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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과 함께하는 서울시(詩)문학기행
(제21회)
일시: 2016년4월14일(목)
주최: 서울특별시
주관: 사)국제펜클럽한국본부
후원: 서울특별시
제21회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서울시(詩)문학기행
■ 일 시: 2016년 4월14일(목)
■ 장 소:
운현궁, 개벽사터(천도교중앙대교당), 이율곡집터, 민영환 자결터
별궁길, 조선어학회터, 재동백송, 박규수 집터,
만해당, 가회동길, 경기고보터(정독도서관), 조계사,
우정총국 회화나무, 민영환 집터, 숙명여고터, 중동고터,
목은 이색 영당, 정도전 집터, 박인환 집터(광화문)
■ 참가자: 서울시민과 문인 45명
■ 강 사: 김경식 (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1960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문학과 역사, 지리를 집중 탐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부터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을 시작했으며,
학교 및 단체에서 수백 회의 인문학기행을 진행했다.
저서로 <사색의향기문학기행>,<서울문학지도>외 다수가 있으며,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문학기행 <이병기시인을 찾아서>가 게재 되었다.
2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에서 문학특강,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였다.
몇 년간 서울문화재단 주최의 <서울문학기행>을 진행하였으며,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주최하고,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서울시민과 문인들이 함께하는 詩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진 행: 이애정(시인)
김자은(시인)
■ 문 의: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처
전화02)782-1337~8
제21회 서울 시민과 함께하는 서울 시(詩) 문학기행 일정표
■ 세부일정표
- 2016년 4월14일(목)
09:30~10:00 운현궁(무료입장) -전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 50m 지점
명찰, 자료집, 간식 제공
10:00~10:30 < 운현궁> - 기행 일정 설명 및 운현궁 소개
10:40 ~11:50 개벽사터(천도교중앙대교당), 이율곡집터, 민영환 자결터
12:00~12:40 점심식사- 인사동 그집 02-737-0575
13:00~17:00 별궁길, 조선어학회터, 재동백송, 박규수 집터,
만해당, 가회동길, 경기고보터(정독도서관), 조계사,
우정총국 회화나무, 민영환 집터, 숙명여고터, 중동고터,
목은 이색 영당, 정도전 집터, 박인환 집터(광화문)
17:00 광화문역(전철5호선)에서 해산
■ 일정에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울북촌과 인사동 주변의 시문학 유적지 답사기
김경식( 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북촌의 역사적인 의미
문학기행에서 수도 서울이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하다. 서울은 조선 시대에는 한양이란 이름으로 500년 이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36년과 대한민국 수립 67년 동안 여전히 수도이다. 환란과 전쟁으로 건축물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다만 서울을 답사하여 역사적인 사실과 그 시대의 인물을 탐구하며,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이 서울역사문학기행의 의미다.
넓은 의미로는 북촌은 청계천과 종로 북쪽을 의미한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인 율곡로의 북쪽을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는 율곡로 북쪽 중에서도 주로 삼청동길(사간동길)에서 창덕궁길(원서동길)까지를 북촌으로 부르고 있다.
율곡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진 길은 대략 6개 길로 분류된다.
북촌 제1길은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삼청동길, 제2길은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는 감고당길, 제3길은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별궁길, 제4길은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가회로(재동길), 제5길은 현대빌딩에서 시작하는 계동길, 제6길은 창덕궁 담장을 따라 난 창덕궁길(원서동길)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둔덕에 위치한다. 명당이다. 궁궐에 근무하던 세도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된 것은 일견 당연하다. 남산 근처는 남촌이라 했다. 주로 가난한 선비나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다.
일제는 북촌의 맥을 빼기 위해 남산 근처를 개발한다. 명동과 충무로의 등장이다. 북촌은 일제하에 명맥을 상실하게 된다. 세도가들이 살던 북촌은 퇴락하기 시작한다.
재력을 상실한 집안들은 유물들이나 세간들을 팔려고 내놓기 시작한다.
이 거래가 시작된 곳이 인사동이다. 결국 오늘날의 인사동으로 변모의 초기의 모습은 북촌의 망해가던 사람들이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이 나오던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북촌의 경계가 되고 있는 율곡로는 인사동 초입의 길이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과 종묘의 맥을 끊기 위해 만든 도로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1번 출구를 나오면 별궁길이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100m 쯤 올라가면,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택과 만난다.
별궁은 고종(1852~1919) 황제가 왕실의 가례(嘉禮)를 위해 건립했다.
이곳은 순종(1874~1926)혼례의 가례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례는 왕의 혼인이나 즉위식을 의미한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 화재를 당하였으며, 1936년 민간에 매각되고, 결국 풍문여고 교사와 한양컨트리클럽 휴게실로 사용되기도 하는 비운을 당한다. 조선 왕조의 건축물들은 이렇듯 풍비박산이 났다. 별궁은 1950년대 까지만 해도 풍문여고 운동장 한 가운데 있었지만, 별궁의 현광루와 경연당은 현재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이전 복원했다. 별궁길을 걸으면서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면, 역사의 뒤안길이 아닌 풍문여고 담장과 상가만 보일 따름이다.
감고당(感古堂) 길은 조선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해 건축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에 감고당에서 거처한 이후, 민씨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왕비로 책봉된다. 덕성여고 본관 서쪽이 감고당이 있던 터다. 지금 감고당은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명성황후는 자신이 왕비로 책봉된 일을 회상하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운현궁과 대원군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다. 또한 고종이 왕으로 등극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다.
대원군 이하응은 운현궁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시켰다.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왕(고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명복의 나이 12세였다. 처음부터 이곳을 운현궁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1863년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그의 부인을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를 받을 때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이 해는 고종이 왕으로 등극한 해였다. 운현궁이 있던 장소는 본래 관상감 터였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왕기가 있다고 전해오던 곳이었다. 대원군은 이곳에 다양한 건축물을 신축한다. 낙성식에는 고종이 참여하고 임시과거시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당시 운현궁은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까지 포함할 정도의 규모였다.
운현(雲峴)이란 당호의 이름은 당시 이곳의 고개이름에서 유래한다.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대원군의 후손에게 등기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1991년 서울시가 매입하고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축물로는 1864년에 완성한 노락당과 노안당, 1870년에 준공한 이로당이 있다. 당시에는 대문도 4개나 있었다. 그러나 후문만 남아 있다. 서울시 시문학기행에서 운현궁을 탐방하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 편의 시 때문이다.
富貴昻天從古死(부귀앙천종고사) 부귀가 하늘처럼 높아도 죽음이 있고
貧寒到骨至今生(빈한도골지금생) 극한 가난에도 살 길은 있네
億千年去山猶碧(억천년거산유벽) 수없는 세월이 흘러도 산은 늘 푸르고
十五夜來月復院(십오야래월복원) 보름밤이 다가오면 달은 다시 둥그러진다네.
- 흥선대원군의 한시 빈한시(貧寒詩) 김경식 번역
이 한시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쓴 시다. 이 한시를 쓸 때는 그가 극도로 삶이 어려웠을 때다.
□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다.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사용되었다. 1866년3월21일 고종과 명성황후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는 가례준비를 노락당에서 하였다. 고종은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그 위세를 알만하다.
□노안당(老安堂)
대원군의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축물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몸채에 동쪽끝 부분에 7칸이 연결되어 정(丁)자형의 건축물로 구성되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이 개혁정치의 중심지였다. 당시에 누구든 이곳에 오면 높은 기단에 세워진 크고 웅장한 집 규모에 기가 죽었을 것이다.
노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이다. 현판 왼쪽 끝 하단에 서위(書爲) 석파선생(石坡先生) 노완(老阮)이라고 쓰여 있다. 김정희(金正喜) 인(印)이라는 낙관도 선명하다.
서위석파선생노완(書爲石坡先生老阮)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을 위해 노안(김정희)이 현판을 쓰다’로 해석할 수 있다 노완(老阮)은 김정희의 30여개의 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많다. 노안당이 완공되던 1864년에 이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노안당에 걸려있는 편액은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제작된 모각품이다. 노안당의 진짜 편액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노안당 현판은 그럼 누가 쓴것인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 흥선군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추사 김정희에게 그림과 글씨를 배웠다.추사를 존경하였기에 노안당 편액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노안당은 불우한 시절에 대원군이 칩거 했던 곳이기도 하다. 청나라에 3년 동안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후에 은둔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결국 1898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보수공사 당시에 노안당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운현궁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노안당의 집 이름은 공자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 이로당(二老堂)
“두 노인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의 집이다. 남성들의 출입을 어렵게 하기 위해 ‘口’자 모양으로 건축했다. 노락당과 함께 안채의 기능을 담당했다.
노락당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결혼식)가 치러진 이후 왕이 머문 이유로 생활공간으로 정서가 맞지 않았기에 새로운 안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현판글씨는 추사 서체를 집자한 것이다. 이로당 왼편 장대석 밑에는 운하연적(雲下硯滴)이라는 석물이 앉아 있다. 연적과 벼루를 상징한다.
□ 운현궁의 대문
지금 운현궁의 대문은 본래 후문으로 사용하던 문이었다. 운현궁에는 .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당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
대원군의 권력이 강할 때에 운현궁의 위용이 대단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청나라에 구금당하고 있을 때에는 관리가 어려울 정도로 퇴락했다. 역시 집은 그 주인이 관리를 해야 한다.
다시 운현궁이 활기를 찾게 된 것은 그가 재집권하고 부터다. 임오군란(1882년) 직후와 동학혁명(1894년) 당시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1898년, 운현궁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그해 부인도 세상을 떠나고, 운현궁은 주인 잃은 집이 되었다. 권력의 무상함과 인생이 짧다는 것을 운현궁을 지날 때마다 느끼는 이유이다.
□ 운현궁 양관
양관은 조선총독부가 친일 귀족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당시 선물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 민족의 반역자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초에 훈장을 받고 저택도 받은 사람들은 많다. 일신을 위해 조국을 배반한 것이다.
운현궁 저택인 양관은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다. 1917년 이준이 세상을 떠난 후에 순종(純宗)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가 상속받는다. 이 무렵 일제의 총독부 토지조사사업(1918)년 완료된다.
이때 조선 왕실이나 관청의 토지와 공유지가 몰수되어 총독부 소유가 된다. 운현궁의 양관은 광복이 되어 개인소유로 변하고 토지분할을 하게 된다. 이때 운현궁 양관(운니동 114번지)의 땅 3586평과 284평의 양관건물은 덕성학원에 매각된다.
양관을 설계한 사람은 일본인 ‘가타야마 도우쿠마’였다. 조선총독부 관저를 설계한 사람으로 고종에게 서훈도 받았다. 양관은 석재와 벽돌을 사용한 2층의 건축물로 284건평이며, 좌우대칭의 르네상스식 건축물이다. 2층 중앙부에 4개의 ‘이오닉 오더’의 붙임기둥 장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앙현관과 기둥은 석재로 쌓았고 다른 부분은 벽돌조에 모르타르를 칠하였다. 난방은 벽난로를 놓았으며, 바닥은 목조이며 화장실과 부엌이 내부에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서울교동초등학교와 동요
서울교동초등학교는 삼일정신과 운현궁의 숨결이 스며있는 학교이다. 1894년에 <교동왕실학교>로 개교한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역사와 전통의 학교답게 우리나라의 많은 인재가 이 학교 출신이다. 윤보선 대통령, 김상협 국무총리, 소설가 심훈, 아동문학가 윤석중, 윤극영. 어효선 등 정치, 문화, 예술 분야에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학교 교정에 세워진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을 읽고, 윤석중의 작사, 작곡인 <반달>을 부르면, 민족혼이 살아오는 듯하다.
교동초등학교의 교목은 작은 화양목이다. 그러나 화양목은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끈기와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나무이다. 사철을 두고 변함없이 늘 푸른 기상을 지녔다. 교동초등학교의 교화는 목련이다. 목련은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 맑고 희게 피어나는 꽃이다.
윤극영. 윤석중. 어효선 선생등이 없었다면 한국의 동요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절망적이다. 어린이들의 문학과 음악적인 정서에 엄청난 영향을 준 분들이다. 무엇보다 이분들은 교동학교 출신들이다.
결국 교동초등학교는 한국 아동문학과 동요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번 교동초등학교 답사가 의미 있는 이유이다.
윤석중 (尹石重 1911년~ 2003년) 은 한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이다. 그가 작사한 노래를 듣지 않고 자란 대한민국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는 교동초등학교와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1942년에 도쿄 조치 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신소년’에 동요 〈봄〉 1925년 잡지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뒤 많은 동요를 발표한다.
윤석중은 율동적 표현을 지닌 동시를 창작한다. 1932년에 발행된 〈윤석중동요집〉은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집이다. 이 책에 게재된〈낮에 나온 반달>〈퐁당 퐁당〉<도리도리 짝짝궁〉등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잃어버린 댕기〉는 1933년에 펴낸 동시집이다. 이 동요집에는 3·4조나 7·5조의 음수율을 벗어난 여러 편의 동시가 실려 있다.
<잃어버린 댕기〉동시집을 통해 그는 글자 수를 맞추어 지은 것을 <동요>라고 규정했다. 어린이를 위해 지은 글자 수가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동시라는 문학적인 성격을 규명한 장본인이다. <윤석중동요집>(1932년),〈잃어버린 댕기〉, (1933년)<어깨동무〉(1940년),〈굴렁쇠〉(1948)를 통해 많은 노래들이 창작되었다. 윤석중은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던 분이다. 윤석중 선생 작사한 동요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제목을 들으면 노랫말이 생각나는 동요는 다음과 같다. <졸업식노래>, <어린이노래>, <스승의날 노래>, <낮에 나온 반달>, <둥근달>, <퐁당퐁당>, <달따러 가자>,
<기러기>, <앞으로>, <옹달샘>, <달>, <고향땅>, <동무들아>, <기찻길 옆 오막살이> 등이다.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 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고개 넘어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놀 지는 저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불면서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 <고향땅> 윤석중 작사/ 한용희 작곡
필자는 지금도 가끔 이 동요를 부른다.
언제부터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향이 그리울 때는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노랫말과 가락이 애수를 느끼게 하며 망향의 노래로 많이 불렀던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단과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은 그 얼마이던가. 이 곡을 작곡한 한용희 선생은 KBS의 어린이 노래자랑 프로였던 '누가 누가 잘하나' PD였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꼬마 눈사람>, <고향 땅> 아이들이 애창하던 동요들을 작곡한 분인데도 일반인들은 그를 모른다.
보름달 둥근달 동산위로 떠올라
어둡던 마을이 대낮처럼 환해요
초가집 지붕에 새하얀 박-꽃이
활짝들 피어서 달구경 하지요
- <둥근달> 윤석중 작사 / 권길상 작곡
<둥근달>의 작곡가 권길상 씨는 이 학교 출신의 아동문학과 어효선이 작사한 <과꽃>을 작곡한 분이다. 특히 권길상 선생님은 유명한 <꽃밭에서>를 작고했지만, 역시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윤극영(1903~1990) 선생님은 우리나라 동요 작곡의 선구자이다.
동요 작곡의 선구자이다. 1922년 방정환, 손진태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그는 도쿄 음악학교의 사범과 재학 중이었다. 색동회는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이다. 1923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한다. 1924년 동요〈반달〉을 작곡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노래다운 노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반달〉은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의 슬픔과 아픔을 표현한 이 노래를 부를 때는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반달> 윤극영 작사/작곡
1926년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동요집과 레코드 집도 발행한다.
이 동요집에는 〈반달>,〈설날〉,〈꾀꼬리〉,〈귀뚜라미〉,〈두루미〉,〈꼬부랑 할머니〉,〈흐르는 시내〉,〈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 등 모두 10편의 동요가 실려 있다. 윤극영은 400편 이상의 동요를 남겼다.
어효선(1925~2004)은 동요〈꽃밭에서>와 〈과꽃〉의 작사가이다. 1943년 한양중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초등학교교사가 되기도 했다. 해방이후 그는 동시를 열정적으로 발표한다. 1948년〈어린이〉에 동시〈졸업 축하의 노래〉,〈선생님의 은혜〉를 발표한다. 〈꽃밭에서〉는 1952년 9월(소년세계),〈파란 마음 하얀 마음〉1957년 6월(새벗)에 발표한 동시이다. 1967년 2월에 <새벗>에 발표한〈눈사람〉도 많이 알려진 동요가 되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어효선 작사 한용희 작곡 < 파란마음 하얀마음>
■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민족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천도교의 총본산 교당이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종합 문예지 개벽(開闢)의 창간터다.
이곳의 역사적인 궤적을 찾아 가면 그곳에 동학 창시자 최제우 선생을 만나게 된다. 조선 후기의 혼란한 사회상과 더불어 기존 종교인 불교, 유교 및 하늘 숭배사상은 그 존재 가치가 약해졌다. 이때 천주교는 백성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는 종교가 된다.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 것이 동학(東學)이다.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선포하고 동학을 창시한다.
손병희(孫秉熙) 선생은 동학의 3대 교주로서,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바꾼다.
중앙대교당의 건립은 손병희 선생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당시 일제는 이 건물의 건립에 반대했다. 그러나 천도교 300만 신도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는데 1명당 10원씩 모금하기로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건축할 대지는 윤치오(尹致旿)가 1,500평을 기증하였다. 1918년 12월 1일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19년 3ㆍ1운동으로 공사는 중지되었다. 1919년 7월 일본인 나까무라 헤이요시(中村與資平)에게 건축설계를 의뢰하여 1921년 2월 28일 준공된다.
지상 2층 그리고 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이다. 1층은 700.83㎡(212평), 2층은 150.74㎡(45.6평), 3층은 47.74㎡(14.44평), 4층은 23.97㎡(7.84평)였다. 시공자는 중국인 장시영(張時英), 총 감독관은 일본인 기사(技師) 고곡호시(古谷虎市)였다. 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22만원이 소요되었다. 나까무라 헤이요시는 1905년 동경제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에 진야갈서설계사무소(辰野葛西設計事務所)에서 근무한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본점을 설계한 곳이 이 사무소다. 나까무라는 1908년 이 공사의 공무원(工務員)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1912년 조선은행이 준공된 후 한성에 잔류하고 봉래동에서 설계사무실을 차린다. 그는 숙명여고(淑明女高, 1920), 조선상공회의소(朝鮮商工會議所, 1920)와 군산ㆍ예산ㆍ대구 등지의 은행 지점 건물 등 많은 건축물의 설계를 맡는다. 그러나 그는 중앙대교단이 완공 될 무렵 도쿄(東京)로 돌아갔다. 이 건물은 그의 한국 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단 건물은 아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쎄제션(Vienna Secession)풍의 건축이다. 적벽돌 외장이 주조를 이루고, 일부분에 화강석을 써서 강조하였으며, 기독교 교회당과는 외부 및 내부의 모습이 다르다.
건물 정면은 좌우 대칭이다. 화강석을 볼륨 있게 사용하여 기단부의 자리를 잡았다. 화강석의 반원 아치를 들여쌓은 출입문의 중앙 현관부는 이채롭다. 현관의 양끝에 화강석의 장식적인 부축벽을 꾸몄다. 전면 1층 창은 윗부분에 화강석을 3개씩 끼운 방형 창이다. 2층 창은 7개의 화강석을 끼운 반원 아치창 형태이다.
이 탑의 중앙부에는 반원 아치의 큰 창이 있고 그 상부에 2개의 작은 반원 아치창을 내었으며, 지붕은 바로크풍이다. 본당은 양옆에 각 네 개의 창을 제작했다. 안쪽 중앙 끝에 무대에 연단을 만들었다. 창 위쪽에는 천도교 문양을 활용하여 새긴 스테인드글라스로 마감했다. 건축물의 전체 외관은 후기 빅토리아 고딕양식이다. 돌과 벽돌을 이용한 장식 처리의 대표는 19세기 빅토리아 고딕양식의 전형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역사는 천도교 신도수가 최대일 때의 상징물이다. 당시 천도교는 교인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슬픔 기억과 함께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당시 지식인과 민중에게 천도교는 분명 희망의 종교였다. 교당 건립을 위해 전국 교인들의 모금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이 건축성금을 독립자금으로 오인했다. 장부를 압수하고 모금된 성금을 각 교구에 반납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교구들은 성금을 반납 받은 것처럼 거짓 영수증을 발급하기도 했다. 공사는 계속되어 완공되었다. 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 천도교중앙교단의 건축물이다. 당시 이 건축물은 명당성당과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경성의 3대 명물중의 한 곳이었다.완공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000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 이곳에서는 종교 이외에도 자주 시국강연회, 음악회, 동화극, 운동경기 등이 열리기도 했다. 특히 노동자, 여성, 사회주의자 등 사회적 약자와 혹은 일제의 집중적 감시를 받던 세력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1922년 10월 22일 열린 노동자대회는 이를 상징한다. 서울시내의 지게꾼들이 모인 성토대회였다.
이들은 몸값 40전과 매달 30전을 경찰에 상납해야 입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400여명의 지게꾼이 모였는데 그 집회의 분위기를 신문기사는 다음처럼 전했다.
"날마다 돈푼씩이나 벌어먹는 가련한 그 지게꾼들의 피를 빨아먹는 단속비는
없어져야 한다. 지게꾼들은 힘을 다해 버텨도 그날그날의 생활을 하야갈 수 없도다. 이때에 40전씩을 내지 아니한다고 지게꾼들의 목숨을 매달아둔 지게를 압수하고 있다. 시내에 있는 수천의 노동자의 생활을 압박하는 것에 대해 경찰을 비난하는 이유다. 이제부터 온당치 못한 압박을 배척하자는 연설이 있었다. 다수한 노동자들은 두 눈에는 흥분에 넘치는 눈물이 가득하고 박수소리는 강당을 진동시켰다.”
조선인 학살사건 보고연설회(1922년 9월), 인력거조합대회(1922년 12월), 조선 최초로 자유연애를 주제로 한 신여성 권애라의 강연(1923년 1월), 백정들의 신분차별 철폐운동인 형평사 전국대회(1924년4월), 노동청년회 노동공제회 등 사회주의 단체들의 러시아혁명 기념 대강연(1924년 11월) 등이 개최되었다.
결국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사회적 약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단골 집회 장소로 그 의미가 깊은 곳이다. 유신독재 하에서 명동성당이 해방구였다면, 일제강점기 때에 천도교대교구당은 그래도 응집력 있는 단체들이 모여 자신들의 의견을 돌출시키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을 중심으로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운동을 펼친 민족 문화와 문학의 산실이다.
■ 민영환 선생의 삶과 죽음
조계사 북동쪽 끝에 누군가의 동상이 서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민영환 선생의 동상임을 알게 된다. 계정(桂庭) 충정공(忠正公)민영환(閔泳煥)이라 쓰여진 그의 동상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관리부실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가난하게 살고 있다.
민영환은 (1861~ 1905) 현재 동상이 서 있는 위치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하처럼 위태로울 때에 민영환은 2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고종에게 개혁정책을 권하면서 나라의 변화를 강렬하게 선도하려고 분투했던 분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 일제에 항거하며, 생을 마감한 민영환 선생의 삶과 죽음은 가슴을 뜨겁게 흔든다.
민영환의 부친은 선혜청당상을 지낸 민겸호이다. 그러나 그는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입양된다. 17세의 나이에 정시문과에 급제했을 정도로 수재였던 그는 1881년(고종18)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대사성과 도승지를 역임한다. 그러나 그에게 비보가 날아든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부친이 시해를 당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3년 상을 치르고 그는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등 요직을 맡기도 한다.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된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이내 친일적인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두문불출한다. 그러나 1896년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된다.
그해 4월1일 인천을 출발하여 상하이, 나가사키, 도쿄, 밴쿠버, 뉴욕 등을 거쳐 유럽 대륙의 신문명을 보고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 각지를 둘러보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10월 21일 귀국한다.
6개월 동안의 기행은 민영환에게 큰 충격이었다. 기행문을 독립신문에 게재한다.
그는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기 위해 긴 기행을 결행한다. 1897년(광무1) 1월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했던 민영환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탐방한 후에 니콜라이 황제에게 국서와 고종의 밀서를 전달한다. 현재 러시아의 역사박물관에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역사를 증언하는 고서와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다. 고문서 중에 황실 자료집이 있다. 이 자료집은 바로 1896년에 거행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의 모든 내용들을 담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니콜라이 2세였다. 황실자료집에는 대관식을 축하하러 온 각국 외교 사절단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이 고서속의 사진 중에 갓을 쓰고 도포 차림으로 러시아 고관과 함께 있는 조선 선비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 최초의 러시아 특사, 민영환(閔泳煥)의 사진이다. 그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났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수반의 취임식에는 거물 정치인들이 참석한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은 성대한 국제 정치 외교의 장이었다. 당시 중국의 막강한 실세였던 이홍장(李鴻章)은 청나라 사절단 대표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역시 일본의 왕자와 함께 참석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은 당시 일본 정계와 군부의 최고 실력자였다. 중국과 일제의 이런 인물들과 러시아를 상대로 고독한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 3개월 동안 계속된 러시아의 외교무대는 그에게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으리라.
민영환 일행은 대관식 때 부르는 테너 가수의 공연을 처음보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웬 신사가 목살에 힘줄이 돋칠 정도로 소리를 지르니 모두 그를 우러러 보더라. 서양에서 군자 노릇 하기란 원래 저리 힘든가 보다." 민영환은 축하 공연에서 발레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며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 가녀린 소녀를 학대하다니 서양의 군자들은 참으로 짐승이로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풍속과 문화가 생소했던 러시아는 너무 먼 나라였다. 그의 저서 <해천추범>에는 민영환 선생의 이런 기행문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2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을 통해 그는 조선의 개혁이 시급함을 인식한다.
유럽의 제도를 모방하고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민권을 신장하여 조선의 근본을 일신하여야 한다고 여러 번 고종에게 건의한다. 그러나 그 개혁은 쉽지 않은 난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독립협회를 측면에서 후원하다가 원로대신들의 무고로 파직되기에 이른다.
1904년 이후 일제의 간교한 침략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자 을사5적을 비난하면서 자결한다.
당시 대한제국의 정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정부는 중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일제는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그해 8월에는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무·외교 부문에 고문정치를 시작한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정치, 경제, 군사 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성토하였지만 대한제국의 운명이 이미 다했음을 인식한다. 백성들을 저항시킬 목적으로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경 2,000만 동포와 고종 및 주한 외국사절에게 보내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아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격심한 이 세상에 우리 백성의 운명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죽어야 할 때 구차스레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어야 할 때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어찌 모르랴. 나는 지금 죽지만 혼(魂)은 죽지 아니하여 지하에서나마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오호국치민욕내지어차)'
- 민영환의 유서 中
그의 자결 소식을 들은 조병세, 김봉학, 홍만식, 이상철 등도 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1910년 경술국치 때에 홍범식 선생도 자결하면서 “민충정공은 큰일을 하셨다”고 했다. 홍범식 선생은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다. 민영환 선생의 저서로는 민충정공유고( 閔忠正公遺稿),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 (千一策)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우정총국과 홍영식의 삶
조계사 입구의 작은 공원에는 사찰 또는 지방의 동헌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있다이 건축물에 가까이 가면 정면 중앙에 우정총국(郵征總局)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보인다. 1884년에 세워진 건축이지만 본래 이곳은 전의감(典醫監)이 있던 터다. 전의감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관청이었다. 우정총국은1956년부터 체신부에서 관리하였으며 1970년 10월 22일 사적 제213호로 지정된다. 현재는 우편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체신기념관’이라고도 부른다. 우정총국은 당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서광범을 비롯한 개화파가 민씨 정권을 타도하는 장소로 선정된 역사적인 현장이다. 그들은 결국 이 터에서 1884년 12월4일 무너지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혁명을 도모한다. 혁명의 실패는 가담자들에게는 혹독한 죽음과 시련이 남을 뿐이다. 역사는 ‘갑신정변’이라 부르고 있으며, 당사자와 가족들은 타살과 자결로 이어졌다. 우정총구의 총책임자였던 홍영식의 삶과 죽음을 우정총국의 앞에 서 있는 회화나무 밑에서 회상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혁명이 정변이 되었을 때 격은 홍영식 가족사의 비극을 역사는 잊고 있기 때문이다.
홍영식(1855~1884)은 인생을 짧지만 굵게 산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영의정 출신의 홍순목이다. 그러나 그는 큰 아버지 홍만식의 양자가 된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관직에 나가기는 부족한 것이 많아 독서를 더 할 것을 강권한다. 2년간 그는 독서에 몰두한다.
이 무렵 그는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등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 훗날 이들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을 다녀오면서 부터이다.
1881년(고종18년)에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탐방한다. 일본 기행에서 그는 이상재를 만난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수행원이었다. 1883년 미국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을 탐방한다. 민영익, 서재필도 이때 함께 동행하였다.
미국 방문에서 그는 개화의 필요성과 혁명적으로 조선이 혁신되어야 하는 확신을 얻는다. 그는 우리나라 우편의 선구자다. 일본 방문에서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업무는 우편이었다. 일본 우편의 아버지는 ‘마에지마’이다. 그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는 홍영식과 만난 일화가 담겨 있다. 홍영식이 우편에 관해 질문한 내용과 직원들이 우편실무를 설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마에지마는 이때 홍영식에게 조선에서도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884년 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이 창설된다.
당시 우정총국의 행정구역은 한성부 중부 견평방(堅平坊) 전의감(典醫監) 자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였다. 홍영식은 1883년 6월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미국에 다녀왔는데, 이때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1884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병조참판이 되기도 했다. 그해 3월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치되자 총판(總辦)이 되어 우정사업을 총책임자로 임명된다.
드디어 10월1일 서울과 인천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1884년 12월4일 그들은 혁명을 도모한다. 이들의 혁명은 3일 만에 실패한다.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3일 만에 진압될 때,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임금을 호위하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가족은 모두 죽음을 선택한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가족 모두 가 음독자살한다.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의 우편 업무가 중단된다. 당시 본채를 제외한 부속건물은 모두 불에 타서 사라진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은 본채이다. 우정총국 건축물은 정면 도리칸 5칸, 측면 보칸 3칸 규모이며 위치는 남향이다. 건물내부 천정은 내진 부분으로 건축했다. 소란우물반자형태이다. 외진은 연등천장으로 꾸몄으며 바닥은 대리석이다. 건축물의 남쪽 양 모서리와 북쪽 면의 기둥은 모두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으로 세워졌다. 정면 가운데 칸은 두 짝문이고 나머지는 사분합창이 내어졌으며, 상부는 모두 빛살 광창으로 꾸몄다. 처마는 단청을 칠한 홑처마 구조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우정총국이란 이름은 10년 후인 1893년 전우총국(電郵總局)이라는 이름이 된다. 잠시 본채에서 우편업무가 재개되기도 했으나 1905년 일본은 통신권을 장악하여 버린다. 이후 이 건물은 한어학교와 중동야학교, 경성중앙우체국장 관사 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개인주택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부터 체신기념관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정총국 앞에 서 있는 늙은 회화나무는 이런 사연을 알고 있는 듯 오늘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의 잎새를 흔들고 서 있다. 이곳은 태극기가 가장 먼저 게양되었던 터다.
■ 목은 이색 영당
숙명여고 옛터 옆에는 목은 이색 영정을 간직하고 있는 기와집이 있다. 그러나 이 건축물이 역사적으로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옆 길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무심하게 지나간다. 그도 그럴것이 문이 언제나 닫혀 있기 때문이다. 관리자에 부탁을 해도 문을 여는 것은 쉽지 않다. 일년에 한산 이씨 분들이 제사를 지낼 때만 문을 열기 때문이다. 목은 이색 영당은 18세기 중엽 이색 선생의 영전을 그린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는 장소이다. 그의 영당은 국내에 몇 군데 있는데 이곳도 그중의 한 곳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원나라가 명나라와 교체되는 시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한 학자다. 20대 때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성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1354년 그의 나이 36세 때 원나라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3년 상을 제도화한 인물이며 고려말 우왕의 사부(師父)가 되기도 했던 대 문장가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득세하자 ‘장단’과 ‘함창’으로 유배되기도 한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호(號)에 모두 ‘은(隱)’자가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일러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공민왕은 이색을 만날 때면 향을 피우고 그를 기다렸다. 신하들이 이런 공민왕의 행동을 만류하였지만 “목은의 높고 넓은 도덕은 이 세상의 누구와도 비교 할 수 없다.”며 그의 학문과 도덕적 숭고함을 인정하였다.
1391년 유배가 풀려 한산부원군에 책봉되지만 여흥으로 다시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그의 문장과 정치력을 아낀 이성계가 한산백(韓山伯)에 임명하였지만 사양하며 살다가 1396년 그의 나이 68세때 세상을 떠난다. 그의 제자로는 권근, 변계량, 김종직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이 있다.
문헌서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 의해 모두 불에 타 버린다. 광해군 때 다시 건립되어 ‘문헌서원(文獻書院)’이란 현판을 걸게 된다.
문헌서원은 두 공간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과 진수당 서재가 있는 강의하고 배우는 장소다. 다른 한쪽 경사면 위에 사당을 배치한 묘당공간이다. 즉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뜰이 있으며 그 뒤로 강당과 서재가 있다. 강당은 전면을 향하고 있으며 서재는 강당옆에 있다.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墓)식의 배치다. 강당인 ‘진수당’은 ‘외삼문’에서 마주 보인다. 문헌서원의 대문인 ‘경현문’은 굳게 잠겨 있어 돌담을 따라가며 서원을 넘겨다본다. ‘진수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서재는 정면4칸 측면2칸의 역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문헌서원이란 사액현판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문헌서원의 역사적인 의미는 아무래도 선생의 묘소와 그의 신도비 때문이리라. 선생의 묘소는 문헌서헌 좌측 기린산 중턱에 있다. 묘지 터는 ‘무학대사’가 정했다는 명당터다. 무덤 앞에는 문인상과 망주석, 마상(馬像)이 각 2기씩 양쪽에 서 있다.
그 오른쪽에는 ‘목은선생이색지묘(木隱先生李穡之墓)’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서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묘소를 오르기 전에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목은 이색선생의 신도비를 만나게 된다. 신도비는 살아생전 덕이 많고 배품이 많아 훌륭한 사람이 죽은 후 그 업적을 돌에 새겨 그의 묘소입구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문헌서원에 있는 목은 이색 선생의 신도비는 다른 비와 구별된다. 신도비문을 두 번 썼기 때문이다. 앞면은 하륜(河崙)이 짓고 글씨는 당대 명필가 공부(孔俯) 쓴다. 그러나 목은 이색은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유배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재평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130년이 지난 현종7년(1666년)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목은 이색의 시와 산문은 시집 35권으로 4,300여수다.
그중 여강의 술회(驪江의 述懷)란 시 한편을 읽어보자.
天地無涯 生有涯 천지는 끝이 없고 인생은 유한하거늘
浩然歸至 欲何之 호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야하나
驪江一曲 山如畵 여강 한구비 산은 마치 한폭의 그림 같아
半似丹靑 半似詩 반은 붉고 푸른듯 반쯤은 시인듯
태조5년(1396년)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여강(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가다 술을 마시고 즉사한다. 그 술을 이성계가 보낸 술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 숙명여고와 박완서
숙명여고는 1906년 고종황제 엄 황귀비의 뜻으로 처음 '명신 여학교'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숙명여고의 개교축하연은 경복궁에서 열리기도 했다. 올해 개교 105주년을 맞이하는 숙명여고는 여성 선각자 뿐 아니라 많은 예술인들의 산실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80년, 서울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전하였다. 학교가 이전하기 전에 숙명 출신들은 지금은 없어진 학교터와 좁은 학교 골목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모두 중년 이상이 되었다. 이 학교터를 그리워하면서 찾아오는 이는 드물 것이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 이 학교 출신중에 소설가 박완서를 생각한다. 소설가 박완서는 1931년10월20일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11년 1월22일 세상을 떠난다. 박완서는 일제강점기 때인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호수돈여자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가 해방 후에 다시 숙명여고 학생이 된다. 당시 소설가 한말숙과 박명성등과 친구가 된다. 박완서에게 문학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당시 담임교사 였던 박노갑(1905~1951)이다. 그는 해방공간에 월북한 소설가였다. 박노갑의 소설들은 농촌과 도시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다.
소설가 박노갑의 호는 도촌(島村)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8년 휘문고보를 졸업한다. 1933년 호세이대학 문리대를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사 등의 신문사, 출판사, 잡지사 기자를 역임한다. 8·15해방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중앙집행위원과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한다. 1946년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1948년 숙명여고에서 박원서의 담임선생이 된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소설 〈안해>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노갑은 농촌문제를 다룬 〈춘보의 득실〉(조선문학, 1936. 10)·〈꿈〉(여성, 1938. 4) 등을 발표한다. 1948년에 발표한 〈사십년>이 대표작이다. 사십년은 궁핍과 범죄, 매춘 등 도시 지식인의 현실인식을 묘사한 작품이다.
박완서는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지만 6·25전쟁으로 학교를 포기한다. 전쟁으로 오빠와 삼촌이 세상을 떠나자 생계를 잇기 위해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한다. 이때 화가 박수근을 알고 그의 그림에 감명받는다. 이때의 기억들을 자전적 소설로 써서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 〈나목 裸木>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1976년 〈동아일보>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하고, 수필집으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살아있는 날의 소망〉(1982) 등이 있으며〈서 있는 여자〉(1985)·〈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등의 소설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자리를 굳힌다. 박완서는 40세의 늦깎이 작가로 출발하여 20년 동안 100편 안팎의 소설을 썼으며 많은 문제 작품을 발표한다. 6·25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사회현실을 예리한 필치로 묘사했다. 소설가 한말숙은 박완서의 숙명여고 단짝 친구였다. 소설가 박완서가 세상을 떠나는 날 까지 계속된 한말숙과의 우정은 “내 속에 박완서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숙명여고 동창으로 60년 된 단짝인 한말숙은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박완서의 숙명여고 학장시절을 떠올리며 “문학을 사랑했던 여고생이자 평범한 엄마, 그리고 큰 사랑을 받았던 소설가”라고 추억했다. 그녀가 남긴 현금 재산 13억원을 유족들은 서울대 인문대 학술기금으로 내놓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가난한 문인들이 많으니 절대 부의금 받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숙영여고 옛터에서 그를 소설로 인도한 박노갑과 박수근 선생의 삶을 생각했다. 박완서는 현저동 골짜기에 살면서 사직동에 있는 매동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숙명여고에 입학해서 그녀는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이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 말기 소개령이 내렸을 때는 개성 호수돈여고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어 숙명여고로 돌아와서 1950년까지 학교생활을 하면서 운명적으로 만난 담임 박노갑 선생을 통해 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서울대학에 입학한 그해에 6.25 전쟁이 터져 정통 문학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박완서는 작가로서 필요한
기본 소양은 숙명여고 시절 “박노갑 선생님께 받은 교육으로 거의 충분했다”고 문학 강연에서 말하곤 했다.
동아일보 1989. 11월 14일의 인터뷰에서는 “그분은 문학소녀들이 갖기 쉬운 환상이나 미사여구를 경계하도록 가르치셨고 남의 흉내를 내지 말라고 얘기하셨죠. 문학이 무엇인가를 엄정하게 보여주신 스승이셨습니다.”
박노갑 선생님의 해금조치 후 제자들이 추모 모임을 가진 인터뷰 기사 내용이다. 다음은 박수근(1914˜ 1965) 화백과의 만남이다. 6.25전쟁으로 인해 대학생활을 접어야 했던 박완서는 집안의 가장이었던 오빠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다. 미군부대 PX에 취직하여 한국물산 위탁매장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다.
이후 박완서는 초상화부로 자리를 옮긴다. 이때 만난 화가가 박수근이다.
박수근을 과소평가 하면서 세월은 흘러갔다. 1965년 박수근은 세상을 떠나고 1968년 박수근 유작전이 열려 대호황을 누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죄책감도 느낀다. 그래서 펜을 들어 당시의 자전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나목>이었다.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으로 장원한다.
그가 3년 동안 다니던 숙명여고 옛 터에서 나는 그가 쓴 몇 편의 시와 몇 줄의 소설을 읽고 싶었다. 그것이 또한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시를 읽는다>는 박완서의 시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박완서의 시<시를 읽는다> 전문
보름달처럼
뭉게구름처럼
새털처럼
보기만 해도 은하수 같은 이.
풍랑으로 오셔도
바닷가 도요새 깊은 부리로
잔잔한 호수 위 빗살무늬 은물결처럼
초록의 싱그러움 잊지 않는 이.
그래서
자신의 잣대를 아는 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
잠자는 영혼 일으켜 세우며
눈빛만 마주쳐도 통하는 이.
그래서 같이
여행하고 싶은 이
-박완서의 시 <이런 사람 하나 만났으면> 전문
■ 정독도서관(경성제1고보터) 답사
-서울교육역사사료관 탐방
-중등학교 발생지
-성삼문, 김옥균 집터
□ 심 훈. 한설야. 박헌영을 중심으로
경기고등학교는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 북촌의 서쪽 입구에 있는 정독도서관이 그 터다.
이 학교는 1974년에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문 고등학교였다. 1900년 현재의 종로구 화동에 터를 잡고 한국 최초의 중고등학교로 개교한다. <경성제1고>이다.
경기고는 1976년 강남 개발 정책에 따라 삼성동으로 이전한다. 다행히 이곳에 정독도서관이 들어섰기 때문에 학교의 모습은 대체로 그대로다. 사옥이나 개인에게 매도되었으면 아마도 답사할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했으리라. 동쪽 북촌 입구에 있었던 휘문고등학교가 그 예다. 현대사옥이 자리 잡으면서 해방공간의 역사무대였던 휘문 고교 교정의 옛 모습은 찾을 방법이 없다. 정독도서관이 개관되었을 때에 이곳은 남산도서관과 함께 가장 인기 있던 도서관이었다. 북촌 길의 감고당 길과 별궁 길은 정독도서관을 찾던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길이었다. 풍문여고 입구를 통해 고샅길을 걸으면, 이내 덕성여고에 정문을 통과하고 100m 쯤에 정독도서관 정문에 닿곤 했다. 또 다른 길은 지금의 헌법재판소(옛 창덕여고) 담 길을 휘돌아 좁은 한옥 골목을 통과하여 정독도서관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정독도서관을 가는 골목에는 늘 학생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금 정독도서관에는 서자 같은 궁궐 건축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성삼문. 김옥균. 서재필 등의 집터도 있었으니 이 터의 의미는 남다르다.
또한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그 유명한 <인왕산제색도>를 그렸다.
정독도서관 정문을 오르는 계단 옆에는 다양한 표지석이 서있다. <화기도감터>라는 표지석에는 이곳이 조선시대 총포를 제조하던 터라고 기재되어 있다. <중등교육발상지>라는 표지석도 보인다. 1900년 이곳에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관립중등학교가 건립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서울교육박물관 건축물은 1927년에 건축되어 지금은 교육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구 경기고 본관 건물은 1938년에 준공 했다. 경사지를 따라 세 동의 건물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세 동의 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예전에는 정독도서관 정문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궁궐 건축물이 보였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현재는 국립 서울미술관으로 다시 원위치로 옮긴 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들의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제반 사항을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고려 때의 제군부(諸君府)를 세종 15년(1433)에 고친 이름이다. 종친부 건축물에서는 역대 왕들의 족보와 임금의 초상화를 받들어 모시고 관혼상제 등의 사무를 보았다. 종친부 건물 중에 살아남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한 건축물은 중당(中堂)과 남쪽의 익사(翼舍), 익랑(翼廊)이다.
중당(경근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큰 건축물이다.
궁궐 건축답게 세벌대와 네벌대, 화강석 장대석 기단을 설치하였다.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워 건축했다.
그러나 3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은 회화나무다. 늙은 회화나무 아래서 필자는 이 학교 출신들 중에서 특별한 인연이 되었던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흥미로웠다. 그들의 삶과 문학, 죽음에 이르는 길을 더듬다 보면 가슴이 흔들렸다. 그래서 필자는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터)을 가거나 찾을 때, 세 명의 경기고 출신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한다. 심 훈, 한설야, 박헌영이다.
이들은 모두 경기고 출신으로 3,1운동 때에 만세운동을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심훈의 삶과 문학
심훈은 1901년에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소설 상록수로 친숙한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또한 영화인이었으며, 독립 운동가였다.
본명이 대섭(大燮)이었으며, 호는 해풍(海風)이다.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경기고)에 입학한다. 1917년에는 왕족 출신인 이해영과 결혼하는데 그의 나이 18세 때다. 이런 조혼은 당시 우리의 풍습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그에게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6개월 투옥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고 결혼을 하였지만 직업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시 그가 감옥에서 쓴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면, 애국심에 가슴이 흔들린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 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던 것이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 1919년 심훈의 옥중편지 인용
이 때 심훈이 선택한 길은 중국 망명이었다. 1920년 어느 날, 중국으로 남몰래 떠난다. 북경, 상해, 남경을 거쳐 항주의 지강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한다. 이 무렵 그는 민족주의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해 ‘극문회’라는 염군사의 산하단체를 조직한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이해영과 이혼한다. 1925년에 영화 장한몽에 출연하는데 이것은 그가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문학적으로는 카프(KAPF)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1926년에는 동아일보에 ‘탈춤’을 연재한다. 이 작품이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이다. 시련이 닥친다.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을 당한다. 이 때 함께 해직 된 사람이 박헌, 임원근, 허정숙 등이다. 철필 구락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사회부 기자들이 1926년 일제의 민족 언론탄압에 항거하여 언론옹호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단체다. 심훈은 자신의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늘 미래를 준비했던 사람이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 마음고생을 하던 심훈은 영화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먼동이 틀 때’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다.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직접 감독을 맡아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이 영화에 대해 임화와 한설야에게는 계급적이지 못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훈이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해는 1928년이다. 기자로 입사해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 하는가?’라는 제목의 평론으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에는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고 이듬해 조선일보사에 퇴사한다. 일 년 이상을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그가 집필을 위해 찾아간 곳은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였다. 1932년에 이곳으로 낙향한 심훈은 ‘영원의미소’(1933)와 ‘직녀성’(1934)을연이어 발표하며 작가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에게 위대한 시를 두고 떠나갔다. <그날이 오면>이다.
1936년 동창이었던 한설야. 박헌영을 두고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그의 죽음에 친구들은 모두 참여하지 못한다. 수배나 구속 중 이였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시 ‘그날이 오면’ 전문
이 시는 영국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러의 저서‘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페레스와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함께 뛰어난 시로 평가 받았다. 이 시에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소중함을 향한 간절한 절규를 지니고 있다. 이때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게 만든다.
■ 한설야의 삶과 문학
한설야(韓雪野 1900년~1976년)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한다. 심 훈, 박헌영과 경성제일고보 동창이다.
그러나 그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지는 못한다. 재학 중에 자신의 고향 함흥고보로 전학을 했기 때문이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소설 <그날 밤>으로 등단한다. 그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 때부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34년 일제에 의해 카프 문학인들의 검거가 시작되고 한설야도 체포되어 구속된다. 수감이후에 그는 계급성에 입각한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황혼>이다. 황혼은 노동자의 삶과 자본가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해방이후에 그는 북한을 선택한다. 그의 고향이 함흥이고 성향이 사회주의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과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을 역임한다. 한 때 그는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누린다. 1953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월북문인들의 숙청을 주동하기도 한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교육상과 인민상을 수상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1962년 숙청을 당한다.
모든 것을 잃고 그는 노동교화소로 추방되었다고 전하며, 1976년 사망했다는 설만 무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가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는 것과 1993년에 북한이 발간한 <문학예술사전>에 그의 장편소설 ‘황혼’에 관한 설명이 등재되어 있다. 복권을 의미한다. 북한은 아마도 그들이 중시하는 예술에서 수령형상소설의 발기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리라. 세 친구 중에 한설야가 가장 오래 살았다.
■ 박헌영의 삶과 죽음
박헌영은 1900년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현주는 몰락 양반 출신이며 지주였다. 박헌영은 첩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이학규와 부친은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부친 박현주는 본처의 아들 박지영. 박신기 등이 있었다. 박헌영 보다는 모두 10세 이상의 이복형제들이다. 박헌영이 경성 제1고보에 입학할 때, 가정환경조사서에는 그의 아버지 신분은 양반이며 상업으로 되어있다.
박헌영의 어머니 이학규는 박헌영의 부친과 결혼하기 전에 딸이 한 명 있었다.
남편이 사망하고 삶을 위해 그녀는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국밥집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곳을 드나들던 박현주의 첩이 되었으리라.
박헌영은 서당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미 그는 4세에 글을 쓸 줄 알았다.
1915년 그는 고향의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성제1고보에 진학한다.
이때 심훈과 한설야를 만난다. 서자의식이 강했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언더우드의 YMCA청년부에도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다. 이때의 활동 때문에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된다.
1919년 3월 1일 무렵 그는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퇴학은 간신히 모면했다. 친구 심훈과 한설야는 구속된다. 3,1운동으로 민족의 독립을 갈구한 그는 독립운동에 자신의 생을 바칠 각오를 하게 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1920년 9월 일본의 밀항선을 타고가 고학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그는 결코 자신이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해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이곳에서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접한다. 1921년3월에 고려공산 청년회 상해지회의 비서가 된다. 그해 5월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도 입당한다. 이때에 상해로 유학 온 주세죽과 결혼한다. 여운형(1886~1947), 김규식(1881~1950), 이동휘(1873~1935) 선생등과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다. 1924년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지만 비밀리에 조직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직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해직되고, 다시 조선일보에 입사하지만 일제는 그의 기자직을 용인하지 않아 해직된다. 결국 그는 막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이후 그는 수차례 감옥에 수감되면서 가혹한 고문을 견디는 투사로 거듭난다.
지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불지 않았다.
단식과 정신이상자 흉내를 내기도 하고,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병보석을 받아 고향집에도 머물기도 하고, 함경남도에 있는 사찰 석왕사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 마다 현지 경찰서는 그를 철저히 감시했다. 아내의 고향인 함흥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일제 경찰은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이미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으며,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아내 주세죽은 딸을 낳았다. 이때 낳은 딸 이름이 <박 비비안니>이다. 이들의 탈출사건은 신문에 보도되고,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박헌영 가족은 모스크바에서 환영을 받는다. '정치망명 객들을 위한 집'이라는 임시 거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김단야의 추천으로 박헌영은 1928년 11월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한다. 주세죽도 동방근로자대학에 입학한다.
박헌영은 이무렵 자신의 ‘이정(而丁)’가명을 사용한다.
“논을 가는 써레와 농작물을 끌어 모으는 고무래”의 한자어를 합치면 '이정(而丁)'이 된다.
러시아 발음으로는 '이춘'이다. “평생을 하층 농민계급으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는 이렇듯 자신의 가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33년 7월 상하이 부두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심문과 고문을 당한다.
5년 만인 1939년에 가석방되어 나오니 자신의 부인 주세죽이 김단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주세죽은 박헌영이 감옥에 수감된 줄을 몰랐다. 자신의 아내의 이런 행위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주세죽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며 함구를 부탁했다.
출옥이후 박헌영은 일제경찰에 의해 A급 불령선인으로 지정하고 감시를 강화한다. 박헌영은 경성과 인천, 청주 등을 오가면서 일제 경찰과 밀정들의 감시를 따돌린다. 1941년 2월까지 청주와 서울, 대전 등의 비밀 아지트에 숨는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무렵 피신처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정순년(鄭順年)이다. 물론 둘 만의 약속이었다. 아지트에서 함께 숨어 있던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순년은 정태식의 5촌 조카였다. 당시 정태식은 박헌영의 동지였다. 피신처에서도 아이는 태어난다. 1941년3월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朴秉三)이 태어난다.
박병삼은 한국전쟁 때 한산 스님을 만나 화엄사에서 출가한다. 1960년 용화사에서 사미계를, 196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지난해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최근 원경(속명 박병삼) 스님(74)은 조계종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대종사는 수행력과 지도력을 갖춘 승랍 40년 이상 스님에게 주는 법계다. 대종사 법계를 받아야 조계종 최고 어른인 종정이 될 수 있다.
원경 스님은 현재 마곡사주지이며, 2010년 시 230편을 묶은 시집 ‘못다 부른 노래’를 출간했다.
아버지! 세월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언제나 낯설은 산등성 위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어린 것이 벌써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심심찮게 외로움을 달래주던
정겨웠던 사람들은 모두 다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 버린 지금은 텅 빈 외로운 곳
오늘도 쓸쓸하고 외로운 적막한 산등성 위에 홀로 서서
무리를 잃어버린 외기러기마냥 그리움에 쌓여
저녁노을 넘어가는 아랫마을만 바라봅니다
- 원경 스님의 시 <그리움> 일부
어린 박병삼은 김삼룡(?~1950)의 아내 이순금이 키운다. 이후 어머니 정순년은 친정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목수에게 시집을 갔다.
은신처에서 박헌영의 생활은 비참했다. 전남 광주에 있던 방직공장 변소 청소부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벽돌과 기와를 굽는 공장의 인부로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책임을 지고 김일성에 의해 박헌영은 1955년 12월 5일 사형을 당했다. 반당(反黨),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 음모 등의 조작된 죄목을 붙인 재판이었다. 박헌영의 죽음은 북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정통 공산주의 종언을 의미한다.
김일성을 핵으로 하는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른다.
■ 재동 백송을 바라보며
-갑신정변을 중심으로
별궁길을 따라 북촌기행을 할 때에 나는 언제나 재동 백송에 인사를 하면서 시작한다. 600살이 넘은 백송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갑신정변, 6,25전쟁에도 살아남아 아직도 그 흰 육체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백송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이곳이 박규수와 홍영식, 최린의 집터였으며, 광혜원터였기 때문이다. 백송은 헌법재판소 북서쪽에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 있다.
재동 백송을 올려다보면 1884년 12월4일 갑신정변에 죽어간 홍영식 선생의 삶과 죽음이 어른거린다. 어디 그의 죽음뿐인가. 갑신정변에 참여 했던 젊은이들의 가족들도 죽어가야 했다. 그 뿌리는 박규수의 삶과 연관이 깊다. 박규수의 집에 모인 젊은이들이 그가 죽고 난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먼저 박규수의 삶의 궤적을 찾아보자. 1884년 12월 4일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혁명의 주동자들은 이 날을 정권 쟁취의 날로 잡았다.
일본군의 후원을 받았지만 준비가 미약하고, 백성들의 지지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주역들 스스로도 불안했으리라. 안동별궁에서 방화하여 그 혼란을 틈타서 거사를 시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안동별궁은 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순종이 세자일 때 가례청으로 이용하려고 건축한 궁이다,
갑신정변의 주역중에 지금의 덕성여고 터에 살았던 사람이 서광범이다.
그는 이곳이 담을 넘기가 쉽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이곳에 불을 지르면 이곳으로 시선이 집중될 것을 알고 있었다.
거사가 시작되자 서재필이 보낸 자객이 민영익을 죽이기 위해 여러군데 칼로 찔렀다. 당시 한국 정부의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 출신 묄렌도르프에 의해 민영익은 간신히 피신한다. 세관본부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으로 민영익을 옮기고 알렌의사를 부른다.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칼에 찔려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왕진을 온 한의사 14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모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알렌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중상자 민영익은 이미 출혈이 심하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사망직전이었다. 오른쪽 귀부분의 두개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있었다.
다행히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었지만, 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등 뒤로 크게 나 있었는데,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 표피가 잘리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그에게 바쳤다. 알렌의 치료후에 민영익은 치유되기 시작했다. 죽음직전에 살아난 민영익은 알렌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알렌에게 현금 10만 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참판 벼슬까지 하사한다. 민영익의 쾌유는 조선 서양의학을 극대화 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서양병원 건립이 과제였던 알렌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이 건립된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 광혜원이 개설되었다. 40개 침상을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이었다.
홍영식의 집에 관한 알렌의 고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패자의 길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광혜원 건물은 전에 홍영식이 쓰던 집이었는데, 그는 최근의 갑신정변 때에 살해되었다. 우리가 그 집을 인수받았을 때에 극심한 약탈 때문에 집은 뼈대만 남아 있었다. 방에는 사람의 피로 추정되는 핏덩이로 덮여 있었다.
그 집을 병원으로 꾸미는 데는 600달러 내지 1천 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정부에서 지불하였다. 일 년에 약 300달러 상당의 약품대가 소요되고, 경상비는 정부에서 담당할 것이며,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의약품과 시술이 무료로 된다.
약 40개의 침대를 수용할 만 한 방이 있고,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할 수도 있다.”
홍영식의 식구들이 모두 자살한 집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은 설립되었다. 결국 이곳은 피의 땅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옛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박규수의 집과 홍영식의 집이 이곳에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결국 그곳이 우리나라 병원의 첫 시작점이기도 하지 않는가. 광혜원을 다시 이곳에 복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 광혜원이 홍영식의 집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는 것은 잘 한 일이 아니다.
임오군란(1882년)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더욱 대립한다. 이 무렵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형성한 세력들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했다. 이들은 청나라에 조선을 의탁하여 난국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사대당이라 한다. 민영익, 김홍집, 어윤중, 민승호, 김만식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청나라에 기반을 두려는 사대당을 반대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고무된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등이다.
임오군란의 사과를 위해 사절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큰 변혁을 이루어 부강한 나라가 되고 있는 모습에 고무되어 귀국한다. 개화파의 개화와 정치개혁의 의도를 알아챈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집권파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무렵 청나라는 독일출신 묄렌도르프를 경제고문으로 추천한다. 그는 당오전이란 화폐를 만들게 한 장본인데 이로 인해 인플레가 극심했다. 이로 인한 사대당의 불만은 대단했다.
1884년 청나라가 프랑스에게 패배하였다는 소식은 개화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개화파 주역들은 일본 주둔 병력을 무력화하여 쿠데타를 도모한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이들의 쿠데타 모의 첫모임 장소는 박영효의 집이었다. 1884년 11월 4일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주역들은 한 달 후에 있을 우정총국 개설축하를 혁명일로 삼았다. 이 모임에는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도 참석하였다.
그는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150명이면 청군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3일 천하 마지막 날 경복궁을 둘러싼 청군은 1,5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시작되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창덕궁으로 달려간다. 고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고종에게 그들은 거짓으로 사대당과 청군이 오히려 변을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대피시킨다.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가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경우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옮겨가자 사대당의 핵심들인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은 궁 입구에서 차례로 살상한다. 12월 5일 창덕궁에서 정변의 주역들은 논공행상식 나눠먹기 자리 배정을 한다.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보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때 이재선은 좌의정에 홍영식은 우의정에 김옥균은 호조판서, 박영효는 한성판윤, 지금의 외무장관 격인 외무독판에는 서광범이 임명된다. 서재필은 병조참판에 임명되는데, 그는 전위대로 공을 세웠다.
12월6일에는 혁신정강 14개조를 공표한다. 그러나 명성황후 측의 보수 수구파들은 청나라 총독 원세개에 편지를 보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청나라군 1,500명이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당연히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여야 했지만 일본군은 쉽게 퇴각한다. 홍범식은 고종을 모시고 북관종료로 가다가 청군에 살해당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법 서재필 등은 일본공사관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입지를 튼튼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은 조선쟁탈전에 와신상담하기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결국 1885년 4월 천진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철수가 결정되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 병사 고작 150명이었지만 청나라 병사는 무려 3천 명이었다. 일본이 실리를 추구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는다. 결국 김옥균은 상해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명성황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와 절두산에서 부관참시를 당한다. 혁명의 실패는 보복의 죽음과 피바람이 살기를 부른다. 그러나 명성황후도 1895년 일제가 보낸 낭인들에 의해 창덕궁에서 비참하게 살상당한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재동 백송은 인간들의 이런 참극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 홍영식의 삶과 죽음
홍영식(1855~1884)은 인생을 짧지만 굵게 산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영의정 출신의 홍순목이다. 그러나 그는 큰 아버지 홍만식의 양자가 된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관직에 나가기는 부족한 것이 많아 독서를 더 할 것을 강권한다. 2년간 그는 독서에 몰두한다.
이 무렵 그는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등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 훗날 이들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을 다녀오면서 부터이다.
1881년(고종18년)에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탐방한다. 일본 기행에서 그는 이상재를 만난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수행원이었다. 1883년 미국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을 탐방한다. 민영익, 서재필도 이때 함께 동행하였다. 미국 방문에서 그는 개화의 필요성과 혁명적으로 조선이 혁신되어야 하는 확신을 얻는다. 그는 우리나라 우편의 선구자다. 일본 방문에서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업무는 우편이었다. 일본 우편의 아버지는 ‘마에지마’이다. 그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는 홍영식과 만난 일화가 담겨 있다. 홍영식이 우편에 관해 질문한 내용과 직원들이 우편실무를 설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마에지마는 이때 홍영식에게 조선에서도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884년 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이 창설된다. 그는 우정국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드디어 10월1일 서울과 인천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1884년 12월4일 그들은 혁명을 도모한다.
이들의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한다.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군에 의해 살해 된다. 그의 가족은 모두 죽음을 선택한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가족이 모두 가 음독자살한다.
혁명적인 사고와 실천행위는 이런 비극으로 끝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재동 백송을 보면 죽어야 했던 그의 가족들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슬픈 역사의 물결이 몇 번이고 가고 와도 아직 끄덕없이 살아있는 재동 백송이 소중한 이유다.
■ 선각자 박규수의 삶
박규수(1797~1877)는 본관이 반남이며, 호는 환재이다. 서울 계동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장소에서 출생했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하였다. 15세 무렵에 이미 글 공부는 대단한 경지에 올랐지만 곧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상심하여 거의 20년간 칩거하며 독서만을 한다. 특히 자신의 할아버지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심취한다.
1848년(헌종14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에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벼슬 운이 좋았다. 부안현감(1850), 동부승지(1854), 곡산부사(1858)를 역임한다. 특히 1860년(철종11)애 중국 북경 부근의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국을 다녀왔다.이 기행을 통해 그는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구미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파악한다.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한 사실은 유명하다.
진주민란후 백성들을 다른 곳 보다 많이 처형하지 않은 것은 안핵사로 조정에서 파견했던 박규수(1797~1877)의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조정에 진주와 인근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다고 보고한다. 물론 관리자들의 책임이 있었음을 보고했다. 아마 박규수의 진주민란 진상보고가 삼정의 문란이 아닌 일방적인 백성들의 책임으로 몰았다면, 조정은 최소한 수 천 명의 진주 사람들을 참살하였을 것이다. 당시 농민시가 노래처럼 불러졌다.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
진주 남강 또 만강(滿江)
짝 발로 헤앙금
도래미 줌치 장도칼
구시월에 무서리
동지섣달 대서리
-진주민란 때의 민요시
겨울밤이었을 것이다. 유년시절 마실을 가서 친구들과 함께 다리를 일렬로 가지런히 놓고 다리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물론 당시에 어떤 의미의 노래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노래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 거리 저 거리의 모든 거리 백성들아
진주 남강변을 채우도록 모두 모여라
한 쪽 발에는 대님을 묶고(동지라는 신호)
도래미 줌치(허리춤에 차는 복주머니)속에 장도칼을 지니고,
구시월에 무서리처럼
동지섣달 대서리처럼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1866년 셔먼호 사건 때는 평안감사였으며 경복궁 중수의 책임자였다. 그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을 가슴아파한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에도 승진은 계속되어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대사간 같은 요직을 역임한다.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쇄국을 풀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강골적인 면을 보여 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계동 자신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한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같은 인물들이다. 중국에서 익힌 견문으로 그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지금 식으로 하면 의식화를 한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수교를 요구한다. 박규수는 최익현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역설한다. 결국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그의 마지막 벼슬은 수원유수였다. 저서로는 ‘환재집’, ‘환재수계’가 남아 있다.
■ 혁명의 풍운아 서재필의 삶
서재필(1864~1951)은 전남 보성출신이다. 그러나 그의 본가는 충남 논산이다. 어느해 이른 봄날 필자는 그의 본가를 찾아 파란많은 삶에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갑신정변 당시에 그는 지금의 정독도서관 북쪽에 살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서광효와 어머니는 성주 이씨였지만, 부친의 6촌 동생 서광하의 양자가 된다. 결국 7촌 아저씨의 양자가 된 것이다. 양어머니의 동생 중에 김성근이 있었다. 그는 이조참판으로 현재 북촌의 정독도서관 근처에 살고 있었다. 서재필은 바로 이 집에서 숙식하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한다. 처음 벼슬은 ‘교서관 부정자'였다.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던 직책이다. 이 무렵에 서광범, 김옥균 등을 만난다.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모신다.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과 교류한다. 이들이 만나 토론하던 장소는 봉원사였다.
지금의 이대 후문 쪽에 있는 사찰이다. 이 무렵 봉원사의 주지는 이동인(1849~1881)이었다. 그는 개화파 승려였다. 이동인은 양산 출신인데 일본말을 잘 했다. 당연히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신지식을 습득했다. 이것을 개화파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봉원사는 이런 젊은이들의 모임장소였다.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에 서재필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난다. 이때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도 함께 동행한다.
서재필과 일행은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6개월간 수업을 받는다.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한다. 1984년 1월부터 7월 동안 약 7개월간이었다. 개화파들은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하여 조련국을 설립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청나라와 명성황후의 반대로 무산된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된다. 결국 1884년 12월4일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어 전위대의 책임자가 된다. 서재필의 책무는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는다.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살해하고,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은 고종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살해한다. 이때 고종은 큰 충격을 받는다. 정권장악 후에 그는 이조참판이 된다. 3일천하 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가 망명한 후에 부모와 3형제등은 처형 당했다. 처는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두 살난 아들도 이때 사망한다. 와신상담하면서 서재필이 살았던 인생역정은 누구나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1885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미국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재필을 달랐다. 와신상담하며, 주경야독하여 의사가 된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라고 후회하였다. 이쯤에서 서재필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야 한다. 그의 이야기는 길고 언젠가 새롭게 조명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들이 그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혁명을 도모하였던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로 인해 죽어야 했던 부모와 형제들, 처와 자식의 비명소리를 들어보라. 혁명이 어디 아무나 하는 것인가. 그는 미국에서 와신상담하여 성공하였지만,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이며 상처였으리라.
■ 만해당
-잡지 유심 발간 장소
북촌의 계동 43번지는 한용운 선생이 살던 집이다. 1918년 9월 창간된 잡지 유심은 이곳에서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그해 12월까지 발행하고 중단된다. 이 집은 최린이 한용운 시인을 찾아 불교계를 3,1운동에 참여하게 만든 곳이다.
최린은 당시 이승훈과의 회합을 통해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운동 일원화 시켰다. 3·1 독립운동 후 법정에서 ‘서울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유심>지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그는 내설악 오세암에 머물고 있었다. 만해는 이 <유심>지를 통하여 세계 정세의 흐름을 널리 알리려 하였다 ,
한용운 시인이 <유심>지는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 투고를 계속 홍보하였다.제3호에는 그 첫 번째 현상문예란의 당선작을 발표하였다. 당시 견지동 118번지에 살던 방정환이 ‘고학생’ 과 ‘마음’등 소설로 입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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