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주간 시사저널에는 [위험한 의학상식]이란 제목하에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의학상식에 대한 글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그 글을 보면서 참으로 건강은 사람들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된다. 실제로 건강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모르고 산다. 의사들도 그 중의 한 사람일 수가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이란 상당히 추상적이고 미래적인 사항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건강할 때 자신의 건강을 챙겨놓을 정도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평상시의 건강 개념이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다소 유별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놓여진 소화기를 찾지 않는다. 소화기가 손 가까운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타고 있는 동안 요즘 사람들은 대체로 119로 전화하는 데 시간을 소모하는 경향이 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에 적신호가 울릴 때 쯤이면 무엇인가 그럴듯한 '커다란'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경향이 있다.
어떤 수를 쓰든 질병을 확실히 낫게 해주겠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의 소위 '비방'에는 상체를 숙이고, 질병이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나을 확률이 어느정도에 불과 하다는 사람들의 진정한 말에는 발길을 돌리는 수가 많다. 그런 사람들의 문제의식은 '진실'이 문제가 아니라 '희망'이 문제인 것 같다. 즉 어떤 질병을 이렇게 저렇게 고칠 수 있다는 발언들이, 어떤 질병을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요정도 밖에 고칠 수 가 없다는 발언보다 신빙성을 가지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희망사항과 사실사항 중 어느 것이 진실에 더욱 가까우냐 이다.
어떤 경우에는 희망사항만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농부가 평생을 뼈빠지게 일하며 살아오다가 청천벽력 같은 암 선고를 받았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생이 암이라는 '뜨내기'에 의해 점령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에게 있어 암이라는 의미는 청하지도 않은 불청객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인생을 아직은 '영위해야 할 무엇'이라는 믿음으로 살아 왔다. 그런데 암이라는 무엇이 그러한 그의 믿음에 쐐기를 박고 있다. 그는 절대로 굴복할 수 없으며 굴복하지 않는 어떠한 방편이라도 찾아 나설 각오를 한다. 이러한 경우에 '희망사항'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는 아직 살 수가 있을 것이고, 또 살아야 하는 보편타당성의 명제를 획득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그에게 문제는 '삶'의 문제일 수밖에 없고 그 외의 문제들은 그림자 속으로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진실'이 검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많은 부분들이 그의 '희망사항'이라는 욕구에 의해 포장되곤 한다. 문제는 그러한 포장들이 사실 또는 진실과는 관계없이 다만 그의 감성적 욕구의 물결을 탄다는 사실이다. 그는 '거의 환상적으로' 그 물결을 타면서 가망없는 희망을 되뇌인다.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 행복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희망사항의 세계에서 웃음을 짓고자 할 뿐, 그의 희망사항이 어떠한 빈약한 구조를 가지는 지에 대한 확인하고 싶지는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용기없는 자들의 도취적이고 자기 위안적인 '안락한 몰락'을 보는 것과 같다.
이쯤해서, 진정으로 우리가 문제를 대할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할 것인가를 한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종합병원 암병동에서 그들의 암과 투쟁하고 있다. 암이 걸린다는 뜻은 자신의 육신이 도저한 힘에 밀리어 부서지는 모습을 스스로 오롯이 바라본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만일 나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나는 어떠한 인생관을 기준으로 그러한 상황을 맞이할 것인가를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한 번 정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밀리고 몰리는 명절의 역사(驛舍)에서 사람들은 원칙의 문제를 잊는 경향이 있다. 무슨 수를 쓰든지 고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암표든 찢어진 표든 나를 고향으로 태워주기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이미 폐기된 구시대의 유물들에 아직 취하여 있는 듯 하다. 다시 말하지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정당한 목적은 정당한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 정당하지 않은 수단은 목적을 부서지게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비방(秘方)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오늘의 풍속도는 목적을 이미 잊어버린 사람들의 뿌리없는 수단적 삶의 한 단면이 아닐까 우려하게 된다. 그 점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사람들은 인식하고 '위험한 건강상식'이라는 자료를 게제한 듯하다.
참으로 그렇다. 위험한 것은 검증받지 못한 '유사진실'에 우리가 몸을 맡긴다는 이미 보편화 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들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