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업도
인천은 누가 뭐래도 바다를 품은 해양 도시입니다. 인천 사람들은 대대로 바다에서 삶을 길어 올렸습니다. 때로 카키, 때론 코발트블루 빛깔로 반짝이는 눈부신 인천의 바다 ‘황해’.
그 황금빛 바다 위로 168개의 보석 같은 섬이 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00개가 옹진군에 속한 섬입니다.
옹진 섬에 대대로 터전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점박이물범, 저어새, 대청부채와 같은 동식물이 공존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월 ‘i-view’가 옹진 섬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두 발로 걸어 옹진 섬들을 찾아가는 ‘섬 깊고 푸른 그리움’을 연재합니다. 가슴 설레는 옹진 섬 여행.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서해의 진주’, ‘한국의 갈라파고스’라고 불리는 굴업도. 소금이 깎고 모래가 키워낸 조각같은 섬이다. 굴업도(掘業島, 倔業島)는 해안지형이 수려해 문화재청도 국내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해안지형의 백미’라고 손꼽은 섬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경치에 반해 연중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특히 개머리언덕은 우리나라 ‘백패킹의 넘버원’으로 알려지면서 야영객들의 발길이 잦다.
▲ 굴업도는 소금이 깎고 모래가 키워낸 조각같은 섬이다. 섬은 아름답고 해안지형이 수려해 문화재청도 국내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해안지형의 백미’라고 손꼽은 섬이다.
소들의 목장이던 개머리언덕, 팩패킹의 성지로
굴업도는 작은 섬이다. 큰말과 개머리언덕이 있는 큰섬과 연평산과 덕물산이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을 목기미해변의 모래톱이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옛날엔 이 모래톱을 ‘장수리’라고 불렀다. 현재 주민은 9가구 16명이 살고, 대부분 민박업을 한다. 섬은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90㎞, 덕적도 남서쪽 13㎞해상에 있다.
굴업도의 명소는 ‘개머리언덕’이다.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곳엔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산에 이렇게 드넓은 초지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우며, 걸으면 걸을수록 아름다운 경치에 ‘와’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곳은 원래 굴업도 주민들이 소를 키웠던 목장이었다. 예전엔 집집마다 2~3마리 소를 키웠고, 이곳에서 방목했다.
개머리언덕의 끝은 낭떠러지다.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이성근(86)할아버지는 “개머리언덕에서 소들이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 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 굴업도 개머리언덕은 우리나라 ‘백패킹의 넘버원’으로 알려지면서 야영객들의 발길이 잦다. 마치 소의 등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개머리언덕은 ‘백패킹’ 성지로 많은 야영객들이 찾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이곳은 사유지이기에 화장실, 세면대 등의 공공시설물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팩패커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환상적인 일출과 일몰을 감상 할 수 있고 청정한 밤하늘에 빼곡히 들어찬 아름다운 별들을 볼 수 있어서다. 운이 좋으면 불을 켜고 밤바다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의 반짝이는 풍광도 조망할 수 있다.
개머리언덕에는 봄, 가을밤 멋진 그림이 연출된다. 야영객들이 친 각양각색의 텐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검푸른 밤하늘의 별들 만큼이나 아름답다. 이따금 사슴들이 다가와 텐트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굴업도의 사슴은 야생으로 현재 수백 마리가 살고 있다.
토끼섬의 ‘해식와’, 오랜시간 바닷물이 바위를 녹여 만든 절경
굴업도는 파도가 거칠어 해안가 절벽 안으로 파고드는 해식와(海蝕窪)가 발달한 독특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해식와를 보려면 무인도인 토끼섬으로 가야한다. 토끼섬 절벽엔 3m~5m 깊이로 우묵한 ‘터널’들이 파져 있다. 이것이 해식와인데 오랜시간에 걸쳐 바닷물이 바위를 녹여 깊고 좁게 침식해 만든 지형구조다.
▲ 섬의 가장 놇은 산인 연평산.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은 수직코스로 힘들지만 오르면 덕적군도의 전망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섬의 북쪽으로는 가장 높은 산인 연평산(128m)과 덕물산(138m)이 솟아있다. 굴업도의 상징적 존재이다. 연평산은 연평도를 덕물산은 덕적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
▲ 목기미해변. 이 모래가 큰섬과 작은 두개 섬을 연결하고 있다.
목기미해변에는 양쪽으로 단단하고 고운 모래 해변이 자리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만해도 모래톱이 높아 사리때에도 바닷물이 넘나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높고 두툼한 모래톱에 집을 짓고 살았고 ‘장수리’라로 불렀다.
굴업도의 상징적 존재, 연평산과 덕물산
목기미해변에서 연평산으로 가는 해변에 ‘옛 선착장’이 있다. 옛 선착장은 세월의 덮개를 언은 채 쓸쓸한 모습이다. 다시 연평산 방향으로 해안길을 걷다 보면 진짜 코끼리가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부르는 ‘코끼리 바위’를 만나게 된다. 굴업도의 ‘명물’이다. 굴업도 토박이들은 ‘남대문바위’라고 불렀던 바위다.
▲ 굴업도의 명물인 코끼리 바위.
▲ 연평산으로 오르는 길은 소사나무 군락지다.
연평산으로 오르는 숲길은 소사나무 군락지다. 소사나무들은 섬의 강한 바람을 오랜 세월 맞아서인지 한쪽방향으로 쏠려 있었다. 등산길은 나무와 돌이 어우러져 진한 초록 숲을 연출한다. 연평산 등산의 하이라이트는 정상으로 오르기 직전 마지막 20m의 아찔한 수직절벽을 오르는 것이다. 밧줄에 목숨을 맡기고 힘들게 올라보니 사방이 시원한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선 바라본 덕적군도의 풍경은 환상 그 자체다.
연평산에서 내려와 다시 목기미 해변을 거쳐 덕물산으로 향했다. 덕물산 가는 길엔 지금은 폐허가 된 목기미해변 마을이 있다. 30~40분 정도 오르면 덕물산 정상이다. 연평산과 덕물산 산행은 2시간 남짓 걸린다.
▲ 80년대까지 땅콩농사를 지었던 목기미해변마을.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다 떠나 폐허로 남아 있다.
7,80년대 땅콩농사로 유명, 80년 후반 이후 사라져
굴업도는 7,80년대 땅콩농사로 유명했다. 땅콩농사는 다른 농작물에 비해 수익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땅콩농사를 지었고, 땅도 땅콩농사에 적합했다. 지금도 섬에선 땅콩농사를 했던 계단식 다랭이밭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소를 활용해 밭을 개간했다. 땅콩농사는 중노동 이었다. 굴업도 땅콩은 해풍을 맞아 알이 굵고 맛이 좋아 인기가 많았다.
이경심(82) 할머니는 “땅콩 팔아서 애들 가르쳤다”며 “섬에 쌀이 귀해서 땅콩을 팔아서 쌀도 샀다”고 말한다.
마을 입구엔 ‘공덕비’가 하나 서있다. 오랫동안 굴업도 땅콩을 수매한 동인천 삼성상회 유흥효 사장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감사한 마음을 담은 비석이다.
땅콩농사가 사라진 시기는 80년대 후반이다. 김용구(더좋은경제 사회적협동조합)센터장은 “굴업도에 땅콩농사가 사라진 것은 80년대 시작된 농수산물수입개방과 관련이 있다”며 “정부에서 농수산물 시장을 개방하면서 아몬드를 수입했는데 아몬드가격이 싸고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땅콩의 영역을 잠식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목기미해변에 있던 작은말은 땅콩농사로 먹고살던 동네로 6가구가 살았다. 땅콩은 70년대 시작 할 때만 해도 쌀보다 가격이 높아 돈이 되는 작물이었다. 쌀에 비해 2.5배 가격이 비쌌다. 이랬던 땅콩이 80년대 후반 가격이 폭락하고 정부에서도 수매를 안 하자 사람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섬을 떠났다. 목기미해변에는 그들이 살다 떠난 마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전신주, 우물터, 집터, 부서진 집 등은 모래 바람을 맞으며 신비함과 지나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굴업도는 어업과 농업이 공존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민어의 고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민어파시도 열렸다. 목금이 너머 바다에 민어잡이 배들로 새까맸다고 한다. 민어를 잡으로 전국 각지에서 어선들이 몰려왔다. 민어로 섬이 들썩이자 외지에서 상인들이 들어와 선구점과 술집을 열었다.
▲ 굴업도 모래언덕. 섬은 모래와 흙이 혼재되어 신비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엔 장수리와 목금이해변 근처에 술집들이 빼곡했고 이곳을 ‘작사’라고 불렀다. 작사는 장사하는 술집과 기생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선원들, 장사꾼들, 색시들이 들어오자 목금이마을과 장수리 등에 임시가옥이 생겼고, 비좁은 땅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민어가 가져다 준 섬의 황금기였다.
이화용(88) 할아버지는 “내가 7~8세인 일제강점기 때에도 민어파시가 있었다”며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민어를 바위에 말려 건조한 뒤 풍선을 타고 충청도나 인천으로 나가 쌀이나 잡곡 등과 바꿔 먹었다”고 말했다.
핵폐기장과 골프장 건설로 미디어의 중심에 서
굴업도는 서해의 작은 섬이지만 역사적 이야기는 어느 섬보다 풍부하다.
1923년 윤칠월(8월)에 섬에 거대한 ‘태풍·해일’이 휘몰아쳤다. 바다는 잠잠했고,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했는데 갑자기 폭풍이 불고 해일이 일어 굴업도 목기미해변을 휩쓸어 버렸다. 당시 <동아일보>보도에 따르면 “인가는 바람에 날아가고 어선은 파도에 잠겼으며 사람은 용왕의 밥이 되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했다. 100여호 민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000여 명의 주민이 죽었으며, 어선 1000여척이 파손되어 바다에 가라앉았다. 한 섬을 초토화시켰던 거대한 재난이었다. 굴업도 주민들은 이때의 슬픈 역사를 아직도 상처로 간직하고 있다.
▲ 굴업도 마을전경. 현재 9가구가 살고 있다.
1994년 굴업도는 갑자기 대한민국 뉴스의 중심에 섰었다. 1994년 정부가 발표한 굴업도핵폐기장 건설 계획 때문이었다. 이 아름다운 섬을 주민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핵폐기장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인천시민들의 반대 투쟁이 거셌고 결국 백지화된 사건이다.
2007년엔 CJ가 굴업도에 골프장 건설을 계획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다시 섬은 몸살을 앓았다. 환경단체의 반대와 찬성주민들 사이에 긴장이 팽팽했다. 현재 굴업도 땅은 98.9%가 CJ의 소유다. 현재 골프장건설 계획은 철회된 상태다. 이후에도 굴업도 개발을 둘러싸고 여러 계획이 나왔지만 구체화 된 건 없다.
섬은 핵폐기장 건설과 골프장 개발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휘말렸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일련의 사건들이 섬의 존재를 세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섬이 잘 보존되어 있고 아름답고 귀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농업대신 민박으로 생업을 바꾸었다. 현재 굴업도 9가구 중 7가구가 민박을 한다.
▲ 개머리 언덕을 뛰어다니는 사슴들. 굴업도의 사슴은 야생이다.
주민들은 개머리언덕이나 산에 살고 있는 사슴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사슴이 개체수가 너무 많아 섬의 자연을 훼손하다는 것이다.
이해준(56) 굴업도 이장은 “굴업도에는 사슴이 3~4백마리가 사는데 사슴들이 흙과 나무를 파헤치고 동물의 배설물이 독해 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방해한다”며 “너무 늘어난 사슴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굴업도는 5년내에 황폐화 된다”고 말했다.
굴업도는 사람들이 가보고 싶은 섬, 버킷리스트에 올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휴가철이나 봄·가을엔 굴업도로 들어가는 배표를 구하기 힘들 정도다. 농업과 어업의 섬에서 관광의 섬으로 바뀌었고 연간 2만 명의 관광객이 굴업도를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섬을 찾는 만큼 우리의 자연유산을 잘 가꾸고 보존하는 노력도 뒤따라야 할 것 같다.
굴업도 주민 인터뷰①
굴업도의 유일하게 땅 소유한 국가유공자
이화용(88) 할아버지
이화용(88) 할아버지는 굴업도에서 유일하게 땅을 갖고 있다. 굴업도는 98.9%가 CJ의 소유다. 이 할아버지는 CJ에서 땅을 팔라고 제안이 왔지만 조상대대로 지키며 살아왔던 땅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살면서 굴업도에서 민박과 식당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어린시절 굴업도는 먹을 게 귀한 섬이었다. 굴업도는 예전엔 ‘피난고지’라고 불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섬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아버지는 풍선을 타고 민어잡이를 했고, 민어를 판돈으로 쌀이나 곡물을 샀다.
▲ 이화용 할아버지
그는 어린시절 민어파시가 있었고 목기미해변에 ‘작사’가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때는 목기미해변이 높아 거기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어요. ‘작사’라고 했는데, 그 규모가 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화용 할아버지는 18살이 되던 1952년, 굴업도에 있던 미 8240부대에 입대했다. 특수부대에 근무하면서 북한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을 조사했다. 경상도, 제주도, 부산 등에서도 군복무를 했고 그 후엔 서울에서 장사하다 안 돼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굴업도에서 땅콩농사도 하고 소도 키우다 다시 인천으로 나가 살다 1994년 굴업도핵폐기장으로 시끄러울 때 다시 섬으로 들어왔다.
이 할아버지는 국가유공자다. 평생 굴업도에서 살았기에 특별히 불편한 건 없고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섬이 좋다고 말한다.
굴업도 주민 인터뷰②
“땅콩농사로 힘들었는데 민박하며 생활이 나아졌어요”
이성근(86) 할아버지
덕적도가 고향인 이성근(86)할아버지는 굴업도가 서포3리로 승격될때 초대 이장을 지냈다.
“제가 서울에 있는데 아버지가 굴업도에서 땅콩농사를 지면 돈을 많이 번다며 저를 데리러 오셨어요. 섬에 가기 싫었는데 지금 아내를 데려 와서 결혼도 시켜서 어쩔수 없이 굴업도에 정착했지요. 한 5년만 살자고 71년에 들어왔는데 50년이 넘게 살고 있네요.”
71년 굴업도에는 18호에 30~40명의 주민이 살았다.
그가 처음 섬에 왔을 때 만 해도 굴업도의 행정구역은 ‘리’가 아닌 덕적도 서포2리 7반이었다. 인구가 너무 작아서 리가 안됐다. 그러다 1980년 1월 1일자로 덕적도 서포3리로 승격됐고, 초대 이장으로 선출됐다.
▲ 이성근 할아버지와 아내
그는 굴업도핵폐기장 개발에 찬성하면서 곤혹을 치렀다. “덕적도 주민들은 핵폐기장 개발에 반대했는데 제가 찬성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 5년간 덕적도에 들어가질 못했어요. 그때 대립이 정말 심각했습니다.”
이 할아버지도 80년대 후반까지 땅콩농사를 지었다. 소가 밭을 갈고, 집 사람들이 저 아래 있던 옹달샘에서 우물을 물지게 이고 매일 퍼다 날라야 했다. 중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었다.
“땅콩농사를 하면서도 빚을 냈어요. 겨울에 빚내서 땅콩농사해서 갚고 또 빚내는 악순환 이었지요. 땅콩할땐 아이들 가르치기도 힘들었지요.”
그는 땅콩대신 민박을 하면서 생활이 나아졌다고 한다. 관광업을 하면서 현금이 들어오면서 형편도 좋아졌다. 민박을 하면서 농사는 그만뒀다. “옛날 18가구가 살 땐 다 한식구 였어요, 생일이면 서로 불러 술 한 잔 씩 먹곤 했는데 지금은 생활은 더 좋아졌는데 인심은 옛날 같이 않아 씁쓸해요.”
굴업도 주민 인터뷰③
손 마를 날 없었던 80평생의 섬 생활
이경심(82) 할머니
이경심(82) 할머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굴업도를 떠난 적이 없다. 다른 주민들은 몇 년씩 인천이나 다른 곳에 살다 들어왔다. 할머니는 19살 때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땅콩농사, 보리, 고구마, 감자 농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땅콩농사를 오랫동안 지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산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어야 했거든요. 그래도 땅콩농사가 좋은 게 장마에도 작물이 떠내려가지 않았어요.”
▲ 고씨민박 이경심 할머니
남편은 이장을 하면서 농사짓고, 소먹이고, 가끔 뗏목을 타고나가 고기를 잡았다.
친정아버지도 민어를 잡았는데, 민어를 말려 충청남도로 가서 팔고 쌀을 사왔다. 섬에서는 쌀이 귀해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함께 먹었다.
이 할머니가 평생을 섬에서 살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땅콩농사도, 소를 먹이는 것도 아닌 몸이 아플 때 치료받을 병원이 없는 거였다. 예전엔 섬사람들은 아파도 대부분 치료를 못받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옛날에는 약이 없어 시름시름 앓다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 할머니는 민박을 하면서 땅콩 농사도 안 짓고, 소도 안 먹인다. 그래도 여전히 손에서 물이 마를 날은 없다. 고된 농사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민박손님들을 위한 밥과 찬을 만들고 밭일을 하며 80여년의 느린 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유창호 자유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