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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73강-2 (2016. 3. 7.)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三
兜率宮中偈讚品 第二十四
四. 十方菩薩의 偈頌讚歎
4. 北方의 光明幢菩薩
(1) 敎化의 作用이 廣大함
(2) 敎化의 作用이 甚深함
(3) 敎化의 作用이 深廣함
5. 東北方의 智幢菩薩
(1) 勸信
(2) 所信의 殊勝한 德
普見於如來(보견어여래)
淸淨妙色身(청정묘색신)이로다.
청정하면서 아주 미묘한 색을 가진 그런 부처님의 몸을 널리 다 보게 된다. ←이것 아주 의미 깊습니다.
부처님을 어디서 보느냐? ‘인간세상에서 보고, 천상에서도 보고, 모든 세상에서 다 여래를 본다.’이 뜻입니다.
그야말로 산하대지, 삼라만상, 두두 물물, 산천초목, 그 무엇이든지 그 곳에서 아니 그 사실에서, 그 사실에서 곧 여
래를 본다는 뜻입니다.
이 화엄경의 차원은요?
역사적인 석가모니부처님도 아니고, 한마음만 가리키는
그것도 아니고, 이 드넓은 우주안의 모든 존재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 그런 이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래의 몸입니다. 진리라는 뜻입니다. 眞理. 여래는 곧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
이나, 有形ㆍ無形. 그 어디에도 그것의 바른 이치. 그 존재의 진실한 모습. 바른 이치가 다 있습니다. 다 있어요.
그것을 여기서는 如來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라고 우리 흔히 화엄
경에 있는 이야기하잖아요. 佛身은, 부처님의 몸은 법계
에 충만하다. 법계 그대로가 佛身이라는 뜻이지요.
佛身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젊은 스님들은 아마 못 들었을 겁니다.
옛날에 춘성스님이라고, 제가 선지식 복이 많아서 선지식
들 회상에 다 다니면서 경전 강의도 많이 들었고, 그 다음
에 선방을 운영하는 그 선지식 밑에도 가서 한철씩ㆍ두 철씩 다 살았는데요. 그 많은 훌륭한, 효봉스님 동산스님에
서부터 다 살았는데요. 우리나라에 중을 한 사람 딱 꼽으
라면 “나는 춘성스님을 꼽겠다.” 그런 말을 아주 당당하
게 늘 했습니다. 춘성스님을 보면 참 정말 중다운 그런
모습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무소유ㆍ무소유해도 정말 그 스님같이 무소유가 없습니다. 80객인데 당신 방이 따로 없습니다. 당신 이부자리 따로 없었습니다. 큰 방에서 같이 정진하다가 3경 딱 치면 어정어정 걸어서 탁자 밑에 가서 탁자 밑을 열고, 거기에서
당신 목침하나 딱 들고 와서 당신 깔고 앉았던 방석 배에
착 걸치면 그대로 주무십니다. 80객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80먹은 노인이 대중들하고 한방에서 목침하나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 깔고 앉았던 방석 딱 배에 걸치면 주무시는
겁니다. 그것도 얼마 주무시지도 않아요. 한 시간쯤 누웠
다가 대중들이 다 잠 들었다 싶으면 그때 다시 일어나요.
일어나서 마당에 나간다든지 법당에 올라가서 한 두시까
지 정진하다가 대중들이 깨기 전에, 한 시간쯤 전에 다시
내려와서 누웠던 자리에 살며시 들어가서 누워요.
누워서 자는 척하는 겁니다. 한 시간쯤 주무시겠지요.
한 시간이나 한 30분쯤 주무시면 대중들하고 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평소에 정진 열심히 안하고, 살펴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그 스님이 그렇게 생활하시는 줄 몰라요.
몇 몇만 알아요. 몇 몇만 밤새워 정진하던 사람들만 그
사실을 알지요. 그런 정도로 참 탈속하고, 진정 무소유로
살았던 스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스님의 법문이 그랬습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까,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니까
살아있는 석가가 코끝을 스치는구나!
그야말로 春風끝에 = 봄바람 끝에 석가가 춤을 춘다
하는 그런 옛 禪詩와 같이 당신은 그렇게 설법하시더라고요. 설법도 아닙니다. 그냥 앉아서 말하듯이 그렇게 평소
에 하는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의 첫째 구절이 그야말로
산하대지, 삼라만상, 산천초목, 두두 물물이
그대로 여래의 법신이다. 하는 그런 내용들이 한 게송
만 하더라도 참 의미심장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2) 敎化의 作用이 甚深함
譬如一心力이 能生種種心인달하야
如是一佛身이 普現一切佛이로다
菩提無二法이며 亦復無諸相이로대
而於二法中에 現相莊嚴身이로다
了法性空寂하사 如幻而生起하시니
所行無有盡이라 導師如是現이로다
三世一切佛이 法身悉淸淨하사대
隨其所應化하야 普現妙色身이로다
如來不念言 我作如是身이라하고
自然而示現하사 未嘗起分別이로다
法界無差別이며 亦無所依止로대
而於世間中에 示現無量身이로다
佛身非變化며 亦復非非化니
於無化法中에 示有變化形이로다
敎化의 作用이 甚深(교화작용심심)함
73-1에는 교화의 작용이 광대하다.
廣大하다는 말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여래가 없는 곳이 없다. 진리 아님이 없다.’ ←이런 뜻이
고요. 교화의 작용이 매우 깊다. ←이것은
譬如一心力(비여일심력)이,
비유하자면 한 마음의 힘이
能生種種心(능생종종심)인달하야,
능히 가지가지 마음을 내지요. 그와 같이
如是一佛身(여시일불신)이, 이와 같은 한 부처의 몸이
普現이 一切佛(보현일체불)이로다.
능히 일체 부처를 나타낸다. 이것도 정말 의미 있는 말입
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마음 쓴 것. 어제ㆍ그제 쓴 것은 그만
두고라도, 작년ㆍ재작년에 쓴 마음은 그만 두고라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쓴 마음이 무수히 많잖아요.
경계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마음ㆍ새로운 마음, 순간순
간 새로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일으키지 않으려 해도 일
으키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있는 것이 우리마음의 구조
입니다.
그 마음의 숫자가 지금 이 시간까지 얼마겠습니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가 마음 쓴,
그 마음의 종류숫자가 얼마겠습니까? 무수히 많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 한마음의
작용입니다. 한마음에서 그것이 계속 그렇게 여기에
能生種種心이라고 설명했잖아요.
한마음의 힘으로 여러 가지마음을 다 표현하고 있다.
能生, 如是一佛身이. 이와 같이 한 부처의 몸이 일체
부처님을 널리 나타낸다.
그러니까 중생근기 따라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별의별 방편을 다 써서 무슨 부처ㆍ무슨 부처ㆍ무슨 부처, 천 부처ㆍ만 부처ㆍ3000불ㆍ만 불ㆍ10만 불ㆍ억만 불,
그렇게... 화엄경에 오면 부처의 숫자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부처가 뭐라고요?
한 부처에서 표현된 것이다. 한 부처에서...
예컨대 우리가 장갑을 끼고 ‘사물을 만진다.’ 할 경우,
무엇을 만지든, 누구의 몸을 만지든지, 책을 만지든지,
옷을 만지든지, 심지어 음식을 만져도 나는 그저 뭘 만져요? 장갑을 만질 뿐입니다. 나는 장갑을 만질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계를 분별하고 이해하고, 거기서 어떤 작용을 하더라도 전부 내 한마음이 들어서 할 뿐이지 다른 것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一切唯心造라고 이렇게 표현합
니다.
마음이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는 사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내 마음이
인식함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겁니다. 내 마음의
세계에서는 내가 인식함으로부터 비로소 존재하는 겁니
다. 내 마음이 인식하지 않으면 최소한도 나에게는 없습니다. 각자에게는 있을지 몰라요. 나에게는 최소한도, 내가
저~ 산천초목을 인식함으로부터 있는 겁니다.
그것이 一切唯心造입니다.
한사람이 하루 가운데 가지가지 사람으로 표현하지요.
마음도 그렇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가운데도 별별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한사람이 여러 사람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여러 사람으로요.
菩提無二法(보리무이법)이며
亦復無諸相(역부무제상)이로대,
여기는 무차별과 차별의 관계입니다.
菩提. 깨달음 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없어요.
차별이 없는 경계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형상도 없어요.
여러 가지 모습도 없어요. 그러나
而於二法中(이어이법중)에,
두 가지 법 가운데 현상은 또 차별하잖아요.
전부가 차별합니다. 천차만별하지요. 차별하는 가운데
現相莊嚴身(현상장엄신)이로다.
상을 나타내서 몸을 장엄한다. 여러 가지 각양각색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요. 각양각색의 모습을요.
오늘에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 내일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 어제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요. 그러나 그것은
유위법. 유차별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了法性空寂(요법성공적)하사, 법성이 공적해서
如幻而生起(여환이생기)하시니,
환과 같이 生起함을 아시니, 법성은 본래 공적한데 如幻.
환과 같이 生起해요. 환과 같이 일어나요. 그것을 아시니,
所行無有盡(소행무유진)이라.
그 행하는 바가 다 다함이 없음이라.
導師如是現(도사여시현)이로다. 도사 또한,
여래도 또한 이와 같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여래는 법성이 공적한 그 당체입니다.
공적하기만 하고 마느냐? 아니지요.
우리가 늘 잘 쓰는 眞空妙有(진공묘유).
참으로 공한 가운데 미묘하게 있는 것이지요. 또
空寂靈知(공적영지)입니다.
공적해요. 찾아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 압니다. 추운지 더운지 다 알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 다 알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압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아요. 그 작용이 얼마나 활발발 합니까? 얼마나 왕성 합니까? 그렇게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찾아보면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런 그야말로 渾大有(혼대유)입니다.
이 세상에 꽉 차게 있는 이것을 無我ㆍ무아, 자꾸 無我,
소승불교에서 無我라고 한번 이야기 한 것. 석가모니가
이야기했다고 불교는 無我다. 무아다. 그러는데요.
“無我다.” 라고 주장하는 그것은 어떻게 부정하겠느냐?
이겁니다. 無我라고 주장하는 그것은 그 당체는 부정 못
하잖아요. 我가 있어서 無我ㆍ無我하는겁니다.
무아ㆍ무아라고 주장하는 그것은 뭐냐? 이 말이지요.
無我는 소승불교에서 하는 주장이지, 불교의 궁극적인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것 속으면 안 됩니다.
남방불교에서 공부해온 사람들이 그야말로 입에 침을
튀기면서 그냥 無我를 주장하잖아요. 요즘 남방에 가서
공부해온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TV같은 것도, 인터넷 같은 것도 잘 되어 있어서 그런 사람들 공부해
서 강의한 것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대승불교, 소승불교, 또 선불교,
중요한 것이 이 세 가지입니다. 다른 호국불교니 기복
불교니 기타 그런 잡스런 불교는 그만 두고라도, 가장
주류를 이루는 것이 근본불교라고도 하고, 상좌부불교
라고도 하고, 대승불교 권에서는 또 소승불교라고 하고
그러지요. 그것하고 그것은 상좌부불교라고 이렇게 해
줍시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유마경 같은 데는 사정없이
소승ㆍ소승 이렇게 하는데, 소승불교 대승불교하고,
그 다음에 선불교, ←보면 이 세 가지가 아주 큰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이 화엄경 같은
것을 잘 살펴서 그런 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승불교에서 無我를 이야기한 것은, 초기에는 무아를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자신의 괴로움을 없앤다거나
아니면 잊어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無我觀이 좋습니다. 좋기는 좋아요. 자기의 괴로움을 없애버리는
것. 그것은 무아관이 좋긴 좋아요.
‘내가 없다.’ 라고 이렇게 관찰해버리는 것이 아주 좋은
치료법이긴 합니다. 그러나 無我는 아닙니다.
참 나가 있습니다.
제가 늘 宗旨(종지)로써 밝힌다고 하면서 참 나를 이야기
하잖아요. 참사람, 차별 없는 참사람! 임제스님이 주장하
는 선불교의 아주 최고봉이라고 하는 임제스님께서도
차별 없는 참사람을 늘 주장하잖아요.
차별이 없는 참사람! 여기도 차별 없는 것과 차별이 있는
것을 이야기했잖아요. 차별 없는 참사람 ←이것이 대승불
교의 일심ㆍ불성ㆍ진여하고,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주장하고 그것은 아주 일맥상통합니다.
이야기 난 김에, 대승불교에서는요?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보살들을, 예를 들어서 문수나 보현
이나 이런 보살을 더욱 우위에 둡니다. ‘부처의 수업을 다 끝낸 뒤에 비로소 보살이 된다.’ 고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것 알아야 됩니다. 또 보살행하자고 하는 것이 불교지, 부처로 앉아있자고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니까요. 보살행하자고 하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보다도 보살을 더 높이 봅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에 와서 아주 파다하게 그렇게 그
사상이 퍼지니까 중국에 와서 선불교에서는 그것을
빌려가지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如來禪위에 祖師禪을
둡니다.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하는 선문들이 아주 허다하지 않습니까?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못 보았다.”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훨씬 높이 있다.’ 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에서 역사적인 석가모니의 견해보다는, 한 5ㆍ600년 이후에 대승불교에서 정립한 보살대승불교
가, “보살대승불교가 훨씬 수준이 높은 불교다.” 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선불교에 와서는 “여래선보다 조
사선이 더 높다.” ←이렇게까지 발전된 것입니다.
그것이 똑 같은 겁니다.
역사적인 석가모니의 견해보다는, 5ㆍ600년 이후에
보살들이 주장하는 대승불교가 훨씬 높고, 또 선불교에
서는 “여래선보다는 조사선이 더 높다.”이렇게까지 된
겁니다. 거기에서, 그럼 불자라고 하면서,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보살을 따를 것인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조사를 따를 것인가? ←이런 주장이, 이런 시시비비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럴 때, 대승불교 권에서나 조사선 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럼 네는 진리를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를 것이냐?” ←이렇게 되묻습니다. 진리를 따를 것이냐? 사람
을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른다면 역사적인 석가모니를 따르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진리를 따른다면 당연히 대승불교를 따라야 옳다.”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이
法身悉淸淨(법신실청정)하사대,
과거부처님이나, 현재부처님이나, 미래부처님이나 모두가 그 법신은 다 텅 비었습니다. 悉淸淨.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텅 비었다고 해서 그냥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眞空妙有입니다.
空寂한 데서 靈知한 것이 淸淨입니다.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아는 데 있는 것!
그것이 참 나고ㆍ참사람이고ㆍ참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든지, 깨닫지 못한다든지, 아니면 근본불교를 많이 배워서 그것을 부정 한다든지 이렇게 하는 것은 이해가 부족해서 그럽니다. 法身悉淸淨하사대
隨其所應化(수기소응화)하야,
그 응당히 교화할 바를 따라서,
普現妙色身(보현묘색신)이로다.
묘한 색신을 널리 나타낸다. 형상으로 나타내게 되면 또
형상으로도 나타냅니다. 허망한 형상으로도 나타내요.
허망한 妙色身말고도 우리는 이미 眞空妙有.
참으로 공한 가운데 미묘하게 있어서 온갖 것 다 분별하
고, 다 감지하고, 시시비비하고, 춥고 더운 것 다 알고,
내가 손해 보는지 이익 보는지 금방 계산해서 다 알아차리고, 신기합니다. 신기한 물건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그 말을 神解(신해)! 신비로울 神ㆍ이
해할 解. “신비하게 안다.” 그랬습니다.
나한테 손해 보는지 이익 보는지 그냥 계산해서 금방 알아냅니다. 그야말로 神解입니다. 神解하는 한 물건이 있습니다.
如來不念言(여래불념언)
我作如是身(아작여시신)이라하고,
여래는 ‘나는 이와 같은 몸을 짓는다.’ 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며, 念言이라고 하는 것은 속으로...
우리가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 있지요.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 많습니다. 혼자서 속으로 생각하는 것.
생각하면서도 말을 합니다. 그것이 念言입니다.
自然而示現(자연이시현)하사, 저절로 나타내 보이사,
未嘗起分別(미상기분별)이로다.
일찍이 분별을 일으킨 바 없더라. “나는 이러한 몸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말 한적 없어요.
그러면서도 저절로 나타내 보이지만 분별을 짓지 않는다.
法界는 無差別(법계무차별)이며,
진리의 세계, 법의 세계는 차별이 없으며,
亦無所依止(역무소의지)로대, 또한 의지한 바가 없되.
而於世間中(이어세간중)에, 또한 세간가운데
示現無量身(시현무량신)이로다.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 보인다.
法界라고 하는 말이나, 여래라고 하는 말이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리라고 하는 말이나, 법성 = 진여 = 참나.
똑 같은 뜻 들입니다.
佛身非變化(불신비변화)며, 佛身은 변화가 아니며,
亦復非非化(역부비비화)니,
또한 다시 변화 아닌 것도 아니다.
於無化法中(어무화법중)에, 변화가 없는 법 가운데서
示有變化形(시유변화형)이로다.
변화하는 형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천 100억 화신. 이런 말도 있고,
천변만화. 라고 하는 말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것이 千變萬化性입니다. 우리들 본성은,
우리들 진여자성은 하나인 것 같지만, 그 하나는 천변만화의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변만화의 성질을요.
천변만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루 가운데 우리가
그 어떤 표현하는 삶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바뀌지요. 또
여러 가지로 바뀌어야 마땅하고요.
그야말로 굳어있으면, 변화가 없으면, 작용이 없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지요. 아무짝에 쓸모없습니다.
정말 어떤 상황에 맞춰서 제대로 정확하게 변화해야합
니다. 그래서
佛身은 변화가 아니고, 변화 아닌 것도 아니다.
변화 없는 법 가운데 천변만화를 나타낸다.
아~ 이고! 우리의 마음의 실체, 참마음의 실체를 잘 표현
했지 않습니까? 이런 게송은 길게 설명을 안 해도, 짧은
글자 몇 자에 다 아주 깊은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3) 敎化의 作用이 深廣함
正覺不可量이라 法界虛空等하야
深廣無涯底하니 言語道悉絶이로다
如來善通達하사 一切處行道하시니
法界衆國土에 所往皆無碍으로다
敎化의 作用이 深廣(교화작용심광)함.
교화의 작용이 깊고 넓다.
正覺不可量(정각불가량)이라.
바른 깨달음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正覺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우리가 조금 뭘 아는 것, 중생들이 조금 뭘 아는 것도 그 앎의 양을 헤아릴 수 없습
니다. 그런데 하물며 큰 깨달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없지요.
法界虛空等(법계허공등)하야,
법계와 허공과 같다. 법계와 허공과 혼연일체가 됩니다.
혼연일체가 되니까 그 양이 법계와 같고, 허공과 같지요.
深廣無涯底(심광무애저)하니,
깊고 넓어서 涯底가 없으니, 변두리가 없다.
또 밑이 없다. 가가없고 밑이 없으니
言語道悉絶(언어도실절)이로다.
우리가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언어도단심행처멸)이다. 그 말을 곧잘 쓰잖아요. 불법에 대해서 아니면 마음에 대
해서, 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제일 아주 윽박지르고,
윽박지르면서 말하자면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지요.
“아니 언어도단인데 뭘 자꾸 지껄이느냐?” 여기 되어있네요. 言語道가 悉絶이라. 그랬습니다.
言語道가 다 끊어졌다.
말로 표현이 안 되지요. 그러나 음성교체라고해서 어떤
이치를 표현하는데, 언어가 제일입니다.
언어가 교화의 체입니다. 音聲敎體. 그것이 불합리하지만 그래도 제일 근사한 것, 제일 가까운 것이 언어입니다.
꽃 한 송이 들고ㆍ손가락 한 번 세우는 것도 좋은 표현이
긴 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것 다...
拈華示衆(염화시중) 하는 것은 뒤에 선불교에서 그런 것
도 만든 이야기지요.
如來善通達(여래선통달)하사, 여래께서 잘 통달해서
一切處에 行道(일체처행도)하시니,
일체 처에서 도를 행하시니
法界衆國土(법계중국토)에, 온갖 여러 가지 국토에서
所往皆無碍(소왕개무애)으로다.
가는 바가 하나도 걸림이 없더라.
5. 東北方의 智幢菩薩
(1) 勸信
爾時에 智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若人能信受 一切智無碍하야
修習菩提行하면 其心不可量이로다
東北方의 智幢菩薩(동북방지당보살)
勸信(권신). 믿기를 권하다
爾時(이시)에, 그 때에 智幢菩薩이
承佛神力(승불신력)하사,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서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시방세계를 널리 관찰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하시기를,
若人能信受(약인능신수)
一切智無碍(일체지무애)하야,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지혜가 걸림이 없음을 믿고 받아
들여서, 修習菩提行(수습보리행)하면, 菩提行.
깨달음의 행을 修習할 것 같으면,
其心不可量(기심불가량)이로다.
그 마음 가히 헤아릴 길이 없더라.
그렇지요. 一切智.
화엄경에서 아주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一切智.
또는 一切智智. 평등과 차별.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평등
한 면과 차별한 면, 양면을 공히 꿰뚫어 아는 것을 일체지. 또는 일체지지. ←이렇게 말합니다.
(2) 所信의 殊勝한 德
一切國土中에 普現無量身하사대
而身不在處며 亦不住於法이로다
一一諸如來의 神力示現身을
不可思議劫에 算數莫能盡이로다
三世諸衆生은 悉可知其數어니와
如來所示現은 其數不可得이로다
↑73강 - 2
↓73강 - 3
或時示一二와 乃至無量身하사
普現十方刹하사대 其實無二種이로다
譬如淨滿月이 普現一切水에
影像雖無量이나 本月未曾二인달하야
如是無碍智로 成就等正覺하사
普現一切刹하사대 佛體亦無二로다
非一亦非二며 亦復非無量이나
隨其所應化하사 示現無量身이로다
佛身非過去며 亦復非未來라
一念現出生과 成道及涅槃이로다
如幻所作色이 無生亦無起인달하야
佛身亦如是하사 示現無有生이로다
所信의 殊勝한 德(소신수승덕)
一切國土中(일체국토중)에, 일체 국토가운데
普現無量身(보현무량신)하사대,
한량없는 몸을 널리 다 나타내되,
而身不在處(이신부재처)며,
그러나 그 몸은 어디 일정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亦不住於法(역부주어법)이로다.
또한 법에 머물지도 않더라. 어떤 현상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장소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건에 있는
것도 아니더라.
一一諸如來(일일제여래)의, 낱낱 모든 여래의
神力示現身(신력시현신)을, 神力으로 나타내시는 몸을
不可思議劫(불가사의겁)에, 한량없는 세월가운데서
算數莫能盡(산수막능진)이로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라 하더라도,
수 억 만년이라 하더라도 算數. 헤아려서 능히 다하지
못한다. 여래의 神力으로 나타낸 몸...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니, 하루 가운데 나타내는
우리의 몸 모습도 별의별 모습을 다 나타내는데, 그것
만도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여래의 神力의 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또 어떤 특정인을
여래라고 생각하면 풀리지가 않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지요.
화엄경을 푸는 열쇠 一切唯心造. 그 다음에
산천초목 산하대지가 그대로 여래의 법신이다.
여래의 몸이다. 라고 하는 등등, 그런 것이 “화엄경을
푸는 열쇠다.” 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지요. 마찬 가지입니다. 여기서 여래도 우리 一心. 진여자성을 빼버리고 달리
어떤 특정한 존재를 설정해놓으면, 풀리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안 풀립니다. 당장에 막혀버립니다.
三世諸衆生(삼세제중생)은
悉可知其數(실가지기수)어니와,
과거ㆍ현재ㆍ미래중생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지금
사람인구가 지구상에, 현재인구만 70억이지요. 그런데
우리 한사람의 몸에 딸린 그 세포는 100조나 됩니다.
우리 한사람의 몸에 100조의 세포가 있답니다.
그러면 70억 곱하기 100조하면 그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람만 해도 그렇고, 나머지 생명체들은 사람의 몇
1000배ㆍ몇 만 배ㆍ몇 10만 배가 됩니다.
몇 10만 배가 뭡니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생명체가 많습니다. 사람 생명체는 별것 아닙니다.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아주 적은 숫자. 지구상에 사람의 생명체
보다 훨씬 많은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과거ㆍ현재
ㆍ미래 모든 중생들을 그 숫자를 가히 헤아려서 안다
하더라도,
如來所示現(여래소시현)은,
여래께서 나타난 바는 其數不可得(기수불가득)이로다.
그 숫자를 가히 얻을 수 없다. 알 수가 없다.
여래를 그렇게 알아야 제대로 아는 것이지요.
그렇게 알아야... 보통 일반불교에서 여래를 역사적인
석가모니부처님이다. 아니면 마음의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차원 가지고는 이것 화엄경이 이해가 안 됩니다.
첫째 풀리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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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正覺不可量이라 法界虛空等하야 深廣無涯底하니 言語道悉絶이로다.
바른 깨달음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법계와 허공과 같아서
깊고 넓어서 가가없고 밑이 없으니, 言語의 길이 다 끊어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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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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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切唯心造...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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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을 푸는 열쇠 一切唯心造. 그 다음에
산천초목 산하대지가 그대로 여래의 법신이다.
여래의 몸이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고맙습니다_()_
이것이 천변만화선입니다 ---> 이것이 천변만화性입니다
여기서 여래도 우리 일신. 진여자성을 빼버리고
---> 여기서 여래도 우리 一心. 진여자성을 빼버리고
고맙습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다른 오타도 고쳤습니다.
어제는 안 보이던 오타가 오늘은 보이듯이 진여자성도 내일은 보이겠죠?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저는 진여자성이 보이는데요? 저 바로 위의 분이 진여자성 아니신가요?
神解...신비롭게 이해하는 그것...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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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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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넓은 우주안의 모든 존재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 그런 이치입니다
---> 이 우주 드넓은 존재안에 모든 것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 그런 그 이치입니다
*스님 말씀의 순서를 바꾸면 자칫 잘못하면 뜻이 다르게 해석 될 수도...
그러나 그것은 유위법. 유차별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무위법. 무차별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도 '무위법. 무차별'로 말씀하셨고 뜻으로 봐도 '무위법. 무차별'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너무 이야기가 발전되었고... 그 다음 다섯번째 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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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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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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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을 푸는 열쇠 一切唯心造. 그 다음에
산천초목 산하대지가 그대로 여래의 법신이다.
여래의 몸이다.
空寂한 데서 靈知한 것이 淸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