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산행길
최현아
‘맨발 걷기’가 유행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요즘 산을 오르다 보면, 맨발로 걷는 사람이 눈에 많이 띈다.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 발을 빤히 쳐다보게 된다. 나도 한번 해볼까 마음속으로 생각하지만, 혹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들도 이상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진 않을지, 뾰족한 돌이나 깨진 병에 찔려 발에 상처가 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최근에 숲길 중간마다 푹신한 짚이 깔렸다. 짚이 깔린 길이 끝나니, 흙길, 자갈길이 나온다. 운동화를 신고 걸을 땐, 머릿속엔 온통 그날 해야 할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급하기만 했다. 주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유로운 마음이 생겨, 산 주위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며 천천히 걷는다.
2주 전부터 맨발 산행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서는 순간부터 산을 오르기까지 주위 풍경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도로와 밭 사이에 빗물 등을 흘려보내는 배수구 주위에 이름 모를 잡초, 바위틈에 자란 돌나물, 푸른빛을 뽐내는 개불알꽃, 민들레가 피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수수꽃다리와 비슷하게 생긴 연보랏빛 라일락꽃과 그 향기가 내 발을 멈추게 한다. 수수꽃다리는 연한 자주색이지만 라일락의 꽃 색깔은 그보다 진한 보라색이다. 4월과 5월 사이에 피는 이 라일락 꽃향기가 좋아 며칠 전에는 향수를 샀다. 찔레꽃처럼 라일락꽃도 먹을 수 있다는 지인의 말에 꽃잎을 따서 입에 넣고 씹으며 맛을 음미해 본다. 꽃잎 맛은 약간 쓴맛 외에 별다른 맛이 나지 않았다.
독산성에 오르는 길은 많다. 나는 주로 고가도로를 지나 홍매화 식당과 교회 사이에 있는 길을 이용한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독산성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온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양손에 신발 한 짝씩 잡고 짚으로 깔린 오솔길을 걷는다. 짚으로 깔린 길은 폭신해서 걸을 만하다. 조금 걷다 보니 짚 길은 없어지고 흙길이 나온다. 뾰족한 돌에 닿으니 발이 따끔거린다. 혹시 주변에 개똥이 있는지, 뾰족한 돌은 없는지 나도 모르게 기웃기웃한다. 운동화를 신고 산길을 걸을 땐 빠른 걸음으로 걷거나 거의 달리듯 산을 오르내렸다. 맨발로 걷다 보니 발바닥이 아파 걸음이 느려지고 숲 주변을 살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맨발로 걸을 땐 시선은 바로 앞 지면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고개를 숙이니 나의 발 앞에서 먹을 것을 입에 물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들이 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화장품 냄새를 맡은 건지 몸을 숨겼던 벌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공격한다. 이름 모를 벌레, 길섶에 핀 야생화에 눈길이 간다.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면 평생 이 들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을 거다. 이미 갈색으로 변한 겹겹이 쌓인 솔잎을 밟았을 땐 자연이 선물한 폭신한 매트리스 느낌이었다. 이름 모를 새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나도 새소리 흉내를 내 인사를 한다. 상록침엽수에 서식하며 나무를 오르내리는 청설모를 보고 사진을 찍는다. 산 중간마다 핀 진달래, 이미 다 떨어진 벚꽃잎을 밟으며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를 떠올린다.
독산성에 오르는 길 주위엔 무덤이 많다. 산 중간마다 사람들이 운동할 수 있는 기구와 평상이 있다. 무덤을 바라보며 철봉을 하는 아저씨를 보니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 인도 바라나시가 생각난다. 갠지스강에서는 목욕도 하고, 그 물을 마시기도 하고,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해서 강에 뿌리기도 한다.
조금 더 걷다 보면 보적사(寶寂寺)에 오르는 길과 유아 숲길 오르는 갈래 길이 나온다. 맨발 산행할 땐 산림욕장이 있는 유아 숲길이 안성맞춤이다. 독산성에는 잣나무, 소나무 조림지가 넓게 분포해 있다. 2015년 경기도 보건 환경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독산성 산림욕장은 피톤치드 농도가 높은 편이란다. 신선교와 서랑동 저수지에 이르는 숲길이 있다. 4월에 벚꽃이 날리면 마치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아름다움다운 길이 연상된다. 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리며 떨어지는 날에는 벚나무 사이로 매튜와 앤이 마차를 타고 지나갈 것만 같다.
평상에서 쉬고 있는 어떤 아저씨가 나의 발을 보고 맨발 산행의 부작용에 대해 말을 한다. “맨발 산행은 지압 효과와 혈액순환 다이어트에도 좋아요. 하지만, 발에 부상이나 상처의 위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라며 목소리를 높여 나에게 당부한다.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인간의 모든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장단점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관리소 앞 놀이터 주변에 빗물이 고여있다. 오후가 되니 비가 그치고 날이 갰다. 빗물에 젖은 숲길을 맨발로 걸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오늘은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 산행하기 쉽게 샌들을 신고 집을 나섰다. 촉촉하게 젖은 솔잎이 쌓인 길과 흙길 웅덩이를 맨발로 밟고 지나가는 기분은 모두 다르다. 발바닥에 다양한 질감을 느끼며 새소리를 듣고 숲의 향기를 맡으며 걸으니,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기분이다. 빗물에 젖은 왕 거미줄에 붙어있는 거미를 보는 것조차도 신비롭다. 비에 젖은 상록수 색깔이 더욱 푸른 빛을 띤다.
밤새 내린 비 탓인지 벚나무의 꽃잎은 모두 땅에 떨어졌다. 비에 젖은 새로 나온 잎의 푸른빛에 눈이 시원하다. 나뭇잎의 색깔은 더욱 짙어지고 열매를 맺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버찌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다.
사계절 내내 산을 오르면서 춘하추동의 계절 변화를 몸소 느낀다. 어찌 보면 자연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며 변화한다는 점에서 인간 생의 주기와 많이도 닮았다. 운동화를 신고 걸었을 땐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맨발 산행을 경험하고 나서야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고, 겸손을 배운다.
*** 독산성 - 문화재청 국가문화 유산 포털 정보에 의하면, 독산성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독성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사적 제140호로 지정된 곳이다.독산성은 한강권역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독상선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한 장소이기도 하다.
보적사- 오산 문화원에 의하면, 보적사(寶寂寺)는 백제 아신왕 10년에 창건했으며, 전통 사찰 제34호에 속한다. 독산성에 소재하는 전쟁터의 사기 앙양과 원혼을 달래주는 호국사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독산성 동문 안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