소는 한달음에 십여 장을 날아 천마장경동의 입구에 떨어져 내렸다.
‘대단하군.’
비불범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독고소소는 멍하니 있는 비불범을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그럽시다.”
길게 뻗어 있는 동굴 안은 군데군데 야명주가 박혀 있어 대낮처럼 밝았다.
한걸음 앞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던 독고소소가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살아생전 적수를 만나지 못했던 증조부께서는 늘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어요. 과연 자신의 무공이 모든 시대를 통해서도 무적불패일까 하는 의문이었죠.”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비불범은 어느새 그녀의 얘기에 빠져드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독고소소는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증조부께서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백여 년에 걸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호에 존재하는 무공비급과 기록들을 모아들였어요.”
비불범은 그녀 옆으로 다가서며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원하던 해답을 얻었소?”
독고소소는 미소지으며 자신 있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그분은 자신의 무공이 당대무적이긴 하지만 결코 고금무적은 아님을 확인하셨어요. 무림에는 그의 천마절기(天魔絶技)에 필적하는 무공이 최소한 아홉 종이 더 있음을 알게 되신 거죠.”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증조부께서는 그 아홉 종의 무공과 자신의 마공을 합쳐서 고금십대절기(古今十大絶技)로 명명하셨어요. 그중 하나만 익혀도 독패강호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죠.”
비불범은 마냥 신기한 듯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독패강호라… 실로 대단한 무공들인가 보구려.”
독고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무림인들 사이에는 전설과도 같은 무공들이죠. 기록에 의하면 천마장경동에는 그 고금십대절기 중 네 가지가 비장되어 있다고 해요.”
비불범은 동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곳에 그 절기들이 비장되어 있다는 말이오?”
“그래요. 하지만 십만 권이 넘는 비급들 가운데 그 절기들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비불범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문했다.
“아무리 십만 권이 넘는다지만 일일이 찾아본다면 사대절기를 찾는 일이 뭐 그리 어렵단 말이오?”
독고소소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가 않아요. 증조부께서는 사대절기를 마수(魔手), 유리(琉璃), 망량(網倆), 천도(天刀)라고만 기록해 놓았을 뿐 구체적으로 그것들의 제목이나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으셨어요. 재주와 인연이 닿는 자만이 절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겠죠.”
비불범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겠군. 제목을 알고 십만 권 중 네 가지의 절기를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 내용조차도 명확치가 않으니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겠구만.”
독고소소의 안색 또한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감을 가지려 애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찾고자 하는 사람의 인연이 닿아야만 가능한 일이죠. 여기가 바로 천마장경동의 입구예요.”
그녀는 지하 광장 끝의 육중한 철문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져 보기에도 중압감이 느껴지는 철문의 양옆에는 두 개의 커다란 화롯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좌우로는 끔찍하게 생긴 네 개의 마신상(魔神像)이 턱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비불범은 마신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조각상이로군. 저 노려보는 눈빛은 뭐람. 기분이 영 찜찜한데?’
독고소소는 철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천마장경각에 비장되어 있는 사대절기 중 마수(魔手)의 무공은 증조부이신 겁황천마의 진전이기에 이미 그 실체가 드러나 있어요.”
비불범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삼종은?”
독고소소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본성에 입문한 자 중 허락 받은 자만이 이 천마장경동에 들어올 수 있고 그 숫자는 지금까지 일천을 헤아려요. 그들 중 누군가가 나머지 세 가지를 이미 얻었을 수도 있고 어느 누구도 얻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비불범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설령 절기를 얻었다 해도 쉽게 밝힐 만한 무공이 아니니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구려.”
독고소소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한동안 이리저리 철문 주위를 살피던 비불범이 의아한 듯 독고소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저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천마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지라 생각되는데… 어째 경비가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독고소소는 화로 좌우의 마신상들을 흘깃 바라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이곳의 경비야말로 하늘 아래에서 가장 삼엄하다고 할 수 있어요. 설령 증조부 겁황천마 당신이 부활한다고 해도 나의 허락 없이는 이곳을 출입할 수 없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철문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비불범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로 그때였다.
츠으……! 번쩍!
마신상의 눈 주위에서 순간적으로 예리한 안광이 쏟아졌다가 이내 스르르 사라졌다. 비불범이 못 봤기에망정이지 만약 그 광경을 목격했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고소소는 철문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철문 중앙의 홈에 밀어 넣었다.
그그긍!
그 순간 육중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이런!”
비불범은 신기한 듯 그녀와 철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독고소소는 그런 비불범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성큼 철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불범은 철문을 매만지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한 두께군. 족히 일 장은 되어 보이는데……!”
독고소소는 신기한 듯 철문 앞에 서 있는 비불범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요? 어서 들어와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아요!”
비불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철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말투에서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부는군.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무시를 당하는지……!’
투덜거리며 안쪽으로 접어들던 비불범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가히 서산(書山)이라 해야 옳으리라. 끝이 보이지 않게 도열된 서가가 사방으로 쭉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안에 꽂힌 온갖 비급과 두루마리, 죽편 등이 수천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이게 전부 무공비급이란 말이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비불범을 향해 독고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평범한 무공이 아니라 하나같이 절학이라 불리기에 부끄럽지 않은 무공들이죠.”
그녀는 서가들을 둘러보며 자부심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이 안에서 사대절기를 골라 찾아내려면 아마도 평생이 걸려도 힘들다고 할 수 있죠.”
비불범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오. 고금십대절기 중 네 가지가 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소.”
독고소소는 비불범을 향해 눈을 빛내며 침중하게 말했다.
“당신이 일단 저 안에 들어가면 이 철문은 한 달 후에나 열릴 거예요. 그 동안 당신은 최선을 다해서 무공을 연마하도록 하세요. 그것만이 당신이 살고 내가 사는 길이에요.”
‘이거야 완전히 협박이로군.’
미간을 찌푸리는 비불범을 향해 독고소소가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요!”
비불범은 엉겁결에 유리병을 받아 들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요?”
독고소소는 유리병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그의 말에 답했다.
“그것은 설삼단(雪蔘丹)이란 영약이에요.”
“설삼단?”
무공을 모르는 비불범으로서는 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독고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삼단에 대해 설명했다.
“이 설삼단이란 단약은 한 알로 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영약이에요. 일개 무사라면 이 한 알에 목숨까지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영약이죠.”
비불범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한 눈으로 설삼단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공심법을 연마한 뒤에 닷새에 한 알씩 복용하도록 하세요. 모두 여섯 알이니까 일 갑자 수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어요. 그 정도면 대충 원로원의 늙은이들을 속일 수 있을 거예요.”
비불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슴팍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나도 드릴 것이 있소.”
그가 독고소소에게 내민 것은 허름한 가죽주머니였다.
“받으시오. 장형님이 소저를 위해 사신군도에서 가져온 예물이라 들었소. 그 동안 경황이 없어 드리지 못하다 이제야 전해 드리게 됐구려.”
독고소소가 멍한 표정으로 가죽주머니를 바라보고만 있자 비불범은 그녀의 손에 가죽주머니를 쥐어주었다.
“비록 장형님이 돌아가시긴 했지만 정혼자의 예물이니 잘 간직해 주셨으면 하오.”
비불범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뚜벅뚜벅 서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예물이라고……?’
혼자 남은 독고소소는 망연히 중얼거리며 쥐고 있던 가죽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이것은……!”
직후 그녀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가죽주머니 안에는 영롱한 빛을 발하는 하나의 작은 수정이 들어 있었다. 헌데 그것이 무엇이기에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독고소소를 이토록 흥분시킨단 말인가?
‘이것이 내 손에 들어오다니……! 하늘이 마냥 무심하지만은 않구나!’
독고소소의 냉정하기만 하던 얼굴이 이 순간 격동으로 흔들렸다.
잠시후 격동을 추스린 그녀는 다시 가죽주머니를 갈무리하고는 서둘러 철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그긍!
그녀가 나가는 순간 육중한 철문은 둔중한 굉음을 내며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
“우라질! 도대체 눈알만 팽팽 돌아갈 뿐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겠군.”
비불범은 서가의 한 귀퉁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비급들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이미 많은 양을 본 듯 그의 옆에는 비급이 산더미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끙끙거리며 비급을 읽던 비불범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후훗! 개발에 편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겠군. 평범한 복호권(伏虎拳) 따위도 끝까지 할 줄 모르는 주제에 갑자기 상승절기를 연마하려 들다니…….”
그는 독고소소를 떠올리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안됐소, 독고소저! 애초부터 내게는 너무 무리한 역할이었던 것 같소이다.”
꼬르륵!
잠이라도 한숨 자려는 듯 팔베개를 하던 비불범의 배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반나절이 지났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일단 나가서 뭐 좀 먹고 와야겠군.”
몸을 일으켜 한바탕 기지개를 켜던 비불범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 이 철문은 한 달 후에나 열릴 거예요!
그제야 독고소소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이런 우라질 경우가!”
비불범은 투덜거리며 철문 쪽으로 달려갔다.
“사람을 굶겨 죽일 작정이었구나.”
쾅쾅쾅!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 좀 열어주시오 독고소저! 먹을 것도 넣어줘야 할 거 아니오?”
비불범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두드리는 철문의 메아리만이 퍼질 뿐이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이제 넌 큰일난 거다 비불범아! 꼼짝없이 굶어죽게 생겼다.”
그는 철문에 기대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천하를 떨어 울릴 무공비급들이 산더미 같으면 뭐하나. 만두 한쪽보다도 못한걸!”
배고픔이란 그가 여태껏 겪어본 어떤 설움보다 더 절실한 것이었다.
울상이 되어 신세한탄을 하던 비불범의 눈이 순간 부릅떠지며 중앙의 탁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설삼단이 있었지!”
비불범은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탁자 쪽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이거야!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군. 헤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설삼단이 든 유리병을 집었다.
순간 그의 뇌리에 퍼뜩 독고소소의 말이 떠올랐다.
― 내공심법을 익힌 뒤 닷새에 한 알씩 복용하셔야 해요!
비불범은 한동안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병마개를 벗겨냈다.
“내공심법은 뭐고 닷새에 한 알은 또 뭐람! 당장 사람이 굶어죽을 판인데!”
그는 손톱만한 설삼단 한 알을 꺼내들며 꿀꺽 침부터 삼켰다. 그리곤 순식간에 설삼단 한 알을 씹어 삼켰다.
“한 알을 먹으면 닷새를 간다는 듯 말하더니 이거야 원, 간에 기별도 안 가는군.”
그는 한 알을 먹고도 도무지 공복감이 해소되지 않자 투덜거리며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걸 지금 다 먹으면 나머지 한 달은 쫄쫄 굶어야만 되는데……!”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넓은 실내를 다 뒤진다 해도 한 달 후 문이 열릴 때까지 유일한 먹을거리라고는 이 설삼단밖에 없었다.
비불범은 갈등하며 유리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갈등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에라! 어차피 지금 죽으나 버티다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럴 바엔 포식이나 하고 죽자.”
그는 결국 배고픔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나머지 다섯 알의 설삼단을 꺼내 모두 한입에 털어 넣었다.
“끄윽!”
순식간에 설삼단을 모두 먹어치운 비불범은 그제야 반응이 오는지 배를 어루만지며 트림을 했다.
“앞으로 일은 앞으로 생각하면 되겠지. 설마 여기서 날 굶겨 죽이기야 하려고.”
그는 좀 전까지 비급들을 훑어보던 자리로 돌아가 철퍼덕 주저앉았다.
“조만간 독고소저가 먹을 걸 갖다주겠지. 아무리 쌀쌀맞은 처자라 해도 설마 사람을 굶겨 죽이기야 할까. 에라! 배도 적당히 채웠으니 이제 잠이나 좀 자볼까.”
그는 세상사 걱정 없는 한량처럼 벌렁 드러누워 팔베개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꾸르릉!
그의 뱃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흘러 나왔다. 비불범은 깜짝 놀라 상체를 퍼뜩 일으키며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이게 무슨 소리람?”
순간 그의 뱃속에서 용암이라도 분출한 듯 복부 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윽!”
비불범은 배를 감싸 쥐고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구! 사람 죽네. 이 악독한 계집! 영약이라더니 약이 아니라 독약을 주었구나.”
그는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면서 입과 코에서 허연 연기를 마구 토해냈다.
“으윽! 뱃속에 화룡(火龍)이라도 들어앉았단 말인가? 꼼짝없이 죽었구나. 컥!”
전신의 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리며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내부가 온통 타버리는 듯했다. 그는 숨조차 토해내기 힘들 만큼 엄청난 열기에 휩싸이며 몸부림쳤다.
“몸 안에서 불구덩이가 요동치고 있다. 화기(火氣)를 빨리 토해내지 못하면 타죽고 말겠다.”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던 비불범의 뇌리에 순간 벼락과 같이 떠오르는 글귀가 있었다.
<북극(北極)에 큰 바다가 있으니 일컬어 북명(北溟)이라. 만류귀종(萬流歸宗) 천하입해(千河入海) 흡기취정(吸氣取精) 차력화공(借力化功) 해방수미(解放須彌) 수납개자(受納介子)…….>
그것은 바로 주작신녀에게서 받은 북명신공의 구결이었다.
비불범은 북명신공의 글귀를 떠올리자 뱃속의 화기가 급격히 사그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북명신공의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북극에 큰 바다가 있으니!”
한동안 구결을 주절거리던 비불범의 몸에서 믿기 힘든 괴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투툭!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흩어지며 허공을 향해 벌떡 솟아오르는 것부터가 괴현상의 발단이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서서히 팽창하더니 넉넉하던 의복이 터져 나갈 듯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만류귀종(萬流歸宗) 천하입해(千河入海) 흡기취정(吸氣取精) 차력화공(借力化功)……!”
비불범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이 괴이한 현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북명신공의 구결을 외우고 있었다.
스물스물!
이윽고 그의 몸에서 옅은 연기가 새나오며 전신의 땀구멍에서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비불범은 그제야 살그머니 눈을 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현상을 목도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잠시 북명신공의 구결을 중단하자 또다시 그의 뱃속에서 화마가 이글거리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음… 북극에 큰 바다……!”
비불범은 다시 눈을 감고 북명신공의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북명신공의 내공심법을 운용해 설삼단의 기운을 고스란히 융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무공을 모르는 비불범이 이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그는 다만 고통을 덜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북명신공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펄럭!
비불범의 옆에 놓인 책의 앞장이 바람에 날려 넘어갔다. 육중한 철문으로 입구가 봉쇄되어 있는 데다 사방이 밀폐된 이 실내에서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책장이 넘어간단 말인가.
그 바람의 근원지는 바로 비불범이었다.
휘이익!
그의 몸 주위로 서서히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잔잔하게 시작됐던 바람은 순식간에 비불범의 주위에 있던 책들을 모두 날려 버리며 기세를 더해갔다.
덜컹덜컹!
비불범의 주위에 있던 서가마저 그의 몸에서 일어난 바람에 들썩거리고 있었다.
수천 권의 책이 담겨져 그 무게만도 엄청난 서가였으나 비불범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돌풍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이내 여기저기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전히 운기조식을 하는 가운데 비불범은 어렴풋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상상하는 것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다.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 비불범의 몸에서 일어난 강풍으로 장내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무공비급들이 군데군데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사방에 도열해 있던 수많은 서가들 중 족히 절반 이상이 그 바람에 떠밀려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삐쭉 곤두섰던 비불범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그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켜던 비불범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제야 그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주위의 전경을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 심상치 않은 사태에 비불범은 대뜸 걱정부터 앞섰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큰일났군. 그 독 오른 암고양이 같은 마누라가 이 꼴을 보면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비불범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이구, 내 팔자야! 어느 세월에 십만 권이 넘는 이 비급들을 다 정리한단 말인가? 정리하다가 한 달이 다 가겠구나야.”
혀를 끌끌 차며 힘겹게 일어선 그는 주변의 책들부터 하나씩 정리해갔다.
탄식하고 앉아 있어봐야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에 기왕 하는 일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또 고민거리가 생겼다.
“책들이야 그렇다 쳐도 저 서가들은 어떻게 세워서 정리를 해야 하나?”
투덜거리며 주변의 책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비불범은 우측에 쓰러진 서가 앞으로 다가갔다.
“이러다 허리라도 부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서가를 세워 올렸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혼자서 가능할까 싶어 끙끙거리며 힘을 줬더니 거대한 서가가 너무나도 가볍게 번쩍 세워지는 것이 아닌가?
비불범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일이람! 혹시 속이 텅 빈 나무란 말인가?”
톡톡!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가를 세워놓고 두드려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묵직해 보이는 느낌이나 소리나 분명 속이 빈 나무는 아니었다.
“어디 다시 한 번 해보자!”
비불범은 믿을 수가 없어 이번에는 다른 서가 쪽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쓰러진 서가를 일으켜 보았다.
“헉!”
놀랍게도 커다란 서가가 한 손에 번쩍 들려졌다. 비불범은 흡사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게 언제 이런 힘이 생겼단 말인가?”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어리둥절해졌다.
“혹시 영약이라던 그 설삼단의 효능 때문일까?”
한동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비불범은 이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복잡한 고민을 털어 버렸다.
“어쨌든 잘됐다. 힘이 세져서 나쁠 거야 없지. 나중에 금릉에 가서 전호와 그 졸개들을 만나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손을 봐줄 수 있겠군.”
그 생각을 하자 비불범은 매우 즐거워졌다. 비불범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쓰러진 서가들을 번쩍번쩍 일으켜 세우고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비급들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비불범이 절반 이상을 정리하는 데는 채 반각도 채 걸리지 않은 듯했다.
“후훗. 별거 아니군 그래!”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서가를 쭈욱 둘러보며 비불범은 득의만면했다.
“이제 정리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잠이나 한숨 늘어지게 자볼까?”
비불범은 서가의 귀퉁이로 다가가 벌렁 드러누웠다.
“어! 이게 뭐야?”
편한 자세로 드러눕던 그는 상체를 일으켜 머리맡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한 권의 낡은 책자가 놓여져 있었다.
“분명히 다 정리를 한 것 같았는데 한 권이 빠졌군.”
그는 미처 서가에 꽂지 못한 한 권의 비급을 주워 서가에 꽂으려다 귀찮다는 듯이 도로 드러누웠다.
“나중에 하면 되지 뭐. 자기 전에 이거나 좀 보고 자면 되겠군.”
그는 벌렁 드러누워 책표지를 올려다보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절대무적필승도법(絶代無敵必勝刀法)>
표지에 씌어진 글귀였다.
그러나 제목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획이 삐뚤삐뚤하고 글자도 틀린 것이 마치 아이들이 장난을 쳐놓은 듯한 악필이었다.
비불범은 그 제목을 보고는 웃음부터 치밀어 올랐다.
“후후… 천상천하가 어떻고 간에 글자나 제대로 좀 썼어야지. 어린아이 장난도 아니고……!”
그는 피식 웃으며 책장을 열어보았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도법이기에 천상천하유아독존에다가 절대무적이란 이름까지 붙였는지 한번 볼까?”
<나 천도(天刀) 나백(羅伯)은 평생을 칼에 미쳐 살았도다. 무려 백여 년의 고심 끝에 노부는 드디어 삼 초의 도법을 창안했다. 단언하건대 노부의 이 도법을 능가할 무공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어찌 그렇지 않으리요? 광고절금(曠古切禁), 전무후무(前無後無)의 초기재인 노부의 평생 걸작을 누가 있어 흉내나 낼 수 있으랴?>
악필로 이어진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에 비불범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거야말로 완전히 안하무인이군. 아니 그렇게 위대하신 분께서 어찌 글씨는 이렇게 지렁이 기어가듯 하시는지.”
하지만 그는 무공비급이라기보다 한 편의 희극 같은 이 글에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삐뚤삐뚤한 서체는 무질서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삼초도법을 완성한 노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노부가 창안한 고금제일의 도법에 어울리는 멋진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결국 노부는 숱한 밤을 불면으로 지새운 끝에 이 삼 초의 도법에 천상천하유아독존 절대무적필승도법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겸손한 이름을 붙이노라.>
“평범하고 겸손한 이름이라고? 천상천하유아독존에다가 절대무적 어쩌고 한 이름이? 정말 못 말리는 노인네군.”
비불범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 글을 읽는 자는 필경 노부의 광오함을 비웃고 있으리라. 하나 비웃더라도 천(天), 유(唯), 절(絶), 필(必) 도경(刀經)의 마지막 장까지 필독한 후에 비웃어주기를 바란다.>
비불범은 자신의 마음을 꼬집어 읽어내는 글의 내용에 적이 놀라움을 느꼈다.
“귀신같은 노인네군. 글씨는 형편없어도 사람 마음을 읽을 줄은 아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다음 장을 넘겼다.
<노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거니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대는 고금제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노부의 유학을 접한 그대야말로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아인 것이다, 부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천고불변의 진리를 명심하라!>
“숫제 협박을 하시는군. 이렇게 애절하게 읽어달라고 사정을 하셨는데도 안 읽어준다면 군자가 아니지. 성의를 봐서라도 끝까지 읽어드리겠소이다, 천도 어르신!”
비불범은 몸을 비스듬히 눕혀 다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제 서론은 끝난 것 같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절기를 창안하셨는지 볼까?”
다음 장을 넘기던 비불범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헉!”
그는 아연실색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본론 부분인 듯한 뒷장은 완전히 세 살배기 어린아이의 낙서장을 보는 듯했다. 줄이라고는 애당초 맞추기를 거부한 듯 삐뚤삐뚤한 글자와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뼈다귀들이 칼싸움을 하는 그림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네.”
비불범은 눈살을 찌푸리며 책을 접으려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음. 분하다. 아무리 앞에 두고 한 약속이 아니라지만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일구이언을 할 수는 없는 일! 끝까지 읽어주겠다고 맹세를 했으니 읽어줄 수밖에.”
그는 쉽게 알아보기 힘든 글을 읽기 위해 책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이거 도대체 뭐라고 쓴 거야?”
― 칼… 은 마음… 이다. 마음이… 능히 베지 못하는… 것을 어찌 한… 낱 쇳덩이인 칼… 이 벨 수… 있으랴?
인내심을 갖고 개발소발 씌어진 글씨를 읽어나가던 비불범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어디서 한번 들어본 말인데?”
눈썹을 찌푸리던 비불범의 뇌리 속으로 불현듯 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 노인네가 하신 말씀이었지. 마음이 베지 못하면 태산을 벤들 무엇하리. 좋은 말이야!”
비불범은 계속해서 시선을 모아 글을 읽어갔다.
― 칼이… 가기 전에 마음이… 먼저 가라. 가장 빠른 것은 번개가… 아니고 마음이니 마음으로 움직인 칼을 그 무엇도 능가하지 못하리라. 이에 이름 하니 이것을 무상쾌도(無上快刀)라 하리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의 내용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글씨는 엉망이지만 꽤나 쓸 만한 글인데? 칼이 가기 전에 마음이 가라.’
그는 다시 아랫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 천상천하유아독존 절대무적필승도법, 줄여서 천유절필 도법의 제일초이니라!”
“끙… 천유절필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했더니 천상천하유아독존 절대무적필승도법의 줄인 말이로군. 뒤늦게나마 제목치곤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드셨다니 다행이야!”
비불범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다음 장을 열었다.
― 빠름은 절정에 이른 파괴력을 이기지 못한다. 제이초는 천패지도(天覇之刀)로 하늘 아래 가장 강한 파괴력을 지닌 도결(刀招)이다. 천패(天覇)의 칼이 휘둘러지면 동장철벽(銅裝鐵壁)이 흙처럼 베어질 수밖에 없도다.
글 아래로 뼈만 앙상한 해골이 위에서 아래로 칼을 내리긋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음……!”
비불범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처음에는 어린아이 낙서 같아 보이는 그림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마치 실제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 만변(萬變)이 무변(無變)에 미치지 못함을 천수가 다해서야 깨달았도다. 이에 허무진도(虛無眞刀)를 만드니 이를 깨우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배움을 버려도 좋으리!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바람과 같고 존재하나 형체가 없는 번뇌 같은 허무의 칼을 뉘라서 막을 수 있으랴?
비불범은 어느새 나백이 남긴 비급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쉴새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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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_*
잘 읽었습니다
영약에 비급에---
북명신공은 역시 대단하군요.
북명신공 때문에 비급을 찾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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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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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 읽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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