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八 章 아아! 沈沙谷!
이야기는 청목도장으로 옮겨간다.
그날 운학은 왜 청목도장과 만나지 못하였을까?
시간을 거슬러 생각하면 사흘 전 청목도장과 운학이 만나려던 그날은 바로 풍륜이 침사곡에서 크게 소동을 벌이던 넷째 날도 저물고, 다섯째 날이 다가올 때였다.
청목도장은 이날 침사곡의 바위 봉우리 위에 서서 김인달을 만났던 것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청목도장은 복면하지 않은 김인달의 참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보니까, 그의 미간에는 붉은 사마귀 하나가 박혀 있었다. 청목은 그것을 눈에 익혔다.
청목과 그는 캄캄한 밤에 서로 만나 대치하고 있었다.
비록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이지만 청목은 이 신비에 싸였던 괴인의 참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마치 어떤 하나의 화제를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얼마가 지나자 청목(靑木)이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친구, 우린 몇 번 만난 셈이지?』
김인달이 야릇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도장(道長), 세 번인가 하오.』
청목이 말한다.
『아냐, 네 번이야!』
김인달은 깜짝 놀랐다. 그가 왜 네 번이라 하는지 몰랐다.
청목이 말한다.
『아직 한 번 있다는 것을 잊었어, 십 년 전 운가장(鄆家莊)에서……』
김인달은 눈이 뒤집히도록 크게 놀랐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능청을 떨며 말한다.
『허허, 도장. 당신 김모(金某)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슈?』
하자 청목이 언성을 높여 똑똑히 말해 준다.
『너 왜 그런 짓을 했어? 왜 한 집안을 몰살시켰느냐 말이다!』
김인달이 피식 냉소를 흘리며 말한다.
『왜 그랬냐고? 흥 당신이 관계할 바가 아니야!』
청목이 분을 참고 말한다.
『좋아, 운학의 원수를 이 빈도(貧道)가 갚아 주마. 김가야, 반대하지는 않겠지?』
김인달은 속으로 당황했으나 억지로 호기를 부리며 대답했다.
『좋소, 도장의 소원이시라면!』
청목은 한 걸음 가까이 갔다. 김인달은 무슨 말을 걸려고 생각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청목은 이 신비하고도 불가해(不可解)한 괴인을 바라보고 냉랭하게 소리를 지른다.
『무슨 변명을 하든 이제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김인달 자, 덤벼라!』
김인달은 자기의 그 간교로운 총명을 믿고, 십수 년 전에 천하 영웅을 침사곡에 불러 모아 모조리 빠뜨려 죽이고, 그들이 남겨 놓은 얼룩진 반점(斑點)의 흔적을 바탕으로 천하 각파의 정예(精銳)들의 절기(絶技)를 본떠서 일찍이 들어 보지도 못한 기기괴괴한 무공의 수법을 창조해 내었던 것이었다.
비록 그 괴이한 무공의 수법이 천하 각 영웅의 목숨이라는 엄청난 피의 대가가 치루어진 소산이기는 했지만 그 수확은 실로 큰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인달 그는 자기만 천하제일의 실력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제자, 사형령주…… 즉 천전교주에게도 전수해 주었으니 천전교주가 강호를 횡행하며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그 엄청났던 손속도 사실상 김인달의 술법의 연장이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김인달이지만 지금 그의 면전에 거인과 같은 압박감으로 버티고 서 있는 왕년의 천하제일의 고수 청목도장(青木道長)만은, 그의 도무지 비길 데 없도록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도 은근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섣불리 손을 쓸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열 자……
두 사람이 노려보고 선지도 이미 반각(半刻)……
[그리고 두 사람은 암암리에 스스로의 진기를 운집시키고 있었다.
고수와 고수의 싸움은 이미 시선이 마주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서로가 어떤 공력을 쏟아내지 않더라도 눈과 눈이 마주치는 그 아운의 일 찰나부터 온 생명이 좌우되는 숨 막히는 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공력, 즉 직접 손으로 치고 막고 하는 몸과 몸으로서의 싸움이 참이라면 공력 뒤에 숨은 슬기와 계교와 암도(暗道)는 거짓이라 부른다.
그러나 싸움에 있어서는 간혹 참이 거짓으로 보이기도 하고 거짓이 참으로 보이기도 하는 법이니 이 허(虛)와 실(實)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수법을 아낌없이 구사(驅使)하는 사람이 마지막의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하여간에……
두 사람의 눈과 눈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파란 불꽃이 튈 것만 같은 눈빛과 눈빛이.] (작업자 주: [ ] 안의 내용은 원문에 없는 내용을 번역자가 엮어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돌연, 청목도장이 신중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가벼이 한 바람 장풍을 쏟아 보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유(幽幽)한 경풍이 김인달의 가슴 정통을 향해 쓸어 나갔다.
그러자 그 다음 순간, 청목도장 그 자신은 일진의 가벼운 바람인양 허공을 날아 김인달의 등 뒤에 사뿐히 내려서며 한꺼번에 삼 장(三掌)을 쳐낸다.
이 삼 장의 손바람이 뻗쳐 나갈 때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그러나 그것을 맞는 김인달의 감각 속에는 마치 원시림을 개척해 나가는 큰 도끼의 그것인양 엄청난 압박을 느끼었다.
무림 중에서 이만한 장력을 쏟아낼 사람은 거의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랴? 무릇 상반신의 장력이 이렇게 태산처럼 무거우면, 하반신 역시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면에 못 박고 서 있지 않으면 안 되거늘 이 청목도장은 이렇게 세찬 장력을 보내고도 몸을 나비처럼 자유자재로 놀리는 게 아닌가.
이때의 청목도장은 마침내 스스로의 몸에 지니고 있는 내가진력을 송두리째 쏟아내며 무학으로서는 더 이상 높은 경지가 없는 지경의 수법을 발휘한 것이었다.
『휘익!』
『쏴아!』
몇 줄기의 장풍이 노도처럼 김인달에게로 쏟아져 나간다.
김인달은 번번이 교묘하게 피하기는 하지만 속으로 대단히 놀랐다.
천하제일 고수인 청목이 이름값을 하느라고 절세기공을 쓸 줄은 이미 각오한 바이지만 막상 당하여 보니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때문이었다.
김인달 그는 급히 좌우 쌍장을 번갈아 동그라미를 그리듯이 휘두르며 동시에 장풍을 보낸다.
왼손에서는 강력한 손바람이 쏟아져 나가고 오른손은 음유(陰柔)의 힘을 쏟아 내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좌우의 장풍이 엇갈려 나가가 그 세고 여린 두 가지 장풍은 갑자기 강유(剛柔)를 겸한 하나의 힘으로 합쳐서 나가는 게 아닌가.
이것이 바로 그가 고심해서 연구해 낸 괴초(怪招)였다.
청목도장도 이에는 깜짝 놀랐다. 그는 한 번 더 시험해 볼 양으로 또 한 차례 손바람을 후리쳐 보냈다.
과연 김인달은 그 일장을 보기 좋게 막아내며 쌍장을 쏟아내니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힘이 청목의 얼굴을 향해 몰아닥치는 게 아닌가.
이때 청목의 장풍은 비록 벌써 쏟아져 나갔으나 그의 온몸의 근력은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었다.
그는 김인달의 괴초가 약간 세력이 위축되며 허공을 치며 빗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북대전(塞北大戰) 당시 소림사(少林寺)의 천일대사는 독기(毒氣)에 쐬어 공력을 잃게 되자 두 발이 침사곡 모래에 빠진 채 김인달과 싸운 일이 있었다.
김인달은 다행히 천일대사의 일격에 죽지는 않았으나 그 역시 불문 정통파의 기공(奇功)을 맛보았던 것인데 그때 그가 겪은 위력은 실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금 이때, 청목의 이 위력 있는 공격을 받자 새삼스럽게 두 천하제일 고수의 이름이 헛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한 사람 즉 천일대사(天一大師)는 불가(佛家)이고 한 사람은 도가(道家)이지만 두 사람이 지닌 내공력은 과연 정통파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차례, 또 한 차례……
기인(奇人)과 괴인(怪人)은 전신의 전력을 다해 그들이 지닌바 절학을 다해 어지러이 드잡이를 놓는다. 후리고 치고 피하고 막고…… 그 한 차례마다가 생명을 주고받는 극히 위험스러운 초식이요 수법이었다.
두 사람의 공방은 어느덧 십여 수에 이르렀다.
김인달은 땀을 흘리며 그가 평생에 고심하여 연구해 낸 기초(奇招)와 이식(異式)을 종횡무진으로 써서 청목도장과 악투를 벌이고 있다.
삽시간에…… 온 공중에 소위 괴상하고 절묘하다는 초식은 전부 쏟아져 나왔다.
즉, 김인달의 초식 중에는 오대명문(五大名門)의 유명한 초식이 있는가 하면, 팔대장문인(八大掌門人)의 비기(秘技)가 그들의 억울한 죽음과 함께 쏟아져 나가기도 했다.
옛날에 천하 각파를 처음 세운 조사(祖師)들이 지금 살아 있어서 자기들의 초식을 괴상한 각도로 이용해 먹어 완전한 무학을 이룬 이 김인달을 보면 칭찬할지 나무랄지 모르는 일이었다.
드디어, 삼십 초 내에 청목도장은 이 괴이한 초식에 걸려들어 잇달아 다섯 걸음을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김인달은 호기(豪氣)가 크게 떨쳐 일어났다.
그는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연구해 낸 고행(苦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어서 오늘 아마도 마지막 남은 정통파 고수 한 놈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한 것이었다.
그는 왼쪽 눈, 오른쪽 손과 왼 발 오른발을 기묘하게 늘려 청목을 덮쳐, 도무지 숨 쉴 겨를도 주지 않고 단번에 결단을 내려는 듯한 기세였다. 보니 실로 무림이 세워진 지 기백년(幾百年) 동안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기관(奇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이 다른 사람도 아닌 청목도장인 것이다. 삼십 초를 접하고 난 뒤 비로소 한숨 돌릴 말미를 잡았다.
그는 이때 전무후무한 공력을 써서 전진파(全眞派)의 방어초식 대북두칠식(大北斗七式)을 썼다. 그의 기민한 두뇌는 벌써 김인달의 괴상한 초식의 초점(焦點)을 잡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또 김인달의 초식의 허점이 무엇인가도 발견하였다. 청목도장은 그 허점을 노려 단숨에 반격하려 할 때 김인달의 그 기이한 수법에 갑자기 변화가 일더니 오히려 청목의 허점을 찌르는 수법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청목은 또다시 위험한 국면에 몰리고 말았다.
틀림없이 청목도장은 김인달의 독수에 걸려든 것이다.
청목은 여러 번 김인달의 허점을 찔러 승기를 잡으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인달의 철통같은 방어에 튕겨질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위험한 처지에 빠질 뿐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불현듯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만약 매 초식마다 이렇다면 어찌 허점이 도리어 승리로 이끌게 되지 않겠는가? 과연 김인달 이놈은 무서운 놈이구나!)
이러한 청목의 생각도 무학의 기본적인 이치에 심히 어긋나는 바 큰 것이었으니 평생을 정통 무학에만 고심해 온 청목도장은 이제 처음으로 자기 무학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하니 일생을 두고 연구할 나의 무학이 가장 상승(上乘)의 것이 아니란 말인가? 김인달이 정말 신인(神人)과 같은 지혜가 있어 무학에서 크게 꺼려하는 새로운 이론을 창안해 내었단 말인가?
청목의 마음속에는 회의(懷疑)로 가득 찼다.
이러는 중에도 싸움은 어지러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목이 쌍장으로 연신 대북두칠식(大北斗七式)의 초식을 쓰면서 얼핏 고개를 들어 보니까 하늘에는 진짜 북두(北斗)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렇다!』
그는 하나의 영감(靈感)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무학(武學)의 진리를 크게 깨닫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소리친다.
(이 자식이 저 괴이한 수법이 더욱 더 기광을 떨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파탄이 드러나게 되리라. 내 자세히 관찰하여 반격하리!)
이렇게 결심한 청목도장은 옥현귀진(玉玄歸眞)의 진력을 있는 대로 뽑아내었다.
『차앗!』
한 소리 맑은 호통이 이 죽음의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청목은 어느새 무슨 빈틈을 발견했는지 반격에 또 반격을 개시한다.
드디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장의 악투(惡鬪)가 삼백 초에 이르렀다. 청목은 수세에서 다시 공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김인달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청목의 공력이 자기와 동등의 위력이 있으나 그의 수세는 정말 정통 그것이어서 어디로 어떻게 쳐들어가야 좋을지 모르게 되었다.
그는 이 신주일기(神州一奇)의 이름을 뺏기란 그야말로 용의 아가리에서 구슬을 빼앗기보다도 어렵다고 느꼈다.
어느덧 달은 서쪽 하늘에 비스듬히 기울었다. 기나긴 밤도 이미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천하 기수(奇手)의 결투는 끝날 줄은 모른다.
공격에서 또 공격, 방에서 또 방어…… . 언제 결판이 날지 모르는 싸움이었다.
청목도장의 장력은 갈수록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의 진기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왕성해 가기만 한다.
김인달은 싸움이 삼백 초에 이를 때부터 이마에 진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문득 상대방의 얼굴을 보니 청목의 이마 위에선 안개 같은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게 아닌가.
그도 마음속으로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이 서슬에 손과 발을 놀리는 법도(法度)도 질서를 잃은 듯했다.
또 몇 초를 어지러이 주고받는다. 그러나 김인달은 청목도장에게 세 걸음이나 격퇴당하여도 그의 입가엔 오히려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여린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작전을 세웠는지, 일변 싸우면서 일변 물러서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물러가는 속도도 갈수록 빠르다. 일 장을 부딪칠 때마다 못이기는 체하고 수 장이나 물러선다.
연신 뒤로 물러서는 김인달, 연신 앞으로 다가서며 공격을 퍼붓는 청목도장…… .
이리하여 두 사람의 그림자는 추호도 떨어지지 않고 용과 범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점차로, 그들은 울창한 숲과 바위산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소리없이 흐르는 죽음의 황사(黃沙)와 얼음보다도 차가운 달빛…… .
그 푸르디푸른 달빛을 온 몸에 받으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기인과 괴인.
『야앗!』
또다시 청목도장은 일 장을 후리치고 김인달은 몸을 번뜩 피하였다. 이때 그의 두 발은 황사 위에 있었다.
『한 발은 가라앉고 한 발은 떠서, 한 줄기 진기를 전신에 뻗치며 은은히 침사(沈砂)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휘익!』
바람소리를 내며 청목 역시 모래 위에 서서 두 소매를 날렸다. 그리고는 그의 진력은 황사(黃沙)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바로 김인달을 쳐나가는 게 아닌가!
김인달은 심중으로 냉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외친다.
『청목아! 청목아! 네가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
이리하여 그는 또 못이기는 체 하여 반 장(丈)을 물러섰다. 이때 그들은 벌써 침사곡 한복판에 이르렀다.
골짜기 안의 그 외로이 솟은 봉우리도 벌써 바라보인다.
김인달은 나는 듯 몸을 놀려
『얏 얏 야얏!』
잇달아 삼장을 쏟아 내였다. 그리고 난후 또 못 이기는 체 하고 세 번이나 뒤로 물러섰다.
드디어…… .
휙 몸을 날린 그는 펄쩍 그 고봉(孤峯)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흐흐흐…… 이놈 두고 봐라. 내가 네놈을 저쪽 돌기둥까지만 유인해서 그 장치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네놈은 산산가루가 될 것이니…… .)
이리하여 그는 그 고봉 속에 비밀히 장치한 돌기둥 쪽으로 연신 후퇴를 계속한다.
청목 역시 그가 짐짓 뒤로 뒤로 물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인달이 무슨 속셈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전신 공력을 써서 김인달의 고괴(古怪)한 초식으로부터 허점만 찾으려고 가진 애를 쓴다.
그는 끝까지 이 괴초(怪招)가 신묘(神妙)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파탄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은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로…… .
김인달은 돌기둥 위에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돌기둥 아래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동굴이 있고 그 시커먼 동굴 아가리는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무시무시해 보인다.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은 인상을 주는 동굴이었다.
그러나 청목은 이 동굴 아가리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오직 김인달의 손짓과 발짓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김인달 역시 다른 데에는 주의할 겨를도 없이 오직 청목을 돌기둥 중앙으로 유인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청목의 짚신은 돌기둥의 중앙과 겨우 반걸음 가량 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걸음을 떼어 바로 앞으로 걸어 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김인달은 벌써 그가 중앙에 발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즉시에 몸을 날려 물러설 참이었다.
그러면, 그 찰나에 그가 조작해 놓은 기관이 움직여 천만 근(斤)의 거석들이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질 것이며 돌기둥은 그 힘에 눌려 두 쪽으로 빠개지고 말 것이다…… .
김인달은, 이제는 언제 그 기관을 움직일 것인가, 하는 기회만을 엿볼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한 찰나에 청목은 한 소리 긴 호통을 외치며 몸을 솟구쳤으니 그는 이때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외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난 찾았다, 나는 그의 파탄을 찾고 말았다!』
그는 쌍장을 바람처럼 쳐내었다.
쏴아!
소리가 죽음의 골짜기에 울리자 전진파(全眞派)의 선천기공(先天氣功)이 한꺼번에 떨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김인달의 파탄 즉, 허점을 찾았다. 김인달은 정신없이 맞아 치는 것 외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가 기초(奇招)로 승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끝까지 파탄을 보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김인달과 같은 강자(强者) 역시 청목도장에게 자기 술법을 감추지 못하고 파탄을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김인달은 몸을 날려 솟구쳐 올라가면서 돌기둥의 석벽 위를 잡아당겨 청목을 깨끗이 없애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 순간 몰아쳐오는 청목의 장력 때문에 다시 헛되이 내려서고 말았다.
‘차앗!’ 청목은 또 맑은 호통소리와 함께 사납게 덤빈다.
김인달은 그 장세를 피하며 석벽위로 손을 뻗칠 기회를 노린다. 김인달이 청목의 장하(掌下)에 쓰러지느냐, 청목이 김인달의 그 장치에 깔려 피를 토하느냐의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다.
휙! 한 소리의 폭진(暴震)!
펑, 하는 또 한 소리의 음향!
김인달은 세 번을 뛰었다가 헛되이 내려오고 청목은 네 번을 공격해서 실패했다.
『간닷!』
『받아랏!』
소리가 연신 울리고, 두 사람은 뛰고 날고 지르고 막는다.
김인달은 돌기둥 위에 우뚝 서서 청목의 일장을 받아낼 때마다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청목이 천하무적 선천기공으로 끝장까지 내쏘았으나 김인달은 여전 실수 없이 받아낸다.
그러나 일곱 번째에 이르러서는…… .
『펑!』
하는 천지가 진동하는 음향이 일어나자 김인달의 안색과 전신의 살결이 붉은 색에서 백지(白紙)처럼 창백해지더니
(으악…… )
소리를 치며 몸을 비틀거린다. 한 걸음, 두 걸음…… 드디어 세 걸음을 비틀 거리던 그는 무릎을 쓰러진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 돌기둥을 안고, 그의 몸은 공중에 달랑 매어 달렸다. 붉은 선혈이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린다.
청목은 돌기둥 위에 서서 냉랭히 그를 바라본다.
그…… 김인달은 감았던 눈을 힘없이 떴다. 그는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생각한다.
『죽음이란 이렇게도 견디기 어려운 것임을 아아……』
그는 지금가지 그가 죽인 무수한 사람이 생각났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복파보의 노보주…… 아직 살아 있는 그의 제자…… 사실은 그의 친아들이지만…… .
『얘야, 얘야, 너의 출생의 비밀을 너에게 말해 줄 사람이 없게 됐구나.』
그리고 그의 뇌막을 스치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즉 십 년 전의 천일대사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날 밤, 독기에 쐬인 천일대사가 침사 위에 서 있는 그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잠깐 사이에 천일대사의 다섯 혈도를 찔러 산석(山石) 위에 쓰러뜨린 일들…… .
그는 소림(少林)과 전진(全眞)의 무공이 똑같이 항거할 수 없는 위력을 가졌다고 느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세하게 저울질 해 본다.
『청목과 천일대사를 각각 한 번씩 부딪쳐 보았다. 그러나 도대체 천일, 청목이 누가 더 무공이 센지 구별하기 어렵구나……』
이리하여 그는 청목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탓인지 돌기둥 위에 서 있는 청목도장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인(巨人)처럼 느껴진다.
『으음……』
김인달은 신음을 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이 죽어가는 외로운 노인의 가슴에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을 준다.
그는 머리를 흔들고 안간힘을 쓰며 억지로 입을 연다.
『청목…… , 청목, 네가 이겼어……』
『……』
청목은 그를 내려 보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김인달은 안간힘을 쓰며 띄엄띄엄 목소리를 짜낸다.
『청목…… 내 너에게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청목은 의아하여 바라본다. 그의 음성은 비록 나직하기는 했으나 그 음험하고 악독한 그 본래의 음성을 되찾아 소리친다.
『내가 너와 싸워 보고 가름해 보니 천일대사의 공력이 너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고 깊다!』
이것은 죽어가는 악마가 고의로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는 발악적인 소리였다.
그러나 의외에도, 청목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아닌가.
청목은 하늘을 덮은 야색(夜色)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확실히 천일대사보다 무공이 높지 못해. 나는 마음속으로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
김인달은 맥이 스스로 풀렸다. 그는 청목도장이 화를 낼 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김인달은 그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을 길게 내뿜고는 부둥켜 않고 있던 돌기둥을 놓았다.
순식간에……
그의 육신은 운석(隕石)이 떨어지듯 황사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반 시각이 지난 후에 동녘 하늘이 허옇게 눈을 떴다.
청목은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 나왔다. 그는 새벽의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 마시고 몸 안에 진기를 운행시켜 보았다. 그리고 왕성한 진력이 있음을 느끼고 홀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현기석(玄磯石)으로 돌아가야 한다. 운학이 기다리느라고 얼마나 속을 썩이고 있을까?』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한 번 경공법을 발휘하자 그의 몸은 활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허공을 날았다. 삽시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서광(曙光)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운학은 천전교주와 드잡이가 일어나고 있었으니 청목도장이 운학을 찾아간다 하여도 만나게 될 리가 없었다.
청목도장이 그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침사곡의 어느 한 봉우리에서는 엷은 분홍색의 안개 같은 것이 허공으로 올랐다가는 사라지고 올랐다가는 사라지고 하였다.
이것은 무엇일까?
바로 풍륜이 바위틈에 감추어 두었던 나머지 한 알의 백고주가 효력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틀림없이 사흘 안에는 침사곡에 있는 모든 생물은 일제히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때……
침사곡에서는 운학과 사형령주 사이에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피투성이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운학은 하늘을 뒤엎을 것 같은 유력으로 신중하게 제일장을 쳐 내었다.
이 일장은 천전교주와의 사이에 벌어진 제삼차전의 제일초였으니……
첫 번째 싸움은 운학이 천전교주와 양대 호법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었으나 일검쌍탈진신주(一劍雙奪震神州) 사여안(查汝安)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몸을 피할 수 있었고,
둘째 번에는 운학이 천전교주의 간계(奸計)에 넘어가 죽음의 침사곡 골짜기로 빠져들어 갔으며,
세 번째가 이번의 이 싸움이었다.
둘째 번까지는 모두 천전교주의 간계와 음모로 하여 운학이 사지(死地)에 빠지거나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순간까지 이르렀으나 이번 이 세 번째는 먼젓번의 대결과는 좀 성질이 달랐다.
즉 이번에는 운학이 먼저 나서서 도전하여 필사의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것이니 사형령주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 만만한 싸움은 아니다.
천전교주는 왼손을 번쩍 들어 단장(單掌)을 치니 주위의 나뭇잎을 휘몰아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운학을 쳤다.
운학은 천전교주의 장세를 한 번 접하여 보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두 번 겨루어 보기는 하였지만 이처럼 센 손바람을 대하여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학은 몸을 움찔하면서
(대단한 걸! 이놈의 공력이 갑자기 늘었을까?)
마음속으로 탄복하였다.
그러나 운학은……
천전교 본부가 무림의 이름 높은 고수들에 의하여 대파를 당하는 날 공교롭게도 농남(隴南)의 영지초(靈芝草)를 얻어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공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하여진 것을 운학이 알 리가 없었다.
아무리 운학이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무공과 선천기공이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천전교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운학은 지난번 교주와 싸울 때도 그가 숨겨 놓고 아끼는 절초(絶招)만은 영영 선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천전교주는 눈치로 알고 있었다.
운학은 긴장하여 쌍장을 연달아 쉬지 않고 쳐 나가니 그 일초가 모두 한 군데 버릴 것 없는 절초였음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 쌍장의 장력이야말로 웅후하고 빈틈이 없었으니 마교오웅과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문 고수나 전진파에서 대대로 배출한 고수도 운학의 지금과 같은 나이에는 도저히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운학의 이런 실력을 사형령주로 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형령주는 운학의 쌍장에 접하자 놀라는 것은 물론 마음에 어떤 두려움이 일기까지 하였다.
천전교주는 농남(隴南)의 영지초(靈芝草)를 마신 다음에 자신의 공력이 크게 정진되어 있음을 믿어 자기의 사부의 가르침을 완전히 소화하여 천하에는 가히 자신의 공력과 맞설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죽었으리라 생각하던 운학이 다시 살아나서 지금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공력을 과시하고 있으니 그의 놀라움은 운학이 그를 보고 놀라는 것보다 몇 배 더 컸다.
운학은 연달아 쌍장을 뒤집어 수십 초를 공격하여 사형령주로 하여금 눈 깜짝할 틈도 주지 않았다.
운학은 자신의 온 능력을 발휘하여 손바람을 일으켜 치니 그 장력은 당대 무림에서는 아마도 당해 낼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이 때 운학 스스로의 가슴에도 놀라움을 참지 못하였으니, 자기의 어디서 그렇게 강한 공력이 나오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즉, 쌍장을 쳐 나갈 때 가슴에 불꽃처럼 터져 나오는 진기가 뻗쳐 올라 전신에 펼쳐져서, 백혈(百穴)에서는 억제할 수 없는 힘이 불끈 솟아올라 자신의 진기와 합류하여 쏟아져 나오는 까닭이 있다.
그는 자기 가슴 속에서 갈수록 뜨거운 진기가 솟아오름을 느꼈으니 이것은 그가 상승내공을 연마한 뒤에 일찍이 느껴보지 못하던 현상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천전교주 자신이었다.
운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기를 쏟아낼 때마다 뜨거운 열을 느끼게 되니 그의 장력은 이 열과 비례하여 강하게 쏟아져 나가자 사형령주는 그와 같은 장력은 자기 평생 처음 대해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전교주는 있는 공력을 모두 두 팔에 집중시켜 몇 초로서 탐색전을 벌려 공연히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였으나 끝내는 운학의 그 무서운 장력에 눌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에도 힘이 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운학의 장력이 태산과 같은 힘으로 그의 몸에 덮쳐 가자 천전교주는 지난날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마교오웅(魔教五雄) 중의 백룡수(白龍手) 풍륜(風倫)의 장력을 겪어 보았지만 운학의 장력보다는 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사형령주는 이러한 두려움을 밖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힘을 뽐내어 운학의 쌍장을 막아내더니
『야앗!』
천지가 뒤흔들리는 기합 소리와 함께 쌍장을 뒤흔들어 반격의 기선을 잡았다.
사형령주의 반격하는 쌍장은 그 초식이 괴상할 뿐이 아니라 그 초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내력도 탐색전을 벌렸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이 초식이야말로 복면의 괴인인 그의 사부 김인달(金仁達)이 창조한 희귀한 무공으로써 천하에 그 경력(勁力)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 그들 두 사람의 사제(師弟) 밖에는 없었다.
천전교주가 전력을 다하여 쌍장으로 반격하였을 때 운학은 태연하게 태산압정(泰山壓頂)의 술법으로 그의 쌍장을 내려 덮쳐 버리자,
『펑!』
하며 천지를 요동할 것 같은 폭음을 내니 두 사람의 손바람이 처음으로 맞부딪쳤던 것이다.
두 사람의 쌍장이 부딪치는 것을 본 운학은 다시 초식을 바꾸어 공격을 하였고, 천전교주는 반격의 태세를 갖추기가 무섭게 장풍을 날려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천전교주는 몇 초의 공세에서 다시 물러나 수세로 몰리면서 운학의 연속적인 공격을 막아 내었다.
평소에 운학이보다는 공력이 몇 수는 높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는 비로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 같았다.
특히 천년영지(千年靈芝)를 마신 다음의 그의 자신에 있어서……
그러나 뜻하지 않게 운학의 강력한 공력에 부딪치자 오늘의 싸움에서는 공세로 일관하여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덧 그의 이마에서는 콩알만한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져 나왔고 이를 악물고 운학의 장력의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기를 쓰다가 지쳐버렸는지 숨소리마저 어지러워짐을 느끼자, 오른손을 뒤집는 순간
『쌩!』
하는 금속성이 나면서 번쩍하는 칼을 뽑아 들었다. 순간 허공에는 서릿발 같은 광채가 번쩍 하였다.
운학은 그 한 가닥의 서릿발 같은 검풍이 얼굴을 노려 날라오자 재빨리 몸을 갈 지(之)자로 뒤흔들면서 서너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물러선 운학은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공격의 태세도 취하지 않고 오직 사형령주를 노려보고만 있자 사형령주는 운학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억눌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을 뿐 다음 공격의 초식을 쓰지도 못한 체 운학을 노려보고 있자니 지나친 긴장 때문에 칼끝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을 노려보고 흘겨보는 눈싸움으로 시간을 보내었다.
이때
『쌩!』
사형령주가 칼을 뽑을 때와 같은 금속성이 들려왔다.
역시 운학의 손에는 장검이 잡혀 있었다.
칼을 뽑아든 운학의 가슴에는 먼저 느끼던 것과 같은 야릇하게 뜨겁게 불붙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운학은 사형령주와 같이 내공을 깊고 높은 경지에까지 단련한 천하의 고수에게 도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때만은 겁이 난다거나 두렵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사실……
운학은 처음부터 이 죽음의 침사곡(沈砂谷)에서 살아 돌아가기를 체념하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운학은 사형령주에게서 잠시도 눈길을 돌리지 않고 노려보다가 칼끝을 대꼬챙이처럼 세운 다음에 앞으로 반걸음 나서면서 벽력같이
『덤벼라!』
하는 소리가 나니 숲속의 나뭇가지에서 대여섯 잎의 나무 잎이 소리도 없이 날렸다.
즉, 운학의 몸에 운행되고 있는 공력의 목소리와 함께 새어 나와 주위의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천전교주는 운학의 장세에 몰리면서 벌써 백여 초의 곤경을 당했던 까닭에 두 다리의 힘이 저절로 빠지는 것을 느꼈으나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사신(死神)의 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끼자 정신을 번쩍 차리고 칼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어 운학을 향하여 똑바로 찔러 나가니 그의 검신에서는
『쉬익 쉬익……』
하고 허공을 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공세의 척수를 잡은 천전교주는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단번에 십여 검을 찔러 나갔다.
사형령주의 그 십여 검에는 아미파의 초식을, 또한 곤륜파의 초식을 뒤바꾸어 쓸 뿐 아니라 지금 까지는 운학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하던 자아류(自我流)의 괴상한 초식을 자유자재로 엇바꾸어 찔러오니 그 초식의 정통함과 공력의 깊이는 정말 천하를 휘어잡을 것같이 보였다.
즉, 천전교주가 종횡무진으로 휘둘러대는 무당 아미 곤륜 각파의 초식은 그 파의 장문인들도 그처럼 절묘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천전교주의 이와 같은 절륜의 검초가 연거푸 백여 합을 공격하니 그 검세는 하늘을 누를 것 같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았다.
사형령주의 검신 위에서는 태산이 춤추는 것 같은 힘이 생겨 좌충우돌 하더니 그의 공력의 수는 드디어 일백팔 합 이상에 이르렀다.
이때 별안간
『쓱, 쓱……』
하며 사형령주의 검풍과 운학의 검기가 엇갈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신룡이 하늘에서 춤을 추듯이 두 줄기에 무지개 같은 검광이 번쩍 하더니
『쨍!』
하는 귀를 찢는 듯한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승부를 결정하는 우열(優劣)의 차가 드러나고야 말았다.
천전교주는 안간힘을 쓰면서 공격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쳐 보았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시 운학의 검기(劍氣)에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운학은 이를 악물고서는 온 몸의 진기를 운행시켜 그 무서운 선천기공을 자신의 칼날에 뻗치고서는 번개와 같이 칼을 휘둘렀다.
그의 검초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십오 검을 찔러 나가니 사형령주의 몸은 드디어 바위 끝까지 밀려가고야 말았다.
이 때 운학은 벽력같은 목소리로
『이 놈!』
하고 그를 노려보더니
『에잇!』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힘을 자랑하며 또 다시 일검(一劍)을 찔러나가니
『윙! 윙!』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운학의 선천기공이 소리를 내면서 그의 칼과 함께 적을 치는 것이다.
천전교주는 비록 자기가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운학의 그 무서운 검세를 막기는 힘이 들었다.
사형령주는 사태가 위급함을 느끼자, 온 몸의 진기를 뽑아서 오십여 자 밖으로 몸을 피하기는 하였으나 몸을 피하는 여세는 드디어 그를 한 잎의 낙엽처럼 침사의 골짜기로 밀려지게 하였다.
거위 털도 뜨지 않는다는 침사곡의 누런 모래는 사람이 떨어져 오는 것을 알기라도 하였는지 노호(怒號)와 같은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사형령주를 삼키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사형령주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앞뒤로 흔드니 그의 몸은 모래사장 위로 반 치(寸) 가량 떠올랐다.
그는 마지막 진기를 모두 일구어 두 다리에 운행시켰다.
그러나 그의 몸은 중심을 잃은 채로 겁에 질려 누런 모래 위에 억지로 서 있었다.
운학은 이 때 앞뒤를 생각할 여지도 없이 골짜기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의 두 발은 가볍게 모래 위를 딛고 그의 장검은 번개와 같이 삼초를 쳐나가니 그의 무서운 검기가 번갯불처럼 세 번을 번쩍거렸다.
그의 검초는 일초 일초마다 무서운 공력을 발휘하니 그 검풍은 침사곡의 회오리바람까지 집어 삼켜서 하늘로 치솟는 모래기둥마저 동강이가 나버리는 것이었다.
천전교주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되었고 입가에서는 뜻 모르는 경련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장검을 휘두르고 있는 초식에 지난날 그 얼마나 많은 무림의 천하 고수들을 비명에 죽게 하였던가!
지금 그들 두 고수는 사신을 향하여 도전을 하는 한편 침사의 모래바닥 위에서 생명을 건 혈투를 벌리고 있으니 거위 털도 뜨지 않는다는 침사곡은 기쁨에 넘쳐 요동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십수 년 전 천일대사가 이곳에서 백고주의 독기에 중독된 채로 힘을 뽐내어 이 죽음의 모래 위에서 신위(神威)를 떨쳐 김인달을 구사일생케 한 것이 어제 같은데 그 늠름하던 천일대사의 신위가 또 다시 풍운만장의 침사곡 위에 재현되려는 것이나 아닌지?
두 사람의 힘과 재주가 칼끝에 모여 장검은 번갈아 허로 질렀다가 실을 거두려는 혈투의 검초가 어느 사이엔가 일천 합을 넘었다.
그러나 운학의 검세는 갈수록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운학의 가슴 속에는 뜨거운 열기가 끝없이 솟구쳐 올라 힘을 무한대의 경지까지 돋구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 열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왜 그런 열기가 일어나 자신의 힘을 돋구어 주는 것인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한 채로 힘을 모아 장검을 휘둘러 사형령주를 끝내는 궁지에 몰아넣고야 말았다.
운학은 드디어 전진검법(全眞劍法) 중에서 최후의 삼 초(三招)를 휘둘러 내었다.
제일초는 전진교(全眞敎)의 선천기공(先天氣功)으로써 사형령주를 왼쪽으로 몰아넣어 버렸으며 제이초는 소림파(少林派)에서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었던 심법으로서 사형령주를 오른쪽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으니――
마지막 제삼검은
『윙!』
하는 검풍과 함께 검신에 선천기공을 운행시켜 쳐 내렸던 것이다.
운학의 이 제삼검은 신묘하여 천전교주의 뛰어난 절학으로서도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어 그는 당황한 나머지 몸의 중심을 잃었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소나기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사형령주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이 살아난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예측했기 때문에 최후의 발악으로서 양쪽이 함께 죽음의 길을 택하는 방법만이 남았다는 것을 느낀 그는 최후의 일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운학은 지난날 몇 번인가 그와 대적(對敵)을 하였어도 그의 정체를 한 번도 보지 못하여 오늘이야말로 그가 얼굴에 뒤집어 쓴 인피 가죽을 벗겨 그의 정체를 온 세상에 밝혀 주는 가장 좋은 기회라 믿었다.
사실――
사형령주는 지금까지 자기의 얼굴을 한 번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지 않은가!
운학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오늘은 내 기어이 천하 사람들에게 저 잔인무도한 살인귀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밝혀 보여 주리라――)
마음속으로 소리치는 운학의 분노는 점점 충천하는 듯싶었다.
그는 검신을 왼쪽으로 약간 비틀면서 오른발을 번쩍 들어
『에잇!』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천전교주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순간 천전교주는 양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왼쪽으로 피하려 하였으나 죽음의 골짜기의 누런 모래 바닥은 그의 발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버려두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거리는 순간, 운학은 재빨리 그의 얼굴에 씌워진 인피를 힘껏 잡아 다녔다.
『앗!』
하는 운학의 온 몸에서 요동치던 진기는 완전히 흩어지고 그의 영혼은 천 리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충격 때문에 안색이 붉다 못하여 검게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자신의 육체와 마음에 받은 충격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침사의 골짜기로 몸이 흔들리며 말려 들어가려 하였다.
운학은 왜 이토록 심한 충격을 받았을까?
인피 가죽을 벗기자 정체를 드러낸 그 얼굴!
아아――
이 어찌 된 일인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백석(白晳)같은 얼굴!
귀까지 뻗쳐간 두 눈썹!
우뚝 선 콧날!
바로 그는 하삼제(何三弟)와 함께 하늘을 두고 맹세한 자신의 의형(義兄) 한약곡(韓若谷)이었던 것이다.
운학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신……』
『……』
『바로 당신이었구려!』
운학은 미친 사람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멀거니 서 있는 운학의 머리에는 지나간 일이 번개같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지난날 수수께끼에 쌓였던 모든 일이 비로소 풀려 나오기 시작하였다.
지난날 자기의 맏형으로서의 한약곡의 행방이나 종적이 어째서 신비에 싸여 분명하지를 못하였던가를――
또 지난날 무당산에서 천전교주가 나무숲을 향하여 호통을 치면서 장풍을 쳐나가기가 무섭게 몸을 숨기자 얼마 뒤에 숲속에서 어슬렁거리면서 걸어 나오던 한약곡――
또 침사곡에서 한약곡을 만났을 때 그는 먼저 얼굴을 돌리며 손을 들어 얼굴에서 무엇인가 벗기고 나서야 하삼제(何三弟)의 죽음을 알려주던 일――
이제 알고 보니 그가 얼굴에서 벗기던 것이 바로 인피(人皮)의 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약곡의 이야기를 하기만 하면 불평을 털어 놓던 하삼제의 생각이 떠오르자, 하삼제의 총명은 미리부터 그가 천전교주(天全教主)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하삼제의 총명(聰明)이 부러워지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어째서?
왜?
하던 의문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것 같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마음에는 의문이 풀려나지 않는 것이 많았다.
운학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 순간에 운학이 받은 충격은 너무나도 저돌적이고 격심한 것이었다.
운학은 그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에는 지나간 곡절이 하나하나 떠올랐다가는 사라져 그는 완전히 백치(白癡)처럼 멍하니 의식을 잃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 용솟음치던 그 열기는 폭발할 것 같은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나 운학은 마음에 받은 충격 때문에 그것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서는 침사곡 모래사장에 멀거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 때――
갑자기 침사곡을 왈칵 뒤집어 놓는 것 같은 폭성이 들려왔다.
『야앗!』
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노호하는 야수의 부르짖음이었으니 멀리 뻗쳐있는 산골짜기에 긴 여운을 남기면서 메아리쳐 갔다.
사형령주(蛇形令主)――
아니, 한약곡(韓若谷)――
그것도 아닌 운학의 의형(義兄)――
그가 운학이 백치처럼 서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일검(一劍)을 들어 기합소리와 함께 운학의 왼쪽 가슴을 찔러 들어간 것이었다.
순간 운학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폭포처럼 흘러 골짜기의 모래바닥을 붉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운학은 전신이 탈진(脫盡)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별로 대단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슴 속에서 터져 오르는 것 같은 열기가 폭발되어 오고 있었다.
그의 혼미하여 있는 의식 가운데에서도, 몸속에서는
『쏴아!』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면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피로 아로새겨진 그의 일생의 괴로움이 모두 풀려버리고 뜨거운 피에 충만된 그의 뼈마디는 극락의 경지에 빠져 들어가 다시없는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온 몸에서는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가 쏟아져 나와 자신의 후각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운학은 순간――
아! 용연향(龍涎香)의 위력!
즉, 운학의 몸속에 잠재하고 있던 무림계의 보물 용연향(龍涎香)의 효력이 운학의 몸에 단련되어 있는 천하 무인의 선천기공과 응결되어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로 아로새겨지는 자신의 가슴에 상처를 의식하는 운학이었으나 자신이 지금 생사의 관문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사의 관문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운학은 이 순간에 무학(武學)의 극치(極致)에 이르렀던 것이다.
만고에 그 어느 고수도 사람으로서는 이런 경지에 이른 일이 없는 최고 절정에――즉, 무위화성(無爲化成)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이 무위화성(無爲化成)――이란 곧 의식(意識)도 아니요, 본능도 아닌 그 어떤 영적(靈的)인 충동으로 하나의 극치(極致)에 도달하는 상태를 말함이니, 지금의 운학이 보여준 무공의 손속이야말로 단순한 재주의 영역을 벗어난 무학의 진수를 이루고 있었으니 이 극치야말로 무학에 뜻을 둔 모든 무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경지에 도달하고자 각고(刻苦)의 나날을 보냈던가. 그리고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경지가 멀고 높다는 것을 깨닫고 그 지닌바 희망을 절반도 펴보지 못하고 꺾이고 말았던가.
이 중국 천하에 무학(武學)이라는 특이한 학문이 세워지고 그 무학을 닦는 사람들의 모임을 무림(武林)이라 일컫게 된지도 어언 천 년(千年)――.
그 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속에 허다한 고수달인(高手達人)들이 나타났다가는 쓰러지고 하였지만 이 최고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세상에서는 무학의 진수를 깨우친 사람을 무성(武聖)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그 무성이란 달마대사(達摩大師) 한 사람만이 지녀야 하는 최고의 칭호라 생각하여 왔다.
달마대사는 당(唐)나라 말엽 때의 사람으로 숭산 소림사(嵩山 少林寺)에서 고고(孤高)한 일생을 마치고 입적(入寂)한 유, 불, 선 (儒佛仙) 삼도(三道)와 무학(武學)까지 겸비한 명승이다.
그는 삼십 세에 이미 소림사의 주지(住持)가 되고 사십 세에 이르러서는 홀몸으로 기만리(幾萬里)의 험로를 걸어 천축(天竺)땅에 들어가 구도행각(求道行脚)을 했다.
불법의 본고장인 천축의 명소고찰(名所古刹)을 두루 편력한 그는 그가 평소에 풀지 못해 주야로 고심했던 많은 선학상(禪學上)의 의심을 풀었으며 아울러 인도 고래(古來)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특이한 체조술(體操術)까지 배우고 돌아왔다.
당시의 당나라는 내정(內政)이 극히 문란하던 시대였다. 각지에는 도적이 횡행하고 산과 들에는 야수(野獸)들이 버글거려 마음 놓고 길을 걸을 수도 없는 시대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찰(寺刹)이란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자연 이 도적떼들의 분탕질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이들의 독수(毒手)에서 스스로를 지킬 무슨 방도가 없을까?)
이미 팔십이 넘어서고 있던 달마대사는 도적들과 사나운 들짐승의 위험에서 자수자립(自守自立)할 방도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면벽좌선(面壁坐禪)하기를 구 년 여――.
그는 아물아물 깊고 높은 선학(禪學)의 이치와 인도(印度)의 체조술을 결부시켜 드디어 하나의 무공(武功)을 창안하는데 성공했다.
우선 그는 이론적인 체계부터 세운다.
무(武)란 무엇인가? 그것은 병장기(丈)를 막는 것(止)이라 했다. 즉 스스로를 지키는 활(活)의 정신이라 했다.
공(功)이란 무엇인가? 그는 선학의 진수인 현현지기(玄玄之氣), 즉 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고 있을 듯하면서도 없으며 칠(擊) 듯하면서도 막고 찌를(衝) 듯하면서도 지키는 것이라 했다.
이 공(功)을 내공(內功)과 외공(外功)의 둘로 나눈다. 내공은 정신수양, 담력(膽力), 의지력(意志力), 심전양기(心田養氣), 몰아(沒我)를 이룰 수 있는 내적(內的) 힘이며 외공은 체력(體力), 체술(體術)을 바탕으로 한 공격과 방어 능력을 말한다고 했다.
달마대사는 이러한 이론적 기초로서 무학의 체계를 세웠다. 물론 내공(內功)은 선학(禪學)이 바탕이 되었으며 외공(外供)은 인도의 체조술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것 없다.
그리고 그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실지의 수련을 쌓았다. 혹서(酷暑)도 엄동도 없고 밤도 낮도 없었다.
제일 먼저 주먹을 쓰는 법인 권법(拳法)에서부터 시작하여 손바닥을 쓰는 장법(掌法), 몽둥이나 지팡이를 쓰는 곤법(棍法)과 장법(杖法), 검법(劍法), 창법(槍法)등 소위 무예 십팔반(武藝十八般)을 차례차례로 완성시켜 나갔던 것이다.] (작업자 주: [ ] 안의 내용은 원문에 없는 얘기를 번역자가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이 달마대사도 백여 세에 이르러서야 이룰 수가 있었던 경지에 전진파 제삼십삼대 장문인인 운학은 약관 이십일 세의 나이로서 도달하였으니――.
이때…… 당대 무림에서 그 누구, 아무리 천하를 진동하는 천하 고수라 할지라도 운학과 대적하여 십 초를 싸워 넘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운학의 가슴에서는 쉬지 않고 선혈이 흘러 옷자락과 모래 바닥을 적시고 있었으나 조금도 개의함이 없이 얼굴에 찬웃음을 띠우면서 서서히 장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처참한 미소가 띠워져 있음을 그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살기와 복수의 한이 맺혀 쏟아져 나오고 평소에 그렇게 인애(仁愛)와 평화(平和)에 가득 찼던 그의 얼굴에는 엷은 안개가 가리어져 있었다.
운학은 한 번 몸을 떨었다. 전신을 휩싸버리는 무서운 공력! 골수(骨髓)에 사무치는 천추의 한(恨)! 이제야말로 온 천하의 피맺힌 공적(公敵) 사형령주를 주살(誅殺)하려는 것이다.
그는 서서히 장검을 높이 들었다. 쓰윽…… 하는 음산한 음향!
그러자 그 장검은 차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불에 달구어낸 쇠덩이처럼 붉은 광망(光芒)으로 열을 내는 것이었다.
새북(塞北) 관도 위에 찬란한 햇살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관도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가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앞에 서서 나란히 달리는 사람은 무당파의 운소진(鄆小眞)과 신룡검객 하마(何摩)였다.
하마는 심중으로 좋지 않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한약곡이 사형령주임이 명백하게 들어난 이상 어찌 한 발자국이라도 지체할 것인가? 틀림없이 한약곡은 운학을 해(害)하고자 할 것이라는 그의 예감이야말로 영감(靈感)처럼 적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소진은 이 모든 사태를 하마처럼 명확히 어림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듯 침사곡을 향해 달려가는 이 순간에 자기의 천상천하에 오직 한 사람의 혈친인 오라버니 운학이 침사곡의 와중에서 죽음과 마주 서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녀는 물론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하마와 나란히 경공의 신법을 날리면서도 왜 하마가 아무런 말도 없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묻는다.
『하대협! 오라버니는 침사곡에 있습니까?』
하마는 힐끗 소진을 바라본다. 그의 눈언저리에 비치는 불길한 예감! 그늘진 눈매에서는 자상한 미소조차 없다.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운형님은 침사곡에서 고전(苦戰)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간신히 말을 맺으며 그는 더욱더 신속한 공동파(崆峒派)의 신법을 전개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오, 하늘이여! 인명(人名)은 재천(在天)이라 할진대 이 어찌 이다지도 비정(非情)할 수가 있으랴!
그들이 한 굽이를 돌아서는 것을 본 사여안은 힐끗 뒤따라오는 그리운 누이 사여명(查汝明)을 돌아본다.
하늘이 점지한 두 남녀의 인연! 될 수만 있다면 저 운학과 사여명이 부부 지정을 누려 일생을 보낸다면 오라비로서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이랴!
사여안은 두 사람의 혼례를 치루는 그 엄숙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그리고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누이! 이제 그는 혈육의 정으로서 사여명의 미래에 대한 크나큰 사명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오라버님!』
사여명이 부른다.
『무슨 이야기라도 있느냐!』
그러자 사여명은 품속에서 반동강이 난 옥환을 꺼낸다.
그 옥환에 아로새겨진 이름, 운학(鄆鶴)――
그것을 본 사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미하고 자상한 미소를 보낸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하나의 소녀가 있었으니 그것은 저 복파보의 아리따운 사매(師妹) 요원(姚畹)이었다.
그는 얼마 전 비통한 울부짖음을 부르며 자기들의 앞을 떠나버린 요원을 생각했다.
(아!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할 짓을 하였구나!)
사여안은 무인(武人)의 세계를 떠나서 일개 필부로서의 요원에 대한 죄책감을 어쩔 수가 없다. 그는 괴로웠다.
『명(明)아! 우리도 어서 길을 재촉해야 한다. 너의 그 하늘의 배필이 침사곡에서 환난을 겪고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자 사여명은 갑자기 얼굴이 핼쑥해지면서
『오라버님! 그 한모(韓某)라는 사람은 운랑(鄆郞)과는 의형제(義兄弟)가 아닙니까? 설사 그가 사형령주라 하더라도 결코 운랑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이제 그녀는 무림의 여걸로서의 항심(恒心)을 떠나서 순수한 처녀로서의 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이 세상에 남녀의 관계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또 어디 있으리오!
그리하여 사여명은 운학을 대하면 여협(女俠)이라기에 앞서 일개 여인으로서의 항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그들은 무성한 숲을 끼고 아무 말도 없이 침사곡으로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하늘은 이렇듯 갈망하는 인간의 칠정(七情)을 위배하려는 것인가?
사여명의 모습은 차츰 멀어지니 그 선자(仙子)와도 같은 우련한 자태는 밝은 일광 속에 가물가물 사라진다.
한 잔의 차를 마실 시간이 지날 즈음――
이 관도 위에 또 한 무리의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맨 앞에 경공의 신법도 웅휘(雄煇)한 사람은 저 복파보(伏波堡)의 보주(堡主) 요백삼(姚百森)이었다. 그리고 그와 엇비슷이 뒤미처 오는 이는 장대가(張大哥) 장천행(張天行) 그 사람이다. 신필(神筆) 왕천(王天)은 뒤쳐져서 일장의 거리를 유지하며 이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요백삼이 그의 넓은 경삼의 소맷자락을 휘저으며 장천행을 돌아본다.
『장대가(張大哥)께서는 원아(畹兒)가 어찌 침사곡으로 간 것으로 단정을 내리십니까?』
장천행은 그 신선같은 동안(童顔)에 미미한 웃음을 날리며
『원래, 원아는 전진파의 수제자 운학을 연모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요백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아가 지난날의 전철을 밟아 또 보중(堡中)을 시끄럽게 하다니……』
요백삼으로서는 우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그의 흉중에는 저 지난날 복파보에서 있었던 드잡이질의 광경이 선하게 상기되었다.
그때 표연히 나타난 청목도장으로부터 도제 운학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운학의 소제를 부인했건만 오직 요원이만은 운학이 복파보에 왔던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백삼은 혼자 머리를 가로저으며 미간을 찌푸린다.
장대가는 말을 이었다.
『운학으로 말하면 전진파의 제일 고수로서 청목도장의 뒤를 이은 수제자이며 그 무학으로 말할진대 천하가 두려워하는 선천기공을 터득하여 무림에 위명을 날리고 있는 중이올시다.』
요백삼은 장대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정중한 음성으로
『그러면 그가 침사곡으로 간 원인은 무엇이요?』
『아마도 나의 생각으로는 저 무림의 공적인 사형령주가 침사곡에 근거지를 잡고 있는 터인즉, 필시 그 자를 주살하기 위해서 침사곡으로 간 것으로 압니다.』
그때 요백삼의 눈이 한 번 번뜩이더니
『헌데 그 사형령주(蛇形令主)라는 자는 도대체 어느 파의 문하입니까?』
그러나 장대가는 얼른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요백삼이 그를 재촉하듯이 시선을 돌리자 마지못해 긴 한숨을 토해 내며 말머리를 꺼내려 한다.
장천행은 한 차례 긴 신음을 토해내고 나서
『그 이야기는 매우 긴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요백삼은 의아스럽다는 듯이
『긴 사연이라니요?』
『네……』
장천행은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말한다.
『당년에 복파보에서 있었던 일막의 불미스런 고사를 보주께서는 기억하십니까?』
요백삼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느덧 이들의 경공은 속도를 늦춘다. 그러자 뒤따르던 왕천이 그들 가까이 몸을 날려 왔다.
이윽고 요백삼은 깨달았다는 듯이
『그 김사제(金師弟)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장천행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그때 한열곡(寒熱谷)에 떨어졌던 김사제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때 신필 왕천이 한 마디 한다.
『노부는 보았습니다. 침사곡에서…… 그 사람은 몽면(蒙面)의 인피(人皮)를 쓴 김인달(金寅達)이올시다.』
요백삼은
『아!』
하고 한 차례 탄식하고 나서
『그러면 그 자가 바로 사형령주의 사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장천행은 이제 모든 것을 밝혀 이야기할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민지사는 사형령주 그 사람은 그의 아들이며 돌아가신 큰 사매(師妹)의 자식인 것입니다.』
이때 요백삼의 눈은 문득 하늘을 향하였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한마디를 중얼거린다.
『오, 하늘이시여! 결국 무림을 어지럽힌 악의 씨는 소배의 복파보(伏波堡)에 있었습니다! 이 어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일이 아니로이까?』
그러나 장천행은 말을 계속한다.
『그리고 또 요보주께서는 기억하시리다! 본인과 함께 조사의 문하에서 연공한 또 하나의 사제―― 운이제(鄆二弟)의 행적을……』
그러나 요백삼은 허공에 던진 시선을 돌리지 아니한다.
장천행은 말을 계속한다.
『그 운이제로 말하면 연전(年前) 강남 땅에서 김사제의 칼에 쓰러졌으며, 그 슬하에 두 남매를 두고 있었으니 그들이야말로 오늘 날 전진파의 도제 운학(鄆鶴) 그 젊은이며 또한 무당파의 운소진(鄆小眞)이올시다!』
요백삼은 계속해서 밝혀지는 미궁의 심연에서 놀라운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다만 하늘을 향해
『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그는 중얼거리며 긴 탄식을 연발한다.
그때 신필 왕천은 놀라는 눈을 들어 장천행을 바라본다.
『그러면 그 운학으로 말하면 우리 복파보로서는 전연 남이 아니지 않소이까?』
장천행이 대답한다.
『그렇소이다. 모두가 복파보의 인연입니다. 무림의 악의 씨도 복파보의 혈연(血緣)이요. 그를 주멸(誅滅)하려는 전진파와 무당파, 이 또한 남이 아닌 셈이지요.』
그때 요백삼은 문득 자신을 수습하는 눈치였다.
그는 목소리를 한층 돋구어
『그러면 지금 우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줄 압니다. 발길을 재촉하여 침사곡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무림의 환난(患難)을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결말을 지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장천행이 그 말을 받는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뿐만이 아니라, 천하 각파가 모두 침사곡으로 신경을 모으고 있을 것입니다.』
신필 왕천이 부연하여 말한다.
『그렇습니다. 천하무림에서는 십 년 전의 새북대전의 비밀에 대해서 한결같이 그 미궁(迷宮)을 파헤치려 할 것입니다. 차제에 모든 의문은 풀릴 것입니다.』
요백삼이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 앞서 이 비밀을 탐지하여 천하에 사죄(赦罪)할 의무가 있지 않겠소이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의 복파보가 해결지어야 할 문제올시다.』
장천행은 말을 마치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양미간에 흐르는 애상(哀傷)의 빛은 아마도 인간의 무상함을 되새기는 것인가!
그러자 그는 돌연 세차게 발을 뻗으니 바야흐로 소림파의 절기인 심법의 경공이 발휘되는 것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요백삼, 왕천이 또한 화살과도 같은 날랜 동작으로 경공의 비호같은 신법을 전개해 내며 허공으로 일진의 광풍이 휘말려 올라가며 그들의 모습은 하늘을 나는 유성처럼 신속하게 운행하기 시작한다.
천하무림의 각파가 일제히 이렇듯 침사곡에 눈길을 쏟으니 침사곡은 바야흐로 십 년 전의 대회전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회견장이 될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혈전(血戰)의 결전장이 아니라, 모든 인간 속에 자리잡은 우호(友好)의 기운으로 나타날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주위를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다.
요원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의 잔디밭에서 교태어린 몸을 잔뜩 구부리고 달콤한 꿈의 세계를 헤매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운학이 떠난 것도 모르고――
얼마만에 그는 깜짝 놀라 밀감과도 같은 단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 다시 지나간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밤에 그는 사여명의 일로 해서 심한 번민에 빠졌었기 때문에 급기야 두 가지의 일――
즉, 한약곡(韓若谷)이 천전교주라는 것과 운학(鄆鶴)은 복파보에서 태어난 복파보의 후인(後人)이란 것을 알려 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벌떡 잔디밭에서 몸을 일으켜 운학을 찾았다.
그러나――사방을 두리번거려도 운학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 가까운 곳에 간 게지? 곧 돌아오겠지!)
하며 무릎을 모아 쪼그리고 앉아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련한 요원이여!
어찌 운학이 돌아오겠는가!
요원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미친 듯이 일어나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여봐요!』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메아리가 들려 올 뿐!
그의 머리에는 지난밤에 자기 입에다 입을 포개던 때의 운학의 빛나는 눈동자가 떠오르고 동시에 그가 금시에 숲에서 나타나 줄 것만 같은 충동을 받았으나 허사였다.
그는 땅 위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글자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운학이 써 놓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혈채(血債)’
‘침사곡(沈沙谷)’
그는 놀라 미친 사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운랑(鄆郞)! 당신은……』
소리치는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그리워하는 운학의 모습 밖에는……
이윽고 요원은 침사곡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운학은 살기어린 눈으로 한약곡을 노려보고 있을 뿐, 한 마디의 말도 없다. 가슴에서 흘러 내려오는 붉은 선혈이 누런 모랫바닥에 한줄기의 무지개를 그려 놓고 있는 것을 보자 그의 검신(劍身)은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허공에 세 줄기의 원을 그려 놓는다.
이것이 바로 칼이 허공을 비행하는 비행술(飛行術)이었으나 오랫동안 절전(絶傳)되어 온 검초이다.
운학이 검신으로 허공에 원을 그리기 위하여 몸을 움직일 때마다 왼쪽 가슴의 상처에서는 붉은 선혈이 샘솟듯이 솟아올라 황사를 물들이고 있었다.
한약곡과 운학은 몇 자 떨어지지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겨누고 있었다.
운학의 검이 허공의 세 번째 원이 그려지자 그때 돌연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어느덧 운학의 손에 쥐어졌던 장검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의 손을 떠난 그의 장검은 한약곡의 오른쪽 가슴을 꿰뚫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사형령주의 백설 같은 얼굴은 더욱 창백하여지고 있었다.
운학은 얼음장과 같은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한약곡의 입가에는 힘없는 미소가 어리더니 그 자리에 푹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 미소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분명히 뜻 있는 웃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웃음으로 그치는 웃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의 시신(屍身)은 침사의 모래바닥으로 말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얼마 뒤에 침사(沈砂)의 황사(黃沙)는 파란 많은 그의 시신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운학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한 줄기의 싸늘한 바람이 그의 상처 입은 가슴을 스치니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다.
아마도 흐르던 피가 다하여 말라붙은 것이리라!
운학은 자신도 한약곡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사자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진기가 차츰 흩어져 가기만 한다.
운학의 발 아래 황사는 꿈틀거리기 시작하였으니……
이때……
침사의 골짜기를 뒤집어 놓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운학의 혼미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운랑! 운랑……』
그것은 단말마에 빠진 비명과도 같이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요원이었다.
멀리…… 절벽가의 바위에는 요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거리는 무척 멀었지만 운학은 요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여보셔요! 운랑……』
어느덧 황사는 그의 발을 반 자 가량 삼키고 있었다.
『운랑! 빨리 올라와요! 죽어선 안 돼요!』
마구 울부짖는 소리가 허공으로 퍼지건만 그러나 황사는 그의 허리까지 삼켜버리고 말았다.
『운랑! 당신은 죽어서는 안 되요! 대답 좀 해 봐요!』
요원의 목소리는 처절하게 산골짜기로 퍼져 나갔다.
이 처절한 요원(姚畹)의 외침을 듣는 운학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의 눈자위에는 흥건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요원을 향하여 마음속으로 외쳤다.
(요원! 나는 죽더라도 너는 죽어서는 안 돼!)
하는 운학은 어느덧 어깨까지가 황사에 빠져 있었다.
바위 위에 서 있는 요원의 발버둥은 꼭 미친 사람같이 날뛰기 시작한다.
그 모양을 바라보는 운학의 눈에서는 소나기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운학의 눈물――
피어린 지나간 자신의 길지 않은 평생이 고통으로 일관됨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을까?
아니!
외로움 속에서 형제의 의(義)를 맺었던 한약곡이 사형령주요, 천전교주였다는 냉엄한 현실이 야속하여 흘린 눈물이었을까?
아니!
인자스럽고 자애에 넘치는 사부 청목도장의 모습이 그리워서 흘린 눈물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오직 희미하게 보이고 있는 요원의 그 모습을 마음속에 오래도록 간직하려는 순정(純情)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샘물처럼 줄줄이 쏟아지는 눈물의 순간 그의 마음에 꼭 닫혀 있던 사랑의 문은 비로소 활짝 열려 한 사람의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가고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요원(姚畹)이었다.
죽음이 닥쳐오는 이 순간에 그의 머리에는 요원과 함께 여러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부(師父)!
덧없이 헤어졌던 누이동생 운소진(鄆小眞)!
자기와 뜻을 같이 하던 의제(義弟) 하삼제(何三弟)!
사랑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아리따운 사여명(查汝明)!
운학은 생각이 사여명에 이르자 모래사장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의 몸에 온갖 진기를 돋구어 발버둥쳤다.
『아아! 얼마나 불행했던 사여명이었던가!』
그 사여명은 이때 침사곡을 향하여 관도 위를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운학은 사여명이 이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니 이 얼마나 신의 섭리가 빗나간 일이겠는가?
누런 죽음의 황사는 드디어 운학의 목덜미까지 삼키고 있었다.
순간 운학의 머리에는 조금 전에 떠올랐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자애로운 사부 청목도장(青木道長)!
아관(峨冠)을 쓴 여도사 소진(小眞)!
준수한 신룡검객 하삼제(何三弟)!
그러고 사여명(查汝明)!
그는 실같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사…… 사여명, 이 나를 용서하오!』
그가 말하는 순간 황사는 그의 입술까지 이르고 있었다.
요원은 이 순간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꺼져 가라앉아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공백(空白)이 있을 뿐이었다.
요원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듯이 두 팔을 번쩍 쳐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팔을 쳐들은 요원의 어깨는 요동을 하고 있었고 감고 있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볼을 지나 그의 흰 옷깃을 수놓아 가고 있었다.
요원이 조용히 눈을 떴을 때,
아!
그 죽음의 침사곡은 평정하기만 하였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요원에게 반문을 하고 있었다.
황사 위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누런 저주스런 모래사장일 뿐.
『……』
요원은 의식을 잃은 채 바위 위에 서 있었으며 눈과 같이 흰 살결에 걸친 깨끗한 흰 옷이 그를 천상 선녀처럼 보이게 한다.
그의 눈에서는 쉬지 않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느낌도 없이 조용히――
이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맞은 편 언덕 위에서 절벽가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여안(查汝安) 남매와 하마(何摩)들이었다.
그들이 조금만 먼저 이곳에 이르렀던들 운학의 한 많은 비극(悲劇)은 구제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때가 너무 늦었었다.
그들이 절벽가에 이르러 침사곡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 신비스러운 회오리바람이 누런 모래를 휘감아 꿈틀거리고 있을 뿐, 천 년 전, 아니 만 년 전의 침사곡과 다름이 없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도 엊그제 그대로요, 저주스런 누런 모래 바닥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음침하고 태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사여안 남매 일행은……
침사곡에서 눈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던 그들은 맞은편 바위 위에 두 팔을 번쩍 쳐들고 넋을 잃고 침사곡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요원을 발견하고서는 놀래어 이구동성으로 소리 질렀다.
『아! 요원(姚畹)이다!』
『요원이다!』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으나 요원의 귀에는 이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예쁜 뺨은 백짓장같이 변해졌고 그 위를 눈물이 샘물처럼 쏟아지면서 울고 있었다.
이 때――
길을 잃은 한 쌍의 기러기가 허공에서 애조(哀調) 띤 울음소리를 남기며 침사곡 남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몇만 리를 날았는지 날개가 축 늘어져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우리 좀 쉬었다 갈까?
분명히 짝 기러기의 애원이었는지 한 마리의 기러기가 쏜살같이 침사곡의 모래사장을 향하여 날개를 멈추면서 내려앉았다.
순간
『끼익――』
하는 비명이 들려오면서 기러기의 몸이 모래 바닥으로 말려 들어가기 시작하자 발버둥을 치며 푸드덕거리기 시작하였으나 잠시 후에 침사곡은 다시 평정하여지며 회오리바람이 불어 일 뿐이었다.
허공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남은 짝 기러기는 역시 날개를 멈추며 침사곡 모래사장을 향하여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또 한 번
『끼익.』
하는 비명과 함께 모래 바닥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아무 것이나 동상동몽(同床同夢)의 숭고한 사랑의 결정이 침사곡에 열매 맺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
천하에 무서운 침사곡이여!
그래 꼭 이 한 쌍의 기러기에게도 그 쓰라린 시련을 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 한 쌍의 기러기의 비극을 끝까지 지켜 본 요원은 비로소 사랑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것같이 벌떡 정신을 차렸다.
아, 사랑이란!
요원은 한 마디로 결론짓고 말았다.
――희생적 정신이야!
그는 입가에 다시 처절한 미소를 띠우면서 벼랑가 바위 끝으로 발을 옮긴다.
그때 맞은편 언덕에 서 있던 사여안 남매와 하마는 일제히
『요원! 너는 죽어서는 안 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요원의 가슴 속에는 이미 사랑의 정의가 지어져 있었으니 그리하여 한 쌍의 기러기의 뒤를 따르려는 것인가, 곡변을 향하여 서슴없이 발을 옮겼다.
억천 년 함묵하여 말없는 침사곡!
원한(怨恨)의 침사곡(沈砂谷)이여!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