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공로가 있는데도 은전을 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뒤따라 시행하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1월 18일,조선 조정은 의주를 출발하였습니다.
출발하기에 이르러 선조 임금이 용만관에 거둥하여
궐패를 설치하고 다섯 번 절을 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상이 장차 여에 오르려 하면서 또 도사 장삼외의 수하 임세록과 중국 사람으로
좌우에 늘어선 자들에게 사례하고 여에 올라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의주의 백성들이 길을 가득히 메워 호곡하면서
다만 목사 황진과 판관 권탁을 20년간 유임시키어 본주를 소복시켜 주기를 원하니,
선조 임금은 여를 멈추고 위로하며 타일렀습니다.
이 날 행렬은 양책관에 머물렀습니다.
1월 19일,행렬은 양책을 출발하여 저녁에 임반에 머물렀습니다.
이날 왕세자가 영변을 출발하여 박천에 유숙하였다.
1월 20일, 행렬이 임반을 출발하여 운흥관에 머물렀으며
저녁에 정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날 왕세자가 영변에서 먼저 정주에 도착하여 행렬를 영접하며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정주에서 양사가 정주 백성들이 정주 군수가 명군 대접을 소홀히 했다는
탄원을 했다고하여 정주군수를 탄핵하니
선조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명하여
정주군수가 곤장 맞게 하였습니다.
이때 승병장 서산대사가 용사 1백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대가를 맞이하니
이여송이 문첩을 보내어 칭찬하고 권장하였는데
그 중에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치는데 충성이 태양을 꿰니
흠앙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주었습니다. 공리를 도모하는 뜻이 없었고 無意圖功利 專心學道禪 今聞王事急 摠攝下山巓 이무렵 요동에 있던 경략 송응창이 평양의 승전 소식을 듣고서 지휘사 황응양을 보내어
면사첩(죽이지 않는다는 증명서)을 가지고 가서
서울 안의 일본군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불러내려 하는데,
안주에 이르러 왕을 뵙고 국왕의 교서를 청구하였습니다.
임금이 잠시 장막 뒤로 들어가서
이호민을 불러 교서를 작성하려고 하니
이호민이 구상할 겨를이 없이 즉시 초안을 작성하여 바쳤고
황응양이 이를 가지고 떠나갔습니다. |
1593년 1월 21일, 평안도의 고니시 잔군과 황해도의 구로다 군,
강원도의 모리 요시나리 군, 개성의 고바야카와 군이 한양에 집결 하니
이는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의 제 2번대를 제외한
한양 이북의 모든 일본군이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각군 지휘관들이 모여서 전략을 의논하니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한양에서 철수하는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우리 일본군은 지난 1년 동안 조선의 7할을 장악하였소!
그런데 지금와서 아군이 이렇게 힘없이 물러선다면 적은 우리를 비웃을 것이오.
또한 우리가 물러서면 적은 더욱더 용기를 얻어 앞과 뒤에서 칠 것이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소!''
라고 하며 역공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다른 일본군 부대는 한양안에 입성하였지만
고바야카와 부대는 한양 외각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명연합군을 서울 근교에서 요격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일본군 사령관들은 조명연합군에게 역공을 감행하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이무렵 조선군 경기 방어사 고언백, 부총병 사대수 임진강을 건너
한양을 정찰하고 있었습니다.
1월 25일에 이여송이 개성에 입성하였고
그 날 조명 연합군 지휘관들은 전략을 의논하였습니다.
명군 유격장 전세정과 명군 장수들은 속전속결을 주장하였고
도체찰사 유성룡과 조선군 장수들은 신중론을 주장하였는데
결론은 속전속결로 끝났습니다.
1593년 1월 24일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패한 분풀이와
한양 안에서 조선인들이 조명 연합군과의 내응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여
종루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한양 백성 수만명을 늘어 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차례로 베어나갔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모두 목을 늘여 칼을 받을 뿐
감히 도망하여 목숨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함께 앉은 사람에게 말하길
``아무래도 죽을 것인데 도망해 달아나면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하니
곁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말리며 말하기를
``오활한(어리석은) 생각 하지마라. 반드시 큰일 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고 일어나 달아나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마치 즐거운 곳에 가는 것 처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날 일본군은 여염집과 관공서들을 거의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1593년 1월 27일, 일본군 정찰대가 일본군 사령부에 조명연합군의 출현을 보고 하였고
일본군은 조명연합군과 맞서 싸우러 출동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선봉대: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제 6번대
다치바나 무네토라 제 1대 3000명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제 2대 8000명
고바야카와 히데케아네 제 3대 5000명
키카와 히로이에 제 4대 4000명
선봉대 총 20000명
본진: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일본군 총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제 3번대 제 5대 5000명
이시다 미쓰나리 제 6대 5000명
가토 미츠야스 제 7대 3000명
우키다 히데이에 제 8대 8000명
본진 총 21000명
조명연합군을 요격할 일본군은 총 41000명 이었습니다.
1593년 1월 25일, 명군 부총병 사대수는 조선군 장수 고언백과 함께
명군 기병 수백기를 인솔하여 선봉대로서 파주 인근의 벽제관 방면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때 조명 연합군 선봉대는 미륵원(혹은 여석령)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조우 하였습니다.
사대수의 선봉대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군 130여명을 참살하였습니다.
나머지 일본군은 도주하였고
사대수는 전령을 급히 보내어 전과를 이여송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사대수의 전령이 파주에 주둔한 이여송에게 보고하니 이여송이 휘하 가정 수십명을 데리고
쏜살같이 출격하였고 곧 휘하의 대장들도 각각 가정 수십명씩을 데리고 출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뒤를 조선에 출정한 명군 중 가장 효용한 북방 기병 3000여명이 따라 갔습니다.
이여송이 급히 달리다가 헤음령에서 낙마하여 얼굴을 다치기도 했지만
부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일본군이 있을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무렵 경기 순찰사 권징이 치계 하였습니다.
“제독의 대군이 이달 23일에 개성부에 도착하였고
파주에 주둔해 있던 적은 이달 23일 경성을 향하여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화·금성의 적은 17일부터 이틀간 잇따라 올라와 동대문 밖에 진을 치고
여인 15명을 사로잡아 갔다가 모두 포천현 앞길에다 버렸습니다.
성에 있는 적들도 나와서 동대문 밖과 남대문 밖의 사한리와 한강등처에다 진을 쳤고,
사대문밖에는 녹각을 많이 설치하고 경성의 젊은 사람들은 머리를 깎게 하고
노인들은 모두 죽였으며 짐바리를 잇따라 한강 건너편으로 내보낸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