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이야기
炚土 김인선
성탄 전야
대통령이 최전방 부대를 방문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장면을 뉴스로 본다
여성 대통령이라서인지 색다른 느낌이 전해 온다
대통령이 찾아간 을지 부대
젊음의 혈기로 국가를 위해 충실하게 의무를 행한 내 생의 한마디도 그곳에 있다
정겨운 이름 아닌가
내가 복무하던 당시 육군 12사단의 부대명이다
우리나라 최전선 중 가장 험준한 지형을 지닌 지역이지만
맑게 흐르는 소양강 상류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몇십 년 우거진 숲
한겨울 꽁꽁 바위처럼 얼어 있는 석탄 장에서 손도끼로 조각조각 깨어
페치카에 개어 바르던 석탄
그리고 불 쏘시개를 만들기 위해 날마다 참나무를 베러 드나들던
눈 덮인 내심정 계곡의 깊은 산자락
늦 봄이면 부대 앞 절벽에서 자라는 야생 목련잎이 떠 흐르는 내
그 향기가 코끝에 다가오듯 지금도 모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쟁이 끝나고 당시 육군 준장이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 5사단장으로 있을 때
1954년 1월
2M가 넘는 폭설이 내려 장병 59명이 순직한 충혼비가 세워진 당봉산성 서화리 강변
나는 그곳 지원 중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일 년 두 번 교대 근무하던 704 OP에서 포대 경으로 바라보던 낙타봉
그곳 샘가에서 옷을 빨아 털던 북한군의 모습
흡사 기차선로처럼 능선 따라 감도는 GOP의 철책
더운 오줌 줄기가 바로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방한복에 모포까지 뒤집어쓰고 경계 근무하던 밤
별빛과 달빛
왜 그리 아름다웠는지
OP 벙커엔 타 포대의 통신병과 관측 장병이 서로 어울려 생활을 한다
졸병 시절 마실 물을 길어 오기 위해 산 아래 샘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면 반나절이 가던 고지
아침이면 구름과 안개가 휘감아 떠오른 주위 산봉우리가 섬처럼 출렁이고
조식 수령과 함께 물을 길어오기 위해 철제 스페아 통을 어깨에 메고
구불구불 험한 산 오솔길 따라 오르내리며 잠시 엠원 소총을 세로 세우고 쉬던 곳
길섶엔 늘 깨곰 나무의 하얀 열매가 고향에 두고 온 그녀의 말간 손톱 되어 나를 반긴다
문득 어느 날 밤 벙커안의 모습이 떠오른다
벙커 콘크리트벽에 생긴 곰보 속에 숨은 벼룩은 밤 깊어야 기어 나왔지만
국방색 동내의 가랑이 솔기에 박힌 깨알 같은 이는
매달아 놓은 디디티 주머니도 아랑곳없이 한낮에도 허벅지에 스멀거린다
뙤약볕 속에서 용치 작업용 콘크리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강자갈을 줍는 것과
가파른 언덕 위에 잔디 떼 덮은 힘든 진지 보수작업이 하기 싫어 잔머리로 열외 하려고
일부러 포경 수술받은 김 일병은 밤에도 때아닌 고통을 겪는다
죽을 맛이다
석식을 마치고 대강 취한 점호 후 좁은 침상에 숨죽이고 쫑긋 세운 귀
장난기 어린 선임하사의 첫날밤 음담패설
이야기가 슬슬 짙어지자 좁은 침상에 누운 청춘들이 끙끙거린다
신부의 치맛자락 내리는 순간에 이르면
이곳저곳 숨소리 들썩이기 시작하고
갓 꿰맨 실밥이 찢어지는 듯 아랫도리 통증에 김 일병은 귀 막는다
하지만 뇌 속 가득 자리 잡고
꿈틀대는 허벅지와 엉덩이, 어느새 여인이 다리 쳐든다
왜 축축한 벙커 속에서 남의 여인의 알몸을 연상하며 아파해야 하는지
김밥 옆구리가 터져 밥알이 나오듯
피마저 나는지 축축한 감촉 따라 아픔 밀리는데
신바람 난 이야기는 막판 절정으로 치달아
벙커 통로엔 서로 다른 신음 섞여 묘한 소리 울려 퍼진다
더운 몸 식히려 나온 벙커 앞마당
고지 위 밤하늘엔 그리운 얼굴
아아
그녀가 하얗게 달 되어 부풀어 있다
그때 포대 경 속으로 보이던 북쪽의 부드러운 낙타봉 능선
그곳으로 겨눈 M60 총구
누굴 쏘려는가
웃던 전우들의 얼굴이 사라지며
난데없이 들리는 부엉이 울음
웅웅
슬피 감기는
아, G.O.P 철책...
험한 산길 까만 점하나
물통 벗고 비탈길 앉았다
엠원 소총 철모에 앉혀 놓고
기다림의 마음 다시 약속하며 장전하는 담배 한 개비
퍼지는 그리움
발밑 풀 속에 그녀가 있다
깨곰 나무에 매달린 하얀 손톱
살며시 피어오르는 고소한 향기
어서 올라가야지
고지 위
하늘로 늘 찾아와 웃는 그녀
가파르던 산
쑥쑥 가라앉는다
-'깨곰 나무' 전문 -
첫댓글 필승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다른거 몰라도 사단 훈련소 마치고 자대배치( 39연대3대대9중대)적근산 독립중대에 가니 내무반에서 콩나물키우지 병장들 깔깔이입고 있지 말년병장들 왜그리 늙었는지 국방색동내의에 이 주머니 달아주던 고참생각 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