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법요해 상권 4. 4무량심 자심/ 비심/ 희심/ 사심/ 수행자가 이 제4선을 얻어 4무량심(無量心)을 행하고자 하면 생각하는 대로 쉽게 얻을 수 있고, 4념처(念處)를 닦고자 하면 쉽게 닦을 수 있으며, 4제(諦)를 얻고자 하면 어렵지 않게 빨리 얻을 수 있고, 4무색정(無色定)에 들어가고자 하면 쉽게 들어갈 수 있으며, 6신통[通]을 얻고자 하면 그것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제4선 가운데서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생각을 버려 청정하고, 순조롭고 부드럽게 마음을 따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비유하여 말씀하시길, “금을 다루는 기술자는 금을 녹여 법에 맞게 잘 제련하여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되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자심] 【문】수행자는 어떻게 자심(慈心)이 한량없음을 얻을 수 있는가? 【답】수행자는 4선을 의지하고 나서 생각하되, 한 성(城)의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도록 소원하며, 이와 같이 하나의 국토, 하나의 염부제(閻浮提)ㆍ 사천하(四天下)ㆍ 소천국토(小千國土)ㆍ 이천국토(二千國土)ㆍ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 및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두루 덮어 모두 즐거움을 얻기를 원한다. 비유컨대 수겁(水劫)이 이를 때는 물을 사라지게 한 불구슬[火珠]이 소멸되어 다시 나타나지 않으며, 대해(大海) 용왕의 마음이 크게 움직여서 그 생각으로부터 물이 생겨 바다로 흘러나와 가득 차 넘치고,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 두루 천하를 가득 채우면, 이때 천지가 가득 차 넘쳐, 차서 넘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또한 그러해서 대자(大慈)의 물로 성냄을 멸하고 자심(慈心)을 사라지게 한 불구슬을 소멸시키며, 자심의 물이 넘쳐흘러서 점점 광대해져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에게 두루 이르러 모두가 그 윤택한 은혜를 입되 항상 그 자심의 물이 흘러나와 끊이지 않으니, 혹 설법하는 것을 들으면 자심이 더 늘어난다. 비유컨대 큰비가 두루 널리 미치지 않음이 없듯이, 수행자는 자심으로 중생들을 생각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청정한 즐거움을 얻게 하며, 또한 얻은 선정의 쾌락을 중생들에게 제공하고, 또한 열반으로 괴로움이 다한 즐거움과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제일가는 진실한 즐거움을 중생들에게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심의 힘이 있기 때문에 시방의 육도중생(六道衆生)이 즐거움을 받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안다. 【문】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하기를, “자삼매(慈三昧)가 무엇인가 하면, 일체 중생을 관하여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모두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경에서 설하기를, “자심삼매(慈心三昧)란 두루 시방에 가득한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단지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를 원한다고만 말하는가? 【답】자심을 처음 닦아 익힐 때는 즐거움을 얻도록 원하는 정도이지만, 자심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향수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된다. 비유하면 나무를 비벼 불이 나올 때 처음에는 가늘고 부드러운 건초를 태우지만, 불기운이 점차 커지면 젖은 나무와 산림을 일시에 함께 태우는 것처럼, 자심도 이와 같아서, 처음 들어가 관할 때는 괴로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향수하도록 바라지만, 자심의 힘이 점차 성숙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 【문】중생은 진실로 얻을 것이 없으니,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뒤바뀐 생각이 아니겠는가? 【답】선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법을 관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진주(眞珠)를 다루는 기술자는, 첫째로 진주의 모양이 귀한지 흔한지 그리고 좋은지 나쁜지를 잘 알며, 둘째로 잘 가공하여 이용하는데, 어떤 이는 그 모양은 잘 알지만 가공해 이용할 줄 모르고, 혹 어떤 이는 가공해 이용할 줄은 알지만 그 모양을 잘 모르며, 혹 어떤 이는 모양도 잘 알고 가공해 이용할 줄도 잘 아는 것처럼,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현성(賢聖)으로서 욕심을 떠나지 못한 이는 법상(法相)과 4진제(眞諦) 등을 관할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이용하지는 못하니, 4무량(無量)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범부가 욕심을 떠나 여러 공덕을 행한다면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으니, 4무량심(無量心)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두 갖추어 해탈한 아라한 등은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도 있고, 선정을 갖추었기 때문에 4무량심을 생각할 수도 있다. 4무량이란 해탈을 얻는 법이니,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뒤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불법에는 진실로 어떤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괴로움은 진실하고 즐거움은 뒤바뀐 것이라고 관하는가? 이른바 뒤바뀌었다는 것은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아상(我相)에 집착하여 항상하거나 무상(無常)하다거나 끝[邊]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이것이 바로 뒤바뀐 것이다. 자심(慈心)을 행하는 사람은 중생이 가명임을 아니, 마치 바퀴 등이 합해져서 그것을 수레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수행자는 자심이 청정하면 뒤바뀌지 않는다. 또한 만약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실재한다고 여기면, 중생이 즐거움을 향수한다는 이것도 마땅히 뒤바뀐 것이다. 중생이 존재한다거나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치우친 견해[邊見]이니, 단지 중생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만이 뒤바뀜인 것은 아니다. [不應但有衆生以爲顚倒.] 또한 자심삼매의 힘 때문에 수행자는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지 않음이 없음을 모두 아니, 마치 일체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살펴보는 것과 같다. 선정의 힘 때문에 반연하는 경계에서 청색을 변화시켜 적색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하물며 중생들에게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樂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예컨대 귀하거나 천하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한 사람이거나 날거나 기어다니는 짐승에 속한 것들이거나 각자 즐거움이 있고 서로 불쌍히 여기니, 귀한 사람에게 있는 근심은 가난한 이에게는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있는 근심은 귀한 이에게는 없다. 【문】다른 세계[道]는 그럴 수 있어도 지옥은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답】지옥의 중생에게도 또한 즐거운 면[樂分]이 존재한다. 멀리서 칼산이나 재[灰]가 흐르는 강을 보고는 나무나 물이라고 여겨 즐거운 생각을 내며, 나무 위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 또한 즐거운 생각을 낸다. 또 자기의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니, 만약 옥졸이 죽이려 할 때는 도망치며 슬피 울면서 놓아 달라고 간청하다가, 만약 그대를 사면해 주겠노라고 말하면 이런 고통을 벗어날 수 있어서 마음이 또한 즐거워진다.이와 같은 것 등이 모두 즐거운 면이다. 또한 신통력이 있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을 행해서 갖가지로 교화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 혹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맞게 제공해 주며, 몸과 입으로 자비행을 베풀어 그들이 이롭게 돕는다. 마치 모든 불보살이 깊은 마음으로 중생들을 애념(愛念)하여 모든 악취(惡趣)를 무너뜨려 진실로 중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렇기 때문에 단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진실로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한다. 【문】자심(慈心)을 행하는 이는 어떤 공덕을 얻는가? 【답】자심을 행하는 이에게는 온갖 악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마치 굳건히 지키고 잘 방비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자심을 행하는 이를 괴롭히거나 해치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환난을 당하게 되니, 마치 어떤 사람이 손바닥으로 창을 막으면 손바닥만 손상될 뿐 창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섯 가지 삿된 말도 그 자심을 파괴할 수 없으니, 그 다섯 가지란, 첫째는 거짓말[妄言]을 하는 과실이고, 둘째는 나쁜 말[惡口]을 하는 과실이며, 셋째는 때에 적절하지 않는 말을 하는 과실이고, 넷째는 악한 마음으로 말하는 과실이며. 다섯째는 이익되지 않는 말을 하는 과실이다. 비유하면 대지(大地)를 파괴할 수 없는 것처럼, 갖가지 성냄과 괴롭힘과 비방함 등으로도 자심을 행하는 이를 훼손할 수 없다. 비유하면 허공이 해를 입지 않듯이, 자심은 온화하고 부드럽기가 마치 하늘의 옷[天衣]과 같다. 또한 수행자가 자심에 들면 호랑이나 이리 등 악독한 짐승이나 뱀이나 도롱뇽류에 속하는 것들이 해치지 못하며, 감옥이나 성 안에 들어가도 상해를 입지 않는다. 자심을 행하는 이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다. 【문】자심의 덕이 이와 같다면, 무엇을 자심의 법[慈法]이라고 하는가? 【답】중생들을 애념하여 그들이 즐거움을 향수하는지를 모두 아는 이 마음이상응하는 법은 행음(行陰)에 속하므로 자심의 법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색계에 매여 있기도 하고, 매여 있지 않기도 하며, 심수법(心數法)과 심법(心法)이 함께 생긴다. 심법을 따라 행하면 색법이 아니며 업이 아니다.업이 상응하면 업이 함께 생겨서 업행(業行)을 따르니, 과보로 생긴 것이 아니다.이것은 마땅히 닦아야 하니 닦을 수 있으며 닦아 행할 수 있고, 마땅히 증득해야 하니 몸으로 증득하고 지혜[慧]로 증득한다. 사유가 끊어지기도 하고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각(覺)과 관(觀)이 존재하기도 하고 각은 존재하지 않고 관만 존재하기도 하며, 각이나 관이 모두 존재하지 않기도 하며, 기쁨[喜]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현성이기도 하고 범부이기도 하며, 낙수(樂受)와 상응하기도 하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와 상응하기도 하니, 도품(道品)이 아니다. 먼저 모습[相]을 반연한 후에 법을 반연하니, 4선(禪)에서는 또한 그 밖의 다른 경지가 있으며 한량없는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무량’이라고 이름한다. 청정하기 때문이고, 자애로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범행범승(梵行梵乘)이라고 이름한다. 능히 청정한 세간[梵世]에 이를 수 있으므로 청정한 도[梵道]라고 이름하니, 이는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행하신 도이다. 【문】어떻게 자심(慈心)을 닦을 수 있는가? 【답】수행자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수염과 머리를 깎은 것은 호화롭게 꾸미고 사는 데 뜻을 두지 않고 교만한 모습을 없애기 위함이니, 이에 걸맞으려면 마땅히 자심(慈心)을 행해야 한다. 지금 물들인 법복을 입고 있으니 마땅히 자심을 행하여 마음이 물들지 않게 하며,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었으니 보시를 받은 공덕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설하기를, <만약 어떤 비구가 점차적으로 자심을 닦으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신심 있는 보시[信施]를 먹음이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또한 만약 출가하였거나 집에서 수행하는 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자심의 힘 때문에 악한 세간에서도 안온하고 근심이 없으며, 법을 파괴하는 무리 가운데서도 오직 법을 따라 행하여 번뇌의 열기로부터 마음이 청량할 수 있도록 하니, 마치 마을 가까이에 청량한 연못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자심을 행하는 힘 때문에 원수가 독으로 해치려 해도 해칠 수 없으니, 마치 가죽신을 신고 가시를 밟으면 다치지 않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욕계에 처해 있어도 그곳의 많은 성냄과 분노의 해침이나 다툼과 원망의 독(毒) 등 갖가지 모든 해로움이 자심(慈心)의 힘 때문에 그를 손상시켜 무너뜨릴 수 없으니, 비유컨대 역사(力士)가 금강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비록 큰 진영[陣]에 들어오더라도 그를 다치게 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자심은 이익되게 할 수 있으니, 세 종류의 사람을 이익되게 한다. 범부로서 자심을 행하면 온갖 성냄을 없애고 한량없는 복을 얻어 깨끗한 세계에 태어날 수 있으니, 세간의 복덕으로서 이를 넘어서는 것은 없다.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이는 욕계의 많은 성냄을 자심의 힘으로 파괴할 수 있으며, 그 밖의 번뇌도 또한 그것을 따라 멸하니, 따라서 욕계를 떠날 수 있고점차로 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심이 모두 갖추어지면 7각(覺)을 닦는데 가까워지며 대승의 마음을 발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도 자심이 그 근본이 된다”고 하신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자심은 세 종류의 사람에게 한량없는 이익이 된다. 또한 자심을 익히는 초문(初門)에는 열여섯 가지 행(行)이 있어 신속하게 자심을 얻게 하고 또한 견고하게 하며, 또한 항상 수행하게 한다. 첫 번째는 계(戒)를 청정하게 간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선법(善法) 가운데서 기쁨을 내는 것이고, 네 번째는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운 것이다. 다섯 번째는 5정(情)을 거두어 수호하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지혜[慧]를 생각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몸이 떠나고 마음이 떠나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함께 행하고 함께 머무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듣든 말하든 자법(慈法)을 따르는 것이고, 열 번째는 다른 사람을 괴롭고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음식을 먹을 때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것이고, 열두 번째는 잠을 적게 자는 것이다. 열세 번째는 말을 줄이는 것이고, 열네 번째는 몸의 네 가지 위의가 안온하여 마음에 맞는 것이다. 열다섯 번째는 필요한 사물이 뜻에 따라 부족함이 없는 것이고, 열여섯 번째는 모든 법행(法行)을 희롱하지 않는 것이니, 이 열여섯 가지 법은 자심삼매(慈心三昧)를 돕는다. [비심] 비심(悲心)이란 중생의 괴로움을 관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옥ㆍ아귀ㆍ축생ㆍ세간의 죄수[刑徒]ㆍ기아ㆍ추위ㆍ질병의 괴로움 등에 대해 괴로움의 모습[相]을 취하기 때문에 비심이 더욱 증가하며, 나아가 즐거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모두 그 괴로움을 본다. 【문】어떻게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여기는가? 【답】즐거움은 무상(無常)하고 즐거움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며, 인연을 쫓아 생기는 것으로 생각생각에 생겨났다 소멸한다. 머물 때가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괴롭다. 또한 욕계의 하늘에서는 즐거움을 향수하더라도 마치 미치고 취한 것처럼 따로 아는 것이 없어서 죽을 때가 되서야 깨달으며, 색계와 무색계의 중생은 깊은 선정에 대해 맛을 들이지만 마음속으로 집착하여 목숨이 다하면 지은 업의 인연에 따라 다시 과보를 받으니, 이와 같은 중생들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겠는가? 지옥 등의 3악도(惡道)는 옛날에 머물던 처소이고, 천상과 인간 세계는 마치 손님이 머무는 것과 같이 잠깐 동안 머물러 쉬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단지 고제(苦諦)를 설하셨을 뿐 낙제(樂諦)는 설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에게는 괴로움 아닌 것이 없는데, 중생들은 가엾게도 진실로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뒤바뀐 가운데 즐거운 생각을 내어 금세나 후세에 갖가지 근심과 번민을 받으면서도 싫증내는 마음이 없다. 비록 잠시 괴로움을 벗어났다가도 괴로움이 다시 반복되니, 즐거움을 구하는 것은 온갖 괴로운 일을 짓는 것이다.이와 같이 사유하여 중생들이 모두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비심(悲心)이다. 그 밖의 비심의 의미는 『마하연론(摩訶衍論)』의 4무량 가운데서 설한 것과 같다. [희심] 희심(喜心)은 수행하는 사람이 모든 법의 실상을 알아 괴로운 중생들을 모두 즐거운 모습으로 관하고, 즐거운 중생들을 모두 괴로운 모습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법은 정해진 모습이 없이 마음의 힘에 따라 바뀌니, 만약 모든 법이 정해진 모습이 없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일도 오히려 어렵지 않은데, 하물며 그 밖의 도(道)이겠는가? 뜻에 따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歡喜]이 생긴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조그만 지계와 정진 등을 바탕으로 하여 문득 욕심을 여의었으며, 모든 선정의 한량없는 공덕에 이르렀다.’ 모든 선한 공덕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환희가 생기니, 비유컨대 장사꾼이 소량의 물품을 간직하고 있다가 백천 배의 이익을 얻으면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다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법의 이로움은 모두 부처님의 은혜를 말미암는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도를 얻으시어 사람들에게 베풀어 설해 주셨으니,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면 이와 같은 이익을 얻는다.’ 이때 마음으로 시방 모든 부처님의 몸은 금색이고 상호(相好)가 장엄되어 있으며, 10력(力) 등 한량없는 공덕의 법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이렇게 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불법(佛法)은 96종류의 도(道) 가운데 가장 으뜸이며, 모든 괴로움을 멸할 수 있고, 항상하는 즐거움[常樂]으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세 가지로 불법(佛法)을 분별하면, 첫째는 열반의 한량없고 항상한 모습이니 이것은 끝내 파괴되지 않는 법이며, 둘째는 열반의 방편과 여덟 가지 곧고 성스러운 도(道)이며, 셋째는 12부경(部經)으로 여덟 가지 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이와 같은 실상을 잘 알면 정도(正道)를 행하고 온갖 잘못된 길을 떠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다. 이른바 불제자의 무리는 일체의 무리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미 이 무리들 가운데 있으니, 이들은 나의 진실한 도반이며 그들은 나를 이익되게 한다”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마음속에 환희가 생기며, 중생들이 모두 환희하기를 원하며, 선정의 힘이 계속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생들이 모두 이 기쁨을 얻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다. [사심] 사심(捨心)이란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약간 느슨해지거나 치우쳤다면 마음을 잠시 그쳐 쉬는 것이니, 다만 중생을 한가지 모습[一相]으로 관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관하지 않는다. 기뻐하는 모습[喜相]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서, 만약 항상 사랑하고 아끼면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그르치게 되고, 만약 항상 괴로움이 절박하면 두렵고 무서워 몸이 쇠약해지니, 그러므로 어떤 때는 놓아 버리고 애착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만약 항상 자심(慈心)과 희심(喜心)을 행하면 방일하게 되니, 이는 기쁨과 즐거움이 많기 때문이며, 만약 항상 비심(悲心)을 행하면 걱정이 생기니, 괴로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심(捨心)을 행하여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지나치지 않게 해야 한다. 또한 수행자가 도(道)에 들어가 선정의 맛을 얻으면 중생들을 분별하여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선량하다느니 선량하지 못하다느니 하게 되어, 선량한 사람에 대해서는 공경하고 사랑하며 아끼고, 선량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겨 교만하게 군다. 마치 사람이 아주 진귀한 보배를 얻으면 가난한 사람을 가벼이 여겨 교만하게 굴고, 보배를 간직한 사람을 보면 공경하고 애념하는 것과 같으니, 이 두 가지 모습을 깨뜨리기 위하여 사심(捨心)을 행한다. 경에서 설하기를, “자심을 닦아 행하면 성냄을 파괴하여 없앨 수 있고, 비심을 닦아 행하면 중생의 번뇌를 없앨 수 있으며, 희심(喜心)을 닦아 행하면 근심걱정을 없앨 수 있고, 사심(捨心)을 닦아 행하면 증오와 애착을 없앨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다만 중생들을 관하여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마음을 따라 짓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숲을 관하고 나무를 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만약 세상 사람들이 추울 때는 따뜻함을 얻고더울 때는 시원함을 얻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것을 즐거움[樂]이라 하고, 벼슬자리를 얻었거나 보배가 감추어진 곳을 찾으면 노래 부르고 춤추며 희롱하고 웃고 노는 것을 기쁨[喜]이라 한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잃어버렸다면 이를 근심과 괴로움[憂苦]이라 하고, 만약 이상의 세 가지가 없다면 이를 버림[捨]이라고 한다. 수행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네 가지 마음[四心]을 갖추면 자신의 몸으로 즐거움을 향수하고 중생들도 그러하기를 원하며,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모든 중생들이 모두 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안다. 또한 여러 천상 세간의 부귀함을 보고 즐거운 모습을 취하여 중생들에게까지 미치기를 원하며,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일체 중생이 다 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안다. 자심을 닦아 행할 때는 마음에 큰 기쁨[喜]이 생기며, 이 큰 기쁨을 중생들에게도 주고자 한다. 혹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불(佛)ㆍ법(法)ㆍ성중(聖衆)에게 예를 올리고 찬탄 공양하여 또한 마음에 기쁨을 얻어서 중생들에게도 주고자 하며, 그리고 외부의 기쁨을 취하여 중생들에게 주기를 원한다. 어떤 때는 스스로 괴로움과 늙음ㆍ병듦ㆍ걱정ㆍ번민ㆍ배고픔ㆍ추위ㆍ 곤경의 고통을 보아서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고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신이 분별하여 헤아려 보건대, 마음속으로 인내함이 고뇌스런 일인데, 어찌 하물며 중생들이 지혜도 없이 갖가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으며,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비심을 낸다. 또한 외부의 사람들이 형벌을 당하거나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또는 경전에서 설하는 악도의 고통을 들으면, 이런 괴로움의 모습을 취해 일체가 모두 괴로움을 관하여 비심을 낸다. 사심(捨心)이란 자기 스스로 증오하거나 애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증오나 애착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며, 외부의 중생들을 취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4선(禪)으로부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욕계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때에 미쳐서도 이런 모습을 취한 다음 일체 중생들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음을 관한다. 또한 만약 귀인에게 오직 아들이 하나만 있다면 그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매우 중하여서 항상 자애롭게 보살피고 세간의 온갖 즐거움을 모두 얻게 하며,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아들에게 줄 것이다. 그 아들이 혹시 여러 가지 근심걱정을 만나면 아버지는 매우 가엾다는 생각[悲念]을 내며, 만약 아들이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면 그 아버지는 크게 기뻐할 것이니,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 다음에는 곧바로 놓아 버리고 아들에게 맡겨 스스로 성장하도록 하고 아버지는 휴식을 취한다.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4무량심 가운데서 중생들을 보기를 마치 자식처럼 생각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즐거운 일을 따라 세간의 갖가지 즐거움을 취하여 중생들이 그것을 얻기를 원하며,자심(慈心)과 선정의 힘 때문에 일체 모든 것이 즐거움이라는 것을 안다. 수행하는 사람은 자심으로부터 일어나, 만약 중생이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 비심을 낸다. 비심의 힘 때문에 중생들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 다음에는 중생들이 이런 고통을 벗어나기를 원한다. 비삼매(悲三昧)로부터 일어나, 만약 중생이 즐거움을 향수하고 도를 얻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알면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 희심(喜心)을 낸다. 중생들이 얻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것을 얻어 심식(心識)이 유연해져 중생들이 모두 환희를 얻는 것을 안다 이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며,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는 사심(捨心)을 내어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기뻐하지도 않기를 원한다. 사삼매[捨定]를 잘 닦은 힘 때문에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며, 번뇌의 열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다 안다. 또한 만약 중생들에게 여러 허물이 있어도 놓아두고 책문(責問)하지 않으며, 만약 그를 공경하고 애착하여도 기쁨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사심(捨心)이다. 이와 같은 등의 4무량의 뜻은 마하연(摩訶衍:大乘) 가운데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