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북벌계획
김여옥, 27세. 김익견, 29세. 김세환, 29세. 김언기, 25세.
김진원, 27세. 김인우, 27세. 김우형, 27세.
조선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 병자호란이라는,
왜세의 침략에 큰 피해를 당하였다.
두 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컸으나, 청에 대한 감정이 더 나빴다.
당시 우리 민족은 여진족에 대해 문화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감이 더 컸다.
이러한 배경에 청을 치자는 북벌운이 일어났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봉림대군 때 형 소현세자와 더불어,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갔다.
때문에 청의 사정에 밝은 편이었다.
송시열, 이완등과 함께 군사를 조련하고,
산성을 수축하며 전쟁준비를 하였으나,
끝내 북벌을 실천하지 못하였다.
효종의 뒤를 이어 현종 때 청나라의 오삼계가 난을 일켰을 때,
이들과 손을 잡고 청을 치자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숙종이 즉위 후 윤휴가 상소하여 실행하려 했으나 매번 계획으로만 끝났다.
효종 때 송시열 등 서인으로만 이루어진 북벌계획이었다
숙종 때 와서 남인 윤휴가 실행하고자 한 것을 보아,
당파 싸움이 그토록 심하던 당시에,
청에 대한 적개심은 당파 구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청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중국 본토까지 정치적,
군사적으로 막강한 국가로 성장했다.
문화도 발달하게 되자,
조선후기에 와서 그들의 문물을 받아 들이자는
북학운동이 일러나기도 하였다.
나선정벌
청나라는 러시아(그때, 나선이라 부름)세력이 흑룡강가까이 압박해오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효종 때 청을치려 양성한 군대가, 청을 도우려 두 차례나 원정하였다.
러시아는 동방침략의 꿈을 가지고 꾸준히 세력을 학장해오고 있었다
효종 5년(1654)과 효종9년(1658)에 조선에서 잘 훈련 된 조총부대가
흑룡강까지가서 큰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서양사람들과 처음으로 전쟁터에서 일어난 전투로, 이를 나선정벌이라 부른다.
27세 참판공 휘 여옥(문숙공파‧ 삼사좌사공파)
1596(선조)-1662(현종2) 조선중기 문신. 자는 군수. 호는 미산.
아버지 증 참판 우급, 어머니는 증 정부인 서산 류씨.
1624(인조2년) 증광생원시 동방생원과 3등 56인으로 합격하였다.
동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 24인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고 효종조에 병자호란의 설욕할 밀명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두 번 평안도 관찰사를 배수하였으며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다.
참판공 휘 여옥 신도 비명
공은 선조 병신년에 났으나 영리하여 무리에서 뛰어났다.
자라면서 힘써 배우고, 스스로 닦아서 문사가 날로 진취하니
사람들은 김씨 집에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
팔송 윤황이 영광고을 원이 되었을 때
공의 명망을 듣고 와서 보고 극구 칭찬하였다.
열 살에 함열 남궁씨 집에 장가를 들었는데 창랑 성문준은 그의 외숙이다.
공의 뛰어난 재주를 사랑하여 스승과 연원 있는
학문을 가르치며 기대가 적지 않았다.
인조 초에 태학관에 올라,
가을에 명경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추천으로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연양 이시백과 백헌 이경석은 공의 인물을 이르되 빙옥같이 맑다고 하였다.
호서의 여러분들도 조정에 올라 시사를 논의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옳고 그름을 물었다.
공은 효우가 독실하여 아버지가 병이 있어 어육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공이 몸소 그물로 고기를 잡아 봉양하였다.
관원으로 부름을 받던 날에도 미리 돌아올 날을 고하고,
기일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두 아우와 화락하여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상사(초상)에는 예를 다하니,
군자가 이렇게 함으로써 공의 행위가 집에서 수신함을 알았다.
함열 객관에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그 밑에서 많이 죽었으나, 공은 혼자서 괘념치 않았다.
드디어 그 과방에서 으뜸으로 장원하니,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 드디어 장원행(壯元杏)이라 썼으니
그 강정함이 이와 같았다.
대제학 박세채 찬
김익견(益熞, 29세)을
북벌 선봉장에 쓰려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천거하였다.
사양하다 효종이 진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금에게 사은숙배 하려 가다가 효종이 승하하였다.
김세환(世煥, 29세)은
김언기(彦璣, 25세) 둘째 아들 김득숙의 증손이다.
도량이 깊고 경서에 밝았다. 창설 권두경, 우헌 우세명 등
유현들과 사귀어 수갑계를 맺어 서현의 경전을 강독하였다.
선대의 유지를 계승하여 문호를 빛내었다.
김진원(振遠, 27세)은
효행이 특별하여 인조가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했으나 가지 않았다.
임금이 거듭 부르자,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부임하였다.
숙종조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추증 ,효자의 정려를 받았다.
김우인(宇仁, 27세)는
진보현감을 지내고 효종조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문도가 100여명이 모였는데 문하에 문과급제자가 10명, 생원,
진사시에 합격자가 40명아나 되어 문명을 떨쳤다.
교관 임기가 끝날 때 문하생이 탁제동문록을 간행하여
선생의 음덕을 추모하였다.
27세 정혜공 휘 우형(양간공파 ‧직제학공파)
1616년(광해9)-1694년(숙종2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도상.
호는 기오당. 시호는 정혜공.
아버지는 증 좌참찬 헌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의령 남씨.
효종 2년(1650) 증 광시 문과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함평 군수가 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형색이 너무 초라할 정도로 청백하였다.
효종 9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효종 11년에 부수찬 홍문관 교리가 되어 시독관으로
임금 앞에서 통감강목과 대학을 강론하였다.
헌납을 거처 1661년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사간‧수찬‧집의를 거처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공의 신의와 청덕(淸德)을 세상에 으뜸이며 고금에 드문 분」이라고 하였다.
1666년 좌승지, 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 형‧병조참의,
대사간, 예‧호조참의가 되었다.
그 후 공조참판, 예조참판, 경기감사, 호조‧병조참판, 도승지,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거쳐 1685년 기사에 들어갔다.
1687년에 개성 유수가 되고
1689년 기사환국을 개탄하고 녹을 받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기국이 뛰어나고 문행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다.
공이 기주관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공을 비필주서라고
별을 붙였다는데 특히 서예에 능하였다.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성삼문 신주가 홍주로 돌아올 때 호송하여
사림(士林)이 이에 감동하여 사우祠宇를 세웠다.
저서로「옥운유고」가 있고 시호는 정혜공이다.
광산김씨사.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