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시 오타루(小樽)와 형님의 도시 목포(木浦)
[홋카이도(北海道) 여행기 2] 근대 개항 도시 오타루에는 아름다움과 낭만이 넘쳐나 / 목포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도시 마케팅 개발이 절실해
작성일 : 9월 30일
새벽 2시경에 눈을 떴다. 하코다테역(函館駅)이다. 이 역에서 잠시 멈추는데 출발할 때 기차의 앞과 뒤가 바뀐다. 즉 역으로 들어올 때 앞 차량이 역을 벗어날 때는 뒤 차량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어나 좌석을 다시 배치해서 앞으로 향하게 하는 바람에 잠이 깼다. 하코다테(函館). 여기도 들를 수 있으려나... 결국 하코다테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잠시 눈을 부쳤다가 새벽 5시경 눈을 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숲에 안개가 끼어 있었다. 약간 써늘한 느낌도 들었다. 6시 5분. 예정대로 삿포로 JR역(札幌 JR駅)에 도착했다.
일단 급선무가 숙소를 정하는 일이다. 스스키노(すすきの)에 싼 비지니스호텔이 많으니 거기서 알아보라는 안내서에 따라 필자는 그곳에 가기 위해 삿포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삿포로 지하철역은 삿포로 JR역에서 지하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에는 물론 지하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겨울이 춥기 때문에 지하상가가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상점은 거의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일일 지하철 표를 구입하고 바로 스스키노로 향했다.
필자는 스스키노(すすきの)에서 호텔 5곳을 들어가서 방이 있는지 물었으나 한결같이 빈방이 없다는 답만 들어야 했다. 9월이면 휴가철도 끝났을 텐데... 왜 빈방이 없을까? 이런 의문은 조금 후에 방문한 오타루(小樽)에 가서 해결되었다.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정말 빠글빠글했다. 저 관광객들이 대부분 이 곳 삿포로에 머무를 건이 아닌가? 호텔을 알아보러 다니면서 아침의 한산한 스스키노를 잘 구경할 수 있었다. 한 2시간쯤 헤매었다. 이러다간 안 될 것 같았다. 삿포로 JR역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통해 호텔을 알아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호텔을 알아보다간 하루가 다 갈 것 같았다.
8시경. 아직 관광안내소가 열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삿포로의 중심에 있는 오도리 공원(大通り公園)과 시계탑(時計台)을 구경했다. 공원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길쭉하게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공원으로의 접근성이다. 여의도 광장을 여의도 공원으로 만들면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접근성이 제기되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폭 넓은 도로를 건너야 접근이 가능한 여의도 공원과 바로 몇 걸음만 띠면 만날 수 있는 오도리 공원. 인간적인 스케일이 중요한 것이다.
9시가 조금 넘어 관광안내소에 들어섰다. 잘 되지 않는 일본어로 호텔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지금 삿포로에 있는 호텔은 빈 방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이런... 어떡한단 말인가?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으니 차근차근 이야기 해달라고 하자 이제야 필자보고 한국사람이냐고 물어 보았다. 지금까지 일본사람으로 알고 있던 건가? 그런데 중국사람이 아니고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보니... 웬만해선 중국사람이냐고 물어볼 텐데...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언제나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 직원은 한국어를 잘 하는 여직원을 바로 불러주었다. 여직원은 역 근처에 있는 유스호스텔로 가는 게 좋겠다고 알려주었다. 다행이다. 그나마 유스호스텔에 빈방이 있으니... 바로 그 유스호스텔에 가서 예약을 하고 짐을 맡기고 오타루(小樽)로 향했다. 오타루는 삿포로 JR역에서 전차로 가면 된다. 아침 식사는 전차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로 해결했다.
[사진 1] 한국 아니에요? 일본에는 한국어 게시물이 정말 많다. 사진은 지하철 오도리역(大通り駅) 지하통로 게시판
오타루는 우리에게 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 1995)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와이 슌지(岩井 俊二)감독도 이 영화 한편으로 국내에 두터운 팬을 확보하였다. “오 겡키 데스카(お元気ですか)”주인공 나카야마 미호(中山 美穗)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오타루를 돌아보면서 목포(木浦)와 자꾸 비교가 되었다. 둘 다 근대에 개항한 항구도시인데 오타루는 사랑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갖는 반면, 목포는 우리에게 언제나 형님의 도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사진 2] 사랑의 도시 오타루와 형님의 도시 목포. 사진은 오타루를 배경으로 한 영화 “러브 레터” 포스터와 목포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목포는 항구다”의 포스터
현 정종득 목포시장은 3대항 6대 도시 재현을 공약으로 당선된 사람이다. 관광을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보고 있으며, 관광을 통해 목포의 구시가지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특히 목포가 호남 KTX 종점인데다가, 인근 무안(務安)에 국제공항이 들어서고, 목포(木浦)-상하이(上海)간 배편이 재개설됨에 따라 목포를 지역 관광의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지역 관광의 거점이라 하면 오사카(大阪)를 들 수 있다. 간사이(関西)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사카에 숙소를 정하고 인근의 교토(京都), 나라(奈良), 고베(神戸), 히메지(姫路)등을 방문하게 된다.
목포가 가야할 방향이 오사카와 같은 지역 관광거점임은 당연한 것이다. 지역 교통의 중심일뿐더러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시인 목포가 관광거점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에 오타루를 보면서 목포가 오타루 정도의 위상을 확보한 후, 오사카와 같은 위상에 까지 가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라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지금의 목포는 오타루 정도의 위상도 관광객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 3] 개항 초기 오타루 도시계획도
오타루가 뒤에 산을 끼고 시가지가 형성되었듯이 목포도 유달산이 있다. 또한 둘 다 근대에 개항한 도시라는 점도 근대건축물이 남아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나중에 자세히 글을 쓰겠지만 당시 홋카이도나 조선이나, 아이누족이나 한민족이나, 이곳 오타루나 목포나 메이지 정부가 보자면 마찬가지였다. 물론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워오고 인구가 많았던 우리 한민족과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을 단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지만 당시 처한 상황은 매한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홋카이도가 일본에 편입된 것은 1869년이나 되어서다. 즉 팽창하고 있던 일본제국주의가 제일 먼저 획득한 곳이 이곳 홋카이도였고, 그 다음이 조선이었던 것이다. 홋카이도를 획득하고 오타루라는 항구도시를 만들어 홋카이도의 자원을 본국으로 수송했듯이 목포를 통해서도 그러했다. 물론 1897년에 이루어진 목포 개항이 우리의 주체적 개항이었다고는 하나 곧 바로 주권이 일제에 넘어갔기에 그 의미는 퇴색되었고 ,오타루와 같은 역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타루와 비슷한 자연환경과 역사배경을 가졌지만 오타루는 사랑의 도시로 기억되고 목포는 영원한 형님의 도시로 인식된다. 영화 “목포는 항구다”의 포스터에도 목포를 영원한 형님들의 도시라고 수식어를 달아 놓았다. 이런 도시 이미지를 가지고는 결코 관광도시가 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여성들이 찾지 않는 도시가 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동해안으로 갈 것인지 목포로 갈 것인지를 물어 보면 답은 뻔하다. 여성을 잡지 않고서는 결코 돈을 벌 수 없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상품은 화장품이었다. 여성의 소비성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들이 안 가는 도시는 형님들도 안 가게 되어 있다. 이게 지금 시대 거역할 수 없는 진리이다. 국내에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도시마케팅이 성공한 곳이 있다. 바로 춘천이다. 겨울연가라는 드라마 하나로 춘천은 사랑의 도시로 인식되었고, 여성들 그것도 외국 여성들이 찾는 도시가 되었다. 목포는 무엇보다도 도시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관광이 블루오션(Blue Ocean)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4] 오타루로 가는 전차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
오타루로 가는 길엔 탁 트인 바다가 마중했다. 철로를 해안가로 깔아 두었기에 볼 수 있는 바다다. 저 바다를 건너면 한국이다. 오타루역(小樽駅)에 내려 역 관광안내소에 들려 지도를 하나 가져 나왔다. 그리고 해안가 쪽으로 걸었다. 맨 처음 이 곳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에 개항 초기의 역사 사진 등을 보았다. 낮 설지 않은 사진이었다. 우리의 근대 도시 모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사진 5] 개항 초기 오타루 시내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우리가 주체적으로 근대를 맞이했다면 과연 우리의 도시 풍경은 어떠했을까? 필자는 도시설계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 도시에 과연 정돈된 도시설계 원칙이 있는지, 있다면 제대로 적용된 곳이 있는지 늘 의문으로 갖고 있다. 지금 보면 과거로부터 절단된 아파트 단지 설계만이 현재 우리만의 독특한 도시설계같이 보여 진다. 목포 유달산에서 내려다보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야 위압감을 주고 경관을 훼손하지만 그런대로 정돈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시가지에서는 어떠한 정돈감이나 어떤 규칙성을 찾기가 어렵다. 정돈감과 규칙성이 보여 지고, 나름대로의 특징을 풍기는 곳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건물들이 잘 보전된 지역이다.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전통을 계승해서 일본과는 다른 특징을 풍기는 정돈된 도시 시가지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식민지 근대의 유산은 지금까지 우리 도시 풍경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진 6] 유달산에서 내려다 본 목포 구시가지. 유달산 바로 밑이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건물들이 잘 보전된 지역이다.
박물관 한 쪽에서는 재활용품에 대한 전시회가 있었다. 자료를 보니 이 곳 오타루에 홋카이도 재활용품 공장이 있다고 한다. 오타루와 재활용품 공장이라... 오타루는 새로 개발된 곳이지만 재활용의 도시이다. 이런 재활용품 공장도 있지만... 도시 자체가 근대건축물을 재활용해서 도심을 재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7] 페트병을 이용해서 만든 사무라이 인형
오타루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은 음식점으로 박물관으로 전시관으로 찻집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었다. 필자는 박물관 옆 찻집(きっさてん)을 전시관인줄 알고 들어갔다. 들어갔으니 그냥 나오기가 뭐 해서 주스를 하나 시켜 마시면서 아주머니께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이 건물은 오타루시 소유이고 자신은 임대를 해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창고로 이용되던 건물이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찻집으로 활용하기 위해 현대식 화장실 설치 등 약간의 변형은 있었다. 찻집을 한지는 한 20년 정도 된다고 한다.
[사진 8] 오타루 운하 변 창고의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에도 근대 건축물의 보존과 활용이 첨예한 주제다. 비단 근대 건축물뿐만이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은 일절 변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활용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문화재 소유주는 문화재 유지에 골머리를 섞고 문화재를 보존해야 할 공무원들도 난감해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변형을 허용하고 어느 정도의 활용을 허용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특히 근대 건축물의 보존과 활용에 있어서 많은 고민을 해야 할 목포는 오타루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오타루는 근대 건축물을 잘 보존하면서도 재활용함으로써 관광객을 유치함은 물론 도심을 활성화시키고 도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물론 오타루가 다 성공한 것은 아니다. 도심은 기반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주변에 새로운 신도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고밀도 개발압력이 존재한다. 오타루에도 이런 개발압력에 굴복한 사례가 있어 보인다. 박물관 바로 옆에 고층 맨션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오타루에서 발견한 가장 큰 흠이다. 개발압력을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것은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사진 9] 오타루 박물관 옆에 들어선 고층 맨션. 개발 압력에 굴복한 것인가?
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의 남자 주인공이 유리 공예품을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오타루의 특산품은 유리공예품이다. 필자도 자그마한 공예품을 하나 구입했다. 개항 초기에는 부두로 짐이 운반되는 모습이 주를 이루었을 남자들의 도시가 유리공예품을 구입하러 오는 여성들의 도시가 된 것이다. 오타루는 여러모로 여성을 자극할 만한 소재가 많다. 근대 건축물의 낭만에서부터 특산품까지... 직접 유리공예품을 만드는 것도 볼 수 있고 체험도 할 수 있다. 또한 갖가지 유리공예품을 판매하는 대규모 판매장들이 있어 그것도 볼거리다.
[사진 10] 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의 한 장면이 연상되나요?
[사진 11] 오타루 오르골당 내 유리공예품
필자는 오타루의 운하를 따라 걸어갔다가 사가이마치 길(堺町 通り)로 들어섰다. 마치 인사동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기서 늦게 점심을 먹고 오타루 여행을 정리했다.
[사진 12] 사가이마치 길(堺町 通り) 풍경
[사진 13] 사가이마치 길(堺町 通り) 언덕에 있는 저 시설의 용도는? 필자는 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눈 오는 겨울에 오타루를 한 번 더 방문할 기회가 있을까? 그때는 누군가와 사랑의 도시를 동행할 수 있을까? 러브 레터의 배경되는 곳을 아직 방문하지 못 했다. 여행은 아쉬움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 번 더 그곳에 가려 하지 않겠는가?
삿포로로 돌아오니 시간이 너무 늦었다. 웬만한 곳은 다 문을 닫았다. 딱 한군데 남아 있었는데 바로 삿포로 맥주 박물관(札幌ビル博物館)이다. 그 곳은 5시 30분까지 개관을 하기에 빨리 그곳으로 옮겼다. 5시경 도착해서 박물관을 견학했다. 여기 삿포로 맥주가 제국주의 시절에는 조선 경성에도 공장을 세웠다고 한다. 그 공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공장과 현재의 한국 맥주산업과는 관계가 없을까?
견학을 마친 후 바로 옆에 있는 삿포로 비루엔((札幌ビル園)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는 맥주와 양고기를 무제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곳에 혼자 들어가서 맥주와 양고기를 먹었다. (때마침 카메라 밧데리가 나가는 바람에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유감이다.) 생맥주를 마셨다가 흑맥주를 마셨다. 여기는 동네 형님들과 오면 딱 일 것 같다. 역시 혼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니까 흥이 나질 않았다. 3잔 마시고 고기 한번 갈더니 그 다음부터는 서빙이 좀 느려졌다. 무제한이라더니... 눈치 주나? 서빙 보는 아가씨보고 술을 더 달라고 하자 괜찮겠냐고 물어본다. 겨우 맥주 3잔 마셨는데... 한국에서 마셨던 식으로 한번 해 볼까? 혼자 추태부리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맥주 1잔 더 마시고 나왔다. 역시 일본은 먹는 것에는 인색하다. 고기와 술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 공동 목욕탕에 가서 씻고 일찍 눈을 감았다. 내일은 6시 2분에 출발하는 전차를 타야 비에이(美瑛)를 추가요금 없이 다녀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