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성 요한 신부
연중 제31주일
신명기 6,2-6 히브리서 7,23-28 마르코 12,28ㄱㄷ-34
묵주기도의 힘과 첫째 계명
10월 묵주기도 성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시작된 후 매일 아침 등산을 다녔습니다.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 1시간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지향은 ‘본당 교우들의 건강과 일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면 몸과 마음이 정화되고,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는 에너지를 얻어서 좋습니다.
‘묵주기도’의 정식 명칭은 ‘Rosarium Virginis Mariae(로사리움 비르지니스 마리애)’이며,
이를 번역하면 ‘동정 마리아의 장미 꽃다발’입니다.
‘인체의 호흡’에 비유될 만큼 신앙생활에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묵주기도는 구원 역사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세상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당부하셨듯이,
우리도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쳐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째 계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은 헌법의 역할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구체적인 규정이 생겼는데,
총613개나 되었습니다.
율법 규정이 많다 보니, 율법 정신을 살기보다 율법 조문을 지키는 데 급급했고,
허례허식과 형식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고달픈 삶을 얽어매는 귀찮은 의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매섭게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의식 있는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십계명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12장 29절-31절)
이것은 613개의 율법 규정과 십계명에 부담스러워하던 사람들에게 명쾌한 가르침을 주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장 12절)고 하신 예수님의 당부처럼,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아멘.
대구대교구 정재성 요한 신부
2021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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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요셉 신부
신명기 6,2-6 히브리서 7,23-28 마르코 12,28ㄱㄷ-34
공짜로는 다다를 수 없는 하느님 나라
담벼락 너머 감나무가 가을과 함께 노랗게 몸치장을 하며 익어갑니다 .
바야흐로 땅 은 진수성찬(珍羞盛饌)의 시절을 맞습니다. 놀랍습니다. 온 우주가 힘들여 키우는 오곡백과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쌀 한 톨에도 우주가 들어있고, 전우익 선생은 수풀 속에서 익어가는
누런 호박 하나도 결코 공짜로 굴러오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눈썰미 좋은 시인은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가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장석주 ‘대추 한 알’)며
대추 한 알조차도 허투루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모세는
“하느님 백성은들어라. 기억하라!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래야 살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에는 천지간에 널린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오직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제1독서 신명기 6장 2절-6절)
예수님은 법을 팔아 권력을 사고 떵떵거리며 살던 율법 학자들을 이렇게 견책합니다.
“한 분이신 주님을 목숨과 정신, 힘을 다해 사랑하되 내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라!
그것이 어떤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마르코복음 12장 28절-34절)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라던 모세와 히브리 사람들도 세월과 함께 떠나갔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떤 희생 제물이나 번제물보다 낫다고 대답했던 슬기로 운 율법학자도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랑이 부족하고 노력없이 댓가를 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법, 편법, 탈법의 카르텔이 정의와 공정의 가면을 쓰고 노력 없이 돈과 권력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해서 놀랍지도 않습니다.
수고, 희생, 연민, 환대, 사랑의 결실을 말하는 것은 강 건너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며칠 전 스님 한 분이 잘 익은 알밤과 함께 <관,도일체고위(觀, 度一切苦危)> 다섯 글자를 적어
이렇게 멋진 해설을 덧붙여 보내주셨습니다.
“모든 종교의 기본입장은 고통의 세상을 벗어나서 완전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여기서 관(觀)은 예수님을 만나 뵙는 것, 예수님의 사랑과 일치되는 것이고
불교적으론 선악 시비 분별을 완전히 극복한 경지로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예수님을 만나 뵙는 길밖에 없습니다.
”코로나19라는 불청객과 더불어 산 시간이 2년이 되어갑니다.
몸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다쳐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려운 시절 안녕하시기를,
오직 하느님과 이웃을 힘내어 사랑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안동교구 김영식 요셉 신부
2021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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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요셉 신부
신명기 6,2-6 히브리서 7,23-28 마르코 12,28ㄱㄷ-34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을 규정하고 얽매는 규정들은 많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첫째가는 계명은 어느 것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구약에서 우리가 더 자주 만나는 것은 사랑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많은 구절이 두려운 하느님을 말하고 인간이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표현도 많습니다.
하느님은 절대 군주이고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의 노예와 같이 표현된 부분도 많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인간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함이 강조됩니다.
신명기에 와서 하느님의 사랑이 이야기됩니다.
모세오경 중에서 유일하게 하느님 사랑의 중요성을 언급합니다.
십계명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의 이름은 존중되어야 하며,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결론이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의 모든 의무를 한가지로 요약합니다.
제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 존경, 섬김, 율법, 우월감과는 다릅니다.
흔히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 빠진다는 것은 뭘 하는 게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서 숨 쉬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속성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숨 쉬고,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며,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에겐 하느님의 눈이 열려 모든 것을 하느님처럼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연을,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려면 그 출발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해야 ‘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하고 느낄수 있고
나의 사랑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으니까요.
부산교구 김태환 요셉 신부
2021년 10월 31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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