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설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장 3-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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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석학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할 때에, 조그만 서당을 열어 어촌 아이들을 제자로 가르쳤습니다.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 중에 제자 황상(黃裳, 1788~1870)은 특히 시(詩)에 튀어난 재주를 보여, 훗날 추사 김정희와도 통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노년에 이르러 스승에 대해 추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께서 이르시기를 ‘공부하는 자에게 큰 병통(病痛, 깊이 뿌리 박힌 잘못이나 결점)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 외우기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소홀한 데 있으며, 둘째 글짓기에 빠르면 그 폐단은 부실한 데 있고, 셋째 이해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게 된다. 무릇 둔하면서 파고드는 자는 그 구멍이 넓어지며, 막혔다가 소통이 되면 그 흐름이 툭 트이고, 미욱한 것을 닦아 내면 그 빛이 윤택하게 되는 법이다. 파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고, 소통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고, 닦기는 어떻게 하느냐? 역시 부지런하면 된다. 이 부지런함을 어떻게 다할 수 있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니라” 라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회고 하면서,
“나는, ‘부지런 하고, 부지런 하고, 또 부지런 하라’는 이른바, ‘삼근계(三勤戒)’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평생 공부에 매진했다. 열다섯 살에 들은 가르침을 61세가 되어서도 잊지 않았다.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공부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오로지 들이파고, 막힌 것을 틔우며, 갈고 또 닦았다. 다산 스승의 가르침을 잊고 살아왔다면 오늘의 나는 결단코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황상은 훌륭하신 스승의 가르침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고 자신의 삶을 설계하면서 죽을 때까지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인간적 신뢰를 바탕으로 유대를 맺고 서로의 내면을 소통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정약용과 황상’처럼, 끈끈한 제자관계를 이룬 성경의 대표적인 사제지간입니다. 사제지간을 넘어 부자지간의 관계를 이룰 정도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3절에서 바울은, 밤낮으로 제자인 디모데에 대하여 간구하고, 생각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죽음을 얼마 앞둔 옥중에서까지 이렇게 제자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4절에서는, 얼마나 보고 싶은지 눈물을 흘리며 지내고 있다고 전하면서,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나서 기쁨을 가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이 말이 유언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편지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감정이 짙게 묻어나는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제자 디모데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잘 성장해 준 것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디모데가 청결한 양심을 가진 것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한 것을 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디모데의 신앙은 바울의 가르침에 의해 성장해 갔지만, 집안 대대로 이어져온 믿음의 내력이 상당했습니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유대인출신으로, 깊은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신앙을 고스란히 디모데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디모데를 쓰시기 위해 조상대대로 신앙을 축적해 온 것이, 디모데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제자를 키워놓은 바울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세 가지의 권면을 합니다. 이 권면의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사역 기간에 12제자들에게 선포 하셨던 말씀의 압축판 같습니다. 세 가지의 권면을 살펴보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권면입니다. (6-8절)
“복음을 들었다”, “복음을 받았다”라는 말은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오래 참으심, 사랑하심의 능력이 우리에게 덧 입혀졌다(7절)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자유 합니다. 죄에서 자유, 돈에서 자유, 세상 고민에서 자유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의 모든 면을 완벽하게 평안과 기쁨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받은 사람은 고난이라는 짊을 함께 져야 하는 의무가 부여 됩니다. 주님이 고난 당하셨기에, 우리도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왜요? 연합되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을 받게 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복음만 받고, 고난은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주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직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고난을 받으라”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말입니까? 스승이 제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도 힘들뿐만 아니라, 제자가 이 말을 선뜻 받아들이는 것도 보통일은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이 이미 고난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자신 있게 증명하는 것이며, 디모데도 스승을 본받아 고난에 기꺼이 동참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참 스승과 제자 사이라면,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최종적으로 전달되고, 전달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스승 곁을 떠날 수 있어야,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의 길을 뒤따라 갈 수 있는 제자로서 홀로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성경은 복음을 위한 책입니다. 그러나 복음이신 주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모든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서, 하늘보좌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계실 것 같습니까? 스승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12제자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 12제자는 복음을 위해 끝까지 박해를 견디다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내하고, 절제하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바울도 주님으로부터 고난이 주는 일체의 비밀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녀이면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복음에서 고난으로, 고난에서 영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직접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요, 자녀라면, 고난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린도 후서 1: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난 받으면 내가 방치되거나, 유기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한 어떤 고난을 받을 시에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시고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도록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고통당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다 지켜보시면서 끝까지 그의 영혼을 지켜 주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흔히 ‘소명, calling’, 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로 소명된(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1차 적으로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고난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주시려고 한다는 말씀이 베드로 전서 2:21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말씀뿐만 아니라, 복음과 고난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말씀은 신약성경 전체, 특히 바울서신서 에서는 끝임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의 말씀을 해 드립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셨다면, 이제는 고난을 받아들이실 준비를 하십시오. 내가 너무나도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혹시나 내가 고난을 거부하고 평안한 삶의 자리만을 쫒아간 결과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고난을 받아들이고, 고난을 이겨내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주는 참 위로와,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제대로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복음을 주는 동시에, 분명하게 고난도 함께 요구하십니다. 사순절 기간에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시고, 내 삶에 고난의 자리를 마련해 가십시오. 더욱더,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삶의 자리에서 중심 잡힌 삶을 살아가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 온전히 순종하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소명과 사명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9-11절)
소명, calling 속에는 복음과 고난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소명을 말할 때, 거의 붙어 다니다 시피 하는 말이 ‘사명’입니다. 소명을 받은 사람은 다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은, 복음으로 무장하고,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특별한 임무를 말합니다. 소명은 지극히 개별적인 상황에서 일어나지만, 사명은 은사대로 나누어져서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다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다만,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거나, 혹은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명을 이루어 가기를 주저하거나 포기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소명과 사명이 한 결 같이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맡기신 일을 중단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대놓고 거절하는 무례한 행동이고,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의 은혜를 싸구려 취급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 갚은 까치, 생쥐와 사자” 같이 짐승들끼리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은 우리에게,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영생”(10절)을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왔던 말이라 이 선물이, 이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실감 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미국 풀러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김세윤 박사가 내한하여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나에서, “한국교회는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하면서 실상 한국교회는 구원파적 신념의 오류에 빠져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는 신념, 그리고 의로운 삶의 열매가 없는 칭의론 등으로 인해, 한국교회 강단에는 온통 싸구려 복음이 판을 치고 있다”고 꼬집어서 말했습니다. 동의하기 싫어도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가르침, 소명과 사명의식의 결여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은, “값싼 은혜(costless grace)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으로서,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닫아 버리고, 값진 은혜(costly grace)는 제자로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신앙을 말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항상 은혜에 대해 자신의 응답을 의문시 하면서,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를 갈망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왜?” 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왜 나를 부르셨는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을 맡기셨는가?” “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왜 나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에 조금도 변화가 없는가?” “왜?” 라는 질문이 떠난 사람은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소명과 사명에 대한 조금의 관심도 없이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신 것을 믿고 계시다면, 나를 왜 불러주셔서 이런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 주신 은혜를 알고 계시다면, 왜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00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의 지체로 이 공동체에 있게 하셨다면, 왜 나를 여기에 머물게 하셨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왜?”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았던 십자가의 은혜를 더듬어 올라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불러주신 소명, 맡겨주신 사명, 이 두 가지 은혜를 완전하게 재생시키셔서, 내가 00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정에서, 직장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 나가야 하는지 해답을 찾아 가시는 사순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는, “성령으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권면입니다. (12-14절)
첫째, 둘째 권면인, “복음과 고난”, “소명과 사명”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오심으로 인해서 발생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다는 것은 우리 몸이 거룩하신 주님이 거하실 정도로 성결해 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통칭해서 거룩할 성자를 붙여서, 성도(聖徒)라고 부릅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 』라는 책에서, “성스럽다는 것은, 장엄함에서 느끼는 두려움, 신비감 그리고 매혹됨”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우리를 악한 세상에서 지켜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없이는 세 가지 권면을 이루어 가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바울이 성령에 의지하여 지키라는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큰 아름다움은 당연히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운 것’ 두 가지를 들어 봅니다. 하나는 우리의 ‘몸’ 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혀’입니다. 성령 받은 몸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거룩한 성령이 거하는 장소로 바뀝니다. 몸을 더럽히는 것은 성령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각종 죄를 언급할 때, 정욕, 음란함을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거론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몸이 유혹 당하기 쉽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몸을 지키기 못하여 불결함이 남아있는 장소에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아름다운 것을 지켜 나가는 제일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음란한 것들, 한 눈 팔면 금방 밀려오는 음흉한 생각, 주체할 수 없이 우리 몸을 더럽히는 음욕의 행위들이, 시시각각 우리 몸을 노리고 있습니다. 성령을 선택하면 육체는 죽을 것이고, 육체를 선택하면 성령은 아무 도움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지키는데 힘쓰십시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음은 ‘혀’입니다. 바울은 야고보서에서 “혀는 능히 길들 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혀는 쉬지 않는 악이고, 죽이는 것이 가득한 독”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혀를 가지고 찬송과 기도를 드리지만, 혀를 가지고 욕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하면서, 혀를 단속하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온전한 자라고 결정지어 말합니다. 하여튼, 살아가면서 입이 문제이고, 입이 방정이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더디 하고, 듣기를 빨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혀를 단속하여 사랑의 말, 칭찬의 말, 희망의 말을 즐겨 하되, 비판의 말, 낙심의 말, 부정적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살면서 혀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대중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말이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목사를 포함해서, 정치인, 교사,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은 혀를 조심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탄도 우리의 혀를 사용해서 망하게 하는 방법이 너무나도 손쉽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자나 깨나 말조심, 혀 조심 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길입니다.
어느 권사님은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의 성격이 드세서, 함부로 말하여 남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을 깊이 고민하다가 성경 구절 암송을 했다고 합니다. 50개, 100개 정도 외워지자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바로 생각나는 암송 구절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암송 구절이 많아지자, 말실수가 적어지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분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평소에 말실수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나, 앞으로 혀를 단속하여 아름다운 것을 지켜 가겠다고 감동이 오시는 분은, 성경구절 암송을 권해 드립니다. 한 200개쯤 선별해서 저하고 같이 시작해 보시죠. 저도 많은 말을 하기 때문에, 혀를 단속해야겠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오늘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과도 같은 세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 분들은 이 세 가지 권면을 사순절에 적용하며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권면이고,
둘째는, “소명과 사명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권면이고,
셋째는, “성령으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권면입니다.
세 가지 권면을 깊이 묵상 하시면서, 디모데와 같이 ‘철결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묵묵히 따라가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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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님이 앞서가신 십자가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세 가지 크신 은혜의 권면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선포된 대로 듣고, 실천 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심자가를 참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