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정존승다라니경에 관한 연구
김 영 덕*
서 언
불정존승다라니를 수록한 불정존승다라니경의 주된 내용은 제석천이 선주천자에게 죽은 뒤에 일곱번 축생의 세계에 전생할 고통을 가엾이 여기고 부처님께 구제방법을 여쭈어서 받은 다라니의 공덕과 인연을 설한 경이다. 이 경에 설해지는 불정존승다라니는 죄장소멸과 연명장수, 액난 제거에 공덕이 있다고 신앙되는 밀교계통의 다라니로 과거에 중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송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밀교역사에서도 그 자취를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불정존승다라니를 연구하는 일은 우리나라 밀교의 본 모습을 확인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할 것이라 생각된다.
Ⅰ. 불정존승다라니경의 전래와 번역
1. 불정존승에 관하여
불정을 경의 명칭에 넣은 경궤류가 불정류의 경전의궤로 칭해지고 있다. 이 경우 불정류의 경궤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명칭의 불정여래를 중존으로 하는 경궤류의 총칭이다. 불정이란 여래의 32상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는 불타의 두정(정상육계상, uṣṇīṣa)을 부처의 상징으로서 이념화한 것이다. 불정여래란 보통은 불정윤왕이라고도 칭해지며, 가장 유명한 당보제유지역 일자불정륜왕경의 일자금륜불정을 비롯하여 불정여래로 불리는 부처로는 삼불정, 오불정, 팔불정 등이 있다.
그러나 불정존승이 타불정류 경궤와 다른 점은 타불정류에서는 제불정여래를 주존으로 하는 데에 반해 불정존승 또는 불정최승이라는 명칭이 경명에 포함되는 불정존승다라니경류에서는 경의 설자가 석가불이며, 다라니를 중존으로 한다. 이것은 다라니의 영험에 대한 신봉이 그대로 다라니의 존격화로 연결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2. 불정존승다라니경의 중국전래
이 경전의 범문사본으로는 현재 3종이 알려져 있다. 뿐만아니라 티베트역도 존재하며, 더욱이 위구르문자, 서하문자에 의해서도 음사되어 있다고 하므로 이 다라니가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유행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 전래된 불정존승다라니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두행의가 불타파리와 함께 번역한 것(T.968)이다. 그리고 불타파리가 서명사의 순정 등과 함께 번역한 불정존승다라니경(T.967) 경머리에 있는 지정의 서문에서는 그 전래의 인연을 설한다. 지파가라(일조)는 불정최승다라니경과 최승불정다라니정제업장주경을 번역하였다. 그 외에 본 경을 번역한 다른 사람으로는 당대의 의정(635~713)이 있다. 이상은 중국에서 선무외와 금강지․불공 등에 의해 대일경․금강정경 등의 본격적인 중기밀교경전이 전래하기 이전에 번역된 불정존승계의 경전이며, 선무외 등도 불정존승계의 경궤 번역에 참여하였다. 그 이후의 불정존승다라니의 번역자로는 북송시대의 법천과 고려지공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불정존승다라니는 가장 고본인 두행의역이 번역된 680년부터 송나라때 다라니의 재역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중국에서 번역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왔다.
3. 제번역본과 주석서
다음은 현존하는 불정존승다라니경의 경․의궤․주석서들이다.
4. 번역의 문제
번역에 관련되어 그 잘못을 교정하였다는 기술이 당정각사 사문 지정이 술한 불정존승다라니경서에 보이고 있다. 서문에 의하면 불정존승다라니경에 이미 여러 본의 번역이 있으며, 다시 이 번역본이 완전하다고 판단되지 않았기에 번역하였다고 설한다. 의정역의 불설불정존승다라니경에서도 존승다라니가 송해진 직후 이 다라니는 과거에 번역된 것에 잘못이 있었기에 의정에 의해서 다시 번역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정존승다라니경에서는 여러 역본에서 선역본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면서 번역에 완전을 기하려는 의도가 보이고 있다. 그 이유를 제시한 하나의 예로 가구령험불정존승다라니기에 수록된 영험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라니의 올바르지 않은 번역으로 인해서 아무리 다라니를 염송해도 소용이 없었으나, 이를 고치자 곧 효험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Ⅱ. 불정존승다라니경의 내용과 그 사상
1. 존승다라니경의 내용
불정존승다라니경류의 내용은 약간의 증감이 있을 뿐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인과의 내용이 상세하기로 지파가라가 번역한 최승불정다라니정제업장주경을 들 수 있다. 이 경에는 선주천자가 악한 과보를 받게된 연유와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세의 중생들이 이 최승불정다라니를 염송하고 수지하는 공덕에 대하여 상세한 해설을 가하고 있다. 불정존승다라니류의 제경에서는 한결같이 이 다라니가 설해지는 과정과 다라니의 공덕에 대한 내용을 설하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세간적인 공덕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출세간의 실지로 지향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존승다라니의 의궤
선주천자의 과거 인과와 존승다라니를 설하는 것이 중심이 된 존승다라니경류에 속하는 의궤에는 불정존승법을 행하는데 필요한 상세한 작법이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불공역 불정존승의궤에는 금강계의 구도가 들어가 있으며, 결론적으로 번역이 아닌 찬술의 가능성을 짙게 하고 있다.
불공역만이 아니라 선무외역의 의궤도 찬술의 가능성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이들 존승다라니의 의궤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위주로 하는 중국의 중기밀교 성립․전개 이후에 존승다라니법을 행하는 아사리의 의도에 따라 그 아사리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밀교관련 내용과 중국사상 등이 뒤섞여서 체계를 잡게 된 것으로 보여지며, 그러한 증거를 의궤가 보여주고 있다.
3. 업장소멸과 파지옥법
경전의 초점은 모두가 두려워할 악한 과보와 그 과보를 소멸시키는 다라니의 힘에 집약됨을 볼 수 있다. 이 경전이 현실적인 중국인들에게 크게 어필되고 널리 행해졌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진정한 참회와 강렬한 정진으로 진실어로써 악구의 업을 소멸시킨다고 하는 경전의 극적인 구조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추진력이 되어 중생들을 확고하게 불도에 묶어둘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본경이 업장소멸과 파지옥법으로 널리 알려진 데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정존승다라니경에서 업장소멸과 파지옥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라니를 지니는 선교방편이다. 경전에서는 이 다라니를 지니면 다라니가 가진 수승한 험력에 의해 온갖 악취에 떨어질 일에서 벗어남을 설한다. 이것은 의궤에서도 동등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불공역의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법에는 다라니가 그대로 존상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Ⅲ. 불정존승다라니의 유포와 그 신앙
1. 중국의 불정존승다라니
⑴ 다라니석당과 돈황문서
다라니석당이란 불교석경의 하나로 다라니를 새긴 당주이다. 중국에서는 삼세중생의 득익공양을 위하여 성행하였고 석당에 새겨진 경문은 주로 불정존승다라니를 새긴 것이 많다. 돈황에 남아있는 밀교관계의 문서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당나라 중기부터 오대요금 때까지 아주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돈황에 잔존한 불정존승다라니경의 부수를 헤아리면 경 105부, 다라니10부, 가구령험불정존승다라니에 관한 것도 4부의 서사본이 있다. 이것은 다른 문헌의 수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그 신봉의 폭이 넓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각지에 걸쳐서 당의 중기부터 원․명에 이르는 석각존승당기의 수많은 분포와도 관련된다.
⑵ 중국의 불정존승신앙
불정존승다라니가 중국에 소개된 시점은 선무외와 금강지에 의해서 대일경․금강정경 등 본격적인 중기밀교의 체계적인 경전이 번역되고 행해진 무렵을 전후한 때이며, 그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당대후기의 밀교에서 금강정경계의 순밀이 오히려 부진하고 태장법 및 태장법의 아류인 삼종실지법과 아울러 내용상 잡밀에 속하는 불정존승다라니경이 번역되고 대중들에게 널리 행해진 데에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불공․혜과 이후 밀교가 급속히 쇠퇴한 데에 따른 점이다. 중국에서는 회창의 법난(842~845)에 의한 폐불의 영향을 받아서 당 후기에 밀교가 급속하게 쇠퇴하게 되었는데, 폐불 이후의 부흥과정에서 밀교는 다른 종파에 비해 무척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둘째는 불정존승다라니경이 중국인의 성향에 적절히 들어맞는 경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인도에서 금강정경의 성립 이후 밀교의 큰 흐름이 금강정경계로 흘렀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2. 한국의 불정존승다라니
⑴ 불정존승관계자료
한국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불정존승관계의 자료를 검토해보면, 가장 오래된 자료로 경북 영일군의 법광사지 삼층석탑 속에서 불정존승다라니명석제원호가 나온 일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흥덕왕 3년(828)에 창건되어 문성왕 8년(846)에 옮겨진 것이다. 그리고 광주직할시 서구 임동의 십신사지 대불정존승다라니당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본에는 강원도 평강에 광평사 다라니당이라 하여 <존승다라니>를 새긴 석당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의례 중 명종 3년 1월에 존승법회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또한 고려말에는 불정존승다라니경의 범자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고려대장경의 초조장경에 불정존승다라니경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재조대장경(고종 23~38년 완성)에는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 1권이 입장되어 있다. 현재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불정존승다라니류는 모두 8본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1. 오대진언(1485년간), 2. 진언집(1569년간), 3. 운수승가례(1670년간), 4. 밀교개간집(1784년간) 등 불정존승다라니를 수록하고 있는 여러 전적의 내용을 검토하면 그 판본들이 개판된 시기가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에까지 걸쳐있다. 이상 불정존승다라니와 관련된 유물과 의식과 문헌 등의 우리나라의 자료는 신라 이후부터 조선시대까지 걸쳐서 비교적 폭넓게 발견되고 있다.
⑵ 한국의 불정존승신앙
불정존승신앙이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은 선무외삼장으로부터 밀교를 전수한 의림(702~805?) 등의 고승이 국내로 들어와 활약한 것으로부터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선무외삼장이 활약하던 중국의 상황으로 미루어 추정컨대 우리나라의 밀교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금강정경보다는 대일경과 삼종실지법 위주로 흘러왔을 거라고 짐작되며, 불정존승신앙도 이때 함께 들어와서 널리 행해지고 그 행해진 결과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언집 등 제진언류 자료에 수록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위주로 한 정순밀교보다는 불정존승 등의 초기밀교가 처음부터 크게 우세했다고 보여지며 한반도에 전해진 불정존승신앙은 직접 이 경의 번역에 참여한 선무외∙지공과 관련된 한국인들의 활약과, 현존하는 여러 전적을 통해서 이의 국내 유통과 신봉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결 어
이상 불정존승다라니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의궤와 내용과 신봉 등에 관한 몇가지 사항을 살펴보았다.
첫째, 불정존승다라니경의 중국 전래는 당나라 초엽부터 그 번역이 행해지고부터이다. 그런데 이 경, 특히 다라니는 여러 번역자에 의해서 몇차례에 걸쳐 번역이 행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다라니의 정확한 번역이 요구된 것은 그만큼 불정존승다라니경이 중시되었음을 말해주며, 또한 다라니의 증험이 그 정확성에 따른다는 데에 있다. 이 경은 중국에서 대일경,금강정경이 본격적으로 전래한 시기의 그 이전부터 그 이후 송나라때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중국에서 번역,재역되었다.
둘째, 경의 주요내용은 업장소멸과 파지옥법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내용이 현실적인 경향의 중국인들에게 크게 어필된다. 또한 그와 같이 행하는 단법이 태장‧금강계에 비해 무척 간단하면서도 두 경의 사상이 투영된 흔적을 선무외와 불공역으로 되어있는 의궤에서 볼 수 있다.
셋째, 이 경은 중국에서 당나라 중엽 이후부터 요금시대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폭넓은 호응을 받았다. 그 사실을 중국 내에 남아있는 다라니석당과 돈황문서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정통밀교에 속하는 태장․금강계법과 별도로 불정존승신앙이 널리 행해졌다. 그리하여 밀교의 융성기가 지난 뒤, 대일경․삼종실지법과 함께 중국밀교의 중요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고 중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불정존승다라니와 관련된 유물과 의식과 문헌 등의 자료를 통해서 볼 때, 불정존승다라니가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끊임없이 지송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밀교의 성격은 체계적인 중기밀교보다는 중기밀교의 성격이 가미된 불정존승 등의 초기밀교적 요소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출처 : http://www.muwon.org/xe/index.php?mid=board_JaRyo_GyungJun&document_srl=2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