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분 | 남 한 | 북 한 | 비 고 |
총 병력 | 104,993명 | 203,380명 | 육,해,공, 해병 |
탱크 | 전무 | 242대(t-34) 소련제 | |
자주포 | 전무 | 176대(su-76) 소련제 | |
곡사포 | 91문(105㎜) | 172문(122㎜) | 1 : 6 |
항공기 | 22대(연락기 등) | 211대(yak-9, il-10등) | 1 : 9.6 |
함정 | 28(소행정 등) | 30(수송, 고속정) | 1 : 1.1 |
자료 : 한국전쟁사 제 1권, 국방부
▲ 전쟁이 시작된 위치를 알리는 38선
▷UN 안보리 긴급 소집·주일미군 출동
북한 침공군은
6월 25일 오전 6시경 옹진, 개성, 의정부, 춘천지역 전 전선에서 38도선을 넘기 시작했으며,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는 상륙작전이 이루어졌다.
병력·장비의 열세에다 경계강화태세까지 해제되어 전투준비태세가 부족했던 국군의 전선은
춘천지구(아군 제 6사단)를 제외하고는 파죽지세로 밀려, 서울은 사흘만인 6월 28일 점령당하고 만다.
▲ 전선시찰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은 물론, 자유세계가 놀랐다.
그리하여 미국시간 25일(일요일) UN안보리가 긴급 소집됐으며,
평화 파괴행위로 규정했다. 이어
① 북한군의 즉각적 적대행위 중지
② 군사력의 38선 이북 철회 요구안을 9:0으로 가결한다.
동시에
주일 미군 제 24사단 스미스부대가 최초로 참전하게 되었고,
우방 16개국이 우리를 도우러 한국으로 달려왔다.
6월 29일 새벽 맥아더 장군이 도쿄(東京)로부터 수원에 도착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한강으로 올라가 한강남쪽 제방에서 전투상황을 관측하다가 호 속에서 한국군 병사를 만났다.
「맥아더 장군과 병사와의 대화」
맥아더 : "자네는 언제까지 이 호 속에 있을 것인가?"
한국병사 : "예! 각하, 저는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때까지 여기 있을 것입니다."
장군 : "명령이 없을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병사 : "엣!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장군 : "오! 장하다, 자네 말고 딴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병사 : "옛! 그렇습니다, 각하"
장군 : "참으로 훌륭하구나! 여기 와서 자네와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병사 : "옛,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쳐부술수 있도록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장군 : "음.. 그리고 또 없나?"
병사 : "옛! 없습니다."
장군 : "알았네. 여기까지 와 본 보람이 있었군"
이때 맥아더 장군은
병사의 손을 꼭 쥐고 나서 통역을 맡고 있던 김종갑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에 돌아가는 즉시 미국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정일권장군 회고록 중에서).
그러나 침공군은 경부선 도로와 철도를 주공격으로 남진을 계속했다.
수원, 조치원, 대전, 추풍령을 넘어 대구 북쪽 왜관까지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고,
호남지방은 거의 무저항으로 공주, 전주, 군산, 목포, 하동, 진주를 거쳐 마산 서쪽 가야까지,
그리고 동해안은 영일만까지 장악하게 된다.
이제 남은 땅은 낙동강 하류 동쪽으로
동서 100㎞, 남북 130㎞의 자투리 땅 뿐이었고,
그 동남 끝단엔 부산이 있었다.
여기까지 온 기간이 6월 25일부터 7월 말까지 40일도 못되었다.
전세계는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지워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해상에서도 적군은 게릴라부대를
삼척, 울진 등지에 상륙시켜 후방교란을 획책하고 있었는데,
부산지역에 약 600여명의 편의 게릴라(민간복 착용)를 침투시키기 위하여
수송선 1척이 남하하던 중 6월 25일 저녁에 발견하여 계속 추적되어 오다가
26일 새벽 울산 앞 바다에서 한국 해군 백두산호(PC-701함)에 교전 중 격침되었다.
만약 이들 편의 게릴라 부대가
부산근처에 기습상륙 했더라면 한국 방어는 더욱 어려워졌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이 전면전을 담당하기에는 지휘체제가 미흡하였다.
그리하여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사령관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군 및 UN군이 단일사령부 지휘아래 통합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7월 하순∼8월 초순 약 10일간의 영동·김천지구전투에서는
적 전차부대가 신속한 작전으로 미군에게 계속 타격을 가하면서 추풍령을 넘고 있었다.
이때, (1999년 9월 29일 AP의 첫 기사로 세계에 알려진)
'노근리사건'이 7월 26일 영동읍 노근리에서 불행한 사건이 다음과 같이 발생한다.
당시 적군은 피난민 대열속에 게릴라정찰대를 민간복으로 변장 침투시켜
정보수집, 사탄유도(射彈誘導), 지뢰매설, 보급차 습격, 포진지 기습 등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렇게 피난민 속에 위장하여 침투하는 북한군을 가려내는 전투중
불행한 민간이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다.
작전일지에 의하면 50여명의 피난민 무리가 철도를 따라 남하하는 것을
적군으로 오인, 불가피한 오발포를 한 사고로 기록되고 있으나,
피난민쪽에서 선제공격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당시 적군은 이곳에 피난민들을 한 줄로 앞세워
논, 밭등을 지나가게 하여 지뢰매설 여부를 확인하는 작전도 감행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2006년 5월 29일 AP통신은 존 무쵸 전 주한미국 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UN군 당국은 최전방에서 피난민 집단의 접근에 대한 전투지침을 작전부대에 하달하였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 '양민학살'의 근거라고 주장, 여론을 왜곡시키고 있다.
□ 낙동강전선 방어작전(防禦作戰)
1951년 2월 17일 맥아더사령관이 수원비행장에서
한국군의 정일권, 백선엽장군등과 만날 때 백선엽장군이 맥아더사령관에게 "We go togetger!"라고 하고 있다.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가급적 북방에서 적군을 저지하고, 인천에 상륙하여 이를 협공한다"는 전략구상 하에,
우선 일본에 있던 미 제 24사단을 한국에 급파, 적군의 남하저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북괴군은
최신식 전차와 야포, 그리고 잘 훈련된 보병으로 아군에게 재정비의 시간을 주지 않고 속전을 강행하였다.
후방에서는 게릴라전으로 남한내 불순분자들을 동원하여
UN군 병참선과 통신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병행하였으므로
미군은 피아(彼我)분간이 어려워 혼전을 피할 수 없었다.
'부산 교두보'(차후작전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지점 : 경상남북도의 ⅓)를 사수하기 위하여
분전한 약 50일간의 진지 사수작전(陣地 死守作戰)을 되돌아 볼 때,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감사한다.
□ 유엔군의 총반격작전(總反擊作戰)·북진(北進)
UN 공군의 폭격으로 행동이 완전히 제한된 적군은 9월 총공세가 실패하자
전투능력 상실과 최악의 병참지원, 피로 중복, 영양결핍, 패전감, 무자비한 지휘통솔 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9월 16일 9시를 기해
미 제 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호응하여,
낙동강 전선에서도 UN군 및 국군이 총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 인천 상륙 작전, 서울탈환
9월 15일 새벽 6시 30분
미 해병 제 1사단 제 5연대의 289명 병력은
인천의 월미도 상륙작전에 성공했으며 이로써 근 3개월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6·25남침 3일만에 서울을 잃은 직후,
맥아더 장군은 수원근방 전선을 시찰할 때 이미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이 작전이야말로 전략, 전술적인 면 뿐만아니라 정치적, 심리적 효과가 극대에 달할 것이고,
더 나아가 호남 곡창에 있는 전략물자인 쌀을 북괴군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이
한국 국민에게 더 없는 값이 될 것이라고 장군은 역설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기의 大도박'(성공확율 5천대 1)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상륙작전계획을 구체화하여 워싱턴에 보고한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확인 토의하기 위하여
'콜린스' 장군과 '서먼' 제독을 특사로 극동사령부에 파견한다.
8월 23일에 맥아더 장군은
특사단에게 약 한시간 동안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타당성 설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결론을 맺는다.
"만일 나의 판단이 빗나가 승리할 수 없는 방어로 돌입한다면,
나는 몸소 그 곳에 나아가 상륙군이 피나는 좌절을 맛보기 전에 철수시킬 것이다.
그때 유일한 손실이란 나의 직업적인 명예뿐일 것이다.
그러나 인천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인천은 성공한다. 그것은 10만명의 생명을 구할 것임."
훗날 콜린스 장군은 그 연설이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미 해군함정 226척을 포함한 총 261척의 상륙작전 기동부대는
약 75,000명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고 있는 미 제 1기갑사단과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 7사단 병력이 9월 26일 서정리(오산∼평택간)에서 합류한다.
한편 같은날,
한미해병대는 연희동 및 마포 쪽에서 중앙청 쪽으로,
미 제 7사단 병력 일부는 서빙고, 뚝섬방향에서 서울시내 쪽으로,
그리고 국군 제 17연대는 하왕십리로 진출하여 전략요지인 망우리를 점령한다.
9월 27일 새벽 서울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6시 10분 한국해병 제 2대대 6중대 1소대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9월 28일 10시경(종군기자들에 의하면) 명동의 교회당을 비롯한 많은 교회에서
서울탈환을 축하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로써 89일간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은 자유를 다시 찾았고,
9월 29일 12시 서울 환도식 이후부터는
눈앞에 다가온 통일만이 남은 과제임을 다짐하며 희망의 10월을 맞는다.
9월 29일 맥아더 원수는
서울을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 하에 넘기는 식전에서(환도식)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UN기 아래서 싸우는 우리군대는
한국의 수도를 해방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전제적 지배에서 해방된 시민은
다시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제일로 하는 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귀국이 입은 전쟁의 참화에 대하여
전 세계는 깊은 관심과 우의로 단호히 궐기하여 전력을 다하여 귀국을 구원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육체를 살리려면 정신을 살리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UN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본인은 각하에 대하여 귀국 정부의 소재지를 회복하고,
이에 따라 각하가 헌법상의 책임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한국 국민에 대한 책임을 각하와 귀 정부에 맡기고
본관과 부하장병들은 다시 군무에 전념할 각오입니다."
□ 북한진격(北韓進擊)
9월 29일 UN 총사령부는
모든 작전부대에 대하여 일단 38도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6·25의 불길 속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국토통일'인데...
이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군 수뇌들을 불러 비장한 결의를 다짐했다 - [단독북진!!]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총사령관과의 대화」
이승만 대통령 : "국군의 통수권자는 맥아더냐? 아니면 이나라 대통령이냐?...
UN은 우리가 38선을 넘어가서 국토통일을 이룩할 권리를 막을 수 없다..."
국군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 :
"...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이미 대통령 각하께서 서명하신 문서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에게 이양되었으므로
지금 다시 이중으로 명령을 내리시게 되면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또한 북진에 관하여는 UN에서도 곧 결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좀더 형세를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은 다만 군사지위 계통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고,
대통령각하께서 국가 대계로 보아 꼭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희들은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어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건넸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개시하라"['晩'자의 서명]
정일권 총사령관은 강릉지구로 북진하고 있는 1군단장 김백일 소장에게
"작전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국군이 반드시 점령해야 할 38선 북방의 뚜렷한 지형지물이 없겠는가?"
정일권 장군은 제 1군단장의 회신을 받고, 워커 8군사령관과의 협의,
"38선 바로 북쪽 ○○고지로부터 적의 저항이 치열하여 국군이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이를 점령 안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일권 총사령관은 다음날 제 1군단 사령부를 방문,
최전방 제 3사단(이종찬 대령) 23연대 작전지역으로 나아가 전선을 시찰, 그곳에서 38선 돌파를 명령했다.
10월 1일 국군 제 3사단 23연대(김종순 대령), 22연대(김응상 대령)도 이미 월선 직전에 있었는데,
정일권 소장은 전방시찰 중 23연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현 전황 어떤가?"
"한 사람도 월북 안했습니다."
"뭘 꾸물꾸물하고 있어! 빨리 북진해!
맥아더 사령부는
10월 1일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10월 2일 북진을 명령하였다.
10월 5일 중부전선에서 국군 제 6사단이 월선북진을 시작했고,
제 3사단 23연대와 24연대는 교호로 선두전진하며 하루 24㎞씩이나 북진하였다.
10월 7일
"한국 평화통일에 관한 8개국 결의안"이
UN에서 찬성 47 / 반대 5 / 기권 8로 가결되었는데,
제 2항에 "UN군은 한국 통일정부 수립에 필요한 기간을 넘어서서,
한국의 어떠한 지역에도 머무를 수 있음"이라 했다.
[에피소드]
백선엽 제 1사단장은 10월 6일 미 제 1군단 본부에서 '작전명령'을 수행하라는 연락을 받고,
단독으로 청주에서 대전으로 가서 작전명령을 받아 보고 매우 실망하였는데,
평양 공략을 포함한 북진계획에 제 1사단은 예비대로서 해주 공격의 임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다음은 그의 수기의 일부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다시 한 번 간청을 했다.
"밀번 장군! 평양은 저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평양까지의 도로나 지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여기 평양까지 가는 도로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차량의 기동에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에선 어떤 경우에는 차량보다 도보행군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단에게 임무를 주십시오.
그러면 밤낮으로 도보행군을 강행하여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하여 보이겠습니다."
나는 어느새 흥분하고 있었다.
평양 탈환은 기어코 내 손으로 이룩해 보겠다는 의지가 감정을 자극해 버린 것이다.
밀번 장군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두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교차하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초조와 불안과 분노의 격류가 온 몸을 휘감고 드디어 두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와 버렸다.
나는 위신도 체면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번 장군앞에서 울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도 평양 공격의 임무를 원합니까? 제너럴 백"
"원랍니다! 꼭 맡겨 주십시오, 밀번 장군!"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제 1사단의 기동력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없이 평양을 탈환해 보이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훌륭한 전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제너럴 백! 당신의 애국심과 용기를 샀습니다."
결심을 한 그는 행동이 빨랐다.
즉시 참모장을 전화로 불렀다.(하략)
10월 20일 평양시내의 수많은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군과 UN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평양거리를 메웠다.
10월 21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인산인해를 이룬 평양시민 대회에 참석했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러분!
만고풍상을 다 겪고 39년 만에 처음으로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에 들어와서
사모하는 동포여러분을 만날 적에 나의 마음 속 감상을 목이 막혀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40년 동안 왜정 밑에서 어떻게 지옥생활을 했던가를 생가갛면 눈물이 가득합니다..."
평양입성의 선봉으로 영예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은 국군 제 1사단은 멸공통일의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짐했다.
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는 미군 첫 평양돌입 부대인 제 5기병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
이때 그는
96일전 포항에서 처음으로 상륙했던 200명 가운데 고참병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보라고 말했다.
나온 병사는 겨우 5명, 그 중에서 3명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 중부전선 : 국군 제 2군단(제 6, 8, 7사단)은
덕천, 희천, 온정리를 거쳐 10월 26일 초산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 동부전선 : 국군 제 1군단(제 3사단, 수도사단)은
10월 10일 원산 진출(제 3사단), 10월 17일 함흥, 흥남에 진출(수도사단)하였다.
10월 26일 미 제 10군단이 이원(利原)으로 상륙하여
미 해병 제 1사단과 미 제 7사단 일부 및 국군 3사단 일부는 혜산진까지(11월 21일)
그리고 수도사단은 11월 24일 현재 청진까지 진출한다.
□ 중공군(中共軍)의 개입(介入)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Wake)섬에서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UN군 사령관의 회담이 열렸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동란에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은 이미 일주일전,
10월 7일부터 약 12만의 중공군이 압록강 및 두만강을 도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 속에서 10월 24일 국군 제 6사단 1연대에서
중국공산군 포로 1명을 나포하여 사단장에게 보고하였으나
"대수로울 것 없다. 계속 북진!"했고,
10월 25일 제 6사단 2연대는 온정리 서북쪽에서 중공군과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때 중국공산군은 꽹과리와 피리를 불면서 공격해왔다는 보고 등 중요한 판단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 26일, 제 6사단 7연대 1대대 수색소대는
초산을 거쳐 압록강에 가서 태극기를 꽂고, 대통령께 진상할 압록강 물을 담아왔다.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은 11월 1일 청천강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면서 중국공산군과의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UN군이 동서로 분단되어(미 제 8군과 제 10군단) 서로 독립작전을 실시함으로써
동·서간 50마일의 공간이 형성되어 군수 보급문제 등 제반작전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1950년 10월과 11월에 한국전선에 투입된 중국공산군 병력은 9개군단, 약 36만명으로 추산된다.
(휴전시까지 100만명으로 추산)
중국공산군이 참전하자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청천강 지역에서 11월 24일 미제 8군은 총공격을 시도하였는데
이에 맞선 중공군 주력 5개 군단은 11월 25일 근대미문의 인해전술로
일대반격을 감행하여 UN군의 북진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12월 1일 UN군에게 청천강 남안으로의 철수를 강요하였다.
□ 평양 철수작전(作戰)
서부전선 UN군은 가급적 접전을 회피하면서 청천강 방어선에서 철수하였고,
국군 제 1사단 15연대가 12월 14일 최종부대로 평양을 철수하였다.
이 작전에서 가장 위협이 되었던 것은
동측으로부터의 중국공산군의 포위였다.
특히 미 제 1기병사단과 터키 여단, 영국군 제 27여단은
미 제 8군 우익에 투입되어 이 철수 작전을 엄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 장진호 지구 전투(戰鬪)
11월 27일 이 지구에 투입된 중국공산군 제 3야전군 주력인 6개 사단 약 10만명 병력에 의해,
장진호 서측을 통과하여 북진중인 미 해병 제 1사단이 완전 포위를 당하고,
호수 동쪽에 있던 미 제 7사단의 2개 대대도 돌파를 당하였다.
알렉산더 헤이그(당시 10군단 참모, 전 미국 국무장관)의 증언에 의하면
11월 말경 상당히 지친 모습을 한 중공군 포로 26명을 알몬드 10군단장이 직접 심문하였는데
그들은 10월초에 이미 투입된 것으로 확인됐다.
미해병대는 전혀 예기치 못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영하 30도의 강추위, 1m이상의 폭설 등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그대로 동사했으며
사상자 수는 4천 4백여명에 이르렀고, 미군 전쟁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함재기(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전투기), 공군기의 지원과 엄호를 받으며
적을 화력으로 제압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겨우 12월 9일
제 1연대 1대대가 미 제 3사단 특수임무 부대와 합류에 성공하여
흥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 흥남 철수작전
국군 13,000명 미군 31,000명 등 모두 44,000명이
12월 11일 흥남항에 집결 14일 승선을 개시하면서 철수 작전이 시작됐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눈이 오는 날은 백색 위장복을 착용하여 교두보를 침투 위협하였으나,
미공군의 근접지원 폭격, 해군의 함포사격 등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되자 12월 21일 인해전술을 포기하고,
북한군 단독으로 공격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 1950년 12월, 미국상선 메레디스호(7,600톤, 승조원 59명)에
피난민 14,000명을 싣고 3일간 거제도까지 항해도중 5명의 신생아 등 전원 무사히 도착.(기네스북에 게재)
12월 24일 미 제 3사단 병력이 승선 완료함으로써
흥남철수 작전은 성공리에 완료되었다.
흥남에서의 민간 피난민 소개작전은
6·25동란 가운데 으뜸가는 '모세의 기적' 같은 역사였고 '한국의 모세'
또는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릴 현봉학 박사(의사)는 한국전쟁사에 기리 빛날 것이다.
현봉학씨는(1922년 청진생) 당시 제 10군단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피난민을 함께 승선시킬 수 없다는 군단장에 애원하여 98,100명(상당수가 기독교인)의 생명을 구원하였다.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 및 포니 해병대령의 증언)
수송선 7척, LST6척 도합 13척에 10만명 가까운 피난민들이
선박 구석구석, 차량 밑, 장갑차 위에까지 쪼그리고 앉아 거제도까지 홍해를 건너는 심정으로 실려왔다.
김성은 장군(당시 해병연대장) 증언에 의하면,
"현 박사가 해병대 통역관으로 있을 때 전투 중 부상당한 해병대원에게
그 자신의 혈관과 부상병 혈관을 직접 호스로 연결하여 피를 넣어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 6·25가 남긴 것
세계 전쟁사상 유례가 없었던 전쟁포로들의
'본국 송환 거부'(반수 이상이 거부),
'포로수용소 폭동'(수용소장 돗드 준장 납치),
'반공포로석방'(이승만 대통령의 영단) 등으로
휴전회담이 정치문제화로 혼란을 초래한
'포로문제'와
'전투경찰의 작전' 문제(예 : 개성철도 경찰대의 전원 순국, 주요시설 보급로 경비,
피난민 정리, 후방게릴라 소탕 합동작전 등)를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휴전에 들어가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한미 군사방위조약의 체결', '연간 경제원조 2억 달러',
'국군 20개 사단 증강 및 해·공군력 강화' 등을 보장 받았다.
피아 군인의 사상·실종자가 230만명,
남·북의 민간인 250만명,
피난 이재민 320만명,
공산측에 의한 학살·납치 37여만명,
전쟁고아 10여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모든 것이 부서졌고 불타버렸다.
6·25이전에 월남한 동포 100만명,
전쟁시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60여만명,
반공포로 약4만명 등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를 택했다.
전선에서의 포성과 살상이 멎은 지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
6·25를 다시 조명해 보며 그 의의를 느껴보는 일에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한반도의 반(半)인 북쪽에는 아직도 고통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민족을 유지시켜 주심은 무슨 뜻일까.
6·25때의 그 결정적인 순간순간들을 조관하셨음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한다.
첫째, 미국을 들어 신속하게 쓰셨다.
안보리의 긴급회의 시 소련 대표를 불참토록 하였고
UN으로 하여금 파병토록 하심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둘째, 미국으로 하여금 50년 전에 세계평화의 씨앗을 이 땅에 심어주셨다는 일이다.
한 전투에서 추위에 동사한 약 7천명의 미국 해병대원들을 비롯하여
16개국에서 온 15만여명의 젊은이들이
왜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야 했는지...
그들 국가의 요청에 응해 이 땅에 와서 한국을 지켜주는 거름이 되도록 하였는지...
셋째, 6·25전쟁은 한국 선교뿐 아니라 세계선교를 위하여
그 결과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나타나는 것 같아 놀랍고도 놀랍다.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애태우던 북한 신앙인들을 끌어내렸고,
흥남에서 실어 날라 더 넓게 복음이 전파됐고,
지금은 전세계 방방곡곡에 선교 일군이 나다니게 되었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와서 싸워준,
그리고 그 청춘들을 받친 16개국 국민들과
의료지원을 해준 5개국 국민들에게 감사드린다.
▶참전(전투병력 파견) 16개국 :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델란드, 그리스, 터키,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디오피아,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 콜롬비아
▶의료지원국 5개국 :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 인명피해
- 피아군인의 사상·실종자 : 230만명
- 민간인 : 250만명
- 피난·이재민 : 320만명
- 공산측에 의한 학살·납치 : 37여만명
- 전쟁고아 : 10여만명
- 이산가족 : 1,000만명
- 월남한 동포, 북한피난민, 반공포로 : 204만명
□ 참전국별 참전자 및 전사자 현황 (단위 : 명)
국 가 | 참전자 | 전사자 | 국 가 | 참전자 | 전사자 |
미국 | 1,200,000 | 36,940 | 이디오피아 | 3,518 | 121 |
영국 | 56,000 | 746 | 벨지움 | 3,498 | 99 |
캐나다 | 26,791 | 516 | 프랑스 | 3,421 | 262 |
터키 | 14,936 | 741 | 남아공화국 | 826 | 34 |
호주 | 8,407 | 304 | 룩셈부르크 | 83 | 2 |
필리핀 | 7,420 | 112 | 인도 | 627 | 0 |
태국 | 6,326 | 129 | 노르웨이 | 623 | 0 |
네덜란드 | 5,322 | 120 | 덴마크 | 630 | 0 |
콜롬비아 | 5,100 | 163 | 스웨덴 | 162 | 0 |
그리스 | 4,992 | 192 | 이태리 | 128 | 0 |
뉴질랜드 | 3,794 | 23 | 계 | 1,352,604 | 40,504 |
□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들
이 사진들은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것.
▷해방, 미군 서울 입성과 한국정부 수립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
▲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
▲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 1949. 3. 제 5차 소련 최고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오른쪽 끝)과 박헌영(김일성 바로옆 안경쓴 사람)
▲ 1945. 8. 평양 붉은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을 환호하고 있다.
▲ 1949. 9. 6. 미군사고문단이 국방경비대에서 기관총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 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1950년 6월 25일 북괴남침
▲ 1951. 7. 10. 적진을 향해 불을 뿜는 155mm 곡사포.
▲ 1950. 7. 6. 전란으로 잿더미가 된 평택역.
▲ 1950. 7. 7. 전란 중의 천안 시가지
▲ 1950. 7. 7. 미군이 포항으로 상륙하고 있다.
▲ 1951. 6. 3. 155mm 곡사포가 불을 뿜고 있다.
▲ 1950. 11. 유엔군이 원산에 상륙하고자 상륙용 소형 함정에 옮겨 타고 있다.
▲ 1951. 6. 22. 임진강 부교로 전차가 지나려 하고 있다.
▲ 1951. 7. 3. 유리한 고지를 뺏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 1951. 9. 6. 금수강산을 초토화시킨 포탄 껍질들.
▲ 1950. 7. 24. 경북 예천, 평화롭던 마을에 전차가 들어오면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된다.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1950. 7. 29. 야간 전투 후 주간 취침.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 1950. 8. 2. 금강철교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1950. 12. 29. 양평, 생포된 포로들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고달픈 피난행열과 1951년 1.4후퇴
▲ 1950. 7. 29. 안동군민들의 피난 행렬.
▲ 1951. 1. 9. 강릉, 1. 4 후퇴로 눈길에 다시 피난을 떠나고 있다.
▲ 1951. 4. 23. 중공군 춘계대공세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 1951. 6. 27. 다리 부상으로 소를 타고 피난길에 나서다.
▲ 1951. 7. 4. 철원, 군 트럭에 실려 피난을 떠나고 있다.
▲ 1951. 7. 19. 강원도 화천, 감자를 캐는 화전민 사람들을 수용소로 데려가고 있다.
▲ 1951. 9. 11. 경기도 동두천, 군인들의 통제 아래 피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 1951. 8. 20. 마곡리
▲ 1950. 8. 20. 경북 어느 지역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를 타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할아버지 등에는 온갖 가재도구가 짊어져 있고, 오른 손아귀에는 손자가 잡혀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표를 사고자 늘어선 피난민들로 남녀노소없이 피난 봇짐을 이고 지고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꼭 필자의 고향(구미) 마을 같다. 온갖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피난민 행렬.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 1950. 8. 24. 경북 왜관 부근.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 1950. 8. 25. 장소 미상, 기총소사에 쓰러진 피난민들.
▲ 1950. 9. 6. 경북 칠곡 다부동, 가도 가도 끝없는 피난 행렬.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기타(전쟁중 국민생활 상)
▶참전국
참전국 참전일 참전부대 참전군(명/연) 전사(명) 부상(명) | 1. 미국 1950.06.27 육. 해. 공군 5,720,000 54,246 103,284 | 2. 영국 1950.06.29 육. 해군 57,000 729 2,538 | 3. 호주 1950.07.01 육. 해. 공군 8,047 304 1,040 | 4. 캐나다 1950.07.05 육. 해. 공군 25,579 312 1,212 |
참전국 참전일 참전부대 참전군(명/연) 전사(명) 부상(명) | 5. 네덜란드 1950.07.16 육. 해군 5,322 120 645 | 6. 프랑스 1950.07.29 육. 해군 3,421 262 1,008 | 7. 뉴질랜드 1950.07.30 육. 해군 5,144 23 79 | 8. 필리핀 1950.09.20 육군 7,420 112 229 |
참전국 참전일 참전부대 참전군(명/연) 전사(명) 부상(명) | 9. 남아공화국 1950.09.26 공군 826 34 0 | 10. 터키 1950.10.17 육군 14,936 741 2,068 | 11. 태국 1950.11.07 육. 해. 공군 12,845 129 1,139 | 12. 그리스 1950.12.04 육. 공군 10,581 196 543 |
참전국 참전일 참전부대 참전군(명/연) 전사(명) 부상(명) | 13. 벨기에 1951.01.31 육군 3,498 101 349 | 14. 룩셈부르크 1951.01.31 육군 89 2 13 | 15. 에티오피아 1951.05.06 육군 3,518 121 536 | 16. 콜롬비아 1951.05.08 육. 해군 5,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