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희-히야신스 꽃잎같은 바람이 불어올까
현희-우리 아버지는 농군(農軍)이셨다
현희-성난 봄, Z씨의 자살미수
현희-새는 숲에만 사는 게 아니다
현희-봄과 여름 사이의 기록
현희-달빛소곡
현희-눈부신 은사시나무를 향한 연가
현희-길고 긴 그림자가 있었다
현희-길 없는 길의 노래
현희-그녀는 외출중
현희-강 오른쪽 강 왼쪽
현희-감청색 바다에 관하여
현희-사모곡 1
현희-미세한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시를 읽는 즐거움-낯설게 만들기와 독자 끌어당기기 - 현희
* 히야신스 꽃잎같은 바람이 불어올까 - 현희
오후 4시.
집어든 신문의 행간에서
<작은 꽃은 섹스이다>라고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푸르스름한 언어의 칼날을 휘두른다.
그러나, 순간의 번득임도 잠시
바람도 불지 않는 오후 4시의 정적 속으로
조용히 슬리는 광채.
오후 4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생기를 잃는다.
<이 세상엔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후 4시 무언가를 시작하기는 너무 늦고 또한 무언가를 포기하기는 너무 이르고…> 나는 베케트가 기다리던 고도의 생존도 아직 확인하지 못한 채 오후 4시에 걸터앉아 있다.
오후 4시.
지극히 평범한 오후 4시.
어떠한 바람도 불어 오지 않고,
저무는 태양을 따라잡기엔 너무나 늦은 시간.
저무는 태양의 발꿈치를 바라보며 앉아 있기엔 너무나 이른 시간.
…바람이 분다. 히야신스 꽃잎같은 바람이 분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히야신스 꽃잎같은 바람. 내 몸에서 히야신스 꽃잎이 피어난다. 꽃잎 속에서 수만 개의 태양이 뜬다. 종달새가 날아오른다. 종달새의 눈에도 히야신스 꽃잎이 핀다. 어지러운 향기가 출렁거리고 나의 열 손가락이 수만 개의 태양을 안아 올린다. 순간 히야신스 곷잎같은바람이 몰고 온 히야신스 꽃잎같은 태양이 스르르 두 팔을 빠져나간다.
오후 4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는 지날 것이고
그러한 예감은 질기디 질긴 절망을 낳고
나는 지금 오후 4시를 힘겹게 소화시키는 중이다.
* 우리 아버지는 농군(農軍)이셨다 - 현희
1
병신처럼 고운 노을이 술 술 술 번지는 바다
붉은 보리밭 이랑이 구비구비 일렁이며 펼쳐지고
평생 농군이셨던 아버지가 고개를 든다.
그 위로 날아가는 산새 한 마리.
내 어릴 적 꿈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슬프디 슬픈 몸짓으로 날아가던 산새 한 마리가
허공에 박혀 지직지직 타는 깃털을 떨군다.
그 불빛에 드러나는 아버지 얼굴
들척지근한 술 냄새가 바람에 밀려 온다.
그리운 아버지 냄새가 밀려온다.
2
아버지는 시내 공판장에 다녀오시는 날이면 늘 취하셨다. 그날도 풀다듬이 곱게 한 옥양목 두루마기 동정에 허망만 가득 묻히고 풀죽어 돌아오셨다. 취한 걸음으로 밭에 나가신 아버지는 누렇게 익은 낱알들을 잡아 뜯다가, 보리 잎새가 되어 눕기도 하다가, 미친 듯 휘젖고 다니는 바람이 되었다가, 흙이 잔뜩 묻은 고무신을 팽개치고 흰구름이 기웃대는 쪽마루에 널부러져 한나절 늘어지게 주무시다가, 보리밭 이랑 위로 날아가는 산새를 가리키며 빈 술병을 끌어 안으셨다. 산새를 가리키는 그 손 끝 병신처럼 고운 노을이 일렁이고 있었다.
3
바다에는 붉은 보리밭 이랑이 출렁거리고
날아가던 그날의 그 산새가 다시 타고 있었다.
타다만 깃털들은 별똥처럼 길게 떨어지는데
허망한 허수아비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데
멀리서 여객선(旅客船)이 부우부우 운다.
* 성난 봄, Z씨의 자살미수 - 현희
성난 봄, Z씨의 자살미수
-이 몹쓸 세상은 자유를 내팽개칠 자유조차 주지 않는군. 그렇다면, 세상을 갈아치든지, 내 정신을 업그레이드 할 수밖엔.
<꽃>이 아름다울수록 외로운 남자가 있었다. 등을 보이고 앉은 <기다림>의 그림자가 아름다울수록 외로운 여자가 있었다. 꽃도, 기다림도 다 죽이고 물푸레나무 숲에 머리를 처박은 봄이 있었다. 영혼을 팔아
버리고 싶은, 그런 처절한 봄이
탱탱히 부풀어오른
꽃의
아랫도리
아래
이슬맺힌
Z씨를 뭉개고
그러나 여름이 오고 있다.
활활 타오르던 적막이 숨을 쉬고 있다.
* 새는 숲에만 사는 게 아니다 - 현희
새는 숲에만 사는 게 아니다
거리에도, 지하철 역에도, 상가(商街)에도, 우울이 늪처럼 가라앉은 커피숍에도
푸르스름한 시간(時間)의 가지 위에 걸터앉아 깝죽대며 날개를 다듬는 새가 있다.
새는 숲에만 사는 게 아니다.
위협적인 족제비 앞에서도, 불쑥 들이대는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서도 살아남은 새는
도심 한구석 포장 마차에서, 살점이 놓여 있는 석쇠 위에서, 자신의 얼굴이 일렁이는 술잔 위에서 다음 날아갈 곳을 겨냥하며 깝죽댄다.
새는 결코 숲에만 사는 게 아니다.
햇살이 좌르르 번지는 눈부신 거리에서도 까닭없이 몸을 움찔거리며, 발꿈치를 세우고 종종걸음치며
사냥꾼이기도 하고 사냥감이기도 한, 새이기도 하고 새가 아니기도 한 새는
거리에서도, 지하철 역에서도, 무너져 내린 백화점 상가에서도, 우울이 늪처럼 가라앉은 커피숍에서도
푸르스름한 시간의 가지 위에 걸터앉아 깝죽깝죽 깝죽대며 노래를 부른다.
종달새는 참새의 목청으로, 따오기는 뻐꾸기의 목청으로 한나절 운다.
새는 숲에만 사는 게 아니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에도 살고, 알래스카에도 살고, 흔들리는 내 사유(思惟) 속에서도 산다.
새는 결코 숲에만 사는 게 아니다.
* 봄과 여름 사이의 기록 - 현희
1.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그린
유화 그림 속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꽃의
아랫도리를 바라본다.
내겐 아직 출구가 없는 봄.
죽은 꽃에 물을 뿌리며
기다림을 주렁주렁 살찌우고 있다.
귀를 자른 염소 한 마리,
숲 속으로 숲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2.
이제 여름은 물구나무서서 운다.
우기(雨期)의 시작이다.
* 달빛소곡(小曲) - 현희
초사흘 달빛이 가늘게 내리는 저녁…. 희디흰 그리움 한 올 한 올 풀어서 비뚤어진 내 눈썹 위에 살짝 붙이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대 불러 옆에 눕히고, 왼쪽 갈비뼈 하나 뽑아 내 갈비를 만들려 하나니. 돌아누우라, 그대여 나를 향해 돌아누우라.
푸르른 달빛이
비껴 내리는
그대 갈비뼈 사이
느릅나무 잎새 하나가 까뭇까뭇 진다.
* 눈부신 은사시나무를 향한 연가(戀歌) - 현희
그대는 눈썹같은 수평선을 보시나요.
촐랑대며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대 품으로 달려가지만 앵돌아진 등줄기를 타고 미끄러지는 내 마음……. 그대의 침묵이 꿈틀대는 수평선을 물들이며 여린 내 혀 빼어물고 서러운 노울이 된다 해도, 설풋설풋 물기 묻은 선홍빛 노을이 된다 해도
먼 언덕
고요히 서 있는
왕자같은 은사시나무.
* 길고 긴 그림자가 있었다 - 현희
1
나와 네가 있었고
우리 사이 길고 긴 그림자가 있었고
… 그리곤 언제나 깔깔거리며 웃는 바다가 있었다.
2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라는 네 말이, 깊은 바다 수초들의 말갛고 유연한 흔들림까지 되비치던 네 말이, 그 부드러움을 타고 흘러나오는 미세한 떨림까지 전해주던 네 말이,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비늘을 털어내고 역겨운 비린내를 풍길 때,
끝이 없어
현기증나던 그리움은
쓰라린 소금기둥이 되고
그르렁거리는 슬픔
우리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그대여, 이제 눈부신 이별을 시작할까요.
3
그대와 나 사이 강을 하나 만들어 두고
실오라기마저 가라앉히는 슬픔을 하나 만들어 두고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길고 긴 어둠을 하나 만들어 두고
말할 수 없이 가벼운 사랑 아- 아-
나는 강물 위를 걷고 있다.
들끓는 침묵 속에서 아- 아- 아- 아-
갈대들은 하이얗게 머리를 풀고
그 위를 지나가는 바람은 위태롭게 미끄러진다.
아-아----아- 아- 아- 아 ---- 아- 아- 아--- 아---
그르렁거리는 천둥과 번개는 카랑카랑한 슬픔을 살라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빙글빙글 하늘로 되돌아가지만
갈대들의 격렬한 몸부림은 멈추지 않는다.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가슴 속 미쳐 날뛰는 파도. 그 푸른 멍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청둥오리 떼,
말할 수 없이 가벼워진 나는
요란한 침묵 속에서 아무런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으며
아무런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생각조차 잊은 듯
너무도 가벼운 아- 아- 아- 아- 먼지처럼 가벼운 사랑이여.
급격히 무너지는 갈대숲과 기울어지는 허공 사이에서
너무도 무거운 아- 아- 아- 아-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이별의 슬픔이여.
그러나 가능한 사뿐사뿐 아- 아- 아- 아-
강물 위를 걷는다.
4
새들은 날아가면서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 날개짓 소리가 너무 커
그 그림자가 너무 길어
애닯구나…….
5
<죽일 것은 죽이시옵고, 살릴 것은 살리옵소서.>
* 길 없는 길의 노래 - 현희
어둠 속에서 바다가 뒤척인다.
달빛 아래 수평선은 끊임없이 바다에 잠긴다.
밤이면 하릴없이 이마에 뿔이 돋아
울컥울컥 치솟아오르는 뜨거운 뿔이 돋아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바다는 있는 거고,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바다는 없는 거라 노래 불렀네.
눈을 뜨면 내 몸은 사방 한 치의 콘크리트 위에 누워 있지만
마음은 거리에서 거리로,
꽃피는 봄에서 꽃지는 봄으로
석유 냄새나는 활자와 헤어린스의 레몬향 사이를 헤치며
길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면 그게 길이라고
길 없는 길 위에서 노래를 불렀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불러도 못 다할 노래를 불렀네.
벽에, 신문지에, 방바닥에, 스탠드에 내 얼굴을 그려 넣으며,
유리병 속에 갇힌 뻐꾸기 울음소리를 꺼내려 애쓰며
내일 연주될 악보 위에서 웅크린 채 잠이 들었네.
어둠 속에서 바다가 뒤척인다.
달빛 아래 수평선은 끊임없이 바다에 잠기고.
그래도 나는 여전히 노래를 불렀네.
* 그녀는 지금 외출중(外出中) - 현희
나는 외출중(外出中). 어둠에 등을 기대고 소설을 읽는다. 나는 이미 외출을 시작했다. 낮동안 잠만 자던 나는 멀리 숲 근처 전신주에 걸린 초생달을 본다. 나는 지금 외출중. 공원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 들고양이와 눈싸움을 한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깔리는 어스름은 나의 눈동자. 고양이의 불타는 눈 속에 내가 들어 있다. 나는 외출중. 30초 간격으로 불어대는 바람은 고양이 눈 속에 들어있는 나를 지워 버리고. 바람은 내가 좋아하는 안개 낀 밤의 가로등 불빛이다. 나는 지금 외출중. 언덕 아래로 마구 달려간다. 그 뒤를 쫓아 흩어지는 무수한 나의 그림자.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두통주의보(頭痛注意報). 나는 지금 외출중. 흐르는 물줄기는 모여서 바다로 가나. 흐르는 나는 모여서 바다로 가나. 흐르는 안개는 모여서 바다로 가나. 나는 지금 외출중.
* 강 왼쪽 강 오른쪽 - 현희
그는 강 왼쪽에 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고 나는 강 오른쪽에 있다. 햇살은 푸르고 하늘은 눈부시고 그의 오른발이 강물 속에 있다.
눈부신
햇살이 건너오고
나의 왼발이 강물 속에 있다. 왼발을 보며 그가 웃는다. 물결은 떨리는 그의 웃음을 밀어오고. 나의 왼발은 떨리는 그의 시선을 비끼며 마구 달아난다. 빠알갛게 물드는 나의 왼발이 떨리어 온다. 오른발을 향하여 내가 웃는다.
그냥
그렇게
강물은 흘러간다. 나의 왼발과 그의 오른발은 흘러간다. 오른발을 느끼며 내가 운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고 왼발을 느끼며 그가 운다.
햇살은
눈부시게
푸르러가고
그의 오른발이 강물 속에 있다. 눈부신 하늘은 강물 속에 내려와 있고 나의 왼발이 강물 속에 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고 왼발을 보며 그가 웃는다. 햇살은 푸르고 하늘은 눈부시고 오른발을 보며 내가 웃는다.
* 감청색 바다에 관하여 - 현희
술잔 속 짙게 가라앉은 감청색 바다
감청색 바다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빗줄기
감청색 바다로 기어드는 빗줄기 사이 뿌우옇게 부유하는 해무
감청색 바다는 정말 있는 걸까. 창밖에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감청색 바다가 존재함을 믿어야 할까. 내일쯤 햇살 속에서 찬란
히 빛날 순은의 바다를 나는 감청색 바다라고 불러야 할까.
그대여, 슬픈 클라리넷 음률로 내 마음 고요히 파고드는 그대
여,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는 그대여, 그때마다 빛깔이 달라지
는 말이여,그러나 믿고 싶어 감았던 눈을 뜨면 휘파람새가 되어
날아가는 그대여, 어지러운 내 파장 속에서 보이다 말다 하는
그대여, 까닭 모를 불안을 느끼며 감청색 바다로 흘끔흘끔 시선
을 돌리는 그대여,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 못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의 고요함만 못하다는데. 아,
참으로 믿고 싶은 그대여.
술잔 속 짙게 가라앉은 감청색 바다.
바다는 비를 부르고, 안개를 부르고, 바다 밑 천년 만년 두텁
게 가라앉은 뜨거운 용암을 부르고, 동굴, 동굴을 뚫고 아니 가
슴과 목구멍을 뚫고 울컥 솟아오르는 뜨거운 용암.
죽음은 받침도 없이 놓여진 술잔…감청색 바다는 뿌우연 해무
에 휩싸이고 있다.
* 사모곡 1 - 현희
1
달력의 숫자 위에는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새털구름 한 조각을 몸에 두
르고 너무나 가벼워 허공에서 기우뚱거리며. 달력은 언제나 날아갈 듯 위
태위태하였으나, 중환자실에는 열린 문門이 없었다.
2
어머니가 도마질을 하고 있다.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
부엌에 들어서는 순간
죽은 어머니의 환영은 사라지고
손에 든 유리컵이 떨어진다.
깨어진 유리컵의 파편 속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잠하는 어머니
부엌 바닥에는 몸서리치도록 고운 노을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3
앙상한 철근과 쓰다 남은 목재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무대 한가
운데, 어머니는 대들보에 못 박혀 있다. 어머니, 더 이상 예수님의 흉내는
내지 마세요. 손바닥에 박힌 못은 매일 빼내야 해요. 그녀의 손바닥에 고인
핏물에서 나는 물장구를 친다. 저녁이 되면 그녀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뜯
어 우리를 먹인다. 우물우물 씹어 그녀를 다 먹어치우는 걸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 내 콧잔등 위에 앉아 있는 하느님,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
가 없어졌으니.... 박수라도 열심히 치셔야 할 거예요. 무대는 대들보에 못
박힌 세상의 어머니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새털구름 위로 낙엽이 쌓이
고, 녹슨 못들이 떨어져 쌓이고, 객석에는 아무도 없다. 어머니, 텅 빈 객석
을 바라보는 내 손바닥에서도 못이 자라고 있네요. 비틀비틀 흔들리며 털
썩 주저앉는 객석....
4
희뿌연 아침, 태양은 마르고 앙상한 손으로 나를 깨운다. 이젠 정말이지
살고 싶다구....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아침.
태양이 뜨는 이 세상엔 아무도 없구나.
오늘은 또 누구와 숨바꼭질을 할까.
* 미세한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 현희
나는 장미꽃을 건네주던
그대 모습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순간 내 가슴을 빠르게 스쳐간 불꽃에 대해서도
불꽃 속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흥분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그의 손톱 밑에 눌어붙은 약간 거무스름한 때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지금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혹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유를 따르는 평범한 순간도
현미경으로 무한히 확대하여 살펴보면
눈부시게 하이얀 왕관이 솟아올랐다 찬연히 사라지고
싱크대로 뚝-뚝- 무심히 떨어지는 수돗물은
가볍게 튕겨오르며 싱그러운 물방울 축제를 벌이고
금방 청소기가 지나간 카페트도 확대하면
무수한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활보하고 있다.
나는 지금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가 건네는 장미꽃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
그 불꽃을 뚫고 끊임없이 기어나오는
무수한 벌레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바라보는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그도,
혹은 또 다른 그가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나에 대해서도.
나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
* 시를 읽는 즐거움-낯설게 만들기와 독자 끌어당기기 - 현희
1. 무심한 관조와 독자의 빈틈 메우기
뜰의 때죽나무에 날아와 있는 새와 지금 날아온 새 사이, 새가 앉은 가지와 앉지 않은 가지 사이, 시든 잎이 붙은 가지와 붙지 않은 가지 사이, 새가 날아간 순간과 날아가지 않은 순간 사이, 몇 송이 눈이 비스듬히 날아내린 순간과 멈춘 사이, 지붕 위와 지붕 밑의 사이, 벽의 앞면과 뒷면 사이, 유리창의 안쪽 면과 바깥 면 사이, 마른 잔디와 마른 잔디를 파고 앉은 돌멩이 사이, 파고 앉은 돌멩이와 들린 돌멩이 사이, 대문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 울타리와 허공 사이,
허공 한 구석
강아지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사이 -오규원, <뜰과 귀> 전문(현대문학 2001. 1월호)
오규원의 <뜰과 귀>는 인간적인 시점이 제거된 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카메라의 렌즈처럼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사물의 세계만을 응시한다. 과거와 현재, 있음과 없음, 위와 아래, 안쪽 면과 바깥쪽 면 등 서로 대비되고 대립되는 뜰의 배경을 거쳐 그는 점차 한 대상을 클로우즈업 하여 강아지의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사이로 시선을 집중시켜 나간다. 하지만 그 뿐이다.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은 축적되지 못하고 허공에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아무런 의미의 응집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화자의 시선을 거쳐 지나가 버린 이미지들을 붙잡아 고정된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사물들은 단순히 제시된 게 아니라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것이며, 작가가 숨겨놓은 수수께끼의 구조를 잘 파악해야 온전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풍경을 통하여 어떠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독자들과 한 판 갈등을 벌인다. <사이>를 사이에 두고 대비되는, 카메라 렌즈와 같은 화자의 시선에 붙들려 온 피사체들의 의미는 작가의 손을 떠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구성될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거대하고 거창한 것을 보는 시선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지나쳐 버리기 쉽고 하찮은 것에 관심을 갖는 시선을 포착하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여백과 빈틈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며 허공을 응시하는 힘을 파악하게 될 때 독자는 이 시의 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뜰의 때죽나무에 날아와 있는 새와 지금 날아온 새', '새가 날아간 순간과 날아가지 않는 순간 사이'처럼 동전의 양면과 같이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응시, '새가 앉은 가지와 앉지 않은 가지 사이' 나 '지붕 위/지붕 밑, 벽의 앞면/ 벽의 뒷면, 대문의 안쪽/바깥쪽 사이' 등 공간과 공간 사이 규정지을 수 없는 더 미세한 공간에 대한 관조,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미세한 공간들을 감싸고 있는 거대 공간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허공', 허공에 가득한 허무. 그 허무를 외면하여 살짝 시치미떼며 바라보는 '강아지의 오른쪽 위와 왼쪽 귀 사이'의 여백.
독자들은 뜰과 나, 혹은 우주와 내가 순간적인 찰나처럼 조우하는 순간의 무심한 관조적 시선을 파악하고 난 후에야 의미 없는 텅 빈 이미지들 사이에 숨겨진 빈틈의 의미를 나름대로 조합해 나간다. 이 때 뜰은 우주와 삶의 이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재현되는 공간이고 작가의 무심한 사유가 조용히 뛰노는 공간이면서 독자가 텅 빈 이미지를 조합하여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2. 게걸스런 안경-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단절과 창조성
안경 속에 입이 있다
안경은 무엇이든 다 삼켜 버린다
신문을 삼켜 버린 안경과
지도를 다 삼켜 버린 안경
은행을 한눈에 먹어버린 안경
안경이 나에게 저리 가라고 말한다
엉클 샘이 안경을 끼었던가?
자유의 여신과 엉클 샘이 만나
결혼을 아니 불륜을 하여
사방에 이상한 안경들이 번성하고 있다
입 속에 눈동자가 들어 있고
눈동자 속에
녹슨 두개골이 들어있고
두개골 속에 트렁크가 들어있고
트렁크 속에 노예 매춘 소녀의 일기장이 들어있고
일기장을 쓰던 연필, 부러진 노래도 들어있다
누가 이 노래를 살려낼 수 있을까
그런 질문만큼 우스운 것이 있을까
안경 속에 입이 있다
안경은 무엇이든 다 삼켜 버린다
신문을 삼켜버린 안경과
지도를 다 삼켜 버린 안경
책과 은행을 한눈에 다 먹어치운 안경
안경이 저리 가있으라고 나를 규정한다
엉클 샘이 안경을 끼었던가?
자유의 여신과 엉클 샘이 만나
불륜을 아니 결혼을 하여
사방에 이상한, 엽기의 안경들이 번성하고 있다 -김승희, <국제 시장에서> 전문(현대시학 2001. 1월호)
김승희 시의 '안경'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안경이 갖고 있는 일상적인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낯설게 형상화된 비일상적인 의미만이 무성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경을 소재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안경의 의미를 추적해야 하는 긴장감. 하지만 안경의 의미를 묻기 전에 우리는 낯선 비유들을 통해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안경 속에 입이 있'고, 그 입은 '신문, 지도, 책과 은행' 따위를 삼켜버리고, '나에게 저리가라고' 명령하고, '나를 규정' 한다. 입이 신문, 지도, 책, 은행 등을 삼킨다는 사이비진술은 낯설게 보일 수도 있지만, 입은 곧바로 먹는 행위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리 새로운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입이 안경 속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시 '입 속에 눈동자가 들어' 있고 그 속에 '녹슨 두개골'이 있고, 두개골 속에 '트렁크', 트렁크 속에 '노예 매춘 소녀의 일기장'이 들어 있다. 안경은 일상적인 어법에서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행복한 결합을 깨뜨리면서 낯설은 은유의 장치 속으로 우리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경'은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인 은유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원관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면 의미는 어느 정도 드러난다. <국제시장에서>라는 전제를 통해 우리는 안경과 시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문명이 만들어낸 안경은 이익을 낚아채는 탐욕스런 눈초리로서, 게걸스러운 입을 가지고 있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 국제시장에서는 그러한 탐욕만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고 억압하며, 판단력 마비와 도덕적 불감증을 초래한다. 자유시장 경제에서도 현대판 노예 제도와 매춘이 성행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비참한 매춘 소녀들의 진실은 트렁크 속에 완전히 감춰져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녹슬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안경은 봐야 할 진실은 외면하고, 탐욕만 챙기는 문명과 산업사회,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비정하고 이기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은유에 해당한다. '엉클 샘과 자유의 여신' 사이의 불륜, 혹은 결혼에 의해 탄생된 안경은 더욱 번성하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 합법을 가장하여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야유와 비판이다. 이 시가 얼핏 '자유시장경쟁의 원리에 의해 국제시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행태'의 고발이라는 주제를 내포하면서도 진부한 관념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독자의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반응과 인식을 탈피하기 위하여 '안경'이라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차단하고 사물을 낯설게 만들기 위한 여러 겹의 장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부산 토곡 배산(盃山) 끝자락에 있다. 처녀를 짝사랑한 못생긴 총각의 애틋한 사연이 있는 곳이다. -송진, <거울바위와곰보각시> 전문(현대시 2001. 1월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한 특징으로 탈쟝르화를 들 수 있다. 시는 산문적인 요소를 끌어들이고, 산문은 시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서로 장르간의 엄격한 벽을 허물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 찾기는 지속적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스토리성을 가미한다. 소설적인 사건 설정이 그것이다. 거울바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곰보각시는 '붉은 신호등, 불곰, 포크레인, 레미콘' 등을 만난다. 그것들은 '젖가슴과 허벅지를 파먹고, 시멘트와 섞고, 수갑과 재갈이 물려서' 그녀를 '얼굴 없는 얼굴'로 만드는 폭력과 시련을 상징하는 동일한 모티브에 해당한다. 서정시가 집중된 순간에 넘쳐흐르는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준다면, 사랑을 찾기까지의 시행착오적인 헤매임과 노력의 과정을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나열하는 것은 분명 산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 형태도 연과 행을 구분하지 않는 산문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는 빠르게 읽힌다.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기 위하여 띄어쓰기도 무시하고 마침표도 찍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시의 핵심 요소인 운율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붉은신호등이다'라는 문장의 반복, '거울바위가어디' 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계속적인 변주와 곰보각시를 방해하는 훼방꾼들의 등장이라는 동일한 모티브의 반복되면서 이 시는 리듬을 형성하게 된다. 루이스에 의하면, 이러한 리듬은 독자의 의식을 마비시켜 의미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작가의 의도나 의미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구실을 한다. 이와 같은 시적인 요소와 산문적인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숨가쁘게 진정한 '사랑 찾기'에 몰두하는 곰보각시의 간절한 정서와 훼방꾼 모티브의 등장을 통한 시련과 계속적으로 '사랑 찾기'가 지연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이 밖에도 직진을 방해하는 '붉은 신호등'을 기점으로 삼아 붉은 등-붉은 피-불곰-젖가슴 파먹음-포크레인……등으로 이어지는 연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이 시를 읽는 즐거움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현대시> 2001년 2월호)
첫댓글 달력의 숫자 위에는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새털구름 한조각을 몸에 두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