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준 <기독교호남신문>
베를린 한인교회 골방 기도
믿는 자들의 기도는 생활의 한 부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기도로 소통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기도로 아뢰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성경과 성령의 감동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 없는 생활을 영혼의 호흡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베를린에 유학중인 김용주 목사님네 집은 연립주택 3충 건물의 2층이었다.
방 두 개에 거실이 있는데, 그가 담임하는 반석교회 새벽기도회를 그 집 큰방에서 모였다.
교인들 십여 명이 모이는데,
설교와 찬송과 기도 소리가 밖이나 위아래 이웃에 들리지 않게 창을 잘 닫고 두터운 커튼을 쳤다.
출입하며 계단을 오를 때도 고양이 걸음처럼 조심조심했다.
기도회 인도를 맡은 나는 가족예배 분위기로,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찬송하고 설교도 짧게 했다.
가깝게 둘러앉아 마주보며 대화하듯 20분쯤 예배를 인도하고는 각자가 개인으로 기도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찬송이나 기도 소리가 이웃에게 들리면 안면방해로 금방 경찰에 신고 되니 조심하는 것이다.
아! 목소리 높여 찬양하고, 부르짖어 간구하고,
때로는 통곡하는 기도로 내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한국 교회가 너무너무 그리워진다.
한국 교회가 누리는 행복이며 축복 아닌가.
김 목사님이 담임하는 베를린반석교회는 주일예배를 독일 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모였다.
현지인들의 오전예배가 끝나면 반석교회는 오후 2시에 예배를 드렸다.
수요일 예배도 그렇게 드리지만 새벽기도회는 교통이 불편해서 목사님 댁에서 모이는 것이다.
참석하는 사람 거의가 유학생들이었다.
그들의 기도 모습은 간절했다.
학위를 받는 문제, 전문직으로 실력을 쌓는 일, 외국에서의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귀국해서 설 자리를 잡는 것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일들이 당면한 기도꺼리였다.
전 교인이 3일간 여름수양회를 하면서도 그런 기도가 이어졌다.
기도마다 조국의 평화와 경제발전 그리고 한국 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구했다. 모두 애국자가 된 것이다.
1960년대 파독간호사로 갔다가 그곳에 주저앉은 몇 분과는 지나간 시절,
고국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교제를 나누었다.
그들도 새벽기도를 하면서 밝아지는 동쪽 하늘처럼 믿음의 소망과 위로와 행복을 가슴에 부풀게 채웠다.
예언자 이사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그 병을 낫고는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기도했다고 간증한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것 같다.
작은 제비가 어떻게 울고, 목이 긴 학이 누구를 보며 어떻게 울었을까.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하는
복음성가의 노랫말처럼 눈물을 쏟으며 신음하듯 마음을 토하는 것 같다.
외국에서의 깊은 시름과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내 편이고 내 하나님이시다.
김 목사님은 유학 15년 만에 훔볼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도에 지도교수 한 분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논문심사가 지체되고
또 신학적 이견으로 많은 토론을 거쳤다.
그의 간증처럼 ‘간신히’ 그러나 ‘당당하게’ 논문을 발표하고 학위를 받았다.
그래도 세 아들이 독일 학교에 들어갔고,
아내는 음습한 기후 적응이 힘들었지만 순간순간을 은혜로 살았다.
기도로 영혼의 호흡을 하며 지냈던 섭리의 과정을 거쳤다.
김용주 박사는 분당두레교회를 담임하면서 총신대학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함께 기도했던 어떤 분은 대학교수로, 어떤 분은 음악인으로 활동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김용주 청년이 전남대학과 총신대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독일로 떠날 때 젊은이 몇이 밤새워 찬양하며 기도 했었다.
‘엘리야는 예언자로서 권세자에게 쫓겨 골짜기에 숨었지만
까마귀가 날마다 아침과 저녁에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네.
자네가 공부하는 동안 넉넉하지는 못해도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이네.’ 하고
믿음의 심지를 돋아주었다.
그의 아내도 기도로 하루하루를 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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