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 독립운동
김마리아, 36세. 김순애, 36세. 김양수, 38세. 김기택, 34세.
김재문, 35세 .김봉헌, 36세. 김영주, 37세. 김영희, 37세.
김영완, 37세. 김상수, 38세 김용표, 39세. 김용준, 39세.
김영필, 37세. 김호연, 36세. 김영기, 37세. 김구현, 36세.
김영창, 37세.
◦ 기미독립운동
미국의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상해에 망명한 지사들이 1919년 2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만주, 미국, 시베리아에도 대표단을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하였다.
‧ 1919년 2월 28일 동경 유학생 600여명이,
기독교 청년 회관에 모여 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여 독립 운동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 국내에서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
민족지도자 33인이 중심이 되어,
고종 장례일 인 3월 3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기회를 이용하여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1 운동은 전국의 남녀노소 학생, 상인, 농민, 노동자가 가담되어
(일본 측 통계 200만)
1,500여 회에 걸쳐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관헌에 체포된 자가
46,948명, 피살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나라가 일본에 합병된 후 일제의 삼엄한 무단 통치에서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기질 않았다.(광산김씨사에서)
국내에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부터
광복단, 조선국권 회복단 등의 단체가 결성되어
지하운동을 벌렸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위해 망명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대동단결 선언서(1917)와 무오독립 선언서(1918)를 발표하였다.
일본 도쿄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1919)를 발표하여
침략자에 대한 민족의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였다.
해외 독립 운동가들과 학생들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의암 손병희 등 국내 인사들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이것이 1919년의 3.1운동이다.
3.1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에 펴져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의 탄압으로 사상자가 2만 명이나 되었으며,
감옥에 투옥된 사람만도 5만 여명이 되었다.
김마리아(瑪利亞, 36세:1892년~1944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국회)최초의 여성대의원 김마리아
김마리아의 ‘독립운동나무’를 아시나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몇 달 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정신여고 전신)에 일본 경찰이 들이 닥쳤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여성 지도자
김 마리아(1892~1944)가 비밀리에 결성한 독립운동단체
‘대한애국부인회’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학교 건물을 수색하였다.
그러나 조직원 명부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모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한 김마리아는
일경들이 닥치기 직전에 3‘1운동과 관련된
비밀문서와 태극기,
한국 역사책 등을 교정 뒷마당에 있던
고목(古木) 구멍 속에 숨겨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이 나무는 수령(樹齡)500여 년으로
교목(校木)인 이 회화나무는 이후 독립운동 나무로 부르고 있다.
1919년9월 정신여학교에서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전국 15개 지부에서 2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열린 2·8독립선언 행사에 참석했고,
2·8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기고
국내에 들어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국에 전했다.
중국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오늘날의 국회)
최초의 여성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 악화돼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사망했다.
김마리아는 광복을 위해 헌신한 ‘한국의 잔다르크’였다.
정부는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을 위한
자료 발굴 추진계획을 밝혔지만
김마리아가 이끈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추진하려면
대한애국부인회 외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자료발굴도 병행해야한다.
김마리아 독립 투쟁역사가 깃들어 있는 ‘독립운동나무’는 이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정신여고가1978년 잠실로 이전하면서 교정 소유자가 바뀌었고
, 이 나무로 접근 할 수 있는 길은 사유지가 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 나무에 이르는 진입로 만이라도 확보해,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들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김마리아 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한 동상이
보라매 공원에 세워져있다.
출처: 2018년 8월6일 조선일보 A29 황인자 젠더 국정연구원
김순애(淳愛, 36세)도
황해도 장연 사람으로 서울의 정신여고를 졸업한 후
부산에 있는 초량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학생들에게 몰래 민족정신을 일께우고자
우리 역사를 가르치다가 탄로가 났다.
1911년에 중구국으로 망명하여 난찡(南京)에 있는
중화명덕 여자학원에 수학하였다.
1919년 1월, 김규식과 결혼하여 상하이로 옮긴 뒤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아사로 취임했다.
헤이룽장 국립사법대학교 학감,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엮임하였다.
1920년 백범 김구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배부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독립자금 모금도하였다.
일본정부 대신 및 친일파를 암살할 목적으로
대의용단(大義勇團을 조직하였다.
1923년에는 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
1943년에 상하이 한인여자 청년동맹간부로 활약하다.
1943년에 한국애국 부인회 재건대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된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김양수(良洙, 38세)는
와세다 대학 재학중 2.8독립선언에 참가하였다.
해방후 광산김씨 대종회 회장직을 여러번 지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엮임했다.
김기택(箕澤, 34세)과
김재문(在文, 35세)는
전남 함평 문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지방민을 동원하여 독립만세 집회를 가졌다.
미리 준비한 대창으로 무장하여
일본 헌병 파견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왜병에 대항하다
옥고를 치렀다.
김봉현(鳳鉉, 36세)은 군내 전역에서,
김영주(永柱, 37세)와
김영희(永凞, 37세)는
양성면과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영완(永玩, 37세)과
김상수(相洙, 38세)와
김용표(容杓, 39세)는
전북 고창 장날에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김용준(容俊, 39세.) 은
보성에서 참가하였다가 투옥되었다.
광복후에 대종중 이사회 의장을 엮임하였다.
김영필(永弼, 37세)은 진안에서.
김호현(浩鉉, 36세)은 진동에서
김영기(永기, 37세는 합천에서,
김구현(九鉉, 36세)은 의령에서,
김영창(永昌, 37세)은 안동에서
각자 고장은 다르나
그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자들이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