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의 엿
“황홍색이 되면, 바로 밀가루를 상 위에 깔고 그 위에 쏟아붓는다. 굳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흰색이 될 때까지 잡아당긴다.”1)
이 글은 김유(金綏, 1491~1555)가 편찬한 《수운잡방(需雲雜方)》 중 상편에 해당하는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에 나온다. 글의 제목은 ‘이당(飴餹)’, 곧 ‘엿’이다. 요사이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전래 쌀엿을 만드는 곳에 가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다만,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황홍색, 즉 호박색(琥珀色, 진한 노란빛을 띤 주황색) 엿 덩어리의 양 끝을 쥐고서 잡아당겼다가 꼰 다음 다시 합치기를 반복하면 속에 구멍이 송송 뚫린 흰색의 엿이 완성된다. 간혹 엿 덩어리가 빨리 굳지 않도록 바닥에 끓인 물이 담긴 솥을 놓기도 한다. 그러면 솥의 수증기가 올라와서 잡아당기는 엿이 바로 굳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오천(烏川, 한글로 외내, 지금은 안동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마을에 살았던 선비 김유가 써놓은 당시의 엿 만드는 방법은 요즈음의 창평 쌀엿과 마찬가지로 주재료가 쌀이다. 그런데 김유는 그 쌀을 멥쌀이라고 하지 않고 ‘중미(中米)’라고 적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도정 정도에 따라 쌀을 백미(白米) · 중미 · 조미(糙米)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백미는 겉겨〔왕겨〕는 물론 속겨〔쌀겨〕까지 완전히 제거한 쌀이다. 이에 비해 조미는 겉겨만 벗겨내고 속겨를 남겨둔 쌀로 오늘날의 현미(玄米, 현미는 일본에서 들어온 용어이고, 우리말로는 ‘매조미쌀’이라고 한다)이다. 중미는 백미와 조미의 중간 정도 속겨를 벗겨낸 쌀을 일컫는다. 김유는 엿 만드는 방법의 시작을 “중미 1말을 깨끗이 씻어 오랫동안 불을 때서 푹 익혀 밥을 짓고, 뜨거울 때 항아리에 담는다. 그런 다음 즉시 그 솥에 깨끗한 물 10사발을 넣고 팔팔 끓여서 밥에 붓는다”2)
이렇게 하면 효소를 더했을 때 고두밥의 녹말 성분이 쉽게 당화(糖化)된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녹말을 당화하는 데 사용한 효소는 엿기름이다. 김유는 가을보리로 엿기름을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한문으로 쓰인 대부분의 요리책에서는 밀로 엿기름을 만드는 중국식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다만, 6세기 전반 북위(北魏)의 북양태수(北陽太守)였던 가사협(賈思勰)이 편찬한 《제민요술(齊民要術)》을 보면 밀로 엿기름을 내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엿이 호박색을 띠게 하려면 반드시 보리[大麥]로 엿기름을 만들어야 한다”3)4)
이런 사실은 19세기 중반 경상도 상주(尙州)의 한 집안에서 쓴 한글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 · 음식방문(飮食方文)》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책의 ‘엿기름 기르는 법’에서도 보리로 만든 엿기름 만드는 법만 적어놓았다. 비록 세월의 차이는 300년이 가까이 되지만, 보리 엿기름 만드는 방법에는 큰 변화가 없지 않았을까? 겉보리를 물에 불려서 씻고 시루에 안치기를 반복하면 보리에서 열이 생겨 싹이 트기 시작한다. 알맞게 난 싹에 효소가 들어 있다. 가을보리로 만든다고 김유가 밝혔듯이, 여름에 추수한 보리로 가을에 만들면 기온이 알맞아서 품질 좋은 엿기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김유는 엿기름을 쌀밥에 넣고 삭히는 과정을 설명한다.
“가을보리로 만든 엿기름 1되를 곱게 가루 내어 냉수와 섞어 (밥이 담긴) 항아리에 붓고, 나무로 고루 휘젓는다. (항아리를) 온돌에 놓고 유의(襦衣, 가운데 솜을 넣고 안팎으로 생무명을 바쳐 넣은 겨울옷)로 두껍게 싼다. 두 번 밥 지을 시간(한나절)을 기다렸다가 그 맛을 보아 단맛이면 잘된 것이다. 조금 시큼하면 잘못된 것이니, 이는 너무 오래 싸두었기 때문이다.”5)
요사이 창평 지역에서 사용하는 방법도 김유가 소개한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끓여서 60℃로 식힌 물, 엿기름물, 그리고 쪄낸 밥을 함께 항아리에 넣고 섞은 다음, 그 항아리를 뜨거운 방에 놓고 담요로 덮어 10시간 정도 삭힌다.6)
이제 엿 만들기의 마지막 작업이다. “모름지기 적당한 크기의 베보자기로 그 즙을 짜서 솥에 붓고, 은근한 불로 졸이면서 자주 저어준다. 젓지 않으면 솥 밑바닥에 눌어붙는다.”7)
김유의 엿 만드는 방법은 1970년대 말 창평에서 전문가가 조사하여 적은 방법만큼이나 구체적이다. 김유는 이 엿 만드는 방법을 두고 “지금 엿집에서 사용하는 좋은 방법이다”8)
이 점은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한문으로 적어둔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엿 만드는 방법과 비교해도 알 수 있다. 홍만선은 그의 책에서 두 가지의 엿 만드는 방법을 적어두었다. 하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나오는 약이 되는 찹쌀엿9)이고, 다른 하나는 ‘속방(俗方)’, 즉 민간의 방법이다. 그중 민간의 방법은 이러하다.
“멥쌀로 밥을 지어 그대로 솥에 두고 뜨거운 김이 올라올 때 엿기름가루와 따뜻한 물을 넣는다. (쌀 1말에 엿기름 1되 3홉과 물 2병쯤을 탄다.) 다시 솥뚜껑을 덮고, 솥 밑에 겻불을 때서 식지 않을 정도로 반일쯤 두면 밥이 삭아서 물이 되어 밥알찌꺼기〔米皮〕만 남게 된다. 이때 베로 짜서 쌀물〔米水〕만 솥 안에 붓고, 다시 졸여 엿을 곤다. 졸일 때 시루를 솥 위에 엎어놓으면 끓어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10)
김유의 서술과 비교하면 엿기름가루와 따뜻한 물의 배합 비율을 써 놓은 것은 장점이지만 엿을 졸이는 시간이나 잡아당기는 과정 등 후반부 작업에 해당하는 내용은 《산림경제》에 나오지 않는다. 김유의 서술이 그만큼 체계적이다.
엿 이외에도 《수운잡방》의 〈탁청공유묵〉에는 총 86가지의 요리법이 적혀 있다. 그 차례는 먼저 술 빚는 법, 그 다음에 식초 제조법, 채소절임 음식인 침채(沈菜)와 저(菹), 동아정과〔冬瓜正果〕 · 두부 · 타락(駝酪) · 엿 만드는 법, 몇 가지의 장류, 더덕좌반〔山蔘佐飯〕과 육면(肉麵, 국수처럼 길게 쓴 쇠고기에 밀가루를 묻혀 된장국에서 익힌 음식) 같은 음식, 그리고 마지막에 간장〔水醬〕 제조법이다.
그런데 채소절임 음식의 중간에 생가지 · 오이 · 생강 · 배추 · 참외 · 연근의 파종법 혹은 저장법이 적혀 있어 그 순서가 약간 뜬금없어 보인다. 조선 후기의 유서(類書)에서는 주로 ‘치농(治農)’에서 이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또 각종 장류 다음에 더덕좌반과 육면을, 마지막에 간장을 배치시킨 목차도 조선 후기의 요리책과 달라서 얼핏 맥락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세조 때의 어의(御醫) 전순의(全楯義)가 편찬한 한문 필사 요리책 《산가요록(山家要錄)》(1450년경)도 〈탁청공유묵〉의 목차와 비슷하다. 술을 으뜸에 두고, 다음에 채소절임 음식과 채소 농사법, 그리고 음식과 장류를 서술하는 방식은 조선 초기 요리책 목차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것 같다.
사실 《수운잡방》은 김유와 그의 손자 김령(金玲, 1577~1641)이 각기 쓴 두 책을 묶은 것이다. 김유가 쓴 부분의 제일 앞에는 ‘탁청공유묵’, 그리고 김령의 글 앞부분에는 ‘계암선조유묵(溪巖先祖遺墨)’이라는 간지가 들어 있다. 《수운잡방》이란 책 제목 중의 ‘수운’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다섯 번째 괘인 ‘수괘(需卦)’에서 따온 것이다. 곧 “수(需)는 구름이 하늘에 오르는 격이니, 군자가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것이다.”11)
‘탁청공유묵’, 즉 김유의 《수운잡방》에서 가장 먼저 삼해주(三亥酒)를 시작으로 41가지의 술 빚는 법이 나온다. 이들 술은 다음의 몇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12) 일일주(一日酒) · 삼일주(三日酒) · 하일청주(夏日淸酒) · 보경가주(寶卿家酒, 하일청주의 일종)와 이화주(梨花酒) 2가지가 한 번만 빚는 단양주(單釀酒)에 속한다. 이에 비해 사오주(四午酒)를 비롯하여 21가지의 술은 곡물에 누룩과 물을 넣어 빚은 밑술에 다시 곡물 익힌 것 또는 누룩과 물을 넣은 이양주(二釀酒)이다. 또 삼해주(三亥酒) · 벽향주(碧香酒) · 소곡주(小麯酒) · 별주(別酒) · 두강주(杜康酒) · 삼오주(三午酒) 등 9가지 술은 밑술에 두 차례 덧술을 한 삼양주(三釀酒)이다. 또 약재를 넣어 약용으로 만든 청주로는 백자주(柏子酒, 잣술) · 호도주(胡桃酒, 호두술) · 도인주(桃仁酒, 복숭아씨술) · 백출주(白朮酒, 삽주뿌리술) 등이 있다. 그리고 진맥소주(眞麥燒酒, 밀소주)라는 증류주도 나온다.
그렇다면 김유는 왜 〈탁청공유묵〉의 86가지 요리법 중에서 거의 절반에 가깝게 술 빚는 법을 적어놓았을까? 그것도 제일 앞부분에 말이다. 이웃이면서 사돈이기도 했던 이황(李滉, 1501~1570)은 김유의 집 “항아리에는 맛있는 술이 넘쳐났다”13)私家)에서 맛있는 각종 술을 갖추려면 상당한 재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김유는 35세 때인 1525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것을 마지막으로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후사가 없던 고모부 김만균(金萬鈞)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부유하던 김만균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김유의 아버지 김효로(金孝虜 1454~1534)의 재산 일부에 김만균의 재산까지 상속받은 김유는 인근에서 으뜸 재력가가 되었다.14)
또 이황은 “집 옆에도 정자가 있었는데, 공이 모두 수리하여 넓혔다. 손님을 맞아 언제나 만류하여 못 가게 하면서 술을 많이 마셨고, 간혹 밤을 새웠지만 피곤한 빛이 없었다.”15)濯淸亭)’이 바로 그 정자이다. ‘탁청(濯淸)’이란 말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굴원은 초나라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추방을 당해 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한 어부가 혼자만 깨끗하면 된다는 굴원을 비판하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관(冠)의 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떠나갔다.
이황은 김유의 인물됨을 평하면서 “이 고을 지나는 지체 높은 이들 찾아와 실컷 즐기기 예사고” 또한 “비록 비천한 이라 하여도 반드시 제대로 갖추어 대접하네”16)
《수운잡방》의 후편을 편찬한 김령은 김유의 셋째 아들인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의 아들이다. 김령은 나이 17세에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注書)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말년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보고 낙향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서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을 도왔다. 인조로부터 여러 차례 벼슬 권유를 받았지만, 문밖출입마저 삼갔다.
김령의 《수운잡방》에도 처음에 18가지의 술 빚는 법과 17가지의 음식 요리법이 나온다. 목차의 순서는 할아버지의 것을 모방했지만 요리법은 같지 않다. 술의 이름 중에 ‘삼오주’는 김유의 《수운잡방》에도 나오지만, 빚는 법이 다르다. 또 전약(煎藥) · 생강정과 · 습면(濕麵, 녹두국수) · 탕(湯) · 채소절임 · 누룩 · 전곽(煎藿, 잣가루 + 식초 + 다시마) · 다식 등의 음식 역시 김유의 《수운잡방》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특히 ‘탕’ 계통의 음식은 김령의 《수운잡방》이 지닌 특징이다.
김령의 《수운잡방》에 나오는 ‘탕’은 모두 6가지이다. 즉, 서여탕(薯蕷湯, 고기 + 마 + 계란) · 전어탕(煎魚湯, 작은 민물생선 참기름볶음 + 마 + 계란) · 분탕(粉湯, 고기 + 녹두묵) · 삼하탕(三下湯, 세 가지 완자탕) · 황탕(黃湯, 노랗게 물들인 떡국) · 삼색어아탕(三色魚兒湯, 은어 + 숭어 + 새우)이 그것이다. 보통 ‘탕’은 국에 비해 건더기가 많고 국물이 적은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가운데 분탕, 즉 묵국 요리법을 한번 보자. 분탕 요리법의 본문은 ‘육수’ 만드는 법과 ‘건더기’ 만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육수’ 만드는 법이다.17) “참기름 1되와 파 흰 부분 썬 것 1되를 같이 볶고, 청장(淸醬, 맑은 간장) 1사발과 물 1동이를 넣어 이 네 가지로 묽은 탕을 끓인다.” 분탕의 육수는 참기름과 파를 함께 볶아 일종의 ‘파기름’을 만든 뒤에 물 1동이를 붓고 ‘청장’ 1사발로 간을 맞추었다. 실제로 이렇게 만들어보면 매우 싱거운 ‘멀건 탕〔稀汤〕’이 된다. 그래서 김령은 “탕을 낼 때 짜고 싱거운지 간을 맞”추라고 적어두었다.
다음은 건더기 만드는 법이다.18) “고육(膏肉)을 초미(初味)처럼 썰고, 녹두묵은 긴 국수처럼 써는데, 황색 녹두묵과 백색 녹두묵 두 가지를 쓴다”고 했다. 분탕의 주재료가 되는 녹두묵은 황색과 백색 두 가지를 쓰는데, 여기서 ‘고육’이 어떤 고기인지 이 기록만 가지고는 알기 어렵다. 당시 법률에 의하면, 관청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소를 도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돼지고기를 썼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 허가받지 않은 쇠고기라서 그냥 ‘고육’이라 적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 “생오이 · 미나리 · 도라지는 1치 길이로 채 썰어서 녹두가루를 입혀 끓는 물에 데쳐 낸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쇠고기 · 황색녹두묵 · 백색녹두묵 · 오이 · 미나리 · 도라지 등의 건더기 재료가 마련된 것이다. 이 재료들을 탕에 넣어 끓여 내는데, 먹을 때 “흰 파를 잘게 썰어 넣어”라고 했다. 덧붙여 김령은 쇠고기를 많이 넣을수록 맛이 좋아진다고 했다. 상상해보라. 녹두가루가 입혀졌지만 길게 채 썬 오이 · 미나리 · 도라지와 황백색의 녹두묵, 그리고 길게 채 썬 쇠고기가 가득한 묽은 탕. 비록 요사이의 ‘샤브샤브’처럼 국물이 많지는 않지만, 건더기를 건져 먹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앞서 설명했던 세조 때의 《산가요록》에는 대구어피탕(大口魚皮湯, 대구껍질 + 도라지 + 마른새우가루 + 꿩고기 + 간장 + 식초), 장사탕(長沙湯, 냉이 + 석이 + 꿩고기 + 노루고기 + 계란 + 장국물), 진주탕(珍珠湯, 꿩고기 + 도라지 + 노루고기 + 생선 + 계란 + 오이지 + 간장)의 3가지 탕이 나온다. 이것은 ‘육해공(陸海空)’의 식재료를 모두 넣은 ‘탕’이다. 이에 비해 김령의 ‘탕’은 ‘육해공’의 식재료 중 1가지만을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경상도의 영해현(寧海縣, 지금의 경상북도 영해와 영양군 석보면)에 살았던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은 《음식디미방》에서 족탕 · 말린고기탕 · 쑥탕 · 천어순어탕 · 붕어순갱 · 와각탕 · 난탕 · 계란탕 · 양숙편 · 전복탕 · 자라갱의 11가지 ‘탕’ 계통 음식의 요리법을 적어놓았다. 18세기 이후의 한문 혹은 한글 요리책에는 ‘탕’ 요리법이 더욱 많이 나온다. 그렇다고 왜 《수운잡방》 중 김유가 쓴 부분에서 ‘탕’ 계통의 요리법이 적혀 있지 않은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시간이 갈수록 각종 ‘탕’ 요리법이 증가한 것은 분명하다.
김령의 《수운잡방》이 지닌 또 다른 특징은 ‘전약’ 제조법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전약은 쫄깃하고 단맛이 나는 정과(正果)의 한 종류로, 왕실의 고급 음식이자 조선 후기에 베이징에 가는 사신들이 선물로 챙겨 갈 정도로 중국인들에게까지 인기가 높았던 음식이다. 김령은 이 전약 만드는 법을 “청밀(꿀)과 아교(阿膠) 각각 3사발, 대추 1사발, 후추와 정향(丁香) 1냥 반, 말린 생강 5냥, 계피 3냥을 법도에 맞게 섞어 졸인다”19)
허준(許浚, 1539~1615)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전약 제조법20)
다시 김유가 쓴 《수운잡방》을 보면서 한 가지 더 살펴보자. 김유의 《수운잡방》에 나오는 ‘진맥소주’의 제조법이 거의 100여 년 후에 쓰인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 ‘밀소주’라는 이름으로 그 내용이 똑같이 나온다. 다만 김유는 한문으로, 장계향은 한글로 쓴 점이 다를 뿐이다.
먼저 김유의 ‘진맥소주’ 내용을 살펴보자.
“밀 1말을 깨끗이 씻어서 푹 찌고 좋은 누룩 5되와 함께 절구에 찧어 독에 넣고 냉수 1동이를 부어서 저어준다. 5일째 되는 날 고아서 술을 모으면 4선(鐥)이 되는데, 술맛이 매우 독하다.”21)
장계향 역시 “(밀) 1말을 깨끗이 씻어 무르게 쪄 누룩 5되를 한데 섞어 찧어 냉수 1동이 부어 저어두었다가 닷새 만에 고면 4대야 나나니라”고 적어놓았다. 두 요리책에서 ‘밀 1말 + 누룩 5되 + 냉수 1동이’의 배합 비율과 서술 순서가 똑같다.
장계향은 《수운잡방》의 ‘선(鐥)’을 ‘대야’라고 한글로 적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선(鐥)’이 술의 양을 재는 조선의 그릇이며 조선식 한자라고 했다.22)
과연 장계향은 《수운잡방》의 ‘진맥소주’ 요리법을 보았을까? 지금 당장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만약 장계향이 《수운잡방》을 읽었다면 ‘진맥소주’ 한 가지만 굳이 자신의 책에 옮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 가능한 가설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 조선 초의 어떤 요리책에 ‘진맥소주’ 요리법이 적혀 있었고, 김유와 장계향이 각자 읽고 옮겼을 가능성이다.
중세 유럽의 요리책은 대부분 부엌에서 요리해본 경험을 종이에 적어서 탄생한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요리책 중에는 서재에서 다른 저자의 책을 읽다가 필요한 내용을 가려서 옮겨 적어 탄생한 것이 많다. 그중 몇 가지 요리법은 부엌에서 직접 실행에 옮겨본 후에 다시 종이에 옮겨 적은 것도 있다. 앞의 《수운잡방》 엿 제조법에서 “지금 엿집에서 사용하는 좋은 방법이다”이라는 글이 나오듯이, “오천의 술 빚는 법”이라고 적은 ‘또 다른 벽향주’, 그리고 “오천가의 방법”이라고 적은 ‘고리 만드는 법’과 ‘고리초 만드는 법’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오천가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요리법을 유학자였던 김유가 직접 요리해보고 작성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김유의 부인 순천 김씨(順天金氏)가 그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이황은 순천 김씨가 “열일곱의 나이에 공에게 시집와서 집안일을 잘 다스렸고, 제사를 정성스레 받들고, 손님을 응대함에 비록 집안일이 바쁘더라도 순식간에 잘 처리하지 않음이 없었다”23)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을 위한 술과 음식의 장만은 순천 김씨의 몫이었다. 그러니 ‘오천가의 비법’은 물론이고 김유의 《수운잡방》은 오롯이 순천 김씨의 손끝에서 나온 요리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90세가 넘도록 장수한 김유의 어머니 양성 이씨(陽城李氏) 역시 《수운잡방》 편찬에 큰 역할을 했을 것 같다. 그녀는 세종 때의 역법서(曆法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에서 역법 계산을 담당했던 이순지(李純之, ?~1465)의 손녀다. 이순지와 함께 일했던 김담(金淡, 1416~1464)은 김유의 양아버지 김만균의 부친이다. 이와 같이 생활에 필요한 실용 지식에 관심이 많았던 서울의 과학자 집안과 김유 집안의 인연이 김령에게도 이어져서 대를 이은 요리책 《수운잡방》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수운잡방》은 단지 16~17세기 경상도 안동의 한 집안에서 전하던 요리법만 담긴 책이 아닐 수 있다. 혹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16세기 조선의 어떤 책에 담긴 요리법이 이 책에 담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천가의 비법’이 담긴 요리법에 더욱 눈이 간다.
김유(金綏), 《수운잡방(需雲雜方)》,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 ‘이당(飴餹)’ : 色黃紅, 則用真末布盤上, 寫於上. 待凝引之色白為限. 이 글의 《수운잡방》 번역문은 김유 지음, 김채식 옮김, 《수운잡방》, 글항아리, 2015를 참조하였다.
김유, 《수운잡방》, 〈탁청공유묵〉, ‘이당’ : 中米一斗, 浄洗爛作飯, 乘熱盛缸. 即於炊飯鼎, 浄水十鉢, 沸湯注其飯.
가사협(賈思勰), 《제민요술(齊民要術)》 권8 ‘작얼법(作糵法)’ : 欲令餳如琥珀色者, 以大麥為其糵.
서유구(徐有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조지(鼎俎志)〉 제2권, ‘취류지류(炊餾之類)’, ‘이방(飴方)’ : 飴餳用麥蘗或榖芽(案) (중략) 而東人但知用麥蘗也.
김유, 《수운잡방》, 〈탁청공유묵〉 ‘이당’ : 秋麰蘖細末一升, 冷水和之, 瀉於缸, 以木均攪之. 置温堗以 襦衣厚裹. 待二炊飯頃, 嘗其味則甘為上. 稍酸則為下, 久裹置故也.
전라남도농촌진흥원, 《향토요리모음》, 농촌진흥청농촌영양개선연수원, 1979(정보제공자: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포리 김정순). ;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 《한국의 전통향토음식7-전라남도》, 교문사, 2008, 414쪽.
김유, 《수운잡방》, 〈탁청공유묵〉, ‘이당’ : 須酌宜以布絞取汁寫鼎, 以微火煎之, 數攪之. 不攪則煎付鼎底.
김유, 《수운잡방》, 〈탁청공유묵〉, ‘이당’ : 今飴家所用良法.
홍만선(洪萬選), 《산림경제(山林經濟)》 제2권, 〈치선(治膳)〉 ‘조이당법(造飴糖法)’ : 本草曰, 諸米皆可作, 惟以糯米作者, 入藥. 以糯米煮粥, 候冷入麥芽末, 候熟取淸. 再熬如琥珀色者, 謂之膠飴, 可入藥.其牽白堅强者, 謂之餳糖, 不可入藥, 只可啖之而已.(寶鑑)
홍만선, 《산림경제》 제2권, 〈치선〉, ‘조이당법’ : 以大米炊飯, 仍置鼎內, 乘熱入麥芽末及溫水(米一斗, 約入麥芽一升三合許, 水二甁許) 還覆鼎蓋, 留糠火於鼎底, 使不至冷. 過半日後, 飯化爲水, 只有米皮. 仍以布絞, 下米水於鼎內, 再熬成糖. 熬時置甑鼎口, 以防沸溢.(俗方)
《주역(周易)》, 〈수괘(需卦)〉 : 象曰, 雲上于天, 需, 君子以飮食宴樂.
김귀영, 〈해제: 음식으로 보는 조선시대〉, 《수운잡방》, 글항아리, 2015, 19쪽.
이황(李滉),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제46권, 〈성균생원김공묘지명(成均生員金公墓誌銘) 병서(幷序)〉 : 庖繼兼珍, 甕溢香醁.
이황, 《퇴계선생문집》 제46권, 〈성균생원김공묘지명 병서〉 : 縣監家故饒溫, 公因是以財雄於鄕.
이황, 《퇴계선생문집》 제46권, 〈성균생원김공묘지명 병서〉 : 宅邊亦有亭, 公皆修而敞之. 客至, 輒爲之投轄劇飮, 或連夜無倦色.
이황, 《퇴계선생문집》 제46권, 〈성균생원김공묘지명 병서〉 : 搢紳之過縣, 多枉駕盡歡. 雖褐寬博, 待必款款.
김령, 《수운잡방》, 〈계암선조유묵〉, ‘분탕(粉湯)’ : 真油一升, 切葱白一升合煎, 清醬一鉢, 水一盆, 右四物和合作稀汤. 汤下時醎淡嘗用之.
김령, 《수운잡방》, 〈계암선조유묵〉, ‘분탕’ : 膏肉如初味切之, 菉豆如長麫切之, 入黃白兩色. 又生瓜水芹桔更中, 一寸許切之, 菉豆末着衣, 沸於熱水中拯出. 右件味下汤用之, 當用时, 葱白細拆, 投之用之. 然此汤膏肉为多, 至味好矣.
김령, 《수운잡방》, 〈계암선조유묵〉, ‘전약(煎藥)’ : 清蜜阿膠各三鉢, 大召一鉢, 胡椒丁香一兩半, 乾姜五兩, 桂皮三兩, 依法和煎.
허준(許浚), 《동의보감(東醫寶鑑)》, 〈잡병편(雜病篇)〉권9, ‘잡방(雜方)’, ‘조전약법(造煎藥法)’ : 白薑五兩, 桂心二兩, 丁香胡椒各一兩半, 巳上爲細末. 大棗蒸去核取肉爲膏二鉢.(一鉢三升爲) 阿膠煉蜜各三鉢. 右先熔膠, 次入棗蜜消化. 乃入四味藥末, 攪勻煎微溫. 下篩貯器, 待凝取用(俗方).
김유, 《수운잡방》, 〈탁청공유묵〉, ‘진맥소주(眞麥燒酒)’ : 眞麥一斗净洗煇蒸, 好麴五升合搗納瓮, 冷水一盆注下攪之. 第五日, 燒取酒, 四鐥極猛.
정약용(丁若鏞), 《아언각비(雅言覺非)》 제2권, ‘선(鐥)’ : 鐥者, 量酒之器, 吾東之造字也. 今郡縣餽贈, 以酒五盞謂之一鐥.【中國無此字】 方言謂之大也. 盥器亦謂之大也, 唯大小不同耳. 按匜者酒器, 亦稱盥器. 然則去鐥從匜, 不害爲書同文矣; 전순의(全循義)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는 2되〔升〕가 1선(鐥), 3선이 1병, 5선이 1동이〔東海〕가 된다고 했다(全循義, 《山家要錄》 ‘酒方’ : 二升爲一鐥, 三鐥爲一甁, 五鐥一東海).
이황, 《퇴계선생문집》 제46권, 〈성균생원김공묘지명 병서〉 : 年十七, 歸于公, 善於內治, 蘋藻之奉, 必致誠謹, 賓客應須, 雖家務騷騷, 咄嗟之頃, 無不整辦.
발행일 : 2018. 05. 25.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음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음식인문학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쓰촨성 량산 이족의 전통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음식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음식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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