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무왕-의자왕의 등장으로 중흥기를 맞이하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한 건 좋은데 양면전선을 강요 당함
그래서 고구려-일본에 갔지만 외교적으로 퇴짜를 맞고
이후 당에 감
당나라도 소원하게 대했으나 1차 고당전쟁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후방을 치지만
백제는 신라를 치는 걸 보고
기존의 친백제노선에서 친신라 노선으로 변경
하지만 별로 해주는 건 없고
신라는 당나라 찬양시를 바칠 정도로 굽신 거림
그러다 결국 나당전쟁까지 일어나는데..
이 글은 신라와 당나라가 멀어진 이유에 대해 적어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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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도와달라니까 하는 소리 (643)
(전략) 내가 왕족 중의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그가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마땅히 병사들을 보내 보호하면서.. (후략)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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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김춘추 보내 도와달라니까
당태종은 자기 친척을 왕으로 삼아 도와주겠단 소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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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인문 처형 논란 (660)
이 날에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金庾信) 등이 당(唐)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곧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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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해 만나자고 했는데
신라가 황산벌에서 싸우다 조금 늦자 (사실 황산벌은 오래 싸운 전투가 아님)
날짜를 조금 어긴 걸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령관급인 김인문을 죽이려고 함
김유신이 화나서 관두긴 했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완전 아래로 보는 행동에 신라는 화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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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와 신라와 싸우는데 뒷짐 지려고 한 당나라 (660)
당나라와 신라군이[원문에 3글자 빠져있음]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하려고 소부리(所夫里, 충남 부여) 들판으로 나아갈 즈음에, 정방이 마음에 꺼리는 바가 있어 진군하지 않고 있었다.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병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되었다.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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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당나라는 갑자기 진군을 멈추고
신라와 백제만 싸우면서 신라군의 뒤를 보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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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 내부 분열 유도 (660)
당과 신라는 연합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싸움에서 유신의 공적이 많았다. 당 황제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를 치하하였다. 장군 정방이 유신ㆍ인문ㆍ양도(良圖) 등 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재량껏 일을 처리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소. 지금 싸워 얻은 백제 땅을 공들에게 식읍으로 나누어 주어 여러분의 공에 보답코자 하는데 어떻겠소?”
유신이 대답하였다.
“대장군이 귀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임금의 소망에 부응하고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아주니,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만이 땅을 받아 자신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는 끝내 받지 않았다.
출처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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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김유신의 위치는 당시 상식이었고
실제로 만나보니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걸 안 당나라는
김유신을 비롯한 3명에게만 먼저 상을 주어 내부분열을 유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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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의 당나라 배신 계획 (660)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사비(泗沘) 땅에 진영을 치고 신라를 침공할 것을 은밀히 꾀하였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多美公)이 나와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을 의복을 입혀 백제인으로 가장하여 역적 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싸움을 벌이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 말하였다.
“이 의견이 취할 만하니 따르시길 바라나이다.”
왕이 말했다.
“당군이 우리를 위하여 적을 없애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개가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를 허락하소서.”
출처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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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당나라의 태도에 화가 난 신라는 아예 660년에 나당전쟁을 하려 함
그것도 당나라와의 친선이 (왕 되기 전) 최고 업적인 김춘추 앞에서
김유신도 동조하지만 김춘추가 반대해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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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라를 정벌하려 한 당나라 (660)
정방이 귀국하여 천자에게 포로를 바쳤다. 천자가 정방을 위로하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정방이 말했다.
“신라는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부형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는 작지만 일을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출처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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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이후 소정방과 당고종의 이야기를 적으며
소정방이 신라를 멸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취소한 걸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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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백제를 준다고 했던 당나라. 하지만.. (660)
사비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며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출처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도성을 지키게 하였고, 또 좌위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 도독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달래게 하였다.
(중략)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와 죽자 유인궤(劉仁軌)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출처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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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협조하면 백제를 준다고 했음
그래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는데
수도에 당나라 사람을 도독으로 앉히며 그럴 마음 없다는 걸 증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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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백제 부흥군과 싸운 신라군
사실 당나라한테 백제는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음
고구려를 칠 때 신라가 뒷치기를 하는데
백제가 신라의 옆구리를 쳐서 없애 버린 거임
그래서 백제를 멸했는데 부흥군이 일어나자
당나라 조정은 '현장의 제장들이 논의하여 철수할지 싸울지 결정하라'는
명령이 아닌 자율권을 주는 (전통적 동아시아에선 이례적인) 행동을 함
이후 바다 건너 보급 오는 것도 별로 없었고
1만 정도 있는 백제 주둔 당나라 군을 신라가 먹여 살리면서
백제 부흥군을 멸망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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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쌀만 받고 가는 당나라군 (662)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장 돌아가 버렸다.
유신 등은 당나라 병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후략)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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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고당전쟁에서 평양에 고립 된 소정방한테 김유신이 쌀(정확히는 쌀 4천 섬과 조 2만2천여 섬)을 줌
그런데 당나라는 이후 신라에게 알리지 않고 지 맘대로 가버림
굶어 죽을 놈 밥 줬더니 투명인간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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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계림대도독부 임명 (663)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임금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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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신라를 계림대도독부에 임명
백제를 웅진도독부로 했으니, 백제랑 똑같이 하겠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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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취리산 회맹 (665)
임금이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맺었다.
(중략) 당 고종이 부여융에게 조칙을 내려 신라로 오도록 하여 잔당들을 무마하고 우리와 화친하라고 한 것이다
(중략)
두 나라는 혼인으로 약속을 맺고 맹세로 거듭했으며,
(중략) 만약 맹세를 어기고 뜻을 달리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살펴보시고 온갖 재앙을 내리셔서,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지고 남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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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갑자기 지금까지 죽어라 싸운 백제(=웅진도독부)와 친하게 지내라고 하며 맹세까지 시킴
결혼까지 하고 싸우면 망할 거란 소리까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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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구려가 망했는데 땅을 뺴앗긴 신라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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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구려가 망함
신라도 3차 고당전쟁까지 오면 (정확히는 이미 2차 때부터)
당나라에 갑질에 시달려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지 않았음
그러다 고구려가 완전 멸망각 나오니까 (어쩔 수 없이) 동참한 거지
아무튼 고구려가 망했는데
당나라는 비열흘은 원래 고구려 땅이었다며 땅을 뺴앗음
비열흘에 구휼한 기록이 669년이고
나당전쟁이 일어난 게 670년임
하지만 이미 신라가 당나라 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비열흘이 (행정적으로) 넘어갔더라도, 신라는 다시 되찾을 생각이었으므로
정확히 언제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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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술 빼돌리기 (669)
당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 사찬 구진천(仇珍川)과 함께 돌아갔다.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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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당나라는 신라의 기술가지 탐냄
쇠뇌 기술자가까지 마음대로 데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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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신 죽이기 (670)
당 고종이 흠순은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끝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우리 임금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질책하고 성을 내어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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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신은 안 죽이는 게 불문율임
현대에서도 전쟁이 나더라도 대사관은 공격을 안 함
하지만 당나라는 사신을 마음대로 감옥에 가둬 죽임
(흠순은 귀국을 허락했지만)
그 이유도 원래 주기로 한 백제의 지분을 가져갔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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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리고 결국.. (670)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출처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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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고 나당전쟁 일으킴..
첫댓글 형님 그래도 신라가 당나라랑 손잡고 백제 고려구 공격한거는 쓰레기짓 한거 아닙니까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손을 잡고 당나라를 멸망 시켰어야죠
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 합쳐도 당나라 멸망시킬 각이 전혀 안 나옴
또 고구려 멸망에서 신라 지분은 사실상 없음
백제도 부흥군 이전까지 신라가 한 건 황산벌 5천 이긴 게 거의 전부임
당나라 막기힘들죠.. 당시 신라가 그나마 당나라 와 싸우다가 대충이기고 사신입적시키고 다시 싸우고 다시 가서 허리숙이고 이짓을 계속해대니까 당나라도 토번 등 주변국가도 분위기 심상찮으니 아몰랑 니네걍 공물이나 바쳐라 한거지.. 당나라가 망한건 결과적으로 당현종때 절도사들의 권력에 너무많은 힘을 실어준결과죠. 특히 안녹산 은 거진 15만병력을 이끌었고,
당시 고구려 장수 고선지도 안녹산의 난 진압 과정에서 모함받아 자기 오른팔 봉삼청 과 함께 처형됩니다.
이정기 도 당시 절도사로써 10만 대군을 호령하는 당에 맞서는 세력이긴했죠. 이후 황소의난 으로 개박살 분열 된 나라
실제로 당나라 군사 끌고 들어온 색희가 연남생. 역사학에 뭐 뭐 했어야 했다라는 결과론적 해석은 지양해야 합니다.
@천국의다단계 그것도 그렇고..
신성 함락(=항복), 금산 전투, 남소성 전투, 국내성 입성, 이타인(책성주) 항복, 설하수 전투, 욕이성(의주로 추정) 함락에 승리한 게 당나라..
고구려 멸망 당시 신라 지분은 사천 전투 승리랑 그냥 평양성에서 문 열었을 때 성문에 빠르게 들어간 게 전부..
@밀어쳐구라캅~ 고선지는 고구려 장수가 아니라 그냥 고구려 출신..
고구려 소속감 드러낸 적도 없고 그러니..
@블랙테일 네, 알고있네요 ㅎㅎ
@블랙테일 조선족 정도죠 뭐 지금으로 따지면
@블랙테일 그 당시에 나당연합군을 결성했시때문네
신라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후방에 배치된 병력을
북쪽 방어에 더 힘을 모았다면...
전쟁은 정말 아주 사소한 전투라도
스노우볼 굴릴 수도 있기에...
@사자의노래 별로 후방에 병력 배치 안 했을 걸요
고구려에게 중국(+유목)은 조금만 밀려도 캐삭빵 당할 강적인데 비해
신라(+백제)는 언제든 밟아버릴 수 있는 적..
그래서 한강 포기하면서까지 돌궐이랑 싸웠고
함경도 남부 버리면서까지 수나라랑 싸웠고 (일시적으로 한강유역 되찾았단 말도 있음)
당나라는 계속 전투해가며 평양 입성하는데 신라는 사천 전투 말고 전투가 없죠
김유신이 처음(?)활약한 낭비성 전투도 다시금 남하하는 고구려 막은 거
@블랙테일 근데 하나 궁금한게
나당연합군에 백제 멸망할때
왜 백제와 고구려는 연합하지 않았나요?
다음타자는 뻔히 고구려인데
@사자의노래 연합했습니다
그래서 신라 빈집털이도 같이 갔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로 나뉘어져 소통이 힘들었고
중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누적되었으며
곧 자기 차례라는 걸 알아서 열심히 방어준비 했죠
고구려 신라 백제는 서로 다른나라입니다. 신라입장에서는 당나라나 백제 고구려나 똑같은 적국이자 동맹국이었죠. 우리가 흔히 당나라 군대라고 비하하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군대중의 하나입니다. 나당전쟁은 상당히 선전한 전쟁입니다.
@블랙테일 뭔가 오해하신듯 비하라기 보다
한반도 역사상 가강 강한 고구려에 대한 연민
당시 최고였던 중국도 눈치보게 만들고 마음에 안들면 중국 사신 목아지도 썰어버렸던
최대강국에 대한 연민이자 그리움의 표현이고
백제는 문화 최강국으로서 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소 고구려와 백제 둘 중 하나가 통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 당시 서로 다른 나라지만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 역사라
좆같은 중국과 연합한 것애 대한 짜증 아쉬움
통일 신라 이후
중국에게 비굴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그래서 고구려를 더 그리워한... 그래서
광개통대왕 장수왕을 아직도 흠모하고
칭송하고...
존경라는 블랙테일님 이게 제마음입니다 밑에 댓글있오소 같이 달아요
당 떨어졌네 ㄷㄷ
대가리에 얼마나 총을 맞아야 식인종 당이랑 친해지나요? 여러분들 신라+당입니다 신라+일본이 아니에요 일본 찾지 마세요 신라 쓰레기들이 역사에서 일찍 사라지면서 백제가 통일했으면 어땠을지 짱께랑 친하게 지내서 작살만 났지 도움 된건 단 한개도 없음
고구려도 2차 고당전쟁 끝나고 친해짐
연남생이 항복하자 바로 3차 고당전쟁 일어나지만
신라를 비하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국민밖에 없죠. 천년왕국을 이룬나라는 전세계 역사에도 없는데 말이죠. 역사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을 넣어면 일개산적도 세계정복이 가능해지죠. 작은 국토에서 매년 전쟁을 치루면서도 살아남고 외교적으로 어찌보면 굴욕일수도 있지만 고비때마다 외교로 풀면서 그 강하다는 당 송이 멸망해도 살아남았죠. 고인물은 썩기마련 부패로 결국 망했지만 다른 왕국에 비해 그리 부끄러운 역사가 아닙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지금은 우리 역사지만 그당시엔 그냥 다른국기였죠.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으면 세종대왕도 한글도 없었겠죠. 지금의 우리도 없을수도 있구...
@커피중독 뭔가 오해하신듯 비하라기 보다
한반도 역사상 가강 강한 고구려에 대한 연민
당시 최고였던 중국도 눈치보게 만들고 마음에 안들면 중국 사신 목아지도 썰어버렸던
최대강국에 대한 연민이자 그리움의 표현이고
백제는 문화 최강국으로서 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소 고구려와 백제 둘 중 하나가 통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 당시 서로 다른 나라지만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 역사라
좆같은 중국과 연합한 것애 대한 짜증 아쉬움
통일 신라 이후
중국에게 비굴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그래서 고구려를 더 그리워한... 그래서
광개통대왕 장수왕을 아직도 흠모하고
칭송하고...
@사자의노래 어릴때 역사 배우면서 광활한 고구려 영토를 보고 아쉬움 안타까움 저 큰영토를 지금도 가졌더라면 생각 안할수가 없죠.
@커피중독 5천년 넘게 우리나라를 굳건히 했던 과거 우리 조상들은 당연히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고 찬란했죠 동감합니다
하지만 만족보다 더 위대했으면 하는 아쉬움의 발로라 여겨주세요^^
.mà
자료 너무 감사합니다 재밌네요
다행입니다
고구려는 자멸했다고 봐야...ㅋㅋ 한반도 다먹힐뻔했지 그나마 김춘추+김유신이라 신라라도 살아남은걸로 봐야됨 신라도 얼탔으면 걍 지금 우리다 중국말쓰고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