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시내를 거쳐 들어간다.
갑곶은 참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곳이다. 한 쪽은 서양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죽어간 성지가 있고, 또 한쪽은 그런 순교자의 죽음을 구실로 침략한 외세에 대항한 국방유적지가 있으니..,, 신앙인으로서 ,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그저 혼란스럽다.
과연 당시에 그런 상황이라면 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신앙이 우선인가, 국가가 우선인가?
성지는 고요하다. 강아지만이 그 땅을 지키고 있다. 십자가에 주님이 어찌나 힘들게 매달려 있는지... 파란 하늘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정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또..지난번처럼 "현빈이가 때리지 말아주세요."라고 기도하지는 않았겟지.
'십가가의 길'을 할수 있는 오솔길이 나있다. 참 고요하고 평온하다.
정수는 변함없이 개와는 친하다. 그 큰 개가 무섭지도 않은가?
밖을 나오니..무슨 궁궐같이 생긴 거대한 갈비집에 서있다. 그곳엔 차들이 빽빽하다..
아니 순교지와 격전지가 있는 이곳에 이런 큰 건물을 허가를 해준것도 의아스럽고, 이곳에 고기굽는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갈비를 뜯으며, 순교자와 호국영령을 기억한다.. 이율배반의 모습이 아닐까?
갑곶돈대.
갑곶돈대는 강화대교 바로 옆에 잇다.
정작 토요일이지만 그 큰 주차장엔 아까 갈비집 보다 주차된 차가 없으니 좀 슬프다.
이곳은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몽고와 항전을 벌였던 중요한 요새이기도 하다. 내륙지방의 몽고가 기마에는 능하지만, 물에는 약하거든..특이 이곳은 유난히 물살이 세단다. 가장 높은 '利涉亭'에 올라가본다. 강 건너에는 문수산성이 보인다.
강폭은 그리 길지도 않다. 300여 미터 돼나.. 고려는 전 국토를 잠식하고, 이 곳만 굴복시키면 모든 것이 끝이다...그러나 이걸 함락시키지 못할 정도로 천혜의 요새다. 1-3년도 아니고 39년을 쳐다보고 있었을것 아니야..
잠시 우일신님의 대몽항쟁의 글을 인용해본다.
고려 무인정권시 대몽항쟁은 임금과 권력층은 도읍과 백성을 버리고 강화로 숨어들어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민초인 백성들은 본토에서 몽고의 갖은 수모와 수탈을 견뎌야 했던 쓰라린 기억을 되살려 볼 때 역사는 흘렀지만 민초는 언제나 고통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진리(?)를 알게되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민초는 그 전란중 고통을 받는 가운데서도 강화정부에게 각종 세금등을 꼬박꼬박 냈고 몽고군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과 수난을 당하게 되니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으며 과연 그네들에게 나라를 위한다는 기본이 있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있었으며 권력 기반을 유지하고자 민초들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친 나라 의 권력층이 과연 잘 되었던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39년간의 대몽항쟁을 통해 고려는 이루 헤아릴 수없이 피폐되었으며 더 나아가 고려가 점진적으로 붕괴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어쩌면 애국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신독재의 수단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화친만 맺었어도 황룡사구층탑도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빈 라덴을 내놓지 않는 아프카니스탄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명분...전쟁과 가난.. 어느 것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
고려 39년을 막아낸 천연요새도 무너질 때는 순식간이다..
병자호란을 맞아 조선초병은 그 물살만 철썩 같이 믿고 있다가 낮잠에 빠졌다. 문수산성에서 지켜본 청군이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민가를 헐어 뗏목을 만들어 단번에 넘어왔다. 이에 허무하게도 강화는 함락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이곳으로 마지막 탈출을 시도하려는 인조는 마지막 희망마저 꺽이고,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지 않는가?.
구한말 이곳은 또 한번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천주교도를 박해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군이 침략했다. 나중에 그들은 정족산성에서 양현수장군에게 대패힌 것이다.. 이곳 강화역사관엔 양현수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양장군..잘했어."
강화역사관은 시간을 많이 할애하라. 강화역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석기시대부터 구한말까지 강화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난 시간이 없어 대충 보았는데..나중에 꼭 다시 올거야.
참 강화역사관 옆엔 400 여년된 탱자나무가 서있다.
왜 이곳에 탱자나무를 심었을까?
이것도 외적방어 때문이란다. 성벽에 이 가시나무를 심어 적들이 못 올라 오게 하기 위한 방편일것이다. 강화는 탱자가 자랄 수 있는 마지막지역이다. 즉 북방한계선을 말하지.
강화 곳곳이 산재해 있던 비석들을 한곳에 모여놓았다. 마치 국립묘지 비석처럼 말이다. 복원된 배도 한번 보고....다음 일정지로 간다.
선원사지..(사적 259호)
생긴지 얼마 안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우측에 선원사지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곳곳에 누런 벼가 알곡을 맺고 있다. 저 땅에서 나온 알곡하나 하나가 39년동안 먹었던 군량미겠지.
선원사지부설 찜질방이 보인다. 찜질방과 절집하고는 어딘지 어색하다.
어째튼 다 왔겠지..
그러나 선원사지는 굽은길 우측에 자리잡고 있어 지나쳐 버렸다. 다시 back....
폐사지에서 나온 돌멩이만 굴러다닌다. 더구나 동국대에서 발굴조사 한다고 줄까지 쳐놓아 들어갈 수도 없다. 멀리서 산세와 시원스런 절터를 구경한다.
선원사지가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대장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예 조금만 임시박물관엔 대장경 판각 그림과 자료가 전시되어있다. 이곳에서 판각했다고 확신하니까 이렇게까지 하겠지.
몽고가 침략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당시 최고 실권자인 최우는 호국을 통한 민심단결이 절실했을 거다. 그 방편으로 거대한 사찰을 짓고, 거기에다가 대장경까지 만들었다. 왕실에서 얼마나 공력을 들여 판각을 했겠는가? 대장경을 완성해야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믿었거든.....
실제로 질 좋은 나무를 3년 이상 바닷물에 담갔다가 다시 소금물로 쪄서 진액을 뺀 다음, 3년을 그늘에서 말려 판목으로 다듬어 그제서야 칼로 새겼다고 한다. 한자 한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오자, 탈자가 없는 세계최고의 대장경이 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만 봐도 알잖아.
광성보
갑곶부터 시작해서 강화도 해안 곳곳에 진, 돈, 보가 상당히 많다. 그거이 무엇을 하는 걸까? . 이것들은 군사상 중요한 지역을 의미하며 주로 해안 변방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군사 주둔지역이란다.
진(鎭)은 오늘날로 치면 대대병력이 주둔하던 곳이고, 보(堡)는 오늘날 중대병력이 머물렀으며, 진이나 보에는 포대가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돈(대)은 하나의 초소가 있던 곳이란다. 구한말엔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 8곳의 포대, 8곳의 봉수가 있었으며 현재는 일부만 복원된 상태다.
광성보 입구는' 按海樓'라는 멋진 성문이 있다. 파란 하늘과는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성문 옆에는 돈대가 있는데. 이곳엔 당시 사용했던 대포가 세워져 있다.
광성보는 병인양요때 프랑스군과 공방전이 펼쳐졌으며. 신미양요때는 미군함대와 격렬히 싸웠던 격전지이다.
어재연 장군부대는 대포와 총에 대응하여, 창과 칼로 대응하다가 그 휘하 200명과 더불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언덕을 오르면 어제연장군 형제의 쌍충비와 그때 싸운 순국무명용사 비가 비장하게 서 있다. 그 밑엔 '殉節墓壇'이라는 비석과 무덤 7기가 있는데, 어재연장군 휘하 군인 51명을 7기의 분묘에 합장했다고 한다. 왠지 무명자의 무덤을 볼 때 비장한 감이 든다..
손돌목
손돌목 돈대에 올랐다. 이곳은 돈대 중 가장 고지대에 있어 사방이 한눈에 들어와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손돌목이란 이 곳 앞바다를 말하는데, 고려 고종이 몽고군 침입으로 강화를 향해 피신하는데 '손돌'이란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했다..워낙 물살이 강해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피신 길의 왕인지라 무슨 계략이 있는줄 알고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 전에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 길로 따라가라고 일러주고 칼을 받았다. 왕은 할수 없이 손돌이 가르쳐 준대로 하여.,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했는데..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분다.
그걸 보고 큰 실수를 한 것을 인정했지만 그는 이미 죽은 몸이었다. 그 뒤로부터 그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10월 20일경에는 큰 바람이 불어 손돌의 넋이 아직 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용두돈대
강화도에서 가장 멋진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용두돈대' 다. 용머리처럼 쭉 내밀고 있어 그런 이름을 가진 것이다. 그 앞 물살이 어찌나 사나운지...석양이 참 아름답다. 아내와 한참을 머물러 경치를 감상한다. 한켠 조그만 땅엔 누런 논이 비집고 있다. 한쪽에선 목숨건 전쟁을 하고 있을때 이곳에선 살기 위해 벼를 심었구나.......이곳엔 비문이 있는데 정면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고, 뒷면 비문은 이은상이 지었다.
초지진(사적 225호)
덕진진은 시간이 지체되어 통과하고 초지진에 도착했다.
원래 효종 때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요새였다. 그 뒤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로즈의 극동함대와 미국의 아세아 함대 및 일본군함 운요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한다. 특히 일본의 운요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의 체결을 가져옴으로써 일본 침략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곳엔 당시 사용했던 구식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과연 저 쇠덩어리 대포가 성능을 발휘 했을까? 의구심이 든다.
이곳은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므로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1973년 성곽보수를 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대선정횟집
강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선정 횟집을 찾아갔다.
역시 답사를 더 기쁘게 해주는 것이 미각여행이다. 역시 강화도에도 여러 맛집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식도락잡지에서 찬사를 보낸 '대선정 횟집'을 소개하고자 한다.
백파 홍성유님까지 소개했으니.. 기대를 가져도 좋다..
이곳은 초지진에서 200여미터쯤 더 가면 좌측에 한적하게 잡고 있다.
솔직이 몇 번을 물어물어 갔다. 주위에 식당들이 많거든.... 간신히 찾아냈다. 맛을 향한 나의 노력이랄까? 3x inch의 나의 배 둘레는 이런 집념에서 나온다. ㅋㅋㅋ
초입부터 코스모스 꽃의 환영을 받으면 들어간다. 맛집답게 그다지 깨끗하지는 않지만 여러 채의 건물이 듬성등성 자리잡고 있다. 연못가운데 비닐집이 지어져 있어, 한적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미각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린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엔 바다가 넘실넘실.....강화도와 대명포구를 잇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내후년이면 저 다리를 건널 수 있을까?
툇마루엔 석양노을이 비친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 행복이 쏟아진다.
메뉴를 보았더니 두 가지 특이한 음식이 있네.. '메밀칼싹둑과 시래기 비빔밥.. "
뭔지는 모르지만 아내와 난 2가지를 따로 시켰다.
"미안해요..제가 여러 사람들한테 소개할려고 하니 두가지 시킬께요."
"무슨 말씀.. 따로 시켜야.. 우리 집 여러 맛을 보여드리지. 괜찮아요.."
얼마나 친절한가?... 미안해서 도토리묵도 1접시 시킨다.
보통 맛집의 단점이 무지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청동 수제비집은 김치 달라고 할때 종업원 눈치 봐야하고, 늦게 나가면 심한 눈총을 준다. 시청의 장호원 김치찌게 집은 혼자 와서 기다리면 쫓겨나기까지 한다. 나-참 더러워서..그런데 그런 수모를 당해도 또 달려가서 줄을 선다.
입이 간사해서 그런가보다. 그런데 이곳은 시골의 풋풋한 인정을 맘껏 느낄 수 있다.
밑반찬이 먼저 나온다.
잘 무친 취나물, 깻잎나물, 호박무침, 멸치젓을 무친고추, 배 한조각이 들어간 동치미국물, 강화도 순무김치 등등 어느 하나 소홀할 것이 없다. 이런 걸 입에 짝짝 붙는다고 하지. 그런데 콩나물과 숙주나물은 왜 함께 나왔지? 거기다 꽈배기, 튀김, 떡이 3열 종대로 접시에 앉아있다. 1만원 내고 이런 큰상은 처음이네...
알맞게 무쳐진 도토리묵이 먼저 나온다. 그런데 묵이 따뜻하다.방금 한 것인가? 아님 날이 추워서 데워 준건가? 어째튼 주방아줌마의 따뜻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한 입 집어넣는다.
카- 좋다. 여기다 오십세주 한잔 마시면 좋을텐데... 운전때문에 생략
참고)오십세주=백세주+ 참이슬
백두산주=백세주 +산
드디어 메인이벤트가 나온다.
메밀칼싹둑.. 메밀반죽을 칼로 싹둑싹둑 썰어내는 광경이 상상된다. 일반 해물칼국수와 흡사한데 면발을 밀가루가 아닌 메밀로 만든 것이다. 어찌나 담백한지..흐물흐물해도 씹는 맛이 고소하다..
국물은 어찌나 진한지... 조개껍데기는 없애고 조개만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거이 골라 먹는 재미..진한 국물에 양파, 당근. 애호박,감자.김등이 얹어져 있다. '담백함과 시원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아내는 맛 집 칭찬엔 인색하다. 왠만큼 맛있게 하지 않으면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다. (지는 요리 드럽게 못하면서 말이다... ㅋㅋㅋ )
아내는 몇 젓가락 집어먹고 나더니.."먹을 만 하네.." ...이건 무지 칭찬이다.
두번째 이벤트...시래기 비빔밥. 무청을 말린 시래기를 넣고 한 밥이다. 시래기를 넣고 밥을 짓다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시래기는 질겨진다. 그걸 부드럽게 하는 방범..그것이 이 집의 자랑이지. 강화도령(철종)이 농사 질 때 새참으로 먹는 사기 밥그릇에 밥이 소복하게 담겨져 있다. 그 안에 밤도 숨겨져 있다. 요새도 이런 사기 밥그릇이 있구나. 참기름 먹인 간장에 살짝 비벼서 먹는 그 밥맛.."잊지 말자 칼싹뚝.. 상기하자 시래기... "
포만감을 증명한 배를 두드리며 ,오늘도 다이어트 실패한 것에 반성하고 있을 때 할머니는 노오란 호박죽이 담긴 그릇에 가져온다. 숫가락으로 한 입에 꿀꺽..
캬-- 정말 맛 있네. "정수엄마야..내가 이태까지 먹은 호박죽 중에 최고야.."
5살 먹은 정수도 똑 같이 말한다.. "아빠 내가 이태까지 먹은 호박중에 최고야."
정수야..너 인생을 얼마만큼 살았니? 너 호박죽 첨 먹잖아.."
정수는 벌써, 코스모스 꽃잎을 모으고 머리에 꽂고 있다. 안 그래도 예쁜데... ( 미안해..나 팔불출이야..딸자랑을 또 했으니....)
* 가격..모밀칼싹두기 5천원, /시래기밥 5천원/감자부침 5천원/메밀부침 5천원/도토리묵 5천원
밴댕이회 1만5천원 / 광어 4만5천원
전화번호 032-937-1907
가는법: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1251-326
초지진에서 200미터, 전등사에서 4킬로
마침말...
이렇게 강화는 단군이래 모든 시대의 역사가 있는 작은 국토박물관이다. 고려와 조선, 구한말의 아픈 상처를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나라가 강해야 강화를 지킬 수 있다. 강화가 넘어가면 나라가 넘어가는 것이다.
하루에 강화를 다 본다는 것은 무리다. 아직도 전등사와 정수사 그리고 동막해변, 석모도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