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훈장 / 최계순
따스한 봄 햇살이 거실에 내려앉는다. 차 한 잔을 놓고 바닥에 놓인 택배 박스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문득, 가슴속에 맺혔던 그리움이 솟구쳐 목울대가 뻐근하다. 박스 위에는 자그마한 태극기가 중앙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대한민국 국방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궁금했지만 풀어보기가 망설여진다.
우체국 직원에게 받은 택배 상자이다. 큰 박스 안에 가지런히 놓인 두 개의 작은 상자에는 빛나는 황금별이 하나 있다. 또 다른 상자에는 검정별이 있고 ‘6.25 무공훈장 수훈’이란 글자가 쓰여 있고 태극기가 있는 훈장증서와 유공자 신청 절차 설명서가 들어있다. 훈장 증서를 받고 나니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신 지 마흔 해가 넘어 받은 훈장이지만 자랑스럽다. 그런데도 아버지만 떠올리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한국동란의 참전용사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의 자욱한 화약 연기 속에서 목숨을 하늘에 맡긴 채 전투를 했다. 그런데도 참전했다는 말씀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기에 우리 남매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전후세대라 수많은 생명이 죽고 부상당했으며 이산가족이 생겼던 전쟁을 겪지 못했고 방송에서 간접으로 느끼곤 했었다. 3년간 이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이 얼마나 참혹했던가. 수십만 명이 죽고 몇백만 명이 부상당한 참사로 떠올리기조차 싫다. 전쟁 중 입대하여 휴전이 되고나서 만기제대 했다는 사실을 훈장 증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수많은 전우가 쓰러져 목숨을 잃은 전선에서 싸웠던 아버지가 참전 사실을 말하지 않은 까닭을 늦게야 알았다. 두 살 터울의 형제가 모두 전쟁에 참전했다. 휴전이 되고 아버지는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생사를 모르는 돌아오지 못한 동생 때문이다.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작은아들을 위해 밤낮으로 정화수 떠 놓고 비손을 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 앞에서 당신만 살아 돌아온 죄스러움에 꺼낼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 아들 두 명을 보낸 할머니 가슴은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 끝났지만 돌아오지 못한 아들이 있었다니 만일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날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우울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였구나, 아버지와 할머니는 크게 한번 웃는 모습조차 볼 수가 없었다. 두 분 모두 몸은 뼈에 가죽을 도배한 듯 바짝 말랐고 어깨는 늘 축 처져 있었다. 그런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살자니 몸도 마음도 지쳤으리라.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너 살 동생을 남겨두고 어머니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으니 아버지의 고통은 한계를 넘어섰으리라.
봄이면 소를 몰아 쟁기로 논밭을 갈아엎고 씨뿌리면서도 부르던 슬픈 노랫가락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당신이 해야 할 농사일을 마치면 말씀도 없이 홀연히 집을 떠나셨다가 곡식이 무르익으면 돌아와 추수를 끝내고 겨우내 땔 장작과 마른 솔가지를 헛간 높이 쌓아 올리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당연히 가장이니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시집간 딸이 보고 싶어 먼 길을 달려와 이틀 밤을 묵고 가시면서 발길이 안 떨어져 자꾸만 뒤돌아보던 아버지의 심정을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다. 딸네 집에서 보낸 그 짧은 시간이 마지막이 될 줄도 몰랐다. 영원한 이별은 예고가 없다더니 그렇게 허망하게 아버지가 떠나시자 억장이 무너졌다.
당신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왔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동생, 어린 자식 둘만 남기고 떠나신 엄마에 대한 고통을 견뎌내기 위한 것은 술뿐이었으리라. 조금 과하게 드시는 날이면 엄마 곁으로 빨리 가고 싶다던 말씀이 씨가 되었는지 이순도 안 돼 떠나시고 말았다.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떠난 남편으로 당신과 비슷한 삶을 살면서도 원망만 했던 딸은 이제야 가슴을 치는 회한의 날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훈장을 들여다보자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친구 부모님과 비교하며 서운한 것만 떠올리며 원망했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것조차 당신 가슴에 묻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으니 그 험한 시대를 살고 가신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다. 답답하고 암담한 가슴으로 어찌 사셨을까. 그 누구도 이렇게 살았던 분이 있을까 싶은 가련한 인생이다.
국가유공자 자녀는 부모의 고귀한 희생으로 얻어진 명예로운 호칭이다. 마냥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첫댓글 선생님의 아버지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들은 자유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글을 읽는동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쓰시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요.
자랑스러운 훈장입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