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복귀 8
리 스톡턴과 헨리 크레인이 들어선 곳은 서울시 외곽의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양식당 노블레스였다. 노블레스는 넓은 주차장이 딸려 있는 서양식 이층 건물로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지만 상류층 인사들이 많이 찾았다. 이곳이 유명하지 않은 것은 음식 맛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음식의 가격이 너무 비싸 일반인들은 찾아올 엄두를 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는지 나비 넥타이를 맨 종업원이 헨리의 이름을 듣자 그들을 이층의 룸으로 안내했다. 1층의 홀을 지나던 리가 자신보다 10센티는 키가 작은 헨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만나려는 사람이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사람이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아.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에게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지."
헨리 크레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미국인 치고는 작은 키인 175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40대 중반의 나이와 더불어 두툼해진 배를 가진 이 평범한 남자가 미중앙정보부, CIA 극동지부의 한국책임자였다. 그는 약간 밑으로 내려간 눈매에 숱이 별로 없는 엷은 은발이었고, 노타이의 와이셔츠에 갈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헨리는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점이 전혀 없었지만 극동지역에서 정보를 다루는 자들 중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눈에 띄는 특별함이 없다는 것 자체가 그의 노련함을 알 수 있게 했다.
데이비트 쿠퍼가 리에게 건네주었던 명함에 적혀 있던 이름의 주인이 이 사내, 헨리크레인이었다. 리도 CIA의 영향력을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헨리의 명함을 받았다. 리는 군인이었다. 사람을 찾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한국 땅이고 리가 아는 한국인이라고는 부대 주변의 몇 명과 사귀는 한국 여자 서너명 정도에 불과했다.
쿠퍼가 그에게 헨리를 소개시켜 주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한국 사정에 정통한 사람의 도움을 얻어야하는 형편이었다.
쿠퍼가 잭슨과 매든을 엉망으로 만든 자를 찾아오는 적임자로 리를 선택한 것은 그가 사람을 찾는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었다. 그도 리가 다른 나라 땅에서 사람을 찾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가 선택된 것은 잭슨 등을 힘으로 붙잡았던 자가 무술의 고수로 추측되기 때문이었다. 그자를 찾아낸다 해도 데려올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곳은 한국 땅이었다. 소말리아나 시리아, 이라크와 같은 나라에서처럼 특수부대 소속의 미군 팀이 작전을 수행하듯이 한국인을 납치하기 위해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쿠퍼는 리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리가 맨손 무예에 있어서 어떤 동양 무술가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리가 목표인 한국인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가 소개해준 사람과 함께라면 한국내에서 사람을 찾지 못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 후에 리가 그자를 데려오는데 실패한다면 그 때 다른 수단을 강구할 계획이었다.
리와 헨리를 안내한 웨이터가 룸의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웨이터는 그들을 돌아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돌아갔다. 교육이 잘 되어 있는 웨이터였다.
"어서 오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원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50 대 후반의 풍채 좋은 사내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유창한 영어였다. 사내의 잘 빗어 넘긴 검은머리 밑으로 넓은 이마가 시원스런 느낌을 주었다. 리는 자신들을 맞이하는 사내가 입고 있는 양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푸른빛이 은은히 드러나는 세로 줄무늬의 양복은 그가 알고 있기로 수제품으로 생산되는 대단한 고가의 옷이었다.
룸은 다섯 평 정도였는데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쓴 듯 귀족스러운 느낌이 들면서도 편안한 분위기였다. 헨리는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사내에게 인사를 했다. 사내가 헨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들은 악수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리! 인사드리게. 민국당의 이광희 의원님이시네."
리가 일어나 헨리처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광희도 일어나 리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광희는 야당인 민국당의 5선 의원이었다. 그는 민국당 내에서도 정보통으로 유명했다. 여당을 난감하게 만드는 폭로전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의 정보력은 그의 전력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육사 출신의 군인이었다. 국군기무사령부가 보안사령부라고 불리던 시절 정보업무를 하던 그는 군사정권하에서 소령으로 예편함과 동시에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중앙정보부로 갔다. 그곳에서 10 여년을 일하던 그는 당시 여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금뱃지를 달았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 그의 개인적인 정보력은 오히려 중앙정보부 시절보다 나아졌다. 그와 선을 대려는 자들이 더 늘어났던 것이다. 그와 함께 그의 정보력도 강화된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헨리와 리를 보는 이광희의 눈이 반짝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맵시 있는 제복을 입은 여종업원이 차를 갖다 놓고 갔다.
이광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헨리에게 물었다.
"자네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기는 정말 오랜만인 걸.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 옆에 있는 잘 생긴 분에 대해서도 말이야. 보기에는 군인처럼 느껴지는데....."
"잘 보셨습니다. 이 친구는 용산에서 근무하고 있는 리 스톡턴 대윕니다."
"주한미군 대위가 무슨 일로 자네와 함께 다니나? 작전 중이신가?"
"작전이라고 할 것까지야......."
헨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끝을 흐리자 이광희의 눈빛이 더 강해졌다.
그만큼 호기심이 강해진 것이다. 그와 눈을 마주친 헨리가 입을 열었다.
"의원님, 사흘 전 한얼신문에 실린 미군 관련 기사를 보셨습니까?"
"그 산사람의 사진이 실렸던 엉터리 신문 말인가?"
이광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날의 사진을 되새기는 그의 눈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이상한 녀석이 엉뚱한 짓을 했더구만."
"그 일 때문에 의원님에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일 뿐인데 내가 자네를 도울 일이 있겠는가?"
이광희의 말을 들은 헨리가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상체가 조금 앞으로 숙여진 그의 자세에서 대화에 임하고 있는 진지함이 느껴져 이광희도 따라서 진지해졌다.
헨리가 입을 열었다.
"사건에 대해서야 다들 알고 있는 일이지요. 더 이상 궁금할 것도 없는 단순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사진 속에 나왔던 미군을 붙잡은 사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 사내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 사내를? 뭐하러?"
"그 사내에게 붙잡힌 미군들이 아주 심하게 다쳤습니다. 사고를 낸 자들은 당연히 저희가 처벌을 할 것입니다만 그 사내에게도 책임을 물어야합니다. 다친 미군들의 상태가 심각해서 사정을 아는 미국인들과 국방부 관계자의 감정이 굉장히 안 좋습니다. 의원님."
"어느 정돈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광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느 정도냐고 물은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헨리에게 미군들의 다친 상태에 대한 물음과 그것을 보는 미국인들의 감정이 얼마나 악화되었는가를 물은 것이었다. 그에 대한 헨리의 대답은 상황이 그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흠,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의원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사고를 낸 미군들의 명백한 잘못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그들은 군사법정에서 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법적 처벌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고 기지 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에 대한 정당한 법적 처벌이라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번 일은 민간인에 의한 물리적인 응징이라고 보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그자의 행위는 분명 지나친 것입니다. 그에 대해 그자에게 책임을 물어야한다는 것이 국방부와 이 사건을 아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주한미군은 한국에 계속 주둔할 것이고 저희가 아무리 관리를 잘 한다 해도 수만 명의 병사들 중 사고를 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때마다 한국인들이 그자처럼 반응한다면 주한미군이 한국 내에 있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그자의 행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하는 것이고 그자를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헨리의 말을 들은 이광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눈을 뜬 그의 시선이 리를 향했다.
"그래서 이 분이 자네와 함께 있는 거로군. 그자를 찾을 담당자겠지?"
"그렇습니다."
"알겠네.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주겠네. 그런 미꾸라지 한 마리가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가뜩이나 주변 정세가 안 좋게 돌아가고 있는 마당이네. 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나라는 자력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가 없어. 동맹이 더욱 강화되어도 시원찮을 텐데 그 관계에 금이 갈 우려가 있는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감사합니다. 의원님."
이광희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상대방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던 그는 핸드폰을 끄고 리와 헨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어 몇 자를 적더니 그 종이를 수첩에서 찢어 헨리에게 건네주었다. 헨리가 종이를 받아 살펴보았다.
"이 사람을 찾아가 보게."
"누굽니까?"
"국정원 국내정보파트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네. 자네를 도와주라고 부탁을 했더니 혼쾌히 승락하더군."
"감사합니다. 의원님."
헨리가 리에게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광희가 일어서자 그들은
한국식으로 인사를 하고 룸을 나왔다. 함께 있는 장면이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광희도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룸에 혼자 남은 이광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국산 중형차를 타는 리와 헨리의 모습이 보였다.
'어리석은 놈. 미군을 건드려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너는 기분을 풀었을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단세포 같은 놈이다. 미국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런 사소한 일로 시도 때도 없이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는 너와 같은 놈들 때문에 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이 나라는 국가로서의 형태를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것을 모르는 미친 녀석.'
이광희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그는 미국의 도움으로 이 나라가 유지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미국의 기분을 거스르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조국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우는 일이었다. 그에게 이번 일로 분노한 미국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진 속의 사내를 잡아야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애국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신문에서 본 사내를 가능한 한 빨리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잠겨 내려다보는 창밖으로 헨리와 리를 태운 차량이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