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제가 시론을 정리해 올릴 정도의 깜냥은 안되지만, "나름의 시 읽기에 대한 잔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거는 작품을 보기전에, 작가의 출신 성분과 호구조사를 미리 해 보는 겁니다.
시는 이성적 인식을 다루는 논리구조를 가진 글들과 다르게, 감성적인 글로 비유와 압축을 통해
많은 정보를 감춰두는 어려운 퍼즐게임 같습니다. 시에는 살짝 감추고 뒤트는 규칙이 내재돼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호구조사를 통해 가능한 한 숨긴 정보를 얻습니다. (문자 써서, 미학=
감성언어로 아름다움의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
『사진,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 1954년』 호구조사 내용
작년에(2022년) 이중섭의 미망인 이남덕( 야마모토 마사코)님이 별세했습니다. 1945년 미군이 깔아 논
기뢰가 수시로 터지는 현해탄을 건너온 후 이중섭과 7년의 동거를 추억하며 100년을 홀로 사셨습니다.
36세에 죽어 망우리에 무연고 묘로 묻힌 동양의 빈센트 반 고흐, 이중섭을 평가할 단어는
가족. 부부. 소. 희망 간단한 게 전부입니다. 피난시절 먹을 게 없어 서귀포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먹고
항문에 피를 흘리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x이 찢어지는 가난으로 이별한 가족의 슬픔이 작품이 됐습니다.
이중섭은 한국 전쟁 중 굶주림에 일본으로 간 아내와 아이들과 같이 살지 못하고 2년 후 무연고자로 죽습니다.
편지 내용 , 야스가타 군(큰 아들 태현) 곧 엄마랑 야스나리 동생과 소를 타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서 살자.
우시군 노 우에와 구무데스= 소 위에 있는 건 구름 임 = 선물 없이 희망만 보냄) 이중섭의 꿈, 소를 탄 가족은
다시 모이지 못하고 그림으로만 남았습니다. 그림 속 가족은 웃고 있지만 슬픕니다.
시란 무엇인가?
시에는 남들이 가지않았던 길에서 알바를 하는, 외로움의 품격이 있습니다.
아래 두그림은 19세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 클로드 모네 작품입니다. (산책, 모델은 부인
카미유와 아들) 인상파라는 게 그림의 인상이 X 같다고 해서 붙여준 야유 같은 그룹 별칭입니다.
위대한 100년 19세기에, 작가들은 정물화나 사실적 인물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점 빼고 주름 지우고
귀족들 애인 초상화나 그려주는 " 이발소 그림의 작가님들" 속에서 고정된 인식을 버리고 순간에
아름답게 나타나는 빛을 쫓는, 새로운 시도를 했던 그룹입니다.
아내이자 모델이었던 카미유 동시외가 애를 낳다가 32살 나이로 죽었습니다. (1875)
모네는 그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전당포에 맡겨놓은 아내의 목걸이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죽은 아내를 위한 선물입니다. 그의 가난과 지독한 슬픔이 작품이 됐습니다.
(아래그림, 카미유의 죽음) 흰색, 회색, 그리고 보라색이 감도는 푸른빛, 세 가지의 색을 가지고
난도질하는 듯한 선으로 시시각각 빛을 바꾸는 아내의 죽음을 그렸습니다. 모네에 의해 가난과
죽음과 제도적 폭력, 이런 슬픔들이 모여 작품이 되었습니다. 한 때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감성인식에서 그들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심장과 진리에 더 가까웠습니다.
1987년 꽃이 진 자리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정호승 시「 슬픔이 기쁨에게 」 앞부분입니다. 정호승은 79년에 동일한 이름으로
그의 첫 시집을 냈습니다. 이 "슬픔이 기쁨에게" 란 제목은 그에게서 시론에 준합니다.
그에게서 시란, 사회적 가난과 제도적 폭력이 델고온 슬픔으로 기쁨을 견인하는
아름다운 바꿔치기 작업입니다.
정호승이 죽어가는 엄마한테 , 뭐 기억나는 시하나 외워보라고 묻습니다.
시인이 어릴 때, 사업에 망한 아빠때문에 일수쟁이한테 시달리고 나면 ,
엄마는 가계부 뒤에 시를 쓰곤 했답니다, 그 기억으로 한 질문입니다.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시란 슬플 때 쓰는 거란다"
정호승에게 슬픔은 가난이었다가, 시대였다가, 자아였다가. 슬픔이 기쁨을
견인하며 그의 시가 됩니다.
「부치지 않은 편지 2」-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부치지 않은 편지」- 정호승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부치지 않은 편지2 에서 정호승은,
쉬운 시어와 잔잔한 어조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합니다. 그러다가 “덜컹”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글이 등장합니다. 이게 먼 소릴까?
눈물의 작은 새가 산을 입에 물고 날다니?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눈물의 작은 새 = 박종철입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합니다.
곧 치안본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박종철이 억하고 죽었습니다.”
"고문이라뇨,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팹니까? (내무부장관, 정호용)"
고문과 어린 학생의 죽음보다도, 우리를 더 분노하게 하는 건 국가기관이 발표한
너무도 허술한 죽음의 시나리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며칠간, 사체를 탈취해 화장으로
고문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측과 시체를 부검해 폭력의 실체를 입증하려는 측의 줄다리기가
시작됐습니다.
박종철이 죽고 4일 후인 1월 18일 날에,
서정주의 전두환 대통령 56회 생일 축시가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생방송됩니다.
제목이 ‘처음으로’인 이 시에는 ‘전두환 56회 생일 축시, 1987년 1월, 미당 서정주가 바침’
이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폭력 앞에 납작 엎드린 사람들은 분노를 넘어 절망합니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 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도 그를 묻어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박종철의 시체는 뺏기듯이 화장되어
강가에 뿌려졌습니다. 모란공원묘지에는 시신 없는 박종철의 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후 박종철이 물고 간 거대한 산은, 우리나라를 6월 항쟁의 한 복판으로 끌고 갑니다.
1987년 6월 우리나라는, 19세기 프랑스혁명의 숙제인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합니다.
두 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1987년 정호승의 시집 「새벽편지」에 수록돼 발표됩니다.
그리고 ‘96년에 김광석은 백창우가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란 노래를 녹음하고
다음 날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노래는 뒷날 유고집 「가객」이란 앨범에 수록돼 세상에
나와 한 시절을 풍미하는 노래가 됩니다. 이 노래는 노무현 장례식 날 광화문에서 ,
“그대 잘 가라”는 장송곡으로 한 시대를 마감합니다.
「전두환 56회 생일 축시 」- 서정주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중략 )
쉬임 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행진곡 行進曲 」- 서정주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醉해 가지고
우리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멀리서 서 있는 바닷물에선
亂打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이분들의 잔치는 끝날 듯하면서 잘 안 끝납니다.
오래오래 사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이 멋진 행진곡이란 시는, 1940년 일제의 조선일보 폐간
(당시 민족적 성향의 신문)을 기념해 발표되어 민족의 울분을 달래줬습니다. 토속적인 언어로
한글을 최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는 문학 대통령, 서정주여! 서정주여!
난타하여 떨어지는 한숨소리가 들리시는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중략)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라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최영미
(중략)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 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 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혹시 젊은 날 그녀의 독특한 경력이,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이 여성은 명문 S대의 지악스런 이념서클인 「 고전연구회」 출신입니다.
1991년 강화도 석모도 앞바다에서 최영미의 서클 2년 후배인 김영환과
조유식 (현, 알라딘 서점 사장)이 북한의 잠수정을 타고 월북해 김일성을 만났습니다.
김일성은 그들에게 권총 2자루와 미화 40만 달러를 주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당부하며 잠수정으로 제주도에 내려 줍니다. (김영환 회고)
김영환은 남한의 사회운동에 주사파의 대부로 활동하며, 찌라시 강철 서신으로
전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내에 구축한 김일성 프랜들리 조직을 지배합니다.
1998년 여수 앞바다에서 전설적인 남파 간첩 진운방의 잠수정이 육·해·공군
합동 작전으로 격침되며, 김영환의 실체가 확인돼 민혁당사건으로 발표됩니다.
김영환. 조유식 등은 조직의 모든 정보를 안기부에 제공하고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수사에 적극 협조한 점을 인정, 공소보류 결정) 이후 이들은 시대정신을 창간하고,
뉴라이트 운동에 매진하게 됩니다.
S대 (고전연구회의) 다른 그룹들은 사회 운동 내에 급진 조직인 CA그룹(제헌의회파)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에서 개혁이 아닌 무장봉기를 주장하며 당시 사회운동을 양분하는
급진적인 활동을 주도합니다. 최영미 님은 CA그룹에서 활동하며 막스의 자본론 등
원전을 번역하는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며,
사회운동 내에 갑자기 나타났던 고전 연구회 류의 급진주의자들은, 갑자기 전향을
감행합니다. 90년대 문학의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이데올로기의 해체입니다.
김영환식 방식은 전향하며 모든 조직의 정보를 제공하고 폭파하는 방법
최영미식 방법은 1994년 그가 발표한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입니다.
이 시집은 50만 부가 팔리며 폭발합니다.
1994년 최영미의 시집 이후, 1995년 김영환의 전향이 언론에 보도됩니다.
사회운동 내부에서 최영미의 시집은, 내무반에 수류탄 까 넣은 것처럼 작열합니다.
이후 연쇄반응, 내무반에 가스통 터트리고 소화기 분사 , 감당안되는 여성였습니다.
최영미의 시속에 사랑이란 거는, 그 남자였다가, 민중이었다가, 역사였다가
마지막엔 그러나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귀하께서 읽으시고 형편 되는대로 이해하시라는, 은유적 복선이라도 깔아 논 것일까요?
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첫 연은 요래 시작합니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사랑의 온도를 느껴보십시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1994년에 출판된 최영미의 시집은, 한 해 동안에 50만 부가 팔리는 일대 폭발을 가져옵니다.
이 현상은 책장사를 위해 선정적인 소재를 올렸다거나, 진영논리의 시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내로남불의 패밀리즘 해체, 이데올로기의 청산과 실존적 시어들의
사회화, 그래서 그러므로 서른에 끝났다는 잔치를, 최영미 님께서 환갑 넘어까지 계속하셨습니다.
「배롱나무 」- 김기섭
발톱이 빠져버린 사랑이 있었네
한여름이 다 가도록
별들은 노래 부르지 않았고
강물은 흐르길 거부했네
배롱나무 아래 애인 있었네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비가 내려
생을 접기라도 하듯
꽃잎 떨어져
빗소리에 스며든 여자 있었네
밤이 오고
내가 울고 있었네
머뭇거릴 틈도 없이 별똥별이 떨어졌네
서툴게
아주아주 서툴게
「배추흰나비의 추억」- 김기섭
(중략)
풍경風景은 비로소 옷을 벗고 고요에 잠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끝에 걸린 달이, 풍경風磬이 흔들린다.
종소리 깊고 아득한 심연을 열어
몇 겁 세월 동안 해와 별 그림자가 자운봉을 스쳐 간 뒤
전생으로 이어진 협궤 열차가 긴 궤적을 그리며 지나갈 동안
말라르메가 시를 낭송하고 샤갈은 그림을 그린다.
졸음에 겹던 사내가 붓을 놓고 한눈파는 사이
지난봄 욱신거리며 우화羽化를 마친 배추흰나비들이
선인봉과 만장봉에서 몽환적으로 피어난다.
추억한다.
배추흰나비들은 저 세상에 두고 왔던 잎사귀에 고인 물소리와
햇살 깃든 야생화 꽃 이름올
올여름엔 더욱 아플 거 같다고
야윈 날개에 묻은 달빛, 이슬 털어내며
한 동안 미래를 차압당한 자들의 표정을 읽고 다니다가
차마 지울 수 없는 연민의 모퉁이에서 눈물 몇 방울 훔치고는
조금은 아름답고도 슬픈 지상의 음계를 날아
도봉산으로 접어들어
그리움이 각질처럼 벗겨진 자운봉 자락에 앉아
온몸 가득 붉은 노을 문지르며 소멸을 관조하는 동안
꽃은 아무 데서나 피고 저물었다.
2021년에 김기섭 님이(달빛 등반)이란 시집을 냈습니다. 동시대에 짱돌을 던졌던
최영미 님과 김기섭 님의 시어 속에서 사랑이란 단어의 온도 차이를 느껴봅니다.
우리가 몇 년 전에 모 대장님과 함께 찾아뵀던 그분이십니다.
「김기섭 블로그 인용 」
** 김기섭 님은 장애로 자판에서 쌍받침 입력을 못하십니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모임에서의 즐거운 추억은 고이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4050서울산악회 회원님들이 정성을 모아 준 후원금에 대해
어ㅈ지 그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ㄷ도 손곡 이달 시집을 전해 준 아 ㄱ가님ㄱ게 거듭 감사의 말을 건낸다.”
1989년에 설악산 화채능선의 끝 권금성과 토왕폭포가 나뉘는 곳,
솜다리가 지천으로 깔린 암릉구간에 그에 의해서(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란
바윗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나이 27세 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동엽길’(93년), ‘녹두장군길’(94년), ‘김개남 장군길’(94년)을 개척했고
설악산 토왕골 '경원대 리지 (96년)‘노적봉 경원대길'=> 별이 있던 그 자리 길로 개명
(96년, 20년)와 별을 따는 소년들(97년). 도봉산 자운봉에‘배추흰나비의 추억‘(98년)과,
만경대 별길(99년) 몽유도원도길(01년) 체게바라길 (03년),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05년) 셀 수 없는 바윗길들이 그의 손으로 개척되어
하늘로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길들에 그는 주옥같은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치 설악산과 도봉산에 시화전이 펼쳐진 듯 낭자합니다. 바윗꾼들에게 그가 붙인
이름의 길을 밟지 않고는 자일을 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한여름이 다 가도록
별들은 노래 부르지 않았고
강물은 흐르길 거부했네
배롱나무 아래 애인 있었네”
흐르다 너무도 갑자기 멈춘 세월 속에서, 그이에게 사랑과 혁명과 바위는 동의어입니다.
82학번으로 문학을 전공하고 최영미처럼 짱돌을 던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에겐
바윗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설레이고 짜릿하며 중독성이 강한 이길, 희고 까칠한 화강암의 암벽을 만지듯이
그의 사랑은 치열하고 외롭습니다. 이 길들에서 실수로 바닥을 치는 사고를 내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강물도 흐르다 멈추는 사랑의 기억, 배롱나무 아래의 그의
애인에 대한 단서를 뒤져봅니다.
"전화가 왔다.
아주 오래된 내 기억의 청동거울 속,
푸르른 때를 벗기며 들려오는 한 여자의 또박또박한 목소리….
약속을 정했다.
벌써 10여 년이 지난 세월.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짱돌과 화염병의 불꽃,
지랄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였다.
짧았지만 아주 긴 기다림의 시간….
예나 지금이나 유난히 큰 눈망울.
여자는 잔잔히 웃고 있었지만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가 내 마음속을 다녀갔다.
아무 일도 못 한 채 며칠을 보낸 나는 북한산 인수봉을 오른 뒤
암릉 취재를 위해 늘 그리운 설악산으로 떠났다.
3일 동안 눈물처럼 비가 내렸고,
비를 핑계로 독한 소주만 마셨다."
「김기섭, 월간 마운틴 기사문 인용 」
페퍼포그 난무하는 길에서 김기섭은 짱돌을 던지고 그녀는 보도블록을 깨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시에서 그녀는 김기섭과 한방에서 같이 누워있고
그들은 헤어져 10년 만에 시린 과거를 간직한 채 잠시 만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가 출몰하고,
그녀만 생각하면 숨이 막혀 별들도 노래를 멈추고 강물도 흐르지 못한다.
추억한다.
배추흰나비들은 저 세상에 두고 왔던 잎사귀에 고인 물소리와
햇살 깃든 야생화 꽃 이름올
올여름엔 더욱 아플 거 같다고
야윈 날개에 묻은 달빛, 이슬 털어내며
한 동안 미래를 차압당한 자들의 표정을 읽고 다니다가
차마 지울 수 없는 연민의 모퉁이에서 눈물 몇 방울 훔치고는
조금은 아름답고도 슬픈 지상의 음계를 날아
도봉산으로 접어들어
김기섭의 시, 배추흰나비의 추억은
2015년 그가 월간 마운틴에 기고한 시로 도봉산 릿지길 (배추흰나비의 추억)에 부친
헌정 시의 성격을 띱니다. 98년 이 길을 개척하고 17년 만에 쓴 헌정 시입니다.
그 사이에, 2006년 11월 김기섭은 인수 B길을 선등 중 둘째 마디 항아리 크랙을
뜯다가 20m 아래로 바닥을 치며 추락합니다, 두 번째 마디 바로 아래 레이백 구간.
이 사고로 이 매력적인 산악인은 휠체어에 영구 영치되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김기섭의 꿈은 사고로 멈춥니다.
날개가 꺾인 산과 혁명과 사랑은 깊고 깊은 자아로 침몰합니다.
나의 시간 속에도 꽃이 진 자리가 있어,
청춘이 지나가고 난 그 자리엔 상처가 맺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욱신욱신 쑤시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몸이 망가져 떠날 수 없을 때,
사회적인 계층과 문화적 집단성에서 제외되었을 때,
나이 들어 세월이 점차 열정을 앗아갈 때,
비가 많이도 오는 날이면,
날개를 다친 나비처럼 90년대의 허허로운 시를 읽으며 마음의 공간을 배회합니다.
첫댓글 니체보다 더 난해한 아까형님
한 사람 정신세계도 모르겠는데
저리도 많은 사람을 만인보처럼
올려두면 우짜자는 것입니까 ㅎ
맨위 이중섭 가족만 보고
땡 칩니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옆에 네가족이
살았던 초가집 1.5평 셋방을 가 봤습니다.
이런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을까.
화지를 구할수 없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걸 감안하면 그나마 저 그림은
칼라물감으로 그려 굶지는 않은 시절이네요.
오랜만에 출현하셨어요
지리한 장마에 건강 주의하시고요
글은 시간 날 때 읽어보시고
형편 되는 대로 이해하셔요
http://aladin.kr/p/A4fh8
이중섭의 소는 유명하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또한 잘 알려졌으나......
읽다보니 선배님 혹시가 역시로 글쓰기로 밥을 구한 세월이 있었든게지요?
모네와 까미유 이야기도 흥미로웠으나 정호승시인 이야기는 가슴이 아팠어요.
사회, 정치, 경제에 도대체 둔한 제가 그나마 시를 통해 알게된 정호승님의 부치지 않은 편지가 그의 이야기인줄 몰랐네요.먼저 떠난 누군가의 희생으로 제가 편히 시를 읽게된 사실을 자주 잊어요.
최영미 시인
그녀의 선운사
봄마다 읽는 시.
저도 서른잔치는 끝났다를 가지고 있는 1인 이지요.
후에 그녀의 미투에 충격을 받고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요.
김기섭 그가 시인 인건 오늘 알았네요.
저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바위길을 개척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네요.
별을 따는 소년,
배추흰나비길,
경원대길,.
신동엽길
참 좋아하든 그 길!!
이제 그가 오르지 못하듯 저도 줄을 놓은지 3년이 되어가네요.
몽유도원도 그곳은 가보지 않았지만 그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요.
아까선배님의 글을 읽으며 알아지는 사실들에
눈물이 나네요.
참 아름다운 바위길들이 그의 손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저는 시를 읽거나 습관적으로 책을 보지 못해서
울적할 때마다 시를 뒤적거리는 편인데요
특히 김기섭님의 시가 좋드라고요.
특별히 꾸미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그사람의 삶 자체가 시가되는 거 같아요
다른 팀에서,
김기섭님이 개척한 루트만을 찾아가는 이벤트를 하드라고요
우리도 그런 거 하면 저도 줄 놓은지 오래됐지만
따라나서고 싶어요
http://aladin.kr/p/A4fh8
@아까 2010년에 개척 보고된
"봄날은간다"코스는
기섭 선배의 강력한 요청으로
민생고에 시달리는 후배들이
교대교대로 참가하여 개척한 코스였는데 영월군청에서 "선돌"지역 일대를 보존지역으로 설정해서
지금은 등반을 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꼬까게 2010년에 연 봄날은 간다와 도화춘몽
둘다 등반이 금지됐을까요
@아까 도화춘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시를 좋아하지만
시를 대하는 태도는 선배님과 사뭇 달라요.
호구 조사는 물론 분석도 하지 않아요.
글자 그대로 읽다가 철렁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 자체로 감동인게지요.
이제부터는 방향을 달리해서 읽을 필요성이 있는거 같네요.
혹시 시간과 기회가 되시면
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이렇게 속시원히 올려 주시겠어요?
제 수준으로는
답답하고 답답해서리.....
ㅎㅎㅎ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한번에 읽었다는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 100%랍니다.
워낙 등장 인물들이 상징성과 페러디가 심한 글이라 읽는다기보담
시처럼 감상한다고 해야될까요.
다 읽었다 안읽었다는 큰 의미가 읎을 거 같아요
제가 읽을땐 등장인물 상징테이블이란게 돌아다녔어요.
낙타는 어떤 상징이고 사자와 어린이는 어떤 상징이다
이 표를 정리해 놓구 읽으시면 좀 이해하기 쉬울까요?
마지막 섹스의 추억까지 읽었어요
너무 길어 일단 여기까지 보고요
어디서 들은 이야기 인데요
조루는 용서가 되는데 지루는 용서가 안된다는 섹스에 대한 어떤 이아기죠
잠깐 쉬었다가 또 들어 올께요 ㅎ
ㅎㅎㅎ
기경님 장마에 무사하시쥬?
제 글이 좀 길지만 지루(하지)는 아니자너요?
나름 글의 체위도 좋구 구석구석 찔러주는 소재도 다양하고
시간 날때 한 번 읽어보시구요
늘 건강하셔유
방금 다시 들어와서 마저 후 페팅을 끝마쳤습니다
사랑의 다양성이라는 단어 위에 여러 경우 모양 각도의 사랑의 다양성을 놓고
왕초보 초보 초중급과 상급의 난이도가
다른 영육간의 사랑의 행위를 맛본것 같습니다
언젠가 함께 짧은 시간을 보냈던 글들의
모습들도 보이고요
본 듯 만 듯 스친 듯 스킨쉽을 했지만
깊은 관계가 아니었던 듯한 이름들도
보입니다
수많은 시간의 과정속에 어떤 모양으로 접했던 여러분들 또는 전혀 다른 스와핑 그룹
처럼 느껴지는 시와 수필 소설들을
생각하며 나의 스타일은 어떤 산행 스타일일까 생각좀 해보는 아침입니다
아까님은 기자쪽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닐까 하고
글을 읽으면 느껴집니다
우리 같은 스타일들이 읽으면 시원~스럽답니다
유익한 아침 트래킹 출근길이었습니다
혹시 여유가 되시면
요책 한번 읽어보셔요
http://aladin.kr/p/A4fh8
우우~ 미안합니다.
어제 야등가는 전철에서 잠깐 읽다가
장난성 댓글을 달았습니다.
지금보니 중섭 모네같은 불우한 삶을 사신
아까님 지인이신 배추흰나비의 이야기네요.
허균과 난설헌을 가르쳤던
이달선생이 몽환할 적에도
꽃은 아무 데서나 피고 저물었네요.
아까님은 간단한 책 소개를
복잡하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ㅎ
만득이가 시집을 구입하게 될줄이야.ㅋ
참 잘하셨어요
손곡이달의 뒤를 잇는 서정시인이란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이루지못한 사랑노래가 백미입니다
바위를 하며 김기섭님께서 만든 길을 다니면서도 그분이 낸 줄을 몰랐다가 술루대장님이 주선한 모임 때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그뒤 한국여성산악회에서 주관한 모임 때 한번 더 뵌 적이 있고요.그러나 김기섭님의 시집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네요
네, 같이 한번 뵈었었나요?
시집에서 바윗길에 헌정한 시들이 참 멋있습니다.
등산 문화가 아쉬운 실정에서 참 귀한 분이십니다.
@아까 님을 이날 뵈었지요
@둡시다 아~ 이 사진이 있으시군요.
기억 납니다
질문~~
김기섭님의 시집을 보니2021년10월5일 이 태어난 날 이던데
그분의 근황은 어떤지?
시는 사고전과 후에 쓴것이 섞인듯 한던데 맞는건지?
2021년 10월 5일은 책이 출판된 날이네요.
김기섭님은 62년생 저랑 동갑
2006년에 사고니까 많은 시가 그 후에 쓴 거 같아요
바윗길 이름의 시도 이후에 많이 썼드라고요
사진이, 그분이 21년에 누구랑 영월가서 영월 여관에서
찍은 사진이라는데 배롱나무라는 시를 뒤에 썼드라구요 ,
영월가서 내가눈물처럼사랑했던 그녀길하고
도화춘몽길 좀 보구싶네요 ,
@아까 개심사 배롱나무가 최고 인줄 알았는데
사진속 배롱나무는 그려 놓은듯 멋지네요.
물속에 비친 그림자까지 아름다움을 더해 주네요.
@아까 김기섭 선배님의 시는 재학시절부터
계속해서 써왔습니다
술좌석, 산행, 야영중에도
가리지 않고
시상이 떠오를때마다...
그 중에 나한테 보관되어 있던
원본들도 몇개가 있었다는...
물론 시집을 내셔야겠다고 해서
전달해 드렸구요
시집에 실린것 이외에도
습작처럼 썼던
많은 시들이 있었지요~
인수에서의 사고 이후에
지독한 고통을 동반하는
재활치료를 하면서
한편 한편 다듬고 가다듬어서
시집을 출간하게 된거랍니다
홍천강에 개척된"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길도 맨처음에는
루트이름이 "사랑은 립스틱처럼"으로
했다가 바꾼거구요~
기회가 된다면 술루대장님,
아까님과 함께 쐬주 일잔하면서
지면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싶네요...ㅎㅎ
참고로
저는 기섭선배님의
경원대OB 직속 후배입니다~
@꼬까게 이렇게 또 한세상의 역사를 알게 되었군요.
사진속 두분 밝아보여 좋으네요.
체게바라 개척이야기와 연결되며 추측한바가 맞았음을 확인했네요.
@꼬까게 아 ~ 시인의 후배시군요
언뜻 체게바라길 얘기에 저도 눈치를챘어요.
시인이 말씀하시는 체게바라길 개척 때 계숙이라는 분도 선배신거지요?
@아까 계숙이라는분은 이화여대학생이었고
나하고는 같은 학번인거로 기억을합니다~
@꼬까게 아, 두분다 후배시군요. 반갑습니다.
독서일기방을 좋아하는 제가
안들어온지 한참이 되었네요.
제목만 보며 내려가다가
아까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번 제주 여행 중에
이중섭미술관에 들러
올리신 '길 떠나는 가족' 액자를
구입했어요.
그가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저리고 울컥한
마음에 구입했어요.
싸돌아 다니느라 책을 들고만
있지 읽지를 못하는 중에
만난 글 한편이 저를 멈칫하게 하는군요.
그린다님 반갑습니다.
제주도 여행중 서귀포 미술관엘 들르셨네요.
저도 낚시나 트래킹으로
서귀포가면 꼭 들러봅니다.
전엔 독서방에 그린다님
그림얘기가 올라와서 즐겁게
읽어 봤었는데, 시간되심
또 올려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