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시대 (북송 960~1126 / 남송 1127~1279) |
개관 |
① 唐이 멸망하고 중국은 5대 10국의 분열상태로 들어간 중국의 중원과 남방지역을 통일한 것은 宋이었고, 북방지역은 요・서하・금・원의 4개 왕조시대가 되었다. 宋왕조는 동경인 汴京(現 開封)에 수도를 세웠는데 이 시대를 북송이라 한다. 이후북송은 북방지역의 金에게 멸망하였으나 북송 휘종의 아들 강왕이 臨安(現 항주)을 도읍으로 삼아 남송이라 하였다. 臨安은남송 150년간 통치 중심지가 되었고, 오흥(吳興. 現 절강성 호주)과 平江(現 소주)등은 귀족의 집결지로 변했다. ② 송代의 문인의 사회지위는 어느 시대보다 높았고, 상인들과 농민중에는 문학적 지식이 높은 사람이 많았다. 문관의 정치집권이 송시대의 특색이며 이는 문화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③ 송代의 황가원림은 동경과 서경, 임안에 집중되었다. 원림의 특색은 특히 산수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데, 산수화의발전이 원림조성에 영향을 주었고, 시정화의(詩情畵意 : 시와 그림이 함께 있는 유무형의 공간을 의미)가 원림 속에 묘사되어 들어가, 사의산수원(寫意山水園)의 형식이 형성되었다. ④ 송代의 원림건축은 수려함과 정교함은 더해지면서 건축 유형도 더욱 다양해졌다. |
특징 |
1. 도성과 황가원림 |
(1) 北宋의 도성과 황가원림 : 首都⇨ 동경(開封: 카이펑) |
① 동경의 황가원림은 대내어원과 행궁어원으로 구분. 대내어원은 '간악(艮岳)'이 대표적이며, 행궁어원으로는 경림원(瓊林苑)과 금명지(金明池), 옥진원, 의춘원, 함방원이 있다. ② 艮岳 : 휘종이 도성안에 축산(築山)을 해야 왕자를 낳을 수 있다는 도사의 말을 믿고 궁성 내에 여항의 봉황산을 닮은 산을 쌓고, 만세산(萬歲山)이라 불렀다가 ‘간악’으로 개명하였다. ③ 瓊林苑 : 외성 서쪽에 위치하여 964년 조성하였고, 976년 다시 경림원의 북쪽에 못을 파고, 물을 끌어와서 부속정원인금명지(金明池)를 조성하였다. |
(2) 南宋의 도성과 황가원림 : 首都⇨ 임안(臨安: 항조우) |
① 남송의 수도는 임안이다. 임안성은 오월과 북송 옛 성의 기초위에 내성과 외성을 증축했다. 남송의 대내어원은 궁원의후원으로 봉황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풍경이 우수한 원림지역이며, 행궁어원은 덕수궁과 앵도원으로 외성에 있다. ② 고종은 덕수궁에 큰 못을 파서 西湖처럼 조성했다. 그리고 석가산을 쌓아 정상부를 비래봉과 흡사하게 만들고, 취원루를중심으로 많은 누정을 조영했다. ③ 임안성 서쪽에 위치한 서호(西湖)는 당시대의 이밀(李密)이 관개와 물을 저장하기 위해 조성했고, 백거이(白居易)가 항주지사로 있을 때 호수를 보호하는 제방을 쌓았다. 저수와 관개를 위한 공사와 대량의 수목을 조림하고, 정자와 누각을 조성하여 점경물 역할을 하게했다. 서호 주변은 황제의 어화원이 분포되어 있었고, 왕과 대신들의 사원도 있었다. 유명한 ‘서호십경(西湖十景)’도 이때 조성되었다. ④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위치한 ‘소상(瀟湘)’은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류하는 곳으로, 소상팔경(瀟湘八景)이 유명하다. 옛 문인이나 화가들이 자연의 이상향으로 생각할 정도로 명승지이다. 북송 代 문인화가 송적(宋迪)이 주변이 뛰어난 경치 8곳을 그려 <소상팔경도>라고 이름 지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소상팔경은 한국과 중국의 팔경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
2. 사가원림의 발달 |
(1) 北宋의 사가원림 |
① 낙양은 역대 명원의 집결지이며, 고관 귀족들에 의해 택저와 원림이 조성되었고, 중원 일대의 사가원림을 대표하고 있는곳이다. 북송 사가원림의 특징은 사대부들의 정원으로 규모는 작고 소박하지만 소위 我趣를 중히 여긴다. ② 宋의 이격비(李格非)가 쓴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는 宋시대 사가원림의 19곳에 대한 전체배치・산지・화목・건축에 의해 구성된 원림경관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대표적인 사가원림으로는 사마공의 독락원(獨樂園), 백거이의대사자원(大獅子園), 오씨원(吳氏園), 호원(湖園) 등이 있다. ③ 독락원은 司馬光의 정원으로, [독락원기]의 기록을 보면 원림은 4천평 정도의 규모이며, 중앙부에는 독서당을 짓고 5천권의 책을 보관했다고 한다. 독서당 남쪽에 농수헌(弄水軒)이 있고, 실내에는 작은 못이 있다. 북쪽으로는 큰 못이 있고 중앙에는 섬이 있다. 섬 위의 한 구역에 대나무를 심었고 동쪽에는 약초를 서쪽에는 토산(土山)이 있으며, 산 정상에는 대를 쌓았다. |
※ 옛 지명 동경(변경, 개봉) / 서경(낙양) / 임안(항주) / 평강(소주) / 중도(대도, 연경, 북경) |
(2) 南宋의 사가원림 |
① 강소성과 절강성 특히, 오흥(吳興)과 소주(蘇州)에는 많은 명원이 있다. 이 두 곳은 물이 풍부한 도시로 태호가 가깝기 때문에 태호석을 이용한 석가산 위주의 원림을 주로 조성했다. 또한 경승지에는 많은 누각과 정관 등이 세워졌다. ② [오흥원림기]에는 30여개 송의 명원을 소개했는데, 그 중 유자청의 정원은 주인이 회화에 능하고 석가산 경영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 석가산에는 100여개의 기봉이 있고 중봉사이에 곡절된 계곡을 만들어 오색의 자갈을 깔아 총죽, 밀수 사이로물이 흐르게 했다. 유씨원의 가산은 기이함이 천하 제일이라 할 만하며, 한씨원의 태호삼봉은 수십 척이되어 천백명의 사람을 동원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③ 북송의 원림은 남송에 비하여 인공의 미를 많이 가미하였다. 이것은 남방 태호 지방에서 발달한 원림의 특성으로 보아야한다. 또한 이때에는 조경식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34종의 화훼를 기록하고 있고, <화십이객(花十二客)>과 같은 화목에 아칭을 붙이는 풍도 유행했다. ④ 남송시대 광동지방을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들을 ‘영남원림’이라 부른다. 영남원림은 황실원림의 웅장함을 표현한 북방원림이나 장강 일대의 강남원림과 달리 정교함이 더해지며, 기후와 재료에 의한 차이도 나타났다. 영남원림은 명청시대에이르러 본격적으로 유명한 사가원림들이 조성되었으며, 정원요소들은 외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였다. |
(3) 대표원림과 문헌 |
창랑정 | ① 창랑정(滄浪亭)은 북송대 건립된 것으로 소주에서 가장 오래된 원림이다. 拙正園, 留園, 獅子林과 더불어 소주의 4대정원(유네스코문화유산)이다. 원래는 五代시대 오월국 광릉왕의 개인 정원이었으나 북송의 시인 소순흠이 사들여 물가에 창랑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별장으로 사용했다. 면적은 10,000m²이며, 간결한 양식에 고풍스런 분위기로 독특한정취를 느낄 수 있다. 창랑정은 108종의 다양한 누창양식으로 유명하다. ② 창랑이라는 이름은 漢의 屈原 초사어부(楚辭 漁父)의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내발을 씻을만하네) 의 글에서 취했다. ③ 창랑정은 문인정원에 큰 영향을 주었고, ‘졸정’・‘망사’・‘퇴사’ 등의 이름으로 원을 조성하고, 원속에 창랑과 관련된이름을 인용하였다. |
문헌 | ① 소순흠(蘇舜欽) [창랑정기(滄浪亭記)] ② 사마광(司馬光) [독락원기(獨樂園記)] ③ 이격비(李格非)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 ④ 주밀(周密) [오흥원림기(吳興園林記)] |
※ 남송 4대 영남원림 동관의 가원(可園), 판우의 여음산방(餘蔭山房), 순덕의 청휘원(淸暉園), 불산의 양원(梁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