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章 해남도로 향하는 배.
1
석양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점소이가 구릉을 내려가자, 바위 뒤에서 '끄릉'하는 소리와
함께 잿빛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는 곧바로 표현사에
게 달려가 냄새를 맡아본 후, 다시 돌아왔다.
끄르릉……!
먹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섭섭하다는 듯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불만으로 가득했다.
"으르렁거리지 마라. 사람이 죽었어."
바위 뒤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리며 나그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이 참 많은 사내였다. 코 밑 부분은 검은 색 일색이었
다. 붉은 입술만 제외하면. 눈빛도 맑았다. 티 한 점 묻지 않
은 듯 맑고 투명한 눈빛은 매혹적이었다. 심성(心性)은 어떤
지 모르지만 외양만은 사내로써 빠지지 않는 용모였다.
"후후! 석두(石杜) 형(兄)…… 더욱 날카로워졌군요. 검을
몸 안에 갈무리하는 경지…… 무음검법(無音劍法)의 오의(奧
義)를 정확히 깨달은 것 같습니다. 마수광의를 삼초(三招)만
에 죽이시다니."
적엽명이었다.
그는 물에 불린 육포(肉脯)를 늑대에게 던져 주며 중얼거렸
다. 허나 눈길은 석두라 불린 점소이가 내려간 구릉 쪽에서
떼지 않았다.
바다가 붉은 해를 삼켜버리자 먹물 같은 어둠이 슬금슬금
밀려들었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별 한 점 떠있지 않은 하늘
은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름답게 느껴져야 할 풍경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
다.
표현사의 시신(屍身)에서 풍기는 피비린내 때문이다. 후텁
지근한 열기에 섞인 피비린내는 진하게 후각을 자극했고, 수
를 헤아릴 수 없는 쇠파리 떼가 달라붙어 극성을 부리는 모습
에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영혼(靈魂)이 빠져나간 육신은 그저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
이다. 평생토록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살았으니 죽어서
는 자연에 보답해야 한다.
여족(黎族)의 생사관(生死觀)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 형제가 죽어도 매장을 하지 않는다. 시
신을 넓은 잎으로 둘둘 말아서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 속에 눕혀놓고 풀잎으로 덮어줄 뿐이다.
곡성(哭聲)도 흘리지 않는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갔으니까.
여족은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
늑대가 육포 한 조각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을
때였다.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니까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데?"
"흠……! 피냄새군. 사람 목숨도 별 것 아니라니까."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무스름한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끄릉! 끄르릉……!
늑대는 낯선 침입자를 잔뜩 경계했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
할 뿐, 슬금슬금 물러서더니 적엽명의 등뒤로 숨어버렸다.
"억!"
정작 놀란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갑
자기 들려오는 맹수소리에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손에 든 작대기를 치켜올린 자도 있었다.
대여섯 명에 이르는 새로운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슴까지 올
라오는 작대기를 들고 있었다.
"뭐, 뭐야?"
"개 짖는 소리야?"
"멍청이. 네 귀에는 개 짖는 소리로 들렸니?"
그들은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티격태격 다퉜다.
끄릉……!
늑대가 다시 으름장을 놓았다.
한결 날카로움이 가신, 반쯤은 기가 죽은 으름장.
"늑대야, 이리야?"
"그냥 사나운 개 같은데?"
그들은 호기심이 치밀었는지, 아니면 서로를 의지했는지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적엽명은 그 때서야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중에 찬(燦)이라고 있소?"
해안소 주민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길손들이었다.
중원 대륙과 해남도(海南島)를 오가는 길손들은 제법 많은
은자(銀子)를 흘리고 지나간다. 포구라고 해봐야 겨우 사십여
호 남짓한 작은 마을에 객사(客舍)와 주점(酒店), 청루(靑樓)
가 유난히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매화, 가래, 계수나무 같은 진귀한 나무들도 많은 이문을
챙겨준다. 생강, 단사, 대모도 많고 상아나 진주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민들 대부분은 다점(茶店)이나 허름한 객
사를 운영할 뿐, 노역(勞役)을 제공해야 하는 힘든 일은 그야
말로 할 일없는 늙은이들의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곤란한 것은 쌀이다.
해안소에는 논이 없다. 그래서 주민들은 삼십 리 떨어진 서
문성에서 쌀을 사다 먹는다. 그런 사소한 몇 가지를 제외하면
생활이 오히려 다른 지방보다 편한 편이다.
찬은 서문성에서 쌀을 사와 해안소 주민들에게 팔았다.
예로부터 의식주(衣食住)에 관계되는 장사는 늘 이문(利文)
이 많이 남고, 찬은 말년을 편히 보낼 만큼 많은 돈을 벌었지
만 워낙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인지라 아직까지 손을 놓지 못
했다.
"쌀장사에 맛들린 모양이군요."
"헤헤헤! 돌아오실 줄 알았습죠."
찬은 늑대를 끌어당겨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이 놈! 많이 컸구나. 오랜만에 만났으면 인사부터 해야
지?"
끄릉……!
늑대는 고분고분했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혀를 길게 내밀고 헥헥 거친 숨을
토해내는 모양이 무척 기분 좋은 모양이다.
찬은 늑대의 목덜미와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일반적으로 파문(破門)당한 자가 갈 길은 딱 세 갭죠. 시
중에서 주먹이나 휘두르다가 형장(刑場)의 이슬이 되는 것하
고, 사파(邪派)에 들어가 이름께나 날리다가 저 자처럼 황량
한 들판에서 죽는 것하고……"
찬은 마수광의를 가리켰다.
세상이 고요하니 시신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재미있군요.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자객(刺客)이 되는 겁죠. 종말은 똑 같지만 그래도 남의
목숨은 실컷 빼앗아 봤으니 난도질당해 죽는다 해도 여한은
없습죠. 헤헤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검이란 요물
은 일단 들었다하면 엿가락처럼 찰싹 달라붙어 여간해서는 떨
어지지 않는 법입죠."
"……"
적엽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깊고 서늘한 눈으로 검게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빙긋
웃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쌀장사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랑(二
郞) 이름자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사파고수가 된 것은 아니고,
이렇게 버젓이 살아 계시니 형장의 이슬이 된 것도 아니
고…… 헤헤!"
"그래서 자객이 되어 돌아왔다, 이 말이군요."
"헤헤."
"미안해서 어쩝니까? 하하!"
"아닌가요? 헤헤! 이 놈의 돌머리는 언제나 쓸데없는 생각
만 한다니까요. 에구!"
찬은 제 머리를 두어 번 쥐어박았다.
적엽명과 찬의 관계는 적엽명이 살아 온 스물 여섯 해 만큼
이나 오래되었다.
적엽명이 출생할 당시 찬은 비가보(蜚家堡)에서 가장 뛰어
난 마의(馬醫)였으며, 적엽명을 강보(襁褓)에 받아준 시녀 소
(素)는 찬의 아내였다.
부부가 모두 여족.
아내를 맞이하고도 아이가 없던 찬과 비가보에서 발 디딜
곳이 없게 되어버린 적엽명은 마음이 맞았다.
둘은 늘 같이 다녔고, 찬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적엽명에게 불어넣었다.
아버지와 사부의 역할을 대신해 준 사람.
그는 아주 어렸을 때 비가보에 팔려왔다.
자식을 은자 몇 푼에 팔아버린 친부모는 그 후 소식을 끊어
버렸고, 찬을 산 고조모(高祖母)도 그 해 운명(殞命)하신 관
계로 찬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버렸다.
찬은 장성한 다음에도 친부모를 찾지 않았다.
넓다면 넓지만 좁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좁은 해남도이니 찾
을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찾았으리라.
찬은 세상에 버림받은 멍울을 말에 쏟아 부었다.
품종(品種), 사육(飼育), 번식(繁殖)…… 목부(牧夫) 역할
뿐 아니라 마의(馬醫) 역할까지 나무랄 데 없었다.
고조모가 찬을 얼마나 샀는지는 모르지만 종복(從僕) 한 명
은 잘 산 셈이 되었다.
비가보주 비사는 찬과 적엽명이 항상 붙어 다니는 것을 보
고 적엽명의 나이 열 네 살 되던 해, 찬을 생일 선물로 주었
다. 그리고 적엽명은 열 다섯 생일 기념으로 면종(免從)시켰
다.
찬은 어찌된 일인지 미련 없이 비가보를 떠났다.
칠성산(七星山)에 터를 닦았고, 미상(米商)으로 조금씩 부
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가보를 떠났지만 십오 년 동안 친자식처럼 돌보던
적엽명을 떠난 것은 아니다. 적엽명이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
닐 때도, 열두 가문의 소가주(小家主)와 비무를 하여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었을 때도, 그로 인해 목숨을 건 탈출을 할
때도 늘 곁에서 지켜주었다. 어떤 때는 그 동안 모았던 돈으
로, 어떤 때는 탁월한 꾀로……
하대(下待)하라는 말만은 한사코 거절했다. 면종이 되었으
니 의붓아버지가, 그것이 마음이 걸리면 숙부라도, 그것도 싫
다면 형이라도 되어 달라는, 정히 불편하다면 말이라도 놓으
라는 부탁마저 거절했다.
'헤헤!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겁죠. 저는 옛날이 좋습니다.
면종 되었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습죠. 옛날 관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소인의 바램입죠.'
결국 적엽명이 말을 올리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 때부터 둘 사이는 서로 존댓말을 하면서 혈연으로 맺어
진 것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많이 늙었군요. 하하! 천하가 알아주는 능구렁이도 세월은
피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적엽명이 찬의 말투를 흉내내며 농을 건넸다.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마흔 하나인데."
그는 호들갑스럽게 손을 휘저었지만…… 마흔 하나? 찬은
마흔 한 살 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새치 하나 없다고 자
랑하던 검은머리는 서리를 얹어놓은 듯 새하얗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
가뜩이나 꼽추인 등은 세월을 얹어서인지 더 굽어보였고,
쉴 새없이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는 점은 여전했지만 맑은
광채 대신 희뿌연 혼탁함이 자리했다.
그는 팔 년 전에도 마흔 한 살이라고 했다. 아니, 철이 들
무렵부터 마흔 하나이라고 했으니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나이
를 먹지 않은 셈이다. 누가 보더라도 환갑은 훨씬 지났을 나
이지만 그는 늘 마흔 한 살이라고 말했다.
칠성산의 황함사귀(黃 蛇鬼:능구렁이 귀신).
여족 제일의 꾀주머니, 찬.
팔 년이란 세월은 모두들 변화시켰다.
찬이 변한 것은 육체만이 아니다. 마음도 늙어 보였다. 검
풍(劍風)이 휘몰아치는 무림에 나서기에는 의욕(意慾)과 기개
(氣槪)가 많이 쇠퇴해 보였다.
모른다. 그의 속내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다. 그 누가 되
었든 간에 찬을 만난 사람은 경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찬의 장점이요, 무서운 점이다.
쉬이이……!
부드러운 바람이 머릿결을 매만지며 지나간다. 그러나 시원
하기는커녕 후텁지근하기만 하다. 비릿한 비냄새는 한결 짙어
지고…… 아무래도 내일 오후부터는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
리라.
"언제 왔는감요?"
"오늘 새벽녘에…… 들어섰죠."
"당연히 섬에는 들어가실 테고……"
"……"
"단순한 고향나들이라면 이대로 돌아가십사…… 권해 드립
죠."
"……"
"암요. 그게 여러 사람, 편하게 하는 것입죠. 더군다나 지
금 비가는……"
찬은 뭔가 뒷말을 이으려고 우물거리다 도로 꿀꺽 삼켜버렸
다.
하지만 적엽명은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라서 찬의 당황하는
표정을 놓쳐버렸다.
"헤헤! 제 좁은 소견으로는 해안소에 들린 것만으로 충분하
다고…… 헤헤! 굳이 잔챙이들과 얼굴을 붉힐 필요가……"
찬은 제일 먼저 자객이냐고 물었다. 적엽명이 발산하는 강
기(剛氣)가 선뜻 말을 붙일 수 없을 만큼 강한 탓이다. 무인
은 수련을 거듭할수록 예기(銳氣)를 안으로 갈무리한다. 온화
하고 평온해 보이는 사람이 진짜 무서운 고수. 반면에 사공
(邪功)을 연마한 무인은 도가 높아질수록 근접할 수 없는 예
기를 뿜어낸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고 했다.
평온하게 생긴 사람은 안정된 무(武)를 추구하고, 예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그에 적합한 길을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
공(正功)과 사공(邪功)이 분류된 것을.
사공을 연마한 사람이 제일 쉽게 손댈 수 있는 직업은 자객
이다.
자객이냐? 사공을 연마했느냐? 똑같은 질문이다.
찬은 두 번째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그가 말하는 잔챙이란 해남오지. 결코 잔챙이일 수 없다.
해남파에서 내세운 제일(第一) 후기지수(後起之秀)가 잔챙이
일 리는 없다. 그리고 그들은 옛날 일을 잊지 않았다.
"볼일이 있어요."
들어간단다.
적엽명이 해남도에 들어간다면 해남오지와 부딪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그럴 경우, 승률은 전무하다. 일 대 일
이라면 혹 모르지만…… 아니, 지금은 그것도 장담할 수 없
다. 해남오지는 이를 악물고 무공 수련에 전념한 반면 적엽명
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
득(得)은 적고 화(禍)는 많은 해남도행.
자신이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으리라.
"헤헤! 건방진 질문 같지만…… 그 볼일이란 것이 혹시 유
소저? 그렇다면 굳이 해남도에 들어갈 필요가 없죠. 헤헤! 다
행히 유소저는 아직 혼전입죠. 소인이 냉큼……"
"만나 봤어요."
적엽명은 길게 이어질 것 같은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벌써? 햐! 젊은 사람들이라 빠르네."
찬은 눈동자를 한 곳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대룩대룩 굴렸
다. 뭔가를 깊게 생각할 때, 아니면 상대의 의중을 탐색할 때
흔히 하는 버릇이다.
찬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유소청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해남도
에 들어갈 이유가 무엇인가? 유소청은 어떻게 만났고,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아마도 이런 고민이리라.
"볼일이 있기는 한데 무슨 볼일인지는 나도 몰라요. 해남도
에 들어가 봐야 확실해지겠죠. 하하! 황함사귀께서 생각하시
는 그런 일은 아닙니다. 누구를 죽인다거나 해남오지와 언쟁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해남파와 무관하다고도 하지 못하
겠고…… 어쩌면 해남파와 검을 맞댈 수도 있겠죠. 우화에 관
계된 일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찬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적엽명은 이렇듯 아리송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칼로 무를 배듯이 단호하고 깨끗했다.
"……"
"……"
이제는 서로 용건을 꺼내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인사치레
는 끝났다. 적엽명도 찬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두 사
람 모두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바람결이 흘리고 간 여운을 즐겼다.
"헤헤! 많이 변하셨습니다. 말수가 없어지고, 고집은 더욱
강해지셨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무공은 더욱 강해진
것 같은데요?"
찬은 입술이 타는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래요?"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꽈앙! 하고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입죠. 너무 날카로워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던
데…… 헤헤!"
찬은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적엽명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후후!"
적엽명은 부인(否認)도 인정(認定)도 하지 않았다.
"저 자도 이랑(二郞) 솜씨입니까?"
찬은 고갯짓으로 마수광의의 시신을 가리켰다. 그는 적엽명
을 부를 때는 늘 이랑이라고 불렀다.
비가의 두 번째 공자(公子).
비가주의 핏줄을 이어받은 두 번째 공자이니 당연히 그렇게
불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비
건이라는 이름보다 적엽명이라는 작호(綽號)가 더 알려진 것
에 대해 늘 못마땅해하곤 했다.
"아니, 석두 솜씨."
"만나셨습니까?"
그는 고리눈을 뜨면서 물었고, 적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하군요. 부딪치면 둘 중 하나는 죽으리라 생각했는데."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예-에? 헤헤헤! 석두가 눈앞에서 먹이를 놓쳤네. 나중에
알면 땅을 치고 통곡하겠는데? 하기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휴우……! 좌우지간 해남파와 원한을 지고도 버젓이 활개 치는
사람은 세상 천지에 이랑 밖에 없을 겁니다."
"도와 줄 겁니까?"
순간, 찬의 몸이 움찔거렸다.
두 사람 모두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정작 적엽명의
입에서 본론이 꺼내지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도
적엽명이 해남도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남파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철벽(鐵壁)인 것이다.
"하실 일이 무엇이신지? 헤헤! 대충이라도……"
"모릅니다. 믿지 않는군요."
"헤헤! 그럴리가요."
"해남도도 많이 변했겠죠?"
"해남파를 상대하시겠다는 생각이시라면 다시 한 번 생각
을……"
"남산(南山)에서 보던 일출(日出)은 장관이었는데."
"해남파는 요즘 우화 때문에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져 있습
죠. 굵어 부스럼 만드실 생각은……"
"후후! 만천강[萬泉河] 물귀신은 여전합니까?"
"끄응! 한 번만 더 여쭤봅죠. 하실 일이 무엇인지……?"
찬은 정말 궁금했다.
해남도에 들어갈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일이기에 해남오지가 벼르고 있
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남도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나중에는 알게 되리라. 같이 호흡을 맞추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일의 윤곽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남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일은 불거지고,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해남파와 상관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
다. 만류할 시간은 지금 뿐이다. 배를 타게 되면…… 앞으로
나가는 길 이외에는 없다.
"하하! 모른다니까요. 섬에 들어가면 알게 되겠죠. 지금은
무슨 일인지 정말 모릅니다."
찬은 마지막 질문을 던진 순간부터 적엽명을 유심히 살펴보
았다.
말을 하는 중간중간 얼굴색이 어떻게 변하고, 얼굴 근육의
경련은? 눈빛의 흔들림은? 음색의 굴곡은 어떤지……
결국 그가 얻어낸 소득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믿음직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다고 말했다면 심기(心氣)가 깊어진
것이다. 여족 제일의 꾀주머니라는 자신에게 마음을 숨길 정
도로.
정말 모른다 해도 관계없다. 그는 적엽명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자부하는 사람 중 하나다. 적엽명은 난폭하
기는 했지만 약자를 괴롭히는 인간은 아니다. 비가의 핏줄로
인정받지 못한 설움을 검으로 달랬지만 항상 정의감(正義感)
에 입각해서 행동했다.
무슨 일을 벌이든 간에 옳은 일이리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적엽명이 정히 해남도로 들어가야 한다면, 도와 달라고 하
지 않아도 도와주어야 한다. 적엽명에게는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으니까. 의붓…… 자식이니까.
술 생각이 간절했다.
"헤헤! 요 아래 내려가서 술이나 진탕 마십시다요. 지난 이
야기도 듣고…… 섭섭했습니다. 인편(人便) 하나 보내주시지
않으시다니."
찬은 먼저 일어서서 구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마수광의 표현사가 당했습니다."
"또?"
"해남도를 떠나기 전, 이미 죽음을 예감한 듯 합니다."
"으음……!"
죽음처럼 고요해진 군막(軍幕)안으로 밝은 달빛이 비춰들었
다.
달빛은 대황촉(大黃燭)과 어울려 군막 안의 정경을 일목요
연(一目瞭然)하게 드러냈다.
갑옷을 입은 노장군(老將軍)은 수심(愁心)에 잠긴 채 목의
(木椅)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다. 그 앞에는 역시 갑옷을 입
은 장군이 고리눈을 하고 앉아있다.
노장군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적을 읽고 있었는지 탁자
위에는 두툼한 고서(古書) 한 권이 펼쳐져 있다.
"다른…… 전갈은 없었는가?"
노장군의 하얀 수염이 바르르 떨리는 듯 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흔 정도는 되어 보이는 참장(參將)이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으음……!"
노장군은 신음을 터트리면서 이마를 짚었다.
"상황이 급했던 모양이군."
"아닙니다."
"응?"
"상황이 급했던 것이 아니고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마수광의는 고의로 해남파를 건드렸습니다.
강임이란 자를 죽이고 검급을 탈취했죠. 무인들에게 검급이란
생명과 같은 것이니…… 해남파 이목을 한 눈에 끌어당기는
행동. 죽음을 예감했기에 목숨을 버린 겁니다. 아니면 해남파
의 이목을 끌어당기면 그들로부터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지."
"허허허! 그럼 마수광의는 해남파 무인에게 죽었겠군. 무인
이니 무인에게 죽는 것이 더 낫겠지. 무인에게…… 마수광의
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군. 적어도 누구에게 죽는지 알고
죽었으니 말일세."
"강임이란 자를 죽일 만큼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시간이 충
분하면서도 연락할 방법은 찾지 못했고…… 결론은 전과 같습
니다."
"결국 우리의 연락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이대로라면 해남도에 들어가는 일 자체가 무의미
해. 애꿎은 목숨만 잃을 뿐이지."
노장군의 마지막 말은 자조(自嘲)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만! 그만하게. 더 이상의 희생은 바라지 않네."
"장군!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벌써 여러 명의
부장(副長)이 죽었습니다. 문강(文剛), 소기(蘇肌), 장웅(張
雄)…… 그 중에 문강은 제 부장입니다."
"아까운 사람들이지."
"마수광의는 어떻습니까? 그가 비록 사파의 인물이기는 하
나 개심(改心)한 지 오래. 홍암(紅巖) 장군의 손과 발이 되어
사지를 뛰어다녔습니다. 이대로 그만두면……"
"그만 하라 하지 않던가!"
노장군은 괴로운 듯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장군! 홍암 장군을 부르셔서 의사라도 물어보시지요."
참장의 항변(抗辯)은 강력했다. 싸움터에 섰을 때처럼 생사
를 도외시한 투지가 전신 가득히 피어올랐다.
노장군은 참장의 얼굴에 쓰인 불만을 읽었다.
해남도가 대만도(臺灣島) 다음으로 큰 섬이라고는 하지만
대군(大軍)으로 몰아치면 칠주야(七晝夜)만에 초토화 될 일
개 섬에 불과하다. 섬에 상주한 관부(官府), 무가(武家)를 장
악한 다음 사단이 벌어진 이유를 조사하면 모든 일이 깨끗이
해결될 터인데 대장군(大將軍)은 왜 어려운 길을 택하는가?
그 정도 파악하지 못할 노장군이 아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했다.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지주(地主), 독서인(讀書人)
의 협력을 받아 명왕조(明王朝)를 창업하였다.
왕조 초기라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강력한 군주지배체제(君
主支配體制)를 수립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왕조의 기반
이라 할 수 있는 지주, 독서인을 다독거리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
모순된 정사(政事)다.
무엇보다 통수권(統帥權)은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가 가지
고 있지만 파견권(派遣權)은 병부(兵部)가 거머쥐고 있다. 군
을 통솔은 하되 병부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는 뜻. 병
부는 군대를 움직일 권한은 가지되 통솔은 군에 맡기라는 뜻.
모든 권력의 중앙에는 황제가 있다.
상황이 그러니 황제의 기반인 강남(江南) 지주들을 자극할
수가 없다. 남만(南蠻)이 우려된다는 명분(名分)으로 광서(廣
西)까지는 군대를 몰아왔지만 광서를 넘어 광동(廣東)으로 진
군한다면 황명(皇命)을 거역하는 일이 된다.
참장은 혈기에 치우친 나머지 올바른 정세(政勢)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해할 수 있다.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
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오류니까. 또한 대도독부(大都督府
)에서 오군도독부로 개편된 것이 얼마 전이니까.
노장군은 강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참장을 바라보았다.
"자네 말은 십분 이해하네 만…… 홍암 장군은 우군(右軍)
운남도사(雲南都司)에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네. 비록 가족
처럼 사랑했던 마수광의이지만 밀정이 죽었다고 해서 운남도
사를 비울 홍암장군이 아닐세. 그래서도 안 되고."
"인편을 보내겠습니다."
"그래서?"
"……?"
"홍암이 가만있지 못하겠다면 어찌할 텐가?"
"사람을 계속 보내야지요. 해남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감히 일군의 부장들을 계속 죽이고 있는
데……"
노장군은 참장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홍암장군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홍암 장군은 적사(赤獅) 장군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그 때 나이 겨우 열일곱.
하지만 용맹(勇猛)만은 따를 자가 없었다.
싸움이 벌어진 전장에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
았다. 제일 선두에서 쌍검(雙劍)을 휘두르며 질풍처럼 달려가
는 웅휘한 모습을 보면 숨이 콱 막혔다.
사내는 역시 강해야 한다. 강한 사내는 아름답다.
홍암장군은 모든 병기를 능통하게 사용하지만 가장 애착을
가지는 병기는 쌍검인 듯 하다.
특히 홍암 장군의 마상쌍검(馬上雙劍) 십이세(十二勢)는 관
우(關羽) 장군의 화신(化身)이란 칭송을 받고 있다.
광담과오관참육장(光談過五關斬六將).
관우가 조조(曹操)에게서 벗어나면서 위나라 장수 여섯 명
을 무찌른 무용담(武勇談).
거기에 필적하는 무용(武勇)이라지?
그는 신들린 듯 싸웠다. 목숨이 서너 개라도 되는 듯 사지
(死地)가 분명한 싸움터도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임무를 맡을
때도 가장 위험한 부분만 도맡았다. 전투 시에는 선봉(先鋒)
을, 후퇴 시에는 후미(後尾)를, 소강상태일 때는 기습공격을.
- 홍암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지 마라. 십 중 팔,구는 죽는
다.
군병(軍兵)들 사이에 떠도는 말.
그러나 조금이라도 전쟁을 겪어 봤다는 군병들은 오히려 홍
암장군의 휘하에 들기를 자청한다. 홍암 장군은 어느 전투에
서도 지지 않으니까.
베어낸 적장(敵將)의 수급만 여섯 개이니 무훈(武勳)이 혁
혁하다 할 것이다.
홍암 장군은 젊은 나이에 종사품(從四品)의 높은 직책에 올
랐으며, 노장군이 품을 벗어나 운남도사에서 병권(兵權)을 쥐
고 있다.
"참모(參謀)들과 상의를 해보게. 우리의 연락망에 이상이
있다면 그 부분부터 해결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희생만 늘어
날 뿐이야."
노장군의 결심은 단호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